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별 외전. 장시현의 ‘자각의 순간’ (25/25)

특별 외전. 장시현의 ‘자각의 순간’

내게 봄은 지루하고도 남루한 계절이었다. 새로운 계절의 설렘은 온전하게 남의 일이었다. 흩날리는 꽃잎 따위를 보며 수업과 작문과 평가 따위가 내게 주어진 현실이었다. 봄이든 여름이든 따뜻한 계절은 나로 하여금 이유 모를 박탈감에 시달리게 했다.

“자. 다음은 서한 학생, 나와서 발표하세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나는 스크린에 뜬 ppt 파일의 제목을 보며 짧게 감탄했다. 저 애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저렇게 생긴 얼굴에, 그런 소문을 가졌으면서 <연인>처럼 격렬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고르다니.

“……안녕하세요.”

목소리 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애는 귀 끝이 약간 붉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화학 공학과 서한입니다. 제가 오늘 가져온 고전은 마르그라, 트?”

책의 저자도 제대로 모르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싱거운 웃음이 튀어나왔다. 반면 그의 옆에 서 있던 교수의 얼굴이 구겨지는 게 보였다. 어떡하나. 학점은 물 건너갔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입니다.”

첫 마디부터 힘겨웠다. 읽기는 읽었을까. 나는 문득 저 애의 감상평이 궁금해져 발표에 조금 더 집중하기 위하여 턱을 괴고 상체를 앞으로 뺐다.

“우선 이 책은 새드 엔딩입니다.”

그는 다짜고짜 이렇게 던져 놓고 봤다. 드라마도 아니고 문학 작품을 엔딩으로 분류, 해석한 게 신선해서 강의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는데 교수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는 누가 봐도 어디서 베껴 온 듯한 빈약한 줄거리와 소감을 읊었다. 작가 이름도 잘 모르는 그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문체가 실험적 사실주의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저 미숙한 애를 알게 된 것은 얼마 전 민재를 통해서였다. 민재의 인간관계는 넓고도 넓었고 저런 카사노바형 인간과도 무난히 어울렸다. 잘생긴 얼굴과 엉뚱한 성격. 인기가 많은 것이 당연했고 저 애 또한 그것을 자신의 청춘처럼 즐기는 것 같았다.

저 애에게선 이상한 기운이 있었다. 분명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인>의 화자인 여성 주인공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고, 역으로 나를 그 소녀에게 대입시켜 보게 만들기도 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분명히 그런 얼굴과 말투, 목소리와 행동거지를 가지고 있었다. 묘한 기분을 느끼도록 만드는.

그래서 저 애의 곁엔 여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아무리 동성애자라지만 남자인 나조차 느끼는 그것을 이성애자 여자들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이상한 점은 꼭 헤어지고 나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남을 벗겨 먹을 뻔뻔한 성격도 되지 못하면서 술을 사 달라고 조른다.

“……소녀와 남자는 그렇게 헤어지고, 남자는 마지막 통화에서 소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강의실은 고요했다. 약간 상기된 얼굴로 소원이라도 빌 듯이 경건히 중얼거리는 저 애의 목소리에 모두가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도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확신 없는 목소리로 저 애는 그렇게 자신의 발표를 듣고 있는 불특정 다수에게 고백했다. 그것마저도 그다웠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꼬리가 올라간 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것인지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눈물이 맺혔는지 그의 반짝거리는 속눈썹이 경련하고, 검은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 상태로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죽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아아. 나는 나도 모르게 단발성 신음을 내뱉었다.

스스로의 예민한 성정을 부정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저 남들과 비슷한 수준의 눈치와 기민함을 가지고 있다고, 나를 예민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단순히 내 껍데기가 만들어낸 환상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따금씩 스스로의 예민함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들이 온다.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들을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아주 외로운 기분. 저 애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는 순간 나는 속절없이 나의 성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자 친구를 바꿀 때마다 나를 찾아오고, 성향에도 맞지 않는 ‘프랑스 문학사’ 따위를 듣고, 그러면서도 내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는 저 애의 마음이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는지 그날 알았다. 나비가 함부로 꽃들 사이로 날아드는 그 따뜻한 계절에.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다짐했다. 저런 어설픈 마음 따위야 모두에게 그러하였듯이 모르는 척할 것이다.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서.

저 애가 내 입맛에 맞는 외모를 가졌대도, 저런 얼굴로 나의 욕망과 충동을 따뜻하게 달구어도, 내 앞을 아무리 오래 서성거려도.

달에 닿기까지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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