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8. 출판 축하회 (8/30)

8. 출판 축하회

“하여 통령 각하의 칙서에 따라 벽보는 축제일을 전후로 해 닷새간 바치의 1구역부터 3구역, 4구역부터 6구역, 7구역부터 9구역으로 나누어 감시한다. 바치 시 내의 5개소 대학의 시찰은 금일부터 재개할 것이다.”

클레멘트 몬테 중령은 불룩한 배를 내밀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허리를 세우고 턱을 든 자세로 서 있는 로미오의 옆에는 발레리아와 마르코가 있었다. 셋을 제외하고도 중령의 집무실에는 다섯 명의 장교들이 더 있었다.

명령 하달을 위해 각 중대의 대위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모은 몬테 중령은 당연하게도 다가올 바치시 축제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다른 장교들도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몬테 중령이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사이 장교들 중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망할 놈의 축제를 금지하면 단테의 12인 놈들이 활개를 칠 일도 없을 텐데.”

로미오는 책상 앞에 앉은 몬테 중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의 검은 점은 이제 사라졌고 그사이 시력은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중령의 집무실에서 열리는 회의는 주기적인 데다 회의 시 장교들은 정해진 자리에 섰는데 로미오는 지금까지 몬테 중령의 얼굴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뿌연 물감을 덧칠한 것 같던 중령의 얼굴은 더 이상 머리와 어깨의 윤곽이 구분되지 않아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양옆에 서 있는 발레리아와 마르코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점이 사라지고 난 이후부터 로미오는 두 사람을 착각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발레리아의 머리 색이 붉은빛을 띠는 갈색이라는 것이었다.

“알피에리 대위.”

“예, 중령님.”

몬테 중령의 몸의 형체를 훑던 로미오는 시선을 바로 했다. 의자도, 의자에 앉아 있는 몬테 중령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만 들렸다.

“자네는 시찰을 돌 수 있겠나? 문제가 없겠는가?”

몬테 중령은 특별히 이해심과 인정이 많은 상관은 아니었지만 맹인 장교인 로미오의 사정을 무시할 정도로 몰인정하지는 않았다. 눈이 어둡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로미오는 다른 장교들과 비교해 능력 면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사관 학교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대대원들을 지휘 통솔하는 데 있어서도 자질이 부족하지 않았다.

단지 지난번에 일어났던 주먹질 문제로 징계를 받은 터라 넌지시 물은 것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로미오는 시력이 떨어지는 경과를 며칠간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고 양심에 따라 대답했다. 몬테 중령은 자신의 배 위에 손을 깍지 껴 올려놓으며 물었다.

“정직 기간 동안 뭘 했나?”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고향이 어디지?”

“네베입니다.”

“네베라. 내가 전에 먹은 치즈가 네베산이었을 거야. 희고 물기가 많은 치즈였는데 잼을 곁들어 먹으면 맛이 아주 그만이었지. 이 배만 아니었으면 그 치즈를 식사 때마다 먹었을 텐데.”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입술을 핥은 몬테 중령은 차를 한 잔 더 마셨다. 로미오는 지팡이 없이 걷는 것이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하며 바닥을 내려다봤다. 군화의 윤곽이 보이지 않았다.

“통령 각하께서는 축제 기간 동안 이뤄지는 연극과 수공업자들 간의 협회, 광장에서 이뤄지는 연설회 등 시민들이 모이는 모든 장소를 엄중히 감시해 불온한 언동이 나오지 않도록 제지할 것이라고 언명하셨다. 허가를 받지 않은 집회가 적발될 경우 집회에 참가한 자들을 검속 대상에 넣어 즉각 체포하라. 집회 참석자들의 가택 수색은 명령서 없이 진행하도록 하며 집회가 이루어진 곳은 출입은 엄금시켜라. 공안국의 참관하에 이루어지는 집회 또한 필요에 따라 명령서 없이 참석자들을 구인하도록 하라.”

비스카르디 통령은 지난 이틀간 두 차례의 칙서를 내놓았다. 칙서에는 단테의 12인과 관련한 반정부 조직 활동을 막기 위해 이번 축제 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집회를 단속하겠다는 경고조의 말이 적혀 있었다. 루바노 공화국의 안보와 평화를 위협하는 자들에 대해 ‘염려’하고 그들을 ‘규탄’하기 위함이 목적이라는 온건한 표현이 쓰여 있으나 그 내면에는 노골적이고도 분명한 겁박이 묻어 나왔다.

시민들 중 어떤 이들은 통령이 수백 년간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바치시의 유서 깊은 전통 축제를 망치려 한다고 혀를 찼고 어떤 이들은 남은 재위 기간 동안 통령이 단테의 12인을 모조리 색출해 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밤낮없이 바빠지겠군. 순전히 내 예감이지만 이번 축제는 어쩐지 순탄하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몬테 중령의 집무실을 나오며 마르코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축제였지만 군인들은 대부분 축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로미오는 복도를 걸으며 자신의 오른편에 선 발레리아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왼쪽에서 들려오는 마르코의 목소리와 발레리아의 붉은 머리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를 마르코로 착각했을 것이다.

“고향에 다녀오니 어떻던가? 마음 편히 쉬다 왔어?”

발레리아의 물음에 로미오는 조반니를 떠올렸다.

“예. 편히 머무르다 왔습니다.”

“고향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가지 않으면 낯설 텐데 초행인 것처럼 길을 헤매지는 않았나?”

로미오는 조반니와 함께 다녀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발레리아와 마르코에게 말했을 때 두 사람이 보일 반응을 짐작해 잠시 말을 아꼈다.

“실은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네베를 구경해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분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잠이 부족한 듯 눈꺼풀을 문지르던 마르코가 순간 손을 멈췄다. 발레리아도 단발 머리끝이 크게 한 번 찰랑일 정도로 크게 고개를 젖히며 로미오를 봤다.

“스포르차 그자와 함께?”

“그자와 같이 고향에 다녀왔다고?”

“예. 오가는 거리가 멀어 하루만 머무르고 돌아왔습니다. 스포르차 선생님께서 곧 바치 병원에서 일하시게 되는 데다 출판 축하회를 앞두고 계셔서 휴양차 함께 다녀온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었잖나? 언제 그런 약속을 잡은 거야?”

“그래. 그날 다 함께 술집을 나왔는데 언제 그런 이야기를 한 거지?”

“이후에 선생님과 한 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연히 고향 얘기가 나와 동행하게 된 것이고요.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가 보지 않은 네베에 스포르차 그자와 함께 다녀왔다는데 이게 어떻게 놀랄 일이 아닌가?”

“가서 고향집을 둘러보고 함께 네베 음식을 먹은 것이 다입니다.”

“허!”

로미오는 조반니가 자신의 윗집으로 이사 왔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기로 하며 오늘이 조반니가 말한 그 출판 축하회 날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반니는 사정이 된다면 꼭 축하회에 와달라고 이야기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출판 축하회에서 별다른 것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조반니와 세라피나가 축사를 하고 모인 손님들끼리 축하를 하고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이번에 출판되는 해부학서에는 지난 5년간 연구한 해부학적 성과가 들어 있습니다. 연구 기간이 길었던 만큼 많은 노고가 서려 있어 출판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뜻깊은 자리이니 대위님께서 와 주신다면 그보다 몇 배는 더 기쁠 겁니다. 밤늦게 오셔도 좋으니 부디 와 주세요.]

낯선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로미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과 자주 맞닥뜨렸다. 이를테면 그 누구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상황에서 먼저 아는 사람을 찾아 나서는 일이 그것이었다. 눈이 어두운 로미오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던 경험이 적지 않았다.

* * *

검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아치형 회랑을 걸었다. 학교에서 군인들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불과 며칠 전 옆 학교의 의학부 학생이 제6군단에게 끌려가 고문 끝에 죽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군인들을 한 번씩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걷고 있는 군인들의 가장 앞에는 지팡이를 짚은 장교가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좌우로 움직이며 바닥을 탁, 탁 치는 소리가 회랑 내에 고요하게 울렸다.

“통령 각하께서 금번 시 축제에서 불필요한 문제로 학생들이 검거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시며 칙서를 내리셨소. 축제를 앞두고 학생들 사이에서 불온한 점이 발견되지 않도록 주의를 주어야 할 것이오.”

“예, 예. 그러고 말고요. 당연히 그래야 하지요.”

로마니엘로 대학의 부교장은 로미오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발에 부딪히지 않게 옆으로 비켜서서 걷고 있었다. 짐짓 점잖은 척하고 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에 들이닥치는 군인들이 반가울 리 없었기에 얼굴에선 웃음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로마니엘로 대학은 5년제의 학제를 가진 대학으로 본래 의학부와 법학부만이 있었으나 설립 이후 300년이 지난 지금 철학과 천문학, 수사학, 논리학, 수학 등의 강의가 생겨 학생 수가 해마다 늘고 있었다. 현재 법학부가 특히 강세를 띠고 있었는데 학비와 기숙사비가 비싸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 한해 학비를 면제해 주는 장학 제도가 마련돼 있음에도 학생들 중에 수공업자의 자식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제6군단은 단테의 12인과 관련된 불온한 사상이 학생들 사이에 퍼질 것을 경계해 시찰 형태로 바치 시내의 각 학교를 불시에 방문했는데 오늘은 정오 무렵 로마니엘로 대학에 시찰 통고서가 도착했다. 교장이 통고서를 확인하고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군인들이 학교를 찾아와 교내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6군단에 끌려간 자는 채찍질과 매질을 당하고 혹독한 고문을 겪는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퍼진 지금 군인들이 학교를 방문해 교내의 회랑과 뜰, 학생과 교수들이 사용하는 건물 곳곳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본보기를 보여 주는 행동과도 같았다.

“대위님. 저기 맞은편에 피에트로가 있습니다.”

피에트로를 발견한 것은 시찰을 모두 마치고 학교를 나가기 위해 2층 회랑을 걷고 있을 때였다. 회랑의 건너편에 피에트로가 있었다. 피에트로는 옆구리에 두툼한 책을 끼고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 틈에 서서 제법 오랫동안 이쪽을 주시한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것을 알면서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먼 거리에서 눈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가만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디에 있나?”

“실례하겠습니다. 저쪽입니다.”

갈리에누스가 로미오의 팔을 가볍게 잡아 손끝으로 피에트로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로미오가 자신을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인사 없이 돌아섰다. 갈리에누스는 두 형제가 이런 곳에서 마주쳤을 때 반갑게 인사를 할 만큼 살갑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에트로의 행동을 이상하다고 느꼈다.

“가 버렸군요.”

로미오는 피에트로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 수 없었기에 서서 지켜볼 필요가 없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멈춰 서 있던 대대원들이 뒤를 따랐다.

“하숙집 주변을 단속해 달라고 부탁하셨던 것 말입니다. 특별히 수상한 자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라나 부인께서도 하숙집 주변을 배회하는 낯선 이를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피에트로와 엔초 역시 대위님께서 고향에 내려가신 동안 별 탈 없이 지냈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네, 중위.”

“무슨 이유로 제게 단속을 부탁하신 겁니까?”

“별일 아니었다. 수상한 자를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야.”

겁탈 직후 끔찍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검은 망토의 사내를 목격한 자들을 수소문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로미오였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골목 끝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로미오는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서로 다르게 만들어진 다섯 장의 망토를 보고 그 사내가 입은 망토를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만 시력이 좋았다 하더라도 수색이 쉬웠을 것이다.

로미오에게는 충분한 시간 또한 없었다. 하숙집 일대를 탐문하는 것은 늦은 밤이나 가능한 일이었는데 거리에 사람이 없는 늦은 시간대에 로사티 3번가 근처를 돌아다니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군복 차림으로 낮 시간대에 하숙집 일대를 돌며 목격자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팡이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고향에 다녀오신 사이에 눈이 나빠지셨습니까?”

“네베에 있는 동안 검은 점이 보였다가 사라졌네. 앞으로는 지팡이를 계속 들고 다녀야 하니 내가 만약 잊거든 알려 주게.”

오래전 함께 술을 마시며 로미오가 검은 점에 대해 말한 적 있었기 때문에 갈리에누스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주기가 다시 돌아온 것이군요… 그럼 지금은 검은 점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로미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전방에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으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걸었다. 갈리에누스는 로미오의 심정을 헤아려 그가 계단이 있음을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렸지만 로미오는 애석하게도 계단 머리가 가까워 올 때까지도 계단의 존재를 모르고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결국 갈리에누스는 로미오의 지팡이가 계단 끝에 닿기 전에 이야기했다. 눈앞의 계단조차 이제 볼 수 없게 된 로미오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지팡이를 달리 잡았다.

“계단의 폭이 얼마나 넓지?”

“여섯 사람이 동시에 일렬로 오르내려도 문제가 없을 만큼 넓습니다. 난간은 오른쪽에 있으니 손을 그대로 내밀어 짚으시면 됩니다.”

로미오가 지팡이를 내려 계단의 높이를 가늠하는데 아래층에서 학생 하나가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급한 걸음으로 올라오던 학생은 한 무리의 군인들을 보고 멈칫했으나 그대로 뛰어 올라왔다. 로미오는 별안간 거칠고 빠른 발소리가 들려오자 얼른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검은 망토의 사내가 떠올라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릎이 굳어 버리기라도 한 듯 발끝이 경직됐다.

“학생 하나가 곁을 지나갑니다.”

로미오가 놀랄 거라고 예상 못 한 갈리에누스가 뒤늦게 말했다. 학생이 지나가자 발소리는 멀어지며 곧 들리지 않게 됐다.

갈리에누스는 로미오가 이제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눈이 어두워졌다는 사실에 착잡함을 느끼며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내려다봤다. 로미오가 놀랄 거라고 생각 못 한 자신의 어리석음도 탓했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놀라셨습니까?”

로미오는 장갑이 주름 없이 팽팽하게 당길 정도로 지팡이를 힘껏 쥐며 말했다.

“됐다.”

지팡이를 잡지 않은 반대 손으로 난간을 잡은 로미오는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갔다. 갈리에누스는 로미오가 넘어지면 부축할 수 있도록 그의 뒤에 가깝게 붙어 걸었다.

“계단이 끝나갑니다. 예, 됐습니다. 이제 1층입니다.”

계단 끝에 멈춰 서서 지팡이로 호선을 그려 바닥을 쓴 로미오는 완전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1층의 회랑을 걷는 동안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이 로미오의 얼굴과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곁눈질했다.

로미오는 지팡이로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치며 전방에 장애물이 없는지 확인했는데 회랑 바닥은 평평하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바닥의 울림을 통해 회랑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중위. 저녁에 시간이 있나?”

“예. 왜 그러십니까?”

“길을 안내할 사람이 필요하네. 괜찮다면 부탁하지.”

“댁으로 가시는 게 아닙니까?”

로미오는 생각에 잠겨 잠시 걷기만 하다가 갈리에누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스포르차 선생님의 출판 축하회에 초대받아 그분과 함께 책을 출판하신 바치 대학교 교수님의 집으로 가야 하네. 하숙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지만 길을 헤맬 수 있어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해.”

갈리에누스는 뭔가 떠올린 듯 짧게 아, 하고 운을 뗐다.

“무소 대위님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정직 기간 동안 그…분과 함께 네베에 다녀오셨다고요?”

조반니를 ‘그자’라고 지칭하려던 갈리에누스는 말을 정정했다. 지금까지 조반니는 한낱 취조 상대에 불과했지만 상관인 로미오와 친분이 있는 이상 멋대로 부를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언제 함께 고향에 다녀올 만큼 친분을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놀랄 일인가?”

“아니요.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 실은 놀랐습니다. 저는 대위님께서 고향에 혼자 다녀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정직 기간 동안 그분과 쭉 네베에 계셨겠군요?”

갈리에누스는 비토리오의 일로 조반니의 이웃집을 탐문할 때 그의 이웃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조반니를 옹호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조반니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가 그럴 리 없다고 두둔했다. 조반니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꼭 현혹된 것처럼 편을 들었다.

조반니의 혐의는 벗겨졌지만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꺼림칙함을 느꼈다. 군인으로서의 감이었다.

“그분께서 뛰어난 사교술을 갖고 계신 줄 압니다. 적당히 안면이 있는 사이로 지내기보다 친분을 돈독히 하는 것을 더 선호해 대위님께 네베에 함께 가기를 청하셨겠죠. 출판 축하회에 초대한 것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 것을 즐기는 분이시니…….”

그자에서 그분으로 호칭이 격상됐지만 갈리에누스는 조반니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침묵의 의미를 알아챈 로미오가 말했다.

“그를 의심하고 있군, 중위.”

갈리에누스는 로미오가 자신과 같은 ‘감’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보이는 것을 믿었다. 본능적인 느낌에 의존하기보다는 증명 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신뢰했다. 무엇보다 조반니의 취조를 직접 맡은 것은 로미오니 만약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시할 것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따지기보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선호하는 행동력이 빠른 사람이었다. 적이 진군해 오고 있을 때 반격 태세를 갖추기 위한 전략을 치밀하게 짜고 군대를 움직이기보다는 군대를 우선 움직인 뒤 전략을 짜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단테의 12인과 관련된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아 그는 풀려났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만 그자는 이제 평범한 의사일 뿐이다. 이번 출판 축하회는 사교적 목적으로 열린 모임이니 그가 나를 초대한 것은 물론 내가 그의 초대에 응한 것도 의구할 필요 없네.”

“죄송합니다, 대위님. 섣불리 의심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포르차 선생님과 함께 네베에 머무르는 동안 이상한 점은 드러나지 않았네. 숨겨야 할 것이 있는 자라면 내게 네베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을 때 원하는 바가 분명 있었을 테지. 얻어 낼 것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네베에 있는 동안 별다른 점은 발견되지 않았어. 목적이 있는 자라면 언젠가 본성을 드러낼 것이고 감시자 역할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대위님께서도 의심을 완전히 버리신 게 아니셨습니까?”

“그자가 자신의 비밀을 능숙하게 감출 만한 재주가 있는 자라는 걸 알고 있다. 그는 네베에서 아픈 아이를 간호했고 내게 그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지. 네베 음식을 흥미로워하며 마을 사람들과 술을 나눠 마시기도 했네. 자네의 말대로 그는 사교적이고 남에게 선의를 베풀 줄 아는 자이지만 그 사실이 그가 단테의 12인과 무관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반대 격의 증거도 없네. 그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을 일일이 의심하기보다는 그저 지켜볼밖에.”

멈춰 서 있던 로미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긴 회랑의 끝이 보였다.

“오늘 열리는 출판 축하회에는 스포르차 선생님이 초대한 손님들이 올 테니 참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 * *

“조반니, 괜찮은가? 자네답지 않게 고돼 보이는구먼.”

“출판 축하회 준비로 밤낮없이 무리를 해서 그런가 봅니다.”

“손님들이 올 때까지 만이라도 앉아서 쉬게. 뭣 하러 이렇게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어? 저기 의자가 있잖나. 앉아서 쉬어.”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누구? 초대한 손님이 아니야?”

“초대를 했지만 바쁜 분이시라 오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와 주십사 여러 번 부탁을 드리긴 했습니다만.”

창틀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본 조반니는 길의 이쪽과 저쪽을 살피며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출판 축하회가 열리는 이곳은 세라피나 교수의 이층집이었다. 조반니는 오늘 출판 축하회의 주인공답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은사 자수가 들어간 진홍색 조끼와 통 넓은 흰 린넨 셔츠, 붉은 계열의 새틴 바지, 붉은색 구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게 갖춰 입은 조반니는 이마와 눈썹이 보이도록 금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 한층 더 미남으로 보였다.

비스듬히 허리를 숙인 자세 때문에 돋보이는 균형 잡힌 몸매는 지금 당장 그대로 재단사의 수첩 속에 밑그림으로 그려진다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부풀릴 필요가 없는 넓은 어깨와 등은 단단하면서도 우람해 보였고 짧은 상의 덕에 드러난 엉덩이와 허벅지는 탄탄했다. 긴 다리는 늘씬하게 잘빠져 날렵하면서도 다부져 보였다.

조각 같은 몸을 갖고 있지만 조반니는 보통의 남자들처럼 거들먹거리거나 으쓱대며 뽐내지 않았다. 좋은 몸에 어울리는 좋은 옷을 걸친 것. 그뿐이었다.

“얼마나 피곤한지 들릴 리가 없는 헛소리까지 들리더군요.”

“어떤 헛소리 말인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자꾸 절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란 말입니다. 오늘 축하회가 끝나면 늘어지게 한잠 자야겠습니다.”

“고생 많았네. 잠도 미루고 애쓴 만큼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야. 이번에 출판되는 자네의 해부학서는 해부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네. 많은 해부학자들에게 귀감이 될 거야. 5년 동안 오롯이 한 연구에만 매달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산소네 교수님께서 힘을 써 주지 않으셨다면 출판 시기가 두 달쯤 미뤄졌을 겁니다. 그리고 비토리오의 일도 있었지요. 비토리오만 아니었더라면 해부학 자료를 제6군단에 압수당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생전에 제게 도움 주기를 그렇게 좋아하던 녀석인데 죽으면서 그런 민폐를 끼쳤으니 유령이라도 돼서 오늘 축하회 자리에 찾아와 사과해야 할 텐데요.”

쉰에 가까운 나이 지긋한 의사인 세르조는 조반니의 입에서 다소 신랄한 말이 나오자 당혹스러운 표정이 됐다.

“그래, 그렇지. 비토리오의 일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구먼…….”

세르조는 비토리오가 조반니의 제자라는 것을 알았다. 조반니의 체포 직후 두 사람 사이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떠돌았던 것도 알고 있었다. 조반니가 그 사건을 누명처럼 여기는 것은 이해했지만 고문으로 죽어 무덤조차 남지 않은 제자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조금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조반니에게서는 조심스러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건강하던 사람이, 그것도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가 그런 일로 죽었다면 응당 말을 아끼게 되기 마련인데.

“참으로 안 된 일이지…….”

“괜찮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출판을 하게 됐으니까요.”

비토리오를 향한 말이었으나 조반니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대한 위로로 알아들었다. 조반니가 바치 병원에서 일할 때부터 그와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세르조는 조반니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손님들은 언제부터 오지? 준비가 다 끝나지 않았나?”

“이제 곧 올 겁니다. 제가 기다리는 그분께서도 오시면 좋겠군요.”

조반니는 목을 빼고 창 너머로 보이는 길을 내려다봤다.

“그건 그렇고 보름 뒤에 있을 의사 협회 정기 모임 말입니다. 좀 더 일찍 앞당길 방법은 없겠습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통령 각하께서 칙서를 새로 내리지 않았나. 정기 모임 일정을 앞당기려면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네. 신청 후 허가가 내려지기까지 기간이 걸리니 앞당긴다고 해도 정기 모임이 열리는 날과 며칠 차이 나지 않을 거야.”

“역시 그런가요. 그럼 다른 방법이 없겠군요.”

“모임은 왜 앞당기려고 그러나?”

“모임에서 의논할 사항이 생겼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눈이 많이 어두운 분이 계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차츰 시력이 저하되기 시작해 지금은 실명 전 단계에 이르신 분입니다.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요.”

“그런 문제라면 질송 선생님께 여쭤보는 게 좋지 않겠나?”

“네, 그래서 오늘 출판 축하회에 질송 선생님께서도 오십니다. 둘째 따님의 혼인 문제로 바빠 극구 거절하시는 걸 간곡히 부탁드려 초대했어요.”

아래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조반니는 계단 머리로 다가가 난간에 기대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기대하던 얼굴은 아니었지만 웃으며 인사했다.

“레오나르도. 일찍 와 줬군. 어서 올라와.”

계단을 올라오는 것은 키가 큰 사내였다. 짙은 푸른빛이 도는 긴 머리를 등 뒤로 묶은 사내는 말로 인사를 하는 대신 손을 들어 보였다. 미남이지만 과묵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사내의 뒤에 몸을 감추듯 숨어 있던 소녀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저도 왔어요. 축하회에 제가 빠질 수는 없죠.”

“숨어 있는 것 다 보였어, 친치아. 어서 와. 잘 왔어.”

친치아라고 불린 열넷 먹은 앳된 소녀는 레오나르도와는 대조적으로 화사한 레몬빛 금발 머리를 갖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옷도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축하회에 초대된 손님다웠다. 그녀는 루바노인이 아니라 체사 왕국 출신으로 고국인 체사를 떠나 이곳에서 홀로 살고 있었는데 오늘 입은 옷은 그녀가 갖고 있는 옷 중 가장 좋은 옷이었다.

“다른 손님들은 아직인가요?”

“응. 올라와서 기다려.”

“밑에서 보니 창밖을 보고 계시던데 기다리는 손님이라도 있어요? 우리가 오는 것도 모르고 길만 내다보고 계셨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게 누구죠?”

“조금 후에 소개시켜 줄게. 두 사람 다 오길 잘했어. 마침 자리가 마련됐으니 인사를 나누면 되겠군.”

“소개시켜 줄 분이 있다니 누군지 기다려지네요. 와, 그런데 옷이…… 이제는 신발까지 붉은색으로 맞추셨네요. 멀리서 알아보기 쉽겠어요.”

“내가 원한 게 바로 그거야.”

“계속 보고 있자니 눈이 아파서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겠어요. 집이 아주 멋있는데 구경해도 되죠?”

“그럼.”

친치아가 축하회를 위해 꾸며진 집 안을 둘러보는 사이 레오나르도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조반니의 오랜 친구로 역시 의사였는데 같은 의사 협회에 가입돼 있어 모임이 열리면 대개 함께 참석했다. 조반니와 같은 단테의 12인의 단원이었기 때문에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는 말에 자연히 목소리를 낮췄다.

“소개시켜 줄 사람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지? 설마 그자는 아니겠지.”

“맞아. 그자야. 나를 취조했던 제6군단의 장교.”

미간을 구긴 레오나르도는 표정이 굳어졌다. 조반니는 레오나르도의 눈빛을 읽었으나 태평하게 이야기했다.

“출판 축하회가 끝날 무렵에 오실 수도 있으니 끝까지 자리를 지켜. 눈이 어두운 분이라 이름을 소개한다고 해도 다음번 만남에서 기억하지 못하실 수 있어. 그분께는 목소리가 유일한 정보니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면 목소리에 신경을 쓰는 게 좋을 거야.”

레오나르도는 조반니가 도박사의 기질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위험한 상황을 즐겼다. 규칙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제약을 받고 싶지 않아 했다. 자신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단테의 12인의 상위 단원으로서 언행을 조심해야 하는 상황에서조차 대담하게 나설 때가 있었다.

“그자를 우리에게 소개시켜 주는 의도가 뭐지? 평범한 자도 아니고 제6군단의 장교라는 자를 말이야. 무슨 생각인 거야?”

“예민하게 굴 것 없어. 너와 친치아는 내 출판 축하회에 초대된 손님이야. 초대된 손님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이상한가?”

“이런 식으로 친교를 갖는 것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잖아. 행여나 너나 나 혹은 친치아 중 한 사람이 그자에게 의심이라도 사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 이런 자리에 그를 초대해 불신을 키우는 짓은 그만둬.”

“그자는 맹인이야.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다고. 그리고 오늘이 아니라도 넌 언제든 그자와 만났을 거야. 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의사를 그에게 소개시켜 줄 생각이야. 그의 눈을 고칠 방법을 찾으려면 되도록 많은 의사들에게 그가 가진 괴병을 널리 알려야 해. 정말로 치료법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까 나를 도와줘. 친치아! 이리 와. 해 줄 말이 있어. 오늘 올 손님이…….”

조반니는 말을 하다 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썹을 찌푸린 그는 뭔가 들리는 것처럼 주위를 휘둘러 살피더니 이마를 짚었다.

“왜 그러지?”

조반니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목덜미를 매만졌다. 피곤한 듯 목을 한 바퀴 돌린 그는 큰 한숨을 쉬었다.

“헛소리가 계속 들리는 걸 보니 무리를 하기는 했나 보군.”

* * *

“그렇군요. 엔초가 곧 생일이군요. 초대해 주신다면 선물을 갖고 찾아가겠습니다.”

“선물은 됐네. 오기만 해. 엔초도 자네가 오면 좋아할 거야.”

“아니요. 꼭 선물을 갖고 찾아가겠습니다. 엔초가 뭘 좋아하려나요? 갖고 싶은 것이 있는지 대위님께서 넌지시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제게는 동생이 없어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내아이니 장난감 같은 것을 선물하면 마음에 들어 할까요?”

“무엇이든 상관없어. 선물이라면 다 좋아할 거다.”

로미오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좌우로 흔들리며 바닥을 쳤다. 이곳은 로사티 7번가였는데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의 집은 이 근방에 있었다.

“축하회가 끝나고 부대로 돌아오신다고 하셨지요? 축하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로미오는 대략적인 발자국 횟수를 세며 길을 걸었다. 돌아가는 길에 안내가 필요하지 않다고 거절하려다가 검은 망토의 사내가 생각나 마음을 바꿨다.

“그래. 부탁하네.”

“그런데 왜 댁에 들러 하루 주무시지 않으십니까?”

“지난번에 정직을 받은 일로 엔초가 걱정이 많아. 집에 자주 들르지 않으면 피에트로에게 왜 내가 오지 않냐고 조르면서도 막상 집에 오랫동안 머무르니 군대에서 쫓겨났냐고 묻더군.”

“하하, 어린아이다운 발상이네요.”

갈리에누스는 길가의 집들을 확인하며 세라피나 교수의 집을 찾았다. 축하회가 열리고 있다면 분명 환하게 불을 켜놓고 손님들을 맞고 있을 것이다.

“산소네 교수님이라는 분의 집이…… 아, 저 집이로군요. 대위님, 저 집 같습니다.”

갈리에누스는 창문이 열려 있는 이층집을 가리키려다가 손을 내렸다. 손으로 가리켜도 로미오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에게 ‘저것’이나 ‘이쪽’, ‘여기’라는 말은 무의미한 것이 됐다.

2층 창문을 올려다보니 창가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키가 큰 사내와 소녀였는데 두 사람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관리인으로 보이는 나이 든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여기가 세라피나 산소네 교수님의 집이 맞습니까?”

“네. 출판 축하회 손님들이신가요?”

“저희는 스포르차 선생님의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

“딱 맞춰 오셨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지금 2층에서 손님들이 축사를 듣고 계시답니다.”

갈리에누스는 로미오가 문간을 잡을 수 있도록 손을 끌어다 준 뒤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로미오가 들어오는 것을 봐주었다.

“문턱이 높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바닥에 내리고 있던 지팡이를 거둔 로미오는 문간을 더듬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는 축하회를 위한 음식들이 준비돼 있어 음식 냄새가 났다. 손님들이 모두 2층에 있어 1층은 조용했다.

“이쪽이에요. 이리 오세요.”

두 사람을 계단으로 안내한 관리인은 준비된 음식들을 갖고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오른편에 난간이 있습니다. 계단이 높아 올라가실 때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가 먼저 올라가게.”

“예.”

혹여나 로미오가 넘어질까 갈리에누스가 반쯤 몸을 돌려 옆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대위님!”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인사한 것은 조반니였다. 그는 2층 계단 난간에 기대어 서 있다가 로미오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2층에서는 세라피나의 축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오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와 주셨군요.”

아래층으로 한달음에 뛰어 내려온 조반니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로미오는 조반니의 옷이 붉다고 느끼며 그의 상체로 짐작되는 가슴 언저리를 내려다봤다. 웃옷뿐만 아니라 바지까지 전부 붉은색으로 보였는데 그 옷이 아니었더라면 조반니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존해 있는 시력으로 더 이상 상대를 알아보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으나 마음을 다잡았다.

“제가 늦지 않게 온 것 같군요. 축하회가 언제 시작됐습니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잘 오셨어요. 지금 산소네 교수님께서 축사 중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은?”

조반니는 갈리에누스에게도 미소를 보냈다. 조반니의 환한 미소가 지나치게 거리낌 없어 보여 갈리에누스는 순간적으로 약간 놀랐다. 마치 자신과 만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은 미소였다. 얼굴 가득 반가운 기색을 띠는 모습이 조건 없이 사람을 좋아하고 따르는 개 같아 보였다.

“갈리에누스 솔로르사노 중위입니다.”

“지난번 취조실에서 성함을 말씀하시는 걸 들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솔로르사노 중위님. 이렇게 불러도 되겠지요?”

“예, 그러십시오.”

조반니가 미소로 악수를 청하자 갈리에누스는 그의 손을 잡았다. 조반니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몸가짐에서 격식과 예의가 묻어 나왔다. 무엇보다 그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타고나기를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두 분 다 어서 올라오세요. 곧 제가 축사를 할 차례입니다.”

“저는 축하회가 끝나는 대로 대위님을 모시고 가기 위해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대위님, 축하회가 끝나거든 아래층으로 내려오십시오.”

“아래층에 재밋거리가 있나요? 그러지 마시고 중위님께서도 올라오셔서 축하회를 함께해 주세요. 술과 음식도 준비돼 있습니다. 좋은 자리이니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실수록 제게는 의미가 큽니다.”

사실 갈리에누스가 참석하든 참석하지 않든 상관없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갈리에누스가 재차 거절하기 전에 그를 무시하고 로미오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어떤가요, 대위님?”

양팔을 펼친 조반니는 옷을 자랑하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손님들 틈에 섞여 있어도 저를 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으시겠지요?”

자신의 옷차림을 로미오에게 보여 주는 조반니의 몸짓에 오묘한 구석이 있었기에 갈리에누스는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조반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갈리에누스를 응시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기 전 로미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잘 알아볼 것 같습니다.”

“구두도 붉은색인데 보이시나요?”

“구두인 것은 보이지 않지만 붉은색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사실 제 발에 맞는 구두는 아닙니다. 걷는 데 불편하기도 하고 뒤축이 끼어 벗는 데 애를 먹기도 하죠. 하지만 대위님께 도움이 될 것 같아 신었습니다. 2층에 손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으로 차려입었으니 제가 어디 있든 쉽게 저를 알아보실 겁니다.”

“굳이 저 때문에 불편한 신발을 신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옷만으로도 선생님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조반니는 새 지팡이를 사 줄 요량으로 로미오의 지팡이의 높이를 눈대중으로 가늠하며 물었다.

“그런데 지팡이를 갖고 계시는군요? 여태 한 번도 지팡이를 들고 계신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요.”

“눈이 나빠져 이제 지팡이 없이는 걷기가 어렵습니다. 2층에 손님이 많은 듯한데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실내에서도 편하게 지팡이를 쓰세요. 제가 계단 위까지 부축해 드릴까요?”

“아니요. 계단은 혼자 올라가겠습니다.”

“지팡이를 들어 드리지 않아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조반니는 몸에 닿지 않게 로미오의 허리 뒤를 손으로 받치며 로미오가 계단을 올라갈 수 있도록 발아래를 살폈다. 조반니의 등 뒤에 선 갈리에누스는 로미오의 허리 뒤를 받치는 조반니의 손을 보고 다시 한번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로미오가 맹인이라는 것을 감안하고도 조반니의 태도는 과하게 느껴지는 데가 있었다.

“중위님도 함께 올라가시지요?”

로미오에게 눈이 돼 줄 사람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갈리에누스는 순순히 두 사람을 따라 올라갔다. 2층에는 손님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이어서 스포르차 교수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박수와 함께 세라피나의 축사가 끝났다. 조반니는 축사가 잘 들릴 만한 자리로 로미오와 갈리에누스를 안내하고 앞으로 나갔다.

갈리에누스가 주변을 둘러보니 척 보기에도 손님들은 대부분 의사와 교수, 법관, 그리고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손님들 중에 바치시의 전(前) 시장과 31인 위원회의 위원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피의 재판장’이라고 알려진 피암메타 판사도 있다는 것이었다. 바치시에서 일어난 악명 높은 몇 건의 살인 사건의 재판을 맡은 것으로 유명한 피암메타 판사는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재판정에 쩌렁쩌렁 울리는 큰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자식도 남편도 없는 그녀는 법원에 살다시피 하며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교류를 하지 않는 데다 타협을 모르는 외골수 기질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에 조반니가 초대했든 세라피나 교수가 초대했든 이런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중위. 아는 사람이 있나?”

“저기 피암메타 판사님이 계십니다. 바치시 전 시장님도 계시네요.”

“실내에 손님들이 많은가?”

“예, 많습니다. 어림잡아도 서른 명은 거뜬히 넘을 듯합니다.”

로미오는 축사를 위해 앞에 나간 조반니를 보며 그가 붉은 인간 같다고 생각했다. 조반니의 양옆으로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조반니만이 하나의 붉은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가 지금 선 자리에서 뒤로 열 발자국 물러나더라도 그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은 분들이 와 주셨군요. 지난 5년간의 연구 성과가 이렇게 성공적으로 끝맺게 되어 흡족합니다. 이번에 출판되는 해부학서를 위해 저는 스물여덟 살에 첫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해부학적 사료도 부족했고 연구자로서 노련하지 못해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연구 기간인 5년 중 반년가량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연구에 별다른 진척이 없기도 했습니다. 많은 인내심이 요구되었고 집념에 가까운 열정도 필요했습니다. 매일 시체를 보는 일을 마다해야 했으며 연구 진행 중 오류가 발견돼 그 이전의 연구들을 모두 폐기하기도 했습니다. 연구를 시작하고 3년이 지났을 때는 조바심에 출판을 감행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축사를 하던 조반니는 로미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사람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원리와 기능, 신경 활동과 생리 작용, 그리고 신체의 조직과 구조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것을 과학의 이론으로 구축하는 것은 해부학에서 시작됩니다. 신체의 각 부분을 규명 가능한 언어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몸에 대한 비밀을 파헤침으로써 생리학과 약리학의 발전을 이끌 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해부학 연구에 뜻을 둔 많은 해부학자와 의사, 그리고 살아 있는 인간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애쓰는 예술가들에게 제 해부학서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샴페인을 나눠주기 위해 돌아다니던 시중인이 잔 두 잔을 갖고 로미오와 갈리에누스에게 다가왔다. 마실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이 거절하자 시중인은 금방 물러갔다.

“연구에 쓰인 시신만 수백 구에 연구 기간 동안 써낸 해부도 역시 수십만 장에 이릅니다. 희생과 인내 없이는 그 어떤 학문도 발전할 수 없습니다. 탐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아무것도 이룩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책을 집필하는 데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출판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축사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조반니의 말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갈리에누스가 뜻밖의 인물을 발견한 것은 박수를 치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상대 쪽에서도 갈리에누스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이 됐다.

“갈리에누스?”

“라울? 너 라울이지?”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여기서 다 보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 어떻게 여기서…… 대위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갈리에누스는 반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로미오는 갈리에누스가 향한 방향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축하회에 초대를 받아서 왔지, 이 친구야. 우리가 사관 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몇 년째이지?”

로미오는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팡이를 차지 않도록 지팡이를 바로 세워 허리 앞에 뒀다. 주위는 사람들의 잡담 소리로 가득 찼다. 손님들 중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있다고 해도 먼저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서 있었다.

“중위님께서는 어디 계시나요?”

조반니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그는 붉은 덩어리처럼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아는 사람을 만난 모양입니다. 저쪽에 있습니다. 중위가 ‘라울’이라고 부르던데 선생님께서 초대한 손님입니까?”

“아니요. 저분은 세라피나 교수님의 손님입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빈손으로 지팡이 손잡이를 잡고 있자 샴페인을 들고 돌아다니는 시중인을 찾았다.

“샴페인을 한 잔 드시겠습니까? 가져다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출판회가 끝나고 부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대답하는 로미오는 조반니의 이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하지 않더라도 대화 도중에 상대의 눈언저리를 바라볼 정도는 되었던 로미오는 이제 완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조반니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축사는 잘 들었습니다. 제가 해부학에 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만 연구를 5년간 하셨다니 놀랍습니다. 이번에 출판하는 해부학서가 선생님의 몇 번째 해부학서입니까?”

“열한 번째 해부학서입니다. 연구 기간이 가장 긴 해부학서이기도 합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초대된 손님으로서 선물이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미처 준비하지 못해 죄송스럽군요.”

“선물이라니요.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조반니는 지팡이를 쥐고 서 있는 로미오를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훑으며 늘 그렇듯 오늘도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노골적으로 몸을 훑어 댔으나 로미오는 알아채지 못했다.

허점 많지만 단정한 그 모습이 재밌게 느껴졌다. 발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면 지팡이를 놓치고 쓰러질까? 궁금증이 났다. 넘어진 그가 지팡이를 찾기 위해 걸음마를 막 배운 아이처럼 팔을 휘적이는 걸 구경할 마음은 없었지만 지금 갖고 있는 저 지팡이가 멀쩡하면 새 지팡이를 선물해도 로미오가 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팡이를 망가뜨리고 싶기도 하고 넘어진 로미오를 일으켜 세워 주고 싶기도 했기 때문에 음침하게 눈알을 굴려 주위를 둘러본 후 보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로미오의 지팡이를 발끝으로 톡 찼다.

데구르르…….

발길질에 지팡이가 바닥으로 쓰러져 멀리 굴러가자 사람들 몇 명이 돌아봤다. 영문도 모르고 쥐고 있던 지팡이를 놓친 로미오는 허리를 숙여 바닥을 더듬으려고 했다.

“주워 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기다리라는 뜻으로 로미오의 손목을 잡았다가 떼고 저만치 굴러간 지팡이를 주워 왔다. 건네기 전 빠르게 지팡이를 훑은 그는 멀쩡한 손잡이를 잡아 뺐다. 그러곤 태연하게 로미오에게 말했다.

“이런. 손잡이가 빠졌군요.”

“손잡이가요?”

“네. 분리가 돼 버렸습니다. 어쩌나요?”

조반니는 로미오의 양손에 지팡이 손잡이와 막대 부분을 쥐여 주었다. 로미오의 표정을 살피니 그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난감함을 추스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지팡이는 눈과 같은 존재니 당연했다.

로미오는 눈앞으로 지팡이를 가까이 가져가 손잡이를 끼우기 위해 몇 번 돌려 보더니 조반니에게 물었다.

“다시 끼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글쎄요. 망가진 것 같은데요. 이리 줘 보세요. 한번 해 보겠습니다.”

지팡이를 받아 든 조반니는 손잡이를 끼우는 척 일부러 덜그덕 소리를 내며 로미오를 내려다봤다. 지팡이가 끼워지길 얌전히 기다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사타구니에 열이 몰렸다.

맹인이 취향인 것은 아니지만 로미오가 이제 거의 앞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허기진 욕정이 일었다. 그가 앞으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많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골반을 휘감듯이 자리해 있는 두툼한 성기 끝에 피가 몰린 것은 자신이 일부러 내는 덜그덕 소리에 로미오가 온순한 태도로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빈손에 지팡이 대신 자신의 성기를 쥐여 주는 상상을 하니 성기가 딱딱하게 서며 바지 안에 가득 찼다. 하지만 당황해 허둥거리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웃옷 자락에 가려져 들킬 일 따위는 없었다.

“안 되겠습니다.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아요. 손잡이를 이렇게 얹어서 잡고 계시면 불편한가요?”

손잡이를 대강 얹어 건네자 로미오는 지팡이를 바로 세워 잡았다. 헐렁하게 끼워진 손잡이 때문에 지팡이는 바닥에서 미끄러지며 똑바로 서지 않았다. 그게 좋아 입술을 씰룩이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조반니! 출판을 축하하네!”

로미오는 지팡이가 넘어지지 않게 바로 잡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봤다. 쾌활한 목소리로 다가와 인사한 것은 낯선 사내였다.

로미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내의 복식은 루바노에서 유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겉옷에서부터 바지 끝자락의 여밈끈 하나까지 모두 고급스러웠는데 목이며 팔에 걸친 목걸이와 팔찌가 호사스러워 보였다. 비스듬하게 틀어 쓴 모자에도 금사 자수가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무엇보다 사내의 뒤에는 하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서 있었다. 깨끗하기는 하지만 하인의 복장을 하고 있는 그들은 루바노가 아닌 다른 나라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오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와 주셨군요. 이런 자리까지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늦게 도착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자네의 축사는 들었어. 멋진 축사였네! 5년간 연구를 했다니 정말로 대단하군. 대단한 열정이야. 탄복하지 않을 수 없어. 출판을 축하할 겸 선물을 하나 준비했으니 받아 줬으면 좋겠군. 자네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주기 위해 고심했네.”

사내는 하인들을 시켜 가져온 선물을 가리키며 약간 거드름을 피웠다.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싸인 선물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싸 보였다.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로미오는 말투로 미뤄 그가 아주 부유한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백작님께서 이런 곳까지 와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귀족이었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는 프리올로 공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복식을 한 프리올로 사람이었다.

“루바노에는 언제까지 머무르시는 거지요?”

“열흘 뒤에 프리올로로 돌아갈 생각이네. 시간이 된다면 돌아가기 전에 식사나 함께하지. 괜찮나?”

“네, 물론입니다. 백작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요.”

“시기적절한 날에 하인 중 하나를 보내도록 하겠네. 지난번에 자네에게 신세를 졌으니 이번 식사는 프리올로 식의 정찬을 대접하지.”

“프리올로 식 정찬이라니 무척 기대됩니다.”

백작이라고 불린 사내는 조반니와 몇 마디 더 담소를 주고받더니 곧 하인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그가 가고 나자 다른 사람이 다가왔는데 로미오는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문은 조반니가 상대를 부르는 호칭을 듣고 나서야 풀렸다.

“페리 전(前) 시장님.”

“출판을 축하하네, 조반니!”

로미오는 페리 전 시장의 얼굴을 알았다. 바치 시민이라면 그를 어디서든 볼 일이 많았다. 나서기 좋아하는 성미였기 때문에 발이 넓은 조반니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5년간의 연구가 이렇게 빛을 발하는군. 해부학에 대한 자네의 집념은 당해 낼 자가 없겠어. 바치에 자네처럼 전도유망한 젊은 학자들이 많아져야 하는데 말이야. 학문과 예술의 길이 누구에게나 공평히 열려 있는데 못 할 일이 뭐가 있겠나?”

“맞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 10년만 더 늦었더라면 이번 해부학서를 출판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젊어서 학문에 매료된 것도 어찌 보면 행운입니다.”

“이번에 출판하는 자네의 해부학서가 열한 번째 해부학서지? 대단하구만! 대단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자네가 저번에 말한 ‘그것’ 말이야. 효과가 아주 좋았단 말이지. 좀 더 필요한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시장님 댁으로 사람을 시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고마워. 허, 허허!”

페리 전 시장은 조반니의 뒤에 서 있는 로미오를 발견했으나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로미오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 데다 이쪽이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해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맹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무시하게 됐다.

그러나 그냥 돌아서자 조반니가 팔을 붙잡았다.

“이분은 제6군단의 대위님이십니다.”

“음, 흠. 그러한가?”

주위가 시끄러웠기 때문에 로미오는 페리 전 시장의 목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바라봤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무례함을 느끼지 않는 선에 한해 자연스럽고도 재빠르게 로미오의 팔꿈치를 잡아 몸을 돌려 주었고 로미오는 그제야 페리 전 시장과 얼굴을 마주 봤다.

“로미오 알피에리 대위입니다, 페리 전 시장님.”

로미오는 자신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부끄러워하는 대신 의연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페리 전 시장은 긴말 없이 짧게 인사를 받았다.

“반갑소이다.”

첫 만남에 사람들은 흔히 악수나 묵례 외에도 눈짓 인사를 했으나 로미오에게는 그런 것이 불가능했다. 페리 전 시장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불편하게 대화를 이어 가는 대신 자신을 찾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럼.” 하고 로미오가 아닌 조반니에게 인사한 뒤 돌아섰다. 페리 시장의 짧은 그 한마디를 사람들의 잡담 틈에서 겨우 들은 로미오는 더 이상 시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조반니에게 물었다.

“가셨습니까?”

로미오에게 매끄럽지 않은 인사로 느껴졌을 거라는 걸 안 조반니는 페리 전 시장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네, 가셨습니다.”

로미오의 표정이 어두워지기도 전에 31인 위원회의 위원 두 명이 다가왔다. 로미오가 목소리로 추측하기 힘든 인물들이었다.

“출판 축하하네, 조반니.”

“축하하네.”

“두 분 다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늦은 시간인데도 감사하게 자리해 주셨군요.”

“5년간의 연구 성과를 축하하는 자리 아닌가. 의미 있는 자리이니 마땅히 와야지. 수고 많았네.”

“괄목할 만한 성과야. 루바노 해부학의 발전은 자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지.”

“바라건대 이번에 출판되는 제 해부학서가 해부학계의 부흥을 일으킬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조반니와 담소를 나눈 두 사람은 페리 전 시장과 마찬가지로 로미오에게 아주 짧게 인사하고 돌아갔다. 두 사람이 가고 나자 몇 사람이 더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자 조반니는 창가에 서 있는 레오나르도와 친치아에게 손짓을 했다.

“대위님께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분들이 계시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그러십시오.”

자신이 적절한 대화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로미오는 사람들이 적당히 예의를 갖추는 척하며 자신과 길게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자 복잡한 심경이 됐다. 그들은 자신이 맹인인 것을 알고서 악수를 청하는 것조차 자제했다. 이런 사교적인 모임에 욕심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태도가 마치 자신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쉬지 않고 상기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눈이 어두운 것뿐이지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레오나르도, 친치아. 인사드려. 이쪽은 로미오 알피에리 대위님이셔.”

두 사람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넓게 트여 있던 앞이 가로막혀지는 느낌과 함께 발소리가 가까이에 와서 멎었다. 로미오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자신보다 키가 크다고 느꼈다.

“제가 먼저 인사드려도 될까요?”

어린 소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친치아 콘델로라고 해요. 스포르차 선생님과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죠. 만나 뵙게 돼서 무척 반가워요.”

‘스포르차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친치아가 평소에 쓰는 것이 아니고 그와의 관계를 위장할 필요가 있을 때 쓰는 호칭이었다. 친치아는 본래 조반니를 당신 혹은 조반니라고 불렀는데 두 사람은 같은 비밀 결사 단원이라는 것 외에는 연결 고리가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다.

“로미오 알피에리 대위입니다.”

로미오는 친치아라는 소녀의 목소리가 명랑하고 밝지만 힘이 있다고 느꼈다. 끝이 명료한 데다 어투에서 빠르거나 가벼운 느낌이 없었고 앳된 소녀임에도 목소리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어린 소녀와 이야기 나눌 기회가 적었으나 비슷한 나이대인 베티나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계시네요? 샴페인을 한 잔 가져다드릴까요? 스포르차 선생님이 특별히 이번 축하회를 위해 리치 지방에서 생산해 50년을 숙성시킨 샴페인을 준비하셨어요.”

로미오는 친치아의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오자 고개를 숙였다. 낯선 상대인 자신을 친근하게 대하는 이 소녀는 샴페인이 꽤 입에 맞은 모양이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로미오는 몰랐으나 친치아는 로미오의 외모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도 조반니에게 로미오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맹인이라는 것과 이름만 알았을 뿐 이렇게 아름다운 사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루바노에 온 이래 이렇게 수려한 외모를 가진 사내는 처음 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위님, 이자의 이름은 레오나르도로 그는 제 오랜 벗입니다.”

조반니가 소개하자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오나르도 디오니시오라고 합니다.”

차분하고 낮은 음성을 들으며 로미오는 레오나르도가 과묵한 사내일 거라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자신의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봐 키가 조반니만큼 클 것으로 짐작됐다.

“만나 뵙게 돼 반갑습니다.”

로미오가 인사를 건네자 레오나르도는 조용한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오래 보지 않아도 로미오가 눈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선이 자신의 얼굴이 아닌 애매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손에 쥔 지팡이는 낡은 것처럼 보였는데 손잡이가 흔들거렸다. 군복은 흐트러짐이 없어 복장에서 별다른 것을 느낄 수는 없었다.

“이보게, 조반니.”

때마침 도착한 질송 선생이 계단을 올라왔다. 기다리던 손님이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반색을 했다.

“질송 선생님! 이제 오셨군요. 먼 걸음 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자네의 그 집요한 부탁이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거야. 오늘도 말일세, 저녁 늦게까지 딸애와 예식 문제로 한바탕 골머리를 앓았어. 이 축하회가 끝나는 대로 금방 다시 가 봐야 해.”

“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따님의 혼인식에 꼭 참석할 테니 제일 먼저 불러 주세요.”

질송 선생의 뒤로는 그의 제자인 블레즈 선생도 있었는데 그는 조반니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로미오를 보고 놀라 말했다.

“로미오?”

“이 목소리는…… 블레즈 선생님?”

조반니는 블레즈와 로미오가 아는 사이라는 걸 다소 음침한 방법으로 알아내 이미 알고 있었다. 블레즈는 지난 몇 년간 로미오의 눈을 꾸준히 진찰해 오고 있는 로미오의 주치의였다. 최근 몇 달간 로미오가 병원에 얼굴을 비치지 않아 아주 오랜만에 만난 것이었는데 당연하게도 블레즈는 조반니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로미오 자네가 어떻게 여기 있나?”

“스포르차 선생님의 초대를 받아 왔습니다.”

“조반니와 아는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구만. 그런데 눈은 좀 어떤가? 지난달에 진찰을 받았어야 했는데 사정이 있다고 오지 않았었지?”

“일이 바빠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사이에 시력이 많이 떨어져 선생님을 뵈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정기적으로 들르라니까 자네도 참 말을 듣지 않아.”

“죄송합니다… 뭐라 변명할 말이 없군요.”

“병원에 오길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한 명도 본 적이 없으니 이해하네. 여기서 이렇게 만난 김에 간단히 살펴볼까?”

블레즈가 들고 있던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진료 도구를 꺼내자 조반니가 끼어들었다.

“블레즈 선생님께서 대위님의 주치의셨다니 잘된 일입니다. 기분 좋은 우연이군요. 질송 선생님께서도 이렇게 와 주셨으니 그럼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제가 여러분들을 모시고 하려던 얘기는…….”

* * *

“그래서 오시라고 이야기 드렸던 겁니다. 대위님께 이렇게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런 말씀을 하시니 부담이 됩니다. 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저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블레즈 선생님께 진찰을 받으면 됩니다. 선생님께서 이런 자리에 다른 의사분들을 모시고 와 제게 도움을 주고자 애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축하회의 손님으로 온 것인지 환자로 온 것이 아닙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 그저 도움을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 대위님을 도와드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한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조반니와 로미오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라울과 인사가 끝난 갈리에누스는 손님들 틈에 섞여 있었는데 손님들의 절반 이상이 의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고리타분한 대화에 섞이는 대신 조반니와 로미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치료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으며 진단이 늦어져서 좋은 병은 세상에 없습니다. 시력이 떨어지고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시력 저하를 늦추거나 막을 방법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 치료법을 백방으로 찾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블레즈 선생님이 이 자리에 계시니 그분과 약속을 잡겠습니다.”

로미오는 해부학서 출판으로 바쁜 와중에 조반니가 자신을 도울 방법을 마련한 것에 고마움을 느꼈지만 부담도 함께 느꼈다. 그를 자신의 주치의 취급하며 눈에 대한 치료법을 맡길 마음은 없었다.

“보름 뒤에 의사 협회에서 주최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저는 그 모임에서 대위님의 시력 저하 증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입니다. 의사들 사이에서 의견이 오간다면 정확한 병명이 밝혀지거나 마땅한 치료 방법이 마련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위님께 곤란하거나 불편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제가 곁에서 지켜봐 드리겠습니다.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고 부디 제 호의를 받아 주세요.”

조반니는 의사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특이하거나 황당한 부탁을 자주 받았다. 의학적 첨언이 필요한 사소한 일에서부터 간단한 진찰 혹은 약 처방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다양한 요구를 했다. 인맥을 넓히는 수단으로 의사라는 신분을 이용했지만 뻔뻔할 정도로 당연하게 도움을 요구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면 실수인 척 증상과 전혀 상관없는 약을 줘 골탕을 먹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로미오는 특이하게도 무엇 하나 쉽게 받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 고집의 정도가 셌다. 받고도 고마운 줄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로미오는 대가 없이 무언가를 주고 싶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갖고 있었다. 목석같은 그가 자신의 도움을 어려워하는 게 꽤 귀엽기도 했기 때문에 온정이 넘치는 자상한 의사 연기에 큰 즐거움도 느꼈다.

“전 정말로 대위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게 해 주세요. 제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이마저도 하지 못할 겁니다.”

조반니는 로미오를 돕고자 하는 자신의 가련한 마음을 로미오가 부디 제대로 느끼길 바라며 그의 팔뚝 아래를 다정하게 잡았다. 로미오는 잠시 흠칫했으나 상황이 난처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팔에 닿아 있는 조반니의 손길은 금방 잊고 고민에 빠졌다.

조반니가 군복 소매 너머로 만져지는 로미오의 팔꿈치를 교묘히 쓰다듬었다가 떼는데 로미오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조반니는 로미오의 허리와 엉덩이를 덥석 잡아 그를 끌어당겨 안고 싶은 것을 참으며 팔을 놨다. 얼굴에 유쾌한 미소가 번졌다.

“저기 계신 질송 선생님께서 이 방면에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대위님께서 어떤 상태인지 저분께 말씀드리세요. 질송 선생님께서 대위님의 상태를 이해할 정도로만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제가 안내해 드리는 날에 병원으로 찾아오시면 돼요.”

“선생님께서는 질송 선생님이라는 분과 어떤 관계입니까?”

“같은 의사 협회에 가입돼 있는 데다 스승님 같은 분이라 친분이 두텁습니다. 대위님과 비슷한 증상을 겪는 맹인 환자를 여럿 치료한 경험이 있어 많은 도움을 주실 겁니다.”

그때 아래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 관리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계단을 오르는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이 잡담을 멈추고 계단을 돌아보는데 의외의 인물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 계셨군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인사한 것은 티모테오 우초 경사였다. 그들의 뒤에는 공안국 간부 네 명이 서 있었다. 초대받아 온 것이 아닌 데다 이 늦은 시간에 공안국 간부 여러 명이 집을 찾는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반가운 일이 될 수 없었지만 조반니는 웃으며 인사했다.

“경사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지요?”

“좋지 않은 일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관리인에게 듣자 하니 새 해부학서를 출판하셨다고요? 우선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티모테오는 말을 하다 말고 로미오와 갈리에누스를 발견하고 눈을 치떴다.

“두 분도 여기 계셨네요? 스포르차 교수님과는 어떻게… 아, 그렇죠. 아는 사이시죠.”

조반니가 제6군단에 끌려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티모테오는 혼자 묻고 혼자 답하더니 준비해 온 이야기를 꺼냈다. 사안이 중했기 때문에 표정이 심각했다.

“닷새 전에 공안국으로 젊은 사내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남동생이 한 달 전에 행방불명이 됐다는군요. 나흘 전에 운 좋게 남동생의 소식을 알게 됐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려고 보니 한 시체 매매 업자가 남동생의 시체를 불법으로 인수해 어느 의사에게 팔았더랍니다. 저희가 오늘 그 매매 업자를 체포해 조사했는데 그가 말하길 3주 전 자신에게 40가토를 주고 시체를 사 간 의사가 바로 교수님이라고 하더군요.”

티모테오의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로미오가 눈을 크게 뜨며 조반니를 봤다. 놀란 것은 갈리에누스도 마찬가지였다.

정적도 잠시 실내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오직 두 사람만이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바로 레오나르도와 친치아였다. 레오나르도는 조반니가 벌이는 이런 일에 신물을 느끼는 것처럼 입속으로 깊은숨만 들이마셨고 친치아는 익숙한 듯 레오나르도에게 귓속말을 했다. 시체는 해부했겠죠?

“사실입니까?”

티모테오의 의혹 섞인 물음에 조반니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대답했다.

“네, 사실입니다. 사들인 시체는 해부학 자료로 쓰기 위해 해부했습니다.”

실내에 다시 한번 수군거림이 퍼졌다. 티모테오는 공안국 간부로서 사명감을 가질 만한 인물이 아닌데다 행방불명이 돼 죽은 이름 모를 낯선 사내보다는 조반니의 입장과 체면을 더 배려했기 때문에 간부들에게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아직 축하회 중이고 교수님께 사실 확인을 했으니 일단은 돌아가겠습니다. 축하회가 끝나는 대로 다시 모시러 올 테니 저희와 함께 가셔서 조사를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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