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마음의 요람 (6/30)

6. 마음의 요람

통령의 관저인 살로네 성 꼭대기에는 공화국을 상징하는 붉은 매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조각상을 떠받들고 있는 벽면에는 루바노 공화국의 건국과 수호를 의미하는 뜻으로 공화국 창립에 선각자 역할을 한 이들의 형상이 조각돼 있었다.

통령인 카를로타 비스카르디는 금발 머리에 금색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틀어 올려 묶은 머리는 큰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집무실의 창문에 반사되는 빛을 받을 때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오십 줄에 들어섰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한 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비스카르디 통령은 루바노 공화국의 정식 명칭인 ‘가장 존귀한 루바노 공화국’의 통령이었기 때문에 역시 ‘가장 존귀한 자’로 이야기됐다.

서른한 명으로 이루어진 공화국 최고의 권력 기관인 31인 위원회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통령은 임기 기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비스카르디 통령은 임기가 4여 년 남아 있었다. 그녀 또한 통령으로 선출되기 전에 31인 위원회의 두 위원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 통령이었던 라파엘레 갈라시가 재임해 있을 때부터 정권의 중심에서 정치적 감각을 키웠다.

통령직은 세습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통령 선출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31인 위원회의 위원들도 그러했다. 31인 위원회 및 나머지 크고 작은 위원회들도 위원 선출에 있어 자신의 가족을 직위에 관여시킬 수 없었고 퇴임 후 일정 기간 동안 같은 직책에 취임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31인 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위원회의 위원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은 명목상 누구에게나 허락돼 있을 뿐, 정치 참여를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지만 자유를 그 어떤 것보다 값어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루바노인들에게 그들 나라의 공화제는 옆 나라의 군주제와 비교해 그 외형이 적어도 공화제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시민을 대변하는 정치 체제라고 여겨졌다.

31인 위원회와 함께 루바노의 국정을 담당하는 주요 3기관 중 하나인 ‘민중 평의회’는 1,000명의 시민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들은 통령을 선출하는 데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31인 위원회와 기타 다른 여러 위원회의 위원을 선출하는 데 표를 던질 수 있었고 선출 절차를 관리할 수 있었으며 법안을 심의할 자격을 갖고 있었다. 비록 의안 제출권은 없었지만 국정 운영에 있어 민중 평의회의 찬성 없이 법률안을 공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루바노 공화국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공직 참여 기회를 주고 권력 독점을 경계하기 위해 공직자의 임기 기간을 짧게 제한하고 있었는데 민중 평의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임기가 끝날 때마다 매번 새로이 1,000명의 시민들이 선발돼 민중 평의회에 소속되었다.

소속되는 시민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은 반면 임기가 짧아 선발 시기가 다가오면 여러 문제가 야기됐지만 제도상의 문제를 꼬집는 이들은 극히 적었으니 루바노인들이 어떤 공화주의를 추구하는지는 충분히 알 만했다.

민중 평의회는 바치의 아홉 개 구역을 나눠 관리하는 ‘시민대표의회’라는 의회의 대표가 될 자격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는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공안국과 업무의 내용이 겹쳤다. 이들은 예전부터 회의장 내의 의석수와 회의에 참여하는 민중 평의회 시민들의 수를 대폭 늘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이것 외에도 공화국 정부를 상대로 갖가지 요구를 하며 시민 중심의 공화주의를 주장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본래 일부 위원회는 추첨을 통해 위원을 선발했으나 민중 평의회에 의해 이제는 모든 공직자들이 선거에 의해 선발됐다.

31인 위원회 및 민중 평의회와 더불어 주요 3기관 중 하나로 이야기되는 14인 위원회는 소수의 명문 가문에게 자리가 돌아가는 경향이 있는 데다 위원들의 수가 적어 주요 3기관 중 가장 폐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선발 절차와 임기가 다른 두 주요 위원회와 동일했기 때문에 적어도 그 점에서만큼은 민중의 원성을 피할 수 있었다.

비스카르디 통령은 짙은 호박빛 눈동자를 갖고 있었는데 식견과 통찰력을 가진 듯한 그녀의 눈은 항시 날카롭게 빛났다. 예술가의 풍모가 느껴지는 목소리는 한 번 듣고 쉽게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 깊었으며 통령의 최측근인 보좌관 5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에 따르면 그녀는 젊은 시절 바이올린을 취미로 연주하기도 했다.

공화국을 위한 화형대에 자신의 민중들을 끌어 올려 산 채로 불태워 죽일 수 있을 만큼 냉엄한 비스카르디 통령은 위엄과 더불어 너그러움을 베풀 줄 아는 성정을 갖고 있었다. 가령, 통령의 집무실을 제집처럼 쓰는 떠돌이 고양이가 그 너그러움의 최대 수혜자였다.

“통령 각하. 차를 다시 내오겠습니다.”

통령의 자리에는 식은 찻잔이 놓여 있었다. 몇 달 전까지 관저 앞마당을 거니는 떠돌이였던 검은 고양이는 그 찻잔 옆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앞발에 턱을 괴고 자고 있었다. 통령과 같은 금색 눈을 가진 고양이는 한쪽 귀가 잘려 나가 있었다.

통령의 집무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고양이는 사람처럼 앞발을 들고 일어서서 천장에 그려진 천장화를 구경하기도 하고 통령이 앉는 푹신한 의자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것들에 익숙해져 더는 관심 갖지 않았다.

“그렇게 하게.”

5인의 보좌관 중 한 명인 주세페 모파는 사람을 시켜 따뜻한 차 한 잔을 새로 내어 오게 했다.

통령은 관저 창밖으로 보이는 뒤뜰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한쪽 발을 저는 점박이 무늬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아치형 주랑(柱廊)에 둘러싸인 뜰을 가로지르는 고양이는 경계심이 강해 세 걸음에 한 번씩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랑의 기둥 사이에 석상처럼 서 있는 호위병들은 통령이 고양이를 내쫓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여기 있습니다.”

새 차가 방 안으로 전달되자 주세페는 고양이털이 날리지 않는 곳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엎드려 자던 고양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자 주세페는 찻잔을 옆으로 옮겼다. 털이 날려 차 안으로 들어가면 곤란했다.

그런데 고양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 냄새를 맡으려는 것처럼 코를 기울였다.

“쉬.”

주세페가 입으로 소리를 내자 통령이 창가 앞에 서서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내버려 두게나.”

“예, 각하.”

주세페가 물러서자 고양이는 찻잔에 코를 댔다. 먹지 않고 냄새만 맡더니 탁자 위를 걸어 다니다가 한편에 쌓여 있는 양피지 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눈을 끔뻑이며 앞발에 턱을 괬다.

곧 다가오는 바치시 축제에서 단테의 12인이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한 틈을 타 움직일 가능성을 염두에 둔 통령은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칙서를 공포할 예정이었다. 수차례 엄중한 탄압을 경고해 민중들 사이에서 단테의 12인과 관련해 무서운 풍문이 떠돌게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단테의 12인의 조직적인 선전을 막을 수 없었다.

재임 기간 동안 강도 높은 탄압을 이어 가고 있는 통령은 단테의 12인의 연루자를 밀고할 경우 받게 되는 종신 연금의 금액을 파격적으로 올리고 밀고자들을 공화국의 번영에 헌신하는 봉사자로 높이 예우했다. 단테의 12인을 절멸시키는 데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대총장이라는 인물의 목을 자르는 것이었다. 그림자와 같은 대총장은 단원들의 조직망 속에 몸을 숨긴 채 은밀하고도 조용히 움직였다.

올빼미들의 소굴에 들쥐를 들여보낼 수 없어 올빼미 가죽을 덮어씌운 매를 심어 발톱 끝에 걸려드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영민한 매는 때가 되면 약속한 곳으로 돌아와 올빼미들의 움직임을 알렸는데 오늘이 바로 그 약속의 날이었다. 올빼미 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우두머리를 낚아채 발톱으로 찢어발기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똑똑똑. 기다리던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들어와라.”

소매에 붙은 고양이 털을 떼어 낸 통령은 자리에 앉았다. 문이 열리자 노년의 사내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가져왔는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통령은 찻잔을 멀리 밀어 두고 양손을 깍지 껴 잡았다. 사내는 옷소매 안쪽으로 손을 넣으며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 * *

비탈진 산길을 내려가는 마차가 흔들렸다.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고 말발굽이 파인 곳을 잘못 밟아 기우뚱 기울어지기도 하는 마차는 몇 시간째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고는 하나 산중이라 흙바닥이 평탄치 않았다.

조반니는 요령 좋게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은 두께가 아주 두꺼웠고 빼곡한 글자로 뒤덮여 있었다. 조반니의 옆자리에는 그가 외출 시 들고 다니는 가방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갖가지 약초와 상처를 지혈하는데 필요한 헝겊 조각이 들어 있었다.

조반니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로미오는 창 너머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사실 왼쪽 눈의 검은 점을 보고 있었다.

여러 해에 걸쳐 조금씩 왼쪽으로 자리를 옮겨 가고 있는 검은 점은 시력이 확연히 떨어지기 직전에 나타났는데 정오가 가까워 오는 지금 그 색이 아침보다 선명했다. 눈동자의 흰자나 검은 자에 나타나지 않아 남들은 보지 못했고 로미오의 시야에만 보였다.

주기적으로 눈의 상태를 진단하는 의사가 오래전에 말하길 점이 나타나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나타나는 시기 역시 예측할 수 없지만 오랫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시력 저하의 전조 증상이 분명했다. 한동안 검은 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면 눈에 띄게 시력이 떨어졌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시력이 떨어지는 속도도 빨라졌다.

“뭘 보고 계시나요?”

조반니의 물음에 그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검은 점 아래에 그의 뿌연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창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풀과 나무뿐인 풍경인데 특별할 것이 있습니까?”

조반니는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조반니의 얼굴도, 그가 들고 있는 책도 아닌 그의 옷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뼛속에 찬바람이 스미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뒤가 다 아물지 않아 앉아 있는 것이 버거웠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제가 즐겨 읽는 해부학 안내서입니다. 제목을 읽어 드릴까요?”

“예.”

“‘해부의 형태’라는 제목입니다. 해부학에 관한 기초 지식을 나열한 책이죠. 10년도 더 전에 산 책이라 글 사이에 있는 그림의 색도 바래고 낱장을 손으로 누르지 않으면 읽기 힘들 만큼 낡은 책이기도 합니다.”

“재밌으십니까?”

“그럼요.”

조반니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힘없이 흔들리는 책장을 조심히 넘겼다.

“이 책을 샀던 당시에는 이 책에 적힌 오류를 몰랐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읽고 싶어져 들춰 봤는데 곳곳에서 크고 작은 오류들을 발견했습니다. 대학에 다니며 의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이 책을 베껴 쓰며 그 오류들까지도 베껴 적었습니다. 그것들이 잘못 기록된 것인 줄 모르고요.”

“의학을 공부하던 때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열일곱, 열여덟 살이었을 때입니다.”

조반니의 목소리에서는 책에 대한 애정이 엿보였다. 즐겨 읽는다는 것은 가장 아낀다는 말과 같은 뜻일 것이다.

“대위님은 어떠셨나요? 열일곱 살에 무엇을 하고 계셨지요?”

조반니는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는 것처럼 책을 덮어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음을 이제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조반니는 그 자신의 즐거운 기분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것을 좋아했다.

로미오는 대화 도중에 이쪽을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거나 대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을 유지하는 상대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행동했으나 그것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조반니는 그러지 않았다.

“저는 열일곱 살 때 사관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네베에는 사관 학교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아닌가요?”

“예. 그래서 사관 학교가 있는 이웃 도시까지 마차로 오가며 공부를 했습니다.”

“학교에 기숙사는 없었나요?”

“있었습니다만 형편이 어려워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로미오는 마차비를 아끼기 위해 네베의 광장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두 시간이 넘는 긴 거리를 걸어서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을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마차비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해 어머니에게는 호되게 혼이 났다.

“공부는 재미있었나요?”

“예.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가 농가를 물려받아 농부가 되길 원하셨지만 그 무렵 저는 군인이 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마차 밖으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갔다. 이상하게 여길 이유가 없는 평범한 복장인 데다 금방 지나쳐 보이지 않게 됐지만 로미오는 주먹을 움켜쥐며 숨을 삼켰다. 몸에 끈을 졸라맨 것처럼 긴장이 되며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검은 옷만 보면 검은 망토의 사내가 떠올랐다.

“농부라니 대위님께 어울리지 않는군요. 농부가 되기에 대위님께선 너무나……”

로미오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창밖 풍경을 외면했다. 위장이 굳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져 눈을 굳게 감았다가 떴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언제든 다시 하숙집을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겁탈당했던 그곳을 잠시 떠나 있는 것으로 고통을 잊고자 했지만 피에트로와 엔초가 집에 남아 있는 이상 안심할 수 없었다. 검은 망토의 사내는 언제든 다시 집을 찾아올 수 있었고 누구에게든 해를 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집을 나서기 전에 부대로 편지 한 통을 써 부쳤다. 자신이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갈리에누스에게 집 주변을 살펴봐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였다. 부탁을 하는 이유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기에 갈리에누스가 의문을 느낄 테지만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

피에트로에게는 문단속을 철저히 할 것을 당부하고 그라나 부인에게도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갈리에누스가 집에 자주 들를 것이라고 이야기해 두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예리하게 날을 간 단도도 한 자루 챙겨 옷 속에 넣어 왔다. 비이성적인 의심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검은 망토의 사내가 자신의 뒤를 밟아 네베까지 따라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이사를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사 간다면 로사티 3번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땅한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 사내가 다시 자신을 찾아왔을 때 어떻게 죽일 것인지.

그가 찾아온다면 그다음은 없어야 한다.

“고향에 가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으신가요?”

로미오는 지금 이 마차 안에 조반니와 단둘이 있으니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안전하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눈을 감고 뜨는 그 짧은 사이에 검은 망토의 사내가 떠올랐지만 애써 잊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무덤에 들를 생각입니다. 여섯 달에 한 번씩 묘지기에게 무덤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보내고 있는데 제대로 관리가 되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왜 저를 따라오시는 겁니까? 네베에 가서 무엇을 하시려고요.”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전 그저 대위님께서 태어나고 자란 곳이 궁금할 뿐입니다. 네베는 제가 지금껏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곳이기도 하지요. 지금으로선 바치보다 공기가 맑을 거라는 것 외에는 달리 상상 가는 게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보낸 사직서가 학교에 도착하면 저는 이제 교수도 의사도 아닌 셈이 됩니다. 휴가차 시골 마을에서 짧은 휴양을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바치 근처의 소도시에 다다랐다. 로미오와 조반니는 하룻밤을 묵은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출발해 그다음 날과 그다음 날도 여관에서 밤을 보냈다. 두 사람이 네베로 이어지는 도시 성문을 통과한 것은 바치에서 출발한 지 사흘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마을 입구로 접어드는 길목에 들어서자 한눈에 보기에도 바치와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시골이었기에 광장 안에 있는 시장의 규모가 무척 작았는데 물건을 팔고 있는 상인들도 네베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를 풍겼다.

좀 더 달리자 풍경이 바뀌며 너른 밭과 푸른 들판이 펼쳐졌다. 먼 곳까지 넓게 트인 땅 위에 드문드문 농가가 세워져 있었는데 너무 멀리 있어 꼭 나무처럼 보였다. 울퉁불퉁한 시골길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길 너머에는 밭과 들판밖에 없었다.

“내려서 주변을 살펴봐야겠습니다.”

로미오는 마차를 세우고 길에 내렸다. 마부와 조반니는 집의 위치를 몰랐기 때문에 유일하게 이 마을 지리를 알고 있는 로미오의 말에 의존해야 했다.

돌아서서 길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로미오는 몇 걸음 걸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고향에 돌아왔다는 감회를 느끼기에는 주위가 온통 뿌옇고 푸르게만 보였다. 실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5년 만에 온 고향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떠나올 때는 분명 저 길 아래까지 전부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시력이 떨어져 그마저도 힘들었다. 들판의 풀 냄새와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는 느껴졌지만 하늘에 떠가는 구름과 정겨운 흙길은 볼 수 없었다.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5년 전과 비교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시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사실이 실감되자 검은 점 사이로 보이는 고향 풍경에서 안락함과 적막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고즈넉한 마을이군요.”

따라 내린 조반니는 사방으로 키 큰 나무와 밭이 펼쳐져 있자 길 찾기는 뒤로 하고 경치를 감상했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은 솜뭉치를 뜯어다가 얹어 놓은 것 같았고 바람에 쓸려 무늬를 이루는 들판은 녹빛 파도 같았다. 이마를 간질이는 바람결에는 흙과 나무 냄새가 섞여 있었다. 햇빛에도 풀 냄새가 스며 있는 것 같았다. 대도시인 바치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르신, 길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집을 찾지 못하자 로미오가 길을 지나가는 어느 농부를 붙잡아 세웠다. 퉁퉁한 팔뚝에 억세 보이는 콧수염을 가진 농부는 닳아서 해진 가죽 신발과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로미오와 조반니의 행색이 외지인 같자 목소리를 크게 해 물었다.

“어디서 왔시다?”

걸쭉한 남부 사투리에 조반니는 신기한 장난감을 본 소년 같은 얼굴이 됐지만 오랜만에 고향 말을 들었을 뿐인 로미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저희는 바치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뭇을 하러 바치에서 아까지 왔시다?”

“이 근방에 있는 집을 찾고 있습니다. 혹시 붉은색 지붕을 가진 집을 아십니까?”

“붉은 지벙 집이 아서 어디 한두 개 있시다? 그러이 찾으면 나절 다 개도록 못 찾을 거시나.”

투박한 네베 말에 조반니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말이 느리다면 알아들을 법도 한데 농부는 말이 빨랐다.

“아서 찾는 것이 사람인개 집인개?”

“집입니다. 저는 전에 이곳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혹시 알피에리 농가를 아십니까? 농장 일을 그만둔 지는 오래되었지만 본래 부부가 밭일을 하는 집안이었습니다.”

“내가 이 머루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시나.”

생각해 보면 농부 쪽도 대단했다. 수도에서 왔다고 자신들을 소개하는 이들에게 꿋꿋하면서도 고집스럽게 네베 말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기억하기로 이 근방에 붉은 지붕 집은 자신의 집밖에 없었기에 로미오는 생각에 잠겼다. 농부가 이곳 마을에서 줄곧 산 노인이었다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테지만 그게 아니니 물어물어 집을 찾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면 이 근처에 있는 노송나무의 위치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조반니는 로미오가 농부의 말을 어려움 없이 알아듣자 신기한 표정이 됐다. 이제야 로미오가 조금 네베 사람으로 보였다.

“노송남구라면 저 오림길 왼쩍에 있시나.”

농부는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가리켜 보이더니 로미오가 알아들은 기색이자 고맙다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 휙 몸을 돌려 오던 길을 마저 갔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농부는 로미오가 등 뒤에다 대고 인사하자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금세 저만치 걸어가 보이지 않게 되자 조반니는 농부가 이야기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리로 가면 노송나무가 있다는 말인가요?”

“예. 저기 언덕길 왼편에 있을 거랍니다. 그런데 제게는 보이지 않는군요. 선생님께서는 언덕이 보이십니까?”

“네, 보입니다. 언덕이라기에는 너무 작지만 아마 저 길을 가리키는 게 맞을 겁니다.”

다시 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조반니는 은근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전혀 다른 말씨와 관습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네베 말은 오랜만에 들어 보시지요?”

혹여나 길을 놓칠까 로미오는 창가 가까이 앉아 밖을 내다보며 예, 하고 대답했다. 창밖의 시골 풍경과 로미오의 옆얼굴은 썩 잘 어울렸다. 이웃 나라의 귀족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우아한 외모를 가진 로미오가 이런 작은 마을에서 자란 시골 소년이라고 생각하니 조반니는 재밌는 기분이 들었다.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어린 로미오가 상상돼 자꾸 웃음이 나왔다.

“대위님께서 시골에서 자라신 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야 네베 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치에 오래 살았으니 겉모습이 완전히 바치 사람이 돼 네베 말을 쓰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없을 겁니다. 조금 전 그분도 제가 말하지 않았다면 고향을 찾아온 네베 사람인 줄 모르셨을 겁니다.”

“방금 그분의 말씨는 제 귀에 굉장히 낯설게 들리는군요. 대위님께서도 그런 식의 남부 사투리를 쓰셨습니까?”

“저분은 네베 말이 많이 짙은 편입니다.”

밭 옆을 지나는데 어느 여인이 자신의 키만 한 양 한 마리를 데리고 지나갔다. 바치에서도 당나귀 수레를 끄는 상인들이 많았지만 양은 볼 일이 적었기 때문에 조반니는 신기한 듯 그 모습을 쳐다봤다. 양은 양고기로나 먹어 봤지 직접 본 일이 아주 오래되었다.

“저기 양이 지나가네요.”

조반니가 창 쪽으로 옮겨 앉자 서로의 무릎이 부딪쳤다. 조반니는 “죄송합니다.” 하며 실수인 척 손으로 로미오의 무릎을 만졌고 순간 로미오는 몸을 틀어 자세를 바꿨다.

“네베에는 적은 수지만 양을 키우는 목장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공동 방목장이 몇 군데에 있었습니다.”

무릎이 닿지 않게 다리를 굽힌 로미오는 노송나무를 지나칠세라 밖만 내다봤다. 조반니는 입술을 핥으며 로미오의 다리를 훔쳐보곤 밖을 구경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외에 다른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널따란 밭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이곳 마을은 사시사철 이렇게 고즈넉할 것만 같았다. 땅 위에 있는 거라고는 나무, 나무, 구름, 나무, 그리고 아담한 집 몇 채가 다였다.

“저기에 노송나무가 있습니다요.”

마부가 마차를 멈추자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언덕이라고 말하기 뭣한 작은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갔다. 길 너머에 유난히 커다란 노송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대위님의 집이 이 근처에 있습니까?”

“예, 그사이 집을 다시 지은 게 아니라면 지붕이 붉은색일 겁니다. 마당은 그리 넓지 않고 굴뚝의 높이는 제 키의 반 정도 됩니다. 집의 오른편에 원추 모양의 교목이 한 그루 있습니다.”

“원추 모양의 교목이 있는 붉은 지붕 집이라…”

그러나 아무리 봐도 주위에 붉은 지붕 집은 없었다. 집이라고는 언덕길 아래에 두 채, 저 밑으로 길을 한참 따라 내려가야 하는 곳에 한 채가 있었다.

“위치를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 붉은 지붕 집은 보이지 않는데요.”

뒤를 보며 걷던 로미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자 조반니가 팔을 잡아줬다.

“조심하셔야지요.”

그때였다.

“양을 잡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거친 네베 사투리가 아닌 바치 말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서 양 한 마리가 폴짝대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양치기 여인이 치맛자락을 잡고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조반니는 양이 로미오를 들이받지 않도록 그를 옆으로 물러서게 한 후 길 한가운데로 나갔다. 팔을 벌려 막자 양은 속도를 늦추더니 멈춰 섰다.

메에에에!

양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여인이 허겁지겁 뛰어와 얼른 목줄을 채우고 흙투성이 앞치마로 목의 땀을 닦았다.

“고마워요, 하…… 목줄을 놓치는 바람에, 하아… 양이 도망가 버렸어요. 못 잡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여인이 안도해 한숨을 내쉬자 조반니가 빙긋 웃었다.

“조금 전에 양을 데리고 지나가시는 걸 봤습니다. 그사이에 이 녀석이 목줄을 빼고 도망갔군요.”

여인은 조반니의 그림 같은 미소에 땀을 닦다 말고 웃었다. 양을 잡아 준 게 추남이었다고 해도 고마운 일인데 시골에서 보기 힘든 세련된 미남이 자신의 양을 잡아 줬으니 몇 배는 더 고마웠다. 심지어 눈앞의 이 미남은 목소리까지 매력적이었다.

“아까 그 마차에 타고 있던 분들이신가요?”

“네. 마차가 지나가는 걸 보셨군요.”

“이곳 분들이 아니시죠? 외지에서 오셨나요?”

“바치에서 왔습니다.”

“멀리서 오셨네요!”

조반니는 양의 머리를 만졌다. 뭉실뭉실한 털이 좌우로 갈라지며 안쪽까지 손이 들어가자 털을 잡아 뜯을 것처럼 세게 쥐었다. 그러자 양은 엉덩이를 빼며 울었다. 메에에…….

“정말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이 언덕길을 전부 뛰어 내려가야 할 뻔했어요. 감사해요.”

여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다 말고 로미오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빤히 로미오를 바라보던 그녀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됐다.

“혹시…… 엔초?”

놀란 것은 로미오도 마찬가지였다. 여인은 로미오의 얼굴을 뜯어보더니 재차 물었다.

“엔초니? 맞아? 아니, 아니지! 엔초는 아주 어린 아이였는데?”

로미오는 눈썹을 찡그리며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노력했다. 이 마을 사람이라면 5년 전 바치로 떠날 무렵의 자신을 기억할 수도 있었다. 희끄무레한 여인의 얼굴을 잘 보기 위해 눈가를 좁히자 옆에서 조반니가 넌지시 말했다. 눈을 그렇게 찌푸리시면 좋지 않습니다, 대위님.

“제 이름은 로미오이고 엔초는 제 남동생입니다. 이 마을에 오래 사신 분입니까?”

“아, 그렇지! 엔초에게 형제가 두 명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제일 나이 많은 형이 아마 군인이 되었다고 했죠. 엔초는 오래전에 수도로 가 살기 위해 여길 떠났고요.”

* * *

“사양 말고 드세요. 양젖 우유가 특히 일품이니 식사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양젖 우유를 반드시 드셔야 해요.”

양치기 여인의 이름은 드루시아였다. 약 4년 전에 네베에 잠시 살았던 그녀는 3년 전에 남동생과 함께 대도시로 옮겨 가 그곳에서 살다 지난달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도시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농사일을 시작한 그녀는 이곳에 정착할 생각이라고 했다.

네베 사람이 아닌 드루시아는 로미오가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바치로 떠난 이후에 네베로 옮겨 와 살기 시작한 까닭에 피에트로와 엔초만 기억했다. 이웃에 살며 어렸던 엔초와 종종 놀아 줬기 때문에 요정같이 사랑스러웠던 엔초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했다. 어린아이였던 엔초가 아무리 빨리 자랐다 해도 로미오만큼 장성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로미오가 엔초와 쌍둥이처럼 닮아서 잠깐 착각을 했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밥은 혼자 먹는 것보다 다 같이 함께 먹는 게 더 즐겁기 마련이죠. 제 동생은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돌아올 거예요. 마침 식사 시간이니 사양하지 말고 드세요.”

드루시아가 직접 재배한 작물로 차려진 식사는 건강해 보이는 요리들이 주를 이뤘다.

쾌활한 성격의 드루시아는 선뜻 먼저 로미오와 조반니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는데 허름하지만 정겨운 분위기를 풍기는 드루시아의 집은 세 사람이 서 있었던 언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당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는데 드루시아는 밭도 가꿨기 때문에 집 앞마당에 농사를 짓는 데 쓰는 기구들과 흙 묻은 장화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랬군요. 하긴, 두 분께서 형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제 기억에 분명 엔초에게는 형이 둘 있었거든요. 그리고 뭐로 보나 대위님께서 엔초와 꼭 닮으셨어요.”

식사는 담소로 시작됐는데 조반니는 로미오의 윗집에 사는 이웃이자 의사라고 소개했다. 드루시아는 옛일을 더듬어 알피에리 집안에 관한 기억을 되살렸다.

“그사이 엔초가 많이 컸겠네요. 여길 떠날 때만 해도 마당에서 혼자 돌멩이를 차며 까르르대는 어린아이였는데요. 엔초가 지금 몇 살이죠?”

“여덟 살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 어쩜! 많이 자랐겠네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기뻐요.”

“아직 어린아이지만 조금씩 사내아이티가 납니다. 인사가 많이 늦었지만 엔초를 돌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한적한 마을이다 보니 또래 친구도 부족하고 피에트로는 엔초를 성가셔해 같이 놀아 주지 않았던 터라 제가 떠나고 엔초가 외로움을 많이 느꼈을 겁니다.”

“아니에요.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걸요, 뭐. 그나저나 엔초가 저를 기억할지 모르겠네요. 버섯 수프를 끓여 주던 누나라고 하면 알려나요?”

“기억할 겁니다. 바치로 돌아가면 엔초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로미오는 자신의 눈이 어둡다는 사실을 드루시아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며 탁자 위의 음식들을 내려다봤다. 어떤 음식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드루시아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말할 틈을 기다리는데 옆자리에 앉은 조반니가 그녀가 잠깐 부엌으로 간 사이 음식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이쪽에 놓여 있는 접시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수프, 빵, 삶은 닭요리 순입니다. 양젖 우유는 왼쪽 팔꿈치 옆에 놓여 있습니다. 감자는 여기에 덜어 드릴 테니 떠서 드시면 됩니다.”

그에게 어쩐지 보모 노릇을 시킨 것 같아 로미오는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어서 드십시오.”

“네. 식사 중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드루시아가 식탁으로 돌아와 앉자 로미오는 자신의 집에 대해 물었다.

“실은 집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제가 떠날 때 종고모님께서 피에트로와 엔초를 돌봐 주시며 그 집에서 지내셨지만 동생들이 바치로 오고 난 이후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혹시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드루시아는 눈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다 손뼉을 쳤다.

“맞아요, 기억나요. 그때 분명 어느 노부인께서 피에트로와 엔초를 돌봐 주셨죠. 그런데 아직 살고 계신지는 모르겠네요. 대위님 댁은 저 집일 거예요. 저도 이곳에 오고 나서 멀리서만 봤지 가까이 가 본 일은 없어요. 제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집이 맞을 거예요.”

드루시아는 창을 통해 보이는 집을 가리켰다. 지붕 색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아주 먼 곳에 2층 지붕 집이 하나 있었다. 노송나무 근처에서 집을 찾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먼 거리였다. 전혀 다른 곳에서 집을 찾은 게 되자 로미오는 멋쩍음을 느끼며 조반니를 쳐다봤다.

“제가 위치를 착각했나 봅니다.”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고향을 찾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 로미오는 손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한 번 더 확인했다.

“저 집 말씀이십니까?”

‘저 집’이라고 이야기해 봐야 보이지 않았지만 방향 정도는 알고 싶었다.

“네, 저 집이요. 식사가 끝나고 다녀오세요. 아마 사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제가 여기 오고 나서 저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본 기억이 없어요. 밤에도 불빛은 늘 꺼져 있어요. 다녀가는 사람을 본 적도 없고요.”

나이를 생각해 보건대 종고모는 네베를 떠나 다른 도시에서 살다가 돌아가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에 잠겨 창밖을 보던 로미오는 뒤늦게 물었다.

“묘지의 위치도 알려 주시겠습니까?”

* * *

식사가 끝나자 로미오와 조반니는 집을 나섰다. 시장에 볼일이 있는 드루시아는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다며 두 사람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할 곳이 여의치 않다면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만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잠자리까지 내어 줄 것 같았다.

“마음씨 좋은 분을 만나 다행이네요.”

“예. 친절하고 상냥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동안 주변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에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농부가 있었지만 거리가 멀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종고모님과는 언제 연락이 끊기셨나요?”

“3년 정도 되었습니다.”

선선히 대답했으나 로미오는 조반니와 함께 옛집을 둘러보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 의문을 느꼈다. 비록 함께 네베에 오긴 했지만 옛집을 보여 줄 정도로 그와 친밀한 사이가 아닌 데다 어쨌든 이곳은 자신의 고향이고 조반니는 자신이 데려온 외지 손님이었다. 그가 후에 바치로 돌아가 네베에 대해 회상할 때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 하나쯤은 있길 바랐다. 구경거리가 없는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조반니가 말한 ‘휴양차’에 어울리는 시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주위를 구경하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제집은 저 혼자 다녀와도 괜찮습니다.”

“아니요. 함께 가시지요. 저도 대위님의 집이 어떨지, 종고모님께서 아직도 그곳에 사시는지 궁금하군요.”

흥미로워하는 기색을 서슴없이 내비쳤으나 조반니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대위님께서는 제가 함께 가는 게 불편하신가요?”

로미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전 고향에 돌아온 것이지만 선생님께서는 네베가 처음이시고 또 아주 멀리서 온 손님이지 않습니까. 제 고향집은 그리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낡은 집을 구경시켜 드리려니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런 시골길을 대위님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좋은 공기에, 좋은 풍경이 이렇게 펼쳐져 있는데 더 바랄 게 있겠습니까? 거름이 쌓인 흙길이라도 대위님과 함께 걷는다면 그보다 즐거운 일은 없지요.”

“……그렇습니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죠. 연락이 끊기기 전까지 종고모님과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셨나요?”

“예. 안부를 묻는 편지를 두 달에 한 번씩 주고받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선 형제가 없으셨기 때문에 종고모님이 저희 형제에게 유일한 가족이셨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사실 종고모는 그리 가까운 친척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왕래가 잦은 편이 아니었기에 홀로 바치로 떠나야 했던 로미오로선 무턱대고 두 동생을 부탁할 수 없었다.

갑자기 고아가 된 형제들의 사정을 듣고 네베로 옮겨 와 산 종고모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로미오는 소식이 끊기기 여섯 달 전에 편지를 통해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이후 피에트로와 엔초가 바치로 오고 나서부턴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이 보이는군요. 붉은 지붕이 맞습니다. 원추 모양의 교목도 있네요.”

계속 걷자 서서히 집이 가까워지며 집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로미오는 사방이 넓게 트여 있다는 것 외에는 방향조차 쉽게 가늠할 수 없었기에 조반니가 먼 거리에서 집의 외관에 대해 설명했다.

“창은 모두 닫혀 있습니다. 마당에는 울타리를 뽑은 흔적이 보이고 2층 다락방에는 돌출된 형태로 채광창이 나 있습니다. 계단식 박공지붕 위에는 적황색 굴뚝이 있군요.”

“맞습니다. 제대로 찾아온 거 같군요.”

“대위님의 집이 맞습니까?”

“예.”

조반니는 집 주변의 경관도 설명해 주었다. 그가 걸어 다니는 나침반 내지 망원경 같다는 생각에 로미오는 죄송스러움을 느꼈으나 조반니가 번거로워하지 않고 성실히 설명을 해 준 덕택에 기억 속의 집 풍경과 조반니의 설명 속의 집 풍경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머릿속에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었다.

조반니의 섬세한 설명은 고향집을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해 줬는데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는 조반니는 구조적이고도 정확하게 집의 외관을 설명했다.

“정말 아름다운 집이군요. 이런 곳에 살면 해가 지는 저녁을 특히 기다리게 될 겁니다. 노을이 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마당에 도착하자 발밑에 길게 자란 풀들이 밟혔다. 로미오는 발끝에 신경을 집중하고 천천히 마당을 걸었다. 오랫동안 돌보는 이가 없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군요. 먼지가 쌓여 있어요.”

문 앞에 서자 조반니가 문고리를 손으로 쓸며 이야기했다. 먼지 부스러기가 묻어나와 사방으로 날렸다. 문 옆에 난 덧창의 창틀을 훑자 역시나 소복하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로미오가 문고리를 억지로 돌리자 굳어 있던 문손잡이가 돌아가며 끼기긱, 소리를 냈다. 문간을 한 손으로 잡고 문을 힘주어 당기자 덜컹거리며 열렸다.

집 안이 어두컴컴해 발밑을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조반니가 뒤에서 손을 뻗었다.

“잠시만요. 네, 이제 됐습니다.”

머리 위의 거미줄을 보지 못한 로미오를 대신해 거미줄을 전부 치워 낸 조반니는 천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손으로 천장을 만지며 문을 전부 열었다.

“불빛이 될 만한 걸 갖고 왔으면 좋았겠네요.”

로미오는 바닥이 기울어지는 소리와 집 안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움직임, 집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바람 소리로 집 안의 모습을 유추했다. 자신이 느끼기에 집은 5년 전 그대로였다.

“종고모님께서 이 집을 떠나신 지 아주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바닥에 먼지가 그대로 쌓여 있는 걸로 봐 적어도 몇 년간 들어온 사람이 없는 듯합니다.”

집 안을 둘러보던 로미오는 벽을 더듬어 걸으며 찬장으로 다가갔다. 찬장 문을 열어 손을 넣자 먼지 쌓인 접시들이 만져졌다. 찬장을 손으로 쓸며 걸음을 옮기다 선반이 나오자 선반 안쪽을 더듬었다. 역시 낡은 그릇들이 들어 있었다.

팔을 뻗는 동작 때문에 가슴과 윗배에 통증이 느껴졌다. 입술을 문 로미오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했다. 위를 올려다보자 어둠뿐이었다. 자신과 피에트로, 엔초의 방은 전부 2층에 있었다. 피에트로와 엔초는 계단에서 바로 보이는 방을 같이 썼고 자신은 복도 안쪽의 방을 썼다.

계단 난간을 짚었으나 올라가지 않고 돌아섰다. 응접실 옆에 있는 문을 열자 문이 뿌연 먼지를 토해 내며 열렸다.

“대위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집 안을 둘러보던 조반니가 주의를 줘 로미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쓰던 방 안에는 낡고 오래된 냄새가 떠돌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빈 가구들이 놓여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나무 뼈대만 남은 낡은 침대와 의자를 상상했다.

농사일로 늘 바빴던 부모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장에 나가 있었다. 농작물을 팔아 번 돈으로 저녁거리를 사 왔고 초를 아끼기 위해 일찍 잠이 들어 다음 날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섰다.

배고픔과 추위에 허덕일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가난 때문에 얻을 수 없던 것들이 많았다. 이제 부모님은 곁에 없었고 이 집은 버려졌다. 굴뚝의 연기가 타오르고, 집 안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따뜻한 불빛이 퍼졌으며, 아기였던 엔초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던 이 집에는 더 이상 그 어떤 온기도 소리도 없었다.

꿈에 그리던 고향집이었다.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 갈 고향집이기도 했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조반니가 계단 머리에 서서 물었지만 로미오는 방을 한 번 둘러본 뒤 문을 닫고 나왔다.

“예. 그만 가야겠습니다.”

“좀 더 둘러보지 않으시고요? 제가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며 설명 드리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로미오는 벽을 손으로 짚으며 느리게 집 안을 걸었다. 거실을 한 바퀴 돌며 천장과 벽의 구조를 느끼고 있자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조반니는 5년 만에 고향집을 찾았으나 로미오가 기뻐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손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본래 이런 상황에서 옛 추억에 잠기지 않던가?

“이제 묘지에 가 봐야겠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이런 것에 대해 감응을 느끼지 않는 성격이라고 이해하고 그와 함께 집을 나왔다.

그러나 드루시아가 알려 준 묘지가 있는 방향으로 걷는 동안 로미오는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바닥만 봤다. 조반니는 경치를 감상하는 척하며 로미오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저기 묘지가 보이네요.”

꽤 한참을 걸으니 묘지가 보였다. 평평하고 넓은 땅 위에 울타리를 둘러 경계를 만들고 묘석을 세워 놓은 묘지는 시골 마을에 어울리는 단출한 모습이었다. 묘지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묘지 입구의 풀을 뜯어 손본 흔적이 있었고 주위를 걸어 다닌 흙 발자국도 보였다.

입구로 들어서자 로미오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석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묘석에 적힌 글씨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에 의존해야 했는데 뒤따라오던 조반니가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알피에리라는 성을 가진 이름을 먼저 발견했다.

“대위님.”

조반니는 허리를 숙여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묘석의 이름을 확인했다. 로미오의 아버지로 보이는 이름 옆에는 나이 든 여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로미오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묘석을 더듬었다. 손끝으로 만져 묘석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고 묘석의 윗부분을 손으로 쓸었다. 높이와 넓이도 확인하고 나서야 조반니에게 물었다.

“‘발다사리오 알피에리’와 ‘리비아 알피에리’라는 이름이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로미오는 몸을 바로 했다. 부모님의 묘석이 맞았다. 실로 5년 만이었다.

“묘석이 어떻습니까? 금이 가거나 부서진 흔적이 보이십니까?”

“깨끗합니다. 묘지 전체가 주기적으로 관리되는 듯합니다. 묘지 입구의 풀도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고 묘석 위도 말끔하군요.”

조반니는 별 감응 없는 눈으로 주변을 구경했다. 묘지는 해부할 시체가 필요할 때나 오는 곳이었다. 밤이슬이 성가시긴 하지만 곡괭이 한 자루만 있으면 손쉽게 신선한 시체를 얻을 수 있었다.

묘석을 내려다보는 로미오는 얼마간 말이 없었다. 지그시 보기만 하는 그는 옛 감상에 젖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눈빛이 깊어 보였다.

“묘지기에게 묘지 관리비를 보내신 보람이 있네요.”

가벼운 말을 건네자 로미오는 어루만지듯 묘석을 쓸며 대답했다.

“예…….”

그러고도 다시 한동안 로미오는 묵묵히 묘석만 내려다봤다.

조반니는 기다리는 무료함을 참으며 앉아 있는 로미오를 구경했다. 로미오는 특별히 작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바닥에 앉아 있으니 자그마하게 보였다. 결 고운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하얀 귀를 가렸다가 들춰 냈는데 완벽한 모양과 크기를 가진 귀가 눈을 즐겁게 했다. 귀 하나쯤은 볼품없게 생길 법도 한데 로미오는 귀까지 그림처럼 보기 좋았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는지 궁금했다.

앉아 있는 그의 엉덩이 밑으로 머리를 넣어 그곳의 냄새를 맡고 싶다고 생각하던 조반니는 로미오가 실타래 같은 긴 기억을 어느 정도 풀어냈다고 생각될 때쯤 입을 열었다.

“옛일들을 떠올리고 계시는군요. 묘지란 그런 곳이지요. 만나러 온 사람과의 기억이 떠오르는 장소요.”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걸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로미오를 위해 한 말이었는데 그는 낮은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더니 다시 말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소리 없이 하품을 한 조반니는 발 옆을 지나가는 개미를 신발로 밟아 비비며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까요?”

지루한 분위기를 풀 겸 이야기를 꺼냈으나 로미오는 대꾸가 없었다. 조반니는 좋을 대로 말을 이었다.

“말로 대위님 말입니다.”

느닷없이 발레리아의 이야기를 꺼내자 로미오가 앉은 채 이쪽을 올려다봤다. 위로 뜬 눈이 평소보다 크고 동그래 엔초가 생각났다. 웃음이 나왔지만 참고 말했다.

“혹시 말로 대위님의 어머니께서 바치 병원에서 일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까지는 모르나 대위님의 어머니께서 오랫동안 의사로 일하신 것은 맞습니다. 말로 대위님의 누이들도 의사라는 이야기를 일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역시나 그렇군요.”

“왜 그런 걸 물어보십니까?”

“지난번에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세 분을 뵙고 돌아가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나더군요. 바치 병원에서 일하던 시절에 말로 대위님과 닮은 의사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분도 말로 대위님과 같은 붉은 머리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런 머리 색은 흔치 않지요. 그리고 눈매가 깊은 미인이기도 하셨습니다. 말로 대위님께서도 미인이시니 당연한 사실이라고나 할까요? 제 기억 속에 두 분은 굉장히 닮으셨습니다. 마치 어머니와 딸처럼요.”

로미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그 의사분이 말로 대위님의 어머니가 맞으실 겁니다.”

“병원에는 밤낮없이 환자가 많은 데다 바치에는 워낙 미인이 많다 보니 아름다운 분들을 뵙고도 금방 이름과 얼굴을 잊게 됩니다. 그날 말로 대위님을 뵙고 그 자리에서 바로 기억해 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며 수도 없이 많은 미인을 본 터라.”

‘워낙 미인이 많다 보니’라는 대목에서 조반니는 장난스럽게 로미오의 눈을 지그시 봤다. 말문 막히게 하는 조반니의 장난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반응을 대체했다. 잠깐이었지만 이자는 자신을 사내로 보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또다시 이런 식의 농담을 한다면 그때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만약 바치로 돌아가서도 생각이 난다면 말로 대위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자신의 눈을 보지 않고 묘석을 향해 대꾸하자 그의 옆얼굴을 구경했다. 끝이 들려 올라간 로미오의 긴 속눈썹이 깜빡거리는 게 눈에 띄었는데 희고 말간 뺨 위로 내려앉아 흔들리는 모양새가 욕정과 함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었는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예, 그러십시오.”

“실례가 되는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여기에 있는 묘석들을 하나씩 전부 짚어 가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해야 했을 겁니다. 도움을 주셨으니 무엇이든 대답을 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으니 말씀하십시오.”

조반니는 속눈썹 아래에 덮인 로미오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그는 과연 검은 망토로 몸을 가렸던 자신의 정체를 얼마나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대위님께서는 어느 정도까지 보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 이렇게 마주 보고 있을 때 제 표정이 보이시나요?”

“아니요. 보이지 않습니다.”

몸을 돌린 로미오는 조반니와 자신 사이에 가까운 거리를 만들어 보였다.

“이 정도 거리에 서야 상대의 얼굴이 보입니다. 이목구비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어렴풋하게 보일 정도는 됩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얼굴의 특정 부분을 흐릿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지금 여기 있는 묘석에 적힌 글씨도 좁은 거리에서는 읽을 수 있으신가요?”

“예. 고개를 숙여 눈을 가까이해 들여다보면 읽을 수 있습니다. 글을 읽거나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아주 가까이에 대고 보면 글자를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제 얼굴을 모르시겠군요? 저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보신 적이 없으니까요.”

“선생님의 머리가 금발이라는 것만 압니다. 지금 입고 계신 옷이 붉은 계열이라는 것도요.”

조반니는 턱을 치켜들고 교만한 미소를 지었다. 로미오가 자신의 얼굴을 봤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으리라.

“제가 눈의 상태를 봐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저 보기만 하겠습니다.”

공손히 묻자 로미오는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반니는 검지를 들어 로미오의 눈앞에 가져갔다.

“이 손가락이 보이십니까?”

“뚜렷하지는 않지만 보입니다.”

“손을 움직일 테니 손끝을 보면서 눈을 떼지 않고 따라오세요.”

로미오가 정면을 보자 조반니는 손가락을 옆으로 움직였다. 로미오의 눈동자가 따라오는 것을 주시하며 그 움직임을 살폈다.

“처음으로 시력에 이상이 생긴 것은 언제였습니까?”

“열네 살 때였습니다.”

로미오는 시선을 옮기며 입으로만 대답했다. 조반니가 어느 손가락을 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은 점 너머로 그의 손이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때 어떤 형태로 시력 저하가 나타났나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천장이 흐리게 보였습니다. 밥을 먹으며 어머니께 숟가락을 쥔 손이 흐릿하게 보인다고 말씀드렸지만 어머니께선 제가 잠이 덜 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이후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느낄 만큼 간혹 시력이 돌아오기도 했지만 눈 앞이 흐리게 보이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해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열네 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시력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로군요.”

“예. 소위 임관 때까지만 해도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선명하게 보였던 데다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양쪽이 비슷한 속도로 꾸준히 나빠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저를 진찰했던 옆 마을의 의사 선생님께서는 시력이 떨어지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넘어지거나 머리를 부딪치는 일이 잦아지자 부모님께선 저를 대도시로 데려가 다른 의사에게 진찰받게 했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던가요?”

“예.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완전히 앞을 못 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지금까지 보이는 것으로 봐 예상보다 시력 저하가 더디게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손을 내리자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뿌연 연기가 드리워져 있어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현재로선 2년 내에 눈이 전부 멀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풀잎이 날아와 로미오의 머리에 붙었다. 바람의 손이 살포시 내려놓은 듯한 그 풀잎을 본 조반니는 손을 내밀어 풀잎을 떼어 냈다.

손이 닿기 전 로미오는 뒤로 물러서며 피하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조반니가 자신의 머리에 붙은 무언가를 떼어 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시야의 가운데와 주변부를 비교했을 때 어떤가요? 흐릿한 정도가 동일합니까?”

“예.”

조반니는 바치로 돌아가 로미오의 상태를 다시 한번 정밀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로미오가 괜찮다며 거절할지 몰라 우선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시야의 범위가 좁아지는 협착 증상은 없는 듯합니다. 색을 구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시력 저하는 색각(色覺)이라고 해서 색을 식별하는 감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붉은색을 가장 잘 구별합니다. 염료를 먹인 옷의 경우 회색과 흰색, 황색의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푸른색과 녹색은 동일한 색으로 파악해 진하고 옅은 정도만 압니다. 붉은색은 여러 단계로 나눠서 파악할 수 있는데 선생님께서 지금 입고 계시는 옷은 진한 붉은색일 겁니다. 사람의 피부 밝기 정도로 옅다 하더라도 붉은 계열은 다른 색과 혼동하지 않고 알아볼 수 있습니다.”

조반니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하듯 얘기했다. 앞으로 붉은색 옷만 입어야겠네요.

미소가 섞인 그의 중얼거림에 로미오는 그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걸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그렇다면 시력이 악화되어 가는 중에 사관 학교에 들어가셨습니까?”

“예.”

“대단하시군요.”

조반니는 짧은 탄식 같은 소리를 냈다. 남에게 박수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미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위님께서는 어려서 쭉 이 마을에서 사셨나요?”

“예. 마을 밖으로 나가 본 적은 없습니다.”

“주위에서 군인을 본 적이 있나요? 시골 소년이 군인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주위에 군인은 없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런 길을 택하게 됐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과거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로미오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차례 침묵이 흐르는 동안 머리를 굴린 조반니는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달리했다.

“저는 어려서 도시에서만 살아 이런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이 몹시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여기 온 지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시골 생활과 잘 맞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네요. 대위님께서는 소년 시절에 도시로 나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대화가 이어지길 바랐으나 로미오는 그렇게만 말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조반니는 자신이 로미오를 제대로 파악한 게 맞다면 이 이상 그가 술술 이야기하는 것을 기대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과 달리 로미오는 비밀 많은 사춘기 소년처럼 입이 무거웠다.

이야기를 끌어내는 방법 중에는 상대의 관심사에 대해 얘기하는 방법이 있었다. 상대가 가장 열의 있게 대답할 만한 것을 캐내다 보면 쉽게 마음을 허물 수 있었다. 그러나 로미오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것을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그에게는 엔초가 약점이니 엔초를 미끼로 던지면 비교적 순순히 응할 테지만 지금 여기서 엔초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맞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지 않으면서 받고만 싶어 하는 사람을 반기는 이는 없었다.

“묘석을 보고 있으니 저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나는군요.”

조반니는 로미오를 보지 않는 체하며 묘석을 내려다봤다.

“일전에 제가 누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었을 겁니다. 사실 어렸을 때 제게는 남동생도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어렸을 때는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라는 말처럼 들리자 로미오가 말끝을 끌었다. 조반니는 한 박자 쉰 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때에 슬픈 미소 같은 것을 지으며 말했다.

“남동생은 제가 다섯 살 때 죽었습니다. 세 살에 죽었기 때문에 영원히 그때에 머물러 있죠.”

로미오는 놀란 표정이 돼 고개를 젖히며 조반니를 올려다봤다. 조반니가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할 거라는 것도, 그에게 죽은 형제가 있다는 것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너무 섣불리 말했나? 조반니는 시름에 잠긴 척 고개를 깊이 숙이고 머리를 굴렸다. 자, 다음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불의의 사고였습니다. 막을 수 없었죠.”

거짓말이었다.

“어쩌다 그런 일이…….”

로미오는 말을 다 잊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표정이 퍽 재밌다고 생각하며 그를 곁눈질했다.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미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타인의 죽음에 애도의 감정을 느꼈다. 로미오가 다른 이들과 같은 지루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달갑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엔초가 있었다. 엔초를 끔찍이 생각하니 저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가 어린 시절 루바노를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았다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실은 남동생 때문이었습니다. 남동생이 죽고 큰 충격에 빠지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동생이 죽은 이 나라를 떠나길 원하셨습니다. 누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아주 명석하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넘치는 재능을 갖고 계셨지만 그 재능은 두 분의 상실감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루바노를 떠나 전 세계 이곳저곳을 떠돌다시피 하며 살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언제나 남동생을 그리워하셨지요. 특히 어머니께서 많이 괴로워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새벽녘 무렵 제 방의 복도 너머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잠을 깨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발소리를 죽여 어머니의 방으로 가 보면 어머니는 남동생의 물건을 품에 안고 울고 계셨어요. 너무 어린 나이에 죽어 손바닥보다 더 작았던 남동생의 신발을 끌어안고 말입니다. 아버지 역시 병으로 돌아가시기 전 사경을 헤매며 남동생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찾은 것이 죽은 지 20년도 더 된 어린 아들이라니 그 상실감의 크기가 얼마나 컸을까요? 저로서는 차마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말하는 내용 속에 거짓말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평생을 괴로워한 것은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이 있지요. 집 안의 가구 같은 것들도 그렇습니다. 손때 묻은 오래된 것들을 쓰다가 버려야 할 때가 오면 망설이게 됩니다. 버리고 나면 버린 것을 후회하고 그 물건이 놓여 있었던 자리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한낱 물건도 그런데 살아 있는 인간은 그보다 더한 게 당연합니다. 그 사람과 나눴던 온기, 그 사람의 미소, 눈빛, 숨소리 같은 것이 마음속의 씨앗이 돼 뿌리를 내리고 나무로 자라면 한낮의 햇빛도 들지 않을 만큼 서늘한 그늘을 드리웁니다. 남동생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는 그 죽음이 오래된 얼룩 같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계절이 수십 번을 바뀌는 것을 보았고 유난히 봄이 푸르렀던 해도 있었습니다. 겨울이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진 나라에서도 몇 해를 보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께는 그런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동생의 죽음 이후 그 어떤 것도 두 분의 마음을 달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두 분의 눈빛 속에서 깊은 상실감을 읽었습니다. 생애의 절반에 달하는 긴 시간을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을 잃었다는 슬픔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하셨어요.”

이야기를 듣는 로미오는 선뜻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 망설이며 물었다.

“남동생의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조반니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안젤로였습니다.”

안젤로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광장 한복판에서 ‘이봐, 안젤로!’를 외치면 지나가던 열 명의 사내들 중 일곱 명이 돌아볼 법한 이름이었다. 바치 시장의 청과상의 이름도 안젤로였다.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선생님께서도 크게 상심하였겠군요. 어떤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십수 년 전 만난 미인의 이름은 기억하면서 자신이 태워 죽인 남동생의 이름은 잊어버린 조반니는 남동생의 이름이 뇌리에 남을 만한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쓸쓸한 척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 아픈 일이지요.”

마음 아픈 일? 마음이 아프다는 게 대체 뭐지? 스스로 말해 놓고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무렴 뭐 어떤가, 하는 생각에 조반니는 로미오가 보기 전에 다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남동생의 죽음은 제 어린 시절 가장 슬픈 기억 중 하나입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에요.”

“선생님께서 누님의 이야기만 하셔서 형제분이 더 있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습니다. 누님께서도 많이 마음을 상해하였겠군요.”

“온 가족이 그랬습니다. 누님은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남동생이 죽었을 때 어른이라고 할 만한 나이었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 힘들어하셨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짧게나마 침묵한 후 생쥐한테 치즈를 건네는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대위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습니까?”

가는 게 있다면 오는 것도 있어야겠지. 속으로 뇌까린 조반니는 침착하게 덧붙였다.

“이런 곳에 살면 적어도 건강만큼은 도시 아이들보다 좋을 것 같은데요. 대위님께서는 어려서 어떤 생활을 하셨습니까?”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늘 바쁘셨습니다. 밭에 나가 온종일 일을 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게 두 분의 일상이었습니다.”

“농부의 삶이란 대개 그런 것일 겁니다. 대위님께서도 집안의 농사일을 많이 도와주셨나요?”

“사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지천에 산과 들이 있다 보니 저는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는 건강한 아이였습니다. 땀 흘려 놀기보다는 시원한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해 나무 밑에 앉아 땅속의 벌레를 구경하는 걸 더 좋아했습니다.”

“농부가 아니라 군인이 되신 걸 보면 농사일이 대위님께 맞지 않았나 보군요.”

로미오는 아주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눈빛이 고요해졌다.

“철이 없었지만 어린 마음에 농부는 절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위님의 부모님께서는 그걸 원하셨고요?”

“예.”

로미오는 사이를 두었다가 계속 말했다.

“전 어머니와 아버지를 미워한 적은 없지만 뙤약볕 아래에 등을 구부린 채 목과 팔이 검게 탈 때까지 두 분을 괴롭히는 농사일은 미워했습니다. 농사일이 미워지기 시작하니 이 시골 마을도 미워지더군요. 평생 이런 곳에 갇혀 당근과 감자를 캐고 시장에 내다 파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이런 곳에 살며 답답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군인이 될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저를 해방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하기도 했었습니다.”

“그게 군대였습니까?”

“예. 소년이었던 저는 군대가 제게 탈출구가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작은 시골 마을을 벗어나 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는 넓은 세계로 안내할 탈출구 말입니다. 어려서 부모님은 항상 바빴고 저는 사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제가 별 볼 일도, 쓸모도 없는 평범한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군대는 달랐습니다. 이 나라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제게는 큰 위로가 됐습니다.”

로미오는 과거로 돌아간 듯 회상에 잠겼다.

“사관 학교 생활이 뜻대로 되었던 건 아닙니다. 학비는 만만치 않았고 시골 촌뜨기였던 저로서는 적응하지 못할 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다니기 시작한 것이었으니 그만두는 건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이 점점 나빠지며 석판이 보이지 않게 됐고 어머니께서 싸 주신 도시락을 옷과 바닥에 흘리며 먹는 일이 잦아졌지만 그런 이유로 군인이 되겠다던 결심을 철회하는 것은 나약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제6군단의 지원병을 모집하기 위해 바치에서 장교 한 분이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분은 제6군단에 입대해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통령 각하를 위해 봉사하는 영광을 누릴 자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저는 그분의 강렬한 눈빛과 마주쳤습니다. 저는 그분이 저를 지목한다고 느꼈고 응답을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졸업할 때 즈음에는 정말로 눈이 많이 나빠져 군 생활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제6군단에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저는 자부심을 느꼈고 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던 겁니다.”

로미오는 자신이 생각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이야기를 급히 끝낼 마음은 없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이들에게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껄끄럽지 않았다. 조반니가 그의 죽은 남동생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음을 천천히 빗질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학교생활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시력은 계속 떨어져 갔지만 그런 것쯤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차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요.”

이야기가 부모님의 죽음에 이르자 로미오는 말을 멈추었다. 부모님의 죽음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예견되지 않은 사고였습니다. 부모님께서 탄 마차가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전복된 것입니다.”

“그때 대위님께서는 몇 살이셨지요?”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피에트로는 열한 살이었고 엔초는 한 살이 될 무렵이었습니다.”

“저런…… 혼자서 많은 것을 감당하셔야 했겠군요.”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오랫동안 꿈꿔 온 군인의 길을 뒤로하고 피에트로와 엔초를 위해 농가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까지도 소년 시절의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러지 못했습니다.”

“더 넓은 세상이 대위님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군요.”

“예.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돼 바치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시작될 새 삶이 제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서요. 소위로 임관하며 말로 대위님과 무소 대위님을 만나게 됐으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좋은 분들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임관 사령증뿐이었던 가난한 장교인 제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사실 지난 5년간 고향에 올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오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제가 선택했어야 했던 본래의 삶이 여기에 있으니까요. 그것들을 외면하고 싶어서 오지 않으려고 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로미오는 이제 읽을 수 없게 된 묘석을 내려다봤다. 좀 더 일찍 왔다면 저기 새겨진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가 남았다.

“대위님께서 군인의 길을 택함으로써 잃은 것은 무엇이 있나요?”

조반니의 물음은 로미오에게 화두를 던졌다. 지나온 시간을 돌이키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지만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시골 마을에서의 평화로운 일상을 잃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땀 흘려 일궈 놓으셨던 땅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얻은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지금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이 군인이 됨으로써 얻은 것들입니다.”

“두 동생과 함께 사는 것 말이지요? 그리고 말로 대위님과 무소 대위님을 알게 되신 것도요. 또 어린 시절의 꿈도 이루셨고요.”

로미오는 조반니가 미소를 짓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에트로는 대학에 다니며 법을 공부하고 엔초는 조각을 배우고 있지 않나요. 폄하할 생각은 없으나 네베보다 바치가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은 사실이고 두 사람에게 바치는 대위님이 이곳을 떠나며 생각했듯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할 겁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요. 이 모든 것들이 고향을 떠나고자 했던 대위님의 결정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열아홉 살 어린아이가 혼자서 그런 결정을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엔초가 지금보다 나이를 먹으면 대위님께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감내하셨는지 이해하고 고마워하게 될 겁니다. 저는 누님만 있어 잘 모르지만 만약 형님이 계셨다면 대위님 같은 분이 제 형님이기를 바랐을 겁니다.”

로미오는 동생들이 자신에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네베를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조반니의 말은 충분한 위로가 됐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는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됐지만 마음 깊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무덤을 내려다보는 로미오는 묘지에 들어섰을 때보다 한결 표정이 편안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동조하듯 대답했지만 조반니의 표정은 로미오와 전혀 달랐다. 로미오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기 위해 그의 과거에 대해 물은 것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 조반니는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남동생을 약점으로 갖고 있는 로미오. 거기에 한 가지가 더해졌다. 군에 입대하는 것을 탈출구로 여겼을 만큼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 시골 소년. 죽은 부모를 대신해 형제들을 책임지고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불우한 소년.

사랑이 필요한 이에게 사랑처럼 보이는 것을 건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애정으로 허기를 달랜 이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잘 알았다. 사랑에 목마른 이들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조련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로미오가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주 반가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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