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돌아오지 않는 것들
“물러서라. 엔초 알피에리의 연행은 내가 맡겠다.”
하숙집 앞에 열을 맞춰 서 있던 군인들이 갈리에누스에게 경례를 하며 물러났다. 갈리에누스를 내려 준 말은 푸르르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부대에서 로사티 3번가까지 쉬지 않고 말을 몰아 달려온 갈리에누스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하숙집 문 앞에 섰다. 2층을 올려다보니 불이 꺼져 있었지만 일단 문을 두드렸다.
“그라나 부인, 안에 계십니까? 솔로르사노 중위입니다.”
인기척과 함께 안에서 문이 열리자 그라나 부인은 놀란 눈이었다. 그녀는 갈리에누스의 등 뒤에 선 십여 명의 군인들을 보더니 잔주름이 잡힌 이마에 더 굵은 주름을 잡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왔다우?”
“엔초에게 볼일이 있어 왔습니다. 부인께서도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해 주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피에트로와 관련된 간단한 질문입니다.”
로미오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라나 부인은 피에트로의 이름이 나오자 갈리에누스에게 한쪽 귀를 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피에트로에게 무슨 일이 있어이?”
“아니요,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쭤보겠습니다. 근래에 피에트로의 손님으로 보이는 자가 이 집을 드나든 적이 있습니까?”
“없다우.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어이.”
“부인께서 마지막으로 피에트로를 보신 게 언제입니까?”
“어젯밤에 봤다우. 이른 저녁에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기에 인사를 했어이.”
“그때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보통 때와 마찬가지였다우.”
“혹시 위층에서 피에트로나 엔초 외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적은 없었습니까? 낯선 자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이.”
갈리에누스는 불현듯 로미오가 하숙집 근처를 순찰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을 떠올렸다. 혹시 그때 로미오가 수상한 자를 발견했던 것일까. 그 수상한 자가 피에트로와 관련이 있어 순찰의 이유를 물었을 때 착각했다는 변명을 했던 것일까.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위층으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갈리에누스는 2층으로 올라가 로미오의 집 문을 두드렸다. 엔초를 위해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엔초, 안에 있어?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문을 열어 주겠어?”
기다렸지만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문을 한 번 더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어 문고리를 당기려는데 아래층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내려가자 엔초와 조반니가 막 하숙집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우르르 몰려온 군인들 때문에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대위님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조반니가 분위기를 눈치채고 즉시 묻자 쭈뼛대며 군인들을 올려다보던 엔초가 큼지막한 눈을 더 크게 떴다. 갈리에누스는 얼른 계단을 내려가 엔초가 겁먹지 않도록 표정을 풀고 이야기했다.
“축제 구경을 갔다 돌아오는 길인가 보구나. 나와 함께 가야 할 데가 있는데 괜찮겠어? 겁먹을 필요 없어.”
엔초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군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반니의 등 뒤로 몸을 슬쩍 숨겼다.
“어디로… 가는데요?”
“부대로 갈 거야.”
“……로미오 형한테 무슨 일이 있어요?”
“대위님께서는 무사하셔. 아무 일 없단다. 나와 함께 가서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주기만 하면 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시간을 조금만 내주면 금방 끝날 테니 곧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로미오 형은요? 그곳에 가면 로미오 형을 볼 수 있나요?”
“그럼. 가면 대위님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어서 가자.”
갈리에누스가 손을 내밀자 엔초가 머뭇거리며 그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조반니가 엔초를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대위님께서 계신다 하더라도 부대는 어린아이가 혼자 가기에 적절한 곳이 아닙니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어차피 돌아오는 길에 데려다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오실 필요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 주셔야 하니 댁으로 돌아가지 마시고 잠시 시간을 내주십시오. 한데, 어떻게 이 시간에 엔초와 같이 계시는 겁니까?”
“전 이 하숙집의 3층에 삽니다. 이사를 온 지 꽤 됐는데 대위님에게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오늘 저녁 내내 엔초와 축제 구경을 했습니다. 무슨 일로 엔초를 데려가는 것인지 알 듯한데 그런 이유라면 제가 더더욱 동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비토리오의 일. 기억하실 겁니다. 의심할 만한 자를 추려 내는 과정에서 저를 제외하기 힘드실 텐데요.”
로미오의 윗집으로 이사 왔다는 조반니의 말에 눈빛이 달라졌던 갈리에누스는 그가 비토리오의 이름을 꺼내자 다시 한번 눈을 번뜩였다.
비토리오도 피에트로도 단테의 12인의 연루자였다. 비토리오의 사건 때 조반니는 그의 선생이었고 이번에는 층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연루자와 관련이 된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조반니는 우연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쪽이었지 ‘나도 문제가 있으니 데려가 조사해 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입장이었다. 이번에 조사를 받게 된다면 지난번보다 더 집요한 취조를 받게 될 것이다. 몸을 수색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난번처럼 갖고 있는 물건들을 압수당해 검열을 받을 것이다.
동시에 로미오에게 깃든 의혹 역시 더 짙어질 것이다. 그는 비토리오의 선생이었던 조반니와 이웃인 데다 벽보를 붙인 혐의를 받고 있는 피에트로를 동생으로 두고 있었다. 멋모르는 부대 내의 마구간지기도 의심할 만큼 너무도 혐의가 무거웠다.
“……그렇게 하십시오. 선생님께서도 동행해 주십시오.”
엔초는 갈리에누스의 손을 잡으며 장갑을 낀 그의 손에서 긴장감을 느꼈다. 웃지 않는 조반니 때문에 더욱 긴장한 엔초는 갈리에누스에게 달라붙어 하숙집을 나섰다.
마차 안에서 엔초의 손을 놓지 않고 계속 잡고 있던 갈리에누스는 마차가 부대에 도착하자 엔초를 안아 마차에서 내려 주었다. 부대에 처음 와 보는 엔초는 발을 맞춰 연병장을 지나가는 군인들을 보고 갈리에누스의 손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그에게 붙었다. 삭막한 부대의 풍경은 무섭게 보이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갈리에누스는 엔초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저기로 갈 거란다.”
“……스포르차 선생님도 함께 가는 거죠? 함께 가고 싶어요. 그렇게 해 주세요…….”
엔초는 갈리에누스의 손을 잡은 채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조반니를 돌아보았다. 갈리에누스는 탑 안으로 들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선생님께서도 함께 갈 거야.”
탑 안으로 들어서자 엔초는 갈리에누스에게 더 가까이 붙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갈리에누스가 피에트로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층에 위치한 취조실로 엔초와 조반니를 데려가니 취조실 앞에는 니콜 안드리치 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쩔쩔매는 태도로 얼른 다가왔다.
“몬테 중령님께서 찾으십니다. 집무실에 지금 말로 대위님과 알피에리 대위님이 계신데 급히 올라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니콜의 입에서 로미오의 이름이 나오자 엔초는 갈리에누스의 손을 세게 잡으며 그가 자신을 로미오에게 데려가 주길 원하는 눈으로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스포르차 선생님과 함께 안에 들어가 있으렴. 선생님, 실례하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갈리에누스는 두 사람을 취조실 안으로 안내한 뒤 다시 나왔다. 몬테 중령의 집무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동안 감추고 있던 굳은 표정이 그제야 얼굴에 드러났다.
몬테 중령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문 너머에서는 로미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일지 헤아릴 수 없어 손으로 눈가를 감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소위였던 시절 로미오는 피에트로와 엔초가 아니었더라면 군을 그만두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로미오 자신은 두 사람에게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며 유일한 보호자라고. 그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문을 두드리자 로미오의 목소리가 끊겼다. 안으로 들어서자 집무실 내에는 로미오와 발레리아, 그리고 사병 하나가 있었다. 그가 피에트로를 발견한 사병일 거라고 생각한 갈리에누스는 그의 옆으로 가 섰다. 자리에 앉아 있는 몬테 중령은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배를 내민 평소와 달리 두 팔을 쭉 뻗어 탁자를 짚은 채 세 사람을 올려다봤다.
“엔초 알피에리와 조반니 스포르차를 부대로 인치해 왔습니다. 현재 제9 취조실에 있습니다.”
갈리에누스는 차마 로미오를 보지 못하고 바닥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여덟 살 난 어린 동생이 취조를 받기 위해 이곳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그는 과연 지금 어떤 마음일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게, 알피에리 대위.”
몬테 중령은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몸을 탁자 쪽으로 기울이고 로미오를 올려다봤다.
“피에트로의 취조를 제가 맡을 수 있도록 허가해 주십시오.”
“허가할 수 없네.”
몬테 중령은 강경했으나 로미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장교의 참관 아래 취조를 진행하겠습니다. 신문에 포함되는 내용은 모두 엄중히 조서로 작성될 것입니다.”
“자네가 취조 과정에서 객관성을 잃을 것이라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뻔한 사실이네. 다른 이도 아니고 친족이 연루자로 체포되었는데 취조를 담당한다? 더군다나 만약 이번 사건에 자네가 간여돼 있다면 피에트로 알피에리의 혐의를 벗기기 위해 신문 내용을 유도할 수도 있는 일이네. 자네에 대한 의심 역시 아직 거둬지지 않았어. 피에트로 알피에리의 취조와 함께 자네의 취조도 이뤄져야 해.”
“저는 피에트로의 혐의점이 파악되는 대로 취조를 받겠습니다.”
몬테 중령은 로미오가 제6군단에 대한 정보를 피에트로에게 넘겨 단테의 12인의 단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뒤를 봐주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다. 로미오가 취조 중에 피에트로와 말을 맞춰 증거를 누락할 수도 있었고 혐의를 벗겨 주기 위해 취조의 내용을 조작할 수도 있었다.
“이번 취조는 자네에게 허락할 수 없네. 이건 형평성을 고려할 문제야.”
몬테 중령이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 같자 발레리아가 나섰다.
“피에트로 알피에리의 취조는 제가 맡겠습니다, 중령님. 불가능하다면 엔초 알피에리의 취조만이라도 담당하게 해 주십시오.”
“자네라고 다를 것이 있겠나? 자네도 피에트로 알피에리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닌가. 증거를 은닉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 자네도 이 사건에서 배제시킬 것이네.”
“엔초 알피에리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낯선 장교가 형인 피에트로 알피에리에 대해 물으면 겁을 먹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할 겁니다. 대답을 얻어 내는 과정에서 겁박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가혹한 처사입니다. 엔초 알피에리는 취조 대상이기 이전에 대위의 가족입니다. 부디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발레리아의 말을 들으며 로미오는 더 이상 불같은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권위는 피에트로를 영원히 보호해 줄 수 없으며 취조는 피할 수 없었다.
만약 피에트로의 혐의가 밝혀진다면. 피에트로가 단테의 12인과 연루된 것이 맞으며 벽보를 붙인 것도 맞다면. 단테의 12인의 사상에 물들어 지금껏 자신 몰래 반정부 활동을 해 온 것이라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가능성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무작정 피에트로를 믿을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오기까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결백을 주장하기엔 피에트로가 취조실에서 보인 태도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그러나 감히 몬테 중령에게 온건한 처분을 내려 달라고 부탁할 수 없었다. 피에트로의 혐의가 입증되면 자신은 군인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할 것이다.
차라리 지금 피에트로와 엔초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는 것이 나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취조 중에 모든 사실이 드러나면 때는 이미 늦었다.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떻게든 부대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을 데리고 남은 평생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게 된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군을 그만두는 것도, 도망자 신세가 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더 먼 미래의 일을 따지고 있을 새는 없었다. 어디로 가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후에 할 일이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이 나라를 버리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이것은 피에트로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감상에 젖어 고뇌를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자신과 피에트로, 엔초 세 사람이 탈 배를 구한다면 당장 오늘 밤에라도 루바노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피에트로는 반역자이기 전에 자신의 동생이었고 지금 필요한 것은 소년이었던 자신을 군인의 길로 이끈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피에트로였다.
피에트로가 죽어서 이곳을 나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렇다면 엔초 알피에리의 취조는 말로 대위 자네가 맡게. 단, 신문 내용에 관한 조서 작성은 다른 장교가 담당할 것이다.”
몬테 중령이 대화를 끝내려는 것처럼 결연한 눈빛을 지어 보이자 로미오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며 말했다.
“제게 직접 피에트로에게 이번 사건에 관해 물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살라티코의 술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같이 있었던 자는 누구인지 제가 직접 밝혀내게 해 주십시오.”
“만약 물어서 혐의점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할 텐가? 자네 손으로 직접 피에트로 알피에리를 처분할 텐가?”
로미오가 대답하지 못하자 몬테 중령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혐의점이 발견된다면 직접 고문실로 옮길 수 있겠나? 이건 자네를 위한 결정이기도 해. 친족을 직접 취조한다는 것이 쉬운 일처럼 느껴진다면 생각을 달리하게.”
“제게 있어 이 문제는 제가 가진 지위와 맞바꿀 만큼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전 그 아이를 열 살이었을 무렵부터 홀로 키워 왔습니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체포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을 거라는 확신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취조를 담당하는 장교가 피에트로를 어떻게 다룰지 아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안 되네. 자네가 피에트로 알피에리를 취조한다면 그건 더 이상 취조가 아니게 돼.”
몬테 중령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벗어 놓았던 모자를 쓴 그는 인도적인 견지에서 한 가지를 덧붙여 말했다.
“피에트로 알피에리의 취조는 내가 직접 맡을 것이다. 신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허락하겠네. 그것이 내가 자네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아량이네.”
* * *
“긴장하고 있구나.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다.”
실내를 지키고 선 군인들은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무서운 얼굴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했다. 엔초는 두리번거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자신의 무릎만 내려다봤다.
“……로미오 형은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조반니가 알 턱이 없었지만 엔초에게는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곧 볼 수 있을 거야.”
엔초는 자신과 조반니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 로미오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로미오가 불렀다면 갈리에누스도 그렇게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갈리에누스는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늘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는데.
탁자를 내려다보던 엔초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배를 움켜쥐었다.
“배가 고파요…….”
“돌아가면 저녁을 먹자. 맛있는 걸 만들어 줄게. 뭘 먹고 싶어?”
뭐든 만들어 줄 것처럼 상냥하게 묻고 있었지만 조반니는 문만 응시하고 있었다. 취조실의 등잔 불빛을 받아 호박색으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저녁을 고민하는 눈이 아니었다. 엔초는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먹고 싶은 것이 생각나지 않아 배만 문질렀다.
잠시 후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문 옆을 지키고 선 군인이 걸쇠를 풀자 발레리아가 들어섰다. 반가움보다 불안함을 더 크게 느낀 엔초는 서너 살쯤 더 먹은 소년처럼 의젓하게 물었다.
“말로 대위님, 로미오 형은요? 업무 때문에 바쁜가요……?”
“응. 대위는 지금 바쁘단다. 하지만 네가 여기 와 있다는 걸 알아. 별다른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로미오 형은 지금 절 만나러 올 수 없나요?”
“아마 그럴 거야. 대신 내가 왔으니 안심하렴.”
발레리아는 손에 든 서류와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발레리아를 따라 들어온 두 명의 장교는 취조실 구석에 있는 탁자에 앉았다. 그들은 뭔가를 쓰는 것처럼 펜을 집어 들었는데 마치 대화를 받아 적으려는 것처럼 이쪽을 주시했다. 그들의 눈길이 무서워 엔초는 고개를 움츠렸다.
“지금부터 질문을 할 텐데 솔직하게 대답해 주면 돼. 질문이 많지 않으니 편하게 대답해.”
발레리아는 펜을 쥐었다. 엔초는 그녀가 평소와 다름없이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있으나 그 미소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그녀는 어두운 표정이었을지도 몰랐다. 문 앞에서 표정을 바꿨을지도 몰랐다.
“……어떤 질문인데요?”
“피에트로에 관한 질문이야.”
“피에트로 형이요?”
“응.”
질문을 하겠다고 이야기한 것은 발레리아인데 어쩐지 그녀는 묻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말이 없었다.
“…….”
펜을 든 채 서류를 내려다보던 발레리아는 취조실 구석 탁자에 앉은 장교가 짧은 헛기침을 하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엔초가 아닌 조반니를 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한 명씩 신문하는 것이 원칙이나 엔초의 사정을 고려해 선생님의 동석이 허락되었습니다. 질문이 이뤄지는 도중에 엔초에게 어떠한 신호를 주거나 대답을 유도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 즉시 분리되어 조사가 진행될 겁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엔초는 발레리아가 어려운 말을 써 그녀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으나 그녀가 조반니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불안한 마음에 조반니의 눈치를 보니 조반니는 다른 것을 묻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만 했다.
“그럼, 엔초. 질문을 할게. 네가 보고 들은 걸 사실대로 얘기하면 돼.”
엔초가 그녀를 알게 되고 지금까지 이토록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처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첫 번째 질문이 던져졌다.
“최근에 피에트로에게서 이상한 점을 느낀 적이 있니?”
* * *
문밖에서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피에트로가 고개를 들자 군복을 입은 나이 든 장교 하나가 들어왔다. 배가 나온 장교는 탁자로 다가와 앉는 대신 문 앞에 섰다. 그의 뒤로 군인들이 들어오더니 가장 마지막으로 로미오가 들어왔다. 로미오는 이곳을 나갈 때와 달리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더니 탁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섰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위치였다.
탁자 앞으로 다가온 나이 든 장교는 의자를 빼 앉았다.
“클레멘트 몬테 중령이다.”
군을 찾아온 손님도, 군인도 아닌 혐의자를 공대할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몬테 중령은 피에트로와 얼굴을 마주 봤다. 눈빛에서 단서를 얻으려는 것처럼 지그시 보다 팔이 묶여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신체를 구속한 상태로 취조를 받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몬테 중령은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질문을 하도록 하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까지는 이곳을 나갈 수 없다. 알아들었나?”
피에트로는 탁자 위에 올려진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몬테 중령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펜을 들었다.
“오늘 몰베나 거리에 벽보를 붙인 혐의로 체포된 소년과 연관이 있나?”
“…….”
피에트로가 대답하지 않자 몬테 중령은 펜으로 서류 표면을 탁 쳤다.
“다시 묻겠다. 몰베나 거리에 벽보를 붙인 소년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 맞나?”
“……모릅니다. 그 소년이 누구인지도, 몰베나 거리에 붙은 벽보가 어떤 벽보인지도요. 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살라티코 거리의 술집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자는 누구지?”
“모르는 자입니다. 우연히 합석했던 거예요. 이름이나 나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오늘 술집에서 처음 본 자입니다.”
“그자와 왜 벽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지?”
“……그런 적 없습니다.”
피에트로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몬테 중령은 펜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질문을 바꾸도록 하지. 조반니 스포르차와는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가?”
“그분은 제가 사는 집 윗집으로 이사 온 분입니다. 바쁘신 분인 데다 저는 그분께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분과도 왕래가 적었습니다. 친밀한 정도를 논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닙니다.”
“비토리오 나르디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피에트로가 동요하지 않자 몬테 중령은 한 장교에게 지시했다.
“그 소년을 데리고 와라.”
“예, 중령님.”
장교가 취조실을 나가자 발소리가 멀어졌다. 곧 다시 들렸는데 군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가 겹쳐 들렸다. 문이 열리자 군인들은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비틀거리는 소년을 양쪽에서 붙들고 취조실 안으로 들어섰다. 소년의 코에는 핏자국이 굳어 있었고 눈두덩이는 부어올라 있었다. 턱 아래에는 멍이 맺혀 있었으며 입술 끝은 터져 있었다.
장교가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하자 몬테 중령이 피에트로를 가리키며 소년에게 물었다.
“이자를 알고 있나?”
소년은 부어오른 눈두덩이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피에트로를 내려다봤다.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띄엄띄엄했다.
“모르, 윽… 모르겠어요… 으…….”
“네게 벽보를 붙일 것을 지시한 자가 이자가 맞나?”
“몰라요, 흐…… 그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아요…….”
벽보를 붙인 자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는 이유로 군인들에게 구타를 당했지만 소년은 처음 보는 상대를 범인으로 지목할 만큼 악랄하지 않았다.
몬테 중령은 소년이 벽보를 지시한 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소년을 취조한 장교에게서 종이를 받아 들어 피에트로에게 밀었다. 종이에는 벽보를 지시한 자가 소년에게 했던 말이 적혀 있었다.
“소리 내 읽어라.”
“…….”
몬테 중령은 펜 끝으로 종이에 써진 문장을 짚었다. 피에트로가 소년을 보지 않으려는 것처럼 눈을 내리고 아무 말 하지 않자 취조실 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로미오는 허리춤에 찬 검으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앞을 볼 수 없기에 두 사람의 목소리에 집중했는데 몬테 중령은 소년에게 피에트로의 목소리를 확인시키는 것으로 혐의를 밝혀낼 작정인 듯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읽어라.”
피에트로는 입술을 뗐으나 얼른 읽지 않았다.
“……전 아니에요. 저 소년을 모릅니다.”
“읽어라.”
“…….”
완고한 몬테 중령의 목소리에 피에트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목소리를 냈다.
“……축제 날 저녁에 몰베나 거리에 이 벽보를 붙이겠다고 약속하면 40바소를 주지.”
피에트로의 목소리를 들은 소년은 부어오른 눈을 크게 뜨며 피가 굳은 입술을 떨었다.
“마, 맞아요! 이 목소리예요, 확실해요! 이자가 내게 벽보를 붙이라고 시킨 그자예요!”
“확실한가? 관계없는 제삼의 인물을 허위로 지목할 경우 처벌을 받을 것이니 신중하게 대답해라.”
“네, 확실해요! 저 목소리예요! 목소리를 듣고 나이 든 사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분명 저자예요. 이봐요, 나 대신 말 좀 해 줘요…! 당신이 내게 벽보를 붙이라며 돈을 줬잖아요!”
소년의 외침에 로미오는 검으로 가져갔던 손을 내리며 몬테 중령을 향해 얘기했다.
“소년이 목소리를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벽보를 부탁받은 시점으로부터 축제 날까지는 엿새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목소리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지기에 충분합니다.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만약 확실한 증거가 나올 경우 피에트로의 혐의를 인정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나 지금 로미오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유일했다.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혐의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없다. 군인들이 하숙집을 수색해 증거를 발견해 냈을 수도 있고 피에트로와 소년 사이에서 결정적 증거가 나올 수도 있었지만 로미오로서는 그 모든 것을 논박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엔초의 취조도 아직 진행 중이었다.
몬테 중령은 로미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날카로운 눈으로 피에트로를 응시했다.
“이 소년이 낯선 자에게서 벽보에 관한 부탁을 받은 것은 엿새 전 저녁 해가 질 무렵이었다. 엿새 전의 네 행적을 밝혀라. 그때 어디에 있었지?”
“엿새 전이라면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집에 있었을 거예요.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저는 그 시각에 늘 집에 있습니다.”
“증명해 줄 자가 있는가?”
“제 동생이요. 여기 와 있으니 물어보면 될 것 아닙니까.”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젊은이였으나 피에트로는 감정적 동요가 비교적 적었다. 대답을 회피하려는 태도는 보였지만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몬테 중령은 피에트로가 취조를 빠져나가기 위한 획책을 꾸몄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 획책이란 것이 로미오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역시 아직 철회할 수 없었다.
“엔초 알피에리가 아닌 다른 인물의 증언이 필요하다. 엿새 전 그날 네가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또 누가 있지?”
“제 동생 말고는 없습니다. 하숙집의 주인인 그라나 부인께서는 그 시간에 대부분 잠들어 계시기 때문에 위층에서 들려오는 저와 엔초의 말소리를 듣지 못하셨을 거예요.”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자 하숙집의 수색을 담당한 장교가 들어섰다. 로미오를 잘 알고 있는 장교는 로미오에게 짧게나마 눈길을 주며 고개를 숙였다. 같은 장교의 집을 수색한다는 것은 흔한 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으로 묵언의 용서를 구했다.
“압수한 물건들의 선별을 마쳤으나 혐의를 입증할 만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연이은 발소리와 함께 다른 장교가 들어섰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로미오는 발소리가 멈춘 곳을 주시했다.
“엔초 알피에리에 대한 취조가 끝났습니다, 중령님. 조서를 전달 드립니다.”
로미오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몬테 중령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엔초가 피에트로에 관해 이상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지만 장교의 목소리로 미뤄 취조 내용 중 의심할 만한 내용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몬테 중령이 조서를 읽는 것인지 일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종이를 내려놓는 기척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엿새 전의 네 행적에 관해 엔초 알피에리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군. 엿새 전 저녁 자신은 집에 혼자 있었으며 그때 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 네가 아주 늦은 시간에 들어왔기 때문이라는군. 기억하기로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이 쳤을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날 이 소년을 만나 벽보에 관한 부탁을 한 것이 아닌가?”
“어린아이의 기억을 믿으시나 보군요. 엿새 전이라면 분명 특별한 일이 없었던 날입니다. 제 동생이 착각을 했을 겁니다.”
“근래 들어 방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는 진술도 했다. 뭘 하고 있는지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무얼 했는지 이야기할 수 있겠나?”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 방에서 책을 읽으며 보냅니다. 단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는 이유만으로 의심하지는 말아 주세요. 제가 단테의 12인과 연루됐다는 증거가 나왔다면 그 증거를 말씀해 주시면 될 일입니다.”
몬테 중령은 뭔가를 기다리려는 것처럼 대답 대신 침묵했고 로미오는 그의 태도에 불안함을 느꼈다. 보이지 않으니 몬테 중령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실내에 몇 명의 군인이 있는지도 정확히 알기 힘들었다.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취조실 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문밖에서 윽박지르는 군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십 명의 군인들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중앙탑 전체에 울릴 정도로 거칠게 철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피에트로였다. 고개를 번쩍 치켜든 그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려 철문이 열리자 열린 문 너머로 여자의 비명 소리가 한층 선명하게 들려왔다. 먼 데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고통에 차 있었는데 비명 소리 틈으로 군인들이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중령님. 체포 과정에서 도주했던 자를 인치해 왔습니다. 청년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남복으로 변장한 소녀였습니다. 나이는 18세로 로마니엘로 대학교 학생들의 인명록을 입수해 이름을 대조한 결과 법학과 학생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피에트로의 눈에 핏발이 섰다. 통제를 잃고 여과 없이 표정을 드러낸 그가 문을 쏘아보자 몬테 중령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와 함께 술집에 있었던 소녀는 현재 고문실로 옮겨졌다. 네가 사실대로 실토하지 않으면 고문을 통해 모든 것을 밝혀낼 것이다. 술집에서 나눈 이야기는 물론 벽보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전부.”
다시 한번 비명 소리가 들렸다. 철문의 두께가 막아 주고 있던 비명 소리는 문이 열린 지금 매서울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탑 전체를 울릴 만큼 커다란 비명 소리는 꽤 오랫동안 이어지다가 끊겼고 잠시 후 다시 울렸다.
“그만둬요!”
견디지 못한 피에트로가 고함을 쳤다. 움켜쥔 주먹을 떠는 그는 몬테 중령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 아이한테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그러니 놔줘요, 당장 멈추라고요!”
“고문을 멈추면 벽보에 관해 사실대로 이야기할 텐가?”
다시 한번 소녀의 비명 소리와 군인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비명 소리의 말미에는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 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자 피에트로가 결국 고개를 떨구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제가 시킨 게 맞아요. 제가 저 소년에게 돈을 주고 벽보를 붙여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니 고문은 그만둬요… 전부 말하겠습니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 피에트로의 입에서 내뱉어진 이 상황에 로미오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스스로의 혐의를 인정하는 말만은 마지막까지 미뤘어야 했다. 자신이 벽보를 붙였다는 자백만은 협박에 의해 강요당한다고 해도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번복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제가 저 소년에게 돈을 주고 벽보를 부탁했어요… 하지만 전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아니에요. 단언컨대 그들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계속되자 몬테 중령은 장교 한 명을 시켜 고문실로 보냈다. 곧 비명 소리가 끊기자 몬테 중령이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모든 것은 입증을 통해 인정된다. 네 발언은 혐의를 벗는 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어.”
“아니라는 것을 무엇으로 입증합니까? 저는 결단코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아닙니다. 술집에 저와 함께 있었던 아이도요. 우린 그저 벽보를 붙였을 뿐입니다.”
“술집에서 벽보에 관해 모의한 것은 인정하나?”
“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하고자 뜻을 모은 건 아닙니다. 제가 정부와 군인들에 대한 도전자이고 반역자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기 있는 당신들 모두 공화국의 시민이 아닌가요? 군인이기 이전에 공화국의 역사 아래 태어나 공화국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혁명 같은 거창한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화국 시민으로서 민중에게 국가가 필요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벽보도 그런 이유에서 붙인 거예요.”
“네가 붙인 벽보는 단테의 12인의 선전 벽보와 양식이 흡사하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을 할 테냐?”
“그들이 붙인 벽보를 본 적 있기 때문에 따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서 지령을 받고 벽보를 붙인 게 아니에요.”
피에트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로미오는 몬테 중령과 피에트로의 사이를 가로막듯 다가섰다.
“인치한 로마니엘로 대학 법학과 학생의 증언을 들어야 합니다. 인적 증거가 그 무엇보다 확실하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물러서라, 대위.”
몬테 중령이 계속해 보라는 것처럼 피에트로를 보자 피에트로는 로미오의 마음 따위는 모르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었다.
“당신들은 이 나라의 공화정이 모든 이들의 소망을 이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공화국은 특별한 이들을 위한 나라예요. 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평등해질 수 없습니다. 권력이 있는 한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의 변두리에서 일생을 유랑하다 죽는 자들로 나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정치 권력에는 관심 없어요. 단지 모든 이들이 평등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평등은 국가와 정부가 철폐될 때에만 가능하다고 믿어요.”
피에트로는 체포된 이상 반론의 여지가 없기에 사실을 말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로미오가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도 알았고 벽보를 붙였다고 인정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도 알았지만 어리석게도 그 사실이 자신의 믿음을 꺾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이런 이야기를 공화국의 수호자인 제6군단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을 기회처럼 느꼈다. 설득으로 이 취조실 내의 군인들을 포섭할 수 있다는 헛된 상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약하지만 로미오의 존재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면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어리기에 치기가 있었고 법을 공부하는 젊은이들 특유의 신념도 갖고 있었다. 그 신념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오직 그것을 피력하는 것만이 중요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가 됐다.
“민중에게 국가가 필요하다고 정한 것은 누구입니까? 당신들인가요? 민중에게는 자유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억압과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루바노 공화국은 가장 이상적인 국가다. 공화정의 정치 체제에 반하는 사상을 지지하는 것은 인정될 수 없다.”
“공화국이 이상적이라는 것은 당신들의 생각입니다. 이 나라가 정말로 이상적이었다면 시장과 법관들이 그들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만찬을 즐길 때 구빈원에서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며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들이 서로의 경작지를 놓고 죽고 죽임당하는 일도 없었을 테죠. 권위를 가진 자는 언제든 변할 수 있고 권력은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국가가 사라지면 가난 역시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너희가 이상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공상은 집어치워라. 루바노 공화국은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시민들에 의해 뽑힌 자가 공화국을 다스리고 그들에게는 영속적인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공화정이 가진 문제입니다. 민중에 의해 뽑혔다는 이유로 권력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이 공화정이 가진 허점이란 말입니다. 권력자들은 민중을 대변하지 않아요. 국가가 사라지고 민중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민중들이 직접 그들의 손으로 땅을 일구고 옷과 신발을 만들고 법을 어긴 자를 처벌하는 세상 말입니다. 국가와 정부가 사라지면 인간은 그 어떤 것에도 억압당하지 않을 겁니다. 민중들에게는 대변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직접 그들 자신의 대변인이 되게 하는 것이 진짜 당신이 말하는 이상에 더 가까울 겁니다.”
“민중들이 스스로 그 모든 것을 조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의 망상에 불과하다. 국가 권력이 사라진 후 남는 것은 혼란뿐이며 인간은 서로의 것을 도둑질하고 살인을 저지르며 야만적인 원시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통치자가 없는 나라 하나가 주어진다면 너희도 그 속에서 계급을 가르고 노예를 만들어 낼 거다. 지금 당장 사람들의 발길이 닫지 않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너희 이상주의자 놈들만이 사는 마을을 만들어 봐라. 내 장담하는데 대엿새도 지나지 않아 호랑이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있을 것이다.”
“민중에게 한 번도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어떻게 속단할 수 있습니까? 자유를 먼저 주세요. 기회를 먼저 갖게 해 주고 민중들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고 탓하세요.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력히 연대할 수 있으며 그 연대에 위계 구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남을 지배하고 스스로의 이익만 챙기고자 하는 욕망은 교육을 통해 교정할 수 있어요. 집이 없어 길에 나앉은 자들을 보십시오.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다 돈이 없어 묘지가 아니라 흙바닥 아래에 묻히는 자들을 보세요. 권력자가 사라지고 자유가 주어지면 평등도 실현될 겁니다. 국가와 권력, 군대, 지배자,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진 세상이 오면 가능해집니다.”
피에트로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몬테 중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미 이곳에 들어섰을 때부터 피에트로를 고문실로 옮길 작정이었던 몬테 중령은 이 이상 피에트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단호하게 지시했다.
“더 이상의 발언은 허용하지 않겠다. 이자를 고문실로 옮겨라.”
물러나 있던 군인 하나가 피에트로를 일으켜 세우자 로미오가 그의 어깨를 억세게 잡았다.
“손대지 마라.”
로미오는 애써 분노를 잠재우며 짧고 강렬한 어조로 경고했다. 거센 악력에 어깨를 붙잡힌 군인이 윽, 하고 신음하자 로미오는 손을 놓았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중령님. 피에트로는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아닐뿐더러 벽보를 붙인 것 외에 다른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인치해 온 소녀의 증언을 들어 봐야 합니다. 두 사람이 술집에 있었던 시각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탐문도 아직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고문실로 옮기는 것은 이릅니다.”
“알피에리 대위를 취조실로 데려가라.”
“중령님!”
몬테 중령의 지시에 다른 군인들이 로미오의 팔을 잡았다. 로미오는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몬테 중령을 향해 외쳤다.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피에트로를 고문실로 옮기는 것을 다시 한번 고려해 주십시오. 부디 제발, 부탁드립니다!”
고문실로 옮겨지면 보다 면밀한 자백을 얻어 내기 위한 고문이 시작될 것이다. 피에트로의 혐의가 밝혀지면 로미오는 군을 그만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알피에리 가문의 재산은 몰수당하고 로미오와 엔초는 국외로 추방되며 피에트로는 화형에 처해져 시체조차 거둘 수 없게 된다.
절망적인 것은 로미오 자신 또한 이 순간 피에트로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어볼 기회가 없었던 탓이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둘만 있을 기회가 생긴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자신은 피에트로의 눈짓조차 읽을 수 없는 맹인이었다. 만약 피에트로가 정말로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맞다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것이다.
“놔요! 저는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아닙니다. 무엇을 더 밝혀낸다는 겁니까? 벽보를 붙인 게 전부예요. 다른 건 없단 말입니다!”
피에트로가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군인들이 그를 취조실 밖으로 끌어내자 몬테 중령도 취조실을 나갔다.
“중령님!”
로미오가 외쳤으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끌려 나가는 피에트로의 고함과 군인들의 발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삼켰다. 자신을 붙들고 있는 군인들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친 로미오는 그들을 밀쳐 내고 문이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거센 저항에 군인들의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서로 몸싸움을 하는 것 같은 형국이 되자 몬테 중령이 지시했다.
“대위를 구금실로 옮겨라. 취조는 그곳에서 할 것이다.”
* * *
“그래서 로사티 3번가의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갈리에누스는 펜을 내려놓았다. 엔초가 있는 취조실을 한 칸 사이에 두고 다른 취조실로 옮겨 와 조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낱낱이 파헤치듯 조반니에게 크고 작은 질문을 던졌으나 그에겐 혐의점이 없음이 밝혀졌다. 그는 평범한 의사이자 평범한 이웃이었다. 수상한 점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피에트로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조반니가 물었으나 갈리에누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취조 내용이 적힌 서류만 내려다봤다. 비관적인 생각에 휩싸여 대답 없이 그대로 있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혐의가 밝혀질 때까지 이곳을 나가지 못할 겁니다. 취조가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경우 오늘 밤이 오기 전에 고문실로 옮겨질 겁니다.”
“군에서 대위님을 의심할 테니 대위님께서도 함께 조사를 받으시겠군요.”
“……예.”
갈리에누스는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묵묵히 서류를 정리했다.
“이만 엔초와 함께 돌아가십시오. 조사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부대 밖까지 군인들이 안내해 줄 겁니다.”
“그 전에 대위님을 한 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아니요. 안 됩니다. 그만 가십시오.”
취조 내용을 보고하러 가야 했지만 갈리에누스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깍지 낀 손을 입가에 댄 채 눈을 감았다.
조반니는 갈리에누스의 표정을 통해 그가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중위님.”
조용하게 부르자 갈리에누스가 고개를 들었다. 연녹빛 눈이 평소보다 짙은 녹색으로 보였는데 그는 밤색 머리카락이 이마로 흘러내린 것도 모르고 어두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봤다.
“저를 믿으십니까?”
갈리에누스의 눈썹 끝이 추켜 올라갔다. 의아함을 느낄 때 보이는 반응이었다.
“제가 바치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예전에 그곳에서 의사로 일을 한 적이 있어 의사들과 잘 압니다. 특히 병원 지하의 영안실에서 시신을 안치하는 일을 하는 분과 아주 잘 아는 사이지요. 최근에 불법 시체 매매 문제가 불거져 병원에서 시신 인계 절차를 무척 까다롭게 처리하고 있는데 반드시 직계 가족이 서명을 해야만 시신을 내어 줍니다. 바치 병원 영안실에 시신이 일단 한 번 안치되면 제6군단이라 할지라도 규정을 무시하고 시체를 가져가는 것은 힘듭니다.”
갈리에누스는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에 이마를 찡그렸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겁니까?”
“병원은 돈을 받고 시신을 넘겨주기 때문에 돈을 낼 수 없는 이들은 시신을 데려가지 못합니다. 가난해서 가족의 시신을 받아 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지만 인계를 위해 내야 하는 돈이 아까워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안치실에는 이름과 나이, 출신지를 알 수 없는 시신만 수십 구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조반니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갈리에누스는 표정이 점차 달라졌다. 취조실 안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조반니는 목소리를 낮췄다.
“만약 시신을 안치할 상황이 생긴다면 되도록 부대 밖으로 보내십시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바치 병원이니 다른 방도 없이 그곳으로 보내야 할 겁니다. 바치 병원에 안치되면 군은 시신의 처분에 대해 절반의 권한을 가지게 되므로 시신을 바꿔치기하는 것이 수월해집니다.”
* * *
“이게 다 무슨 일이우?”
하숙집 문을 연 조반니는 엔초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잠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그라나 부인은 군인들이 로미오의 집에서 물건을 압수해 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염려스러운 얼굴이었다. 엔초를 걱정한 그녀는 엔초가 무사해 보이자 머리부터 쓰다듬었다.
“엔초를 부탁드립니다. 전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미안하다, 엔초. 저녁은 내가 다녀온 뒤에 함께 먹도록 하자.”
“……어디에 가시는 거예요? 저와 함께 있어 주시면 안 돼요?”
“말해 줄 수 없단다. 걱정하지 말고 집에 올라가 있으렴.”
하숙집을 나온 조반니는 축제가 한창인 중앙 광장을 지나 통령의 관저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수레를 끌고 광장으로 향하던 행상인 하나가 멀리서 조반니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으나 조반니는 워낙 빠른 걸음으로 걷느라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저만치 통령의 관저가 보일 때가 되자 조반니는 잠시 멈추어 섰다. 창을 들고 관저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 중 한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지그시 쳐다보고 있으니 저쪽에서 조반니를 발견했다. 경비병이 모자를 위로 젖혔다가 한 번 내려 보이자 조반니는 뒤돌아 왔던 길을 돌아갔다.
정처 없이 걷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가 분명한 듯 성큼성큼 걷다가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다. 미행하는 자를 우려해 골목 끝에 몸을 숨기고 길가를 살핀 뒤 골목 깊숙한 곳으로 몸을 감췄다.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간 그는 어느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지요.”
넉 달에 한 번, 혹은 석 달에 한 번 오는 조반니를 알고 있는 급사는 그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2층에는 넓은 홀을 가운데에 두고 칸칸이 나무 문이 달린 방이 있었는데 시끌벅적한 아래층과 달리 조용했다. 방마다 손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문밖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일 안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술은 항상 먹던 것으로 주십시오.”
술을 마시러 온 얼굴이 아니었으나 조반니는 술을 한 병 시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급사가 나가자 그는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문을 바라봤다.
급사가 잔과 술을 가져다준 후로 꽤 한참이 지나서야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아주 희미한 소리였지만 조반니는 들을 수 있었다. 조용히 기다리자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선 이는 긴 로브를 걸치고 로브에 달린 모자를 눌러 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모자 사이로 금발 머리 한 가닥이 흘러내려 있었는데 키가 컸으나 사내의 골격이라기보다는 키가 큰 여인으로 보였다.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게 얼마 만입니까?”
문이 닫히고 나자 조반니가 인사했다. 상대는 조반니와 마주 보고 앉더니 모자를 벗었다. 감춰 둔 머리카락이 어깨로 흘러내렸는데 조반니의 머리와 똑같은 금빛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누님.”
모자를 벗은 여인, 카를로타 비스카르디는 긴 로브 자락을 정리했다. 한 나라의 통령이 입기에 그녀가 걸친 옷은 다소 값싸 보였는데 이곳까지 오는 길에 눈을 피하는 데는 제격이었다. 관저를 빠져나와 길을 걷는 동안 그 누구도 그녀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으니 잘한 선택이었다.
“늦은 밤에 이곳으로 나를 부른 것을 보아하니 필시 중한 일이 생긴 것이겠구나. 뭐지?”
카를로타는 입가의 주름을 약간 움직여 몹시도 고요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비밀스러운 데다 약속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만남이었기에 당연했다. 이곳을 나가면 조반니는 조반니 비스카르디가 아닌 조반니 스포르차였다.
공화국 내에서 두 사람이 남매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통령의 보좌관 5인인 체사레와 주세페, 그리고 조반니의 신분증명서를 위조해 준 바치시 행정 기관의 기관장 셋뿐이었다. 체사레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편지를 전달하는 일을 맡았는데 입이 무겁기로 유명한 자였다. 주세페 역시 카를로타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비밀이 새어 나갈 우려가 적었다. 관저를 지키는 경비병은 조반니가 통령의 은밀한 심부름꾼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두 사람이 남매라는 사실과 그들 사이에 오가는 일들에 대해서는 몰랐다.
이런 식의 만남을 갖는 것은 대략 넉 달에 한 번으로 조반니와 카를로타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은 지난 겨울이었다.
스무 살가량 차이가 나는 비스카르디 남매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한쪽은 젊은 사내였고 한쪽은 쉰이 넘은 나이 든 여인인 데다 두 사람이 남매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각각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핏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닮은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카를로타의 눈동자 색은 조반니보다 짙었고 눈매가 몹시 매서웠기 때문에 날카롭게 번뜩이는 것처럼 보였다. 화려하고 싱그러운 금빛을 띠는 조반니의 눈동자와는 대조적인 까닭에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 근본적으로 전혀 달랐다.
두 사람을 같은 자리에서 동시에 보며 생김새를 비교하지 않는 이상 섣불리 남매 사이로 의심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그간 건강히 지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지난겨울에 뵀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누님께서는 나이를 먹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인사는 그쯤하고 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라.”
“급한 상황이라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당장 만나 뵙고 이야기를 드려야 할 만큼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습니다.”
조반니는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오늘 로마니엘로 대학교의 법학과에 다니는 한 소년이 제6군단에 체포되었는데 그 소년은 제 아랫집에 사는 이웃입니다. 이사를 간 다음 날 제가 저녁을 대접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 소년이 ‘묘지기’인가?”
‘묘지기’는 두 사람이 단테의 12인의 단원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단테의 12인의 중앙 지부를 ‘굴’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는데 그 외에도 두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을 썼다.
“아니요. 법을 공부하는 평범한 소년인데 묘지기들의 사상에 감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 소년의 형입니다. 소년의 형이 제6군단의 장교이기에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년이 혐의를 벗든, 벗지 못하든 군이 더 이상 그분의 재직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장교라는 자의 이름이 뭐지?”
“로미오 알피에리입니다. 직급은 대위입니다.”
“그자가 네게 중요한가?”
“네, 중요합니다. 아주 중요하죠. 그분은 눈까지 멀어 가고 있어 여러모로 이번 사건을 혼자 감당해 내시기 어려울 겁니다.”
“눈이 멀어 가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그분은 맹인입니다. 앞을 거의 보지 못합니다.”
카를로타는 조반니의 말속에서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자에게 동정을 느끼나?”
“그럴 리가요. 저는 그런 것을 모릅니다. 누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여섯 살 무렵 병으로 앓아누웠던 아버지에게 자신이 증여받아야 할 유산의 액수를 알려 주며 숨을 거두기 전에 상속서를 써 달라고 아버지의 머리맡에 펜을 가져다 놓았던 조반니였다. 어린 그를 값비싼 보석이나 되는 것처럼 귀하게 키웠던 아버지를 조반니는 뒤뜰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것으로 취급했다. 생일날 받은 편지 속에 적힌 애정 어린 말을 이해하지 못해 편지를 찢어 버리기도 일쑤였고 그렇게 찢어 버리고서도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체포된 소년의 안위는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맹인 장교입니다. 다른 것은 어떻게 돼도 좋으나 그분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만은 막고 싶습니다. 피치 못할 일이 일어난다면 그분은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라도 동생을 구하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누님께 부탁드리고자 만남을 청한 겁니다. 그분께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누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시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군에 소속돼 있는 한 통령의 권한이 절대적으로 미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조반니는 피에트로의 죽음을 저울질한 결과 그가 죽는 것이 자신에게 더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미오는 피에트로의 죽음과 멀어 가는 눈으로 인해 분명 자신에게 더욱 의지할 것이다. 피에트로가 죽지 않고 크게 다치더라도 결과는 비슷할 테니 구태여 카를로타에게 피에트로를 살려 달라고 청할 마음은 없었다. 또 아무리 통령이라 한들 그녀가 피에트로의 혐의를 벗겨 주기 위해 나서는 것은 부자연스러웠다. 단테의 12인과 군 모두를 속여야 하는 상황에서 카를로타를 움직여 피에트로를 빼내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비토리오 나르디 그자에 이어 또 한 번 네게 혐의가 씌워졌구나. 이런 식으로 연루되는 것이 네게 불리하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로 다시 한번 군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묘지기들 역시 제 신분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상위 단원으로서의 활동을 일정 기간 금지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로써 대총장으로 추대되는 것은 예상보다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행동을 신중히 해라. 묘지기들이 모습을 감추고 달아나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간다.”
“운이 나빴습니다. 이번에 체포된 소년의 일은 전혀 예견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10년간 쌓아 온 노력을 이제 와 헛되게 할 수는 없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겠습니다.”
술병을 따 잔에 따르려던 조반니는 순간 고개를 돌려 문을 주시했다. 낯선 목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신속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 보이더니 문 앞에 붙어 서서 귀를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마치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자 카를로타가 주름진 눈가를 찌푸렸다.
“무슨 소리가 들린 거냐?”
“바로 조금 전에 들렸습니다. 듣지 못하셨습니까? 저 소리는… 잠깐. 또 들립니다.”
조반니가 문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카를로타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리 말이지? 문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조금 전 그 소리가 들리지 않으셨다고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조반니는 자리에 앉았다. 너무 작은 소리라 카를로타가 듣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문에 시선을 뒀다. 잠시 생각해 보니 수상한 자들은 아니고 단지 손님 몇 명이 문 앞을 지나가느라 들린 소리 같았다.
“제가 대총장으로 추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들이 와해되는 것 또한 금방입니다. 누님께서 오랜 시간 기다려 오신 그 순간이 곧 올 것입니다. 공화국의 황금기가 누님의 손안에서 이뤄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오랫동안 고대했으니 이제 그 결실이 맺어질 날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멀지 않았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소년이 되는 시간이었고 소년이 청년이 되는 시간이었다. 고작 이런 일로 그 긴 시간을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었다.
“만약 알피에리 대위님께서 군에 계속 있길 원하나 군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누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 주길 부탁드립니다. 그분은 불명예를 안고 군에서 쫓겨나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분은 충직한 분이시고 이번에 일어난 벽보 사건에 그분의 공이 있으니 명분은 충분할 겁니다. 제 부탁을 들어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동정은 느끼지 못하나 타인이 느낄 치욕스러운 감정은 고려하다니. 카를로타는 조반니를 유심히 바라봤다. 이것이 사적인 부탁이었다. 단테의 12인을 와해시키는 것이 대의라면 로미오라는 눈먼 장교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조반니의 개인적인 일이었다. 조반니가 통령의 권위에 기대어 이런 부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카를로타는 로미오라는 자에 대해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이곳에서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가 그게 전부냐? 그자에 관한 부탁을 하기 위해서 날 이리로 부른 게야?”
“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조반니는 잘생긴 입매를 올려 씩 웃어 보였다. 어렸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 버린 조반니였지만 카를로타는 뺨이 통통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어린 조반니를 기억했다.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마.”
카를로타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이 늦은 밤 급하게 자리에 나왔음에도 별말 없이 일어섰다. 위험한 만남의 대가라기에는 터무니없는 부탁이었지만 타박하지 않았다. 벗었던 모자를 다시 쓴 그녀는 금발 머리를 로브 속에 숨겼다.
“편지는 보름 뒤에 보내는 것으로 해라. 너와 내가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계절이 한 번 바뀐 이후로 하겠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누님. 조심히 돌아가세요.”
조반니가 손을 흔들자 카를로타는 문을 열고 나갔다. 소리 없이 문을 닫은 그녀는 흡사 유령처럼 발소리도 내지 않고 유유히 홀을 빠져나갔다.
* * *
구금실의 문을 열자 컴컴한 실내가 보였다.
천장까지 뻗어 있는 철창 안, 좁은 의자에 앉아 있는 로미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윗몸을 기울인 채 무릎 위에 팔을 댄 자세였다.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대위님.”
갈리에누스는 철창 앞에 섰다. 목소리를 듣고도 로미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엔초가 스포르차 선생님과 함께 돌아갔습니다. 말로 대위님 말씀으로는 엔초가 겁을 먹기는 했지만 무사히 조사를 마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댁에서 압수한 물건들은 안드리치 하사를 시켜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파손되거나 분실되는 물건이 없도록 신경을 썼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위님의 조사는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 혹 제게 부탁하실 것이 있습니까?”
“…….”
로미오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이 없었다. 갈리에누스는 구금실 안을 지키고 있는 군인을 잠깐 본 후 로미오에게 말했다.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그러나 말을 더 잇지는 못했다. 조반니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갈리에누스는 비록 조반니가 로미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할지라도 그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아 할 거라고 생각했다. 대화를 엿듣고 있는 다른 군인이 있는 이상 편히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피에트로는 지금 어디 있나.”
“몬테 중령님의 집무실 아래층에 위치한 고문실에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말로 대위님의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무소 대위님께서도 방금 부대로 돌아오셨는데 역시 출입이 금지됐습니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짐작해 고문에 앞서 취조 중인 것 같습니다.”
로미오는 천천히 손을 들어 눈가를 감쌌다. 손을 뗀 그는 장갑 낀 자신의 손을 허망하게 내려다봤다.
“프라타 대령님께서 부대로 돌아오시는 대로 말로 대위님과 무소 대위님께서 대위님을 구금실이 아닌 취조실로 옮겨 줄 것을 청하신다고 합니다… 곧 여기서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눈이 어두운 로미오를 이런 곳에 가두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발레리아와 마르코는 몬테 중령이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기에 그보다 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대령에게 간청을 하려 하고 있었다.
“대령님께서 만약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때 로미오가 고개를 들어 갈리에누스를 올려다봤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볼 수는 없었지만 입 모양을 볼 정도는 되었다.
로미오는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상태로 교묘하게 입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나를…….’
갈리에누스는 로미오의 입 모양을 정확히 읽었다.
‘도와줄 수…….’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은밀한 입 모양은 이렇게 끝났다.
‘있겠나.’
* * *
“아니에요. 아니란 말입니다…… 대체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믿으실 건가요? 이 이상 무슨 말을 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전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아니에요… 고문은 그만두고 제 말을 믿어 주세요… 제발…….”
같은 질문을 이미 여러 차례, 어쩌면 수십 차례 들었을지도 모르는 피에트로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두 손은 밧줄로 포박당해 등 뒤로 묶여 있었고 양쪽에서는 군인 둘이 어깨를 붙들어 내리누르고 있었다.
몬테 중령은 사람을 미치게 할 작정으로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먼 곳에서는 소녀의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고 고문실 내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은 기괴한 고문 도구들이 가득했다. 몬테 중령의 등 뒤에는 허리춤에 채찍을 찬 체격 좋은 장교가 금방이라도 채찍을 빼 휘두를 것처럼 어깨를 떡 펴고 서 있었다.
고문실에 도착한 직후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소녀의 비명은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었다. 고문을 그만두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몬테 중령은 소녀를 인질로 잡은 것처럼 압박을 가했다.
“단테의 12인이 평범해 보이는 학생인 너를 위장시켜 벽보를 붙이게 한 게 아니냐? 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야말로 가장 포섭하기 쉬운 존재일 테니 손쉽게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네가 여기 체포된 이상 그들은 네 입에서 새어 나갈 정보를 우려하고 있을 거다. 여기서 무사히 풀려난다고 해서 계속 그들의 편에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되는 법 같은 건 모릅니다… 어디로 가야 그들을 만날 수 있는지도 몰라요. 당신들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물밑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자들을 제가 도대체 무슨 수로 만난다는 말입니까? 저도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비명 소리가 한층 거세지자 피에트로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것처럼 고개를 떨궜다. 군인이 턱을 들어 억지로 머리를 들게 하자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먼저 자백하면 인치해 온 소녀보다 가벼운 처벌을 내릴 것이다.”
“정말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비록 벽보를 붙였고 그들의 사상에 감화된 것은 사실이나 조직을 이뤄 전위적인 혁명을 꾀하는 것은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저는 혁명론자도 아니고 혁명가가 될 생각도 없어요. 비밀 결사 같은 것에 가입할 마음은 전혀 없어요…….”
“자백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중형을 면치 못할 거다. 고문으로 네 입을 열게 하기 전에 기회를 주는 것이니 어서 말해라.”
“아닙니다. 정말로 아니에요…… 전 단테의 12인과는 관련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 소리를 멈춰요. 고문을 그만두세요, 제발…….”
이윽고 비명 소리가 멈추자 피에트로가 절박함에 목울대를 떨며 숨을 삼켰다. 괴로움이 묻어 나오는 몸짓은 이곳에 들어섰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력해 보였다.
“중령님.”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장교가 들어섰다. 새로 껴 장갑은 깨끗했으나 장교의 군복 소매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의 허리춤에는 허리띠만 있고 그곳에 감겨 있어야 할 채찍이 없었다.
“인치해 온 로마니엘로 대학교의 법학과 학생이 사망했습니다. 군의관을 불러 확인한 결과 숨이 멎은 상태라고 합니다.”
이미 피에트로의 말속에서 소녀와 피에트로의 관계를 눈치챈 몬테 중령이 피에트로의 표정 변화를 살피니 예상대로 그는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로마니엘로 법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탐문한 결과 평소 두 사람의 친분을 아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는데 아마도 표면적인 관계를 위장을 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감정까지 위장할 순 없었다. 열여덟 소년이 마음을 둔 소녀에 대한 감정을 무슨 수로 통제하겠는가.
“증언을 해 줄 자가 죽었다고 해서 거짓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 소녀의 취조를 통해 얻어 낸 증거와 네가 하는 말들을 맞춰 진위를 밝힐 것이다. 자, 어서 말해라.”
몬테 중령이 취조를 이어 가려 했지만 피에트로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고개를 거세게 내저었다.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무시무시하게 몸을 떠는 그는 얼굴이 흙빛으로, 그리고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목의 핏대가 불거지며 피부 밖으로 맥박이 뛰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공포가 서린 눈으로 소녀의 죽음을 알린 군인을 응시하던 피에트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자신을 막아서는 군인들을 밀치고 열린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난데없는 상황에 문 앞을 지키던 군인들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피에트로는 괴력에 가까운 힘으로 그들을 뿌리치고 복도로 나갔다.
“잡아라!”
손 쓸 새 없이 갑자기 벌어진 일에 몬테 중령이 외치자 군인들이 복도로 몰려나갔다. 급하게 내달리는 피에트로의 발소리와 함께 멈추라며 고함치는 군인들의 소리가 중앙탑을 울렸다. 그러나 복도를 내달리는 피에트로의 발소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발소리가 멎고 군인들이 다급하게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주 커다랗고 둔탁한 무엇인가가 퍽, 하고 부딪쳐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몬테 중령이 복도로 나가자 군인들이 달팽이 껍질같이 둥글게 말린 계단 난간에 붙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중 몇 명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군의관! 군의관을 불러라! 어서!”
몬테 중령이 난간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탑의 1층 바닥에 피에트로가 엎드려 있었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꺾인 고개를 바닥에 대고 있는 그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바닥에 고인 피가 바닥의 무늬를 따라 흥건하게 번져 가고 있었다.
* * *
발소리를 죽여 복도를 걷고 있었지만 갈리에누스의 허리춤에 찬 검은 크게 흔들렸다. 급한 걸음으로 걷는 그는 따라오는 자가 없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걸으면서도 한시가 급해 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로미오가 지시한 것들 중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추려 지체 없이 일을 해치워야 했다. 부대 내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는 정해져 있었다. 발레리아와 마르코. 그 둘 외에 니콜 안드리치 하사에게도 지시를 할 수 있겠지만 그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연루자를 빼돌린 혐의는 중죄에 해당했다. 자칫하다간 모두가 위험해질 것이다.
우선 피에트로의 고문실 내에 정확히 몇 명의 군인들이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취조실 내에는 통상 문을 지키는 이들을 포함해 다섯 명에서 일곱 명 사이의 군인들이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피에트로의 경우 사안이 중한 데다 몬테 중령이 직접 취조 중이니 그보다 많은 군인들이 있을 것이다.
인치돼 있는 소녀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로미오는 소녀가 있는 고문실의 위치와 함께 소녀의 상태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소녀도 같이 빼낼 생각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 것은 고문실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장교들의 고함 소리와 분주하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소리의 근원지는 계단이 있는 복도 끝이었다. 갈리에누스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의 난간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들이켜며 난간 아래로 떨어질 듯 몸을 기울였다. 탑의 아래에 펼쳐진 풍경에 넋을 놓고 멍한 시선을 보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믿을 수가 없어 난간에 점점 더 가까이 기대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군의관은 아직인가? 어서 부르게, 어서!”
“인치한 소녀의 사망을 확인한 후 광장의 가두 행렬을 진압하던 중 부상을 입고 돌아온 병사를 치료하기 위해 급히 서쪽탑으로 가셨습니다. 병사 하나를 보내 모셔오도록 했는데 아무래도 이미 상태가…….”
“피를 닦을 것을 더 가져와라! 뭐든 좋으니 어서 가져와!”
계단 아래의 군인들이 피에 절은 소년의 머리를 붙들고 코와 눈가를 닦아 내는데 계단 위에서 갈리에누스가 뛰어 내려오며 고함쳤다.
“물러서십시오!”
그는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피범벅인 피에트로의 머리를 무릎에 뉘었다.
눈을 감고 있는 피에트로는 옆얼굴이 추락의 충격으로 짓이겨져 있었다. 뒷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목을 받치고 있는 무릎 위로 피가 흘러내려 삽시간에 바지를 적셨다.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두려울 만큼 참혹한 모습이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칼은 피에 흠뻑 젖어 있었고 귀와 코에서도 거품이 섞인 피가 흘러내렸다.
피가 새어 나오는 피에트로의 머리를 안고 주위를 급히 둘러보자 몬테 중령이 보였다. 그 역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느끼고 낯빛이 경직돼 있었다. 짐작건대 피에트로는 고문 중에 이렇게 처참한 모습이 돼 계단 아래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일부러 계단 난간에서 밀어 떨어진 것도 아닐 것이다.
그는 저 난간 위에서 혼자서 떨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피를 이렇게 흘리고 있는데 다들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군의관이 자리를 비우고 있다면 부대 밖으로 내보내 치료를 받게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정치범이기 이전에 어린 소년입니다! 죽게 내버려 둘 셈입니까? 당장 마차를 불러 주십시오, 지금 당장!”
* * *
“대, 대위님…….”
로미오는 고개를 들었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철창 앞으로 다가온 니콜 안드리치 하사를 올려다봤다. 발걸음을 내딛었다가 물러나고 다시 내딛는 소리로 미뤄 하사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에서도 그 사실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그…….”
청각이 예민한 로미오였다. 구금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니콜 안드리치 하사가 목소리를 떨었다.
“그, 급히 가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순간 로미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피에트로의 취조가 마무리됐나?”
“……아닙니다. 취조는 아직…….”
“취조가 아직 진행 중이라면 무슨 일이지? 나를 어디로 데려간다는 말인가?”
“모, 몬테 중령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중령님께 허가 받아 대위님께 말씀드리러 온 것입니다…….”
니콜 안드리치 하사가 불안한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들은 로미오는 손끝이 식는 것을 느꼈다.
“바치 병원으로, 어서… 어서 가 보셔야겠습니다. 모셔다드릴 테니 어서 가 보십시오…….”
로미오는 철창 가까이 다가갔다. 병원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기다렸지만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손을 더듬어 철창을 꽉 쥐었다.
“무슨 일이지? 피에트로에게 무슨 일이 있나?”
“그, 그것이…….”
“말해라, 하사. 어서.”
“……피에트로 알피에리가 중앙탑의 계단에서 추락했다고 합니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급히 부대 밖으로 옮겨 현재 바치 병원에 있다고 합니다…….”
* * *
유난히 이마의 주름이 굵은 의사가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눈앞에 서 있는 나이 든 장교는 침대에 누운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딱딱한 그의 표정은 여러 가지를 말해 주고 있었는데 자신이 할 대답은 하나였다.
“추락 직후 즉사한 것으로 보이는군요.”
여러 번 닦아 냈으나 여전히 피범벅인 피에트로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핏기가 돌지 않는 죽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몸에서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숨도 쉬지 않았다. 손끝은 늘어져 있었고 가볍게 주먹을 쥐고 있었으나 얼굴만큼이나 손등의 피부가 희었다. 몸 전체가 놀라울 정도로 창백했다.
“병원에 도착해 맥을 짚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오른쪽 얼굴의 훼손이 심해 그 부위로 많은 양의 피가 흘렀습니다.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몬테 중령은 부대를 나서며 체포된 소녀의 가족들에게 한 차례 붙들렸다. 그들은 소녀에게 죄가 없으니 부디 풀어 달라며 애걸했다. 양 뺨이 눈물로 흠뻑 젖은 가족들은 마차에 오르는 중령을 향해 끊임없이 소녀는 죄가 없으며 불온한 단체의 활동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고 외쳤다.
그러나 이미 소녀는 죽었고 피에트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 이상 두 사람의 혐의는 밝힐 수 없게 됐다.
의사와 몬테 중령이 있는 안치실 바깥에는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비록 사망했지만 어찌 됐든 피에트로는 정치범이었다. 고문 중에 죽은 연루자의 시체는 소각시키는 것이 원칙이었으니 피에트로의 시신도 회수해 가 소각시켜야 했다. 예외는 없었다.
군인들 틈에 섞여 있는 갈리에누스의 옷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옷소매와 허리, 허벅지, 무릎이 전부 피에 젖어 있었다. 피에트로를 안고 있었던 그 잠깐 동안 끊임없이 흘러내린 피에 옷이 전부 젖어 버렸는데 그의 뺨에는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도 있었다.
“여기, 여기입니다… 대위님, 이쪽으로…….”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안드리치 하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 뒤로 로미오가 보였다. 하사의 안내를 받고 있는 로미오는 벽을 짚으며 걷고 있었다. 안드리치 하사는 맹인을 안내하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로미오는 이곳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군인들은 로미오를 보고 좌우로 물러났다. 그 누구도 나서서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곁눈질로 그를 봤다.
“도착했습니다. 여기… 이 문 너머에 안치실이 있습니다.”
안드리치 하사는 로미오가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잊고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로미오의 뺨은 해쓱하게 희었는데 핏줄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에는 끔찍한 적막이 흘렀다.
“……대위님.”
갈리에누스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지만 로미오는 그를 보지 않고 손을 내밀어 문을 만졌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구금실을 나와 마차에 타 안드리치 하사의 설명을 듣는 동안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피에트로가 죽었다고 했다.
탑에서 추락해 숨이 끊어졌다고 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고. 군인들이 죽은 피에트로를 병원으로 데려갔다고. 살리려고 했으나 이미 죽어 있었다고.
말이 되지 않았다. 피에트로가 죽었다니. 그는 자신의 동생이었다. 안드리치 하사는 자신의 동생이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피에트로를 키워 온 것은 자신인데. 이번 사건에 휘말린 피에트로를 막지 못한 것도 자신이었다. 손쓰지 못하고 고문실로 끌려가도록 내버려 둔 것도 자신이었다. 그래서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가 죽었다고?
“……몬테 중령님께서…….”
로미오는 문을 더듬으며 물었다. 안에서 조용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 안에 계신가?”
갈리에누스는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문을 두드렸다.
“……중령님. 알피에리 대위님께서 오셨습니다.”
문이 열렸다. 시체를 보관하는 곳이라 방 안에서는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군인들이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을 정도였다. 방 안에서는 살아 있는 자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생명력을 가진 것들이 내뿜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죽은 동물, 혹은 오래된 식물에서 나는 냄새가 났다.
다섯 발자국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침대가 있었다. 그 침대 위에 피에트로가 누워 있었다. 피가 말라붙은 옷을 입고 눈을 감고 있는 피에트로의 얼굴에는 푸른빛이 돌았다. 숨이 끊어진 몸은 잠들어 있을 때와 달랐다. 누가 보더라도 시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로미오는 피에트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바로 앞에 숨이 끊어진 채 누워 있는 자신의 동생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희끄무레한 회색빛의 덩어리와 드문드문 그 사이에 번져 있는 붉은 빛깔이었다. 피를 흘린 채 누워 있는 피에트로는 로미오에게 그렇게 보였다.
로미오가 앞을 볼 수 있다 할지라도 피에트로의 시신은 훼손이 심해 얼굴을 알아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른쪽 얼굴 전체가 추락의 충격으로 본래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해 무너져 내려 있었고 뒷머리도 피부 안쪽이 드러나 보였다. 이마와 관자놀이 부근은 강한 힘에 의해 짓이겨져 있었으니 살아 있었더라도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것이 분명했다. 왼쪽 눈꺼풀과 광대뼈가 겨우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훼손당한 오른쪽 얼굴 때문에 피에트로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 서 계신 곳의 정면에 피에트로가 있습니다.”
갈리에누스는 침대에 누워 있는 피에트로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섞여 있었다.
로미오가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기척을 통해 몬테 중령이 자신의 오른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안 로미오는 그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통제하기 위해 로미오는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았다. 피에트로의 죽음을 논리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감정을 배제했다.
“……취조 중에 그가 취조실 밖으로 뛰어나갔고 그 뒤를 군인들이 쫓았네. 목격한 군인들이 말하길 그가 소녀의 고문실을 찾으려는 것처럼 급히 계단을 내려가다가 손이 묶인 채 중심을 잃고 아래로 추락했다고 하는군. 그를 일부러 계단 아래로 밀어 넘어뜨린 자는 없네. 그는 우리의 조사 대상이며 우리가 은폐하고자 하는 것이 있지 않은 이상 그를 해할 이유는 없어. 하나, 사건의 전말이 목격한 자들의 진술로만 밝혀진 상황이니 추락을 목격한 군인들이 조사를 받을 것이다.”
“…….”
“……그가 이런 식으로 죽음에 이르기를 바란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네, 대위. 모든 것은 사고였어.”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주 긴 침묵이었다. 로미오는 몬테 중령의 말을 의심하는 것처럼 물었다.
“……정말로 죽었습니까?”
로미오는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침대가 걸리자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더듬자 피에트로의 다리가 만져졌다.
“정말로…….”
무릎과 허벅지를 더듬어 위로 올라가자 손목이 잡혔다. 피부가 굳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차갑고 딱딱했다.
여기 누워 있는 것이 정말로 피에트로인가.
“죽은 게 확실합니까?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로미오는 손을 좀 더 위로 올렸다. 팔뚝을 따라 올라가 어깨에서 멈추고, 다시 목과 턱을 더듬다 코와 입 위에서 멈췄다. 피에트로의 코와 입에 손을 댔으나 그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흡을 하고 있어야 할 코와 입에서 따뜻한 숨결이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닿는 차가운 몸에서 냄새가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피에트로는 죽었다.
살아 있지 않았다.
“피에트로가 맞습니까? 여기 누워 있는 것이… 피에트로가 확실합니까?”
로미오는 이 자리에 누워 있는 사람이 피에트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어떻게 그가 죽을 수 있을까. 자신은 취조를 받는 그를 빼내려고 했다. 그런데 탑에서 떨어져 죽었다니. 이런 식의 죽음을 맞을 줄 알았다면 무엇이든 했을 것인데. 피에트로를 어떻게든 빼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 것인데.
“얼굴의 훼손이 심하나 이자와 당신의 얼굴을 비교해 보니 형제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의사는 이미 군인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병원으로 찾아온 조반니와 만나 로미오의 사정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군인들의 눈을 피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는 기민하게 눈을 굴려 몬테 중령을 본 뒤 저 나이 든 장교를 이곳에서 내보낼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
로미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피에트로가 죽었다는 사실이 이른 아침 부대 내에 울려 퍼지는 나팔 경보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에 울려 대 도저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수가 없었다. 피에트로가 죽었다는 사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마비시켰다. 눈으로 볼 수 없어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주검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믿을 텐데 그저 만져 볼 수밖에 없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혹시 피에트로가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이 들어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의사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죽었다고 판단했으나 사실은 살아 있는 것이라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이라면.
그도 아니라면 다들 피에트로를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피에트로가 아닌 다른 아이를 데려와 피에트로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그러나 아니었다. 얼굴을 더듬어 보니 이것은 피에트로가 맞았다. 가슴 위에 손을 올렸으나 심장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 있음을 방증하는 가슴께의 울림이 손바닥 너머로 전해지지 않았다. 이건 시체였다. 살아 있는 몸이 아니었다.
말도 되지 않았다. 피에트로가 죽었다니. 그럴 수는 없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나가 계시지요. 시신을 정리하기 전에 이분께 시간을 드려야겠습니다.”
의사가 몬테 중령을 향해 말하자 그는 로미오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중령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의사는 로미오에게로 다가와 빠르게 속삭였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음침한 인상을 가진 의사는 밤낮없이 일을 해서인지 눈 밑이 검었다. 등이 굽기까지 한 그는 숨을 참고 이야기하듯 재빨리 속닥거렸다.
“저는 조반니와 잘 아는 사이입니다. 인연이 깊은 사이이니 제 말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말하길 이 소년의 시신을 바꿔치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대위님께 알려 드리라고 하더군요. 이 소년의 시신은 군이 회수해 갈 것이라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로미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의사는 미끄러지듯 방의 구석으로 향했다. 튼튼한 나무로 만든 난간 위에 관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는데 의사는 이것저것 살피며 고르지 않고 선반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관을 열었다. 관 안에 든 것은 젊은 남성의 알몸 시체였는데 스물이 안 된 소년처럼 보였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고 얼굴에 큰 상처가 나 있었는데 어딘가에 짓이겨진 것처럼 오른쪽 이마와 머리뼈가 무너져 내려 있었다. 얼굴의 훼손이 심했으나 머리칼이 검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키는 컸으며 체격은 좋은 편이었다.
그 시체를 침대에 실어 로미오에게로 다가온 의사는 앞서보다 더 빠른 말투로 얘기했다.
“여기 여분의 시체가 준비돼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문밖에 있는 장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 소년의 시체를 바꿔치기하시겠습니까?”
로미오는 의사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를 응시했다. 피에트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군이 피에트로의 시체를 회수해 갈 거라는 사실도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의 말이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조반니에게 언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조반니는 언제 이곳을 다녀간 것이며 어떻게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알고 의사에게 부탁을 했단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이…… 시체를 바꿔치기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제 손에 들린 이름 모를 이 소년의 시체는 당신의 형제와 머리카락의 색, 눈 색이 일치합니다. 사람은 숨을 거둔 후부터 얼굴이 푸른빛으로 변하고 살아 있었을 때와 달리 몸의 곳곳이 경직되거나 이완돼 얼굴의 생김새가 생전의 모습과 달라 보입니다. 제가 당신의 형제의 생전 모습은 모르나 이미 얼굴의 훼손이 심한 상태입니다. 조금 전 그 장교가 그를 잘 알고 있어 생김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않은 이상 시신이 바꿔치기 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설사 의심한다 할지라도 시신 인도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어려울 겁니다. 의문이 풀릴 때까지 수일이 걸릴 것이고 그사이에 시신은 부패가 진행돼 시신이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해질 겁니다. 이 자리에서 의심받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로미오는 차갑게 굳은 피에트로의 팔을 잡았다. 왜 지금 이 순간 피에트로의 멱살을 잡았던 것이 떠오르는 건가. 그것이 자신이 피에트로에게 해 준 마지막이라서?
“문밖의 저 장교가 선반 위의 관을 모두 뒤진다면 발각이 될지도 모르나, 글쎄요. 지금 이 방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화를 쉬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발각될 것이라는 위험 때문에 의사의 제안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시신이라도 얻어야 했다. 군이 살을 태울 정도로 거센 소각장의 불길 속에 피에트로를 던져 넣게 할 수는 없었다.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예. 부탁드립니다. 시신을 바꿔 주십시오.”
로미오가 뒤로 물러나자 의사는 빠른 손놀림으로 피에트로의 옷을 벗겼다. 옷이 스치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전부 벗긴 의사는 관에서 꺼낸 시체에 피에트로의 옷을 입힌 후 피에트로의 시신을 관에 넣었다. 키가 작은 데다 등까지 굽어 있었으나 의사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 모든 일을 진행했다. 관뚜껑이 덜그덕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라 로미오는 의사가 방금 피에트로의 시체를 관 속에 넣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됐습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앞으로 영원히 비밀에 부쳐야 합니다. 군에서 시신이 뒤바뀐 것을 알아차리면 저는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의사는 누런 이를 내보이며 킬킬 웃더니 피에트로의 피를 닦아 낸 헝겊을 남자의 시신에 문질렀다. 피에트로의 얼굴에 묻은 피를 그대로 얼굴에 묻히고 피에트로가 누워 있었던 자세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피가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의 모양도, 벌리고 있는 입술 사이의 넓이도, 쥐고 있는 손의 모양도, 심지어는 눈썹의 결도 손으로 만져 피에트로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피가 응고되길 기다리며 말했다.
“시신은 이곳에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곧 부패가 시작될 테니 사흘 내로 반드시 시신을 받으러 오셔야 합니다. 이제 저 문을 열고 조금 전 그 장교에게 시신을 인도하겠습니다.”
피에트로의 시체가 든 관을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은 의사는 시신의 인도에 관한 허가서를 로미오에게 내밀었다. 맹인인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조반니에게 짧은 설명을 들은 의사는 로미오가 펜을 잡자 펜촉의 위치를 잡아 주었다. 서명이 끝나자 의사는 넓은 천을 가져와 시신의 목 아래에 덮었다.
“들어오시지요.”
문이 열리고 몬테 중령이 들어서자 로미오는 돌아섰다. 피에트로가 죽었다는 사실이 판단력을 상실케 만들었지만 피에트로의 시신을 회수해 가는 것에 대해 그 어떤 반대의 입장도 내보이지 않는 것이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피에트로의 시신을 제가 거두어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중령님. 그는 제 동생입니다. 제 손으로 묻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피에트로는 등 뒤의 침대가 아닌 관 안에 들어 있었다. 죽은 피에트로가 그 안에 있었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중령에게 청한 것이었지만 더는 이곳에 서 있을 수도, 의견을 피력할 수도, 중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수도 없었다.
피에트로는 죽었다.
살아 돌아올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네. 혐의자의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중령이 잘라 말하자 로미오는 더 말하지 않고 방 안으로 불어 들어오는 공기의 흐름을 통해 문의 위치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물러나 서 있는 군인들이 흘끔대는 가운데 로미오는 의사가 몬테 중령에게 이만 시신을 가져가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하겠소.”
등 뒤에서 몬테 중령의 대답이 들리자 로미오는 벽을 더듬어 그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