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네 사람의 저녁 만찬 (5/30)

5. 네 사람의 저녁 만찬

이른 아침, 조용한 골목에 발소리가 울렸다. 바치 대학교 교수들의 검은 망토를 입은 조반니는 좁은 골목 사이를 걷고 있었다.

로사티 3번가의 하숙집에서 본래 살던 저택까지는 제법 멀었기 때문에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걷는 조반니의 걸음은 빨랐다. 망설임 없이 골목 안쪽으로 꺾어 들어간 조반니는 3층 저택이 있는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저 멀리 고양이 한 마리가 저택 문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혀로 손을 핥으며 털 손질을 하고 있는 고양이는 근방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점박이 무늬를 갖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리자 고양이는 이쪽을 쳐다보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크게 하품을 했다. 느린 걸음으로 사뿐히 걷는가 싶더니 등을 둥글게 말며 기지개를 켰다.

다음 순간 조반니의 발이 빨라졌다.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고양이에게 다가간 그는 고양이가 가르릉대며 울음소리를 내려는 찰나 있는 힘껏 발로 고양이를 걷어찼다.

냐아옹!

괴력에 가까운 발길질에 골목 끝으로 멀리 날아간 고양이는 벽에 부딪히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쏜살같이 달아났다. 겁에 질린 울음소리가 골목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사이 조반니는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로 저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든 풀 냄새가 가득한 1층 정원에는 날벌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는데 불 꺼진 컴컴한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망토 자락이 일으킨 바람에 벽에 걸린 해부도 밑그림들이 팔랑거렸다.

계단을 다 내려간 조반니는 초를 찾아 불을 붙였다. 시체를 처분해 쿰쿰한 냄새만이 떠도는 지하실은 빛이 들지 않아 발아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제 미처 다 옮기지 못한 책을 챙긴 조반니는 초를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바이올린을 챙긴 그는 금방 다시 집을 나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로사티 3번가에 도착했을 땐 시간이 꽤 지나 있었기 때문에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숙집 건물 앞에 도착한 조반니는 망토를 털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에는 음식 냄새가 떠돌았고 층계 창문으로는 느긋한 아침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마침 그라나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부인. 좋은 아침입니다.”

숱 많은 백발을 동그란 모양으로 내려 묶은 그라나 부인은 키가 무척 작아 뒷짐을 지고 조반니를 올려다봤다. 북부 사투리를 쓰는 그녀는 귀가 어두웠는데 다행히 조반니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우? 간밤에 잠을 잘 잤어이?”

“네, 잠자리가 편해 덕택에 깊이 잠들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여쭤볼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이 근처에 괜찮은 약재 상점이 있을까요?”

“약재 상점 말이우? 난 약재 상점을 운영하지 않어이. 이 하숙집만으로도 밤낮없이 바뻐이.”

“아니요. 괜찮은 약재 상점이 있는지 여쭸습니다. 부인께서 자주 가시는 약재 상점이 있습니까?”

조반니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라나 부인은 고개를 휘둘러 저었다.

“난 약을 잘 먹지 않는다우. 이 나이가 되면 되레 약이 필요하지가 않어이.”

“그러면 괜찮은 약재상이 있을까요?”

“약재 무어라고?”

“약재상이요.”

“약재서? 약재서를 보고 직접 약을 지어 먹을 생각이우?”

“아니요, 약재상이요. 약재 상점이 없다면 필요할 때 약재상에게 약을 얻으려고요. 이 근방을 돌아다니는 약재상 중에 약을 얻을 만한 분이 계신가요?”

조반니는 허리를 굽히며 그라나 부인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그라나 부인은 주름진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내가 귀가 어둡다우. 크게 말해 주이?”

그라나 부인이 귀를 가져다 대자 조반니가 입가에 손을 댔다. 다시 한번 말하려는데 하숙집 문이 열리고 로미오가 들어섰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군복 차림이었다.

어제 새벽 늦게 로미오가 하숙집을 나서는 소리를 들었던 조반니는 오랜만에 본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위님.”

로미오는 그라나 부인과 조반니를 향해 묵례를 한 뒤 별다른 대꾸 없이 문을 닫았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조반니는 큰 목소리로 그라나 부인에게 다시 말했다.

“부인께서는 약이 필요할 때 어떤 약재상에게서 약을 얻으십니까?”

“응? 약재 무어라고?”

“약재상이요!”

“으응?”

조반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그라나 부인은 고개까지 한껏 들어 올리며 귀를 가져다 댔다. 조반니가 재차 크게 말하려는데 계단을 올라가던 로미오가 말했다.

“살라티코 거리로 이어지는 골목길에 암갈색 지붕을 한 오래된 약재 상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 엔초가 다치면 늘 그곳에서 약을 얻습니다.”

그라나 부인은 로미오의 말을 어떻게 들은 것인지 하얗게 센 옆머리가 나풀거리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맞어이. 그 약재 상점이 가장 가까우이.”

조반니는 로미오가 자신의 미소를 보지 못할 걸 알면서도 환하게 웃곤 그라나 부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로미오가 마저 계단을 올라가니 그라나 부인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조반니는 냉큼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어젯밤에 늦게 집을 나서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쩐 일로 다시 오셨지요?”

로미오는 한 손으로 계단 난간을 쓸며 한 칸씩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뜸을 들이듯 말이 없더니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사정이 있어 정직 처분을 받았습니다. 당분간은 집에 머물게 됐습니다.”

뒤따라 올라가던 조반니는 검집이 걸린 로미오의 허리를 내려다봤다. 군복 허리선을 따라 등허리를 훑다가 작은 엉덩이와 날씬한 허벅지 윤곽을 눈으로 더듬었다. 군복 바지에 감춰진 미끈한 종아리와 가는 발목의 움직임을 보는 동안 입가에는 음침한 미소가 걸렸다. 계단을 올라가는 로미오의 발소리는 군인답게 일정했지만 허리에서 엉덩이로 미끄러지는 맵시 있는 몸이 몹시도 우아해 입 안에 침을 고이게 했다.

“유감이군요. 어쩌다 그런 일이.”

애석함을 담아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조반니의 입꼬리는 치켜 올라갔다.

군복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로미오는 문고리를 손으로 더듬어 문을 열었다. 피에트로는 학교에 가고 엔초도 화실에 가 집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아침 식사를 한 탁자 위에는 빵 부스러기가 남은 접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조반니가 집 안으로 따라 들어올 것 같자 로미오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몸을 돌려 올려다보니 조반니의 뿌연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라나 부인께서 근래 들어 귀가 많이 어두워지셨습니다. 피에트로는 글씨를 써 보여 드리며 그분과 대화를 합니다. 부인께서 말을 못 알아들으시면 써서 보여 드리십시오.”

“그렇군요.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조반니는 나직하게 울리는 웃음소리를 섞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잠시나마 자신이 사내가 아니었더라면 조반니의 웃음소리를 매력적으로 느꼈으리라고 생각했다.

“약재 상점 외에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혹시 정부 청사에서 로사티 1번가까지 오는 도중에 지름길이 있을까요? 늘 포목점 골목 쪽으로 오는데 더 빨리 올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아니요. 포목점이 있는 골목으로 오는 게 가장 빠릅니다.”

“그렇군요.”

조반니는 또다시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반니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 않기 때문에 로미오는 자연히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는데 조반니의 말투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더 상냥하게 느껴졌다. 말소리는 빠르거나 느리지 않고 적당했으며 목소리의 크기도 너무 크거나 작지 않았다. 자신과 대화하고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목소리의 울림을 고려할 때 서 있는 자세는 곧았다.

조반니가 뒤에서 따라올 때 발소리를 들어 보면 그는 바닥에 뒤꿈치를 똑바로 디디며 바른 걸음걸이로 걸었다.

“대위님께서는 여기 사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2년 남짓 되었습니다.”

“집에 자주 들르시는 편인가요?”

“비가 오는 날에 가끔 들릅니다.”

“대부분 밤중에 다시 부대로 돌아가시고요?”

“그렇습니다.”

“잇몸은 어떠십니까? 지난번에 봐 드렸을 때보다 통증이 많이 가라앉으셨나요?”

가슴 쪽에 통증이 느껴져 장갑 낀 손으로 가슴을 짚던 로미오는 조반니가 잇몸에 대해 묻자 손을 멈췄다. 그날 술집에서 잠깐 봐줬을 뿐인데 조반니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모르고 넘어간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을 것을 물어봐 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으나 오늘 아침 군법위원회에서 내린 정직 처분 결과를 듣고 돌아온 탓에 한가하게 잡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예,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여쭤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벽에 열쇠를 걸고 장갑을 벗으며 그만 돌아가 주기를 완곡히 부탁하려는데 조반니가 부엌에 걸린 선반을 우연히 발견한 듯 물었다.

“저기 저 조각상은 엔초가 만든 것이겠군요? 어제 고양이 조각상을 잠깐 봐 주었는데 솜씨가 좋던걸요. 듣자 하니 화실에서 조각을 배운다고요?”

로미오는 조반니가 조각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를 내쫓으려던 것을 잠시 잊었다. 그가 엔초의 조각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예, 2년 전부터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로미오는 엔초가 어느 정도의 조각 실력을 갖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의 조각상을 만져 볼 기회가 없는 데다 엔초의 조각상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솜씨를 가늠하지 못했다. 엔초는 스승님에게 늘 좋은 말만 듣는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의학뿐만 아니라 그림과 조각에도 조예가 있으신 것으로 압니다. 언제부터 그림과 조각을 배우셨습니까?”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은 반기지 않는 로미오였지만 엔초의 일이라면 달랐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일부러 조각상 이야기를 꺼낸 조반니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여덟 살 때부터 배웠습니다. 그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갖고 노는 것을 좋아해 나무와 석고를 보면 두드리거나 깎으며 장난을 치곤 했어요. 회화에도 관심이 많아 종이가 보이면 늘 낙서를 해 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분께 조각을 배우셨습니까?”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루바노에서 보내지 않았으니까요.”

조반니는 천천히 로미오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누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전 다섯 살 때 루바노를 떠나 가족과 함께 프리올로 공국으로 가 살았다고 합니다. 수도 근처의 어느 교외 마을에서 살다가 아홉 살 때 이사를 가 페로모나라는 해안가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집 근처에 있는 운하로 나가 포도주며 치즈, 양탄자를 가득 실은 배가 들어오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저의 가장 큰 재밋거리였지요.”

“누님이 있으셨습니까?”

“네. 어머니 같은 분이셨습니다. 어머니가 계셨지만요.”

조반니는 자신이 다섯 살 때 벽난로에 넣어 태워 죽인 남동생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살아 있었다면 로미오보다 나이가 많았을 남동생의 이름은 잊어버려서 기억나지 않았다.

“엔초의 조각을 봐도 되겠습니까?”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며 묻자 로미오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십시오.”

책과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조각상을 집어 든 조반니는 자세히 조각상을 살폈다. 조각을 막 배운 어린아이들이 연습용으로 자주 만드는 사람의 두상이었다. 실제 머리 크기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크기였지만 다듬은 솜씨를 보아하니 충분히 재능 있다고 할 만해 보였다.

“엔초가 일곱 살에 화실에서 처음 만들어 온 조각상입니다.”

“그럼 이것이 엔초의 첫 작품인가요?”

“예.”

칭찬하는 말을 하려던 조반니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숨긴 채 잠자코 조각상을 살폈다.

“첫 조각이라…… 음…….”

혼잣말로 중얼대자 로미오가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얼굴이 됐다. 곁눈으로 그런 로미오를 흘끔 본 조반니는 그의 표정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턱을 매만졌다.

“그렇군요. 이 부분은…….”

로미오는 조각상을 보았다가 조반니의 옆얼굴을 본 뒤 다시 조각상을 봤다. 조반니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 않자 습관처럼 눈썹을 찡그렸다. 대답을 기다렸지만 조반니는 조각상만 계속 살펴볼 뿐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엔초의 조각상이 입을 댈 수 없을 만큼 형편없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조반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묻는 말이 튀어 나갔다.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조반니는 조각상을 내려놓는 대신 돌아서서 로미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로미오의 두 번째 손가락과 세 번째 손가락을 잡고 조각상의 머리 윗부분을 만지게 했다.

“이 부분을 한 번 만져 보세요. 손의 근육이 정밀하게 발달하지 않은 어린아이가 이런 형태로 조각을 다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끌을 다루는 경험이 많다 할지라도 그 능수능란함의 밑바탕에 해부학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엔초도 힘을 줘 끌을 잡고 석고를 깎아 내는 것은 자신보다 서너 살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수월하게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조각 실력과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여기 이 부분을 자세히 보십시오.”

조반니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빨고 싶다고 생각하며 로미오의 엄지를 잡았다. 손끝을 끌어다 조각상의 눈썹 뼈를 만지게 하자 로미오가 희고 긴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문질렀다.

“엔초는 회화 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얼굴 구조에 대해 해부학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구현해 내기 위해 수십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깎아 냈을 겁니다. 잘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이 밑에 윤곽선을 그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눈과 뺨을 둘러싸고 있는 얼굴뼈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윤곽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반니는 포개듯 로미오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어루만지며 쓰다듬자 조각상을 만지는 것에 집중하던 로미오가 한쪽 눈썹을 들썩거렸다.

조반니는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로미오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제 이마를 만져 보십시오.”

얼굴에 손이 닿자 로미오가 팔을 뒤로 물리며 나머지 한쪽 눈썹도 들썩였다.

“…이마를 말입니까?”

“괜찮습니다. 한번 만져 보세요.”

로미오가 선뜻 만지지 못하자 조반니는 로미오의 손을 가까이 끌어당겨 자신의 이마를 강제로 만지게 했다.

“인간의 눈썹 뼈는 이렇게 이마에서부터 이어져 우뚝 솟은 산 같은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안와(眼窩)라고 부르는 눈구멍은 눈을 보호하기 위한 뼈인데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탄탄하면서도 따뜻한 조반니의 피부가 손에 만져지자 엔초를 제외하고 남의 얼굴을 만져 본 적이 없는 로미오는 오묘한 표정이 됐다. 조반니가 친히 만져 보라며 직접 손을 끌어다 준 데다 얼굴이 만져지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조반니였기 때문에 불쾌함이나 무례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단지 남의 얼굴을 만지고 있다는 생각에 주저되었는데 엔초의 조각상이 두상이 아니라 흉상이었다면 조반니가 그의 어깨와 가슴을 만지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제 이마와 눈썹을 만지며 엔초의 조각상을 떠올려 보시면 그 형태가 머릿속에 그려지실 겁니다.”

조반니가 손을 좀 더 내리니 눈꺼풀이 만져졌다. 손끝에 조반니의 속눈썹이 가까이 닿으며 그의 눈두덩이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느껴졌다. 이마로 흘러내린 짧은 금발은 손등을 간질이며 스쳤고 조반니가 내쉬는 숨결은 손바닥 언저리에 끼쳐 왔다. 엔초와 비교해 보면 피부의 감촉과 눈썹 뼈의 굵기, 눈꺼풀의 넓이로 추정할 수 있는 눈동자의 크기가 훨씬 크고 단단하고 힘 있게 느껴졌다.

“여기 이 부분은 세 개의 뼈가 만나는 지점으로 사람에 따라 튀어나온 정도가 모두 다릅니다. 엔초의 조각상은 그 기울임 정도가 가파르게 느껴지고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누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조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안와에서 이어지는 뼈의 형태가 해부학적으로 적절한 구조를 이뤄 평범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얼굴처럼 보입니다.”

조반니는 자신의 눈과 뺨 사이를 짚고 있던 로미오의 손을 놓았다.

“일곱 살 어린아이가 만든 것 치고는 솜씨가 매우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을 거둔 로미오는 조각상의 눈썹 뼈 부분을 다시 만졌다. 조반니의 얼굴을 만지는 동안 미묘해졌던 낯빛이 서서히 풀어졌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엔초의 조각 실력이 가늠되는군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만약 볼 수 있었다면 엔초에게 더 많은 말을 해 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이 조각이 되었든 흙으로 만든 인형이 되었든 모든 것은 시력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손끝으로도 사물의 무게나 튀어나오고 들어간 정도를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얼마나 안정감 있고 균형 있게 만들어졌는지 파악할 수 있었지만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조각상이나 그림을 보고 단 몇 초 만에 감상을 내놓는 것과는 결코 비교가 되지 못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로미오는 조반니가 가만히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이쪽으로 둔 채 별다른 자세를 취하지 않고 움직임 없이 서 있었다. 표정이나 시선이 보이지 않아 그것이 다소 기묘하게 느껴졌다.

“뭘… 하고 계십니까?”

조각상을 내려놓자 조반니가 받아 들어 선반에 얹었다.

“대위님의 눈을 보고 있었습니다.”

“제 눈을요?”

흐릿한 조반니의 얼굴에서 입매 부분이 움직였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가볍게 다물리는 소리도 들렸다. 미소였다.

“대위님의 그 아름다운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렇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니 오랫동안 눈만 바라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겁니다.”

놀리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 데다 눈에 대한 칭찬은 이로써 두 번째였지만 순간 말문이 막혔다.

“…….”

좋은 경치나 그림도 아니고 자신의 눈을 보고 황홀하다고 말하니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일전의 경험으로 조반니가 남을 칭찬하기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황홀하다고까지 이야기하니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남을 당황시키는 데에 참으로 재주가 있는 자였다.

칭찬으로 되받아치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자신은 조반니의 얼굴을 몰랐다. 그의 이마와 눈썹을 만졌지만 그것만으로 외모를 유추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 주실 수 있으신가요, 대위님?”

“……무엇을 말입니까?”

“제게 대위님의 눈을 보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

로미오는 턱을 낮게 수그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조반니가 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곤란해하시는 대위님의 표정이 보기 좋다고 이야기하면 실례가 될까요? 하지만 곤란해하시는 모습도 보기 좋네요. 기분을 상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조반니가 비스듬히 어깨를 기울여 로미오를 가까이에서 보더니 용서를 구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로미오는 자연히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저어야 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사과하실 것 없습니다.”

조반니는 뺨을 쓸어내리는 척하며 로미오의 손을 잡았던 자신의 손 냄새를 맡았다. 음미하며 코 속 깊이 냄새를 빨아들인 뒤 마치 마시는 것처럼 목젖을 크게 움직여 침을 삼켰다. 그러자 사타구니 사이로 열이 몰렸다.

“시간이 꽤 된 듯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반니는 단단해진 성기로 인해 바지 앞섶이 부푸는 것을 느끼며 허벅지에 힘을 줬다. 로미오가 보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책과 바이올린을 챙겨 태연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허벅지를 따라 굵게 돋아난 두꺼운 성기 윤곽은 망토 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졌다.

“학교로 가십니까?”

“네. 곧 해부학 수업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녁 식사 때 뵙겠습니다.”

조반니는 문을 닫기 전 한쪽 눈을 가볍게 깜빡이며 눈짓 인사를 보냈다.

* * *

열린 창 너머에서 마차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가 앞의 의자에 앉아 있는 로미오는 무릎 위에 옷을 올려놓고 있었다. 한 손에는 실이 꿰인 바늘이 들려 있었다. 혼자 집에 남아 할 일이 없던 차에 손봐야 할 옷을 골라 수선이 필요한 부분을 바늘로 꿰매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피에트로와 엔초를 돌본 로미오였다. 군인이라는 신분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집안일에 익숙했다. 문제는 손에 든 바늘 끝과 옷의 늘어진 자국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옷은 낡진 않았지만 오래 입은 티가 났다. 로미오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무늬나 장식이 없는 평범한 흰색 튜닉이었는데 깨끗하긴 하지만 여러 번 빨아 입은 흔적이 보였다.

몸치장을 좋아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어깨를 부풀리고 장신구를 걸치고 몸 선이 드러나도록 허리 폭과 바지의 품을 줄였지만 로미오는 옷감의 사용을 최소화한 검소한 옷들만 입었다. 군인이기 때문에 사치를 부릴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로미오가 가진 옷들은 하나같이 지나치게 수수하고 소박하며 비웃음을 살 만큼 유행과 맞지 않았다. 색을 잘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옷의 색깔을 선택하는 데에 미적인 관점이 배제돼 대부분의 옷이 단색이기도 했다.

대위 봉급은 혼자 지내기에 충분했지만 로미오는 하숙비와 피에트로의 대학비, 엔초의 화실비를 포함해 두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피에트로와 엔초가 원할 때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오늘 같은 날 편하게 신을 제대로 된 신발 한 켤레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옷을 사지 않았다.

피에트로가 엔초에게 사탕을 사 주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관 학교에 다니던 생도 시절에 자신은 번번이 남에게 옷을 얻어 입으면서도 두 동생에게는 염색 비용이나 재단비를 따지지 않고 좋은 옷을 입힌 로미오였다. 엔초는 어떻게 네베의 그 시골 마을에서 수도인 바치로 옮겨 와 살 수 있는지, 어떻게 이름난 조각가의 도제로 들어가 조각과 그림을 배울 수 있는지, 어떻게 이런 좋은 하숙집에서 지낼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였기 때문에 돈을 아껴 쓰는 것은 피에트로의 몫이었다.

“아!”

바늘에 손을 찔린 로미오는 바닥에 바늘을 떨어뜨렸다. 손끝을 말아 쥐자 핏방울이 작게 맺혔다. 옷을 내려놓고 의자 밑으로 내려가 바닥을 더듬었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아 바늘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여 여기저기를 더듬거리는데 1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라나 부인을 찾는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베티나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베티나가 계단을 올라오다 말고 멈칫했다. 세탁한 옷을 배달하는 일을 하는 베티나는 열네 살이 된 어린 소녀였다.

“아, 안녕하세요, 대위님. 아무도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계셨네요.”

배달 일이 바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던 베티나는 발목까지 오는 흰 앞치마 자락을 황급히 정리했다. 주근깨가 난 양 볼이 은은하게 붉어졌지만 로미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엔초와 친한 데다 그라나 부인과도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집이 비어 있을 때도 자유롭게 하숙집을 드나드는 베티나는 집 안에 아무도 없을 때면 옷을 담은 바구니를 집 문고리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

“오랜만에 봬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래. 오랜만이구나.”

“어쩐 일로 집에 계세요?”

“사정이 있어 당분간 집에 머무르게 됐다.”

수줍음 많은 소녀인 베티나에게 로미오는 호기심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그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평범한 배달부인 베티나로서는 좀처럼 말 섞을 기회가 없는 군인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제6군단의 장교라는 사실에 겁을 먹고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던 베티나였지만 이제는 그가 좋은 의미로 군인답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그는 늘 수고비도 넉넉하게 줬고 일전에 몇 번인가 실수를 했는데도 모두 눈감아 줬다.

“식사는 하셨어요?”

“그래.”

베티나는 자신의 몸에서 빨랫감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로미오에게 옷을 건넸다.

“여기 있어요. 엔초의 바지 두 벌과 겉옷 세 벌이에요.”

“고맙다.”

“맡기실 옷이 또 있나요?”

“아니.”

로미오가 옷을 받아 들자 베티나는 팔에 바구니를 끼고 로미오의 어깨 너머로 집 안을 봤다.

“혼자 계셨나 봐요. 혹시……음, 저… 제가 도와드릴 것이 있을까요?”

로미오는 고개를 저었고 베티나는 대화를 끌어가고 싶은 마음에 할 말을 궁리하며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무뚝뚝하지만 어린 소녀의 마음을 눈치 못 챌 정도로 바보가 아닌 로미오는 문고리에 손을 얹고 기다렸다. 베티나는 머뭇거리며 눈을 굴리다 로미오의 손가락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괜찮으세요? 피가 나요!”

앞치마에서 닦을 것을 꺼낸 베티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로미오의 손을 직접 닦아 주려다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 황급히 손을 거뒀다.

“어, 어서 닦으세요. 어쩌다가 그렇게 되신 거예요? 아파 보여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라.”

로미오가 손수건을 거절하려 했지만 베티나는 로미오의 손에 손수건을 억지로 쥐여 주었다.

“저는 괜찮으니 편하게 쓰세요. 다음번에 올 때 받아 갈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베티나는 로미오가 다시 손수건을 돌려주기 전에 얼른 계단을 내려갔다.

로미오는 손바닥만 한 작은 손수건을 잠시 내려다보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수건은 쓰지 않고 빨랫감과 함께 접어 둔 뒤 창가로 가 마저 바늘을 찾았다. 하지만 가느다란 바늘은 눈에 쉽게 띄지 않았기 때문에 무릎으로 기며 한참을 더듬다가 포기했다.

의자에 앉으니 할 일은 창밖을 쳐다보는 것밖에 없었다. 낮 동안 이렇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책 한 권도 쉽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엔초가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길거리를 내다보며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지만 뿌옇게 보이는 거리는 흥미를 끌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미오는 부엌으로 향했다. 사과 하나를 옷소매에 문질러 한 입 베어 먹으려다가 마음을 바꾸고 칼을 챙겼다.

창가로 가 의자에 앉은 그는 손끝으로 칼날을 더듬어 위치를 확인하고 사과 표면에 찔러 넣었다. 껍질이 칼에 베이자 과즙이 흘렀다. 한 손으로 사과 꼭지와 옴폭 패인 밑동을 잡고 칼을 쥔 손을 조금씩 움직여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구부정하게 머리와 등을 숙이고 사과를 가까이 보며 계속 껍질을 깎자 코끝에 싱그러운 사과 향이 맴돌았다. 손의 감각에 집중하며 울퉁불퉁하게나마 길게 껍질을 깎아 낸 로미오는 칼끝에 매달린 껍질을 떼어 냈다.

벌컥.

문이 열린 것은 손을 타고 흐른 과즙이 바늘에 찔린 손가락에 스며들 무렵이었다. 이 시간에 집에 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얼른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순식간에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집을 제대로 찾아왔군.”

상대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로미오는 극렬한 공포감에 마비가 된 것처럼 그대로 굳어 문을 열고 들어선 상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잿빛으로 변한 얼굴에는 두려움과 혼란이 섞인 기괴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고 호흡은 순간적으로 억제됐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자신의 몸과 얼굴을 감싸고 있는 망토를 털었다.

그자였다. 비 오는 날 포목점 골목에서 자신을 겁탈한 바로 그 사내였다.

“왜 그렇게 놀라지? 지난번에 헤어질 때 또 보자고 얘기했을 텐데 설마 잊어버린 건가?”

남자는 찢어질 것같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더니 흡사 자신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문고리를 돌려 잠갔다. 문이 잠겼는지 재차 확인하거나 집 안을 둘러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저자가…… 자신이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꿈을 꾸는 것인가?

심장이 요동쳤다. 사과를 든 손안에 식은땀이 묻어 나왔다. 어떻게 이 집을 찾아냈을까. 설마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알아낸 걸까. 이곳에서 자신을 겁탈하는 동안 방문자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비 내리던 그날 밤, 바로 오늘 다시 한번 자신을 범할 것이라고 단단히 마음먹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나?”

남자는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길이의 짧은 단도를 꺼냈다. 망토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칼끝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표정이 볼만한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여러 생각들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으나 로미오는 다음 순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과가 떨어져 바닥을 구름과 동시에 앉아 있던 의자를 들어 남자에게 집어 던졌다. 고개를 피한 남자가 몸을 측면으로 틀자 의자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고 로미오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챙!

남자는 반격의 자세를 취하며 로미오가 휘두르는 칼을 단도로 막아 냈다. 손목이 뒤로 꺾일 정도로 두 칼날이 세게 부딪쳤지만 로미오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칼을 거두고 다시 빠르게 아래에서 위로 찔러 올렸다.

카드득, 스릉! 챙!

남자는 손에 든 칼로 로미오의 연속된 두 번의 공격을 다 막아 냈지만 몸짓이 급했다. 체격은 월등히 좋으나 오랜 기간 사관 학교에서 검술 훈련을 받은 로미오를 당해 내기 힘들었기 때문에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문에 등을 붙였다. 기습적으로 집으로 들이닥쳤다고는 하나 로미오는 군인이었다. 맨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면서도 정확히 목만을 노리는 솜씨는 보통 이상이었다.

“하압!”

사과를 깎던 칼이 아니라 장검이었다면 이미 손등과 어깨를 찔렸을 검은 망토의 사내, 조반니는 단도 손잡이를 틀어쥐며 연이은 로미오의 공격을 막아 냈다.

츠륵! 챙, 챙!

요란하게 부딪치며 미끄러지는 칼날이 창가의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동작으로 베고 찌르기를 반복하는 로미오는 기어이 칼끝으로 조반니의 왼쪽 뺨을 아슬아슬하게 베어 냈다.

그러나 그는 맹인이었다. 시야가 가려지지 않게 노련히 칼을 휘둘렀지만 거리감을 파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로 인해 파고들 만한 허점이 생겼다. 밀리지 않고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조반니의 왼쪽 뺨을 긋는 것을 끝으로 머리채가 잡혀 바닥에 내던져졌다.

“윽!”

이마가 쿵, 처박히며 엎드리게 된 로미오는 조반니가 칼을 든 손목을 내리치는 바람에 칼을 떨어뜨렸다. 조반니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발로 차 멀리 밀어 보내곤 로미오의 위로 올라타 손목을 잡았다.

“제법이군, 후…….”

피식 웃은 조반니는 옷소매로 뺨의 피를 닦았다. 로미오는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채 죽일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으, 크……윽!”

몸부림을 치자 조반니는 다시 한번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세게 처박았다. 현기증이 일며 귀에서 이명이 들렸지만 로미오는 바닥에서 일어나기 위해 무릎을 세우며 거칠게 거부했다.

“놔! 제기랄… 아윽……!”

“쉿. 조용히 하라고. 문밖까지 소리가 들리겠어.”

로미오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싸 누른 조반니는 목젖 옆의 어느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로미오는 목에 힘줄이 서고 눈가가 크게 일그러질 정도로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죽여 버릴 테다! 네놈을, 윽…! 죽여 버리겠어!”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차라리 내 비위를 맞추는 게 어때?”

조반니는 로미오의 머리를 뒤로 젖힌 뒤 손에 힘을 줘 목을 졸랐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로미오가 괴로운 듯 흰자위를 크게 뜨고 어깨를 들썩였다. 얼굴이 희게 질려 가며 표정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곧 눈이 감기며 몸이 축 늘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조반니는 로미오의 멱살을 잡아 부엌으로 끌고 갔다. 바닥에서 끌어 올려 탁자에 눕히자 의식을 잃은 로미오가 양팔과 다리를 벌린 상태로 힘없이 눕혀졌다. 분에 젖어 악을 쓰던 조금 전에 비하면 잠든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집 안에 고요가 찾아오자 조반니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반짝이는 금발이 머리 위로 흐트러지며 핏방울이 맺힌 뺨에 붙었다.

소매로 뺨을 훔친 조반니는 로미오의 바지 허리춤을 풀었다. 끈이 느슨하게 벌어지자 속옷과 함께 밑으로 잡아 내렸다. 허벅지 사이에 자리한 성기가 훤히 드러났지만 의식이 없는 로미오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주변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했던 조반니는 로미오의 성기 주변에 음모가 없자 실소를 터뜨렸다.

“하!”

발그스름한 성기 주변은 거뭇한 자국 없이 깨끗했다. 아랫배로 이어지는 성기 뿌리 부근과 푸르스름하게 혈관이 비치는 흰 허벅지에서도 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러 뽑아낸 흔적이 보이지 않았으니 원래부터 음모가 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음낭 위로 늘어져 있는 성기가 부드럽고 매끈해 보였는데 산호색 귀두에 난 요도가 선명해 액이 맺히면 오목하게 고일 것 같았다. 성기 기둥에 감긴 핏줄은 도톰하면서도 가느다랬고 주름이 없는 굵은 음낭은 귀두보다 더 짙은 붉은색이었다.

조반니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로미오의 발밑으로 속옷과 바지를 전부 끌어 내려 벗겼다.

“스읍…….”

코에 속옷을 대고 냄새를 맡자 로미오의 살 내음이 느껴졌다. 몸을 떤 조반니는 혀끝을 내밀어 속옷을 핥곤 자신의 바지춤을 내렸다. 집에 들어섰을 때부터 부풀어 있던 거대한 성기가 수북하게 난 음모 사이로 튀어 올랐다.

검은빛을 띠면서도 붉은 성기는 핏줄 때문에 우둘투둘했고 굵직한 귀두살은 그보다 훨씬 검붉었다. 정액을 그득히 담고 있는 것 같은 음낭은 허벅지 위로 묵직하게 늘어져 있었는데 팽팽하게 부푼 데다 피가 몰린 것처럼 벌겠다. 무거워 보일 정도로 둘레가 큰 성기는 탁자 위에 걸쳐졌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속옷을 넓게 펼쳐 구경하더니 아랫도리가 전부 벗겨져 탁자 위에 누워 있는 로미오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큭, 하하…… 킁킁, 흡…….”

장난을 치듯 이상한 소리를 낸 조반니는 로미오의 속옷을 머리에 쓰고 코까지 끌어 내렸다. 냄새를 빨아들였다가 뱉고 다시 빨아들이며 입과 코에 속옷을 문질렀다. 그렇게 해도 성이 차지 않자 머리에 속옷을 쓴 채 엎드려 로미오의 뺨을 핥았다. 물컹한 혀로 턱 끝에서부터 관자놀이까지 쭉 핥아 올리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로미오의 뺨과 눈꺼풀이 침으로 젖어 들었다.

“으음…….”

조반니는 로미오의 양쪽 다리를 들어 엉덩이 살을 벌렸다. 선홍색 음낭과 회음부 아래에 자그마하게 난 구멍이 보이자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엉덩이 골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런 귀여운 구멍이라면 온종일 빨아 댈 자신이 있었다.

“하아, 습… 흐읍…….”

엉덩이에 파묻힐 것처럼 코를 바짝 붙이고 냄새를 맡자 거대하게 부푼 성기가 위로 치솟을 것처럼 꺼떡거렸다.

조반니는 혀를 내밀어 구멍 주위를 핥곤 로미오의 엉덩이를 자신의 뺨에 눌러 비볐다. 의식이 없는 로미오의 다리가 힘없이 벌어지자 쥐어 터뜨릴 것처럼 엉덩이 살을 활짝 벌려 게걸스레 구멍을 빨았다.

“후읍…훕, 추웁…….”

입 안에 고인 침이 흥건히 묻어 나와 입술과 구멍 주위에 스며들었다. 콧대가 뭉개질 정도로 로미오의 엉덩이에 얼굴을 깊이 파묻은 조반니는 쩝쩝 소리가 나도록 맹렬하게 구멍을 빨아 댔다. 창자까지 혀를 집어넣을 것처럼 주둥이를 처박아 빨아 대니 질척하게 물기 어린 소리가 나며 얼굴 가득 은은한 체취가 끼쳐 왔다.

“후웁, 츱…….”

흥분한 듯 허공에 허리를 흔들자 거대한 성기가 앞뒤로 덜렁거리며 철썩, 철썩 허벅지를 쳤다.

조반니는 머리에 쓰고 있던 속옷을 벗어 던지고 로미오의 엉덩이 아래쪽을 받쳐 허리를 들어 올렸다. 다리가 가슴 쪽으로 쏟아져 허리가 반으로 접히자 침으로 젖은 오밀조밀한 구멍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붉기도 하고 희기도 한 구멍이 미끌미끌해 보여 주름 입구를 손으로 쑤시다 입술을 모아 힘줘 빨았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좁은 구멍이 쉽게 열리지 않자 혀를 세워 억지로 틈을 만들었다. 오므라든 주름을 날름거리며 핥아 대다 로미오의 발목을 잡았다.

양다리를 넓게 벌려 자세를 고정시키고 자신의 성기에 침을 뱉은 조반니는 귀두를 주물럭거리며 로미오의 엉덩이 골 사이에 비볐다. 좁은 구멍에 맞춰 허리 힘으로 쑤욱 밀어 넣자 주름들이 뻑뻑하게 벌어지며 귀두살을 삼켰다.

“후우…….”

연약한 살벽들이 꿀럭대며 성기에 달라붙었는데 따뜻하고 축축한 안이 수분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쪼그라들어 귀두를 조여 댔다. 붉은색을 띤 연한 구멍 사이에 거무죽죽한 성기가 박혀 있는 것이 목덜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보기 좋았다. 정신을 잃은 채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로미오는 그보다 더 보기 좋았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양 무릎을 밀어 가슴에 붙이고 성기 뿌리까지 전부 밀어 넣었다. 귀두를 물고 있는 주름들이 벌어지다 못해 팽팽하게 퍼지며 안으로 오그라들었다.

로미오의 웃옷을 접어 올리자 멍투성이인 윗배와 가슴이 드러났다. 원래의 맨 피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체 전체가 멍으로 빼곡했는데 엉덩이 사이에 터질 듯이 삽입돼 있는 성기 때문에 납작한 아랫배가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있었다. 평평한 가슴 위에 난 젖꼭지는 앙증맞았고 양쪽 겨드랑이는 체모 없이 깨끗했다. 어린 소년처럼 날씬한 배는 갈비뼈를 살짝 드러낸 채 성기를 품고 있었고 사타구니 사이는 거무칙칙함 없이 뽀얬다.

허리를 뒤로 물리자 발긋한 살들이 딸려 나오며 성기를 뱉어 냈다. 다시 허리 힘으로 뿌리까지 퍼억, 처박자 꺼졌던 윗배가 뒤로 밀리며 아랫배에 길쭉한 성기 윤곽이 돋아났다.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잡은 조반니는 탁자가 야단스레 덜컹대도록 허리 짓을 빨리했다. 성기가 거칠게 몸 안을 드나들자 로미오는 눈을 감은 채 고개가 흔들렸다.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는 아랫배와 침에 젖어 쿨쩍대는 구멍을 구경하며 조반니는 허리 짓을 더 거세게 했다.

“큭, 윽…… 아, 하…….”

성기가 빠른 속도로 마찰되자 구멍 주위에 열이 오르며 작은 주름들이 급하게 벌어졌다가 우므러들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소리를 내 빨자 희고 가는 손가락들이 혀와 잇몸 사이에서 흐느적거렸다.

로미오의 손가락에서는 단맛이 났다. 과일의 과즙인 것 같다는 생각에 손가락 마디에서부터 손톱까지 빈틈없이 빨며 눈을 굴렸다. 집 안을 둘러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과를 발견하곤 씩 웃으며 로미오의 손가락을 입 안에서 제멋대로 굴렸다.

음낭이 로미오의 엉덩이를 세게 후려칠 정도로 빠르게 성기를 쑤시던 조반니는 목쉰 소리로 커다랗게 숨을 토해…냈다. 허벅지 근육이 불끈대는 것을 느끼며 로미오의 위로 몸을 숙인 그는 후벼 파듯 성기를 처박고 움직임을 멈췄다.

“큿!”

어금니를 물며 인상을 쓴 조반니는 엉덩이를 움찔움찔 떨었다. 로미오의 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성기 윤곽이 넘실대며 움직였다.

자세를 굳힌 채 정액을 뿜어내는 동안 성기 끝에서부터 진한 쾌감이 느껴졌다. 구멍 안쪽의 질긴 살들은 성기 기둥과 귀두를 조여 댔고 구멍 바깥쪽의 주름은 압박을 하듯 뿌리를 삼키고 있었다. 요도의 작은 홈까지 빨아들이는 것 같은 강한 조임에 성기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짜릿했다.

로미오의 배 속 가득히 원하는 만큼 정액을 붓고 나서야 조반니는 허리를 슬슬 움직이며 뒤로 물러섰다.

“후, 후우…….”

성기가 빠지자 침과 정액이 뒤섞인 분비물이 길게 늘어지며 귀두에 묻어 나왔다. 벌겋게 부어올라 뻐끔거리는 로미오의 구멍은 성기 크기만큼 넓어져 희멀건 정액을 쏟아 냈다.

쯔븝, 픅…….

고인 정액이 주르륵 흐르자 젖은 소리가 났다. 조반니는 축 늘어진 로미오의 등 밑으로 손을 넣어 그의 몸을 돌렸다. 엎드리게 해 엉덩이를 벌리자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슴과 마찬가지로 등에도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다.

오목하게 팬 척추와 가는 허리를 손으로 짚은 조반니는 엉덩이 살을 벌려 희멀겋게 젖은 구멍에 성기 끝을 댔다. 음모가 눌리게 전부 쑤셔 박자 안에 들어 있던 정액들이 밀려나며 구멍 밖으로 쏟아졌다. 허리를 뒤로 물린 후 다시 처박자 질척한 배 안에 치덕거리며 성기가 비벼졌다. 성기 기둥이 정액으로 걸쭉하게 젖어 있으니 구멍 사이를 매끄럽게 드나드는 게 수월했다.

빠르게 허리 짓을 하자 철벅대며 정액이 튀어 음모와 아랫배에 묻었다. 마찰 속도가 거세지니 기포가 일어나며 로미오의 엉덩이 골 사이에 덩이져 맺혔다.

조반니는 터질 것처럼 시뻘게진 자신의 성기를 끊임없이 로미오의 몸 안으로 밀어 넣으며 거친 숨소리를 냈다.

“허윽…윽, 으…….”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채 앞뒤로 흔들리던 로미오가 깨어나려는 것처럼 미세하게 눈썹을 움찔댔다. 조반니는 허리 짓을 멈추고 웃옷 주머니에서 허리끈을 꺼냈다. 눈을 가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은 그것으로 로미오의 눈을 가리곤 탁자를 쿵, 쿵 흔들어 대며 다시 과격하게 허리 짓을 이어 갔다.

로미오는 입가를 잘게 떨며 입술을 벌리더니 손끝을 꿈질댔다. 낮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움직였으나 이 상황을 얼른 이해하지 못해 탁자에 뺨을 대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정신이, 후우… 들었나?”

등 뒤에서 조반니의 움직임과 함께 목소리가 들리자 로미오는 뒤를 돌아봤다.

눈이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겁탈당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아래에서 치받는 고통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문 그는 몸부림을 치며 허리에 힘을 줬다. 그러자 조반니가 가뿐하게 로미오의 몸을 뒤집어 천장을 향해 눕혔다.

“가만히 있어라.”

“읏, 아윽…! 윽……!”

조반니가 양 손목을 움켜쥐자 로미오가 다리를 모으며 조반니의 가슴을 걷어찼다. 조반니가 윗몸으로 짓누르며 움직이지 못하게 하자 무릎으로 그의 허리 옆쪽을 가격하며 온몸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조반니는 거칠게 다리를 밀어내며 주먹으로 로미오의 배를 내리쳤다.

“커윽……!”

강한 충격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몸을 둥글게 마는데 조반니가 손으로 뺨을 눌러 잡더니 주먹으로 배를 연달아 세 번 내리쳤다.

“악, 으, 아……!”

쉰 비명이 흘러나오며 허리가 저절로 뒤틀렸다. 로미오는 고통에 찬 신음을 쏟아 내며 웅크렸지만 조반니는 갈비뼈 부근과 가슴 아래쪽을 계속해서 주먹으로 가격하고 옆구리와 아랫배, 윗가슴을 사정없이 때렸다.

로미오는 양팔로 몸을 안고 조반니의 손을 막아 냈지만 역부족이었다. 탁자에 등이 부딪칠 정도로 주먹질이 거칠자 로미오는 안간힘을 다해 무릎으로 가슴과 아랫배를 가렸다. 그러나 조반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벅지와 종아리를 무차별적으로 내리쳤다.

“아으, 윽… 아, 학……!”

입을 크게 벌리고 쉰 목소리로 숨을 삼킨 로미오는 옆으로 돌아누워 손으로 다리를 가렸다. 견디기 힘든 끔찍한 주먹질에 입에서는 침이 흘렀고 어깨와 허리는 바르르 떨렸다. 허벅지 사이에는 정액으로 젖은 조반니의 성기가 삽입돼 있었다.

조반니는 때리기를 주저하거나 힘을 조절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점점 더 힘을 실어 주먹질했다. 주먹 끝에 단단한 갈빗대가 닿고 연한 피부와 살이 눌리며 거친 타격음이 울렸지만 쉬지 않고 계속 때렸다. 살을 후려치는 둔탁한 소리의 강도가 집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거셌지만 멈추지 않았다.

“흐…악, 으……윽!”

멍으로 빼곡한 배를 양팔로 감싼 로미오는 고개를 가슴에 묻고 비명 같은 신음을 냈다. 마치 죽기 직전의 사람들이 내는 숨소리 같았다. 쇳소리 같기도 하고 양철통 속에서 물이 끓는 소리 같기도 했다.

주먹질이 계속되자 로미오는 더 이상 몸을 감싸지 못하고 양팔을 축 늘어뜨렸다. 저항할 힘을 잃고 숨만 헐떡이자 거품이 섞인 침이 흘렀다.

“……그…윽……흐…….”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숨소리에 조반니가 주먹 쥔 손을 허공에 든 상태로 가격을 멈췄다. 엉덩이 사이에 귀두가 박혀 전신을 바들거리는 로미오는 성기를 훤히 드러내 놓은 채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조반니는 구기고 있던 미간을 펴고 표정을 풀더니 어깨를 밀어 로미오를 똑바로 눕혔다. 허벅지를 자신의 허리에 감게 해 성기를 넣은 뒤 허리 짓을 해 퍼억, 퍼억 박아 댔다.

“으…흐…….”

두툼한 성기가 구멍을 짓이길 것처럼 험악하게 들락거렸지만 로미오는 의지를 상실한 듯 흐느적대며 몸이 흔들렸다.

가히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고통이라고 해도 좋았다.

보지 않아도 몸 안이 사내의 체액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이미 한 번 사정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아래에선 질퍽대는 소리가 났고 엉덩이 골 사이는 축축했다. 탁자에 부딪히는 등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배와 가슴의 통증이 극심했다. 누군가 폐를 쥐어 비트는 것처럼 괴로웠고 두들겨 맞은 가슴과 배는 퉁퉁 부어올라 더부룩했다.

남자의 성기는 딱딱하고 뜨거웠다. 빠져나갈 때는 배 속에 든 것들을 뭉갤 것처럼 날카롭게 느껴졌고 삽입 시에는 뱃가죽을 뚫을 것처럼 잔인하게 치고 들어왔다.

자신은 다른 곳도 아닌 집에서 범해지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몸을 흔들고 있는 남자는 사정하려 애쓰고 있었고 자신이 당해 낼 수 없는 완력을 갖고 있었다. 숨소리는 뜨거웠으며 움직임은 우악스러웠다.

눈앞이 암흑이었다. 눈이 완전히 멀면 자신이 보게 될 세상이었다.

이 행위가 끝나면 남자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이 벗겨진 채 죽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엔초가 떠올랐다.

남자의 존재가 공포스러웠다. 자신을 찾아내 집 안으로 들어와 목을 조르고 겁탈하고 있는 남자가 두려웠다. 그는 칼 없이도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맨손으로 그에게 목이 졸리면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질 것이다.

이 고통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 행위가 끝나면 자신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전처럼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사람이 아니었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목을 조르고 때리고 범할 수 있는 존재였다. 비 오던 날 밤 포목점 앞에서 우연히 만난 사냥감, 고깃덩어리, 의지나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인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

“후우, 하…….”

허리를 움직이던 남자가 역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는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거친 숨을 쉬어 댔다. 로미오는 거북스러울 정도로 큰 남자의 성기를 가까스로 받아 내며 맥을 추지 못하고 몸이 흔들렸다. 탁자에 뒷머리가 찧어지며 두통이 일었지만 자신의 손목을 끌어당겨 허리 짓 하는 남자 때문에 고개를 바로 할 여력이 없었다.

로미오의 몸으로 자위를 하는 것처럼 제멋대로 성기를 쑤시던 검은 망토의 남자, 조반니는 발끝을 세워 상체를 들더니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으며 허리 짓을 했다. 배 안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장기들을 밀어 올리고 뒷구멍을 찢을 기세로 빠르게 박아 대자 로미오가 손톱으로 탁자를 긁었다.

“악… 흐, 윽, 아윽……!”

성기 윤곽이 윗배까지 도드라진 로미오는 엄청난 힘으로 배 속을 짓누르는 성기의 부피를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들썩였다. 벗어나려는 것처럼 윗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발버둥을 치는 동안 입에서는 침이 흥건하게 흘렀다. 명치께를 때리듯 삽입되는 성기는 흉기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정액으로 흠뻑 젖은 구멍 안쪽의 살벽들은 경련을 일으켰고 탁자를 긁던 로미오의 손톱은 끝이 부러져 핏방울이 맺혔다.

미쳐 날뛰듯 성기를 쑤시며 로미오의 몸을 흔들어 대던 조반니는 음낭까지 처넣으려는 것처럼 몸을 가까이 맞붙였다. 너무 깊이 들어가 성기 뿌리가 얼얼했지만 저린 감각이 허벅지까지 전해질 만큼 좋았다. 정액을 쥐어 짜낼 것처럼 조여 대는 로미오의 뒷구멍에 정신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더 거세고, 더 빠르고, 더 거칠게 허리 짓 하자 피가 비칠 것같이 벌건 성기가 불뚝거리며 떨렸다.

관자놀이에 힘줄이 보일 정도로 억세게 허리 짓을 하던 조반니는 사람이 낼 수 없다고 생각되는 거친 신음을 토해 내며 움직임을 멈췄다.

“큿, 윽!”

로미오의 엉덩이 사이에 파묻히다시피 삽입된 성기에서 정액이 툭 터져 나왔다. 이미 배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정액이 들어갈 자리를 찾지 못하고 구멍 밖으로 비집고 밀려 나왔다. 탁자 위로 덩어리진 정액들이 뚝뚝 흘러내리는 사이 로미오는 다리를 벌린 채 몸을 웅크렸다가 펴며 버르적거렸다.

“하, 악……아…그, 흐…….”

조반니는 허리를 뒤로 뺀 후 주름 끝에 귀두를 걸치고 숨을 골랐다.

“허억, 후우… 후…….”

성기 기둥에 흥건히 묻은 정액은 로미오의 구멍과 엉덩이, 허벅지 사이에 뒤범벅돼 있었다. 처음과 비교해 확연히 벌어진 주름은 찔금거리며 계속해서 정액을 뱉어 냈는데 마찰된 흔적으로 안쪽이 붉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아랫배에 귀두를 비벼 털어 내더니 크기가 작아지기 시작한 성기를 또다시 엉덩이 사이에 밀어 넣었다. 처음인 것처럼 강하게 허리 짓을 해 박아 대자 어깨를 떨던 로미오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윽, 흐, 하악…… 윽……!”

급하게 수축하며 소리를 내는 로미오의 구멍은 어떻게든 성기를 밀어내려 애썼지만 조반니는 그럴수록 더 우악스레 로미오의 배 속을 헤집고 뭉갰다.

귀두 끝에 닿는 물컹한 것들이 정액인지, 아니면 부어오른 점막인지 알 수 없었다. 출렁대는 배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성기는 찐득거리며 구멍에 들러붙었고 젖은 주름들은 눅눅해진 상태로 성기를 빨아 올렸다.

들린 다리가 덜렁거리는 로미오는 성기가 삽입될 때마다 배가 솟아오르고 성기와 음낭이 흔들렸다. 엉덩이가 탁자 위에 미끄러질 정도로 아래가 온통 정액 범벅이었으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목 막히는 신음만 내뱉었다.

“그, 윽…! 으흑……!”

윗몸을 숙여 로미오를 짓누른 조반니는 엉덩이만 움직여 성기를 처박으며 로미오의 허리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쩍쩍대는 아래는 정액으로 연결돼 축축했고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강한 쾌감은 목덜미를 뻐근하게 했다. 골반에 저릿한 느낌이 전해지며 허리가 푸드득 꺾였다. 정액을 바르기라도 한 것처럼 흠뻑 젖은 성기는 사정하는 것에 안달이 나 크게 꿈틀댔다.

매질을 하듯 성기를 쑤셔 대던 조반니는 이성을 상실하고 동물 같은 신음 소리를 냈다. 부풀어 오르는 로미오의 아랫배와 괴로움에 몸서리치는 그의 신음 소리, 표정, 몸짓, 그리고 그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정신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로미오의 옷을 벗기고 다리를 벌려야만 볼 수 있는 은밀한 그곳에 자신의 성기를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특권처럼 느껴졌다.

“후, 허억, 후우…….”

로미오는 압사당하듯 납작하게 눌려 천장을 향해 다리를 벌렸다. 두 다리를 번갈아 내뻗었다 오므리며 발작을 일으키듯 괴로워했다.

사람의 몸이 아니라 진흙으로 만든 인형을 주무르듯 로미오의 허벅지를 틀어잡은 조반니는 턱 끝까지 찬 숨을 몰아쉬었다. 성기 윤곽이 돋아 있는 배를 내밀며 엉덩이를 떠는 로미오는 다리를 가눌 힘조차 없어 발끝을 휘청거렸다.

“윽…으, 아윽……!”

몸이 벌어지고 속이 틀리는 고통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망치질을 하는 것 같은 잔인한 허리 짓에 근육과 살, 뼈가 제자리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였다. 몸속을 휘저으며 부피를 넓혀 가는 성기 때문에 산채로 다리가 찢어지고 갈라져 살가죽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뼛속이 파먹히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이 행위가 영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로미오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거친 삽입해 의해 흔들리던 몸에서 서서히 충격이 잦아들더니 탁자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감각이 희미해졌다. 몸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영혼이 분리되는 것처럼 공중으로 떠오른 로미오는 미끄러지듯 탁자에서 멀어졌다.

반쯤 벌거벗겨진 채 탁자에 누워 있는 자신이 보였다. 엉덩이를 내놓고 굶주린 사람처럼 허리를 흔들어 대는 남자의 뒷모습도 보였다. 흐릿한 망막 끝에 맺힌 그 광경은 탁자에 누운 자신의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환영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를 보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저기 저 탁자 위에서 눈이 가려져 겁탈을 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이었다.

“크윽!”

다음 순간 성기를 쑤셔 넣은 상태로 세 번째 사정을 하는 남자에 의해 빨려 들어가듯 다시 몸으로 돌아갔다. 즉시 전신의 떨림과 함께 하반신의 통증이 느껴졌다. 남자는 머리 위에서 역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허억, 후, 헉, 허윽…….

침으로 흥건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몸을 떠는 동안 남자는 계속해서 신음했다. 끝이길 바라는 마음에 이를 악물며 엉덩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을 참았다. 남자는 배 속 가득 정액을 쏟아 내더니 허벅지를 놓아주고 목을 감싸 쥐었다.

강한 압력으로 누르는 손길에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가 몰려들었다.

“하, 악……!”

버둥거렸으나 잠시뿐이었다.

“후우, 후…….”

정신을 잃은 로미오가 들고 있던 다리를 떨어뜨리며 늘어지자 조반니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뗐다.

젖은 성기가 로미오의 다리 사이에서 주르륵 빠져나오자 바닥 위로 정액이 점점이 떨어졌다. 굵은 성기가 탁자 위에 걸쳐진 채 껄떡이는 동안 조반니는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다. 바닥에서 로미오의 속옷을 주운 그는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거친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후, 우…….”

부풀었던 성기가 작아지자 성기 기둥을 타고 정액이 미끄러져 음모를 적셨다. 로미오의 속옷으로 귀두를 닦은 조반니는 허연 정액으로 엉망이 된 속옷을 로미오의 다리에 꿰어 주었다.

속옷을 제대로 입히고 엉덩이를 벌려 보니 자신의 정액을 양껏 머금고 구멍이 크게 벌름댔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다 바지를 끌어 올려 입혀 준 후 자신도 바지를 추슬러 입었다. 벌건 성기는 물에 분 것처럼 크고 뜨뜻했으며 정액을 닦아 냈는데도 젖은 것처럼 축축했다.

“하…… 끝내주는군. 환상적이야.”

헛웃음을 흘린 조반니는 로미오의 눈을 가린 허리띠를 풀었다. 잠든 사람처럼 누워 있는 로미오는 힘없이 고개가 돌아가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뒤가 찢어져 안쪽 살들이 쏟아질 때까지 좀 더 박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신발을 신겨 주며 보니 로미오의 신발은 밑창의 색이 바랬고 끈이 낡아 보였다. 신발 굽과 발뒤꿈치가 닿는 안쪽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조반니는 신발을 자세히 살피다가 로미오의 발에 신겨 주었다.

바닥에 떨어진 정액을 발로 밀어 닦고 로미오를 안아 들자 그는 끈 풀린 인형처럼 늘어져 품에 안겼다. 의자를 창가로 가져가 로미오를 등받이에 기대 앉히고 팔걸이에 팔을 걸치게 했다. 창밖을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자세를 고치고 사과와 칼을 주워 탁자에 올려 뒀다.

자신이 들고 왔던 단도를 챙긴 조반니는 집 안을 한 번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유유히 집을 나섰다.

* * *

엔초는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조반니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로미오가 집에 와 있을 시각이었다. 화실에서 다른 아이들을 제쳐 두고 가장 먼저 나왔지만 마음이 급해 뛰다시피 빨리 걸었다. 저만치서 뜻밖의 인물을 발견한 것은 시장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깡총대며 걷던 엔초는 손을 번쩍 들며 상대를 불렀다.

“선생님!”

시장 안쪽으로 이어지는 골목 어귀에 서 있는 것은 조반니였다. 그는 키가 무척 컸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멀리서 목소리를 들은 조반니는 가던 길을 멈추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얼른 뛰어가자 조반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화실에 다녀오는 길이지?”

“네! 선생님은 시장에 필요한 것이 있어서 사러 나오셨어요?”

“저녁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사러 나왔단다. 집에 돌아가서 음식을 준비하면 늦지 않게 식사를 할 수 있을 거야.”

“무슨 음식을 만드실 거예요? 사과파이요?”

“그건 이미 어제 다 준비가 끝났어. 설탕에 사과를 조리고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 놓아서 굽기만 하면 완성이지. 오늘 저녁 식사로는 다른 것을 만들 생각인데 시간이 된다면 함께 장을 보고 돌아가겠니?”

“좋아요! 그렇게 해요.”

엔초는 어서 집으로 가 로미오를 보고 싶었지만 조반니를 따라 시장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행상인들이 수레며 판매대에 물건을 올려놓고 목청껏 손님들을 부르고 있었다. 집까지 시장 물건을 배달해 주고 돈을 받는 시장 소년들은 일거리를 얻기 위해 눈치껏 손님들의 뒤를 따라다녔는데 흥정 중인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바빠 손을 휘휘 내저어 시장 소년들을 쫓아냈다.

“흰 얼룩 다람쥐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팝니다! 모자에 다는 금술 장식과 붓꽃 문양이 아로새겨진 유리잔도 팝니다. 없는 게 없으니 구경하고 가세요!”

“깃털과 보석 장식이 달린 구두가 14바소입니다. 멋내기용으로 그만인 줄무늬 머리쓰개도 있어요! 구두와 머리쓰개를 함께 사면 장미 넝쿨 모양으로 꼬아 만든 허리 조임끈을 덤으로 드립니다!”

“고리버들로 만든 모자가 6바소, 자수를 새긴 속치마가 4바소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상점 간판들을 둘러보던 조반니는 가장 먼저 생선 가게로 향했다. 가는 길에 달걀과 양파, 귀리빵이 담긴 바구니를 곡예사처럼 머리에 이고 지나가던 여인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조반니. 시장에는 뭘 사러 왔어?”

쉰 살은 족히 넘긴 것 같아 보이는 여인은 친근한 말투로 물었다. 한곳에 노점을 차리지 않고 시장과 광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잡상인인 그녀는 몸집은 작았지만 한 손으로 머리 위의 바구니를 거뜬히 잡고 있었다.

“저녁 식사 거리를 사러 왔습니다. 모처럼 굴 요리를 해 보려고요. 엘레아노라는 어떤가요? 기침이 다 나았습니까?”

“그럼. 이제 혼자 일어나서 수프를 떠먹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어. 염려해 줘서 고마워. 시장 어귀에 서서 물건을 팔고 있을 테니 굴을 사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 싱싱한 계란을 바구니 가득 챙겨 줄게.”

머리에 인 바구니를 툭툭 친 그녀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다시 생선 가게로 향하는데 손질한 무화과와 사과, 석류, 모과를 판매대에 잔뜩 내놓고 팔던 청과상이 조반니를 불러 세웠다.

“조반니! 어제 사 간 사과는 어땠어?”

“아주 달고 맛있었어요. 고맙습니다, 안젤로. 사과파이를 선물해 드릴 분이 계시는데 무척 좋아하실 거 같습니다. 다음에도 부탁할게요.”

“아무렴. 언제든 말만 해.”

“지난번의 그 노점상 문서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잘 해결됐어. 이제부터는 격일로 나눠서 물건을 들여오기로 했지. 잘된 일이야. 자, 이거 하나씩 받아 가라고. 오늘 들어와서 아주 싱싱해.”

청과상은 잘 익은 무화과 두 개를 조반니와 엔초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함께 무화과를 먹으며 다시 생선 가게로 향했지만 조반니는 앞서의 두 사람 말고도 인사할 사람이 많았다.

“주시, 오랜만입니다. 이야, 그 머릿수건은 뭐예요? 전에 쓰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리네요. 당신의 그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이 더 돋보여서 사람들이 다 당신만 보겠어요.”

“오랜만이에요, 조반니. 하하! 농담도 참. 이 머릿수건은 새로 장만한 거예요. 그나저나 지난번에 사 갔던 모자는 어땠어요?”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빨리 겨울이 되기만을 기다려야겠어요. 그래야 얼른 모자를 쓰죠.”

“어이! 이봐, 조반니! 어제 말한 양고기 절임이 준비돼 있어! 맛이 아주 기가 막힌다니까.”

“고맙습니다, 오스발도. 돌아가는 길에 들를게요. 부인께서는 건강이 어떠신가요?”

“많이 좋아졌어. 자네가 얘기했던 그 약 덕분이야.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더군.”

코앞에 있는 생선 가게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여섯 명의 사람들과 더 인사를 나눈 조반니는 시장 안의 모든 사람들과 친한 것처럼 보였다. 밤낮없이 시장을 지키는 상인들에서부터 식료품을 사러 나온 이발사, 머리를 손질받고 돌아가는 어느 필경사, 시장에서 사고파는 품목을 검문하러 나온 행정관에 이르기까지 마주치는 모든 이들의 이름을 알았고 그들에게 최근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안녕, 조반니.”

마지막으로 마주친 것은 어느 젊은 여인이었는데 엔초는 그녀에게서 꽃내음 같은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그 여인은 조반니에게 묘한 미소를 보내며 인사했는데 엔초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느라 조반니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으며 입 모양으로 인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 외에도 조반니는 우연히 마주친 몇 명의 여인들과 눈짓 인사를 더 주고받았는데 그중에는 노골적으로 조반니에게 귓속말을 하며 은밀한 웃음을 흘리는 여인도 있었다. 낯부끄러운 말을 다 들리게 속삭인 여인도 있었지만 엔초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 조반니가 귓속말로 화답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동시에 세 명의 여인과 동침을 한 경험도 있는 조반니였다.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여인들이 많은 것은 당연했으며 그 여인들이 하나같이 다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것도 당연했다.

할 말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아 무화과를 다 먹을 때쯤에야 겨우 생선 가게에 도착했는데 도미며 굴 따위를 상자에 담아 팔고 있는 생선 장수 역시 다른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조반니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반색했다.

“어서 와요, 조반니. 마침 시간 맞춰 왔네요.”

“준비가 다 됐습니까?”

“물론이죠. 여기요. 토르토라 해협에서 갓 건져 올린 것처럼 펄떡거리는 굴 한 바구니입니다. 이 빛깔을 보세요. 살아 움직일 것처럼 윤기가 흐르지 않아요? 이렇게 싱싱한 굴은 정말 간만이에요.”

생선 장수는 준비해 놓은 바구니를 꺼내 석재 매대 위에 얹었다. 엔초가 발꿈치를 들고 안을 들여다보니 바구니 안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굴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굴은 흔히 먹을 수 없는 고급 음식이었기 때문에 엔초는 눈이 휘둥그레져 조반니를 올려다봤다.

“이 바구니에 든 것들을 다 사시는 거예요?”

“그럼.”

“굴을 이렇게 많이 사는 사람은 처음 봐요.”

“오늘 저녁 식사에서 주가 되는 요리가 굴이란다. 일찌감치 미리 부탁해 준비해 놨지. 기대해도 좋아.”

흔히 굴은 사내들에게 좋은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생선 장수는 은근한 눈초리로 낯부끄러운 농담을 던졌다.

“이 많은 굴을 다 어디에 쓸 심산이에요? 말해 봐요.”

“그런 게 아닙니다. 식사를 대접할 분들이 계셔서 산 거예요.”

“오호, 식사 대접이라. 누구예요? 어떤 분들과 식사를 하기로 한 거죠?”

“놀리지 마세요.”

들고 가기 좋게 굴 바구니를 안은 조반니는 천연스러운 표정으로 돈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정말 신선해 보이네요. 덕분에 오늘 저녁 식사를 훌륭히 대접할 수 있겠어요.”

“특별히 당신에게만은 제일 싱싱한 굴들만 줄 테니 또 필요하면 언제든지 들러요.”

이후 조반니는 치즈 상인에게서 치즈 두 덩이를 산 뒤 순회를 하듯이 차례로 잡화점과 푸줏간에 들러 갖가지 양념과 고기를 샀다. 큰 키만큼이나 힘이 센 그는 혼자서 식재료를 다 들었기 때문에 엔초는 빈손으로 조반니의 뒤를 따라가며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로요? 어째서요? 왜 학교를 그만두시는 거예요?”

“병원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야. 네 나이였을 때부터 내 꿈은 의사였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보단 병원에서 일하는 게 내게 더 어울려. 지금도 바치 병원 앞을 지날 때면 그곳에서 일하는 상상을 해. 그리고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는 것은 지루해서 견디기 힘들어. 이제는 교수가 아니라 의사로 일할 때가 됐지.”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꿈이었다니 대단해요. 제 꿈은 루바노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가 되는 거예요.”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꿈이구나. 아마 그렇게 될 거다.”

“축제가 열리면 제가 만든 조각상이 전시돼 있는 광장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예요. 제 그림은 아주 인기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사고 싶어 할 거예요. 제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저자가 바로 엔초 알피에리라고 할 거예요. 그러면 저는 무척…… 그런데 얼굴에 그게 뭐죠?”

엔초는 조반니의 왼쪽 뺨에 흰 가루 같은 것이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밀가루 같기도 하고 석회 가루 같기도 한 그것은 왼쪽 뺨에 난 무언가를 덮고 있는 것처럼 발려 있었다. 어제저녁에 조반니를 봤을 때 그의 뺨은 깨끗했다.

“사과파이를 만들던 밀가루 반죽 가루인가요?”

조반니는 대답을 하는 대신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웃었다. 눈꺼풀 사이로 금색 눈동자가 작게 보이게 한껏 눈을 접은 그 웃음은 어딘가 독특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특별한 웃음 같았다.

“왜 그렇게 웃으시는 거예요?”

“즐겁기 때문이지.”

하숙집 앞에 도착했을 때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서 있었던 것 같은 나이 든 노인이 보였다. 그라나 부인을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조반니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노인은 밑단 선이 바닥까지 끌리는 긴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머리에 백발이 성성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데다 옷차림새로 보아 법관이나 학자 같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조반니가 묻자 노인은 엔초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처럼 엔초의 얼굴을 한 번 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조반니가 웃옷 소매에서 편지를 꺼내 건네는 동안 엔초는 편지 가운데에 붉은 봉랍을 올려다봤다. 노인은 편지를 받아 들어 옷소매에 넣곤 조반니에게 묵례를 하고 걸음을 돌렸다.

“그럼 식사 때 보자구나.”

노인의 뒷모습을 말끄러미 보던 엔초는 로미오를 떠올리고 재빨리 먼저 하숙집 안으로 들어갔다.

“네! 저녁 식사 때 봬요!”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올라간 엔초는 얼른 집 문을 열었다. 자신보다 일찍 돌아와 있던 피에트로가 마침 방에서 나와 집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로미오 형은?”

그런데 피에트로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방에 있어.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내가 돌아왔을 때부터 침대에 누워 있었어.”

엔초가 놀라서 얼른 로미오의 방으로 쫓아가자 피에트로가 막았다.

“솔로르사노 중위님이 이 근방을 검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르셨는데도 나와 보지 않았어. 귀찮게 하지 말고 내버려 둬. 저녁 식사는 아무래도 스포르차 선생님과 셋이서 해야 할 거야.”

“내가 약재 상점에 다녀올게.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지도 모르잖아.”

“약은 필요 없다고 했어. 집에 혼자 있는 동안 몸이 나빠졌나 보지. 내버려 둬.”

그러나 엔초는 피에트로의 말을 듣지 않고 로미오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고리에 매달려 형, 하고 부르자 피에트로가 더 제지하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형……?”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며 불렀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방 안에는 작은 초가 켜져 있었고 로미오는 등을 보인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상한 점은 머리맡에 검이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본래 군복과 함께 벽에 걸어 두는데 무슨 일인지 손만 뻗어 바로 잡을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형?”

목소리를 낮춰 가까이 다가갔지만 로미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고 있을 줄 알았지만 침대 맡에 서서 내려다보니 로미오는 눈을 뜨고 있었다.

“……엔초구나.”

로미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엔초는 로미오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로미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디가 아픈 거야? 열이 나?”

“……괜찮아.”

작은 손으로 로미오의 이마를 짚었지만 열은 없었다. 벽을 바라보는 로미오는 미동이 없었는데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거야?”

“…….”

“응? 형, 어디가 아파?”

“……아프지 않아. 걱정 마.”

엔초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침대 위로 올라갔다. 로미오의 어깨를 잡으며 얼굴을 보려고 애쓰자 그제야 로미오가 시선을 들어 이쪽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왜 그래? 정말 아픈 게 아니야?”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로미오는 다시 고개를 바로 해 벽을 보더니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옆이마를 대고 누웠다. 통증을 참는 것처럼 손으로 가슴 아랫부분을 쥐는 게 보였는데 입술 사이로 앓는 숨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가슴이 아파? 다친 거야?”

엔초가 로미오의 윗가슴을 만지려고 하자 로미오는 엔초의 손을 잡았다. 밀어내지 않고 그저 잡고만 있었는데 마치 몸을 만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을 푹 자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엔초가 선뜻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대자 로미오는 손을 놓아주었다. 로미오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엔초는 겁이 나는 한편 어떻게 할지 몰라 주저했다.

“화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스포르차 선생님을 만났어… 선생님께서 저녁 식사 재료 거리를 아주 많이 사셨어. 저녁을 함께 먹자. 형이 좋아하는 사과파이도 만드신댔어.”

“……난 괜찮으니까 피에트로와 셋이서 먹어. 선생님께는 죄송하다고 대신 전해 줘.”

손을 뻗어 로미오의 뺨을 만지는데 손 너머로 로미오가 입술을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눈가를 찌푸리는 것도 보였다.

엔초는 슬그머니 손을 떼고 로미오의 뒷모습을 내려다봤다.

“스포르차 선생님이 맛있는 음식을 아주 많이 준비하신댔는데……. 넷이서 함께 저녁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

“……알았어. 저녁 식사는 셋이서 할게…….”

풀이 죽어 침대에서 내려온 엔초는 발소리를 죽여 방을 나갔다. 울상이 된 얼굴로 닫힌 방문을 돌아보고 거실로 갔다. 앉아서 기다리자 곧 위층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한참이 지나서야 경쾌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조반니는 양손 가득 굴 요리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

“많이 기다렸지?”

조반니는 피에트로에게 방금 갓 굽고 쪄 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굴 요리 접시를 건넸다.

“위에 가서 음식들을 더 가지고 내려올 테니까 이것들을 먼저 차려 줘.”

피에트로가 탁자 위에 음식을 차리는 사이 위층으로 올라간 조반니는 나머지 요리들을 갖고 내려왔다. 한 손에 접시를 두 개씩 든 그는 먹기 좋도록 탁자 위에 요리 접시를 전시했다.

“그라나 부인께서도 함께하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밤잠이 많은 그라나 부인은 이른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잠들어 있었다.

준비한 음식이 모두 차려지자 진풍경이 따로 없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말린 포도와 땅콩, 양파, 절인 채소를 넣어 버무린 굴 볶음이었다. 그 외에도 잘게 썬 감자와 초록 콩, 호박을 아낌없이 넣어 끓인 굴 수프, 시큼한 과일즙을 뿌리고 숭어알을 얹어 비린내 없이 껍데기 그대로 담아낸 향긋한 생굴, 열에 푹 찌고 치즈를 푹신하게 뿌려 갖가지 양념에 찍어 먹을 수 있게 썰어 낸 양고기 찜, 적포도주에 절여 두툼하게 구워 낸 돼지 넓적다리 구이, 그리고 사과와 꿀로 속을 가득 채운 사과파이까지 다양했다.

요리에 쓰인 양념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가 돼 보였고 고기의 양은 이틀을 족히 먹어도 충분할 만큼 많아 보였다. 바치 시내의 상인들이 벌어들이는 한 달 수입의 절반을 오늘 요리의 재료값으로 쓴 조반니 손님이 다섯 명쯤 더 와도 될 정도로 많은 음식들을 준비했다.

“이 많은 음식들을 언제 다 준비하신 거죠?”

조반니가 대식가라는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없는 피에트로가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의 양에 놀라 물었다. 준비한 정성을 생각해 보건대 조반니는 이 식사 자리에 대한 기대감이 커 보였다.

“함께하는 첫 저녁 식사라 준비를 많이 했지.”

눈 돌아갈 만큼 맛있고 진귀한 음식이 가득 차려졌지만 엔초는 로미오의 방만 쳐다봤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피에트로만이 약간 당황해 재차 물었다.

“정말로 여기 있는 모든 음식을 혼자서 만드셨어요?”

“물론. 전부 혼자서 만들었어. 그런데 대위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방에서 쉬고 있어요. 몸이 좋지 않아서 저녁을 먹지 않겠대요. 죄송하다고 대신 전해 달라고 했어요.”

조반니는 자못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턱을 매만졌다. 연기였지만 이 자리에 그 사실을 알아차릴 만한 사람은 없었다.

“어디가 아프신 거지? 오늘 아침에 뵀을 때는 편찮으신 곳이 없어 보였는데.”

조반니는 로미오가 앉아야 할 빈 의자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로미오가 집어 던졌던 의자가 이 의자였던가? 아니면 저 의자였던가?

“모르겠어요…… 로미오 형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엔초는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로미오의 방을 곁눈질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준비했을 정도로 저녁 식사를 고대했던 조반니는 생각에 잠겨 의자 등받이 끝을 툭툭 두드렸다.

참을성이 있었더라면 오늘이 아니라 내일 로미오를 겁탈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적어도 저녁 식사를 즐겁게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데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해 그를 범해 버린 것이었다. 계획 하에 일을 진행했더라면 저녁 식사와 겁탈 두 가지를 다 뒤탈 없이 끝냈을 것이다. 무모하게 행동해 저녁 식사 계획을 어그러뜨려 버렸으니 자신의 잘못이었다.

“잠깐 대위님을 봐 드려도 될까? 아프신 곳을 알면 약을 처방해 드릴 수 있어. 갖고 있는 약 중에 대위님의 증상에 맞는 약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러세요. 그런데 아마 얘기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몇 번이나 물었는데 괜찮다고만 하던걸요.”

조반니는 기다려 달라고 손짓한 뒤 로미오의 방으로 향했다.

“대위님.”

문을 두드리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문 틈에 귀를 댄 조반니는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

“대위님, 문을 열어 보시겠습니까?”

그러나 역시 대답은 없었다. 문 앞에 서서 기다렸으나 방 안에서는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별수 없이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앉은 조반니는 식기 전에 들라는 뜻으로 식탁의 오른편에 있는 음식들부터 설명했다.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요리는 이쪽이야. 이 양념은 후추와 육두구를 섞어 만든 것으로 입맛에 따라 꿀을 좀 더 넣어도 좋아. 꿀이 담긴 통은 여기 있으니까 각자 원하는 만큼 덜어서 섞어 먹도록 해. 이쪽에 있는 음식은 안까지 뜨겁게 익혀서 겉이 식더라도 한 입 베어 먹으면 김이 날 테니 천천히 먹어도 좋아. 계피 향이 진하지 않도록 신경 써서 조리했지만 만약 향이 강하게 느껴진다면 겉부분의 살 껍질을 떼어 내고 먹도록 해.”

조반니는 피에트로와 엔초의 팔이 닿는 곳에 꿀통을 놓아 주고 엔초의 접시에 돼지 넓적다리 한 조각과 굴 볶음을 덜어 주었다. 엔초는 배가 고픈 와중에도 로미오가 걱정돼 로미오의 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굴 볶음을 한 점 떠먹자마자 눈이 큼지막해졌다.

“맛이 어때?”

입가에 양념이 묻은 엔초는 순간적으로 로미오를 잊고 한 입 더 크게 먹더니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숙련된 요리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까다로운 음식이었기 때문에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게 당연했다.

“아주 특이한 맛이 나요. 특이하고 맛있는 맛이요. 이게 무슨 맛이에요?”

“여기에 찍어 먹어 보렴.”

조반니는 나이프를 들었으나 먹지 않고 로미오의 방에 시선을 뒀다. 엔초가 맛있다고 감탄을 내뱉었고 피에트로도 식사를 시작했지만 그는 손을 멈추고 로미오의 방만 쳐다보았다.

“드세요.”

피에트로가 권했지만 조반니는 식탁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떠나고 로미오가 이 위를 어떻게 치웠을지 상상했다.

얼굴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대위님께 다시 한번 여쭤봐야겠어.”

로미오의 방문 앞으로 다가간 조반니는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보세요, 대위님. 아프신 곳을 살펴봐 드리겠습니다.”

대답이 없어 한 번 더 두드리는데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발소리가 다가오니 문이 열렸다. 문틈 너머에 있는 로미오는 방 안의 작은 촛불 빛에 옆얼굴만 겨우 보였다. 고개는 숙이고 있었고 한 손으론 벽을 짚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잠깐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봐 드려도 될까요?”

조반니가 문 사이로 이마를 넣으며 물었지만 로미오는 눈을 들지 않고 바닥을 향해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서 있는 것이 버거운지 로미오는 상체를 숙이고 한쪽 다리를 굽힌 채 문에 어깨를 기댔다. 입고 있는 옷은 당연히도 겁탈당할 때의 옷과 달랐다.

“……시간을 내 음식을 준비하신 것으로 아는데 죄송합니다.”

조반니는 눈을 내리깔고 로미오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차례 훑었다. 정액 범벅이 돼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식사야 언제든 다시 함께하면 되지요. 아프신 곳을 살펴봐 드릴 테니 문을 조금만 열어 보세요.”

“…….”

로미오는 자세를 굳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문을 당겨 열었지만 들어오기를 허락하는 대신 문 앞에 섰다.

고개를 든 로미오의 얼굴은 수척하고 창백했다. 병색이 퍼진 사람처럼 파리하기도 했다. 눈 밑의 그림자는 우묵하게 들어가 보였고 푸른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어 조반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집에서, 지금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 저 식탁 위에서 로미오를 범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로미오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잡을 때의 감촉이 손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긴장이 느껴지는 피부는 탄력 있고 미끈했다.

“혈색이 몹시 나빠 보이는군요. 아무래도 약을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깨를 감싸 침대에 데려가려고 하자 로미오가 몸을 틀며 손길을 피했다. 팔로 가슴 아래를 감싼 그는 시선을 의식한 듯 금방 팔을 뗐다.

“……종종 이렇게 몸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큰일은 아니니 염려 마시고 마저 식사하십시오.”

“손으로 짚으신 부분에 통증이 느껴지시나요? 기침은 어떻습니까? 기침이 나오지는 않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리로 오세요.”

조반니는 로미오에게 손을 대지 않고 침대로 향했다. 거절을 하려던 로미오는 등을 구부린 채 느린 걸음으로 조반니를 따라 침대로 가 앉았다.

윗몸을 숙이고 무릎에 팔을 얹은 자세로 상체를 지탱했지만 통증 때문에 편히 앉을 수가 없었다. 꼬리뼈가 잘려 나간 것처럼 깊은 고통이 느껴졌다. 뼈와 뼈 사이에 칼날이 박힌 것 같은 아픔이었다.

“통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뼈나 근육의 문제라면 진통을 낮게 하는 약을 드시면 됩니다. 가져다드릴까요?”

로미오는 고개를 저었다. 조반니는 숨을 내쉴 때마다 로미오의 앞가슴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는 것을 관찰했다.

두들겨 맞았으니 몸이 성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괴로워하는 얼굴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할 수 없어 아쉬웠다.

“혹시 앞이 보이지 않아 부딪치신 겁니까? 거짓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히 말씀해 보세요. 부딪치거나 넘어지셔서 다치신 겁니까?”

촛불 빛에 로미오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게 보였다.

“아니요… 아닙니다.”

로미오는 무릎에 머리가 닿을 것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숨을 들이켰다. 호흡에 문제가 생겼을 때 흔히 내는 바람 새는 것 같은 숨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좋아질 테지만 오늘 밤은 잠을 설치게 될 것이다.

“식사를 조금이라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식사 생각은 없습니다. 이만 가십시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음률을 가진 것 같은 로미오의 숨소리는 물을 머금은 것처럼 들렸다.

낮에 들었던 로미오의 신음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기분 좋은 그 소리가 정말로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흘러내린 로미오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쓸어 넘겨 주고 싶어졌다. 이마와 뺨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그리고 코뼈가 내려앉도록 두들겨 패고 목을 조르고 옷을 벗기고 싶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로미오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 바닥에 쓰러뜨리고 겁탈하는 상상을 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피에트로가 달려와 막을 것이고 엔초는 놀라서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로미오에게 검은 망토의 사내가 자신이며 오늘 낮에 찾아왔던 것 역시 자신이라고 밝히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범해진 적이 없기에 로미오의 심정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정말로 그자가 선생님이셨습니까? 어떻게 이런 짓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마 그와 비슷한 말을 할 것이다. 믿을 수 없어 하며 화를 내고 경멸할 것이다. 어쩌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궁금했다. 과연 진실을 밝혔을 때 로미오는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이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할까? 그래서 반응을 볼까?

모든 사실이 밝혀져 삽시간에 온 도시에 소문이 퍼지면 자신은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을 것이다. 사형을 면치 못할 수도 있다. 구금과 재판은 무료한 일상에 특별한 자극이 돼 지루함을 덜어 주겠지만 가능하다면 오늘 로미오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싶었다. 굴 요리가 아주 만족스럽게 돼 꼭 대접하고 싶었다.

“가슴의 통증을 느끼시는군요. 그것도 아주 큰 통증을 말입니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엉덩이를 움켜잡을 수 있는 위치에서 은밀하게 손끝을 비볐다.

어깨를 틀어쥐어 끌어당기면 힘없이 끌려와 눕혀지겠지. 가녀린 몸을 떨며 신음하겠지. 몸부림치며 괴로워할 테지. 아, 그 감미로운 신음 소리!

“대위님.”

“…….”

“듣고 계신지요.”

로미오는 몸짓을 보이거나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끔찍한 고통이 묻어 나오는 눈빛은 바닥을 향해 있었고 무릎 위에 걸친 손은 허공에 늘어져 있었다.

그에게서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기운만이 느껴졌다. 두 번째 겁탈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예상외로 큰 듯했다.

“고향에…….”

말문을 뗐지만 로미오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고향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가는 데만 마차로 수일이 걸리니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겁니다.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약은 괜찮습니다. 가슴의 통증은 곧 가라앉을 겁니다.”

손으로 얼굴을 감싼 로미오는 힘에 부쳐 등을 숙이고 느리게 뺨을 쓸어내렸다.

조반니는 엔초에게 보여줬던 그 미소를 지었다. 흰 이빨이 드러나도록 입을 벌리고 눈을 한껏 접은 미소.

“제가 함께 가도 될까요?”

아름다운 모든 것은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원할 때 언제든 취할 수 있도록 손안에 있어야 했다. 그 아름다움이 온전한 형태인지 아니면 손에 넣고자 했던 이유를 잊어버릴 만큼 망가진 형태인지는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어야 했다.

“폐 끼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저 대위님께서 어떤 곳에서 나고 자라셨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망가뜨려도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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