11. 묘지의 밤
콘세티나 프라타 대령의 집무실은 중앙탑의 8층에 있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프라타 대령은 나이에 비해 백발이 많았지만 부관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오르기에는 아직 일렀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8층의 집무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남쪽 탑의 지하 소각장은 늦은 밤부터 불을 때고 있어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태우고 있는 것은 두 구의 시체였다. 두 구 중 한 구는 소녀의 시체였는데 소녀의 유류품은 가족들에게 돌아갔고 소각장에는 시체만이 타고 있었다. 남은 한 구도 입고 있던 옷과 소지품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시체만이 타고 있었는데 그 시체가 대역 시체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군인들은 피에트로의 시체를 싣고 부대로 돌아온 로미오를 두고 그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쪽과 동생의 죽음을 겪은 그에게 더 이상의 조사는 무리라는 쪽으로 나뉘어 뒷말을 주고받았다. 몬테 중령은 취조가 끝나지 않은 혐의자를 사고로 사망케 했기 때문에 면책을 받을 예정이었으며 피에트로의 추락 장면을 목격한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련의 비극 같은 일이 부대를 휩쓸고 지나간 자정 무렵, 로미오와 몬테 중령은 프라타 대령의 집무실에 있었다. 축제의 첫날밤이 저물어 광장은 고요했고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로 가득하던 중앙탑에도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
낮 동안 고위 장교들의 소집 명령으로 자리를 비웠던 프라타 대령은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을 보고받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로미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프라타 대령은 로미오의 동생이 바로 저 문밖을 나가자마자 보이는 계단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군인들이 바닥을 닦았지만 핏자국은 가시지 않고 아직 남아 있었다.
로미오의 옆에 선 몬테 중령 역시 로미오만큼이나 무거운 표정이었다.
“금일 벌어진 일에 대해 유감을 표하네, 알피에리 대위.”
프라타 대령은 부대 내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에 로미오가 계속 군에 남아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장교로 복무하고자 한다면 이번 사건과 관련된 조사를 계속 받아야 할뿐더러 로미오는 남은 평생을 동생인 피에트로가 연루자로 체포돼 죽었다는 사실을 꼬리말처럼 달고 다녀야 할 것이다. 단테의 12인을 색출하는 임무를 맡은 그가 이런 일을 겪고 전처럼 무사히 복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프라타 대령은 그에게 퇴역을 권하려 하고 있었다.
이미 군인들 사이에서도 연루자로 체포되면 자신들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의심 비슷한 두려움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군이 절대로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 군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단테의 12인에 대한 심판 자격을 의심하며 섬뜩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프라타 대령은 로미오가 군을 나감으로써 이날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일단락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비록 중앙탑의 계단 바닥에 남은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겠지만 그가 군을 떠난다면 부대 내에서 이 일과 관련된 소문을 빠르게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불과 두 시간 전에 동생의 죽음을 겪은 로미오에게는 너무 가혹했으나 지금 프라타 대령이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군에서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로미오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오랜 시간 몸담아 온 이곳을 떠나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내린 결정입니다. 그러나 저는 결단코 이번 사건과 무관합니다. 제게 죄가 없음을 부디 알아주십시오. 저는 피에트로가 단테의 12인의 사상에 감화된 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가 이곳에 인치되어 온 것을 보고도 착오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공화국의 수호자들의 틈에 섞인 불순분자가 아니며 제 퇴역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와전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명예롭게 퇴역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자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네. 부대 내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누구라도 견디기 힘들 걸세. 자네의 퇴역은 응당 대우받아야 마땅하니 염려 말게.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그 뜻을 받아들이겠네.”
프라타 대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대답하자마자 장교 하나가 급하게 문을 열더니 긴장이 묻어나오는 몸짓으로 경례를 했다.
“무슨 일인가?”
장교는 침을 꿀꺽 한 번 삼키더니 손을 내리며 대답했다.
“통령 각하의 마차가 지금 부대 앞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 * *
긴 복도에 장교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등잔 불빛이 어른거리는 계단 복도에는 장교들의 그림자가 음산하게 일렁였다.
부대 내에 유일한 응접실은 손님을 맞기에 지나치게 간소했지만 통령이 불시에 찾아왔을 때 그녀를 영접하기 위해 가장 알맞은 장소였다. 기름이 넉넉한 등잔을 가운데에 두고 널찍한 의자에 앉아 있는 카를로타는 주름 잡힌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턱 아래를 전부 감싸는 목 가리개와 장갑 때문에 전신이 어둠에 휘감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위용을 드러내는 보석 목걸이나 머리 장식은 없었지만 근엄하고 고요한 눈빛에서 위압감이 엿보였다. 방 안에는 통령의 호위병 수십 명이 벽 장식처럼 서 있었다.
제6군단의 지휘관이자 군단장인 포치 소장은 늦은 밤 갑자기 부대를 찾아온 통령을 알현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오늘 낮 부대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받은 그는 뒤처리를 프라타 대령에게 맡기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다 통령의 불시 방문에 깜짝 놀라 급히 옷을 갖춰 입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통령 각하.”
통령의 등 뒤에는 통령의 보좌관 5인 중 한 명이 서 있었다. 카를로타는 의자에 앉아 소장을 올려다보았는데 좀처럼 표정이 변하지 않는 것은 그녀의 특징이었다.
“금일 벽보를 붙인 혐의로 소년 하나가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본래 연루자들의 체포에 관한 것은 문서로 작성해 통령에게 보고하게 돼 있었는데 피에트로에 관한 일은 아직 보고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문서는 반드시 포치 소장의 허가를 거쳐 통령의 관저로 보낼 수 있었는데 소장은 통령이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 알고 있자 그녀가 소문을 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 소년은 현재 풀려났습니다. 벽보를 붙일 것을 지시한 배후가 있어 그자를 체포해 조사했습니다. 배후로 밝혀진 것은 로마니엘로 대학교에 다니는 법학과 학생으로 1연대의 대위가 그자의…….”
“민중의 입은 그 누구보다 빠르오. 알고 있소.”
“예, 통령 각하…….”
소장은 말끝을 흐렸다. 장교의 친족이 연루자로 체포된 것도 모자라 취조도 채 끝내지 못하고 그가 죽었으니 이는 소장의 실책이었다. 통령에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면서 말끝을 흐리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1연대의 대위라는 그자가 맹인이라 들었소. 사실이오?”
“예, 그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벽보를 붙인 소년을 몰베나 거리에서 체포한 것도 그입니다.”
카를로타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대더니 양손 끝을 맞대 첨탑 모양을 만들어 무릎에 얹었다. 로미오에 관해 몇 가지를 물은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소장이 고개를 조아리는 가운데 입을 뗐다.
“그자와 이곳에서 긴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만.”
“……알피에리 대위와 말입니까?”
“그렇소.”
오늘 벌어진 일은 이례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카를로타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라 이해한 포치 소장은 그녀가 로미오를 보고자 하는 것에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재빨리 대답했다.
“예, 통령 각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소장이 방을 나간 뒤 곧 발소리가 들렸다. 정중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응하자 문이 열렸다. 카를로타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젊은 장교를 주시했다.
그는 조용한 걸음을 내디뎌 가까이 다가온 후 손을 올려 경례했다.
“통령 각하를 뵙습니다.”
문 가까이에 선 장교는 바른 자세로 경례를 했으나 시선이 이상했다. 카를로타는 금빛 눈을 가늘게 뜨며 장교의 시선이 자신의 목 언저리에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로미오 알피에리 대위입니다. 통령 각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통령이라 하여 아름다운 것에 대한 조예가 없지는 않았다. 카를로타의 눈이 일순 뱀의 눈처럼 기이한 금빛으로 빛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방 안의 어스름한 램프 빛이 눈앞에 선 젊은 장교의 발치로 몰려들어 그를 비추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컴컴한 방 안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푸른 두 눈은 서늘한 빛을 띠었다.
아름답지만 가족을 잃은 자의 눈이었다. 카를로타는 알아볼 수 있었다.
“통령 각하께서 얼굴을 보실 수 있도록 가까이 오십시오.”
등 뒤에 서 있던 주세페가 말하자 로미오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걸음이 절도 있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기에 본능적으로 느끼는 머뭇거림이 발소리에 묻어 나왔다.
지팡이 하나 짚지 않았지만 로미오는 마치 볼 수 있는 것처럼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섰다.
“금일 일어난 일에 관해 알고 있네. 공화국이 건국된 이래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기에 이 늦은 밤에 이곳으로 찾아오게 됐네. 맹인이라 들었는데 내 얼굴이 보이는가.”
“외람되오나 보이지 않습니다.”
로미오는 카를로타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하여 턱을 낮췄다. 카를로타와 눈이 마주쳤지만 로미오는 자신이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저는 물체의 형상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마주 앉은 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며 머리카락의 색과 옷의 색깔만을 어렴풋이 구분할 줄 압니다.”
카를로타는 조반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소장에게 들은 바로 로미오는 유능한 장교였다. 맹인 군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나 그는 지극히 군인다운 인물처럼 보였다. 다만, 군에게 동생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가 전과 같은 충성심을 갖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자신의 동생을 체포해 취조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은 모두 군 내부에 있었다. 그들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속단하기 어려웠다.
“귀관의 동생이 연루자로 체포되었는데 어떠한가. 만약 귀관이 그가 가진 혐의와 무관하며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입증한다면 군에 남는 것이 가능하네.”
통령의 재가만 있다면 퇴역 위기에 처한 장교가 군에 계속 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소위로 강등시키거나 부대를 옮기는 것도 가능했다. 카를로타는 어느 쪽이든 로미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미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퇴역을 원합니다. 더 이상 제6군단에 남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귀관은 눈이 멀었으나 금일 몰베나 거리에서 벽보를 붙인 소년을 붙잡지 않았는가? 죽은 귀관의 동생과 연루돼 있다면 소년을 체포하지 않았을 것이네. 귀관의 결백은 이미 한 차례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는 데다 이 나라는 제6군단의 전력에 손실을 줄 만한 우수한 장교가 퇴역하는 것을 바라지 않네.”
“저는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으며 간단한 업무조차 볼 수 없습니다. 6년여 전 소위로 임관됐을 무렵부터 언젠가 군을 스스로 나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레 퇴역하게 되기를 원한 적은 없으나 언제든 때가 오면 명예롭게 퇴역하고자 바라왔습니다. 공화국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겠으나 저는 평생토록 루바노의 번영을 꿈꿀 것입니다. 통령 각하의 아량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석회로 만든 회반죽을 얇게 바른 가면 같은 얼굴이었다. 말에 맺음은 있으나 울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과 달리 로미오의 목소리는 칼날 끝조차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차가웠다. 혀가 시릴 것 같은 싸늘함이 말끝에 배어 있었다.
카를로타는 윗몸을 앞으로 기울여 로미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봤다. 과연 그가 원망하는 것이 군 하나뿐일까.
만약 동생을 앗아 간 것이 단테의 12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귀관의 동생의 죽음은 안타깝게 생각하네.”
로미오는 이 자리에 서서 공화국의 수호자 노릇을 자처하는 것이 가당하지 않음은 물론 통령을 뵐 낯 또한 없었기에 짧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찌 됐든 피에트로가 벽보를 사주한 것은 명백한 진실이었다.
“귀관의 동생이 법을 공부했다고 들었네. 사실인가?”
“……예, 그렇습니다.”
“젊은 시절 나 역시 법을 공부하며 내 나름의 신념을 갖고 있었네. 젊은이들이 가진 신념은 나라 하나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법이지. 이 나라는 공화정을 부정하는 사상을 허락하지 않으나 나는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이 인간사에 대한 추동력으로 신념을 가지는 것에 우호적이네. 귀관의 동생은 목숨을 잃었지만 그가 신념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비록 그 신념이 그른 사상에서 배태되었으나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이 나라가 아니라 ‘그들’이네. 죄 없는 젊은이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역병처럼 퍼뜨리는 그들이 귀관의 동생을 희생자로 삼은 것이네.”
그리 강력하지 않은 작은 패라 할지라도 단테의 12인을 절멸시키고자 하는 자가 한 명이라도 더 생긴다면 카를로타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로미오는 군에서 퇴역당했다는 굴욕감과 동생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보상받고자 단테의 12인에 대한 복수심을 다진다면 안 될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군인이 아닌 민중이었고 단테의 12인이 민중의 틈에 쥐새끼처럼 숨어들어 있는 이상 모든 민중은 감시의 대상이자 감시자였다.
카를로타는 로미오와 같은 자들이 올빼미의 굴 입구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에 제격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현명한 감시자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귀관의 동생이 안식을 찾길 바라네. 귀관도 이제 그만 한 명의 공화국 시민으로 돌아가 편히 쉬게.”
* * *
“막냇동생이 홀로 집에 남아 있습니다. 그 아이도 이곳에서 조사를 받아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 알고 있을 겁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퇴역식은 내일 거행하도록 하지.”
프라타 대령에게 경례를 해 보인 로미오는 집무실을 나섰다. 통령이 돌아가고 난 후 곧장 대령의 집무실로 찾아와 허가를 받은 그는 별도의 채비 없이 맨몸으로 부대를 나섰다.
중앙탑의 1층에는 발레리아와 마르코, 갈리에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로미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마르코는 눈가가 붉었다. 발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로미오가 두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두 사람도 피에트로를 잘 알았다. 병원에서 시신을 싣고 돌아온 직후 피에트로의 시신 소각 반대에 가장 큰 목소리를 낸 것도 두 사람이었다. 마르코는 너무 강하게 반론한 나머지 구금될 뻔하기도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마르코는 끝내 소리를 내 흐느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로미오는 발레리아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것을 느끼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지만 하염없이 그 온기를 느끼고 있을 수 없었다.
마음속에 끔찍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피에트로가 죽었다는 사실로부터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집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두 분 다 제 염려는 하지 마시고 그만 쉬십시오.”
“……그래. 조심히 다녀와.”
발레리아의 손을 놓고 돌아서자 갈리에누스가 지팡이를 건넸다.
“……여기 지팡이입니다.”
“고맙네, 중위.”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혼자 갈 수 있으니 여기 남아 있게. 자네도 그만 쉬어.”
1층 바닥에는 옅게 핏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로미오는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고 중앙탑을 나섰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부대 밖으로 나가 로사티 거리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지만 1번가에 도착해서도 하숙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대로 지나쳐 계속 걷던 로미오가 도착한 곳은 바치 병원이었다. 늦은 시각이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곧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이 칠 시간이었다. 제 발로 이곳까지 걸어왔으나 상념에 빠져 자신이 지나온 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로미오는 길 한 가운데에 멈춰 섰다.
병원 앞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리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먼 거리에서 들려온 것은 조반니의 목소리였다.
“…….”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고 서자 밤거리가 황량하게 느껴졌다. 오가는 이도 없었고 병원을 드나드는 자도 없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조반니의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사람이 앞에 서 있으면 으레 그렇듯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는데 조반니가 다가오니 벽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공간이 가로막힌 느낌이 들었다. 흐릿하게 보였으나 조반니가 붉은 옷을 입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꽤 오래 기다렸습니다. 오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엔초는 집에 있습니다. 그라나 부인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요. 완전히 잠든 걸 보고 나왔습니다.”
“……부대에서 조사를 받으며 엔초가 겁을 먹지는 않았습니까?”
“제가 옆에서 함께 조사를 받았습니다. 긴장을 많이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집으로 돌아간 이후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로미오가 고개를 들어 병원을 올려다보자 조반니가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시지요.”
로미오가 안으로 들어가자 조반니가 따라 들어왔다. 복도를 지나가던 누군가와 인사를 나눈 그는 지하의 안치실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로미오를 안내했다. 로미오가 난간을 잡으며 내려가자 앞서 내려가며 그를 지켜봤다.
계단 끝에 도착한 로미오는 지팡이로 복도를 쓸며 걸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겹쳐지는 걸음 소리만이 홀연히 지하 복도를 울렸다.
안치실 문을 두드리자 시체를 바꿔치기해 주었던 그 의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방 안에서 나는 기이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조반니도 로미오도 그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셨군요.”
의사는 문을 활짝 열어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내더니 문을 걸어 잠갔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끝납니다.”
의사는 시체를 닦던 참이었는데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의 시체였다. 아이의 시체를 깨끗한 헝겊으로 닦은 의사는 그 위에 천을 덮었다. 그리고 침대째 옮겨 구석으로 밀어 놓고 손을 닦으며 얘기했다.
“시신을 꺼내 드리겠습니다.”
의사는 피에트로의 시체가 든 관 앞으로 갔다. 도움 없이 그 관을 내린 의사는 새 침대에 피에트로를 눕혔다. 대역 시체가 된 소년의 옷을 입고 있던 피에트로는 그사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바치 병원에서 제공하는 수의였는데 꼭 잠자리에 들기 위해 옷을 갈아입은 것처럼 보였다. 얼굴에 묻은 피는 지워져 있었으며 머리는 단정히 넘기고 있었다. 손톱은 짧았고 눈꺼풀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얼굴에는 보랏빛이 감돌았다.
“……관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로미오가 입을 떼자 조반니가 대답했다.
“제가 준비했습니다. 시체 도굴업자들의 곡괭이질을 우려해 단단한 나무관을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급하게 구하느라 넉넉한 크기의 관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피에트로에게 그런대로 맞을 겁니다.”
의사가 방구석에서 관을 가져왔다. 못을 박아 뚜껑을 덮으면 쉽게 열지 못하는 떡갈나무 관이었다. 키가 큰 피에트로를 위해 큰 관을 준비한 것이었지만 조반니의 말대로 넉넉하게 자리가 남기보다는 머리와 다리가 딱 맞게 들어갈 것 같았다.
의사는 피에트로의 몸을 들어 관 안에 다리부터 넣게 한 뒤 머리를 받쳐 눕혔다. 손을 가지런히 배 위에 올리게 하자 피에트로는 관 속에 들어가 잠든 것처럼 보였다.
피에트로의 수의가 나무 관에 스치는 소리를 듣는 로미오는 지팡이를 세게 쥐었다. 핏줄이 돋은 그의 손등을 곁눈으로 본 조반니는 로미오의 감정을 읽으려는 것처럼 그의 낯빛을 살폈다.
“시신의 처분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이름으로 묘지에 안치하는 것입니다. 장례식은 당연히 치를 수 없으며 먼 거리를 이동하기에는 큰 위험이 따릅니다. 아시다시피 군인들의 눈을 피해 묻어야 하는 시신이니까요. 현재로서는 바치시의 묘지에 묻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대위님. 현재 피에트로를 가장 빨리 안치할 수 있는 묘지는 그곳밖에 없습니다.”
“…….”
피에트로를 내려다보고 있으나 사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로미오는 장례니 안치니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처럼 한참을 침묵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느끼는 감정을 짐작하기 위해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 감정을 나열했다. 슬픔, 침통함, 비참함, 절망감. 각각이 무슨 차이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짐작했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습니까, 대위님?”
“…….”
“대위님?”
“……그렇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바치 병원의 묘지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가지에서 많이 벗어난 도시 외곽의 넓은 땅 전체가 묘지로 쓰였기 때문에 그곳까지는 마차를 타고 가야 했다. 시신을 묻고 나면 통행금지 시간이 시작돼 동이 틀 때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발이 묶여 있을 수도 있었다.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것은 아침이 돼서야 가능할지도 몰랐다.
“날이 밝으면 부대로 돌아가 보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묘지에는 저 혼자 다녀와도 괜찮습니다.”
“아니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의사는 미리 준비한 못과 망치를 가져왔다. 시체를 도굴해 본 경험이 있는 의사는 괭이로 땅을 파고 관의 못을 뜯어내는 일에 능숙했기 때문에 관을 봉하는 것도 장의사 못지않게 잘했다.
“뚜껑을 덮은 이후 다시 관을 열기 위해서는 관을 부수어야만 가능합니다. 관 안에 함께 넣고 싶은 물건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그럼 관을 닫도록 하겠습니다.”
관 속에 고요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피에트로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뚜껑이 덮이자 그의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잠깐.”
의사가 못을 막 박으려고 할 때 로미오가 입을 뗐다. 로미오의 표정을 줄곧 주시하고 있던 조반니가 의사에게 손을 들어 제지시키자 로미오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한번 만져 보고 싶습니다.”
의사가 다시 관 뚜껑을 열자 로미오가 조반니에게 부탁했다.
“제가 피에트로의 얼굴을 만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조반니는 로미오의 팔꿈치 아래쪽을 잡아 손을 뻗게 해 피에트로의 턱에 댔다. 그러자 로미오가 허리를 숙여 피에트로의 턱 아래와 목, 뺨과 코를 차례로 더듬어 만졌다.
잠든 얼굴, 다시 보지 못할 얼굴, 썩어 없어질 얼굴이었다. 한때 살아 있었으나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될 얼굴이었다. 피에트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로미오는 양손으로 피에트로의 얼굴을 더듬었다. 손끝에 새기려는 것처럼 추락으로 뭉개진 이마와 뒷머리를 만지다가 눈을 감았다. 입술을 짓씹었고,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손을 뗐다.
“……됐습니다.”
뒤로 물러서자 의사가 관 뚜껑을 덮었다. 굵은 못을 위에 대고 망치를 두드리자 못이 박혀 들어가며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번 쾅, 못질을 하자 못 하나가 완전히 박혔다. 그런 식으로 못을 모두 박자 관은 그 누구도 열 수 없을 만큼 단단히 봉해졌다.
의사는 복도로 이어지는 문이 아닌 다른 문을 가리켜 보였다.
“저 문으로 나가면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뒤뜰로 이어지는 길이 나옵니다. 거기에 마차 한 대가 준비돼 있을 텐데 그 마차에 타고 계시면 관을 옮겨다 드리겠습니다. 관을 옮겨 줄 묘공들과 마부는 관 속에 누가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하나 두 분께 말을 걸거나 묻지는 않을 겁니다. 묘지에 도착하거든 알아서 관을 옮겨 드릴 겁니다. 저 길로 나가셔서 마차에 먼저 올라타 계세요.”
두 사람은 의사의 말대로 문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뒤뜰로 이어지는 문을 열자 뜰은 어두웠다. 분수대가 있었지만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각형의 주랑에 둘러싸인 뜰에는 휘장이 쳐진 이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는데 말 두 마리가 푸르르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잠시 뒤 발소리가 들렸다. 덜컹대며 마차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관이 실렸고 마부가 마부대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출발한다는 말 없이 곧 마차가 움직였다.
뜰을 빠져나간 마차는 병원 밖으로 나갔다. 어둑한 거리를 달려 묘지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더 깊어 있었다. 바치시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성벽 근처였기 때문에 인적이 드물었다. 키가 낮은 담장에 둘러싸인 묘지를 지키고 있는 것은 추레한 옷차림의 묘지기였다. 그는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다 조반니와 로미오가 내리자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마차 뒤에 매달려 이곳까지 온 묘공들도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여기 안치 허가서입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반니가 시신 안치 허가서를 건네자 묘지기는 두 사람과 묘공들을 묘지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름 없는 시신은 묘지에 쉽게 안치해 주지 않았지만 이미 뒷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끝나 있었다.
“자, 어서 옮기지.”
묘공들은 피에트로의 관을 내려 묘지 안으로 옮겼다. 나무 관의 무게와 피에트로의 체중 때문에 무거웠지만 그들은 엄숙히 관을 옮겼다.
“자리는 이곳입니다요. 그러면 땅을 파도록 합지요.”
땅에는 묘지기가 미리 세워 놓은 묘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짧은 글귀만이 적힌 묘석에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버젓한 장례식조차 치를 수 없었다. 죽은 자를 위한 노래를 불러 주는 이들도 없었고 장례 행렬도 없었다. 묘석 위에 얹어 줄 화관도 준비하지 못했다.
묘공들이 땅을 파는 동안 조반니와 로미오는 뒤로 물러나 서 있었다. 묘지의 나무 위에 앉은 흰 가면올빼미 한 마리만이 어둠 속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흙을 파는 소리에 이어 구덩이 속에 나무 관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로미오는 쓰고 있던 군모를 벗어 손에 쥐었다.
스산한 묘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삽으로 흙을 퍼 담는 소리뿐이었는데 흙으로 덮이기 시작하니 관은 금세 보이지 않게 됐다.
마지막 이별과도 같은 매장이 순식간에 끝나자 묘공들은 자리를 정리했다.
“끝났습니다요.”
돈으로 입막음을 한 묘공들은 무덤이 잘 만들어졌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군소리 없이 물러갔다. 조반니의 눈짓에 묘지기도 고개를 숙여 보이고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
우두커니 서서 묘석을 내려다보는 로미오는 침묵으로 할 말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조반니 역시 말없이 그를 기다리며 흙으로 평평하게 덮인 땅을 내려다봤다. 피에트로가 묻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감쪽같은 땅 위에는 덩그러니 남은 묘석만이 하얗게 빛났다.
불과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늘 저녁 무렵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피에트로였다. 어젯밤 이 시각 잠자리에 들었을 그는 이제 땅속에 묻혀 있었다.
영원한 안식이었다.
“……선생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한참 만에 로미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얼음으로 저민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선생님께서 손을 써 주지 않으셨다면 피에트로의 옷가지 몇 벌을 돌려받고 소각장에서 소각되는 걸 지켜봐야만 했을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너무나 큰 도움을 주셔서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뭘요.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걸요. 하지만 당분간은 이곳에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 자주 다녀가면 다른 이들의 관심을 사게 될 겁니다.”
“……예. 제 생각도 같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지만 그가 울거나 비통해하지 않아 감정을 종잡기 힘들었다. 이미 피에트로의 죽음에 대해 마음을 정리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겉으로 의연해 보이는 것뿐일까. 자신이 만약 로미오라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낄지 이해해 보려고 했지만 쉽게 짐작되지 않았다. 가족을 잃은 자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달리 방법이 없어 병원에서 숱하게 봤던, 가족의 죽음을 겪은 이들의 반응을 떠올리며 그들을 흉내 낼 준비를 했다. 모방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대위님께서는…….”
그러나 위로의 말을 전부 이을 수 없었다.
로미오의 뺨 위로 눈물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소리 없이 군화 굽 위로 떨어진 눈물이 두 방울, 세 방울, 방울져 떨어지며 피에트로가 묻힌 땅 위를 적셨다. 어둠 속에서 눈물을 떨구는 로미오는 흐느낌을 죽이고 있었지만 그의 뺨 위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추고 있던 조반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뒤늦게 깨닫고 로미오의 어깨를 감싸 그를 안아 주었다. 뒷머리에 손을 얹고 등을 감싸니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손을 움직여 로미오의 등을 쓸어내린 조반니는 자신에게 안겨 있는 로미오의 체온과 몸의 무게를 가득 느끼려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귀를 간질이는 흐느낌이 음악 소리라도 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소리까지 듣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한 조반니는 양팔을 넓게 벌려 로미오를 더 가까이 안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손을 내리자 그의 허리가 만져졌다. 엉덩이를 쓰다듬고 바지를 벗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대로 안고만 있자 로미오가 몸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백랍같이 흰 그의 뺨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조반니는 조금 더 안겨 있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로미오의 어깨를 잡았다. 눈물에 젖은 그의 얼굴이 아름다웠다. 물기가 어린 파란 눈동자와 눈물을 한껏 머금고 있는 기다란 속눈썹을 보고 있자니 그의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비비고 싶어졌다.
로미오는 우는 것조차 끔찍이도 아름다웠다.
“함께 나고 자란 형제를 잃는다는 것은 팔이나 다리를 잃는 것과 같은 아픔일 겁니다.”
조반니는 분위기를 틈타 슬그머니 로미오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장밋빛을 띠는 보드라운 귓등도 자연스럽게 한 번 쓸었다. 눈물을 흘리는 로미오의 모습이 욕정을 자극해 어떻게든 계속 몸을 만져 대고 싶었다.
“피에트로는 죽었지만 그가 남기고 간 것들이 대위님의 여생에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을 겁니다. 제게 있어 피에트로는 법을 공부하던 명석한 소년으로 남을 겁니다. 피에트로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도 그럴 겁니다.”
로미오를 꽉 껴안고 싶었다. 안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를 이 흙바닥 위에 떠밀어 눕히고 싶었다. 눈물에 젖은 뺨을 핥고 입 속에 혀를 넣고 싶었다.
축축한 눈가를 빨면 로미오가 거부를 하며 고함을 지를 테고 그럼 입을 막고 옷을 벗긴 후 배와 사타구니 사이에 코를 묻고 살 내음을 맡을 것이다.
피에트로의 죽음을 겪고 실의와 절망에 빠진 그를 흙투성이가 되도록 범하며 극한의 고통에 빠진 두 눈을 마주 볼 것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절망을 목격한 그 눈을 보며 성기가 짓무르도록 쑤셔 박고 또 쑤셔 박을 것이다. 로미오의 신음을 들은 지 너무도 오래돼 그 소리를 잊을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듣고 싶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지금 대위님께는 소용이 없겠으나 무엇이든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필요할 때면 언제든 제게 도움을 청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로미오의 머리 뒤로 손을 올린 조반니는 머리채를 잡아 틀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정말 그렇게 할 것처럼 손을 대고 있던 그는 스르르 팔을 치워 냈다.
로미오가 거부하지 않는 선에서 뺨이라도 한 번 더 만져 보기 위해 눈물에 젖은 그의 뺨을 감쌌다. 매끈한 피부가 손바닥에 닿았지만 로미오는 밀어내지 않았다. 갓난아기를 만지듯 아주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 준 조반니는 역겨울 정도로 빠르게 눈알을 굴려 로미오의 표정을 관찰하곤 그의 손을 잡았다. 역시나 로미오가 놓아 달라고 말하거나 거부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자 군복 소매와 장갑 사이의 맨 팔목도 슬쩍 만졌다.
음험하게 미소 지은 조반니는 로미오의 허리도 안아 보기 위해 두 손을 내렸다. 날씬한 허리 아래 엉덩이가 시작되는 둔부 언저리를 교묘하게 쓰다듬으려다 로미오의 눈을 보고 손을 멈췄다.
그의 눈빛에 슬픔이 어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로미오의 눈빛은 분노에 차 있었다. 푸른 그의 눈 속에 거대한 불길 같은 분노가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었다. 그는 피에트로를 잃었다는 사실에 슬픔과 함께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피에트로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로미오는 피에트로의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피에트로를 죽인 자가 있다면 오늘 밤 찾아내 산 채로 사지를 찢어 버리고도 남을 만한 사람이었다.
“군에 분노를 느끼십니까? 그들이 피에트로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순간 조반니는 기회를 포착했다고 느꼈다. 로미오가 몸을 물리며 뒤로 물러서자 조반니는 그의 몸을 탐하던 것을 즉시 멈추고 손을 치웠다. 눈물을 닦아 주었음에도 로미오의 뺨은 금방 다시 눈물로 젖어 들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는 로미오의 눈은 그 스스로도 다스릴 수 없는 강렬한 복수심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피에트로를 살릴 수만 있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맨손으로 땅을 파내고 관의 못을 모두 뽑아낼 그였다.
“……병원을 나설 때만 해도 저는 오래전의 제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네베를 떠나 피에트로를 바치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선택이 결국 피에트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피에트로가 땅에 묻힌 지금 그를 죽게 만든 것은 제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라면 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단테의 12인입니다. 피에트로가 체포된 후 군을 배신할 마음까지 먹었던 저였지만…… 저는 어쩔 수 없는 군인입니다. 죄 없는 피에트로를 반역자로 만든 것이 군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단테의 12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피에트로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들에 의해 무고한 자들이 희생되어 왔고 또 희생될 겁니다. 피에트로는 그 희생자들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대체 왜 그 아이가 죽어야만 하는지…… 저는 피에트로가 이런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편안한 죽음을 맞지도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고통을 느끼며 죽어 갔습니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살아 있는 동안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줬을 겁니다…….”
뺨 아래로 점점이 떨어지는 로미오의 눈물을 보며 조반니는 피에트로와 엔초가 로미오에게 있어 삶의 목표와도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를 잃고 두 사람의 보호자가 돼 그들을 책임져 왔을 로미오였다. 피에트로의 죽음으로 인해 로미오는 과거와 미래를 전부 잃었다. 삶에서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깨어진 지금 로미오가 분노에 사로잡히는 것은 당연했다.
조반니는 분노할 수 있는 자는 무엇이든 이뤄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분노가 상실로부터 비롯될 때 그 힘은 더욱 강력해졌으며 잃은 것이 있는 자들은 잃을 것이 있는 자들보다 더 필사적이었다.
“대위님. 제가 만약…….”
조반니는 자신이 도박과도 같은 말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진실을 내뱉었을 때 로미오의 반응이 예상하던 것과 다를 수 있었다. 다 안다고 하기에 로미오는 변화무쌍한 사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했다.
“단테의 12인의 단원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조반니는 어둠 속에서 로미오가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놓치지 않고 봤다. 그는 앞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더니 의심하며 물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로미오는 숨을 한 번 참은 뒤 다시 물었다.
“……제게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실없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저는 단테의 12인의 단원입니다.”
로미오는 마치 다른 나라 말을 들은 것처럼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눈물도 그치고 젖은 뺨도 서서히 말라 가자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10년도 더 전에 입회식을 치르고 정식 단원이 됐습니다. 지금은 상위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가 단테의 12인의 단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입니다. 그러나 저는 공화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단원이 된 게 아닙니다. 제 목적은 단테의 12인의 와해입니다. 저는 그들을 절멸시키고자 1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끈질기게 기다리며 그들을 속여 왔습니다. 제가 단테의 12인을 와해시키기 위해 그들의 틈에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
두 사람뿐인 묘지에 적막감이 흘렀다. 조반니는 말을 계속했다.
“비토리오와 피에트로의 조사에서 저는 두 번 다 제6군단의 감시를 빠져나갔습니다. 제가 모든 사실을 대위님께 털어놓는 이유는 대위님께 기회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그들의 끝을 보시겠습니까? 대위님의 손으로 직접 그들을 무너뜨리시겠습니까?”
믿지 못할 이야기에 로미오는 입술을 벌린 채 조반니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선생님께서 정말로…….” 하고 말을 뗐으나 끝맺지 못하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들을 색출하는 것입니다. 제게는 단테의 12인의 상위 단원들의 인명록이 있습니다. 그들의 은거지인 ‘올빼미 굴’의 위치도 알고 있습니다. 피에트로의 죽음을 만회하고자 한다면 당장 검거에 나서는 게 좋겠죠. 그러나 아직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 그렇게 할 경우 단테의 12인의 완전한 와해는 어려워질 겁니다. 두 번째 방법은, 대위님께서 그들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 덫을 놓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완벽한 복수가 될 겁니다. 그들을 완전히 뿌리 뽑아 이 나라에 발 디디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편이 안전합니다. 하지만 대위님께서는 시력이 떨어져 가고 있지요. 덫을 놓고 기다리는 동안 상태가 악화될 위험이 큽니다.”
조반니는 이야기가 전부 끝났을 때 로미오가 어떤 대답을 할지 짐작하고 말을 이었다.
“대위님께서 원하신다면 단테의 12인의 정식 단원이 되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조직의 중심부로 들어가 숨죽여 기다린다면 머지않아 때가 올 겁니다. 만약 기다리지 않고 즉각 행동을 개시하길 바라신다면 날이 밝는 대로 부대를 이끌고 단테의 12인의 은거지를 급습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내일 이 시각엔 적어도 절반이 넘는 단원들이 제6군단의 지하 감옥에 구금돼 있을 겁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해질 것이고 대대적인 검거가 이뤄질 겁니다. 단원들이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경은 폐쇄되고 바치 시내 곳곳에 숨어 있던 이들은 빠짐없이 색출돼 거리로 끌려 나올 겁니다.”
“…….”
로미오의 표정 변화는 조반니가 단테의 12인의 단원이라는 사실에 대한 충격에서 시작돼 점차 수용의 단계로 넘어가더니 이윽고 두 가지 선택지 중 한쪽을 택해야 하기에 느끼는 혼란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지금…….”
로미오는 조반니가 단테의 12인이었다는 사실을 이토록 치밀하게 숨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큰 의문을 느꼈다. 그에게 속아 왔다는 사실에서 회의감도 느꼈고 왜 평범한 의사인 그가 단테의 12인의 와해를 목표로 하는지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조반니가 중대한 두 가지 선택을 자신에게 줬기 때문에 바보같이 의문만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혼란스럽습니다…… 여쭙고 싶은 것이 많으나 우선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왜 제게 선택권을 주시는 겁니까? 10년을 바쳐 기다려 온 일이라면 온전히 선생님께서 혼자 이뤄 내시면 되지 않습니까? 공화국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함께하자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대위님과 함께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피에트로의 복수를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단테의 12인이 피에트로를 앗아 갔으니 똑같은 방법으로 대갚음해 줘야지요. 저도 피에트로와 엔초를 보며 안젤로를 떠올렸던 적이 있기에 피에트로가 죽은 지금 가족을 잃은 것처럼 괴롭습니다. 그를 위해 단테의 12인을 단죄하고자 합니다.”
조반니는 이미 머릿속으로 이 제안이 로미오와 자신 사이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계산을 끝낸 참이었다. 혼란에 빠진 로미오의 표정이 마음에 들어 대답을 부추기고 싶었지만 그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대위님께서 어느 쪽이든 분명 선택을 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제가 단테의 12인의 단원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실 테죠. 그러니 충분한 여유를 드리겠습니다. 대답은 차후에 다시 만나 듣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곧 통행금지가 시작될 겁니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