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갈고리 고양이 술집 (3/30)

3. 갈고리 고양이 술집

비는 다음 날 새벽에 그쳤다.

전날 밤 부대로 돌아온 로미오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앉으면 통증이 심해져 옆으로 웅크린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자신이 불과 몇 시간 전에 겁탈당했음을 떠올렸다. 흠뻑 젖은 군복을 입은 채 어떻게 로사티 1번가에서 부대까지 걸어왔으며 어떻게 침실에 도착했는지도 생각해 내려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골목을 나온 이후의 일들이 꿈인 것처럼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어스름하게 하늘이 밝아 올 새벽 무렵이 되니 정신을 잃은 자신을 누군가가 여기까지 데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동이 트자 부대 내의 가장 높은 전망대에서 기상나팔이 울려 퍼졌다. 근육이 뒤틀리고 뼈가 살을 찢고 나올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골반의 통증이 심해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군복을 벗어 보니 어깨와 가슴, 허리가 푸르스름한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목을 손으로 더듬자 손바닥에 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장갑은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했고 군복 바지와 신발에도 점점이 핏방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몸을 씻고 나와 새 군복으로 갈아입었지만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꼼짝 않고 있으니 갈리에누스가 방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문을 열어 주자 그는 적잖이 놀라며 턱 아래에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어 있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로미오는 꼬리뼈와 척추의 극심한 통증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지만 가까스로 문고리를 잡고 자세를 유지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 염려 말게.”

창백한 안색으로 그렇게 대답했지만 갈리에누스는 밤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로미오의 얼굴을 보며 의아해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함께 장교 식당으로 가 식사를 하던 중 같은 대대 1중대의 대위인 발레리아와 마주쳤다. 먼저 식사를 끝낸 그녀는 아침 인사를 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가 갈리에누스와 비슷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얼굴이 왜 엉망이야?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로미오는 흡사 악몽에 시달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눈가에는 깊이 그늘이 져 있고 입술은 찢어져 바짝 말라 있었다. 어딘가 불편한 듯 어깨를 반듯하게 펴지 못하고 등을 구부려 앉은 그는 시선을 탁자 언저리에 두고 있었다.

웃는 낯으로 다가왔던 발레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돼 로미오를 가까이서 보며 표정을 살폈다.

“누군가와 싸우기라도 한 건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대체 무슨 일이야? 어쩌다가 얼굴이 이렇게 되었어?”

로미오보다 1년 앞서 소위로 임관한 발레리아는 로미오보다 세 살이 많았다. 공증인인 아버지와 의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 형제들이 의사와 법관의 길로 들어설 때 사관 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시골 출신인 로미오가 바치로 와 장교 생활을 시작할 때 도움을 많이 줬는데 특히 그가 네베 사투리를 고치는 데 큰 역할을 해 주었다. 그녀는 같은 대대의 3중대장인 마르코와 같은 사관 학교를 졸업해 운 좋게 나란히 1대대에 임관한 데다 나이가 같았기 때문에 그와도 사이가 좋았다.

중위 진급을 거치는 동안 로미오는 두 사람과 친해졌고 대위가 된 지금은 셋이서 있을 때 이름을 부를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로미오는 지금도 발레리아와의 첫 만남을 기억했는데 깔끔하게 빗어 넘긴 적갈색 단발머리에 쾌활한 말투를 쓰던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수도 사람의 전형에 들어맞았다.

“잠깐 보지.”

로미오가 고개를 숙이고 식탁을 내려다보고 있자 발레리아가 손을 뻗었다. 뺨에 손이 닿은 순간 로미오는 팔과 다리를 비롯한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발레리아는 뺨을 옆으로 돌리게 해 멍이 든 부위를 살펴보고 금방 손을 거뒀지만 로미오를 심장이 격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부딪쳤습니다. 어젯밤에 집에 가는 길에 비가 많이 오더군요. 주위가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손을 움직여 숟가락을 잡자 갈비뼈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앉고 일어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기 때문에 앉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웠고 입을 벌려 음식을 씹을 때마다 귀 아래쪽이 불에 덴 듯 욱신거렸다.

갈리에누스가 뭔가 큰일이 있음을 직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안색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시선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자신은 입에 담지 못할 짓을 당했다.

바로 어젯밤에.

누구인지도 모를 낯선 사내에게.

“저런. 크게 부딪쳤나 보군.”

발레리아 역시 로미오가 평소와 다르게 낯빛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갈리에누스를 슥 쳐다보고는 그가 별달리 아는 것이 없는 듯하자 다시 로미오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다면 저녁에 마르코와 함께 술이나 한잔하지. 어때?”

발레리아가 세련된 수도 사람의 전형인 것과 달리 마르코는 네베 사투리를 재미있어 해 임관 초기 로미오에게 네베 말로 장난을 치는 등 짓궂은 면이 있었다. 여자에게 관심이 많지만 험상궂게 생긴 외모 때문에 늘 퇴짜를 맞는 그는 생긴 것과 달리 성격이 유들유들했다.

아주 오래전에 마르코는 어려서 들과 산을 뛰어다니며 놀았다던 로미오의 말을 듣고 ‘집 뒤뜰에서 멧돼지나 사슴과 마주쳐 본 적도 있겠군?’ 하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두 동생을 고향에 두고 홀로 바치로 와 장교 생활을 하던 임관 초기에 로미오는 마르코의 그런 농담을 좋아했다.

“대위, 내 말 듣고 있나? 오늘 저녁에 시간이 괜찮겠어?”

발레리아는 기분을 풀어 줄 요량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로미오는 머리를 깊이 떨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됐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여 들렸다. 발레리아는 로미오의 접시에 음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갈리에누스의 접시를 확인했다. 식사를 시작한 지 꽤 시간이 지난 듯 보이자 ‘흠.’ 하고 짧게 한숨을 뱉으며 로미오의 얼굴을 쳐다봤다. 갈리에누스도 로미오의 표정을 살피다 그의 접시를 가리켰다.

“입맛이 없으십니까?”

로미오는 야채를 넣어 끓인 육수로 만든 국물 한 접시와 후추에 절여 바싹 익혀 낸 돼지고기를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신맛이 나는 향신료와 설탕을 넣어 버무린 건자두 볶음도, 속에 버섯과 양파를 다져 넣어 노릇하게 구운 도미구이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두툼한 빵 한 덩이만 겨우 몇 입 떼어 먹은 상태였다.

“좀 드시지 않으시고요.”

갈리에누스의 걱정스러운 재촉에도 로미오는 낮게 눈을 내리깐 채 대답하지 않았다.

전날 밤 로미오가 집에 다녀온 줄 안 갈리에누스는 집안 문제와 관련하여 뭔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로미오의 두 동생에 관해 잘 알았지만 하루 사이 지나치게 얼굴빛이 나빠진 그에게 자세한 것을 물을 수 없었다.

그때 세 사람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발레리아와 갈리에누스가 쳐다보니 니콜 안드리치 하사였다. 그는 2중대 1소대의 분대장으로 로미오가 이번 사건을 맡았기 때문에 비토리오가 갇혀 있는 감옥의 보초를 담당했다. 비토리오의 상태를 보고하는 것이 그의 몫이었기 때문에 지난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얼굴이 수척했다. 밤낮없이 감옥을 감시해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만…….”

모자를 벗고 있는 실내에서는 경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잊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도로 내린 니콜은 로미오와 발레리아, 갈리에누스를 차례로 보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로미오의 얼굴에 난 멍 자국과 입술의 상처를 보고 잠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비토리오 나르디가 방금 사망했습니다. 직접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체포된 지 오늘로 보름이 된 비토리오는 지금까지 일곱 차례 고문을 당했다. 조반니의 취조 이후 더 얻어 낼 것이 없다고 판단한 몬테 중령은 이틀 전 마지막 고문을 끝으로 비토리오를 고문실에서 감옥으로 옮기게 명령했다. 고문 결과 비토리오는 무정부주의 사상에 감화됐을 뿐 단테의 12인의 단원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시체는 물론 체포될 당시 입고 있었던 옷가지와 그의 기숙사 방에서 압수한 물건들은 지하 소각장에서 소각되었는데 비토리오는 고아였기 때문에 시체를 돌려 달라고 애걸하며 부대 앞을 서성이는 가족은 없었다.

“나르디 그자가 조반니 스포르차에게 전할 것이 있다고 하며 편지를 한 장 남겼습니다.”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던 로미오의 표정이 달라지자 니콜은 편지를 건네려는 손을 머뭇거렸다.

“펜과 종이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기에 가져다주었더니 꼭 전해 달라며 한 장 쓰더군요. 내용은 별것 아닌 듯합니다. 실은 편지라고 하기에도 뭣하지만…….”

편지를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뒤로 손을 물리는 니콜의 행동이 예의에 어긋났기 때문에 갈리에누스는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니콜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로미오의 눈치를 살폈다.

비토리오의 편지를 들고 갈리에누스에게 보고할 생각으로 그를 찾아갔지만 집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당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여기로 찾아온 것인데 공교롭게도 로미오도 함께 있었다.

니콜은 로미오가 맹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가 글을 읽는 데 불편함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명령 하달은 갈리에누스를 통해 받았기 때문에 중대장인 로미오와 직접 마주할 일이 드문 니콜은 편지를 갈리에누스에게 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보고드릴 필요가 있는 것 같아 말씀드리려고 갖고 왔습니다. 식사가 끝낸 후에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편지인가?”

“예, 내용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로미오는 니콜의 손에 뿌옇게 흐린 윤곽으로 무언가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니콜은 주저하며 피로 얼룩덜룩해지고 구겨진 종이를 로미오에게 건넸다. 그리고 로미오가 편지를 받아 들어 눈앞에 가까이 대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되었다.

“…….”

종이가 코에 닿을 만큼 가까이 편지를 가져다 댄 로미오는 한 자씩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지만 니콜에겐 그 모습이 마치 편지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이하게 보이는 광경에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로미오를 보고 있으니 발레리아가 넌지시 물었다.

“하사, 식사는 했나?”

“아니요,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니콜은 발레리아를 향해 대답한 뒤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로미오를 관찰했다. 종이를 손에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와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단정한 상앗빛 손톱에서 고상한 풍격이 느껴졌다. 얼굴을 가린 종이 너머로 검은 머리칼에 덮인 흰 귀와 갸름한 턱이 보였는데 멍이 들어 있음에도 턱 선이 매끈해 보기 좋았다.

로미오가 흘끔거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눈에 띄는 외모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견은 없었다. 물론 그에게서 보는 이를 압도하는 강렬한 눈빛이나 뛰어난 통솔력이 배어나는 몸짓은 찾아볼 수 없었다. 태생적으로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갖고 태어나는 자가 있다면 로미오는 아니었다.

그는 그림 같은 사내였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하고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를 가진 우아한 사내.

바치의 뒷골목을 누비는 약종상의 수레 속 사랑의 말이 적힌 묘약의 주인공.

운명적인 만남을 노래하는 낭만적인 시와 희곡 속에 나올 법한 이름난 미인이 바로 그였다.

“하사.”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관이고 맹인이었다. 외모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몰래 훔쳐보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

“예, 대위님.”

로미오는 눈앞에 가져다 대고 있던 편지를 내리고 니콜을 올려다봤다. 니콜은 로미오의 눈빛을 보며 그가 하려는 말을 짐작했다.

“시체와 함께 소각시켜라.”

그래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니 전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며 니콜은 편지를 받아 들었다. 조반니의 명성에 대해 들어 본 바 있는 니콜은 이번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을 뿐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는 자에게 펜과 종이를 주며 부탁을 들어준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니콜은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 된 소년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니콜은 로미오와 발레리아, 갈리에누스를 차례로 보며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발레리아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나르디 그자와 스포르차가 정말로 특별한 관계가 맞긴 했나 보군.”

로미오가 비밀을 지켜 달라던 조반니의 부탁을 구태여 들어줄 필요가 없었던 것은 취조 결과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이었다. 소문낸 적 없으나 대부분의 장교들은 이번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

조반니가 체포된 다음 날 바치 전역에 그의 체포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며 비토리오에 관한 소문도 함께 떠돌았는데 로미오는 조반니가 어떤 방식으로 소문을 잠재울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그가 추문에 시달리는 것에 책임을 느끼지도 않았다. 단지 이번 일로 통령이 바치 일대의 모든 대학에 대한 검열을 강화한다면 더 철저히 감시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로미오는 손을 더듬어 접시 위에 올려진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아 도로 내려놓고 욱신거리는 턱을 손으로 감쌌다.

“오독이나 해독할 이유가 없는 내용이었다. 연인 간에 할 법한 말이 적혀 있었어.”

몬테 중령이었다면 ‘이런 보고는 할 필요 없다’고 지적했겠지만 로미오는 니콜이 자신에게 편지를 가져다준 것이 지침을 따른 행동이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 적혀 있었지?”

발레리아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로미오가 턱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고 대답했다.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조반니’.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 * *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코끝의 점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있나? 미소는 또 어떻고? 멀리서 바라보는데 현기증이 일더군. 그래서 다가가 말을 걸었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내일 밤에 시간을 내줄 수 있겠냐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 여인이 뭐라고 했는 줄 아나? 자신은 바치 사람이 아니라 사보카의 보석상이라고 하더군. 보석을 팔기 위해 오늘 새벽녘에 사보카에서 출발해 아침 일찍 바치에 도착했다고 말이야. 내일 아침이면 다시 사보카로 돌아가야 해서 같이 식사를 할 수가 없다더군. 하지만 이틀 전에 그 여인을 몰베나 거리에서 봤어. 보석상이 맞긴 하더군. 10년도 더 돼 보이는 오래된 가게에서 자기 아버지와 장사를 하고 있지 뭐야!”

마르코와 발레리아의 사이에서 걷던 로미오는 허리 뒤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으며 바닥을 응시했다.

“나 참.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어슴푸레하게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가 어제 미처 다 하지 못한 서류를 처리하려던 로미오는 집무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마르코에게 붙잡혔다. 그는 발레리아와 함께 살라티코 거리에 있는 술집에 갈 생각이라고 했다. 됐다고 거절하려 했지만 ‘술은 마시는 사람이 많을수록 맛있는 법이다’라는 그의 지론을 당해 내지 못했다. 갈리에누스가 옆에 있었다면 그도 꼼짝없이 붙잡혔겠지만 로미오는 오늘 저녁을 혼자 먹었다.

온종일 어젯밤 포목점 골목에서 검은 망토의 사내에게 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허벅지와 엉덩이를 쥐는 손의 감촉과 어둠 속에서 보았던 금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 거라는 두려움에 불현듯 심장이 빨리 뛰기도 했다. 겁탈을 당한 것이 불과 어젯밤의 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군복 옷깃에 가려진 목의 상처를 더듬어 보기도 했다.

해가 저물고 밤이 가까워 오자 낮과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자신은 겁탈당했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르코와 발레리아가 떠드는 틈에 끼는 것이 나을 것 같단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다리 사이의 통증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평범히 행동했다.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나, 로미오? 응? 자네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어?”

마르코는 술집으로 향하는 길에 며칠 전 거리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집무실 문에 정수리가 닿을 정도로 키가 큰 마르코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로미오의 어깨 위에 팔을 얹고 눈망울을 사납게 굴렸는데 손질하지 않은 짙은 갈색 머리가 동물의 갈기처럼 푸석푸석해 보였다.

마르코의 팔이 몸에 닿은 순간 로미오는 흠칫 고개를 떨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곧 긴장을 풀었다.

“……예, 이해합니다.”

몸을 보호하고 감춰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판단으로 군복 안에 몇 겹의 옷을 더 껴입은 로미오였다. 갈비뼈가 쑤시듯 아파 와 손으로 가슴을 짚자 겹겹이 껴입은 웃옷 아래의 살갗이 쓰라렸다.

“아니. 자네는 내 마음을 이해 못 해. 내가 자네 같은 얼굴이었다면 그 여인이 식사 대접을 거절하지 않았겠지.”

마르코는 두툼한 입술을 씰룩거리며 콧김을 내뿜었다. 

낮에 있었던 회의에서 로미오가 통증 때문에 손으로 가슴 부근을 누르는 것을 몇 차례 보았던 발레리아가 물었다.

“아직도 아픈가?”

“참을 만합니다.”

“군의관에게 가 보았나?”

“……아니요. 괜찮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로미오가 가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자 마르코는 웃음을 그치고 “내가 괜히 손을 올렸군.” 하고 로미오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팔을 내렸다.

세 사람은 곧 살라티코 거리로 들어섰다.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도매상점과 약재 상점, 포목점, 잡화점의 주인들은 너나없이 불을 밝히고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도매상점에는 색색깔의 양탄자와, 금실과 은실로 무늬를 놓아 짠 휘장과, 화려한 그림을 수놓은 벽걸이 가리개가 걸려 있었고 약재 상점에는 선반마다 빼곡하게 약병이 들어차 있었다.

포목점에는 종류별로 면직물이 걸려 있었고 잡화점에는 옷이나 장갑 따위의 의류부터 시작해서 의자나 탁자 같은 가구, 그릇, 베개, 말발굽에 다는 편자, 실과 바늘 등 팔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판매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낮에는 지금보다 세 배는 더 활기가 넘치는 거리니 시장이라도 한 번 열리면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많았다.

“오늘도 고양이들이 있으려나?”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한 마르코는 멀리 갈고리 고양이 술집이 보일 때쯤이 되자 웃었다.

“아, 있군.”

갈고리 고양이 술집은 세 사람이 자주 가는 술집의 이름이었다. 가게 입구에 ‘한밤중의 포도주’라는 이름이 쓰인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실은 그게 진짜 술집의 이름이었다. 다만 아무도 그 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주인 부부가 떠돌이 고양이 한 마리에게 가게 앞을 내줘 살게 했는데 그 고양이의 몸에 새겨진 털 무늬가 갈고리 모양과 비슷했다. 따로 이름을 지어 주지 않고 다들 갈고리 고양이라고 불렀는데 몇 년 전에 그 고양이가 어디선가 새끼 고양이 세 마리를 데려왔다. 낮 동안은 보이지 않다가 해가 지면 가게로 돌아와 문 앞에 배를 깔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는데 오늘도 네 마리가 다 가게 앞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아 있었다.

냐아옹-

발레리아가 녹슨 종이 달린 문을 밀자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한 마리가 울음소리를 냈다. 나머지 세 마리는 꼬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는데 한 녀석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로미오에겐 거대한 주황빛 덩어리가 바닥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요 녀석들은 항상 이렇게 줄을 맞춰 앉아 있단 말이지.”

마르코가 허리를 숙여 고양이를 쓰다듬으려는데 울음소리를 낸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어슬렁어슬렁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침 포도주를 들고 지나가던 여급이 입으로 소리를 내 고양이를 내쫓았다.

“쉬익, 쉬익! 어서 나가!”

고양이는 느린 동작으로 고개를 들어 여급을 올려다보고 발레리아와 로미오, 마르코를 차례로 봤다. 치켜세운 꼬리를 흔들며 느릿느릿 몸을 돌린 고양이는 크게 한 번 울고는 가게를 나갔다.

“어머! 오랜만에 오셨네요?”

여급은 이 시간에 종종 가게로 와 술을 마시고 가는 세 사람을 잘 알아 반가운 얼굴이 됐지만 로미오의 얼굴에 든 멍을 발견하고 금세 다시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대위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로미오는 턱의 멍을 가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 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왁자지껄한 가게 안을 둘러보며 말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오늘도 가게에 손님이 많군요.”

발레리아는 여급의 놀란 표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웃으며 물었다.

“늘 앉던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요?”

“위층 창가 자리를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럼요. 올라가 보세요. 방금 손님 두 분이 오셔서 자리를 내어 드렸는데 아직 세 분이서 앉을 자리가 남아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 손님 두 분 중 한 분이 글쎄…….”

가게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의 사내가 “여기 포도주 한 병 어서 주시오!” 하고 외쳐 여급은 말을 멈췄다.

“올라가 계세요. 술은 늘 드시던 걸로 가져다드리면 되죠?”

“예, 안주도 늘 먹던 걸로 주시면 됩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여급은 포도주를 들고 가게 안쪽의 탁자로 향하며 로미오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대위님?”

“예… 괜찮습니다.”

여급은 빠른 걸음으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며 로미오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두 번째 만남에 그녀에게 환심을 사려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한 마르코는 멀어지는 그녀가 로미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미련이 남는 듯 으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세 사람은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 올 때마다 늘 앉는 자리로 향했다.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군복을 입은 세 사람을 흘깃거리며 쳐다보았는데 가슴팍에 제6군단의 휘장이 붙어 있는 것을 본 자들은 두 어 번 정도 더 흘깃거렸다.

로미오는 천장과 벽에 걸린 등잔 불빛에 의지해 창가 자리로 다가가다 앞서가던 발레리아가 갑자기 멈추어서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마르코가 등 뒤에서 허, 하고 탄식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그는 창가 쪽을 보고 있었다.

로미오가 그쪽을 바라보니 여급의 말대로 늘 앉던 자리에 손님이 두 명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의 색깔과 형체가 흐릿하게 구분되었는데 왼쪽에 있는 사람은 남자였다. 앉은키가 높고 골격이 큰 게 느껴졌다.

“이런 우연이 있나.”

발레리아가 자신을 돌아보며 말해 로미오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발레리아는 고갯짓으로 창가의 탁자를 가리켰다.

“조반니 스포르차가 저기 있어. 우리가 늘 앉던 자리에 말이야.”

로미오는 눈가를 가늘게 찌푸리며 창가 탁자에 앉은 두 사람 중 남자로 보이는 쪽을 쳐다봤다. 여기에 조반니가?

기묘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살라티코 거리에 즐비한 술집들 중 하필 갈고리 고양이 술집에서, 그것도 자신이 늘 앉던 자리에 마침 이렇게 그가 앉아 있으니 당연했다. 지난번 만남이 취조실이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곳 술집은 사적인 장소였다.

“옆에 앉은 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 바치 대학교의 교수인 것 같군.”

범죄 전력을 떠올려 보건대 조반니는 운 나쁘게 살인 사건에 휘말린 것일 수도 있고 정말로 방적공을 때려죽였으나 무죄를 받았을 수도 있다. 비토리오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실제로 연인 관계였을 수도 있고 비토리오가 혼자 그를 사랑했던 것일 수도 있다. 조반니가 살인자였든 아니었든, 죽어 가는 연인을 모른 체한 냉혈한이었든 아니었든 로미오는 그가 실제 평판과는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조반니는 지난번 취조 때 자신에게 눈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당혹감을 줘 모욕할 생각이었다면 이해되었지만 아니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뭐, 어쩌겠는가? 비어 있는 자리를 놔두고 다른 곳에 앉을 순 없지.”

로미오는 발레리아의 뒤를 따라가며 조반니로 보이는 듯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차츰 얼굴이 보였는데 그도 이쪽을 발견하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발레리아와 로미오, 마르코가 탁자 앞으로 다가와 서자 조반니는 로미오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여기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로미오에게 취조를 받았던 데다 바로 어제 그를 겁탈한 주제에 조반니는 꽤나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대위님?”

조반니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로미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앉아 있던 조반니를 내려다보고 있던 로미오는 일어나는 그를 따라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잘 알던 사이인 것처럼 인사하는 조반니를 보고 있자니 취조실에서 본 그와 이곳 술집에서 마주한 그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심문할 의무가 더 이상 없으니 적대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기에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대답했다.

“이런 곳에서 뵐 줄 몰랐습니다.”

손을 내밀어 조반니의 손을 잡자 그가 부드럽게 힘을 줘 손을 맞잡았다. 마주 서자 조반니는 로미오와 비교해 확연히 키가 크고 체격이 당당했는데 지난번 취조 때와 마찬가지로 바치 대학 교수들이 입고 다니는 검은색 겉옷을 입고 있었다. 겉옷이 발목에 닿을 정도로 무척 길었는데 악수를 하느라 팔을 내밀고 있어 끝자락이 흔들렸다.

그 겉옷을 본 순간 로미오는 자신을 겁탈했던 사내가 입고 있던 검은 망토가 떠올라 흠칫했다.

“얼굴은 어쩌다 그렇게 되셨습니까?”

로미오는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조반니의 손이 단단하고 큰 데다 손아귀 힘이 세다고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웠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조반니의 얼굴은 지난번보다 턱의 윤곽과 눈, 입매가 뚜렷했지만 누군가 그의 외모에 대해 물었을 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그가 자신의 멍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로미오는 턱을 당기고 고개를 숙였다. 맞잡은 손을 놓으려는데 조반니가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손을 움켜쥐었다. 순간 어깨 통증이 강하게 느껴져 로미오는 어금니를 물며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을 풀지 못하고 조반니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손을 놓았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것인지 곧장 몸을 돌려 발레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굳이 제 소개를 하지 않아도 되겠죠? 이 술집 안에서 제 이름은 모르는 분이… 글쎄요. 몇 되지 않을 듯한데.”

장난기가 섞였지만 거짓말은 아닌 듯 들리는 조반니의 말에 발레리아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가벼운 미소로 응수했다.

“발레리아 말로입니다.”

조반니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녀의 손을 놓았다. 으레 여성들에게 그러하듯 특별히 좀 더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를 보내며 길게 눈 맞춤을 한 후 마르코를 보았다. 조반니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마르코는 조반니가 발레리아와 악수를 하는 동안 그의 옆얼굴을 보며 모두들 왜 그더러 눈이 돌아갈 정도로 잘생겼다고 하는지 이해하는 심정이 되었다.

“마르코 무소요.”

이 사내와 같은 얼굴이라면 누군들 쳐다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르코는 조반니의 얼굴을 뜯어봤다.

흐트러진 금발 아래의 반듯한 이마와 뚜렷하게 도드라진 눈썹 뼈, 숱이 적당하고 끝이 날렵한 눈썹, 시원스럽게 뻗은 눈매와 날카로운 콧대, 웃을 때마다 보기 좋게 휘어지는 입매, 강인해 보이는 턱 선까지. 그야말로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빛과 행동거지에서는 여유로움이 묻어 나왔고 예의 바르면서도 매력적인 미소는 태양 빛으로 반짝이는 그의 금발과 잘 어울렸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조반니는 양옆으로 훨쩍 벌어진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를 갖고 있었다.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여느 조각가가 정교하게 깎아 만든 대리석 조각 같았는데 이 술집 안에서는 물론이고 바치를 통틀어, 아니, 공화국 전체를 통틀어 그보다 잘생긴 사내를 찾기란 어려운 일일 터였다.

어디 그뿐인가? 심지어 조반니는 낮게 울림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갖고 있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가 느껴지는 목소리는 첫 만남에 누구에게든 쉽게 호감을 살 법했다. 이런 자라면 평생을 거리의 비렁뱅이로 살아간다 해도 분명 사람들의 입에 이름이 오르내릴 게 틀림없었다.

“이분은 저와 같은 바치 대학교 의학부 교수님이십니다. 함께 해부학서를 집필 중입니다.”

조반니는 옆자리에 앉은 여인을 가리켜 보였다. 여인은 바치 대학교 교수들의 검은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입매가 얇고 눈초리가 매서워 인상이 까다로워 보였다. 나이는 조반니보다 서너 살 많아 보였다.

“세라피나 산소네라고 해요.”

여인이 앉은 자리에서 로미오와 발레리아, 마르코를 향해 말하자 조반니가 밝은 목소리로 세라피나에게 로미오를 소개했다.

“제가 제6군단에 체포됐을 때 취조를 담당하셨던 대위님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그들을 흘끔거리던 옆 탁자의 손님 두 명이 조반니의 말에 저들끼리 쑥덕대며 귓속말을 했다.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닌데 조반니가 너무도 즐겁게 이야기하니 발레리아와 마르코가 서로 슬쩍 얼굴을 마주 봤다.

로미오 역시 어울리지 않게 유쾌해하는 조반니를 잠시 말없이 올려다봤다.

“…….”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데 있어 별다른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했다.

“로미오 알피에리입니다.”

세라피나는 로미오와 짧게 악수한 뒤 손을 놓고 발레리아와 마르코와도 악수를 주고받았다. 악수가 전부 끝나자 조반니는 싱글벙글 웃으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앉으시죠.”

남은 자리는 네 개였고 로미오와 발레리아, 마르코는 각자 앞에 있는 의자를 빼내 앉았다. 로미오는 공교롭게도 조반니의 옆에 앉게 됐는데 조반니의 왼편에 난 창이 활짝 열려 있어 그 아래로 살라티코 거리가 내다보였다. 키 작은 상점들과 구불구불하게 난 좁은 골목들이 해가 진 저녁 하늘 아래 고요하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거리 곳곳에 켜진 상야등 불빛도, 상점을 오가고 있는 사람들도 로미오에게는 전부 흐릿하게 보였다. 하늘도, 살라티코 거리도 어둑하게만 느껴졌다.

“이 자리가 세 분이 항상 앉는 자리인가 봅니다? 여급이 얘기하더군요. 술을 마시러 올 때마다 늘 이 자리에 앉는 분들이 계신다고요.”

조반니가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하자 발레리아가 대답했다.

“예, 올 때마다 항상 여기에 앉습니다.”

조반니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로미오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저와 처음 만나셨던 게 바치 대학교에서였지요? 두 번째는 취조실이었고요. 세 번째가 이곳 술집이라니 참 재밌군요. 여기 자주 오시는 편이신가요?”

“가끔 옵니다. 대개 이 시간에 말입니다.”

“오늘이 그 가끔 오시는 날들 중 하루군요.”

로미오는 조반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다고 느꼈다.

“여기선 아래층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이지요. 대위님께서도 이 자리에서 노을 지는 하늘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로미오는 순간 조반니가 자신이 시력이 나쁘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만남은 물론, 두 번째 만남이었던 취조실에서도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알 턱이 없었다.

묻지 않은 상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저는 맹인입니다. 제게는 창밖 풍경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도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로미오는 세라피나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봤다. 맹인이라는 것을 밝히면 놀라는 사람들이 으레 있었기 때문에 조반니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짐작하는데 놀랍게도 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압니다.”

조반니의 말에 로미오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저와 세 번째로 만나는 게 아닙니까?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노을을 본 적이 있으시냐고 여쭤본 게 이상하게 들렸나 보군요. 전 그저 대위님만의 노을 감상 방식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빛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게 아닌 이상 흐릿하게나마 붉은 하늘빛을 볼 수 있으실 테니까요. 맹인인 대위님께서 이 자리에서 본 노을을 어떻게 표현하실지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로미오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극히 일부만을 볼 줄 아는 맹인인 자신에게 노을이 지는 모습을 물어보는 조반니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귀가 어두운 사람에게 한여름 숲속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바스락거림에 대해 묻는 것과 비슷했다.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귀가 어두운 사람에게 그런 것을 물어볼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로미오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리자 조반니는 도리어 자신이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 * *

“그럼 임관 당시에 네베 사투리를 하셨습니까?”

탁자 위에는 매콤한 향신료를 곁들인 양고기와 뜨거운 연기에 익혀 말린 오리고기, 각종 육류와 채소를 다져 넣어 구운 파이, 꿀을 섞은 과일즙으로 양념을 한 송아지 고기, 그리고 포도주 세 병이 올라와 있었다.

다섯 사람이 시킨 음식들과 함께 여급은 치즈와 잣 향이 나는 과자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오랜만에 온 로미오 일행에게 특별히 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은 로미오 때문이라는 것을 발레리아도 알고 마르코도 알았다. 로미오는 정작 그녀가 붉은 기 도는 갈색 머리를 높이 올려 묶었다는 것 외에는 얼굴조차 제대로 몰랐지만 말이다.

“저런 얼굴로 ‘식사는 하셨시다?’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마치 남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술이 들어간 마르코는 기분 좋게 떠들어 댔다. 조반니는 로미오와 발레리아, 마르코 세 사람에 대해 질문이 많았는데 로미오는 조반니가 낯선 사람과 대화를 이어 나가는 데 능숙하다고 생각했다.

음식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레리아에게 머리 색이 아름답다고 칭찬한 조반니는 군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며 그녀에게 취미가 있는지 묻더니 마르코에게도 자신이 의사로 일하던 시절 유난히 목소리가 좋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환자가 있다며 마르코의 목소리가 그때 그 환자만큼이나 인상적이라고 칭찬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그렇군요’, ‘정말입니까?’, ‘놀랍군요.’ 따위의 가벼운 놀라움을 나타내는 말과 ‘그래서 어떻게 됐죠?’, ‘그리고요?’ 등 대답을 재촉하는 말로 대화를 이끌어 간다고 느꼈다. 덧붙여 그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칭찬하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줄곧 갖고 있던 의문을 해소했다.

세라피나는 말수가 적었었기 때문에 로미오는 세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마주 앉은 그녀와 함께 말없이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던 중 조반니가 자신에게 고향이 바치가 아니지 않느냐고 물었다. 묻는 이유에 대해 되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번 취조 때 느꼈습니다. 사용하시는 말 중에 억양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게 하나 있더군요. 그게 뭐였는지 기억하지만 무소 대위님의 표정을 보니 말씀드리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보세요, 너무 좋아하시는걸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고향이 어디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시작된 대화에서 로미오는 자신의 고향인 네베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치에서 마차로만 꼬박 사흘이 걸리는 남부 지방인 네베는 억양뿐만 아니라 철자가 조금씩 다른 독특한 사투리를 갖고 있었다.

“바치 말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고향에 대해 물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네베 말은 전부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사투리 이야기가 나오자 마르코는 로미오의 임관 당시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조반니에게 들려주었다. 조반니는 흥미로워했으나 로미오는 옛이야기가 나올 때면 늘 그렇듯 다소 멋쩍은 기분을 느꼈다.

“남부 말이 강한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 임관하시고 언제쯤 완전히 바치 말을 쓸 수 있게 되셨나요?”

“두 달쯤 걸렸던 것 같습니다.”

“두 달이요? 빨리 바꾸셨군요.”

“말로 대위님께서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로미오의 말에 발레리아가 치즈와 잣 향이 나는 과자를 집어 먹으며 웃었다. 그녀는 임관 당시 그 누구보다 네베 사람다웠던 로미오의 말투와 행동을 기억했다.

“대위가 입을 열면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늘 한 명쯤 있었으니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네베 말이 웃겼던 건 아닙니다. 반대였어요. 모두들 네베 말을 좋아했습니다. 다만 말씨를 고치지 않으면 말하는 매 순간 출신지도 함께 소개하는 격이라 대위가 곤란한 상황에 자주 처했습니다.”

조반니는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로미오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처음 생활하실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뭐였는지 궁금하군요. 특별히 기억나는 게 있으신가요?”

“글쎄요. 제가 이곳에서 이방인이라는 것 외에 달리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도시 생활을 어렵게 느끼진 않았습니다.”

“고향에 동생들을 두고 혼자 이곳에서 생활을 하셨으니 많이 외로우셨겠군요.”

로미오는 저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옛날 일들을 떠올렸다. 조반니의 말이 옛 기억들과 겹쳐져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못 했습니다만 돌이켜 보니 고향을 많이 그리워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네베에 가셨던 게 언제이지요?”

“5년도 더 되었습니다.”

“고향 생각이 많이 나시겠군요?”

“예, 네베는 바치와 비교해 날씨도, 사람들도, 먹는 음식도 다르니 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을 발견할 때마다 네베를 떠올립니다. 제가 시골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갖고 있는 습관 같은 것들 말입니다.”

네베의 풍경을 잊어 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곳이 그리웠다. 푸르게 펼쳐진 너른 들판과 언덕 아래마다 있는 작은 농가들, 그중 가장 아늑하고 따뜻했던 자신의 집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지남을 일깨웠다. 붉은색 지붕과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저녁 무렵이면 멀리서도 보이던 집 안의 촛불 빛이 서서히 잊혀 가고 있었다. 고향에 가 본 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이기도 했고 시력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눈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기 전에 네베에 가야 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 마을의 전경을 눈에 담아야 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에도 들러야 했다.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게 대위님께 이곳 생활에 대한 외로움을 덜어 주었나 보군요. 제가 지금껏 보았던 대위님의 표정 중에 가장 편안해 보이는 표정입니다. 지금 짓고 계시는 그 표정이요.”

조반니는 포도주 병을 집어 로미오의 빈 잔에 부어 주었다. 비어 있던 잔이 희끄무레한 자줏빛으로 채워지자 로미오는 조반니를 봤다.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그와 눈 맞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조반니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이 그의 눈빛 속에도 담겨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짐작하며 손을 더듬어 포도주 잔을 잡았다.

“그런데…….”

조반니는 포도주 병을 내려놓으며 로미오의 앞에 놓여 있는 접시를 가리켰다. 접시 위에는 파이 조각이 남아 있었다.

“전혀 드시질 않으셨네요.”

로미오는 포도주 석 잔을 마시는 동안 겨우 파이 반 조각을 먹었을 뿐이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로미오는 탁자 위에 놓인 양고기와 파이 접시를 차례로 봤다. 눈이 나쁜 자신을 위하여 여급은 늘 그 순서로 음식을 놓았다. 오늘 조반니와 세라피나가 시킨 오리고기와 송아지 고기는 양고기와 파이 접시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노릇하게 익은 고기 빛깔이나 입맛을 돋우는 붉은 양념 색깔은 보이지 않았다. 접시 위에 음식이 놓여 있고 그 음식이 무엇인지 알고 무슨 맛인지 짐작했다. 술집 안에는 여러 음식 냄새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양고기나 오리고기만의 독특한 냄새를 맡을 순 없었다. 접시 위에 양고기가 아니라 고양이가 올라와 있다 해도 시각적으로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필요하시다면 여기 있는 음식들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쪽으로 몸을 기울여 로미오가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얹었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가 손끝으로 입술을 문지른 그는 양고기 접시를 톡톡 쳤다.

“‘부드럽고 연한 육질’이나 ‘양념을 머금어 갈색 빛을 띠는 다리 살’, ‘육즙이 흥건하게 고인 접시’에 대해 설명해 드리면 식욕이 나실 겁니다. 대위님께는 지금 탁자 위에 올라온 음식이 얼마나 먹음직스러운지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잘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으실 겁니다.”

조반니의 말에 로미오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이었다. 볼 수 없다는 것은 식욕에 영향을 미쳤다. 냄새를 맡을 수 없을 때 입 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것은 음식의 색깔과 모양이었다. 매 식사 때마다 접시 앞에 눈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음식을 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낯선 음식일수록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이유도 당연했다.

그러나 조반니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주변에 저와 같은 맹인이 있습니까?”

로미오는 여태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순수한 궁금증을 내비쳤다. 그 순간이었다.

쿠당탕!

조반니가 의자 등받이에 올리고 있던 팔을 내리다가 무심코 로미오의 허리에 찬 검 손잡이를 건드리자 로미오가 갑작스레 놀라 몸을 움츠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난데없이 벌떡 일어난 바람에 의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조반니와 발레리아, 마르코는 물론 세라피나와 옆 탁자의 손님들까지 로미오를 쳐다봤다.

얼굴이 일그러진 로미오는 조반니의 손이 닿은 검 손잡이를 내려다보았다. 단순히 검집이 흔들렸을 뿐 조반니의 손이 허리에 닿은 것이 아니었지만 극도로 몸이 긴장됐다.

목덜미에는 소름이 돋았고 허리를 비롯한 두 다리는 경직되었다.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곳은 로사티 1번가 포목점 골목이 아니었고 방금 몸에 닿았던 것은 조반니의 손이 아니라 검 손잡이였다. 그걸 알면서도 삽시간에 호흡이 가빠졌다.

몸의 통증이 느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왜 그러시나요?”

로미오는 손으로 갈비뼈 아래를 감싸 쥐었다. 조반니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어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허벅지 근육이 경직돼 있는 데다 손끝이 떨려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잡아 일으켜 세워야 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탁자 가까이 의자를 민 뒤 도로 앉아 군복 앞섶과 옷소매를 정리하는데 마르코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위, 왜 그러나?”

발레리아도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여 로미오의 얼굴을 가까이 봤다.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바람에…….”

시선을 내려 탁자를 내려다보는데 조반니가 손을 뻗어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로미오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비틀자 조반니는 놀란 기색으로 로미오의 얼굴을 살폈다.

“안색이 나쁘시군요. 정말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로미오가 자신의 어깨를 짚고 있는 조반니의 손을 내려다보자 조반니가 손을 거뒀다. 탁자 아래로 내린 손을 주먹 쥔 로미오는 가슴이 크게 오르내릴 정도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로미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조반니는 입가를 매만지는 척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르코와 발레리아가 재차 로미오에게 괜찮은지 묻는 동안 혼자서 피식댄 그는 포도주를 마시는 척했다. 웃음이 멈추지 않자 접시 위의 양고기를 포크로 건들며 입매를 씰룩댔다.

이 상황이 몹시 재미있어 견디지 못하는 듯 연신 입꼬리를 떨던 조반니는 끅끅대며 웃고 싶은 것을 참으려고 입술을 물었다.

실상을 말하자면 어젯밤에 로미오를 겁탈한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로미오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하기야 어떻게 알겠는가? 몸에 조금만 손이 닿아도 겁먹은 새끼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라는 처지에.

“제 주변에 맹인이 있냐고 물으셨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왜 그런 것을 물어보시는 건가요?”

조반니는 양고기 한 점을 포크로 찍었다. 입에 넣어 씹으며 로미오의 옆얼굴을 구경하니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 같아서 여쭤봤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여기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음식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면 저도 식욕을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맹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몸이 건강한 이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자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듯이 선생님께서 저와 같은 맹인의 사정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과 음식에 대한 욕구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시는 겁니까?”

조반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저는 단지 대위님께서 겪으실 어려움들에 대해 상상했을 뿐입니다. 예리한 호기심이라고 해 두지요. 아니. 호기심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요. 통찰력이라고 해 두지요. 낯선 것들에 대한 통찰력요.”

조반니는 그렇게 말하며 접시 위에 포크를 내려놓고 로미오의 쪽으로 몸을 틀었다.

로미오는 조반니가 갑자기 자신에게로 몸을 돌리자 고개를 뒤로 젖히며 물러나려고 했다. 바로 옆에 앉아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는데 조반니의 몸은 컸다. 자신이 그의 등 뒤에 서면 어깨에 전부 가려질 정도로.

검은 망토의 사내와 체구가 비슷하다는 생각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계속 지켜보니 음식을 씹을 때 턱 아래쪽에 통증을 느끼시는군요.”

조반니는 가까워진 거리에서 로미오의 얼굴을 지그시 봤다. 천장에 걸린 등잔 빛에 뺨은 발그레한 것처럼 보였고 신경이 곤두서서 긴장했기 때문인지 동공은 커졌다. 긴 속눈썹은 눈을 감을 때마다 나붓거렸고 푸른 눈동자는 안이 들여다보일 것처럼 깨끗하고 또렷했다. 턱 아래에 곰팡이 같은 멍이 들어 있지만 로미오는 여전히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마치 어떤 신비스러운 존재의 사적을 그린 옛 벽화 속에서 걸어 나와 이곳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멍 때문입니다.”

로미오가 손을 들어 멍을 만지려고 하자 조반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멍이 아니라 다른 문제 때문일 겁니다. 혹시 입 안이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잇몸 쪽이 말이에요.”

아침에 장교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보다는 통증이 줄었지만 조반니의 말대로 아랫니를 비롯한 잇몸 쪽이 욱신거렸다.

“예, 오늘 낮 동안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살펴봐 드리겠습니다.”

조반니는 따라 해 보라는 것처럼 입을 벌렸고 로미오는 조반니의 입을 본 다음 그의 눈을 올려다보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쓸 정도는 아닙니다.”

“벌려 보세요.”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로미오가 곁눈으로 쳐다보니 마르코와 발레리아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조반니를 보는데 그가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어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조반니는 턱 끝을 부드럽게 잡아 좀 더 벌리게 했고 로미오는 조반니의 손이 닿자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치워 내려다가 멈칫했다.

조반니는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로미오의 입 안을 구경했다. 고르게 난 하얀 이들과 발갛고 촉촉한 혀가 보였는데 아랫니가 난 잇몸 쪽이 부어 있었다.

잇몸이 아프지 않냐고 물으려는데 입을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로미오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손안에 다 잡힐 것처럼 자그마한 얼굴과 반드러운 뺨이 언뜻 소년 같아 보였는데 자신이 바치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을 무렵 사관 학교에 다녔을 로미오를 떠올리니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의 과거도 알고 그의 알몸도 알고 있었다. 몸을 섞을 때 그가 내는 신음 소리도 알고 있었고 뒤가 얼마나 좁은지도 알고 있었다. 하얀 엉덩이에 이어 이렇게 순종적으로 입 안을 훤히 보여 주니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잇몸이 부으셨군요. 아프실 텐데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씀만 여러 번 하시는군요.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을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군의관에게 진찰을 받으셔도 좋고 약종상에게 증상을 설명하고 처방 없이 약을 얻으셔도 됩니다. 치아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

조반니는 로미오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뺨을 살짝 돌리게 해 멍도 살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던 로미오는 옆으로 고개를 튼 채 얌전히 있었다. 친절을 베푸는 상대에게 괜찮다는 말로 여러 번 거절할 수 없는 데다 뺨에 닿은 조반니의 손끝은 세심하고 조심스러웠다.

“이쪽도 괜찮군요. 오래가지 않을 듯 보입니다. 됐습니다.”

고개를 바로 하려던 로미오는 조반니가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내리며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자 그를 쳐다보았다. 몸이 긴장되는 것은 둘째치고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미묘해졌다.

흐릿하게 보였지만 조반니는 웃는 낯이었다.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 잠시 그렇게 생각했으나 곧 잊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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