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의 독립적이고 견고한 모습이 좋았다.
그를 보며 나는 ‘자유’와 ‘여유’가 인과 관계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유로운 인격체인 그는 여유가 넘쳤다. 타인이 제게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래, 그렇구나’ 하며 웃어넘기는 그 무한해 보이는 다정함.
하지만 나는 그의 어리석음도 좋았다.
강압적이고 부유한 집안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면서 인생을 가족과 한마디 상의 없이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호탕함과 그에 따르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임을 가뿐히 짊어지고 가는 그의 묵묵함이 늘 생각이 났다.
이따금 과거를 더듬는 듯한 시선이 좋았다.
술집 카운터 구석에 언제나 놓여 있는 시집 한 권은 모서리가 뭉툭하게 닳아 있었고 그는 손님이 없으면 이따금씩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첫사랑이었던 그 여자를 회상한다고 내 멋대로 단정을 짓고 나면 그조차도 멋있어 보였다.
나는 그렇게 내가 좋은 점만 봐서 그가 진실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아차릴 기회조차 없었다. 그를 자세히 들여 보지 못했다.
나는 그를 만화 캐릭터처럼 마음에 품었다. 그래서 그의 과거에 크게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는 인간이었다. 나처럼.
그도 나처럼 이면이 있고 약점이 있다. ‘걸레’라는 소문을 가지고도 혼자 정조를 지키며 순정파 놀이를 하고 있는 나처럼, 그저 완벽한 모두의 첫사랑 같아 보이던 그에게도 다른 얼굴이 있었다. 그 또한 무언가에 발목이 잡힌다. 발목이 잡혀서 포기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가장 포기할 것 같지 않았던 글을 포기한다.
그로부터 도망쳐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화장실 변기부터 붙잡았다. 코와 입으로 알코올이 역행했다. 역겨운 악취가 났다.
나는 정말 이기적이다. 짝사랑 상대마저 내 마음대로 판단했다. 멋대로 기대를 했다가 나의 상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자 도망쳐 나온 꼴이었다.
그가 참다못해 내보인 상처가 너무 뜨거워 보여서 손댈 수 없었다. 더 가까워져서 부딪히면 둘 중 하나가 폭발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이 통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위장과 함께 마음까지 전부 토해내고 비우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왜 이런 와중에도 좋지.
왜 나는 이런데도 당신이 좋을까.
그와 더 가까워지는 것이, 그를 열어 보는 것이 이토록 두려운데 왜 완전히 멀어질 수는 없을까.
속을 게워내는 내내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래도 좋아. 더 가까워지고 싶지도 더 멀어지고 싶지도 않았으나, 가까워졌다가 완전히 멀어지기를 반복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양치를 할 힘도 없어 물로 입을 헹구고 매트리스 위에 털썩 누웠다. 맥이 다 빠진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민재 형과 은지로부터 다량의 문자가 쏟아져 들어와 있었다. ‘어디야? 괜찮아?’부터 ‘집에는 잘 들어간 거야?’, ‘장시현이랑은 무슨 일이야?’까지.
당연하게도 선배의 연락은 없었다.
나는 민재 형의 마지막 문자 하나에만 답장을 했다.
[은지랑 안 사귈 거니까 형도 이제 적당히 해요.]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집에는 잘 들어간 거야? 은지가 많이 걱정하고 있어.]
몽롱한 정신으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손에 점점 힘이 빠졌다.
[이제 아무랑도 안 사귈 거예요.]
눈이 가물가물 감겨 왔다. 취기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차피 헤어져도 그를 만나러 갈 수 없다면, 누구와도 사귈 이유가 없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 한아.’ 그 다정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될 바에야…….
눈을 감자 그 앞으로 우주가 휘청거렸다.
***
다음 날 민재 형은 해장을 시켜 주겠다며 학교 주변 동태찌개집으로 아침 댓바람부터 나를 불러냈다. 나는 부은 눈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나갔다.
형은 찌개가 나오고 끓어오를 때까지 별말이 없었다. 내가 국자로 앞 접시에 생선을 덜어낼 즈음 말을 시작했다.
“어제 내가 과했다면 미안하다.”
“……아니에요.”
무덤덤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미약하게 올라왔던 화도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색이 옅어졌다.
“어제 너 가고 나서 장시현이 엄청 뭐라고 했어.”
“……선배가요?”
“어, 꾸지람을 넘어서서 거의 훈화 말씀 들었다.”
“…….”
멍한 얼굴로 민재 형을 보다가 묵묵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근데 나도 이유 없이 그런 건 아니고.”
“…….”
“은지가 네가 좋대. 근데 네가 말을 안 한대. 차일 거면 차라리 빨리 차였으면 좋겠다고, 네가 술을 먹으면 그래도 얘기를 잘한다고…….”
“……됐어요, 지난 얘기.”
민재 형은 말을 멈추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됐다. 그가 말했다.
“네가 아니면 아닌 거지.”
“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은지한테 먼저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마음 정리하라고.”
“…….”
“과에서 더 소문 나빠지면 얼굴 들고 학교 어떻게 다니려고.”
허탈감이 찾아와 피식 웃었다.
“이제 그럴 일 더 없어요.”
“…….”
“여자 그만 만날 거니까.”
형이 수저질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웬 심경의 변화야?”
“그냥요.”
“지겨워?”
“조금.”
민재 형이 찬찬히 웃었다.
“어디서 진짜 사랑이라도 찾아왔나 보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결론이에요, 그거?”
“너 같은 애들은 그런 짓거리 못 끊잖아. 계기가 없는 한.”
반박을 하고픈 마음조차 들지 않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연애랑 도박이랑 주식,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해.”
개소리를 정성스럽게도 한다. 나의 표정을 캐치한 민재 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순간의 성취감에 고무된 애들은 그거 뇌를 분해하지 않는 이상 못 고친다니까.”
“…….”
“아무튼 그 결심 오래가길 바라, 한아. 진심으로. 어제 일이 불쾌했다면 다시 한번 사과할게.”
“괜찮다니까요.”
밥을 잘 먹여 놓고 나갈 때가 되어서 민재 형은 먹은 게 다 얹힐 만한 주제를 꺼냈다.
“시현이랑은 무슨 일이야?”
“…….”
침을 삼키다 사레가 들릴 뻔했다. 애써 묻어 두었던 어제의 일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 불편했다.
“걔가 그렇게 성질내는 거 오랜만에 봐서 좀 신선했어.”
“…….”
“어제 둘이 나가서 어지간히 싸우는 것 같던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기도가 꽉 막혀 있던 감각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둘이 그렇게 친해진 줄도 몰랐네, 나는.”
“형은…… 시현 선배랑 오래 알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고등학교 때부터 알았으니까. 같은 대학 와서 친해지긴 했지만.”
“선배 요새 무슨 일 있어요?”
“글쎄, 그런 말 없던데. 왜?”
“무슨 일 있는 것 같던데…….”
일부러 말꼬리를 흐렸다. 글을 그만둔다는 것은 어쩐지 선배의 비밀 같았기에 함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글쎄, 희윤이는 알려나.”
번쩍 고개가 들렸다.
“이따 잠깐 만나기로 했는데 물어봐 줄까? 커피 한잔하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민재 형이 물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반짝였다.
“지금 어디쯤이려나.”
내가 말리기도 전에 그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어어, 희윤아.”
명랑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전해져왔고 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여기, 동태찌개집인데. 어어, 거기. 그래? 어딘데?”
민재 형이 툭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결제를 하곤 옷을 챙겨 입었다.
“주변에 있대. 나가자.”
“제가 같이 간단 말은 안 했잖아요.”
민재 형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나를 이끌었다.
희윤은 밥집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카페에 있었다. 얼떨결에 그곳까지 끌려간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희윤을 발견했다.
먼저 다가간 것은 민재 형이었다.
“천희윤.”
희윤은 민재 형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김민재! 얼마 만이야!”
희윤은 어떤 여자와 같이 있었다. 긴 머리의 뒤통수가 보였다. 희윤은 생글생글 웃으며 상대에게 뭐라 뭐라 말했고,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쉽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곤 우리를 스쳐 지나가 카페 밖으로 나갔다.
“누구야?”
민재 형이 고갯짓으로 물었다.
“아는 동생.”
“예쁘네. 남자 친구 있어?”
희윤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다시 풀어졌다.
“신경 꺼, 민재야.”
완벽한 모양새로 웃은 희윤이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 둘이 처음 보지? 이쪽은…….”
“……서한 씨 아니에요?”
나는 모자 아래의 얼굴을 애매하게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둘이 알아?”
“장시현 때문에 얼굴 몇 번 봤어.”
“잘됐네. 안 그래도 걔 땜에 데려왔어. 시현이 요새 무슨 일 있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어제 한이랑 시현이랑 싸웠어.”
“근데?”
“힌트 좀 달라고. 네가 걔한테 유일하게 특별한 사람이잖아, 희윤아.”
희윤이 픽 웃었다. 민재 형은 커피를 주문하고 오겠다며 나를 남겨두고 사라져 버렸고 나는 말없이 희윤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싸웠는데요?”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놓았다. 흐음. 희윤이 콧소리를 냈다.
“남자들 싸움이야 한번 치고받고 하든지 아님 허심탄회하게 술 한잔하면 끝날 그런 일인데, 장시현이 그런 스타일이 아니긴 하죠? 서한 씨가 원하는 화해도 그런 류의 화해는 아닌 것 같고…….”
“…….”
“나한테 무슨 말이 듣고 싶어요? 사람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구?”
뾰족한 말과는 다르게 희윤은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뼈가 있는 말을 농담처럼 물 흐르듯이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민재 형이 끌고 와서 어쩔 수 없이 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비겁해 보였기에. 다만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선배한테 무슨 일 있어요? 뭔가 아는 게 있으면 알려 줄 수 있는지…….”
“…….”
“민재 형 말마따나 선배한테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하니까요. 희윤 씨가.”
희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정말 그렇게 믿는구나. 내가 걔한테 특별하다고.”
“…….”
“서한 씨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요.”
“…….”
“못됐네, 장시현.”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듣고도 기분이 미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제가 뭘 모르는지 알려 줄 거예요?”
“…….”
“아닌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희윤이 한쪽 눈썹을 구겼다. 팽팽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기분 상했어요?”
“…….”
“그냥 서한 씨가 조금 걱정돼서요.”
“…….”
“나중에 너무 큰 배신감을 느낄까 봐.”
남에게 잘 웃어 준다는 민재 형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희윤은 표정을 구기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화도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고 기다리자 생긋 웃으며 음료를 빨아 마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시현한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죠? 나도 잘은 몰라요. 걔가 남한테 자기 얘기 흘리고 다니는 타입이 아니라서.”
“…….”
“얼마 전에 뭐…… 글 때려치우고 로스쿨이나 준비한다고 했었는데.”
로스쿨?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로스쿨이라니. 과학고 출신 공과대 학생인 내게는 머나먼 이야기이기도 했다.
“근데 그런 얘기는 문창과 애들이 ‘밥 먹었니?’처럼 달고 사는 말이니까요. 나 재능 없어. 글쓰기 싫어. 진로 바꿀 거야.”
“…….”
“물론 시현이한테는 단순히 그것 이상의 의미겠지만.”
희윤이 선배를 ‘시현이’라고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이해 못 한 얼굴이었는지 희윤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다시금 설명을 시작했다.
“걔가 자기 가족들이랑 사이 안 좋은 건 알죠?”
“……들었어요, 민재 형한테.”
“걔네 집안이 법조계 집안인데, 아버지 부장 판사, 형은 검사에……, 죄다 모태 신앙이고.”
모태 신앙인 게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잠자코 희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걔가 집에서 인정을 못 받았어요. 그냥 없는 자식이었지.”
“…….”
“공부를 못 했으면 몰라. 고등학교 때도 전교권이었다고 하고 대학 와서도 학점도 좋았으니까, 또 성격도 괜찮은 편이고 인기도 많고, 그러니까 부모님 입장에선 더 이해가 안 됐겠죠.”
“문창과에 가겠다고 하는 게요?”
희윤이 살풋 웃었다.
“그것도 그거고……, 여러모로요.”
“…….”
“그렇게 집안이랑 절연하고 지금까지 자존심 하나로 버텼는데.”
“…….”
“로스쿨에 가겠다는 건, 걔 입장에서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거예요.”
바보처럼 그 말에 마음이 아팠다. 선배가 그 고난의 시절을 어떻게 버텼는지 상상이 되어서였을까. 밥 먹을 시간도 없어 가게 문을 닫고 남은 음식들을 대충 입에 욱여넣던 모습이 생생했다.
“왜…… 글을 그만두는데요?”
잠시 뜸을 들이며 나를 바라보다가 그가 물었다.
“서한 씨 과가 어디죠?”
“화학 공학과요.”
“거기 사람들은 뭐 되고 싶어 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내가 대답하자 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근데 우린 아니에요.”
“…….”
“여긴 9할이 작가로 밥 벌어먹겠다고 들어오는 애들이에요.”
나는 멍하게 희윤의 눈을 바라보았다. 예쁜 눈매였다. 상냥하고도 매력적인.
“그런데 문창과는 우리 학교에만 있나? 전국에 문창과가 얼마나 많은데. 거기 애들도 다 작가 하고 싶어 하고. 그런데 순문 입지는 계속 좁아지고.”
“…….”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못 버티는 곳이에요. 아무리 좀 쓴다 하는 장시현이어도.”
나는 문득 선배의 글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문학과는 담을 쌓은 나지만 그의 글을 읽고 칭찬하는 것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다면 그는 글을 그만두지 않을까.
그런 내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희윤은 말했다.
“굳이 그거 말고도 걔 상황에선 더 복잡한 계산도 많이 있을 거고……. 4학년이잖아요. 걔한텐 지금이 로스쿨 준비할 마지막 기회예요.”
섬세하지 못한 나의 감성으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었지만 희윤은 지치지 않고 내게 가르쳐 주었다.
“무슨 뜻이냐면…….”
“…….”
“걔가 그 잘난 자기 집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구요.”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 따위가 그의 글을 읽는다고 무엇도 바꿀 수 없음을. 그렇게 소꿉장난 같은 일이 아님을.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요.”
조곤조곤한 희윤의 목소리는.
“걔 외로운 애라고.”
나를 파도처럼 고요히 침잠하게 했다.
민재 형은 두 손에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나는 얌전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었다.
“둘이 얘기 좀 했어?”
“내가 힌트 많이 줬지.”
“그래? 근데 얜 왜 모르겠다는 얼굴이야.”
희윤이 내 표정을 한 번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과생이라 그런가? 눈치가 좀 없는 것 같아. 원래 공대 남자들 좀 그렇지 않나?”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았다. 눈치 없다는 말. 그런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아닐걸?”
민재 형이 나를 대신하여 부정했다.
“한이는 오히려 눈치 없는 척을 하는 편이지. 여자 경험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다행이구. 둘이 삽질할까 봐 걱정이거든.”
희윤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다시 웃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장시현도 눈치 없는 편은 아니니까.”
“…….”
그제야 나는 삽질을 한다는 둘이 나와 선배를 일컫는 말임을 알았다. 대답하기가 어색해 가만히 앉아 있는데 타이밍 좋게 민재 형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희윤이 너 대체 뭐 하다 온 거야?”
“놀았다니까, 그냥.”
“한국에도 놀 데 많은데 굳이 외국까지 나가서? 도피성 아니고?”
나는 기막혀하는 희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얼굴조차 예뻤다. 선배가 반할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내가 대체 뭐로부터 도피를 해야 되는 건데?”
“너 갈 때 딱 장시현 제대했잖아.”
희윤이 질색했다.
“상상력 그만 발휘해, 김민재. 네가 나 대신 문창에 왔어야 하는 건데.”
“글 쓰는 애가 글도 안 쓰고, 뭐 하는지 이메일 한 통 없고.”
“어구, 서운해쪄요?”
희윤의 키득대는 소리에 민재 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희윤은 아랑곳 않고 기지개를 한 번 켰다. 나른한 고양이처럼.
“나 가서 연애했어.”
스탭을 밟는 무용수처럼 가뿐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완전 찐하게.”
민재 형은 믿지 않는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지만 나는 지난번 희윤이 내게 주었던 대답이 떠올랐다.
‘한국에 왜 돌아왔어요?’
‘사랑이 끝나서요.’
민재 형은 커피 잔을 탁 내려놓으며 항변했다.
“문창과인 네가 말도 안 통하는 외국 남자랑? 말이 되는 소릴.”
“가서 만났단 말은 안 했는데.”
희윤은 내내 웃는 낯이었으나 미세하게 남은 씁쓸함이 그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운명의 상대인 줄 알았지 뭐야.”
기분이 이상했다.
희윤이 선배와 겹쳐 보였다.
***
그 주 목요일, 나는 햄버거를 먹었다.
선배가 일한다는 프랜차이즈에서.
그릴에서 햄버거 만드는 일을 하는 선배는 카운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내가 온 줄도 모를 것이고, 나 또한 내 손에 들린 햄버거가 그가 만든 것인지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만들었으리라 멋대로 믿으며 먹었다.
이 햄버거 집에서의 나의 애정은 그렇게 뿌리 내렸다.
미련하고 희박한 희망 한 줄기로.
“안녕하세요.”
나의 인사말에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알아본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럴 만도 했다. 목요일마다 카운터에는 같은 아르바이트생이 있었고 나는 시간이 남는 목요일엔 꼭 여길 왔으니까.
“오늘도 더블 치즈 세트로 드릴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여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드시고 가시고요?”
“……네.”
알바생이 눈에 띄게 나를 반가워하는 얼굴이라 나도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누구든 나를 반겨 주는데 그게 누군들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그는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가 담긴 쟁반을 내밀며 자주 오시는 단골이라 감자튀김을 많이 담았다며 속삭였다.
나는 사실 감자튀김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감자튀김은 보통 카운터 아르바이트생이 튀기니까. 먹을 일말의 이유조차 사라진 셈이다. 하지만 나는 아르바이트생의 친절이 감사해 기다란 것들을 여러 번 씹어 먹었다.
이곳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햄버거 속의 양상추를 오래오래 씹노라면 내가 선택한 이 초라함이 꼭 낭만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나의 낭만을 스토킹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말이다.
나의 낭만은 너무도 소소하고 용기가 없어 고작 그의 손길이 닿았길 바라는 햄버거 따위를 먹는 것이 전부다. 비겁하고 이기적이어서 여자와 헤어졌다는 명분이 있어야만 연락을 한다.
함께 외국으로 떠났다는 희윤은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운명의 상대인 줄 알았지 뭐야.’
어느 정도 운명이라고 생각해야 그럴 수 있을까.
희윤은 보면 볼수록 나와 너무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잘 웃고, 너무 잘 웃어서 탈이고, 거침없고, 하지만 섬세하고, 어른스럽고…….
선배가 그런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하니 애써 감춰 두었던 울적함이 다시 솟았다. 선배는 꼭 자기 자신을 닮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희윤과 선배는 내가 예측할 수조차 없이 많은 공통점을 가졌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랑을 했겠지.
햄버거를 다 먹고 빈 껍질을 대충 구겨 놓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장시현 오늘 본가로 갔어요.]
[로스쿨 얘기 꺼낼 예정인 듯함.]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 하지만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카페에서 만났을 때 희윤과 나는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아니, 희윤이 일방적으로 나의 전화번호를 가져갔다. 희소식이 있으면 알려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말하는 ‘희소식’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해 볼 수 없었는데, 이게 도대체 뭐가 희소식일까.
선배가 결국 이 햄버거집 안에 없으며, 내가 먹은 햄버거는 선배가 만든 게 아니라는 것만 확인 사살 당한 나는 급속도로 속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선배가 없다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햄버거고 감자튀김이고 지겨워 죽겠다. 미리 말 좀 해 주지. 그럼 뼈해장국을 먹으러 갔을 텐데. 어쩐지 평소보다 햄버거가 맛이 없다 했다.
내가 답장이 없자 희윤이 다시 문자를 보내왔다.
[망하길 빌어 봐요. 어린 양이 무사히 가족의 품에 안착할 수 없게 해 주세요. 아멘.]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희윤이 그날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내게 전화를 건 것은 내게 꽤나 운명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내 핸드폰은 전 여자 친구들의 테러로 인한 특단 조치로써, 1시가 넘으면 방해 금지 모드가 작동해서 그가 몇 번이고 전화를 했대도 받지 못했을 테니까.
“여보세요.”
-서한 씨.
반쯤 잠들어 있던 나는 희윤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조급하게 튀어 나갔다.
“선배한테 연락 왔어요?”
나는 내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선배의 전 여친에게 그의 소식을 훔쳐 듣는 일이었으니.
-음…….
희윤은 말을 길게 끌었다. 그럴 성격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어떤 방면으로든 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그가 그렇게 말했기에 나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한 씨한텐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왜요?”
난감한 듯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 질 나쁜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 주셨으니까?
“…….”
-동지를 잃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진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서…… 사실 지금 좀 당황스러워요.
주절주절 희윤이 난처한 기색으로 늘어놓았다. 내겐 한계였다.
“죄송한데 알아듣게 말해 주세요.”
-학생회관 204호, 거기가 우리 과방이에요.
“…….”
-거기 지금 시현이가 혼자 있을 거예요. 나랑 거기서 만나기로 했거든.
희윤이 내게 그걸 알려 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본능적으로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가족들이랑 이야기가 잘 안 풀린 것 같더라고요. 괜히 찔려서 자세히 묻진 못했지만.
“선배가 글을 그만두는 일이 희윤 씨 입장에서 배신인가요?”
희윤은 잠깐 말이 없었다.
-걔랑 나는 원래 항상 서로를 배신하는 사이예요.
“…….”
-한배를 타고 있지만 언제든 뛰어내릴 준비가 되어 있죠.
선배와 그를 한곳에 모아 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면 나는 모른다고. 뭔 소린지. 문창과 외부인과 대화할 땐 한국어로 얘기하는 버릇을 들여 달라고.
-걔랑 내 사이를 구구절절 서한 씨한테 말할 필요는 없고……, 내 조언은 여기까지가 끝. 더는 안 알려 줄래요. 질투가 나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그에게 나의 마음을 들켰을까 해서.
-과방 비밀번호는 문자로 보내 줄게요.
내가 대신 가도 되는 것이냐 묻고 싶었는데 희윤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내가 가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떠올려 보았다. 희윤과 선배의 약속이기도 했고, 선배가 내게 알짱거리지 말라고 하기도 했고, 남의 과방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게 불편하기도 할 테고…….
하지만 가야 할 이유, 그 한 가지를 져버릴 수가 없어서.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 웃음이 너무 그리웠고.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며 나는 천천히 걸었다. 선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가족과 이야기가 잘 안 되었다는 것은 무슨 얘길까. 글을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는데 잘 안 될 일이 뭐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비참한 그림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 그림을 선배에 대입해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선배의 세계는 너무 복잡하고 희미했다. 나는 그가 좋지만 그의 세계가 단순해졌으면 좋겠다. 그게 더 살기 좋으니까. 마음이 편하니까. 그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너무 복잡하지 않게.
학생회관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요했다. 이따금 기계가 작동하며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뿐,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었다. 계단을 오르며 나는 지금 이 장면이 공포 영화와 로맨스 영화의 중간쯤에 있다고 생각했다.
‘문예 창작’의 팻말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일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손가락이 굳은 듯 뻣뻣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나는 그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
문창과 과방 안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아무도 청소를 안 하고 어지르기만 하는지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웠다. 교재로 추정되는 온갖 국문학 서적들부터 소설집들까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헌책방에라도 온 듯 낡은 책 냄새가 콧속 가득 차올랐다.
나는 발밑에 채는 책 두 권을 곱게 접어 들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소파 위에 선배가 앉아 있었다. 검은 슈트 차림의 그는 한 손으로 제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희윤이니?”
꽉 잠겨 있는 음울한 목소리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짙은 눈썹부터 날카로운 눈까지가 순차적으로 빛 아래 드러났다. 그의 서늘한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몸을 떨었다.
“서한.”
물음표가 아니라 마침표. 그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나의 존재를 의심하듯이.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
내가 말문이 막힌 것은 선배가 불청객인 내게 적의를 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차마 상상할 수 없었던 그 모습 그대로,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새 살이 빠졌는지 튀어나온 눈썹 뼈가 그의 인상을 더더욱 단단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에게서는 거친 남자의 향기가 났다.
그리고 저 눈빛.
혀끝을 얼게 만드는 잿빛의 시선.
숨이 턱턱 막혔다. 내가 입만 벙긋거리고 서 있자 그의 미간이 더더욱 죄어들었다.
“내 말 안 들려?”
“희, 희윤 씨가…….”
말을 더듬은 것은 기필코 고의가 아니었다. 내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그가 짜증스럽게 하아, 한숨을 토해냈다.
“희윤이가 또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네.”
선배는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다정한 말이었으나 이상하게 욕설처럼 들리는 어조였다. 그의 살벌한 기운이 나를 거세게 짓눌렀다.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도 그는 차갑게 말했다.
“내 눈에 걸리적거리지 말라고 얘기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죄송해요.”
상사에게 혼나는 신입 사원처럼 기죽은 얼굴을 하자 그가 감정을 억누르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겐 꼭 속삭임처럼 들렸다.
“너는 왜…….”
“…….”
“꼭 선물처럼, 사람을 쫓아다녀?”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그대로 내쫓길 분위기였다.
나는 그제야 지금 이게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내게 사안을 전해 주던 희윤이 너무 태연하고 명랑해 보여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줄 알았다.
“선배…… 괜찮아요?”
나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다가가서 그의 이마를 짚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발이 딱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선배가 피식 웃었다. 그가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 상태로 고개만 돌려 나를 보았다. 앞머리가 쏠리며 단단한 이마가 조금 드러났다.
“뭐가?”
그가 비스듬히 웃었다.
“희윤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니?”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저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할 질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더 궁금해지네.”
선배의 목소리를 그대로 녹음해서 들려주고 싶었다. 이 목소리를 듣고도 대답할 마음이 들겠냐며. 당장 질질 끌려 나갈까 무서워 죽겠는데.
“희윤이 성격이면, 뭐라고 했으려나.”
희윤이, 희윤이. 선배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누군가 심장을 긁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내게 보여 줬던 그의 다정함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이며, 그에게 특별한 사람은 따로 있다는 생각에.
“내가 우리 집 애물단지였는데, 정신 좀 차려 보겠다고 글 같은 건 이제 그만두겠다고 했는데도 거부당해서 꼴만 우스워졌다고?”
“……그렇게 얘기 안 했어요.”
놀랍게도 내게선 차분한 목소리가 나왔다. 떨림을 억누르려고 애쓴 결과였다.
“그냥, 가족들하고 이야기가 잘 안 풀렸다고. 근데 선배가 얼마 전에 글도 그만둔다고 하고.”
“…….”
“그럼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래서 위로해 주고 싶었어요…….”
“어떻게 위로해 줄 건데?”
그가 삐뚜름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몸으로?”
이토록 엇나가는 그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천근 같은 발을 한 발자국씩 그에게로 옮겼다. 그는 내가 코앞에 올 때까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선배가 원한다면요.”
그 말에 그가 얼굴 근육을 움찔 떨었다. 그러곤 이내 조소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자신 있나 보네.”
그가 느릿하게 소파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남자랑도 제법 할 만했나 봐, 한아.”
그런 말에는 동요하고 싶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얼굴이 더욱 초췌해 보였다.
“너 별로던데. 잘 못하더라.”
솔직하고 담백한 평가였다.
“……많이 안 해 봤으니까요.”
그가 나의 말을 안 믿을 확률이 더 높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에게 솔직하고 싶었다. 그가 처음이었다는 말까지는 못 하더라도, 더 이상은 경험이 많은 척, 능숙한 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배는 나의 소문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말해 줬으니까.
그의 눈썹이 위로 꿈틀 솟았다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금방 늘 수 있어요.”
머리는 좋으니까……. 배움에 있어 습득이 느리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선배는 그 피폐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 한쪽 입꼬리를 올려 나를 비웃었다.
“그래?”
그가 나 보란 듯이 제 허벅지 위를 툭툭 쳤다. 무슨 사인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차갑게 말했다.
“그럼 이리 올라와 봐.”
“……네?”
“못 알아듣니?”
“…….”
“올라와서 나한테 키스하라고.”
만회할 기회 줄 테니까.
잠시 동안 모든 생각이 멈추었다. 하지만 선배는 더는 나를 재촉하지 않고 그저 지긋이 바라보았다. 키스를 하든지, 나가든지 둘 중 하나는 하라는 눈으로. 내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나를 요소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나는 천천히 소파 위를 기어 올라갔다.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가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길고 하얀 목에 팔을 감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 숨을 쉬기가 어려웠는데, 나와 달리 선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의 숨결은 조용하고 미동이 없었다. 나의 것과는 다르게. 나는 요동치는 숨소리를 숨기기 위해 그에게 서둘러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다소 거칠게 맞물렸다.
처음엔 멀뚱히 앉아 있기만 하던 선배는 그의 윗입술에 닿은 내 혀끝이 머뭇거리자 순식간에 고개를 돌려 각도를 바꾸었다. 입 안으로 파고들기 좋은 각도였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숨결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미끈한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모조리 앗아 갔다.
나는 내가 심각한 산소 부족 상태에 있다고 느꼈다. 잠깐 숨을 쉬려고 했으나 그의 혀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선배의 손이 느릿하게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얇은 니트 속으로 파고들었다. 옆구리를 쓸어 올리는 간질간질한 손짓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와의 입맞춤은 너무도 달콤했다. 방금까지의 싸늘함이 싹 잊힐 만큼 부드럽고 축축했다. 나를 더듬는 손가락의 움직임 또한 악기를 다루듯이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하지만 일순간 그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나를 밀어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반듯한 콧날과 선명한 턱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고개를 돌려 버린 것이다.
나는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제가 많이 못했어요?”
하. 한참을 말이 없던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
“네 잘못 아니라고.”
“…….”
“너 그렇게 못하지도 않고.”
그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술이 다시금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그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나의 허리를 완전히 밀어내 버렸다.
“여기서 너랑 이러고 싶지 않아.”
“…….”
“다른 사람들 손때 묻은 이런 데서 너 건드리고 싶지도 않고…….”
나를 소파에 우두커니 남겨 두고 선배는 일어서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 주변을 맴돌았다.
“한아.”
그가 지친다는 듯이 나를 불렀다.
“오늘 본가에 가서 로스쿨 가겠다고 말했어.”
“…….”
“정말로 그만두고 싶어. 글도, 이런 짓거리도. 늦게까지 일하는 것도 이제 지겹고.”
“…….”
“섹스도 지긋지긋하게 해 봤어. 별것도 없다고 단언했는데.”
선배가 엄지손가락으로 나의 입술을 문질렀다. 흔적을 닦아내듯이.
“키스 하나 제대로 못하는 너한테 나는 왜.”
“…….”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선배를 앞에 두고 나는 인형처럼,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저한테 흔들리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바보처럼 물었다. 바보처럼 보이지 않고 싶었으나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나는 선배의 앞에서는 늘 그러하니까.
“안 되지, 한아.”
선배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너는 나를 쓰고 싶게 하니까.”
나는 이 울렁이는 감정을 죄다 토해내고 싶었다. 목구멍에서 역류하기 일보 직전의 뜨거운 말들을.
“그리고 너는 남자잖아.”
하지만 선배의 그 말에는 그저 울고만 싶어졌다.
“그럼, 그러면…….”
사고가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튀었다.
“저랑은 왜 잤어요?”
성별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 순간 누군가 필요했던 거라면.
“저를 더 빨리 만났다면 좋았을 거라는 말이…….”
나는 그저 그에게 있어 대용품이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
“희윤이 돌아와서 그런 거예요?”
자꾸만 그런 나쁜 생각이 들었다.
선배는 곧바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나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이어 가게끔.
“희윤이에 관련해서는…… 그렇게 감정적으로 생각할 것 없어.”
피로가 가득 묻어 있는 얼굴로 마침내 그가 답했다.
“섹스는 그냥 아무하고나 하는 거니까.”
꼬이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의 뇌는 자꾸만 부정적인 쪽으로 사고 흐름을 끌고 갔다. 섹스는 누구와도 할 수 있고, 감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글은 왜 그만두는데요?”
따지듯이 물었다. 이번엔 금방 답변이 돌아왔다.
“별것 없으니까.”
“…….”
“뭐 그렇게 대단히 황홀한 섹스, 인생을 바꿔 놓을 연애, 그런 건 없더라.”
“…….”
“우연히 내게 찾아오는 운명 같은 사랑? 다 허상이야, 한아.”
“…….”
“하루 종일 그놈의 같잖은 사랑에 대해 탁상공론하고, 쓰고, 다 별것 없더라.”
몰랐는데 그의 인생관은 꽤 냉소적이었다.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학과에 와서 등록금을 위해 매일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치고는. 혹은 그랬기 때문에 냉소적으로 변했든가.
“사랑 같은 게 없다고, 내가 계속 그렇게 믿어야…….”
그의 음성이 한숨처럼 흩어졌다.
“그래야 새 인생 살지, 나도.”
가슴 한편이 무너지듯이 시큰거렸다. 나는 묻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요, 선배? 로스쿨 가서, 글도 안 쓰고, 사랑 같은 건 없다고 믿으면서…….
그렇게 새 인생을 살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묻지 못했던 것은 그가 너무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다 지긋지긋하다는 그의 말이 너무 잘 이해가 돼서. 일주일 내내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은 하루 종일 글을 써서 교수에게 까이기만 하고, 그런 삶의 피로도가 어땠을지, 섬세하지 못한 나조차도 너무 잘 알겠으니까.
그래서 나도 그에게 늘 조심스러웠던 거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만 겨우 약속을 잡고, 몰래 그를 창문 너머로 훔쳐보고, 그가 나의 햄버거를 만들었으리라 정신 승리 하고.
그렇게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한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를 너무…….”
나의 사랑이 한 번도 그에게만은 이기적인 적이 없었음을.
“황홀하게 만들지 마.”
그러므로 이번에도 나는 결국 그의 뜻대로.
그를 좋아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