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시골 마을 소동 (7/30)

7. 시골 마을 소동

저녁 준비를 하던 드루시아는 집 밖에서 로미오와 조반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문을 돌아봤다. 기다렸지만 두 사람은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서 말을 주고받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고 밖으로 나가니 두 사람은 마당에 서 있었다.

“바지에 흙이 묻어 있어서 그러니 가만히 계세요. 아까 묘지에서 묻은 걸 겁니다.”

“예, 압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손으로 흙을 털어 드리는 게 어려운 일인가요? 서 계시면 털어 드릴 테니 잠깐만 그대로 계세요.”

“아니요, 제가 하겠습니다. 굳이 선생님께서 하지 않으셔도…….”

컴컴한 마당 한가운데에서 조반니는 로미오의 무릎을 털어 주려고 하고 로미오는 거절하며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두 분 뭐 하고 계세요?”

로미오가 드루시아를 쳐다보는 사이 조반니가 로미오의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냈다.

“됐네요.”

씩 웃은 조반니는 일부러 두 번 더 로미오의 무릎을 톡톡 치고 드루시아에게 물었다.

“시장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네. 마침 염소 고기가 맛있어 보이기에 오랜만에 찜 요리를 했어요. 다 준비됐으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두 분은 어떠셨어요? 집에는 잘 다녀오셨어요? 어떻던가요, 대위님?”

로미오는 자신의 무릎을 턴 조반니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며 대답했다.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먼지도 많이 쌓여 있고 다녀간 흔적도 보이지 않더군요.”

“역시나 그랬군요. 어쩌나요. 실망하셨겠어요.”

“종고모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도 알 턱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세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차려져 있었기 때문에 드루시아는 마지막으로 당근 수프를 접시에 떴다.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막 식사를 하려는데 집 밖에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쿵쿵거리는 빠른 발소리가 들리더니 다급하게 문이 열렸다.

“드루시아!”

문을 연 것은 이웃집에 사는 중년 부인이었다. 그녀는 낯선 사내들인 로미오와 조반니가 함께 있자 순간 당황했으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시모가 열이 파뜰파뜰 재비고 있시! 젓번에 말한 그 약을 아즉 갖고 있시?”

드루시아는 소리 나게 의자를 밀고 일어나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약이라면 진작에 다 써 버렸는데 어떻게 하죠?”

“마시모가 한 시간 전부터 열이 내려가지 않시! 물수개를 대주고 몸을 닦어도 도대매 나아지질 않는데 방법이 없겠시?”

“저번에 받은 두 개의 약병 중 한 병을 이소타 부인께 드렸어요. 이소타 부인께 가서 같이 물어봐요.”

“이소타 부인도 진적에 그 약을 다 썼다고 하니 큰일이기. 마시모네 아재비가 의사 선생내를 부르러 갔는데 아즉 오지 않고 있시!”

마시모라는 아이가 평범한 고열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년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네베 말을 알아듣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둘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조반니였다.

“마시모라는 아이의 증상이 정확히 어떻습니까?”

낯선 사내인 조반니가 대뜸 묻자 중년 부인은 조반니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수상하다고 하기에는 조반니가 지나치게 멀끔하고 인상이 좋은 데다 마시모라는 아이의 상태가 극히 위중했기 때문에 일단 대답했다.

“기운 없이 늘어져 이마가 불등이처럼 뜨겁시나.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고 저나 때까지만 해도 혼저 물을 먹었는데 지쯤은 누워만 있시나.”

“아이가 몇 살입니까?”

“젓번 달에 열 살이 됐시나.”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전 의사입니다. 같이 가시죠.”

용케 말을 알아들은 조반니가 자신의 가방을 챙기자 중년 부인이 드루시아와 마주 봤다. 드루시아는 구세주라도 발견한 듯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이분은 바치에서 온 의사분이에요. 마시모한테 어서 가요!”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을 듣고 있던 로미오가 합세하자 네 사람은 집을 나섰다. 중년 부인이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고 세 사람은 뒤를 따라갔다.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드루시아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3층 집이었다. 마당에 풀려 있던 닭들은 네 사람이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서자 푸드덕대며 도망갔다.

“의사 선생내를 데려왔시나!”

환하게 불이 밝혀진 집 안에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긴 의자에는 마시모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두꺼운 요를 덮고 누워 있었고 사람들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는 아이의 머리를 받치고 수건으로 연신 이마를 닦아 주고 있었는데 낯빛이 초조했다. 사람들은 의사를 데려왔다는 말에 네 사람을 돌아보았지만 중년 부인이 데려온 것이 낯선 외지인이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반니는 열을 내리는 방법에 대해 한마디씩 거드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전 바치에서 온 의사입니다. 사정이 있어 네베에 머무르게 됐는데 아픈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왔습니다. 마시모라는 소년이 이 아이인가요?”

마을이 좁고 사람 수가 적었기 때문에 마시모를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은 도움을 주기 위해 이곳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유달리 경계심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의사라고 밝히는 외지인에게 무턱대고 아이를 살펴보라고 할 수는 없는 터라 다들 미심쩍은 표정이 됐다.

“의사? 바치 의사가 뭇을 하러 이런 머루에 있시다? 머시로 의사가 맞는개?”

아이의 머리맡에 서서 물수건을 들고 서 있던 어느 나이 든 사내가 물었지만 조반니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못 알아듣겠군요.”

뛰어오느라 가슴의 통증 때문에 거친 숨을 고르던 로미오가 조반니에게 다가갔다.

“정말로 의사가, 하아… 맞는지, 하… 묻습니다.”

조반니는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사 협회에 가입한 의사들에게 주어지는 배지를 꺼내 보였다. 모든 의사는 반드시 최소 한 개 이상의 협회에 가입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의사들은 평소 배지를 패용해 다니다가 자신의 신분을 알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를 보여 주고 자신에게 의학적 처방을 내릴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다.

“확인시켜 드렸으니 이제 아이의 상태를 보겠습니다.”

조반니가 팔을 걷고 다가가자 마시모라는 소년이 눈을 반쯤 뜨고 조반니를 올려다보았다. 까무잡잡하게 그은 피부를 가진 건강한 소년이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어디가 아픈지 직접 말할 수 있겠어?”

“으으…….”

앓는 소리를 낸 마시모는 몸이 축 처졌다. 대신 대답한 것은 아이의 어머니였다.

“열이 및 시간째 내려가지 않고 있시나.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이마에 열이 재벼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시나.”

숨이 차 가슴을 짚고 기침을 하던 로미오는 곁에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덥석 어깨를 잡아 흠칫 놀랐다. 그런데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아주머니는 활짝 웃고 있었다. 얼굴이 뿌옇게 보이는 와중에 웃고 있는 입 모양이 보였다.

“로미오? 로미오인개?”

목소리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어 머뭇거리는데 아주머니가 어깨에 이어 두 손을 잡았다. 잡은 손을 통해 반가운 기색이 느껴졌다.

“나이기, 산티나! 이게 얼마만이기?”

산티나? 생각에 잠긴 로미오는 그녀가 누구인지 금방 깨닫고 네베에 온 이래 가장 밝은 얼굴이 돼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산티나 아주머니셨군요. 여기서 이렇게 뵙다니 놀랐습니다.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셨어요?”

“어쩌다 아서 만나나 그리! 도대체 이게 및 년만이기? 어떠이 말도 없이 겁기 네베에 왔시?”

“고향 생각이 나 왔습니다. 5년 만이죠. 아주머니께 제일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직 이 마을에 사셨군요?”

“당히 아서 살지. 에이그, 못 본 적에 아주 시내가 다 됐시. 피에트로와 엔초는 잘 지내고 있시?”

“예, 바치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산티나라는 이름의 아주머니는 반색을 하며 로미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녀는 아주 옛날부터 이 마을에 살고 있어 로미오는 물론 로미오의 부모님과도 잘 알았다. 사관 학교를 졸업한 로미오가 이곳을 떠나던 날 밤, 마을의 광장까지 나가 배웅을 했던 그녀였다.

“아주머니께서는 하나도 안 변하신 것 같습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로미오는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처럼 건강해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실은 목소리를 듣고 건강 상태를 유추했지만 ‘건강하게 들린다’는 말은 부자연스러웠으므로 보인다고 표현했다.

“나야 널선 몸이 건강하지. 게나제나 눈은 좀 괜찮은 거이기? 아를 떠날 때도 잘 못 보지 않았시? 지쯤은 좋아졌는개?”

“아니요. 똑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아지지는 않을 거예요. 오랜만에 이렇게 뵀는데 아주머니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에이그, 어쩌다 그러이 됐시… 내가 도와줄 방법이 없는개?”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갠데 저기 저 의사 선생내는 바치에서 데려온 손님이기?”

“예. 바치에서 같이 온 의사 선생님이십니다. 아픈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달음에 오셨습니다. 유능한 분이세요.”

산티나는 로미오의 손을 꼭 잡은 채 사람들 틈에 있는 자신의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리 와보서게!”

산티나의 부름에 그녀의 남편인 세베리노가 이쪽을 돌아봤다. 그는 로미오를 보자마자 얼굴이 밝아져선 얼른 다가와 큰 소리로 인사했다.

“이게 누구이기? 머시 로미오인개? 어쩌다 아서 만나나!”

“세베리노 아저씨지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다마다! 이야, 네가 및 년 전에 아를 떠났지? 얼마 만에 온 거이기?”

“5년 만입니다. 목소리를 들으니 편찮으신 곳 없이 건강하게 지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너 아서 떠날 때도 눈이 안 좋았지? 아즉도 그런개?”

“예, 그때와 똑같습니다. 벨리사와 루이지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이제 둘 다 학교에 다닐 나이죠?”

“그럼, 잘 지내지! 네가 아 와있는 줄을 알면 둘 다 그릿말인 줄 알 거이기. 어떠이 말도 없이 왔시 그리?”

세베리노와 로미오가 대화하는 동안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람들 몇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로미오를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로미오? 너 로미오이기?”

“이 목소리는…… 트리솔라 아주머니신가요?”

“그리! 어떠이 네가 마시모네 집에 있시? 언제 네베에 온 거이기?”

“고향 생각이 나 왔습니다. 그동안 몸 건강히 잘 지내셨어요? 아주머니께서도 5년 전과 비교해 그대로이신 것 같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이기? 너 로미오 아니기? 로미오 맞시?”

“누구…… 아브리아나?”

“이게 및 년 만이기! 데시 오랍, 이리 와보서게. 아에 로미오가 있시!”

산티나를 시작으로 로미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로미오를 알아보고 몰려들어 인사를 했다. 로미오의 부모가 마차 사고로 죽었을 때 마을 안에서 장례식을 치렀기 때문에 알피에리 집안과 친하지 않았더라도 ‘그 집 삼 형제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더라.’ 하고 옛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그 삼 형제 중 첫째가 군인이 돼 이곳을 떠났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었다.

“떠나기 전에 다들 뵙게 돼 다행입니다. 예, 그럼요. 피에트로와 엔초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니요, 눈은 여전히 나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반니가 마시모를 진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게 인사할 수 없는 로미오는 적당히 대화를 끝내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마시모의 상태를 지켜봤다. 로미오의 곁에 선 산티나만이 반가움이 쉽게 가시지 않아 로미오의 등을 연신 토닥였다.

“언제부터 열이 났습니까?”

조반니가 마시모의 열을 재며 물으니 마시모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섯 시간 전부터 나기 시작했시나. 어적에도 열이 나 물을 먹이니 급장 내려갔어게.”

네베 말을 이해하기 힘든 조반니가 로미오를 돌아보자 로미오가 대답했다.

“세 시간 전부터 났고 어제도 열이 있어 물을 먹이니 금방 내려갔다고 합니다.”

고열이 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사혈 도구를 쓰기에 앞서 원인을 찾기 위해 마시모의 몸을 살폈다. 이상한 점이 발견된 것은 어깨를 짚었을 때였다. 마시모의 왼쪽 어깨뼈와 쇄골을 만진 조반니는 표정이 달라져 두 손으로 어깨와 등 전체를 만졌다. 손이 닿자 마시모는 몸을 웅크리며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으으…….”

마시모가 아파하자 마시모의 어머니는 불안한 눈이 돼 조반니에게 물었다.

“어깨에 문제라도 있시다? 열이 재빈데 왜 어깨를 보서게?”

조반니의 등 뒤에 서 있던 로미오가 그녀의 말을 전했다.

“어깨를 살피는 이유가 궁금하시답니다. 어깨뼈에 문제가 있습니까?”

“네. 일단 옷을 벗겨야겠습니다.”

“므신 문제가 있시다? 옷을 왜…….”

마시모의 어머니가 머뭇거렸지만 조반니는 기다리지 않고 마시모의 웃옷 소매를 어깨 밑으로 잡아 내렸다. 마시모의 왼쪽 어깨가 드러나자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에그나, 저게 다 뭐인개!”

“어깨가 어떠이 된 거이기?”

“몸에 문제가 있시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구만! 아이나가 죽게 생겼시!”

마시모의 왼쪽 어깨뼈는 몸 안에서 어긋난 것처럼 이상한 형태로 튀어나와 있었다. 마시모의 어머니는 아들의 어깨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해 얼굴이 백지장이 됐고 마시모는 팔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신음했다.

“아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진 적이 있습니까?”

“어, 어, 없시나. 어깨가 왜 이러는 거시다? 어깨가, 왜…….”

“외부 충격으로 뼈가 제자리를 이탈한 탈구(脫臼) 상태입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들의 경우 팔을 힘껏 잡아당기는 것으로도 팔 관절의 바깥쪽이 탈구되기도 합니다. 떨어진 적이 없다면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적은 없습니까?”

조반니가 재차 묻자 마시모가 눈꺼풀을 푸들푸들 떨었다. 눈치를 보듯 어머니를 쳐다본 마시모는 겨우 입술을 열어 말했다.

“나즘에…… 아까 나즘에 지벙에서 뛰어달다가 발을 헛디뎌 냄쳤어게… 혼지가 날까 말을 못했시…….”

마시모의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지벙? 지벙에서 떨어졌시?”

“으응…….”

자신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반니가 로미오를 돌아보자 로미오가 즉시 대답했다.

“낮에 지붕 위에서 놀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답니다. 어머니에게 혼이 날까 봐 거짓말을 했나 봅니다.”

마시모의 어머니는 아들의 몸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겁에 질려 조반니를 쳐다봤다.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행여나 어린 아들이 잘못될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제 어떠이 되는 거시다? 튀난 뼈를 맞출 수 있서게?”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조반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뒤로 돌아갔다. 조금 전 조반니에게 의사가 맞는지를 물었던 사내는 충격을 금치 못하고 마시모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마시모의 삼촌인 그는 조카가 아프다는 여동생의 말에 급히 집을 찾은 것이었다. 조반니는 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며 마시모의 어머니에게 설명했다.

“지금부터 어긋난 뼈를 맞출 겁니다. 아이가 많이 아파하겠지만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는 데다 별도의 도구가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에 금방 끝날 겁니다. 단, 아이가 비명을 지를 수도 있습니다. 뼈를 맞추는 동안 아이가 몸을 뒤틀지 않게 가슴과 허리를 단단히 잡아 주세요.”

뼈를 맞출 수 있다는 말에 마시모의 어머니는 놀라는 한편 안도한 듯 보였지만 마시모의 낯빛은 하얗게 질렸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아픈 뼈를 손으로 누른다니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다리를 잡아 주시겠습니까?”

조반니가 지시하자 마시모의 삼촌이 마시모의 다리를 잡았다. 그러자 마시모가 발버둥을 쳤다.

“으아아! 그러이 만지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시나! 내버려 두서게!”

마시모의 어머니가 아들의 가슴을 껴안자 조반니가 한 손으로 마시모의 어깻죽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등을 감쌌다. 본래 기운 넘치는 소년인 마시모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 아프, 아프단 말이기…! 만지면, 으아악, 으아!”

“꽉 잡아 주셔야 합니다.”

“머시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없시다?”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물으신 겁니까? 네, 이게 가장 간단한 방법입니다. 제대로 잡아 주시기만 하면 금방 끝납니다.”

마시모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자 어머니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아이를 잡았고 마시모의 삼촌도 발밑에 서서 두 다리를 붙잡았다. 사람들은 차마 제대로 보지 못해 고개를 돌리거나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조반니는 더듬거리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마시모의 어깻죽지 부분을 잡더니 손바닥으로 압박해 어긋난 뼈를 힘껏 밀어 올렸다.

“으, 아아악!”

마시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괴로워하는 것도 잠시 끔찍하게 튀어나와 있던 관절이 쑥 들어가며 눈 깜짝할 사이에 어깨가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갔다. 그야말로 감쪽같았다.

“으, 흑흐, 흐…….”

바로 방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던 마시모는 흐느끼다 말고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봤다.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도 놀라서 손가락질을 했다.

“어깨가 본대로 돌아갔시나!”

“이야, 아이나가 이제 소리도 지르지 않시.”

“기! 물 한잔 떠올 수 있는개? 마시모에게 먹어야겠시.”

마시모가 울음을 그치자 마시모의 어머니는 놀라서 아들을 껴안았다.

“팔을 움직여 보겠어?”

조반니의 말에 마시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머니를 올려다보곤 왼쪽 팔을 들었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아팠던 팔이 거짓말처럼 움직여졌다. 약간의 열이 남아 있었지만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조반니는 마시모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원을 그리듯 팔을 돌리게 한 다음 머리 위로 들어 올리게 했다.

“이렇게 해도 아프지 않지?”

마시모는 일어나 앉아 팔을 천천히 돌렸다. 우느라 뺨이 축축했지만 다 낫기라도 한 듯 중얼거렸다.

“겁기 아프지 않시…….”

조반니가 마시모의 이마를 짚어 열을 재는 사이 마시모의 어머니가 놀라면서도 기뻐하며 아들을 감싸 안았다.

“이제 머시로 안 아픈 거이기?”

고열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외관상으로 보이는 문제가 없는지 마시모의 얼굴을 살피던 조반니는 마시모의 입 속에 이가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러지거나 사고로 빠진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자연히 빼야 하는 이를 뽑은 것이었다.

“최근 이틀 사이에 아이가 이를 뺐습니까?”

“지난 및 칠 동안 헌지 흔들려 어적 나즘에 문고리에 실을 감아 뺏어게.”

“어제 빼셨단 말이지요? 발치 후 흔히 고열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턱을 만져 보면 이를 뺀 부위에 미약하게 열감이 있군요.”

조반니는 의자 바닥에 떨어져 있는 두꺼운 요를 주워 들었다. 마시모가 덮고 있었던 요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옷을 벗길 때 만져 보니 겨드랑이도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열이 날 때 옷을 겹겹이 입히거나 요를 덮어 주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몸이 뜨거워지면 열로 인한 경련이 일어날 수도 있고 땀을 지나치게 흘릴 경우 몸 안의 물기가 모자라 의식이 몽롱해지거나 정신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발치로 인한 미열이 이 요 때문에 고열로 바뀌었을 겁니다. 약을 드릴 테니 지금 바로 아이에게 먹이고 내일 마을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보도록 하세요. 감염 문제가 아니라면 열은 수일 이내에 내려갈 겁니다. 마시모, 입을 벌려 보겠어?”

조반니는 가방에서 입 안을 볼 수 있는 도구를 꺼냈다. 마시모가 입을 벌리자 입 안에 넣어 이가 빠진 부위를 살폈다.

“출혈이나 부종은 없으니 우선 약을 먹이는 것으로만 처방을 내리겠습니다. 또 아픈 곳이 있을까, 마시모?”

“없시나. 전혀 없어게.”

“어머니께선 오늘 밤 아이의 상태를 지켜봐 주십시오.”

조반니가 약을 꺼내자 사람들이 물을 가져다줘 마시모에게 먹였다.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지만 조반니는 자신이 오기 전까지 어깨가 탈구된 채 아파했을 마시모에게도, 자신이 그 탈구된 뼈를 맞춰 이 소동을 해결한 것에 대해서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가방을 정리했다.

“고맙시나. 의사 선생내가 오지 않아 큰일이 날 줄 싶었는데 이러이 도와주셔서 머시 고맙시나. 진찰비와 약값은 급장 드리겠시나. 그갠데 혹시 아즉 식사를 하지 않으셨으면 아서 하시는 게…….”

“아니요. 진찰비는 됐습니다. 약값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아픈데 의사가 없다기에 급히 와서 봐 드린 것뿐입니다. 저녁 식사도 감사하지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이제 네베 말을 절반쯤 알아듣게 된 조반니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불쑥 나선 것은 그 경광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마시모의 삼촌이었다.

“저나 식사는 내가 저대하겠시나.”

광장 근처에서 식당이 딸린 여관을 운영하는 마시모의 삼촌은 기세 좋게 나서더니 조반니를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의사 선생내께서 조카를 살려주셨으니 당히 식사를 저대해야 하지 않겠시다?”

역시 절반만 알아들은 조반니가 로미오를 쳐다보자 로미오가 말했다.

“아이의 삼촌 되시는 분인가 봅니다. 선생님께 저녁을 대접하시겠답니다.”

그때 산티나가 끼어들었다.

“아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집으로 모시겠시나. 매짐 우리도 저나를 먹으려던 참이었어게.”

“멀리까지 갈 필요 있는개? 우리 집이 아서 급장인데 가서 다 같이 먹는 게 어떻겠시다?”

“의사 선생내만 괜찮으시면 우리 집으로 가서 저나를 드시는 게 좋겠시나. 어적에 염소를 잡아 염소구이를 저대할 수 있어게.”

“식사 저대라면 아서 하서게. 마시모가 이러이 감쪽같이 나았으니 당히 우리가 저대를 하여야…….”

서로 잘 아는 사이라 다 같이 저녁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로미오를 모르는 사람들, 서로 잘 알지 못하지만 로미오는 아는 사람들, 로미오는 모르나 마시모를 치료해 준 의사 선생에게 식사를 대접하려는 사람들이 뒤섞여 여기서 다 같이 저녁을 먹어야 한다, 우리 집으로 가야 한다며 식사 자리를 놓고 각자 의견을 냈다.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 로미오가 그들을 지켜보는데 조반니가 고개를 기울여 귀엣말을 했다.

“저분들은 대위님을 아는 분들이신가요?”

“예.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 마을에 살고 계셔서 어머니, 아버지와도 잘 아는 분들이십니다. 저를 먼저 알아보셔서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내일 바치로 그냥 돌아갈 뻔했군요. 마시모가 아니었더라면- 예, 아주머니. 저는 어디서 식사하든 좋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 보인다고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역시 고향은 고향인가 봅니다.”

여관으로 가자는 쪽으로 결정이 기우는 것을 지켜보던 로미오가 조반니를 올려다봤다.

“즐거워 보이셔서 저도 기분이 좋군요.”

“제가 말입니까?”

“네. 당연한 겁니다. 고향이란 그런 곳이죠. 그런 곳이어야 하고요.”

식사 자리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마을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마시모가 다가와 조반니의 팔을 당겼다.

“의사 선생내.”

허리를 굽혀 마시모를 내려다본 조반니는 로미오를 흘깃 본 후 특별히 더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마시모. 궁금한 게 있어?”

“잠깐 기다려 주겠어게?”

마시모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겅중겅중 뛰어 올라가더니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내려왔다.

갖고 내려온 것은 자신이 직접 만든 달걀 꾸러미였다. 짚을 엮어 만든 그것은 달걀을 담아 벽에 걸어 보관할 수 있는 꾸러미로 가볍지만 튼튼하고 유용해 보였다.

“받아주서게. 감사한 뜻을 담아 드리고 싶시나. 어깨를 고쳐주셔서 머시로 고맙시나.”

* * *

“자, 멈껏 드서게! 언제든 말씸하시면 더 가져다 드리겠시나. 술이든 음식이든 다 말씸하서게.”

마시모의 삼촌은 주방에서 저녁 식사와 함께 술을 한가득 내왔다. 그는 식사와 술값을 받지 않겠다며 로미오와 조반니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자신의 여관까지 데려왔다.

“조카를 도와주셨으니 이 정도 저나는 저대해야 하지 않겠시다? 의사 선생내가 아니었으면 그적 없이 마시모가 밤새 앓았을 거시나.”

“저 역시 마침 네베에 머무르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건강해졌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마시모의 삼촌은 햄과 감자로 속을 채우고 하얀 치즈와 올리브를 곁들인 귀리빵과 채소 양념을 끼얹은 양고기 구이, 옥수수 가루와 호밀을 넣어 만든 옥수수죽 외에도 네베의 지리적 특색이 강한 음식들을 주방에서 쉴 새 없이 내왔다.

우윳빛이 도는 하얀 치즈는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이 특징이었는데 양과 염소의 젖으로 만든 네베 특산물이었다. 소금으로 염장한 양고기 역시 네베에서 생산하는 전통주로 구워 달면서도 독특한 맛이 났고 옥수수죽은 네베 농민들의 주식으로 배불리 먹는 것이 목적인 소박한 음식이었지만 갖가지 재료를 추가해 감칠맛이 나는 데다, 무엇보다 로미오가 어려서 자주 먹던 음식이라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걸쭉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특징인 옥수수죽은 갓 끓였을 때는 부드럽게 떠먹을 수 있었고 식으면 베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졌는데 어느 쪽이든 식감이 부드러워 먹기 좋았다. 수프보다 걸어 덩어리진 건더기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적은 양으로도 쉽게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제대로 된 고향 음식을 먹을 기회가 생겨 기쁩니다.”

로미오는 먹는 것에서 만족감이나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본 고향 음식들에 마음이 풀어져 여관 주인에게 미소까지 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은 산티나도 그 사실을 알고 로미오의 손을 토닥였다.

“그동안 네베 음식이 헌지 먹고 싶었을 거이기. 헌뜸 먹어둬.”

농사일에 지친 마을 사람들이 주로 들르는 여관에 묵고 가는 여행객은 많지 않았지만 술을 마시러 오는 손님들이 꽤 많았다. 이곳에서 하루 자기로 한 로미오와 조반니는 내일 아침 마차를 타고 바치로 돌아가기로 계획을 잡고 즐거운 식사를 했다. 드루시아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해 술을 마실 수 없었기 때문에 간단한 식사를 끝내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점심을 대접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엔초를 돌봐 주셨던 것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살 일이 없으니 엔초에게는 그 무렵의 일들이 고향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될 겁니다. 좋은 기억으로 남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뭘요. 두 분 다 바치까지 조심히 돌아가세요. 다음번에 다시 네베에 오시면 함께 식사를 해요. 피에트로와 엔초에게도 꼭 안부 전해 주세요, 대위님.”

늦은 밤이었지만 로미오와 조반니는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 내일 드루시아에게 보내 달라며 식당에서 파는 가장 비싼 포도주 한 병의 값을 지불했다. 점심 식사를 대접받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짧은 편지도 한 통 쓰며 바치에 오게 된다면 근사한 식사를 한 끼 대접하겠다고 적었다.

“이런, 이 치즈는 맛이 굉장히 독특하군요. 식욕을 자극하는 풍미가 느껴집니다. 꿀이나 후추를 곁들여 먹어도 맛있겠어요.”

“헌지 드서게. 이걸 먹어야 제대로 네베 맛을 봤다고 할 수 있시나.”

“아서 드신 네베 음식이 생각나면 나적에 또 오서게, 의사 선생내. 그때는 제가 저나를 저대해 드리겠시나.”

“의사 선생내께 이 음식들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시나. 아까지 왔다면 이걸 반디 먹고 돌아가는 게 상정이시나. 전통주도 한 잔 드셔 보서게.”

로미오와 조반니가 내일 아침 타고 갈 마차에는 마시모의 어머니에게 받은 달걀 바구니가 실려 있었다. 닭을 키우는 마시모의 집은 질 좋은 달걀이 자랑거리였기 때문에 마시모의 어머니는 진료비와 약값을 거절한 조반니에게 신선한 달걀을 바구니 가득 담아 선물했다. 마시모네 달걀은 바치에서 파는 것과는 빛깔부터 다른 데다 크기도 크고 무거웠으며 비린 냄새 없이 신선했다.

“이건 정말 옛날 생각이 나게 하는군요.”

로미오는 조반니가 그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식욕을 보이며 옥수수죽을 떠먹었다. 새로운 맛을 알게 된 조반니도 기분 좋게 식사를 했는데 그에게 이 자리는 엄밀히 말해 기회와도 같았다.

“대위님께서 어린 시절에 자주 드시던 음식인가요?”

“예. 저는 일곱 살 때부터 이 옥수수죽을 끓이는 법을 알았습니다. 주식으로 먹었던 음식입니다.”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로미오는 어깨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고개가 숙어졌다. 음식을 식탁이나 바닥에 떨어뜨리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탓에 그러지 않기 위해 느리게 숟가락질을 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섯 숟가락을 떠먹을 때 한 숟가락을 떠먹는 식으로 천천히 옥수수죽을 맛본 뒤 빵을 집어 들었다. 빵 위에 얹어져 있던 치즈와 올리브가 접시 위로 쏟아지고 빵 속에 든 속 재료도 흘러내렸지만 더듬거리지 않고 빵을 작게 뜯어 한 입 먹었다. 처음 차려진 그대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욕심내지 않고 얌전히 먹었다.

“대위님. 빵을 접시에 덜어…….”

“에이그, 접시에 덜어 줘야…….”

동시에 말한 조반니와 산티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빵을 먹던 로미오도 손을 멈추고 두 사람을 쳐다보자 산티나가 로미오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의사 선생내께서는 로미오와 뭇 때문에 같이 네베에 오셨시다? 어떠이 하다 알게 된 사이서게?”

로미오는 빵을 손에 쥔 채 조반니에게 말을 전했다.

“산티나 아주머니께서 선생님께서 저와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궁금하신가 봅니다.”

조반니의 시선이 빵을 쥔 로미오의 손에 잠깐 머물렀다. 핏줄이 비치지 않는 로미오의 흰 손은 대리석 속에서 꺼낸 조각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됐습니다. 이제 같은 하숙집의 2층과 3층에 사는 이웃이라 언제든 뵐 수 있는 사이이기도 합니다. 네베는 제가 와 본 적 없는 곳이기도 하고 좋은 경치도 구경할 겸 따라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줄 알았다면 더 일찍 네베를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드릴 걸 그랬네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실은 선생님께 포도밭이라도 보여 드려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포도밭요?”

“네베에는 전통주를 재배하는 포도밭이 있습니다. 포도밭을 키우는 분은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원하신다면 수소문해 구경시켜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께 포도밭은 시시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조반니는 피식 웃었다. 포도밭이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하는지 눈을 떼지 않고 줄곧 지켜봤는데 언제 그런 귀여운 생각을 한 것일까.

“그런 걱정을 하고 계셨다니 몰랐네요. 하지만 그 편도 괜찮았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 바다는 원 없이 보고 자랐으나 농원을 구경해 본 적은 없으니까요.”

로미오는 빵을 다 먹고 남은 옥수수죽을 떠먹었다. 문제는 옥수수죽의 양이 얼마 남지 않아 바닥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로미오는 숟가락 끝의 느낌으로 접시에 죽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았지만 보이지 않아 제대로 죽을 뜨지 못했다. 그릇 밖으로 죽이 밀려나더라도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 접시 바닥을 숟가락으로 긁다시피 하며 어렵게 죽을 떴다.

“나적에 또 네베에 오서게. 거면 포도밭을 구경시켜 드리겠시나. 나 아는 분께서 포도밭을 걸지고 있어게. 로미오와 꼭 다시 네베에 들르서게, 의사 선생내.”

로미오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아브리아나라는 여인이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키에 영리하게 생긴 까만 눈을 가진 그녀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로미오와 옛이야기를 나누며 밀린 회포를 풀었다.

“의사 선생내를 모시고 다시 와, 로미오. 의사 선생내가 안 된다고 하시면 혼저라도.”

“그래. 사정이 된다면 꼭 다시 올게.”

“피에트로와 엔초도 데려올 수 있시?”

“응. 그럴 거야.”

“바치는 아보다 번잡하고 사람들도 많지? 그러시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기. 고향 머루에 내려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어 큰 일이 있나 했시. 마시모네 집에서 이러이 마주쳐서 잘 됐시.”

“그리, 로미오. 마시모가 아니었으면 너 내일 아를 떠나도 아무도 모를 뺀 했시.”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뵈러 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지에 들르느라고 그랬어요.”

“어쩐다고 말도 없이 그러이 혼저 묘지에 찾아갔시?”

“죄송합니다. 다음번에 네베에 오면 꼭 제일 먼저 뵈러 올게요.”

천성이 그렇지 못한 로미오는 겸연쩍어하며 말을 아꼈다. 마시모의 일이 아니었다면 노을이 질 때까지 묘지에 머무르다 마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다음 날 바치로 돌아갔을 것이다. 다들 자신을 따뜻하게 반겨 줄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자신이 고향에 돌아왔음을 알리고 함께 식사를 하기엔 너무 오랜만에 고향에 오기도 했고 그간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생각이었다.

“못 먹겠시?”

음식이 나온 직후 로미오에게 음식의 위치를 하나씩 짚으며 알려 줬던 데시라는 청년이 로미오가 옥수수죽을 떠먹는 것을 지켜보며 물었다. 그는 로미오보다 대여섯 살가량 나이가 많았는데 키는 크지만 몸이 호리호리해 농사꾼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어렸을 때부터 로미오와 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요즘 농사일은 어떤가요?”

“아서는 널선 일이 비슷비슷해 특별할 것도 없시. 그저 이러이 저나 때 술이나 한잔 마실 수 있으면 족한 거이기.”

로미오는 한 손으로 옥수수죽 접시를 잡고 숟가락으로 접시 모서리로 죽을 몰아 떠먹었다. 제대로 뜨지 못해 한 입도 되지 않은 적은 양을 뜨기도 하고 빈 숟가락을 입에 넣기도 했지만 인내심을 갖고 찬찬히 떠먹었다.

옥수수죽 접시를 그럭저럭 비워 내고 나자 빵 귀퉁이를 뜯어 먹었는데 조반니는 로미오가 빵 속에 든 감자 조각을 허벅지 위에 떨어뜨리자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훑어본 후 슬며시 고개를 빼 식탁 아래를 확인했다. 감자 조각은 로미오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 떨어져 있었다.

앉아 있느라 주름이 진 바지 중심부와 상의에 덮인 허벅지에 시선이 꽂혔다. 바지 너머, 속옷 안쪽에 들어 있을 발그스름한 로미오의 성기가 떠올랐다. 흰 허벅지 사이에 자리하고 있을 음모 없는 음낭과 부드럽게 늘어진 성기를 상상하니 아랫배가 절로 묵직해졌다.

눈을 굴려 로미오의 얼굴을 쳐다본 조반니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손으로 코와 광대뼈 언저리를 가리고 로미오의 허벅지 사이를 봤다. 벌리고 있던 다리를 오므려 딱딱해지기 시작한 성기를 비비듯이 조이는데 로미오의 허벅지 위에 있던 감자 조각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뭔가가 떨어지는 것을 느낀 로미오는 고개를 숙이려다 말고 조반니를 쳐다봤다. 그러자 조반니는 즉시 눈을 내리고 양고기 구이 한 점을 입에 넣으며 시치미를 뗐다.

식사가 끝나자 마시모의 삼촌이 안주와 함께 술을 가져다주었는데 음식이 어땠냐는 그의 물음에 로미오는 미소로 대답했다.

“아주 맛있었습니다. 바치로 돌아가면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의사 선생내께서도 맛있게 드셨시다?”

“네. 만족스러운 식사였습니다. 네베 음식을 제대로 맛본 거 같아 기쁘군요.”

밤이 늦자 함께 식사하던 사람들 중 두어 명이 돌아가 남은 사람들끼리 잔을 부딪쳤다. 로미오를 비롯한 산티나와 세베리노, 아브리아나, 데시는 옛 추억에 잠겨 떠들어 댔다.

“예, 기억합니다. 그때 그 일이 근 10년간 마을에서 벌어졌던 일들 중 가장 큰 일이었죠. 그 멧돼지를 못 잡았다면 밭이 죄다 쑥대밭이 됐을 겁니다.”

“테르차네 집 마당의 나구가 달났던 사건도 기억하고 있시? 그때 다들 한잠도 못자고 날 다 개도록 재러 다니다 잰 늠 중 열넛 마리를 다 같이 먹었잖시.”

“로미오 너 안촐라가 및 년 전에 머루를 떠난 거 알고 있시?”

“그래? 안촐라가 여기를 떠났어?”

“도시서 일을 한다고 떠난 지 괘이 됐시. 아를 떠날 때 방적 일을 할 거라고 했시.”

“실로 아지비네는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시. 전에 살던 집에는 살지 않지만 아즉도 그때처럼 양을 키울 거이기. 그 집에 벌써 아이나가 예섯일텐데.”

네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조반니는 오랜만에 들은 고향 소식을 신기해하는 로미오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이미 반쯤 술에 취한 세베리노는 다른 사람들이 세 모금 만에 먹을 양의 술을 한 모금 만에 쭉 들이키더니 입을 슥 닦으며 조반니에게 물었다.

“로미오에게 듣자하니 의사 선생내께선 학교에서 아이나들을 가르치는 일도 하셨시다?”

옆 탁자에 앉은 농부들이 우스운 일이 있는 것인지 네베 말로 껄껄 웃으며 떠들었다. 로미오는 바치로 돌아가면 들을 수 없게 될 고향 말을 머릿속에 새겨놓으려는 것처럼 술잔을 쥔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술이 들어갔기 때문인지 로미오는 평소와 달라 보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도, 술잔을 들고 있는 손도, 식당 안의 손님들을 둘러보는 시선도 달랐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취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세베리노를 향해 대답했다.

“네. 이제 교수 일은 하지 않지만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의학과 해부학을 가르쳤습니다.”

로미오가 술잔 입구를 손으로 더듬어 위치를 확인한 뒤 술을 따르며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책도 쓰지 않으셨습니까?”

잔이 무거워지는 정도로 술이 얼마나 찼는지 짐작한 로미오는 넘치지 않을 정도로 따랐다고 생각되자 술병을 내려놓았다.

조반니는 자신의 잔을 로미오의 잔에 가볍게 쨍, 부딪치며 웃었다.

“네. 제가 재능이 많아 의사 외에도 여러 일을 합니다. 책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바이올린도 연주하지요.”

술을 들이켠 조반니는 안주로 나온 길쭉하고 딱딱한 과자를 집어 먹더니 바이올린이라는 말에 감탄한 표정을 짓는 아브리아나를 향해 능청스레 말했다.

“조각도 꽤 하고 바이올린 곡도 작곡합니다. 요리 실력도 훌륭한 편이고 지금보다 젊었을 때의 이야기지만 소설책도 몇 권 썼습니다.”

로미오도 과자를 하나 집어 먹더니 되물었다.

“소설책이라니 전혀 몰랐습니다. 언제 그런 것을 쓰셨습니까?”

“대위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실 수도 있지만 약 3년 전에 에곤이라는 소년 용병을 주인공으로 한 ‘에곤 이야기’라는 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었습니다. 당시 바치 시내의 모든 서적상과 수집가들이 그 책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됐을 정도로요. 저자가 비탈레라는 이름의 어느 남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제가 그 소설을 썼습니다.”

산티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었지만 로미오는 기억하고 있었다. 에곤 이야기라면 오래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소설이다. 소설책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소설에 관심이 없는 로미오였지만 알고 있었다. 조반니가 제목을 이야기하자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소문에 의하면 에곤 이야기의 저자는 에곤 이야기로 떼돈을 벌어 외국의 어느 섬에 별장을 샀다고 했다.

“기억하시나요?”

“예, 기억합니다. 그즈음 바치 시내에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서적상들이 많이 생겼었습니다. 마차를 타고 길을 지날 때면 그 책을 판다고 소리치는 상인들의 목소리를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다툼이 일어나 공안국에서 검문을 강화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생님께서 그 소설을 쓰셨다니 놀랍습니다. 그런 데에도 재능이 있으셨군요. 한데, 저자를 밝히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소설이 인기를 얻게 되면 속편을 써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를 물리치기 힘들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로미오의 놀란 얼굴을 본 아브리아나가 관심 있는 표정이 됐다.

“개니까, 의사 선생내께서는 작곡도 하시고 그림도 그리시고 책도 쓰신다는 말씸이서게?”

“그렇습니다.”

우쭐대기보다는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하는 것 같은 어조라 아브리아나 웃었다. 그때 술값을 계산하는 매대에 앉아 있던 여급이 다가와 안주를 내려놓았다.

여관 주인의 딸인 그녀는 조반니를 향해 생긋 웃었다.

“맛있게 드서게.”

그들이 여관에 들어온 뒤부터 줄곧 조반니를 보고 있었던 여급은 농부들만 가득 있는 이런 시골 마을에서 조반니와 같은 미남을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는 것을 알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들어 보니 심지어 바치에서 왔단다. 수도에 사는 사내들이 다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조반니가 놀라울 정도로 잘생겨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손님 역시 어디서든 보기 드물다고 생각될 만큼 준수한 외모를 갖고 있었지만 사내답게 잘생겼다고 생각되는 쪽은 조반니였다. 윤기 흐르는 풍성한 금발이 어찌나 눈이 부신지 식당 안에서 그의 금발만 보였다.

“아재비에게 이야기 들었어게. 마시모를 도와주셔서 고맙시나.”

개구쟁이 사촌 동생이 다치는 것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치료해 줘서 고맙다는 것은 사실 핑계였다. 미끈하게 잘생긴 사내와 눈 한 번 마주치고 말 한 번 더 걸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이렇게까지 감사 인사를 들을 일은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인데요.”

로미오는 목소리를 통해 여급이 조반니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밝고 생기가 있으며 고조돼 있었다.

문득 조반니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혹 네베에 하루 더 머무르서게? 하루 더 머무르시면 내일도 아서 저나를 드시면…….”

“죄송하게 됐군요. 아쉽지만 내일 돌아갑니다.”

조반니의 대답에 여급은 못내 아쉬운 듯 한숨을 쉬더니 바치까지 조심히 가시라고 말하며 돌아섰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밤이 늦자 산티나와 세베리노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이 늦도록 술을 즐기기에 네베 농민들의 삶은 고단하고 바빴다. 로미오는 여관 앞의 길까지 나가 술에 취해 걸음이 꼬이는 세베리노와 그를 부축한 산티나를 배웅했다.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아주머니. 아저씨도요. 바치로 돌아가거든 편지 한 통 부치겠습니다.”

“겨우 이러이 얼굴을 봤는데 아쉬워서 어째. 나적에 또 오게 되거든 꼭 들러.”

“예, 그러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 집까지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어으으… 그리, 그리. 나적에 다시 와. 고향만 한 곳이 또 어디 있시?”

오랜만에 본 로미오와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산티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의 눈이 붉어진 것은 보지 못하지만 목소리로 들어 그녀가 많이 서운해한다는 사실을 안 로미오는 그녀의 두 손을 감쌌다.

“잘 지내세요, 아주머니.”

“그리. 아까지 온다고 고생했시. 조심히 가.”

멀어지는 산티나와 세베리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로미오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조반니와 아브리아나, 데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브리아나가 특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건 몰랐네게. 그갠데 어떠이 고향까지 같이 오게 됐어게?”

“제가 따라왔지요. 전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장소, 새로운 음식을 좋아합니다. 새로운 도시에 가 보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은 없으니까요.”

“개서, 어떠이 만족을 하셨시다? 네베가 나실어 불편하지는 않으셨어게?”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에 대위님께서 네베 분이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곳일까 상상을 해 보기도 했는데 이제야 진짜 네베의 모습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로미오가 의사 선생내께 네베 이야기를 헌지 했어게?”

“많이 하셨냐고 물으신 겁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대위님께선 본래 말수가 적으신 분이라 고향 이야기를 자주 듣지는 못했습니다.”

아브리아나에게 로미오는 오랜 고향 친구였다. 고향 친구가 타지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던 차에 낯선 사람이자 외지인이자 로미오의 이웃이기도 한 조반니가 마침 이 자리에 있었다. 조반니에게서 옛 고향 친구인 로미오의 평판을 듣는 것은 재밌는 일이었다.

“로미오는 아이나였을 때도 자기 얘기를 좋아하지 않았어게. 아이나들끼리 노를 때도 혼저 남구 밑에 앉아 흙을 만지고 노르는 걸 좋아했시나.”

조반니는 훗, 하고 소리를 내 웃으며 로미오를 봤다. 로미오는 열없게 술만 한 모금 들이켜고 말이 없었다.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 생각은 없지만 반응을 보니 당황하는 모습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얘기를 해 주세요. 대위님께서는 어린 시절에 어떤 아이였나요?”

대답한 것은 데시였다.

“저러이 보여도 로미오가 멧둣이며 노리를 잘 쫓아냈시나. 밤에 동물들이 머루로 내려오면 막지대기를 들고 나가 쫓았어게. 발이 얼마나 빨랐던지 덜음질로는 머루에서 로미오를 이길 아이나가 없기도 했시나. 그리고 남구도 잘 올랐고 베랭이도 잘 잡았어게.”

“베랭이가 뭔가요?”

앞말들은 가까스로 알아들었으나 베랭이를 알아듣지 못해 물으니 로미오가 말했다.

“벌레입니다. 네베에서는 벌레를 베랭이라고 합니다.”

로미오의 대답에 조반니는 턱을 괴며 웃었다.

“귀엽게 들리는 말이군요.”

“네베 말에는 베랭이와 비슷한 어감의 말들이 많습니다.”

“아니요. 대위님이요. 발이 빨라 달리기도 잘하셨고 나무도 잘 오르셨고 벌레도 잘 잡으셨다니 말입니다.”

귀엽다는 말에 로미오가 다소 겸연쩍어하자 아브리아나가 키득댔다.

“로미오가 동생들을 잘 돌보기도 했어게.”

“아이나들을 잘 돌봤었지.”

“맞시. 피에트로가 났을 때도 로미오가 피에트로를 안고 머루를 돌며 사람들에게 보여줬시나. 알피에리 아주미와 아지비가 계시지 않으면 등에 업고 다니기도 했어게.”

“로미오가 감자도 기가 막히게 갱였시나. 수확 시기가 되면 노를 시간도 없이 밭으로 불려가 감자를 갱였어게.”

“감자를 잘 캐셨다는 얘기죠?”

“맞시나.”

조반니는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댄 채 재미있는 상상에 빠졌다. 만약 로미오가 농부가 됐더라면 지금 이 식당에서 네베 말로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을 것이다. 한해 농작물 수확량 따위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을 사람들과 술잔을 부딪치는 로미오를 상상하니 이상할 정도로 즐거웠다.

소리를 죽여 쿡쿡 웃는데 아브리아나가 물었다.

“로미오가 바치에서 어떠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네게. 얘기를 해주실 수 있시다?”

옆에서 듣고 있던 로미오가 왜 자신을 두고 조반니에게 묻냐는 것처럼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내가 대답해 줄게.”

“너한테 얘기를 듣는 건 재미가 없시. 물어봐도 잘 대답해주지 않을 거 아니기.”

아브리아나와 대화하는 로미오를 보며 조반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는 농부보다 군인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시골 마을에서 멧돼지와 닭을 쫓고 나무를 타고 오르며 자란 로미오의 어린 시절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로미오는 분명 순박했을 것이다.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로미오에게도 묘하게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년이 아니기에 순수하다는 말은 맞지 않았으나 그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다. 군인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돈과 명예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이 여리고 동정심이 많지는 않지만 악한 인간은 아니었다. 선량한 모습이 두드러지지는 않으나 굳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양심을 가지고 있는 선한 사람이라고 봐야 했다.

자신의 얘기를 쉽게 터놓는 것을 꺼린다는 점에서는 아니었으나, 저의가 있거나 음흉하지 않았기에 솔직함을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남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악의가 없었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을 거라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어수룩하고 굼뜬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속이면 속아 넘어갔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는 것 같지는 않으나 타인에게 야박하지 않았고 오기를 발휘하며 자존심을 내세우진 않지만 그렇다고 비굴한 것도 아니었다. 거만함이나 경솔함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을 쉽게 믿고 의지하지 않지만 독선적인 태도로 치밀하게 득실을 따지지도 않았다. 잇속을 챙기는 것에 능해 보이지 않지만 무능하지 않았고 수줍음과 부끄러움을 타진 않지만 당황시키기 쉬웠다. 요염한 몸놀림이나 손짓을 갖고 있지 않지만 아름다웠으며 허영심 없이 수수하고 검소했다.

정치적 야망이나 집념이 없는 무구한 사람 같아 보이면서도 제6군단의 장교라는 위치에 맞는 분별력과 침착함을 갖고 있었다. 온화하고 자비로운 성품은 아니지만 염세적이지 않았고 신중하지만 까다롭지 않아 신뢰할 만했다.

조반니는 자신이 어떤 형태로는 로미오에게 끌리고 있다고 느꼈다. 아름답기 때문에 그에게 접근해 겁탈을 일삼았지만 아름답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쉽게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 * *

“봄이 오기 전에 머시로 다시 와. 약속 지킨다고 했시? 응?”

“그래, 그럴게. 데시 형도 건강히 잘 지내세요.”

“나적에 오면 머루 사람들부터 찾아온다고 했시? 말없이 혼저 왔다가 달나버리지 않겠다고 했시? 응?”

“예. 약속 반드시 지킬 테니 걱정 마세요. 바치로 돌아가거든 편지할게요.”

여관 앞에서 아브리아나와 데시를 배웅한 로미오는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뒤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다 여관으로 들어갔다. 밤이 깊어 손님들의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 여관 안은 한산했다. 조반니는 술이 바닥날 무렵부터 취기가 차츰 오르더니 탁자에 이마를 대고 어깨를 숙인 채 취한 사람같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로미오는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술병이 전부 몇 병인지 세어 본 후 취할 만큼 많이 마신 것이 아니라고 판단해 조반니를 깨웠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조반니가 숙이고 있는 고개를 들지 않자 로미오는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조반니가 술기운이 역력한 눈빛으로 자신의 술잔을 흔들었다.

“술자리는 이것으로 끝인가요?”

멀끔한 목소리였지만 조반니는 술 냄새를 풍기며 한숨을 쉬었다. 로미오는 조반니의 술잔을 멀리 치웠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려면 이쯤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휴우… 일어날 수 있고말고요.”

그러나 탁자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선 조반니는 휘청거리며 몸을 흔들었다. 부축해 줄 생각으로 팔을 잡자 조반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로미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서로 허리가 가깝게 닿으며 몸이 포개어졌지만 술에 취한 조반니를 밀어낼 수 없는 로미오는 조반니가 넘어지지 않게 등을 받쳤다.

“제가…… 후… 취한 것처럼 보이시나요?”

“예. 술을 몇 잔 드셨습니까?”

“글쎄요, 음… 기억이 안 나는군요. 모처럼의 술자리가 즐거워 한두 잔 마시다 보니… 그런데 대위님께서는 전혀 취하지 않으셨네요?”

“저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두 잔 정도 마신 게 다입니다.”

늘어뜨려진 조반니의 손끝이 윗가슴을 툭 치자 로미오는 상체를 뒤로 물리며 자세를 바꿨다. 조반니가 부축받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듯이 자신의 어깨를 꽉 안아 불편했지만 부축해 주지 않으면 조반니가 계단을 오르다가 뒤로 넘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으로, 으음… 올라가는 건가요?”

여급이 위층으로 방을 안내해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조반니는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몸을 한껏 기대며 쓰러질 듯 말 듯 걸었다. 마시모의 삼촌인 여관 주인은 여관 한편에서 손님들과 술을 마시느라 바빠 조반니의 부축을 부탁할 수가 없었다.

“많이 취하신 것 같으니 어서 주무십시오.”

“취하다니요? 전 멀쩡, 후우…… 멀쩡합니다…….”

“아니요, 취하셨습니다.”

조반니는 고개를 흔들며 머리를 기대 왔다. 관자놀이에 그의 얼굴이 닿자 로미오는 조반니의 반대편 팔을 당겨 바로 서게 하고 계단을 올랐다. 다 같이 술을 마셨는데 왜 그 혼자서 이렇게 취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위님… 넘어지시지 않게 조심하세요.”

부축을 받는 처지인 주제에 그렇게 말한 조반니는 로미오의 쪽으로 점점 더 몸을 기울였다.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해 조반니를 데리고 계단을 오르는 로미오는 힘에 부쳐 걸음이 느려졌다. 호리호리한 로미오와 달리 조반니는 날마다 죽은 사람의 뼈를 깨고 부수고 시체를 직접 옮기는 일을 수년간 해 팔뚝이며 등이 근육으로 다져진 데다 로미오보다 키도 컸고 체구도 장대했다. 그를 부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반니를 방까지 데려가 침대에 눕히고 난 로미오는 한숨부터 쉬어야 했다.

“하아…….”

로미오는 침대에 누운 조반니가 실눈을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모른 채 방을 둘러봤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목이 마른데… 물을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물이요?”

“네… 목이, 음… 많이 마르군요, 큼!”

조반니가 목이 잠기는 듯 헛기침을 하자 로미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로미오가 방을 나가자 술 취한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던 조반니는 한쪽 눈을 떴다. 뻔뻔하게 팔베개를 하고 누운 그는 웃옷의 앞섶을 벌리고 허리끈을 풀더니 방 안을 구경했다. 장난을 칠 생각으로 기분 좋게 발끝을 까딱거리다 복도 너머에서 로미오의 발소리가 들리자 다시 술에 취한 척 돌아누웠다.

“선생님. 물을 드십시오.”

물을 갖고 돌아온 로미오가 침대 머리까지 다가와 얘기했으나 조반니는 못 들은 체하며 입속말을 했다.

“음…….”

로미오는 허리를 숙여 조반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주무십니까?”

“…….”

“선생님?”

조반니는 팔로 얼굴을 가린 채 혼잣말을 웅얼대더니 놀아 누우며 로미오의 손목을 쥐었다. 웃옷 앞섶이 넓게 벌어지며 가슴팍이 은근히 드러나자 로미오가 흐릿하게나마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오는 사이에 옷이 흘러내린 것이라고 생각하며 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손목을 잡은 조반니의 손을 떼어 냈다.

“물을 가져왔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물을…… 으음… 말인가요?”

“괜찮으십니까? 일으켜 드리겠습니다.”

머리가 아픈 척 조반니가 이마를 짚으며 일어나자 로미오가 손에 물 잔을 쥐여 줬다.

“저는 옆방에 있을 테니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여급에게도 사정을 이야기해 두었으니 필요하면 잠자리를 살펴봐 드릴 겁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깨우러 오겠습니다.”

물 잔을 깨끗하게 비운 조반니는 로미오가 컵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자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은 순간 로미오는 놀라며 손을 물렸지만 조반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질투하는 다른 사내들이 말하길 ‘느물거리는 웃음’을, 그를 흠모하는 많은 여인들이 말하길 ‘끝내주게 매력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금, 무슨…… 이게… 뭘 하신 겁니까?”

로미오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만큼 놀라 조반니의 입술이 스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터무니없는 그의 행동에 거부감보다는 놀라움을 더 크게 느꼈다. 누군가 이런 식으로 손등에 입술을 댄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보답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조반니는 물 잔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눕자마자 잠이 든 것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선…….”

‘-생님’ 하는 뒷말을 잇지 못한 로미오는 얼이 빠진 얼굴이 됐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손등에 입을 맞출 수 있는 것인가. 취기를 이유로 이해해 주기에는 지나친 행동이었다. 조반니가 혹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일까.

물 한 잔에 대한 고마움을 입맞춤으로 되돌려 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과한 답례였다.

“…….”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술에 취해 잠든 사람을 흔들어 깨워 방금 한 행동에 대해 변명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황함과 놀라움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허공에 손을 든 채 어쩌지 못하고 조반니를 내려다봤다. 잠이 든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보였다. 손등에 조반니의 입술의 감촉이 남아 있었는데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 감촉이 피부 위에 스민 것 같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결국 별수 없이 방을 나온 로미오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근 후 옷 안에 숨겨 두었던 단도를 머리맡에 올려 두고 침대에 누웠다. 지난 며칠간 밤마다 잠을 설치고 있었지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으니 손등의 감촉은 곧 잊혀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떡 일어난 것은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빠른 동작으로 머리맡의 단도를 집어 든 로미오는 문을 주시했다. 몸 전체에 열기가 퍼지는 착각과 함께 호흡이 가빠졌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이곳까지 따라왔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수상한 발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몸이 얼었다.

세 걸음 만에 문 앞으로 다가간 로미오는 문틈에 귀를 댔다. 문고리를 잡고 단도를 고쳐 쥐는데 문 너머로 술에 취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문 앞으로 다가올 경우 나무 문 너머로 칼을 꽂을 수 있도록 자세를 잡은 로미오는 문밖의 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문을 여닫는 소리와 함께 복도는 정적에 휩싸였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귀를 기울이던 로미오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다가 단도를 내렸다. 안면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처럼 입가가 굳어 입술을 문질렀다. 단도 손잡이 안쪽으로는 땀이 묻어 나왔다.

그대로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다가 침대로 돌아와 앉아 단도를 내려놓았다. 잠깐 사이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후우…….”

침대에 누웠으나 시선은 문을 향했다. 잠들 수가 없어 자리에서 도로 일어나 방 안을 몇 발자국 걸어 다녔다.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그 앞을 서성거렸다. 침대로 가 앉아 닫힌 문을 바라보는데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검은 망토의 사내는 첫 번째 겁탈에서도, 두 번째 겁탈에서도 목소리를 변조했다. 비 오는 날 밤 포목점 골목에서 마주쳤을 때 ‘이봐.’ 하고 부르던 저음의 목소리. 빗소리에 섞여 또렷이 듣지 못했지만 그 저음의 목소리가 사내의 진짜 목소리일 것이다. 찢어질 것 같은 새된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목소리를 변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변조한 그 목소리가 변조가 아니라 진짜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런 목소리는 특정되기 쉬웠다. 한 번 듣고 쉽게 잊어버리기 힘들 만큼 독특해 목소리만으로 누구인지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외관에서 특이한 점은 기억나지 않았다.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집으로 침입했던 것으로 봐 그는 자신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모를 확률이 컸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불특정한 시간대에 기습적으로 나타났다가 자취를 감췄으니 바치 안에 거주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자의 진짜 목소리는 처음 냈던 그 저음이 분명한데 문제는 그날 들었던 목소리를 기억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봐’라는 한 마디뿐이었고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자가 자신이 언젠가 잡힐 가능성을 우려해 목소리를 변조한 것이라면…….

혹시 그자가 자신의 주변에 사는 인물인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몸의 피가 식으며 섬찟해졌다.

또 다른 의문점은 그가 밝은 낮 시간에 어떻게 하숙집으로 멀쩡히 걸어 들어왔느냐는 것이었다. 몸을 전부 가리는 커다란 망토를 입고 거리를 걷는 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쉬웠다. 흑색은 염료를 먹이는 비용이 저렴해 가난한 수공업자들이 즐겨 입었지만 얼굴까지 전부 가릴 수 있는 데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기다란 망토는 흔한 복장이 아니었다.

하숙집으로 들어와 1층에서 옷을 갈아입은 것이 아니라면 밝은 대낮에 몸을 전부 가리는 긴 망토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를 목격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유유히 하숙집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든, 빠져나가는 모습이든 분명 한 명쯤은 목격자가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비 오던 날 밤 포목점에서 목이 졸리며 그의 눈을 보아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의 눈은 금색이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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