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드러나는 진실
“형, 오늘 나랑 축제를 구경하러 갈래?”
“됐어. 안 가.”
“난 구경하고 싶어. 같이 가자, 응?”
“됐다니까.”
키가 작은 엔초는 의자 밑으로 늘어진 다리를 흔들며 빵을 한 입 떼어 먹었다.
창밖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의 분주한 목소리로 시끄러웠다. 축제 준비를 위해 어젯밤 정부 청사 직원들이 로사티 거리에 있는 모든 집에 바치시를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진 색색의 휘장들을 쳐 놓고 갔는데 피에트로와 엔초의 하숙집 창밖에는 황금색 휘장이 쳐져 있었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머리 위에 샛노란 그림자가 넓게 드리워졌다.
“형은 그럼 구경 안 갈 거야?”
“안 가.”
“나 혼자 가도 돼?”
“사람들 틈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렇지만 형이 같이 가 주지 않잖아.”
축제 첫날인 오늘 광장에서는 축제 행렬의 행진과 가면극, 마술, 곡예, 희곡 경연 등 다양한 볼거리가 마련됐다. 축제를 맞아 한몫 잡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도 행상인들이 몰려들어 광장이며 시장 골목 어귀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거리마다 사람들로 터져나갈 것처럼 붐비는 데다 으슥한 골목 안쪽에는 공안국의 단속 대상인 사창가나 질 나쁜 손님들의 단골 술집도 있었기 때문에 엔초가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위험했다.
“로미오 형은 오늘 와?”
“축제에 제6군단의 군인들이 동원될 텐데 로미오 형이 어떻게 와. 축제가 끝날 때까지는 못 올 거야. 로미오 형이 정 보고 싶으면 광장에서 기다려 봐. 군인들이 거기서 사람들을 감시할 테니까.”
“로미오 형도 함께 축제를 구경하면 얼마나 좋을까……”
“군에 있는 이상 축제 구경은 평생 불가능해.”
피에트로는 빈 죽 그릇을 멀리 치워 두고 남은 빵을 먹었다. 엔초는 이따금씩 조반니의 발소리가 들리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대에 차 물었다.
“그러면 스포르차 선생님께 함께 구경 가자고 해도 돼?”
“그분을 귀찮게 하지 마. 스포르차 선생님은 바쁜 분이셔.”
“하지만 스포르차 선생님이라면 함께 축제 구경을 가 주실 거야. 스포르차 선생님은 마음씨가 좋으시니까.”
“지난번에 못 들었어? 선생님은 이제 교수 일을 그만두고 바치 병원에서 일하신다잖아. 의사는 병원에서 환자를 보는 게 일이야. 축제 구경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그럼 그라나 할머니에게 부탁해도 돼? 그라나 할머니도 축제를 구경하시고 싶을 수 있잖아.”
“그라나 부인은 귀가 어두우셔서 안 돼. 인파에 휩쓸려 사고라도 당하려면 어쩌려고?”
“그러면 나는 누구랑 축제를 보러 가?”
“가지 마.”
매정한 대답에 엔초는 뾰로통한 표정이 됐다. 피에트로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식사를 하자 짧은 팔로 팔짱을 끼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형이 축제 구경을 못 하게 했다고 로미오 형한테 다 말할 거야.”
“그러든지. 난 다 먹었으니까 일어난다.”
피에트로는 빵을 전부 먹어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교에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데 엔초가 등 뒤에서 말했다.
“그런데 형은 밤마다 방에서 매일 혼자 뭘 하는 거야? 방 밖으로 잘 나와 보지도 않고.”
피에트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로미오의 방에 눈길을 줬다. 잠자코 서서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대꾸했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 * *
“뭐? 재판?”
탁자 위에는 남성 시신 한 구가 놓여 있었다. 남자의 가슴과 배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은 흔적이 세 군데 있었는데 그 깊이 벌어진 자상이 보였다. 사망 원인이 될 만큼 깊은 상처였다.
남자의 머리맡에 선 조반니는 끝이 날카로운 해부용 칼과 가위로 남자의 안구를 절개하고 있었다. 위아래로 눈꺼풀이 넓게 벌어지도록 안구와 눈꺼풀 사이에 도구를 끼워 고정시켜 놔 시체는 눈을 한껏 크게 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후 경직으로 몸이 굳어 있었기 때문에 한쪽 어깨를 누르면 팔과 다리가 일자로 굳은 채 전신이 들려 올라갔다.
안구를 덜어 내기 위해 안구 표면을 감싸고 있는 얇은 막을 잘라 내고 있는 조반니는 양손이 쉴 틈 없이 바빴다.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인 자세로 시체의 눈을 마주 보고 있는 까닭에 어깨에 부담이 많이 됐지만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계속 손을 움직였다.
안구를 감싸고 있는 불투명한 흰색 막은 질겼기 때문에 여러 번의 가위질을 해야 했는데 고도의 섬세함이 요구됐다.
조반니는 머뭇거리지 않고 눈꺼풀 안쪽으로 예리하게 가위를 넣어 흰색 막을 깨끗하게 잘라 낸 뒤 눈구멍 안에서 눈알을 덜어 냈다. 보통의 해부학자들과 비교해 노련하고 신속한 절개였다. 시체는 다시 돌려줘야 했기 때문에 헝겊을 작게 잘라 뭉쳐 빈 눈꺼풀 안쪽에 넣었다. 안구의 볼록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오목한 모양으로 깎은 나무 조각을 넣고 눈꺼풀을 닫자 시체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매매 업자는 현재 투옥된 상태라고 해. 우초 경사가 말하길 내게 시체를 팔기 전에 묘지에서 시체 다섯 구를 도굴해 사형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더군.”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공안국의 조사를 받은 조반니는 마지막 추가 조사를 남겨 두고 티모테오로부터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불법 시체 매매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었다.
조반니의 해부학서는 출판과 동시에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해부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 시체 매매 문제가 불거진 지금 시신을 구하는 절차에 대한 논란이 불 지펴졌다.
해부학자들과 의과대학의 교수들에게 이 문제는 해묵은 골칫거리인 데다 그들은 대부분 조반니와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정부에서 시신을 교부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며 한뜻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충분한 시신 수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의사들이 시체 매매 혐의로 법정에 서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신원도 명확하지 않은 자의 시체를 불법으로 사들이다니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매매 업자에게 시신을 살 때 그자가 네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어?”
의사가 가져야 할 윤리 의식이 부족한 조반니에게 설명해 봐야 그가 알아들을 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오나르도는 조반니가 재판에 회부된다는 사실에 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반니가 재판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그의 행동은 너무나 어리석었다.
“물론 알고 있었지. 하지만 나는 해부용 시체가 필요했고 그자는 돈이 필요했으니 수지가 맞는 거래였다고.”
“시신이 필요하다면 내게 물어보지 그랬어. 아니면 다른 해부학자들에게라도 도움을 구했어야지.”
“시체가 급하게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장례도 치르지 못하게 해부해 버렸으니 네가 해부한 그 젊은이의 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우초 경사에게 듣자 하니 그들이 전부 법정에 나올 기세로 벼르고 있다더군. 가난한 수공업자 집안이라는데 부모 없이 형제들만 넷이 있는 데다 다들 돈이 없어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할 형편이라는 거야. 남동생의 시체를 사 간 의사가 나라는 것을 알았으니 장례 비용은 물론 묫자리 값까지 받아 내려 들 거라더군.”
공안국 조사실을 들락거리며 여러 번 조사를 받았음에도 조반니는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그는 실제로 요 근래 밤마다 깊이 푹 잠들었으며 하루 세 번의 식사를 풍족하게 잘했다. 기분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남동생의 시체로 장사를 하려면 형제들 중 수완 좋은 장사치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집게와 가위를 내려놓고 손을 닦은 조반니는 해부도가 그려진 종이에다가 몇 자 길게 적었다.
“재판 결과를 예상할 수 있겠어?”
“벌금형에 그칠 거야. 피암메타 판사가 재판장을 맡을 테니까.”
“그걸 어떻게 알지?”
“출판 축하회 날 밤 피암메타 판사가 와 있는 걸 못 봤어?”
조반니는 도구를 바꿔 들더니 씩 웃으며 안구를 해부하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을 맡아 주겠다고 그녀가 네게 약속했나?”
“피암메타 판사는 그런 약속을 할 분이 아니지. 하지만 내게 신세를 진 것이 있어 분명 맡아 줄 거야.”
“신세 진 것이라니?”
“그런 게 있어.”
해부가 끝나자 조반니는 해부용 도구와 시신을 정리했다. 바치 병원에 가기 위해 함께 지하실을 나서는데 계단을 막 올라가던 레오나르도의 시선이 지하실 구석에 놓여 있는 탁자에 머물렀다. 조반니가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문을 열자 바깥의 햇빛이 비쳐들어 탁자에 올려진 그림들이 보였다.
주문받은 초상화 작업을 위한 작업대가 마련된 탁자 위에는 인물화가 여러 장 놓여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과 귀만 보이는 뒷모습, 턱을 괴고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 등 다양했는데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그림 속의 주인공을 알아본 레오나르도는 지하실에 들어올 때 자신이 잘못 보았던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자의 얼굴을 그리는 이유가 대체 뭐지?”
1층의 실내 정원으로 올라가 묻자 조반니는 이해하지 못한 척했다. 실은 그 그림으로 수음을 하고 있으면서 딱 잡아뗐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제6군단의 대위 말이다. 지하실 탁자 위에 그자의 얼굴 그림이 놓여 있는 걸 봤어.”
집을 나온 두 사람은 병원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골목 어귀에 화려한 가면을 쓰고 몸치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가면을 자랑하며 떠들어 대다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한 무리의 아이들도 정부 청사에서 나눠 주는 깃발을 들고 골목을 내달렸다.
“오늘 저녁에 중앙 광장에서 불꽃놀이가 열린대!”
엔초 또래로 보이는 한 아이가 외치자 다른 아이들이 구경을 가자며 떠들썩하게 외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반니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고 싶어서 그렸어. 바로 앞에서 얼굴을 보고 그릴 수 없어서 상상으로 그렸지만. 아름다운 걸 보면 그리고 싶어지는 게 예술가의 본능이지.”
* * *
“대위, 정말 괜찮겠나?”
“마차를 타는 게 낫겠어. 너무 위험해.”
“예, 대위님. 마차를 타십시오. 승마는 위험합니다. 혹여나 낙마하신다면 큰 부상을 입으실 겁니다.”
마구간에서 꺼낸 말들이 넓은 연병장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장교들이 하나둘 말에 오르고 사병들은 걸어서 중앙 광장까지 이동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남은 것은 로미오뿐이었는데 발레리아와 마르코, 갈리에누스는 한사코 그의 승마를 만류하고 있었다.
“걱정하실 정도로 위험하지 않습니다. 승마 시에는 말이 저 대신 눈이 되어 주는 데다 지금보다 시력이 온전할 때지만 사관 학교 시절에도 승마 훈련은 충분히 잘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승마 훈련이 아니잖나. 너무 위험해.”
“그래. 마차로 이동하는 게 자네에게 더 나을 거야.”
“걱정 마십시오. 훈련이 잘된 말이니 앞이 안 보이는 제게 도움을 줄 겁니다.”
“대위님, 승마는 정말로 위험…….”
“걱정 말게. 괜찮아.”
장교들은 말을 타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군인들 중 마차를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미오가 마차를 탈 경우 오직 그를 위해 마차를 끌 사병과 말 한 필, 그리고 마차 한 대가 필요했다.
발레리아와 마르코, 갈리에누스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으나 로미오는 그들의 생각만큼 승마가 자신에게 어렵거나 위험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사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익숙한 공간 내에서 말을 탔고 지금은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 나가야 했지만 오늘 탈 말은 훈련이 잘돼 있는 데다 자신은 지금까지 꾸준히 승마를 해 왔다. 말은 앞을 보지 못하는 기수에게 적응이 돼 있었고 오늘은 빠른 속도로 달릴 필요 없이 그저 말 등에 올라앉아 있으면 됐다.
“여의치 않다고 생각되면 말에서 내리겠습니다. 중위, 부탁하네.”
로미오는 세 사람의 지나친 걱정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손을 더듬어 안장을 잡았다. 발레리아와 마르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갈리에누스가 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를 당겨 주자 로미오는 받침대 안으로 발을 넣었다. 솟구치듯 몸을 들어 올린 로미오는 말 위에 올라앉아 익숙하게 고삐를 쥐고 자세를 잡았다.
“됐습니다.”
걱정하는 세 사람을 향해 웃어 보이니 발레리아와 마르코가 동시에 한숨을 쉬며 별수 없이 말 등에 올랐다. 갈리에누스는 말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로미오가 잘못 밟고 있거나 걸고 있지 않은지 그의 발 부분을 확인하고 자신도 말에 올랐다.
부대의 문이 열리자 한 무리의 군인들이 부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모두 멈춰 그들을 돌아보는 가운데 군인들은 중앙 광장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광장은 이미 축제 노랫소리로 시끌벅적했는데 공안국이 만들어 놓은 길 사이로 가두 행렬이 행진을 하며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며 사람들에게 꽃을 뿌리고 있었다. 거리 양쪽은 선술집에서 마시던 술을 그대로 들고 나와 흥겹게 춤을 추는 사람들로 요란스러웠다. 풍성하게 장식한 치마를 입은 여인들은 치마를 발로 차올리며 노래를 불렀고 남자들은 발장단을 하며 열성적으로 그 노래를 따라 했다.
축제의 날이 밝았노라, 축제의 밤이 오고 있노라!
가장 뜨거운 태양이 뜨는 황금의 도시 바치!
자유 위에 역사를 새긴 예술의 도시 바치!
축제의 밤이 부활하고 술과 춤이 함께하니
가두의 행렬 앞에 모두 나와
목청껏 소리 높여 노래하자!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남녀도 있었고 멀리 떨어져 환호를 하며 즐기기만 하는 이들도 있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의 층층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광장의 가두 행렬을 구경 중이었다. 축제에서 가면을 쓰는 것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얼굴에 염료를 발라 가장했는데 젊은이는 노인으로, 여자는 남자로, 어린아이들은 동물로 우스꽝스럽거나 재치 있게 꾸몄다.
행진을 하는 행렬의 뒤에는 백 명이 족히 넘는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말을 타고 있는 장교들이 열 명 가까이 됐는데 그들은 두 구역으로 나눠 광장을 에워싸듯 서서 사람들을 감시했다. 가두 행렬은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자들로만 이뤄져 있었지만 군인은 그들도 감시했다. 행진하는 이들이 뿌린 꽃은 군인들이 탄 말의 발굽 아래와 군화 바로 앞에 떨어졌는데 로미오가 타고 있는 말의 발아래에도 하얀 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축제에서 가면은 금지다! 당장 벗어라.”
장교 하나가 가면을 쓴 사내를 발견하고 거칠게 고함쳤다. 그의 고함 소리에 군인들의 행렬 근처에 서서 축제를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지목당한 사내는 동물 모양의 가면을 벗으며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투덜댔다.
“축제에 가면이 금지라니 어디 제대로 즐길 수나 있겠어?”
사내의 투덜거림에 웃고 떠들던 사람들 몇이 거들 듯이 투덜대며 말을 더했다.
“그러게 말이야. 이건 바치시의 전통이라고.”
“가면이 없으면 무슨 수로 마음껏 춤을 춘단 말이야? 평소에 체면 차리고 사는 자들이 축제를 맞아 마음껏 떠들고 욕을 하려면 가면이 필요한데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한담?”
“옳은 말이야. 어떻게 가면을 금지할 수가 있는지, 원.”
수런거리는 소리가 번지자 구경을 멈추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한목소리인 것은 아니었다.
“금지라잖나. 얼른 벗게! 이게 다 바치를 위한 일이야.”
“단테의 12인 놈들만 없었어도 우리가 이렇게 가면을 금지당할 일은 없었을 거야. 탓을 하려면 통령 각하가 아니라 그자들을 탓하는 것이 옳아.”
“각하께서도 다 우리를 위해 이런 방도를 마련한 게 아니겠어? 잔말 말고 군의 말을 따라!”
사람들의 쑥덕거림에 장교가 말에서 펄쩍 뛰어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통령 각하께서 내린 칙서를 보지 못했나? 가장행렬을 금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읍해 마지않을 일이건만 감히 각하의 명에 반기를 들다니.”
장교가 매서운 눈초리로 둘러보자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가두 행렬이 뿌리는 꽃이 여기저기 내려앉으며 축제의 여흥을 이어 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축제에 집중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장교는 다시 말에 올라 사람들을 감시했다.
그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말을 타고 있는 로미오는 천천히 광장의 중앙부로 이동했다. 말 등에 올라탄 상태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지만 그들의 얼굴을 볼 순 없었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발소리, 가두 행렬의 나팔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로미오가 할 수 있는 것은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사이로 어떠한 불순하고 은밀한 소리가 들린다면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거기! 가면을 벗어라. 축제에서 가면은 금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짜 보석과 깃털로 장식된 가면을 쓰고 몰려나와 춤을 췄다.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은 가면을 벗으라는 말을 무시하고 저들끼리 춤을 추며 바닥에 술을 뿌려 댔다.
“가면을 벗으라는 말이 들리지 않나?”
군인들이 다가가려 했지만 음악 소리가 커지며 사람들의 함성 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사람들은 때를 놓칠 수 없다는 것처럼 일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짝지은 이들이 손의 손을 잡고 가운데로 모여들었다가 퍼지며 춤을 추자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있던 군인들이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뒤로 물러서라! 저리 비켜!”
급기야 한 군인이 춤추던 어느 나이 든 사내의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사내의 손을 잡고 있던 여인이 바닥으로 넘어지며 그 여인과 손을 잡고 있던 이들도 우르르 쓰러졌다. 그러자 멀리 떨어져 구경 중이던 사람들이 몰려와 군인의 팔을 잡았다.
“축제에서 이게 무슨 짓이오?”
“가면을 쓰는 것은 통령 각하의 명에 반기를 드는 행위다! 당장 벗지 않으면 모두 구금할 것이다!”
“가면이 대체 뭐가 그리 문제라고 이러는 것이오? 통령께서는 이런 날 광장에 한 번이라도 나와 보셨소?”
“이건 바치 시민들의 축제요! 시민들의 축제는 그 누구도 망칠 수 없어!”
“옳소! 맞는 말이오!”
소란이 벌어지니 사람들이 점점 더 몰려들었다. 몸싸움으로 번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갈리에누스가 말에서 내렸다. 로미오는 시민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서지 못하고 갈리에누스가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소리만을 들었다.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십시오.”
사람들 틈으로 들어간 갈리에누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소란이 점점 더 커지자 발레리아의 목소리와 마르코의 목소리도 들렸다. 소란이 먼 곳까지 번진 것인지 웅성대는 소리가 반대편에서도 들려왔다. 말 탄 장교 몇이 뛰어내려 그들에게 다가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도 통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로미오 역시 말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내리는 과정에서 바닥이 있는 높이를 가늠하지 못해 발을 잘못 디뎠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몸이 뒤로 기울어진 로미오는 어깨를 부딪치며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머리에서는 모자가 벗겨져 나뒹굴었고 장갑을 낀 손은 돌바닥에 미끄러졌다. 시민들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중대의 소위 하나가 그 모습을 보고 얼른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장교가 말에서 떨어지는 광경을 본 사람들은 넘어진 로미오를 힐끔댔고 바닥으로 넘어진 것에 낭패감을 느낀 로미오는 소위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며 귀가 붉어졌다. 넘어지면서 부딪친 어깨가 욱신댔지만 통증을 느끼고 있을 새가 없었다.
말에서 떨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사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수도 없이 승마를 했지만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승마는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단언하며 말을 탔는데 말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모자를…….”
로미오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주워 주겠나?”
자신을 일으켜 세워 준 소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로미오는 모자가 떨어진 방향도 몰랐다.
“여기 있습니다.”
소위는 바닥에 뒹구는 모자를 주워 공손하게 건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말에 올라탔다. 모자를 쓴 로미오는 자신이 모자를 제대로 썼는지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고 흐트러진 군복 앞섶과 소매를 정리했다. 귀 끝의 붉은 기가 잦아들자 낭패감이 가시며 낯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 * *
“여기 앉으십시오, 교수님.”
티모테오의 안내에 조반니는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병원에서 나와 곧바로 공안국으로 온 조반니는 이 추가 조사를 끝으로 더 이상 다른 조사는 받지 않을 예정이었다.
“이번 일로 심려가 깊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일이 한 번쯤 생길 수도 있지요.”
재판을 받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 한 번쯤이라는 말은 맞지 않았으나 조반니는 손을 깍지 껴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조사를 당하는 게 아니라 하는 사람 같은 태도로 티모테오를 대했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를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티모테오를 보조하기 위해 그의 옆에 젊은 여성 간부가 한 명 서 있었는데 조반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려 미소 지었다. 그러자 간부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시신을 인계받으며 매매 업자에게 준 돈이 40가토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시신을 인계받은 장소가 살라티코 거리 2번가에 있는 붉은 차양 술집의 뒷골목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해부한 시신이 이번에 출판하신 해부학서에 쓰인 것이 사실입니까?”
“네. 골반과 다리뼈의 골격 구조를 그리기 위한 해부학 자료로 쓰였습니다. 해부학서의 쉰여섯 번째 장에서부터 아흔네 번째 장에 걸쳐 시신의 해부도가 나와 있습니다.”
“매매 업자가 교수님께 적법하게 허가를 받은 시신이라고 설명하며 인계한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시신 주인의 가족들의 동의를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시신은 자루에 담아 댁으로 옮기셨다고 하셨죠?”
“네.”
“인계받은 당일 시신을 처분하신 게 맞습니까?”
조반니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선호하는 계절에 대한 대답을 하는 사람 같았다.
“네, 맞습니다. 제가 인계받을 때 시신은 부패 후 건조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기 때문에 해부도를 그리기에 앞서 시신을 따뜻한 물에 불려 뼈를 발라내 표백시켰습니다. 시신을 인계받은 날 그 모든 것들이 이뤄졌습니다.”
조반니는 티모테오의 옆에 선 간부가 인상을 희미하게 찡그리는 것을 봤다. 떨떠름한 표정이 된 것은 티모테오도 마찬가지였다. 서류를 넘기는 그는 거북스러운 듯 뺨을 꿈틀댔다.
“구역질 나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다른 말로 설명해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하군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매매 업자에게서 시신을 인계받았던 과정을 상세히 재설명해 주십시오.”
“그날 매매 업자와 살라티코 거리의 술집 뒷골목에서 자정 무렵 만나 돈을 건네고 시신을 받았습니다. 시신은 흰 천에 덮여 수레에 담겨 있었는데 매매 업자가 말하길 죽은 지 수일이 지나 발견된 데다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길 원치 않는다더군요. 시신은 젊은 남성의 것으로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상처는 몸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체온이 급격하게 내려감에 따라 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시신은 준비해 간 자루에 담아 자루 입구를 묶은 뒤 등에 이고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시신의 외양에 특별한 점은 없다고 하셨죠? 가령, 살해당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습니까?”
“네, 없어 보였습니다.”
몇 차례 더 질문이 이어졌지만 조반니는 앞서 두 차례의 조사에서 대답한 것과 동일한 답을 내놓았다. 조사는 곧 끝이 났고 티모테오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서류를 덮었다.
“예, 됐습니다. 조사는 이것으로 끝낼 테니 그만 가셔도 좋습니다. 재판 통고서가 댁으로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 다시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궁금하신 것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경사님.”
“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교수님께 나가는 길을 안내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조반니는 간부의 안내를 받아 조사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걸으며 작게 휘파람을 불자 앞서가던 간부가 고개를 슬쩍 뒤를 돌아봤다. 간부가 공안국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주자 조반니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상냥하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간부는 표정을 관리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말아 넣더니 조심히 돌아가시라고 얘기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조반니는 하숙집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사람들 대부분이 중앙 광장에서 열리는 축제를 구경하러 가 해가 진 저녁임에도 길거리는 한산했다. 중앙 광장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로사티 3번가에 도착한 조반니는 하숙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라나 부인이 사는 1층의 불이 꺼져 있어 인사 없이 계단을 올라간 그는 3층으로 올라가려다가 2층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엔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에트로 형이야?
“난 피에트로가 아닌데.”
문가에 입을 대고 말하자 문틈 너머에서 귀여운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스포르차 선생님.”
엔초가 문고리에 매달려 인사하자 조반니는 장난을 칠 의도로 눈가에 손그림자를 만들어 자신의 눈높이에서 주위를 둘러봤다.
“문이 열렸는데 엔초는 어디에 있는 거지? 안 보이는걸?”
조반니가 자신을 찾는 척하자 엔초는 양팔을 들어 조반니의 얼굴 앞에 흔들었다.
“아래예요, 아래! 여기요! 여기 있어요.”
조반니는 깜짝 놀란 것처럼 손을 내렸다.
“미안하구나. 너무 작아서 보지 못했어.”
“저, 키가 계속 크고 있어요. 아홉 살이 되면 지금보다 커져서 선생님이 저를 못 볼 일은 없을 거예요. 분명 키가 이만큼 자랄 거예요.”
엔초는 머리 위로 손을 들어 키를 만들며 씩씩하게 말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어린 시절을 잠깐 상상하며 엔초의 머리를 헤집다시피 쓰다듬었다. 엔초가 조금이라도 로미오와 다르게 생겼었다면 먼지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사람 좋은 척하며 물었다.
“혼자 있었어?”
“네, 피에트로 형이 아직 오지 않았거든요. 선생님께서는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에요?”
“그래. 그런데 축제 구경을 가지 않니? 집에 있을 거야?”
“같이 구경 갈 사람이 없어요. 피에트로 형이 저와 같이 가 주지 않을 거라고 했거든요.”
“피에트로가 축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나 보구나.”
“네… 피에트로 형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해맑게 웃던 엔초는 차츰 표정이 시무룩해지더니 말을 마치고 나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조반니는 엔초가 많이 다치거나 아프면 로미오가 매일 집에 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계단을 돌아봤다. 계단 머리에서 밀어 가벼운 부상을 입히기 위해선 팔의 골절을 노려야 했다.
“나와 같이 구경 가겠어? 저녁은 축제 구경이 끝나고 돌아와서 피에트로와 함께 먹자.”
조반니는 축제 구경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엔초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이롭게 작용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예상대로 엔초는 눈을 반짝거리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정말요? 정말 같이 가 주시는 거예요?”
“그래.”
“네! 그래요, 가요! 얼른 가요!”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손뼉을 친 엔초는 들뜬 얼굴로 냉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올게요!”
“나도 준비가 필요하니 잠시 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금방이면 된단다.”
“네!”
엔초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가 실내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로미오가 피에트로 몰래 주고 간 돈도 서랍에서 꺼내 챙겼다.
“선생님, 저는 준비를 다 했어요!”
옷을 다 갈아입고 나와 3층을 향해 외치자 위층에서 대답이 들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엔초는 계단 층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행복한 얼굴로 발을 굴렀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지자 3층으로 올라갔고 문이 열려 있어 조반니의 집 안을 들여다봤다.
조반니의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그는 벽에 걸린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은 아주 비싸 집에 걸어 놓거나 갖고 있을 수 없었는데 조반니의 방 벽에 걸린 거울은 제법 컸다.
“다 됐다.”
엔초가 방문 앞으로 다가가니 조반니가 신발을 신으며 얘기했다. 주위에 어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 엔초에게 조반니는 신기한 존재였다. 그는 로미오보다도 나이가 많았고 키도 더 컸으며 힘도 더 셌다. 손도 얼마나 큰지 사탕 병에 한 손을 넣으면 사탕을 열 개, 아니, 열다섯 개쯤 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도 조반니만큼 몸이 커지고 싶었다.
“그거 아세요? 로미오 형이 붉은색을 아주 잘 알아봐요. 다른 색보다 구분을 더 잘해요.”
“알고 있단다. 그래서 대위님을 위해 되도록 붉은색 옷을 입으려고 하지. 붉은 옷을 입으면 대위님께서 언제든 쉽게 나를 알아보실 테니까.”
“선생님께서도 로미오 형이 선생님을 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저도 그래요. 로미오 형이 저를 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로미오 형이 제 턱에 우유가 묻으면 닦아 주고 옷의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으면 다시 채워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지팡이 없이 걷고 아주 빠르게 달릴 수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로미오 형이 그러는데 꿈속에서는 볼 수 있대요. 꿈을 꿀 때는 눈이 보인대요.”
“그것참 재미있는 이야기구나. 대위님께서 꿈에서 나를 본 적은 없다고 하셔?”
“로미오 형은 꿈에서 항상 옛날로 돌아간다고 했어요. 사관 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돌아간대요. 그래서 제가 아기였을 때 모습도 본대요. 선생님을 꿈에서 봤다고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아쉽구나.”
엔초는 집 안을 둘러보다가 탁자 위에 올려진 다섯 장의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 말미에 보낸 이가 적혀 있었는데 보낸 것은 사람이 아니라 대학교였다. ‘스포르차 교수’의 앞으로 도착한 다섯 장의 편지는 각기 다른 대학교에서 보낸 것이었다. 제일 위에 놓여 있는 편지는 로마니엘로 대학에서 보내온 것이었는데 조반니를 의과대학의 교수로 모시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와…….”
편지에는 조반니가 초빙을 수락할 경우 한 해 동안 받게 될 교수 봉급의 액수도 적혀 있었다. 아주 큰 돈이라 그 돈으로 사탕을 몇 개나 사 먹을 수 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아르고 과자점에 파는 모든 과자를 전부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리기 때문에 남의 편지를 마음대로 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는 엔초는 다른 대학에서 보낸 편지도 하나씩 읽어 보다가 흥미가 떨어지자 집 안을 둘러봤다.
집 안은 깔끔했는데 깨진 접시를 버려 놓은 바구니가 눈에 띄었다. 다가가 내려다보니 바구니 안에 담긴 짚 꾸러미가 눈길을 끌었다. 돌멩이 같은 것을 여러 개 담을 수 있게 짚을 꼬아 만든 꾸러미는 산산조각 난 그릇 틈에 버려져 있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처럼 깨끗한 게 버려져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조반니가 방에서 나왔다.
“아주 멋있어요! 붉은색이 선생님께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조반니의 옷차림을 본 엔초는 활짝 웃으며 칭찬했다.
“이제 가자꾸나.”
집을 나온 두 사람은 광장으로 향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조반니는 뒤를 몇 번 돌아보았다. 누군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길 주변을 둘러본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봤다. 반갑게 인사할 만한 누군가를 찾기보다는 의심하며 주시하는 것 같은 눈빛이라 엔초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야.”
조반니는 미행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며 길 전체를 넓게 둘러봤다. 뒤돌아 먼 곳까지 본 후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을 살피며 걸었다.
광장에 가까워 올 무렵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 다섯 대가 저만치 줄지어 오는 게 보였다. 광장의 가두 행렬에 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는 보기 드물었기 때문에 엔초는 고개를 빼고 마차를 구경했다. 그런데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젊은 사내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조반니! 마침 네 집에 가는 길이었어!”
사내가 마차를 멈추라고 지시하자 앞서가던 마부가 마차를 세웠다. 다섯 대의 마차가 일제히 멈춰 서자 사내가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사내는 휘황찬란한 보석 반지까지 끼고 있었다. 외국의 귀족이 아닌 루바노 사람으로 보였고 고귀한 신분이기보다는 상인처럼 보였다. 마차를 끄는 말도 금으로 만든 말편자를 달고 있는 데다 좋은 것만 먹여 키운 것처럼 갈기에서 윤이 흘렀다.
사내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한 엔초가 조반니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피식 웃었다.
“휴양차 가는 게 아니라더니 먹고 마시며 논 얼굴이군, 줄리오. 언제 돌아온 거야?”
“오늘 새벽에 국경을 넘었어. 축제일에 맞출 겸 해서 쉬지 않고 달려왔지.”
오랜만에 만난 것인지 사내는 반가움을 금치 못하며 조반니는 어깨를 툭 쳤다.
“그것보다 너, 며칠 전에 출판 축하회를 열었다지?”
참석하지 못한 것을 사과할 것 같던 사내는 되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발 해부학에는 관심 끊고 다른 것에 취미를 붙여 봐. 죽은 자들의 몸속을 들여다보는 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환자라면 이제 병원에서 실컷 보게 될 거잖아.”
“죽은 자들의 세계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괴악하게 들리겠지만 시체에서 나는 냄새는 날 즐겁게 해. 그리고 난 의사이자 해부학자라고. 해부학에 관한 관심을 끊을 수 있을 리가 있겠어?”
“정상이 아니군. 어쨌든 출판을 축하해. 축하회에 참석하지 못해 아쉬움을 덜기 위한 선물을 가져왔어. 가진 것이 돈뿐인 친구를 뒀으니 선물이나 두둑하게 받아 둬.”
마차 안에는 하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어깨 너머로 선물 꾸러미며 상자가 보였다. 그 뒤의 마차에도 창문 너머로 보일 정도로 뭔가가 잔뜩 실려 있었다.
“조금 전 내가 말한 그 선물을 조반니의 집에 가져다 둬라. 깨지지 않게 조심히 모셔다 놓거라. 나는 조반니와 광장에서 축제를 구경하다가 돌아가야겠어.”
“예, 도련님. 주인님께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요.”
마차 문이 닫히자 다섯 대의 마차가 다시 줄지어 지나갔다. 사내는 한산한 밤거리를 둘러보며 바치의 냄새를 맡으려는 듯 코 속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역시 고향이 최고야.”
사내는 루바노에서 제일가는 갑부인 포르치오 가문의 외동아들인 줄리오 포르치오였다. 가문의 주인이자 그의 아버지인 에도아르도 포르치오는 현재 루바노 공화국의 주요 위원회 중 하나인 14인 위원회의 한 사람이었고, 그의 여동생인 줄리오의 고모는 전 통령의 5인의 보좌관 중 한 명이었으며, 브누아 사람인 줄리오의 조모는 브누아 왕국에서 왕실의 재무관으로 지낸 바 있었고, 줄리오의 숙부는 물려받은 재산을 상속 후 5년 만에 열 배로 불려 젊은 시절부터 이름을 날린 바 있었으니 포르치오 가문은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문의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될 유일한 후계자인 줄리오는 가족의 내력을 그대로 물려받아 상인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는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바치시에서 가장 호화롭고 아름다운 저택을 다섯 채 꼽는다고 할 때 포르치오 가문은 그중 한 곳에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포르치오 가문이 죽을 때까지 다 쓰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나저나 조반니 너…… 응? 이 아이는 누구지? 언제부터 있었어?”
줄리오는 말을 하다 말고 조반니의 옆에 서 있는 엔초를 발견했다. 그러자 조반니가 엔초의 머리에 손을 얹고 설명했다.
“최근에 3층 저택을 두고 로사티 3번가로 이사를 했어. 관리인에게 저택을 맡겼는데 처분이 늦어져 두 채를 모두 사용하고 있지. 이 아이는 내가 세 들어 살고 있는 하숙집 아래층에 사는 이웃이야.”
조반니가 소개하자 엔초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저는 엔초 알피에리라고 해요. 여덟 살이고 조각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우리 형은 제6군단의 대위고 이름은 로미오 알피에리예요.”
“제6군단?”
줄리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웃었다.
“꼭 그림 속에 나올 것처럼 생겼구나. 조반니와 함께 축제를 구경하러 가는 길인가 보지? 같이 가면 되겠군.”
광장까지는 멀지 않았는데 도착하고 보니 어릿광대로 분장한 곡예사들이 곡예를 하고 있었다. 낮보다 더 화려하게 불을 밝힌 광장은 술 취한 사람들의 환호 소리로 시끄러웠다. 서너 개의 공을 동시에 던져 받아 내며 줄 위를 걷는 곡예사들 외에도 야외 매대에서 인형극이 시연 중이었기 때문에 구경거리는 많았다. 해가 저문 광장 여기저기에는 횃불을 들고 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엔초는 사람들의 뒤편에 서서 말 탄 장교들의 얼굴을 살폈다. 저 중에 로미오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발뒤꿈치를 들고 지켜보고 있으니 장교들이 천천히 광장 변두리를 돌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군복을 입은 장교들 중 로미오를 찾기 위해 열심히 그들을 보던 엔초는 로미오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형!”
로미오는 느리게 말을 몰며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엔초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쳐 갔다. 사람들에게 가로막힌 엔초는 팔을 크게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형! 나 여기 있어! 여기야!”
그러나 로미오는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조반니는 미행하는 자가 따라붙지 않았을까 주변을 둘러본 뒤 말을 타고 있는 로미오를 보며 잠시 더러운 상상을 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대로 지나가 버리자 엔초의 어깨를 다독였다.
“주위가 시끄러워서 대위님께서 듣지 못하시는 것 같아.”
“치…….”
엔초가 풀이 죽은 사이 곁에 있던 줄리오가 엔초와 로미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놀랐다.
“조금 전 지나간 그 장교가 형제인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군.”
말 위에 올라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 로미오는 주위의 소음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말의 흔들림이나 손에 쥔 고삐의 촉감에도 예리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밤이 되자 광장에는 사람들이 낮보다 세 배가량 많게 느껴졌다. 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는데 사병들은 물론 장교의 수도 늘어 있었다.
“골목을 한 번 돌고 오지.”
광장 변두리에 다다른 마르코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발레리아가 고삐를 당겨 말을 돌리며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내가 저쪽을 맡는 게 좋을 것 같군. 대위, 저기 말이야.”
발레리아가 방향을 알 수 있도록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자 로미오가 소리가 들리는 쪽을 봤다.
“지금 보고 있는 방향에 살라티코 거리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고 우리는 지금 광장이 정면에 보이는 방향에 서 있어.”
“그러면 저쪽이 몰베나 거리입니까?”
로미오가 손을 들어 다른 방향을 가리키자 발레리아가 대답했다.
“맞아.”
“그러면 제가 몰베나 거리 1번가에서부터 5번가까지 맡도록 하겠습니다.”
“길을 헤매지 않게 조심하도록 해.”
“중위와 함께 가지 않아도 되겠나?”
로미오는 즉시 거절하지 못하고 낮에 말에서 떨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제 이런 일에 적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말을 삼키게 됐다. 그러나 일단은 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갈라진 세 사람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로미오는 말발굽이 땅에 닿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을 몰았는데 말은 시야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없어 느긋하게 몰베나 거리 입구로 들어섰다.
발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는 빠른 걸음과 느린 걸음으로 구분되었다. 아이의 발소리인 것처럼 들리는 소리는 가벼웠고 걸음이 느리고 무거운 것은 노인의 발소리로 짐작됐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와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발소리도 구분됐다.
사람들의 기척과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갈 생각으로 말의 방향을 틀어 걷던 로미오는 너무 깊은 골목 끝까지 들어왔음을 깨닫고 말을 세웠다. 주위에 발소리는커녕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곳 지리에 익숙한데다 말을 타고 있어 길을 헤매지 않을 거라고 믿었는데 너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버린 것 같았다.
로사티 3번가의 포목점 골목이 생각나 일순 몸이 긴장됐지만 자신이 어느 골목에 서 있는지 알기 위해 말에서 내려 건물 외벽을 더듬었다. 아직 1번가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고삐를 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벽을 더듬으며 걷던 로미오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것은 손끝에 종이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축제 전날인 바로 어제 공안국은 이 거리를 단속했다. 단속 결과 분명 발견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벽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손으로 종이 표면을 더듬어 본 로미오는 종이를 떼어 냈다.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눈앞으로 가져가 자세히 보곤 손가락을 벌려 종이의 크기를 쟀다. 종이의 냄새를 맡고 손바닥으로 종이 전체를 더듬는데 익숙함이 느껴졌다. 귀퉁이 끝에는 누군가가 방금 전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것 같은 미묘한 온기도 스며 있었다.
이것은 단테의 12인의 벽보였다. 그리고 아마 이 벽보를 붙인 자는 아직 골목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종이를 구겨 쥔 로미오는 지체하지 않고 말에 올랐다.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멀리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말을 멈춘 로미오는 말이 푸르르 울지 않도록 목을 쓸어내리며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지며 점차 선명하게 들렸다.
상대가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이라는 생각에 로미오는 그쪽을 주시했다.
뚜벅, 뚜벅… 뚜벅…… 뚝.
이어지던 발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쓰다듬는 손길을 받고 있던 말이 전방에 누군가가 나타났음을 알리듯 고개를 들고 앞을 봤다. 좌우로 흔들던 긴 꼬리의 움직임도 멎었다.
허리를 펴며 말에게서 손을 뗀 로미오는 발소리의 주인이 자신을 정면으로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봤다. 좁은 골목 안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제6군단이다. 신원을 밝혀라.”
침묵이 흐르더니 다음 순간 상대가 재빨리 몸을 돌려 골목 끝으로 내달렸다. 다급한 발소리에 로미오는 재빨리 말 등을 걷어찼다.
“하아!”
로미오의 신호를 알아들은 말은 그대로 속력을 높여 골목을 질주했다. 거친 말발굽 소리 틈으로 상대의 발소리가 달아나고 있는 게 들렸다. 로미오는 몸을 낮추고 말의 몸에 다리를 밀착시킨 상태로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머리카락이 뒤로 휘날리며 옆구리에 찬 칼이 허벅지에 부딪혀 흔들렸다.
“거기 서라!”
고함을 쳤으나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뛰는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로미오는 발소리의 주인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뛰는 것을 느끼고 고삐를 잡아당겨 말의 방향을 바꿨다. 골목을 빠져나가 넓은 거리로 나가자 사람들이 다급하게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에구머니나!”
“이런 좁은 골목에서, 저, 저것, 참……!”
“속도를 늦추시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보이지 않소?”
“조심하세요! 거기, 얼른 피해요!”
사람들의 외침과 욕지거리를 뒤로한 로미오는 발소리를 뒤쫓아 몰베나 거리를 내달렸다. 앞서가던 급박한 발소리가 오른편으로 꺾어 사라지자 말을 오른쪽으로 틀어 골목으로 추정되는 좁은 길 안으로 들어섰다. 멀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발소리는 도망가지 않고 열 발자국도 되지 않은 거리에 멈춰 있었다. 사내의 것으로 추측되는 가쁜 숨소리도 들렸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더 이상 달아날 곳은 없다. 저항하지 마라.”
줄달음을 쳤던 상대의 숨소리는 가빴다. 말에서 뛰어내린 로미오는 검을 빼 들어 겨누며 상대가 내는 숨소리와 옷자락의 스침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골목에서 뭘 하고 있었지?”
“…….”
“대답해라.”
상대가 신발 밑창에 힘을 줘 바닥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발목이 틀어질 때 나는 소리였다. 몸의 방향을 돌리고 있는 것인가?
검을 고쳐 잡으며 자세를 잡는데 골목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공안국이다! 물러나라! 빠른 발소리와 함께 다섯 명 이상인 듯한 공안국 간부들이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광장 변두리를 순찰하던 중 몰베나 거리에서 벌어진 소란을 듣고 달려온 그들은 제6군단의 장교인 로미오를 보고 주춤하더니 검 끝이 향해 있는 상대를 발견하고 골목 입구를 포위했다.
“골목을 샅샅이 수색해라.”
로미오가 손에 든 벽보를 건네며 지시하자 간부 중 하나가 얼른 받아 들었다. 바로 어제 단속을 돌았던 그들이었기에 벽보가 발견된 이 상황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서로 눈치를 봤다.
“골목에서 벽보를 발견한 직후 저자와 마주쳤고 신원을 밝히라는 명령에 달아나 이곳까지 쫓아온 것이다. 저자가 아닌 다른 자가 벽보를 붙였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되 축제일을 전후로 이 근방에서 저자를 본 이가 있는지 탐문해 봐라. 벽보를 붙이기 적당한 장소를 고르기 위해 사전에 몰베나 거리를 물색했을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지난번 벽보 순찰 때 티모테오와 함께 있었던 간부 하나가 로미오를 알아봤다. 티모테오에게 들어 로미오가 시력이 낮다는 것을 안 그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저자의 가면부터 벗기도록 하겠습니다.”
검집에 검을 넣던 로미오는 예상 못 한 이야기에 그를 돌아봤다. 상대가 가면을 쓰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맨 얼굴인 자와 대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해라.”
간부들이 다가가자 사내가 도망치려는 것처럼 골목 끝으로 물러섰다. 로미오가 말고삐를 잡고 기다리니 간부들이 사내를 붙잡는 소리와 함께 가면으로 추정되는 딱딱한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미오는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던 간부 하나가 헛숨을 들이켜는 것을 들었다.
“난 벽보를 붙이지 않았어요! 이거 놔요, 난 아니라고요!”
이유를 몰라 그를 돌아본 로미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 * *
“살라티코 거리에 있는 어느 재단사의 양복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소년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열다섯 살이고 부모나 형제 없이 10년째 고아원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고아원과 몰베나 거리는 말로 대위님과 무소 대위님이 수색하고 계십니다. 추가로 발견된 벽보는 아직 없으며 골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행인 둘을 발견해 조사했지만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고아원 아이들을 상대로 조사 중이나 워낙 많은 수의 아이들이 소년과 같은 방을 써 조사에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로미오는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다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뭔가에 골몰한 듯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소년을 체포해 부대로 연행해 왔기 때문에 직접 취조를 맡게 됐지만 로미오는 상대가 어린 소년이라는 사실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추격 끝에 잡은 것이 어린 소년이라는 사실이 심기를 거슬렀다.
“…….”
로미오가 지팡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갈리에누스가 그를 뒤따라 집무실을 나갔다.
도착한 곳은 취조실이었다.
“따라 들어오게, 중위.”
“예.”
갈리에누스가 문을 두드리자 철문의 걸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작은 나무 탁자 앞에 손이 묶인 소년이 앉아 있었는데 두 명의 군인이 소년의 옆에 서서 로미오를 향해 경례했다. 탁자 위에는 소년에게서 압수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는데 주머니에 든 돈 몇 푼과 단테의 12인의 선전 벽보 한 뭉치가 그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로미오는 탁자에 지팡이를 걸치고 의자에 앉았다. 소년은 불안한 표정으로 로미오와 갈리에누스를 번갈아 쳐다봤는데 부대로 연행되어 온 이후 두 시간 넘게 갇혀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등장에 크게 겁을 먹은 상태였다. 이곳은 안락하지도 따스하지도 않은 취조실이었고 사방에는 전부 군인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축제 기간 동안 가면이 금지라는 것을 몰랐나? 왜 가면을 쓰고 있었지?”
마주 앉은 로미오가 묻자 소년은 고개를 떨궜다. 입을 열지 않으려고 머리를 깊이 숙이더니 말끝을 떨며 이야기했다.
“가, 가, 가면을 쓴 게 그렇게 크, 큰 잘못은 아니잖아요…….”
로미오는 정면에 시선을 뒀다. 소년의 목소리에서는 경계심보다 불안함과 긴장이 느껴졌다.
“신원을 밝히라는 말에 그 자리에서 이름을 밝혔더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거다. 멈추라는 말을 듣고도 도망간 이유가 뭐지?”
“그건…….”
소년이 대답하지 못하자 로미오는 사이를 둬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너는 인적이 드문 골목을 걷고 있었고 그 골목에서는 단테의 12인의 벽보가 발견됐다. 네가 벽보와 무관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테냐?”
“부, 부탁을 받았어요! 벽보를 대신 붙여 달라는 부탁이요! 난 글을 읽을 줄 몰라요. 배운 적이 없어요. 벽보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몰랐지만 돈을 받고 부탁을 받았기에 붙인 거예요! 그 벽보가 그런… 벽보인 줄 알았다면 받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도망갔던 건 무서워서 그랬던 거예요. 아이들 사이에서 제6군단에 잡혀 들어가면 죽어서 나온다는 소문이 돌아요. 마주쳐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해서 도망갔던 거예요. 겁이 나서…….”
소년은 ‘단테의 12인’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거짓말일 가능성을 고려한 로미오는 미동 없이 소년을 바라봤다.
“그 거리는 공안국이 바로 어제 단속한 거리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중앙 광장에는 오늘 낮부터 군대가 진을 치고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적고 군인들 또한 중앙 광장에 모여 있는 이런 때에 으슥한 골목에 내용조차 모르는 벽보를 부탁을 받고 붙였다니,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여덟 살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그 벽보의 내용을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냐는 말이다.”
“돈이 필요해서 그랬어요!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붙였어요. 축제가 있기 엿새 전에 그자가 내게 축제가 있는 날 저녁에 몰베나 거리에 벽보를 붙여 달라고 얘기하며 돈을 줬어요.”
“그자가 누구지?”
“몰라요. 얼굴은 보지 못하고 부탁만 받아서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이름 같은 거 못 들었어요. 나이는 물론 사는 곳도 몰라요…….”
“가면을 쓴 것도 그자가 시킨 것인가?”
“그건 아니에요. 가면은 제가 쓰고 싶어서 쓴 거예요. 호, 혹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자가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돈을 주면서 벽보를 붙이면 나머지를 더 주겠다고 했어요. 내가 벽보를 정말로 붙이는지 확인한 뒤에 약속한 장소에 돈을 가져다 놓는다고 했어요. 믿지 못하겠다면 그 장소로 가서 정말로 돈이 있는지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에요!”
소년은 울상이 돼 억울함을 토로했다. 공포에 질려 있어 얼굴빛은 사색이었고 로미오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연신 눈을 피했지만 결백을 증명하려는 마음에 목소리가 커졌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 말해라.”
“몰베나 거리 5번가에 있는 도매상점의 뒷골목이에요. 그날 팔고 남은 음식들을 버리는 쓰레기통이 있는데 그 아래에 돈을 놔둘 거라고 했어요. 오늘 벽보를 붙이고 밤늦게 거기 들러 돈을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물증이 나오지 않는 이상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로미오는 갈리에누스에게 지시했다.
“확인해 봐라.”
“예, 대위님.”
갈리에누스가 취조실을 나가자 로미오는 다시 소년을 마주 봤다.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는 지금까지 체포된 단테의 12인의 연루자들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축제 날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광장의 행렬을 구경해야 할 어린 소년이 단테의 12인의 사상에 감화된 것이었다.
이 나라의 무엇이 소년에게 국가를 전복시킬 만한 무정부주의 사상을 주입시켰는지 묻는다면 답은 하나였다. 가난이었다.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로미오 자신은 그런 인간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했다. 이 소년은 이제 겨우 열다섯, 피에트로보다 고작 세 살이 적었고 자신은 가난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은 군에 몸담고 있었으며 이 소년은 국가 권력에 위배되는 불온한 사상을 가진 집단의 일원일 수 있었다.
“벽보를 붙이기 전에 받은 돈은 어디에 있지? 이미 다 써 버렸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제가 지내고 있는 고아원의 침대 아래에 뒀어요. 큰돈이었기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게 그곳에 뒀어요. 축제 마지막 날 광장에서 오래된 물건을 파는 경매가 열릴 때 필요한 걸 사기 위해 아껴 뒀어요.”
“그 돈이 전부 얼마지?”
“……40바소요. 벽보를 붙이고 난 후에 받기로 한 돈은 30바소예요.”
소년의 얼굴을 응시하던 로미오는 일부러 이마를 찌푸렸다.
“고작 70바소를 위해 얼굴도 모르는 자에게 부탁을 받고 그런 짓을 했다는 이야기군.”
로미오의 어조에서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자 소년은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외쳤다.
“믿어 주세요, 정말이에요!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벽보를 붙인 건 잘못이지만 전 정말로 단테의 12인이니 뭐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70바소에 그런 위험한 짓을 할 만큼 사정이 궁했던 것이 아니라 사정이 궁하니 그들의 사상에 감화된 게 아니냐? 궁핍한 삶을 사는 네게 그들의 사상이 답이 되어 줄 거라고 믿었을 테니 말이다.”
“난 그런 거 몰라요! 단지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하니까… 고아원에서 지내도 배를 곯는 날이 많아요. 양복점에서 심부름 일을 해 봐야 몇 푼 벌지도 못해요. 돈을 받으면 필요한 것들을 살 생각이었어요. 사상이니 뭐니 그런 거 잘 몰라요!”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리자 군인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로미오에게 경례를 해 보인 뒤 고아원에서 압수한 소년의 소지품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낡고 해진 옷 몇 벌과 신발 두 켤레, 그리고 유품으로 보이는 목걸이 시계, 돈이 든 천 주머니가 전부였다.
“재단사에게 확인한 결과 이 소년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간단한 단어조차 쓰지 못해 잡일만 한다고 합니다. 손님이 전하고 간 짧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재단비 지불 문제를 일으킨 적도 있다고 합니다.”
군인은 로미오가 볼 수 있도록 탁자 위에 올려진 소지품들을 헤치려다 그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손을 바로 했다.
“고아원에서 압수한 소지품은 옷과 신발, 가방, 시계, 그리고 동전이 든 주머니가 전부입니다. 특이한 점은 동전이 든 주머니가 침대 밑에서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고아원 원장이 말하기로 고아원 아이들에게는 큰돈이기에 훔친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고 합니다.”
“주머니 속에 든 액수가 얼마지?”
“40바소입니다.”
소년이 간절한 표정으로 군인을 바라보는데 취조실 너머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레리아의 중대 소속 소위 하나가 급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고아원 주변을 탐문하고 있어야 할 그였다.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그의 상관인 발레리아에게 알릴 일인데 무슨 일인지 급하게 전할 말이 있어 온 것처럼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 대위님…….”
로미오는 소위가 주저한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살라티코 거리의 어느 술집에서 수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청년 둘을 발견해 현장에서 체포했다고 합니다. 두 명 중 한 명은 도주해 추적 중이고 나머지 한 명은 부대로 연행해 오고 있는데, 그것이…….”
소위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머뭇대며 말을 멈췄다.
“계속해라, 소위.”
로미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지만 소위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로미오가 무례하다고 느끼기 바로 직전까지 말을 아끼더니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붙잡힌 두 명 중 하나가…….”
뜸을 들이는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군인들이 소위를 쳐다봤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로미오도 마찬가지였다.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이었든 간에 소위는 분명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곳으로 왔을 것인데 망설이는 태도가 모호했다. 마치 이야기를 했을 때 불리해질 누군가를 우려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자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귀를 잠시…….”
소위는 주변의 눈을 살피는 것처럼 군인들을 둘러보더니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로미오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로미오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귀엣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미오는 고개를 홱 들어 소위를 올려다봤다.
순간적으로 어금니를 세게 물어 목 위로 힘줄이 불거졌다.
“……지금 뭐라고 했나?”
* * *
“……부대에 도착하는 대로 취조실에 구금될 거야. 대위가 현재 벽보를 붙인 혐의로 붙잡힌 소년을 조사하고 있지만 네가 체포된 이상 대위도 이제 조사 대상에 포함돼.”
발레리아는 뭉친 눈가의 근육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녀는 현장에서 체포한 혐의자를 부대까지 걸어서 호송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어기고 마차에 태워 부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혐의자가 불시에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할 것을 우려해 사병 두 명을 동승시켜야 함에도 마차에 아무도 태우지 않았다. 말을 탄 장교와 사병들이 마차를 뒤따라오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까지 낮춰 얘기하고 있었다. 호송에 동행한 장교들이 추후에 문제 삼기에 충분한 행동이었으나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해 독단적으로 이런 지시를 내렸다.
“너와 관련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조사를 받을 테니 엔초 역시 예외는 아니야. 로마니엘로 대학교의 법학과 학생들도 마찬가지고. 이미 군인들이 학교로 찾아가 학생들의 인명록을 넘겨받았을 거야.”
표정이 극히 어두운 발레리아는 손으로 얼굴 전체를 쓸어내렸다. 장교의 가족이 연루자로 잡혀 들어온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제6군단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머릿속에 그린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손을 뗐다.
“대위가 결백을 입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피에트로?”
팔이 등 뒤로 묶인 채 앉아 있는 피에트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는 마차에 타고 난 이후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
현재 피에트로가 받고 있는 의혹이 여러 가지였기에 발레리아는 현장에서 피에트로를 일부러 놓쳤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쓸데없는 일을 벌여 자칫 로미오가 더 큰 의심을 살 위험도 배제할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피에트로의 혐의를 벗기는 것과 로미오의 입지를 지키는 일이었다.
“조사가 시작되면 같은 질문을 받겠지만 미리 물어볼게. 벽보를 붙인 소년과 관련이 있어?”
“…….”
“네가 시킨 게 맞아?”
“…….”
혐의자에게 이런 식으로 온정을 베풀어 본 적 없는 발레리아였다. 피에트로가 로미오의 동생이기에, 그리고 피에트로의 체포가 로미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해 피에트로를 마차에 태워 호송하고 조사 시 받게 되는 질문에 대해 언질을 주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까지 우려하고 있는 그녀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탓에 목을 가다듬었다.
“고문실로 옮겨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잊지 마. 나와 무소 대위가 힘을 쓰겠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권한의 한계가 있어. 로미오는 네 혐의가 풀릴 때까지 이번 사건에서 배제돼 너와 접촉하는 것이 금지될 거야. 넌 술집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자가 누구인지, 그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술집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혹 그곳에서 너희가 기다리던 자는 없었는지에 대해 모두 얘기해야 할 거야. 체포될 당시의 정황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낱낱이 이야기해야 해. 조사는 네가 대답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야. 내가 지금 가장 궁금한 건…….”
발레리아는 말을 아꼈다. 그녀로서도 하기 힘든 말이었기 때문에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
피에트로가 발레리아의 얼굴을 보지 않고 바닥에만 시선을 두는 사이 마차가 부대에 도착했다.
발레리아는 느슨하게 풀어놓았던 줄을 피에트로의 팔에 묶었다. 마차 문을 열고 먼저 내리자 사병 둘이 피에트로를 마차에서 내리게 해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 본래였다면 어깨를 잡아 끌어내린 뒤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억세게 팔을 붙들었을 테지만 피에트로가 로미오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우를 갖췄다.
발레리아가 앞서 걷자 장교와 사병들이 열을 맞춰 피에트로의 뒤를 따랐다. 몬테 중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그의 집무실이 있는 중앙 탑으로 들어가는데 저 멀리 갈리에누스가 보였다. 마구간에서 말 한 필을 꺼내고 있던 그는 팔이 묶여 연행되는 피에트로를 발견하고 말고삐를 손에서 놓쳤다.
믿지 못할 광경을 본 사람처럼 충격이 번진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던 그는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피에트로가 여기에…….”
발레리아와 피에트로를 번갈아 본 갈리에누스는 말을 전부 잇지 못했다. 발레리아는 마차에서 내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대위는 지금 취조실에 있나?”
갈리에누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착오가 있을 거라고 믿는 듯한 눈으로 피에트로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중위, 시간이 없네. 대위가 지금 어디에 있지?”
“취조실에…… 아직 취조실에 계실 겁니다. 벽보를 붙인 소년을 조사하는 중이신데 대체, 이게 무슨…….”
“살라티코 거리의 술집에서 체포됐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자는 도주했고.”
“……대위님께서…… 이 사실을 아십니까?”
“소위를 미리 보내 알리도록 시켰네. 아마 전달받았을 거야. 나는 몬테 중령님께 보고드리러 갈 생각이니 자네는 지금 당장 대위의 집으로 가 엔초를 데려오도록 해. 몰베나 거리를 수색하던 인원들 중 절반을 보냈지만 자네가 가서 데려오게.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엔초가 겁을 먹을 거야.”
갈리에누스는 이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피에트로만 계속 쳐다봤다. 며칠 전 하숙집 주변을 순찰하던 자신에게 문을 열어 줬던 피에트로였다.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를 마지막으로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부탁하네, 중위.”
“……예, 대위님.”
발레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피에트로를 데리고 중앙 탑으로 들어갔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간 그녀는 가장 가까운 취조실로 피에트로를 데려갔다. 커다란 창이 달린 데다 부대에 있는 취조실 중 가장 넓은 취조실이었다.
피에트로를 의자에 앉힌 발레리아는 등 뒤의 줄을 풀어 준 후 취조실을 지키기 위해 따라 들어온 군인들에게 엄포를 놨다.
“이 소년이 알피에리 대위의 동생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취조가 시작되기 전까지 팔을 잡아끌거나 옷을 당기거나 미는 등의 강압적인 행동은 삼가라. 내 말 알아들었나?”
“예, 알겠습니다.”
“몬테 중령님께 호송 사실을 보고드리고 올 테니 그 누구도 이 소년에게 손을 대지 말고 기다리도록.”
발레리아는 취조실을 나가기 전 피에트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당부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그대로 앉아 있어.”
눈을 보려고 애쓰며 말했지만 피에트로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취조실을 나간 발레리아는 탑의 위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가던 그녀는 위에서 내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은 로미오였다. 그의 뒤에는 자신이 부대로 급히 보냈던 소위가 따라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가 “말로 대위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자 로미오는 난간도 잡지 않고 황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발레리아는 로미오가 넘어지기 전에 먼저 계단을 올라가 그의 손을 난간에 얹어 잡게 했다. 안색이 좋지 못한 로미오는 손끝의 마디가 하얘지도록 난간을 단단히 잡은 채 자신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마와 코에 시선을 뒀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차 안에서 이뤄진 질문에 대한 피에트로의 반응으로 미뤄 볼 때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부대로 연행해 오는 길에 피에트로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지만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어. 몸수색 결과 소지품 중에 의심할 만한 물건은 없었고 엔초는 솔로르사노 중위가 데리러 갔으니 안심해. 나는 몬테 중령님께 보고드리러 갈 테니 자네는 취조실에 가 봐. 제1 취조실이야. 아무도 없을 거야. 어서 가 봐. 소위, 대위를 모셔 가라.”
발레리아가 얼른 계단을 올라가자 로미오는 더 묻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뒤따르는 소위가 먼저 앞서가 제1 취조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문이 열리자 로미오는 문간을 더듬어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하십시오, 대위님.”
지팡이가 없었으나 로미오는 머뭇거리지 않고 탁자 바로 앞으로 다가가 섰다.
피에트로는 로미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로미오가 자신이 목소리를 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켰다. 소리로 알려 주지 않으면 로미오가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려는 것처럼 탁자 위만 바라보았다.
“…….”
말을 건네지 못하는 것은 로미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피에트로의 체포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거짓말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착오가 있었을 것이라고, 피에트로와 닮은 사람을 피에트로라고 착각하고 체포했을 것이라는 허황된 상상을 하고 있었다. 피에트로라고 생각되는 낯선 소년을 체포해 데려왔지만 확인 결과 피에트로가 아닐 거라고. 지금 피에트로는 로사티 3번가의 하숙집에 있을 거라고. 엔초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려 했다.
그러나 눈앞에 피에트로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 끌려와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다.
“피에트로.”
“…….”
“……대답해.”
“…….”
몬테 중령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취조가 시작될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연루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취조를 이제부터는 피에트로가 받게 될 것이다.
“살라티코 거리의 술집에서 뭘 하고 있었어?”
“…….”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주먹이 세게 쥐어졌다. 자신은 피에트로의 표정도, 몸짓도 볼 수 없었다. 피에트로가 지금 어떻게 취조실 내의 의자에 앉아 있는지,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어떤 눈빛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른 모든 곳은 되더라도 취조실은 아니었다. 이곳에는 오지 말아야 했다. 올 수 없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어? 네가 지금 이곳으로 붙잡혀 들어온 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
피에트로는 고개를 비스듬히 들더니 조용히 입을 뗐다.
“……말로 대위님께서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말씀해 주셨어. 조사를 받게 될 거라고… 형도, 엔초도.”
로미오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주먹을 더 굳게 말아 쥐었다.
“정말로 술집에서 벽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
“같이 있던 자와 벽보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 사실이야?”
“…….”
피에트로가 고개를 숙이자 로미오는 그의 침묵을 참지 못하고 멱살을 틀어잡았다.
“대답해!”
앉은 채 멱살이 잡혀 끌어 올려진 피에트로는 로미오를 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소위가 안절부절못하며 다가왔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 누가 보더라도 형제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머리 색과 눈 색, 심지어 목소리까지 비슷했다.
취조실 밖에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이 문을 열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솔토 소령이 안으로 들어섰다. 군 내의 규율을 지키는 것에 엄격한 그는 다른 대대의 소령이었다. 피에트로의 체포 소식이 그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사병들 사이에서도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알피에리 대위!”
로미오는 피에트로의 멱살을 거칠게 놓으며 돌아섰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경례를 하는데 소령이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몬테 중령님께서 찾으시니 속히 집무실로 가 보도록. 취조가 시작되기 전까지 저기 앉아 있는 저 혐의자에게 일체의 신문을 하는 것을 금한다. 혐의자가 장교의 친족이라 하여 예외는 없다. 자네가 임의로 혐의자를 취조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네.”
“……예, 소령님.”
로미오는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문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위의 부축으로 문간을 짚고 밖으로 나가자 등 뒤의 철문이 큰 소리를 내며 쾅,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