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화국군 제6군단
비밀 결사 조직 ‘단테의 12인’을 색출하기 위해 창설된 루바노 공화국군 제6군단의 대위 로미오 알피에리는 사물의 형체만을 흐릿하게 인식하는 맹인이었다.
“보름 전에 해부학 강의를 하지 않고 쉬셨군요.”
취조실의 널찍한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로미오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은 공화국 최고의 일류 대학인 바치 대학교 의학부 교수 조반니 스포르차였다. 탁자 위에는 바치 대학교 교수들의 강의 기록지가 놓여 있었다.
“왜 그날 강의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전날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밤새 해부를 하느라 몹시 피곤했습니다.”
로미오를 빤히 보며 대답하는 조반니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다.
“그날 저는 암소의 뇌를 해부했습니다. 밤부터 새벽까지 비가 내린 탓에 냄새가 심해 해부를 서둘렀습니다. 동틀 무렵 제집 지하실에서 통행금지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었고요. 늘 그곳에서 해부를 합니다.”
“지난 3년간 강의를 쉰 적이 일곱 번 있으시군요. 밤새워 해부를 하고 강의를 쉬는 일이 잦지는 않으신 듯합니다.”
“해부학서를 집필 중입니다. 출판을 앞두고 있어 근래 들어 아침까지 해부를 하는 일이 많지요.”
조반니의 목소리는 마치 잡담을 나누는 것처럼 가벼웠다. 여유로운 동시에 느긋함마저 느껴졌는데 강제로 끌려온 것치고 지나치게 편안해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불안함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더듬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그는 편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한데 보름 전의 일에 대해서 무슨 이유로 물으시는 건가요? 보름 전 그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조반니가 이토록 여유로운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는 여타의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정신이상자이기…… 아니, 잠깐…… 음. 그래. 조반니가 여유로운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일단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조반니 스포르차.
그는 누구인가? 군인들에 의해 이곳 취조실로 끌려온 낯선 사내? 도시에서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는 유명인? 혐의점이 있는 취조 상대? 아니.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천재였다.
교수로서 강의할 수 있는 모든 과정을 마치려면 최소 36세가 되어야 하지만 조반니는 불과 스물둘에 교수 자격을 얻어 스물여섯 살 때까지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
교수직을 그만둔 뒤 수도인 바치에서 가장 큰 병원인 바치 병원에서 의사로 일한 그는 이후 여러 병원을 옮겨 다니다가 1년 전 루바노 공화국 정부로부터 교수직을 권유받아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 학기 단위로 계약을 하던 중 종신직을 요청받았으며 현재 보류 중이었다.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미술, 수학, 건축, 조각, 음악에도 재능이 있는 조반니는 서른다섯 권의 철학서를 출판하고 루바노 당국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공회당 건물의 벽화를 그리고 수학자들의 협회에 가입해 학교에서 쓰는 수학 교본을 집필하고 건축 고문으로 추대돼 도시의 중앙 광장에 세울 석조 분수대의 건축과 조각을 도맡아 하고 수준급의 바이올린 실력으로 바이올린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발명에도 일가견이 있어 무거운 물체를 고층 탑에서 떨어뜨려 지상에 안전하게 착지시키는 낙하 기구를 고안하기도 했고 땅속 깊이 박힌 암석과 흙을 파내는 데 쓰이는 도구를 발명하기도 했다. 설계에서 실험까지 정밀한 단계를 거쳐 탄생한 조반니의 발명품은 수십 가지에 이르렀는데 그는 발명 외에 식물학과 천문학에도 흥미를 보였고 지리학과 지질학에도 박식했으며 문학에도 재능이 있어 소설과 시도 썼다.
명석한 머리와 재능 외에도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남이라는 사실이 조반니의 유명세에 한몫했는데 도시의 많은 여인들은 남몰래 조반니를 흠모했고 많은 남자들은 그를 질투하며 머리를 금발로 물들였다.
그런 조반니가 공화국군의 부대 내 취조실로 끌려온 것은 단테의 12인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받기 때문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학교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화국군에게 붙잡혔다.
하지만 조반니는 군인들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쳐 집 안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피식대며 말했다.
“보름 전이라면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없는데 대체 왜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겁니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든 저와는 관계없는 일일 텐데요.”
탁자 위에는 공화국의 치안을 담당하는 공안국으로부터 넘겨받은 조반니의 위법 행위 전력에 관한 서류가 놓여 있었는데 조반니는 6년 전과 8년 전에 불법으로 산 시체를 해부해 재판에 회부된 적이 각각 한 번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5년 전에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방적공과 시비가 붙어 그를 때려죽인 혐의로 재판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대답을 전부 하셔야만 이곳을 나갈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은 요구군요. 그래서 질문이 무엇입니까?”
조반니는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눈으로 로미오를 지그시 쳐다봤다. 간간이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꼬리를 씰룩거리기도 했는데 머릿속으로 로미오의 성기 모양과 색깔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꺼운 철문 앞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까지 합해 취조실 안에는 모두 다섯 명의 군인이 있었다. 창이 없는 취조실은 벽에 달린 녹슨 철제 등잔 외에 빛이 될 만한 것이 없어 음침하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자칫 잘못하다간 고문실로 옮겨져 시체가 되어 이곳을 나갈지도 몰랐지만 조반니는 두려워하거나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상상 속에서 로미오의 옷을 전부 벗겨 그를 알몸으로 앉혀 놓고 있는 까닭에 히죽대느라 바빴다.
“보름 전 그날 뭘 했는지 기억합니까?”
“말해 무엇 하나요? 물론입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로미오는 등잔 빛에 흐릿하게 보이는 조반니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것처럼 눈과 코, 입술, 턱 선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조반니의 금발 머리와 바치 대학교 교수들이 입고 다니는 소매 없는 검은색 겉옷이 색깔만 겨우 구분됐다.
“밤새 해부를 한 터라 낮 동안 계속 잠을 잤습니다. 오후에는 시장으로 가 배달 일을 하는 소년에게 집까지 몇 가지 물건을 배달해 달라고 부탁했고요. 마지막으로 시장에 갔던 게 지난달의 일이라 시킬 것이 많았습니다.”
로미오는 조반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바치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마주한 자리에서 조반니가 머뭇거리거나 떠는 기색 없이 여유롭게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던 것을 기억했다.
단순히 혐의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체포 권한을 갖고 있는 제6군단이었다. 조반니는 대담한 자가 분명했다.
“배달받은 물건이 무엇인지 자세히 말하십시오.”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물건과 음식을 부탁했습니다. 밀빵 세 덩이와 달걀 일곱 개, 아르디토산 포도주 한 병, 옷에 꿸 은단추 세 개, 허리띠용 줄, 양초 하나를 샀습니다. 모두 더해 1가토를 썼고 배달 일을 한 아이에게는 배달 값으로 4바소를 줬습니다.”
더듬거리지 않고 그날 산 물건을 막힘없이 대답하는 조반니의 말을 들으며 로미오는 그의 표정을 집요하게 주시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후에는 뭘 했습니까?”
“밤늦게까지 해부를 한 것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네, 줄곧 집에 있었으니까요.”
로미오는 어렴풋하게 보이는 조반니의 눈빛을 관찰했다. 그는 자신보다 눈높이가 높았기 때문에 턱을 들어 올려야만 했다.
취조는 지금부터였다.
“비토리오 나르디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지난 여섯 달간 그가 선생의 집을 여러 차례 방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토리오 나르디는 열흘 전 단테의 12인 단원으로 의심받아 체포된 스물한 살의 청년이었다. 바치 대학교 의학부 학생인 그는 현재 고문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정부와 지도자, 국가에 대항해 공화국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테의 12인은 조직의 기원에 관한 여러 설들이 떠돌았는데 분명한 것은 창시자가 단테 피치니라는 철학자라는 것과 그가 자신과 뜻을 함께할 열한 명의 단원들을 모아 비밀 결사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과거 직접적인 민중 봉기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혁명을 꾀하던 단테의 12인은 루바노 곳곳에 지부를 설립하거나 도시 빈민들 간의 공동체를 운영하는 형태로 민중들 사이에 섞여 조직 활동을 했다. 단원들은 목수, 재단사, 문헌학자, 금은 세공사 등 직업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남녀가 섞여 있었다.
단원들 간에 위계를 갖고 입회 과정에서 엄격한 의식을 치르는 단테의 12인은 흰 가면올빼미를 조직의 상징으로 삼고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집회소를 갖고 있었다. 수도인 바치 이외의 다른 소도시에서 체포된 이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원들이 전국 각지에 퍼져 있었는데 정확한 수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전(前) 통령이었던 라파엘레 갈라시가 취임 기간 동안 서른세 명의 연루자를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장이라 불리는 대총장이 누구인지 여전히 꼬리조차 잡지 못한 상태였는데 현 통령인 카를로타 비스카르디는 취임 이래 단테의 12인의 체포와 구금에 관한 새로운 칙령을 몇 가지 내렸다. 그중에는 야만적인 고문과 화형 집행도 있었다.
루바노 공화국 정부는 단테의 12인을 반정부 비밀 결사로 규정하고 공화국의 안보를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제6군단을 창설해 단테의 12인에 연루된 자들을 색출해 내고 있었다.
공화국군은 붉은 자수로 장식된 검은 군복을 입었는데 군복 가슴팍에는 공화국을 상징하는 붉은 매 휘장이 달려 있었다. 매는 백색 방패 위에 양 날개를 펼친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방패 주위는 밀 이삭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매의 머리 위에는 황금색 태양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 매와 백색 방패는 각각 불멸과 안보의 의미를 띠었고 밀 이삭과 황금색 태양은 루바노 공화국의 풍요와 영속성을 상징했다.
“비토리오 나르디와 사적으로 만남을 가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토리오가 모종의 이유로 조반니와 만나 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조반니 역시 단테의 12인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혐의를 벗지 못할 경우 대학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 조반니는 이 자리에서 자신을 변론해야만 했다.
그러나 로미오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조반니는 엉뚱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눈이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난데없는 칭찬에 로미오의 왼쪽에 서서 턱을 치켜들고 벽을 보던 군인이 조반니의 얼굴을 흘깃 봤다. 미동 없이 조반니를 보던 로미오도 한쪽 눈썹을 미세하게 꿈틀, 한 번 움직였다.
“밤빛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눈동자입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운 눈을 갖고 계시는군요.”
“…….”
감탄이 섞인 칭찬에 로미오는 턱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불쾌함보단 기묘한 당혹감이 서린 탓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혐의를 의심받아 취조실로 끌려온 자가 감히 장교인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도 사내고 자신도 사내가 아닌가.
하지만 그뿐이었다. 눈썹 끝을 가볍게 비틀어 움직인 것이 전부였다. 로미오는 가면을 씌운 것 같은 딱딱한 얼굴로 조반니를 가만히 봤다. 별다른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시장의 한 도매상점에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에서 대위님을 닮은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작고 흰 뺨에 푸른 눈을 한 아름다운…….”
“묻는 말에만 대답하십시오.”
말이 가로막히자 조반니는 군모 아래로 보이는 로미오의 검은 머리칼로 시선을 옮겼다. 윤기 흐르는 단정한 머릿결을 바라보다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위님께서도 저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로미오는 날카로우면서도 길고 부드러운 눈매를 갖고 있었다. 갸름한 턱 선은 고운 인상이 들게 했으며 우아하게 뻗은 콧날은 끝이 날렵했다. 알맞은 두께의 입술은 장밋빛을 띠어 생기 있어 보였고 굳게 다물고 있으나 끝이 올라간 입매는 말간 두 뺨과 어울려 그림같이 보기 좋았다. 군복 목깃에 감싸인 긴 목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날씬한 허리는 언뜻 연약해 보였지만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게 편 어깨와 쭉 뻗어 탁자 위에 올려놓은 팔뚝에선 지극히 군인다운 태도가 엿보였다.
조반니는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눈이 아름답다는 칭찬에 대한 반응으로 미뤄 로미오가 엄숙하거나 권위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일 거라고 확신했다.
“오래전부터 제가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해부학만이 아닙니다. 저는 조각과 그림을 사랑합니다. 몇 날 며칠을 지하실에 틀어박혀 시체들만 보고 있노라면 살아 있는 것들이 그리워지죠. 전 뭐든 그립니다. 살아 있는 건 뭐든요. 하지만 제게 자신의 몸을 그림이나 조각의 모방 대상으로 내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다들 꺼려하죠. 이해합니다. 보여 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조각가나 화가들도 사람의 나체에 대한 관심을 숨기니 말입니다.”
어두침침한 취조실에 어울리지 않는 로미오의 아름다운 외모가 조반니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가장 시선이 가는 것은 그의 눈이었다. 그림자를 드리운 풍성한 속눈썹 아래 파랗게 반짝이는 두 눈이 놀라울 정도로 투명하고 맑았다. 진짜 보석보다 더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는 그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비토리오는 제게 그의 몸을 그릴 수 있게 해 줬습니다.”
조반니는 취조실 안의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주 천천히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저는 오래전부터 비토리오의 나체를 그려 왔습니다. 그가 제집에 들를 때마다 수십 장씩 그렸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 것과 달리 하고 있는 말의 내용이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로미오는 눈을 깜빡이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그를 응시했다. 말을 하지는 않았다.
조반니는 저명한 의과대학의 교수였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나체를 그려 왔다는 말은 그의 명성과 맞지 않을뿐더러 인간의 몸에 대한 관심을 의학적인 관점에서만 허용하는 사회 통념상 믿기 힘든 추문처럼 들렸다.
“바치 대학 의학부 교수직을 제의받은 것은 제 명성 덕에 얻은 기회였습니다. 그때 전 이미 두 권의 해부학서를 출판한 상태였습니다. 대학에서 사람의 시체로 실습하는 해부학 강의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며 본래는 책으로만 공부했습니다. 실제로 시체를 가져다 놓고 해부를 하며 강의하는 것은 제 해부학서의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실습의 중요성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좀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조반니는 로미오의 얼굴을 뜯어봤다. 로미오가 스물여섯 살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바노 남부 지방인 네베 출신이라는 것도, 로사티 3번가의 하숙집에 두 동생과 산다는 것도.
“비토리오는 제가 바치 병원에서 일할 때부터 소문을 듣고 제게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해부학 강의를 할 때면 언제나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는 열성적인 학생이었습니다. 강의가 없는 날에도 종종 찾아와 사적인 질문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지요.”
“그가 스스로 원해서 선생의 집에 드나들며 선생에게 도움을 줬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적으로 만난 이유가 그것뿐입니까?”
“네,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다른 건 없습니다.”
로미오는 턱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똑바로 고정했다. 흐릿하게 보이는 조반니의 금색 눈동자는 자신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탁자 위에 놓인 강의 일지에는 학생들의 수업 출석 여부도 기록되어 있었다. 비토리오는 체포당하던 날로부터 나흘 동안 기숙사와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와 한방을 쓰던 학생이 비토리오의 책상 서랍에서 단테의 12인의 선전물을 발견해 공화국군에 알렸고 그날 저녁 비토리오는 바치 대학 인근의 한 상점 골목에서 붙잡혔다.
취조 결과 비토리오는 자신과 단테의 12인은 무관하며 선전물에 대해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흘 동안 종적을 감춘 이유에 대해서는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방을 쓰던 학생을 조사했지만 특별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비토리오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조반니의 목소리는 한층 진중해졌다.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가 깊고 조용하게 들리자 로미오는 단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언제였습니까.”
조반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주 느리게 도로 내쉰 그는 별수 없다는 듯 단숨에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름 전 그날 저녁 무렵에 비토리오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날도 비토리오의 나체를 그렸습니다. 다른 때처럼 비토리오는 오랜 시간 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줬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우리는…….”
조반니가 보름 전에 있었던 일을 고백하자 로미오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그는 말을 끄는 조반니를 짧게 다그쳤다.
“이후에는 뭘 했습니까?”
조반니는 몸을 좀 더 앞으로 당겨 로미오에게 가까이 고개를 댔다. 솜씨 좋은 조각가가 끌로 다듬은 듯 섬세한 외모를 감상하고 있자니 그의 냄새가 궁금해졌다. 힘껏 껴안고 목덜미의 냄새를 맡은 뒤 사타구니 사이에 코를 박고 싶었다.
“서로의 몸을 열렬히 탐하며 끓어 넘치는 정욕을 채웠습니다.”
조반니의 목소리가 고요한 취조실에 울리자 로미오는 꽉 다물고 있던 입을 살짝 벌렸다.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조반니는 로미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봤다.
“…….”
“…….”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취조실 안은 서로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대위님? 제가 보름 전 그날 비토리오를 만났던 것을 비밀에 부친 이유에 대해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조반니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나체를 그린 것도 모자라 그와 동성애 행각을 벌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찍이 어떤 이들은 조반니를 두고 ‘얼굴에서 신성한 빛이 감도는 것 같다’고 표현하며 세상에 감히 그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군인들 중에서도 조반니 스포르차라는 이름을 들어 본 이들이 있었다.
로미오 역시 조반니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리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저와 비토리오의 관계가 알려질까 봐 조심스럽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로미오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조반니를 마주 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탁자 위에 시선을 두던 그는 짧게 침묵한 후 고개를 들었다.
“사적인 만남을 가지는 동안 그가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었습니까?”
“아니요. 없었습니다.”
“그가 정치 이념에 대해 불온한 말을 하거나 단테의 12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습니까?”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습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고 나면 비토리오와 저는 서로의 옷을 벗기고…… 네, 모든 것이 끝나면 비토리오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지난 몇 달간 우리가 한 일은 그것들이 전부입니다. 서로의 나체를 어루만지며 육체의 즐거움을 탐닉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비토리오 나르디의 주변 인물들 중에 특이한 자를 본 적은 없습니까?”
“비토리오의 주변 사람들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로미오는 또다시 입을 다물고 잠시간 조반니를 쳐다봤다. 자신을 향해 있는 그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가늘게 눈가를 좁혔다.
“선생께서는 비토리오 나르디가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 않은 모양입니다. 연인 관계이지 않습니까? 그가 단테의 12인과 연관이 있다는 혐의를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대위님. 아닙니다.”
“무엇이 아니라는 겁니까?”
조반니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로미오는 그가 웃는 표정을 짓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입꼬리와 눈매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저와 비토리오는 연인 사이가 아닙니다.”
조반니의 말에 로미오는 의문이 담긴 눈빛이 됐다.
“그는 제가 요구한 것을 들어주었을 뿐입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로미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반니는 지난 몇 달간 은밀한 만남을 가졌지만 비토리오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준 상대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불편해하는 기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우리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비토리오가 루바노인이 아니라 하버 왕국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해도 전 놀라지 않을 겁니다. 누구든 비밀 한 가지쯤은 갖고 있는 법이죠.”
조반니는 할 말이 끝났다는 것처럼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몸을 뒤로 젖히고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로미오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탁자 위에 놓인 강의 기록지를 내려다봤다. 백지 위에 흐릿하게 보이는 글자를 주시하며 머릿속으로 뭔가를 따져 보다가 물었다.
“보름 전 그를 본 게 마지막이었습니까? 그 이후에 다시 본 적은 없습니까?”
“그날 본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나흘간 종적을 감출 것에 대해 그가 다른 말을 하진 않았습니까?”
“아니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날 비토리오는 다른 날과 다름없었습니다.”
조반니가 실토한 비토리오와의 관계에 의문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혹여나 그가 뭔가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거짓말이란 게 믿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이야기라 더욱 의심이 갔다.
그래서 몇 가지를 더 물으려는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가까워지던 발소리는 문 앞에 멈춰 섰고 두 번 문을 두들기는 소리로 이어졌다.
“들어와라.”
문 앞을 지키고 선 군인들이 걸쇠를 풀고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소대장인 갈리에누스 솔로르사노 중위였다. 그는 머리 위로 손을 올려 경례를 해 보인 뒤 로미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취조실 안으로 들어섰다.
조반니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로미오의 앞으로 다가와 선 갈리에누스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드릴 준비를 마쳤습니다.”
갈리에누스는 조반니의 집을 수색하고 압수한 물건을 선별하는 일을 맡았다. 보고드릴 준비를 마쳤다는 말은 조반니를 고문실로 옮겨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과 같았다. 압수한 물건들에서 단테의 12인과의 연관성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로미오는 갈리에누스를 올려다보고 있던 시선을 내려 조반니에게 고정했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을 짐작했다.
“알았다. 나가 봐라.”
갈리에누스는 손을 들어 다시 경례를 하고 돌아섰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취조실 안은 고요해졌다.
조반니는 로미오가 깍지 낀 양손을 좀 더 세게 맞잡는 것을 보며 소리 없이 빙그레 웃었다.
“더 물어보실 게 남았습니까?”
로미오는 시선을 내리깔며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던 손을 내렸다. 조반니를 향해 눈을 치뜨며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내려는 것처럼 쏘아보다 표정을 풀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로미오는 사무적인 손짓으로 문을 가리켜 보였다.
“그만 가셔도 좋습니다. 갑작스레 이런 곳으로 오시게 해 죄송합니다. 조사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조반니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그는 로미오의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더니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위님.”
조반니가 뭔가 다른 말을 할 것 같다고 생각한 로미오가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자 조반니가 말을 이었다.
“제가 눈이 아름답다고 말씀드렸던 건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시원하게 뻗은 입매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로미오는 조반니의 입꼬리 부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앞서 느꼈던 기묘한 당혹감이 엄습했다.
“지금껏 대위님보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대위님께서도 대위님의 눈이 아름답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
“세상에. 설마 모르고 계신가요?”
로미오는 자신이 할 말을 찾지 못한 얼굴이 돼 있다는 것을 몰랐다.
“…….”
짧은 침묵이 흐르고, 로미오는 취조실 문 쪽으로 시선을 주며 조반니를 향해 말했다.
“그만 나가십시오.”
조반니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지그시 로미오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군인들이 문을 열어 줬지만 나가지 않고 서서 로미오를 내려다보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머뭇대거나 두리번거리는 일 없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취조실을 나갔다. 부대 밖까지 그를 안내하기 위해 군인 한 명이 로미오에게 경례를 해 보이고 문을 닫았다.
취조실 안이 다시금 조용해지자 로미오는 손을 들어 살짝 찡그린 이마를 문질렀다.
남은 일은 갈리에누스의 보고를 들은 후 그와 함께 비토리오의 고문을 담당한 클레멘트 몬테 중령에게 취조 결과를 보고하는 일이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탁자 위를 내려다보던 로미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을 더듬거려 조반니의 범죄 전력에 관한 서류와 강의 일지를 집어 든 그는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군인이 문을 열어 주자 취조실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