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제 5장. 충돌-(1) (13/25)

제 5장. 충돌

(1)

발가락 끝이 저릿저릿했다. 분노와 모멸감, 수치심, 그 모든 것들이 차갑게 뒤섞여 온몸에 얼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가웠다. 커피 좀 맞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디 좀 들어갈래?”

그렇게 묻는 혜주 누나를 밀어냈다.

“놔줘.”

누나가 싸늘하게 식은 내 손을 매만졌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생각이 났다. 누나를 이용했던 순간들이, 그 내 노력이 모두 부질없었다고 느껴지자 견딜 수 없었다.

웃기게도 나는 그의 앞에서 나의 성 정체성을 증명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가 혹시나 의심할까 봐. 나를 밀어낼까 봐. 끊임없이 나 스스로를 해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 여자를 사귀고 그 여자를 선배가 일하는 카페에 데려가고, 그 모든 것들이 그런 증명의 일환이었다. 등신같이 그 반대의 경우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혜주 누나는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런 여자니까.

내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는데 몸은 이미 아는 듯했다.

BRIDGE. 촌티 나는 간판을 눈앞에 두고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문 앞에 붙어 있는 CLOSE 안내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작정 문을 잡아당겼다. 잠긴 문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덜컹덜컹 문이 떨어져 나갈 듯이 흔들렸다.

선배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가 나올 때까지 이 문을 부술 듯이 잡아당기는 것뿐이었다.

투명한 문 사이로 앞치마 차림의 그가 주방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선배는 내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듯했다 이내 인상을 찌푸리곤 손을 위로 뻗어 잠금을 풀었다. 나는 그와 얇은 유리 하나를 두고 얼굴을 맞대야 하는 그 짧은 순간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직 오픈 안 했…….”

선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이 먼저 나갔다. 단단하게 쥔 주먹으로 그의 턱을 후려갈겼다. 그의 몸이 뒤로 확 쏠렸다. 휘청거리는 그를 보며 묘한 희열에 휩싸였다.

선배는 손등으로 제 입술을 한 번 쓱 쓸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무표정을 하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제가 만만해요?”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쁜 숨이 튀어나왔다.

“아무렇게나 대해도 착하게 대답하고, 다 끌려가고,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 같냐고요.”

선배는 턱을 반쯤 기울이고 나를 보다 이내 입술을 열었다.

“다짜고짜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는데 대답부터 해 주자면.”

“…….”

“너는 만만한 사람한테 술도 사 주고 차도 태워 주고 키스도 해?”

태연자약한 그를 보자 화가 마구잡이로 치솟았다. 그를 동요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만큼 배신감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인간으로서 나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드는 감정이었다.

“선배 게이 새끼예요?”

하지만 그 말에 더 타격을 받은 것은 나인 듯했다. 검지와 중지로 제 턱선을 쓸던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그저 픽 웃었다. 분노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유유히 웃는 얼굴로 그가 물었다.

“나랑 섹스한 너는 뭐 그렇게 다르니?”

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지. 뭐가 저렇게 당당한 거지. 왜 이런 순간에도 저렇게…….

“다르죠. 선배랑은 다르다고요.”

“…….”

“선배가 원래, 원래…… 그런 거였으면.”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았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마구잡이로 엉켜 통제할 수 없었다.

“나는…….”

그는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꺼내 놓은 말을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 뒤따라올 그의 대답이 무서웠고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릴까 두려웠다.

내가 남자라서 안 된다고 했으면서, 여자였으면 나를 운명이라고 느꼈을 거라고 얘기했으면서, 그는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도 모르는 것만 같았다. 나의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속이 뒤집혔다.

“왜, 게이 새끼 좋아하는 게 자존심 상해서?”

그가 다시금 비스듬히 웃었다. 나는 그의 신랄한 조소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에 무언가 턱 걸린 것처럼 아팠다.

“다…… 알면서.”

“…….”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렇게 배신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선배가 그렇게까지 잘못한 게 아닌데도 왜 이렇게 기만당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지. 나 혼자 바보처럼 전전긍긍하던 모습이 떠오르면 왜 이렇게 못 견디게 화가 나는지.

“그러는 너는.”

내 감정에 따라서 동요하듯 선배의 음성이 조금 거칠어졌다.

“너는 한 번이라도 네 입으로 네 감정, 직관적으로 얘기한 적 있어?”

그의 감정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처럼.

“아니지. 너는 이도 저도 아니었어.”

“…….”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살랑거리며 사람 신경 쓰이게 해 놓고,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았지. 나한테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고지순하게 나만 바라보면서 여자랑 사귀지 않은 것도 아니고, 딱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니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

“그래 놓고 그렇게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보이는 이유가 뭐야.”

그가 이렇게 빠르게, 많은 말을 뱉어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짜증스러운 어조에 잠시간 멍했고 그 이후론 미칠 것 같았다. 그가 하는 말들을 다 씹어 먹어 버리고 싶었다. 송두리째 부정하고 싶었다. 내 감정에 대해서 뭘 아냐고 따져 물으며 그를 비난하고 싶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이도 저도 아니었다고?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데. 나는 폭발하듯이 소리쳤다.

“선배가 이딴 데서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니까요!”

울음 섞인 발음이 엉망으로 뭉개졌다.

“학과도, 동아리도, 그 어떤 것에서도 나와 마주치지 않으니까요! 얼굴을 볼 수 없는 음식점에서, 혼자 갈 수 없는 카페에서 일하니까요! 내가 여자와 헤어진 날만 술을 마셔 주니까! 그 정도는 돼야 매일 일하느라 바쁜 선배를 만날 수 있으니까!”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을 보며 나는 흐느꼈다.

“나는 다 했어요!”

“…….”

“선배를 사랑한다는 그 말, 그거 하나 빼고.”

“…….”

“나는 다 했다고요……!”

나는 그의 앞에서 정서적으로 나체가 되었다. 그가 너무도 손쉽게 나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말 몇 마디로 나로 하여금 본심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그에게 나는 너무 쉬운 사람이었다.

나의 지저분한 고백을 들은 선배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묘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숨이 막히는 침묵이었다.

“너는 매번…….”

마침내 그가 들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란 적 없던 선물처럼 사람을 달뜨고 불안하게 만들어.”

그 말이 달콤하게 들리는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늘 매달리며 희망을 찾았으나 이제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남는 것은 이렇게 초라한 자화상뿐이었으니.

“선배 좋아한 거, 후회할 거예요.”

끅끅거릴 때마다 몸이 들썩거렸다. 울지 않고 똑바로 그를 노려보며 말하고 싶었으나 그의 철저하고도 엄격한 얼굴이 보일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안 좋아할 거예요.”

그저 치기 정도로 생각했는지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겁해서 싫어요. 치사해서 이제 안 좋아할 거예요.”

“…….”

“이제 안 좋아한다구요. 이제…….”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나를 벽으로 거세게 밀친 그가 한 손으로 유리문의 블라인드를 내리며 내게 입 맞추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밀쳤으나 그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의 뾰족한 코끝이 뺨에 짓눌렸다. 그와의 키스에서는 흐릿한 피 맛이 났다. 내가 얼굴을 때렸을 때 입 안이 터진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뜨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고 나자 눈을 꽉 감고 있는 선배가 보였다. 그렇게 사납게 내 혀를 탐하면서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촘촘한 속눈썹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도무지 그를 납득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더는 숨이 막혀서 안 되겠다 싶어 힘없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쳐대자 그가 얼굴을 조금 물렸다. 허억, 허억. 나는 강제로 오래 잠수당한 사람처럼 숨을 토해냈다. 그는 내가 주저앉지 못하도록 내 다리 사이에 무릎을 끼워 넣었다. 맞닿는 살이 옷 너머로도 열기를 뿜어냈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다시 키스할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가 미간을 강하게 구겼다.

“그렇게 줬다 뺏는다고 하면 내가…….”

그 또한 방금의 키스가 숨에 찬 듯 숨소리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의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이번엔 거부할 수 없었다.

“약이 오르잖아, 한아.”

그가 긁힌 음성으로 나의 이름을 부를 때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어르듯이 그가 나의 볼을 툭툭 쳤다. 나는 숨을 마저 고를 틈도 없이 헐떡대며 겨우 입을 벌렸다. 그가 이번엔 부드럽게 나의 윗입술을 머금었다. 말캉한 것이 입술을 빨아들이는 감촉과 소리에 정신이 나가는 것 같았다.

입술이 빨려 들어갈 때마다 들리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낯 뜨거웠다. 나는 달뜬 숨을 토해내며 그의 리드를 쫓아가기 바빴다.

“선배, 허억, 힘, 힘들…….”

내가 입술 사이 벌어진 찰나의 틈으로 그렇게 말할 때가 되어서야 그는 입술을 떼어냈다. 나를 고요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그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을 찾아냈는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이내 능숙한 손길이 뺨을 감싸고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매만졌다. 그가 그 위로 키스했다. 단순히 입을 맞댔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키스하듯이 혀를 이용해 내 뺨을 핥고 문질렀다. 혀끝의 돌기에 쓸리는 뺨이 따끔거렸다. 얼굴 전체가 애무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만, 그만해요.”

나는 탁한 숨을 토해냈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그도 순순히 몸을 뒤로 물렸다. 나를 지탱하고 있던 그의 무릎이 빠져나가자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내 눈물 맛을 되새기듯이 제 아랫입술을 혀로 핥는 선배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사람 가지고 놀아요?”

그를 때리고, 울면서 속엣말을 모두 토해내고, 숨을 못 쉴 때까지 키스하고, 그 모든 과정 끝에 나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하지만 가시지 않은 배신감과 충격, 그와 키스하던 감각들은 모두 남아 번갈아 가며 내게 찾아왔다.

“여자 친구한테 잘하라고 했다가, 다정했다가, 한순간에 나를 침대에 눕히고.”

쉰 목소리가 듣기 흉했다. 힘없이 중얼거렸다.

“알짱거리지 말랬다가, 또 잘해 주고, 남자라서 안 된댔으면서 함부로 키스하고.”

“…….”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속이고…….”

“…….”

“내가 선배랑 그 여자를 보면서 얼마나.”

“…….”

“얼마나 혼자…….”

내가 알아듣지 못했던 선배와 희윤의 모든 말들이 조금씩 윤곽을 갖추어 갔다. 그들의 말이 불친절하고 시적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은 내가 그들과 같은 상황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무지의 공간이 채워지고 나자 많은 것들이 보다 선명하게 보이고 들렸다.

모태 신앙. 희윤은 선배의 집안이 모태 신앙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쫓겨난 것일까, 제 발로 박차고 나온 것일까. 글 때문이었을까, 성향 때문이었을까. 로스쿨에 간다는 것은 글만을 포기하겠다는 것일까, 혹은 성적 지향까지 바꾸겠다는 뜻일까. 

              후자라면 유의미한 사랑 같은 게 없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일까, 혹은 성향이 바뀔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수없이 많은 생각이 저들끼리 알고리즘을 구성하며 연상의 꼬리를 물었다.

찬 바닥에 주저앉은 내 앞에 선배가 쭈그려 앉았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매정하게 열리는 입매가 보였다.

“속인 적 없어.”

“…….”

“네가 이성애자식 사고방식에 찌들어서 의심할 생각이 없었던 것뿐이겠지.”

허탈했으나 울 기운조차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나랑 희윤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그의 눈이 빛났다.

“말해 봐.”

“……싫어요.”

“신경 쓰였니?”

“말 안 할 거예요.”

입을 꾹 닫았다. 선배가 얼굴을 조금 가까이 들이밀었다. 예술적으로 빚어진 그의 콧대를 보며 나는 빌어먹게도 설레었다.

“여자 친구는 왜 사귀었어?”

“…….”

“정말로 나 때문에?”

남들이 보면 재수 없다고 할 법한 말을 그는 서슴지 않고 했다.

“햄버거집은 몇 번이나 왔니?”

“…….”

“다 말해. 네가 사랑한다는 말 대신 했던 것들.”

내 감정을 기만하고 있으면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일부러 더 입을 꾹 다물었다.

“한아, 그런 고백을 해 놓고 벙어리 행세는 너무 무책임한 거 알아?”

진이 다 빠진 와중에도 나는 그를 선명히 노려보았다.

“이제 끝이에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

“별 보러 갔던 날, 그렇게 정했어요. 안 좋아할 거라고.”

그의 눈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럼 오늘은 왜 왔니?”

그는 약간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그러나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왜 왔냐고…….

“선배가 나를 속였으니까…….”

“그래서?”

“…….”

“또 이만큼 다가와서 긁어 놓고 도망가려고?”

그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싸늘해졌다. 반대로 한쪽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자주 모순을 느꼈다. 그조차 그의 일부 같아서 아주 아름다워 보였다.

“도망을 갈 거면 제대로 가, 한아.”

“…….”

“제대로 꺼지라고.”

확 들이닥치는 한기에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입꼬리를 조금 더 위로 찢었다.

“같잖은 배신감, 그런 거 운운하지 말고.”

같잖은 배신감. 그의 말이 아프게 꽂혔다. 결국 그것조차 그를 만나기 위한 빌미처럼 이용된 듯하여.

“결국 네 감정 못 이기고 나한테 또 온 거면서 스스로 면죄부 주지 말란 이야기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까닭은 선배의 모습이 지난날 나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내게 매달리거나 화를 퍼붓는 전 여자 친구들을 앞에 두고 자기 감정은 자기 몫이라고 생각하던 나의 모습이…….

내게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이렇게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선배의 말이 다 맞다. 내 배신감은 같잖았다. 나만의 감정일 뿐이다. 내 전 여친들의 것처럼.

말을 끝낸 선배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쭈욱 멀어지는 그의 얼굴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너를 가지고 노냐고?”

선배는 어느새 다시 무표정이었다. 그는 표정을 제멋대로 바꾸면서도 그 모든 변화를 자연스럽게 소화해냈다.

“당하기 싫으면 닿지도 않을 거리에서 사람 약 올리지 마.”

그의 한쪽 눈꺼풀이 옅게 떨렸다.

“그러면 너 때문에 내가 엉망이 되는 만큼, 너도 망쳐 주고 싶어지니까.”

그는 더 이상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처음 보았던 다정하고 완벽하던 선배는 없었다.

“네 말마따나 나는 비겁한 새끼라 한 번도 네게 먼저 연락한 적 없었잖아.”

“…….”

“그러니까 이 관계는 결국 네가 키를 쥐고 있는 거야.”

차갑게 떨어지는 말에 깨달았다. 희윤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그는 예민하고, 눈치가 빠르고, 실패를 기피하며, 외롭다.

문제는 나는 그의 어리석음만 좋은 줄 알았는데 그의 비겁함마저 좋았다는 것이다.

              ***

그로 인해 처음 깨닫는 것이 많았다. 사랑은 어쩌면 곧 회귀라는 것.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이토록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지 않으리라 하는 다짐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지…….

그의 비겁함은 어른이 되는 과정의 부작용일까. 원래 어른들은 늘 그런 식으로 비겁하곤 하니까, 선배는 훨씬 일찍 철이 들었을 테고, 어쩌면 사는 게 좀 고단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남들보다 더 비겁해졌을까.

남을 이해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너무도 이기적이어서 남의 감정 같은 것에는 동화되지 않았다. 내겐 내 안위가 가장 중요했고 그 밖의 것들에게 공감하지 못했다. 선배에게 ‘운명적 사랑’이 허상이듯이 내게는 내 소문 따위가 그랬다. 내게 어떤 마음을 품었든 그것은 그 사람들의 몫이고 내겐 책임이 없다.

그렇게 믿었으나 어느새 나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배를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그를 원망하지 않음으로써 ‘그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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