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분리 공정 수업 시간에 은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그는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치고 가방을 내려놓은 후 내게 제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뭔데.”
“우리 사진 찍혔대요.”
화면에 떠 있는 것은 저번 주의 사진이었다. 취한 내 팔을 붙잡고 나를 끌고 가는 은지의 모습이 담긴. 내막을 아는 나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었지만 우리 둘의 뒤쪽에 선명하게 떠 있는 MOTEL 표시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하도록 만드는 그런 좆같은 사진이었다.
문득 어제 혜주 누나의 말 중 한 부분이 떠올랐다. 여자들에 둘러싸여 산다고 했었나. 나의 의도와 관계없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막 물어봐요, 우리 사귀냐고.”
“야, 너 입 좀.”
나는 서둘러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직 수업 시간까지 시간적인 공백이 제법 남아 우리 이야기가 들릴 만한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좀 작게 말해.”
“그래서 그냥 제가 오빠 좋아한다고 했어요.”
“야……!”
나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은지는 생글생글 웃었고, 나는 이 애가 조금 무서워졌다.
“오빠 성격 나쁜 거 알겠는데, 그런다고 상처받고 울고불고하는 거 제 스타일 아니라서요.”
“그래서, 한 번 좆돼 봐라?”
“비약하지 말고요. 서로 이용하는 관계, 그거 하자구요.”
“…….”
나의 무표정에도 그는 끄떡없이 그저 웃었다.
“오빠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손해는 네가 보겠지. 내 평판은 이미 심해 저 아래인데. 다만 너로부터 얻을 것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네가 얻는 건 뭔데?”
“음.”
이걸 말해, 말아? 은지는 딱 그런 얼굴이었다가 전자로 마음을 정했는지 표정에서 망설임을 지워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여우인 건지 모르겠지만 저 정말로 오빠 좋아하거든요?”
“어?”
“좋아한다구요.”
머리에서 종이 울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인지 순간적으로 입을 헤 벌렸다. 은지가 내 턱을 툭 쳐서 입을 닫아 주었다.
좋아한다고.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쪽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쪽이라. 게다가 여기는 강의실이었다. 고백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너…… 선배 좋다며.”
“관심 있다 그랬지, 좋다고 안 했거든요. 그땐 둘이 엄청 친한 줄 알았어요.”
“뭔 소리야.”
“이해 못 했으면 됐어요. 설명하기 귀찮거든요.”
망나니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부담스러워 죽겠다는 얼굴 하지 말아 줄래요?”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인데.”
“오빤 자기 감정도 잘 모르나 봐요.”
“…….”
분명히 제가 맞다는 듯한 확신에 찬 얼굴로 은지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나는 혼자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남자 친구 사귀어 본 경험은 있어?”
스무 살이라니. 새내기라니. 그래, 솔직히 다른 것보다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강했다. 누군가의 처음이 되기에 나는 좋은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상대의 한…… 열다섯 번째 남자 친구이고 싶었다.
“있기는 있죠. 한두 번?”
“곤란한데.”
“왜요? 오빠 경험 없는 여자 좋아해요?”
“아니, 난 첩 하고 싶은데.”
“…….”
“바쁘고 잘나가는 여자의 세컨드나 써드 정도가 내 목표야.”
은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빠는 항상 상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사람을 긁네요.”
“…….”
“그렇게 긁히면 더 오래 남는다구요.”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곤란해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은지를 통해 이득 볼 게 없었다. 내게 있어 만나선 안 될 여자의 모든 조건을 갖춘 이 애랑 헤어졌다간 나머지 2년이 내내 고달플 것 같았다.
“잘 생각해 봐요. 분명히 나 이용할 구석 있을걸요?”
하지만 은지가 그렇게 말한 순간 나는 얼마 전 새벽에 선배의 집 앞에서 선배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 친구랑 헤어지면 연락은, 그건 해도 되는 거죠. 그 정돈 해도 되는 거죠, 선배.’
‘……그래.’
나는 은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좋다는 사람치고는 너무 태연하고 당당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 그런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아이. 어쩌면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해도 쿨하게 오케이를 외칠 것만 같은 아이.
“……생각해 볼게.”
그런 아이라면 조금 이용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
내가 은지의 이용 가치 계산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나를 불러냈다. 선배가 일하는 술집, 브릿지였다.
분명 농구부 소수 정예 사모임이라길래 나갔더니 민재 형과 은지가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소수 정예라니까.”
민재 형이 빙글빙글 웃었다.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는 척하며 주방 쪽을 살폈다. 민재 형은 고맙게도 큰 소리로 외쳤다.
“시현아! 한이 왔어!”
프라이팬이 가스레인지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났다. 우리는 기다렸으나 선배는 나와 보지 않았다.
“바쁜가 보네.”
머쓱해하는 민재 형의 음성을 배경으로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았다. 은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술잔에 술을 따랐다.
“형은 웬일이에요. 다른 약속 없어요?”
워낙 바쁘신 몸이라 인맥 관리하기도 아까울 시간에 어쩐 일이냐는 뜻이었는데 그는 다른 쪽으로 해석한 듯했다.
“아아, 둘 사이 방해하지 말고 꺼져라?”
“그렇게 말 안 했어요, 형.”
요새 부쩍 간을 혹사시킬 일이 많았다. 출렁이는 투명한 액체를 보자니 벌써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한이가 올해 몇 살이지?”
나는 드럽게 맛없는 정체 모를 국물을 한 숟가락 먹고 캑캑거리며 대답했다.
“스물셋이요.”
“왜? 나랑 한 학번 차이 나는 거 아닌가?”
어느샌가 내 앞에 물 잔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학교 1년 일찍 들어왔어요.”
“왜? 검정고시?”
일찍도 물어본다 싶은 것들이었다. 그가 아직도 내 과를 기공으로 알고 있을 확률이 더 높은 마당에, 필요 이상의 신변 조사였다.
“아뇨, 과학고 나왔어요. 조기 졸업.”
나를 바라보고 있던 은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아, 사실 은지가 물어봐 달래. 네가 왜 동기들보다 한 살 어린 스물셋인지.”
“민재 오빠!”
민재 형의 장난스러운 놀림에 은지가 기겁을 하며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투닥거리는 것을 보며 나는 오히려 저 둘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미지 관리에 열중하는 민재 형이야 은지를 사귈 마음을 먹지 않겠지만.
“그럼 진짜 연상 킬러 맞네요.”
“응?”
“동기들도 연상일 테니까, 진짜 연상들만 만난 거잖아요, 그럼.”
은지는 밑도 끝도 없이 액셀을 밟았다. 나는 그 직진이 당혹스러워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괜찮아, 은지야. 늘 처음은 있는 거잖아. 네가 첫 연하 여친 하면 되지.”
민재 형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위로랍시고 하며 은지를 달랬다. 문득 고개를 들자 옆 테이블에 익숙한 옆선이 보였다. 미간부터 우뚝하게 솟은 콧날을 보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선배였다. 같은 앞치마, 같은 분위기, 같은 공간의 선배.
“지금 먹태는 다 나가서요. 네, 그럼 오징어로 바꿔 드릴게요.”
선배는 평소와는 다르게 웃음기가 반쯤 빠진 얼굴이었다. 의무적으로 친절한 얼굴이었다. 왜일까.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나는 속도 없이 그를 걱정했다.
주문을 다 받은 선배가 반쯤 숙였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의 스쳐 가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재빠르게 눈을 피했으나 본능적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얼빠진 표정을 짓자 그가 먼저 내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왜.
나를 그런 얼굴로 봐요?
아까 주문을 받을 땐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의무적으로 다정할 필요도 없는 그런 얼굴로…….
“오빠!”
은지가 큰 소리를 내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들의 대화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는 걸 알았다.
“정신 어디다 팔았어요? 할 거죠?”
“어? 응. 응?”
뭐가 뭔지도 모르고 대답했으나 그 뒤에 나오는 말을 듣고는 10초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진실 게임. 누구부터 시작해요?”
진실 게임? MT 같은 데 가서나 할 법한 그런 간질간질하고 역겨운 게임을 하자고?
그것도 선배가 있는 술집에서?
“나부터. 대답 못 하면 이거 마시는 거다.”
민재 형이 드라마 남자 주인공처럼 씩 웃으며 테이블 중앙에 놓인 맥주컵에 소주를 절반 정도 부었다. 나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형을 바라보았다.
“형, 저거 세 잔이면 저 집에 기어가야 돼요.”
“그럼 솔직하게 대답하면 되잖아.”
야만적인 방식이었다. 나의 표정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둘은 게임을 시작했다.
“은지야.”
“네.”
“너 한이 좋아하지?”
“네.”
분명히 대답을 하는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민재 형이 ‘어쭈.’ 하는 눈으로 웃었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은지는 불길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
“…….”
“첫 경험 언제예요?”
맙소사.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새끼손가락으로 귀 안을 후볐다. 귀가 막혔나. 헛소리가 들리는 건가.
은지는 네가 들은 게 맞다는 듯이 못을 박았다.
“첫 경험, 언제냐고요.”
첫 연애도 첫 키스도 아니고 첫 질문에 첫 경험이 언제냐고 묻는 저 1학년의 패기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는 말없이 손을 테이블 중앙으로 가져갔다. 민재 형이 좋다고 웃는 소리가 얄미웠다.
“야, 그거 그냥 대답해 주지. 뭐 그렇게 부끄럽다고 고작 그런 걸로 술을 마시냐.”
씨씨를 열 번이나 했는데 첫 경험이 당장 얼마 전이라고 할 순 없었다.
양이 많아 서너 번을 삼키고야 겨우 끝이 난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곧바로 위장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한 손으로는 잔에 술을 콸콸 따르며 독기 품은 눈으로 민재 형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럼 형은 언젠데요.”
“어?”
민재 형은 우리 둘을 그저 관전할 생각이었던 것인지 제게로 돌아온 질문에 당황한 듯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나는 내가 마신 술을 되돌려 줄 생각으로 제법 많은 양의 소주를 잔에 따랐다.
하지만 민재 형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말했다.
“스무 살 때. 누구랑 했는지도 알려 줘?”
맥이 탁 풀렸다. 민재 형의 웃음에서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더 커서 와라, 애기야. 너는 날 못 이겨.
내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그가 다시 공격해 왔다.
“그럼 나도 한이한테.”
“형……, 저 술 약해요.”
“마시기 싫으면 대답하면 된다니까. 자, 내가 알기로 한이가 공개 CC를 한 건 혜주 누나까지 여섯 번인데, 분명히 더 될 거란 말이야.”
하아.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불리해도 너무 불리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사귄 것만 몇 번?”
나는 마치 내 것처럼 앞에 놓여 있는 벌주 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빠, 설마 먹게요?”
은지가 물었고 나는 대답 없이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아까 내가 부어 놓은 것이라 그런지 더 맛이 없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오빠 걸레란 거 과 사람들 다 아는데 뭐 대체 연애를 몇 번이나 했길래 그걸 마셔요?”
“형,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야, 아직 질문 네 개밖에 안 했잖아.”
나는 당신네들한테 궁금한 게 없다고. 짜증이 솟구쳤으나 겨우겨우 감정을 억눌렀다.
“은지야. 내가 왜 좋은데?”
은지의 기세로 봐서는 아주 쉽게 대답해 버릴 질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물어볼 만한 다른 질문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은지가 입을 열었다.
“띠꺼워서 좋아요.”
“…….”
“한결같이 타인한테 재수 없는 게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하나.”
정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수확이 눈곱만치도 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은지가 나를 그만 좋아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수 없게 굴지 않기 위해 노력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럼 다시 오빠.”
“나한테 그만 좀 물어봐…….”
나는 거의 울 것처럼 중얼거렸다.
“원나잇 경험 몇 번?”
얘는 새내기가 노는 수위가 왜 이렇게 세, 대체.
은지는 당연히 내가 술을 마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자연스럽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저거 마시면 골로 간다. 직감이 속삭였다.
“……한 번.”
은지의 손이 뚝 멈췄다. 나는 해탈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한 번 해 봤다고. 원나잇.”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배의 영역에서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뱉어 놓고 보니 그날 일이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그런 원나잇. 고작 이런 진실 게임에나 등장하는…….
“이제 내 차례지.”
뭘 또 질문해야 하나 뇌를 쥐어 짜내고 있는데 은지가 고개를 저으며 내 손에 술잔을 쥐여 주었다.
“왜. 대답했잖아.”
“오빠, 거짓말하면 두 잔인 거 알죠?”
“거짓말 아니야.”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어, 한아.”
민재 형까지 합세해서 나를 몰아붙였다.
“아니, 거짓말 아니라고. 한 번 했다고, 원나잇!”
“씨씨를 여섯 번 한 네가? 말이 안 되는 게, 내가 네 소문으로 들은 것만 다섯 번이야.”
그런 소문이야말로 말도 안 됐다. 그럼 대체 그 다섯 명의 여자는 누구랑 잔 거야.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섹스 경험이 딱 한 번인데.
민재 형과 은지는 아주 똑같은 모양새로 웃고 있었다. 어떻게든 나를 취하게 만들고 말겠다는 일념이 엿보였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술을 다시 마셨다. 슬슬 소주 냄새조차 독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단계에 이르렀다.
“자, 한 잔 더.”
민재 형이 기어이 손에 들린 술잔에 소주를 다시 부었다. 나는 자존심을 구기고 부탁했다.
“좀 봐줘요, 형.”
“에이, 게임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억울하다고 항변을 하고 싶은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 진짜 원나잇 한 번 했다니까요. 진짜로 ‘원’나잇이었다니까요. 열심히 말을 해 보았으나 혀가 조금 꼬이는 것 같았고 어느새 내 손에는 묵직한 맥주 잔이 들려 있었다.
“흑기사 해 줄까요, 오빠?”
은지가 마녀처럼 웃으며 물었다.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이게 목적이었던 거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또 무슨 소원으로 나를 곤란하게 할 줄 알고.
야속하게도 술은 식도를 타고 꿀꺽꿀꺽 잘도 넘어갔고 나는 진심으로 이게 마지막 잔이기를 바랐다.
“은지야 그렇다 치고, 형은 왜 이래요? 총학 일 안 바빠요?”
“그것도 질문이야?”
멋대로 해라. 나는 후우, 숨을 내뱉으며 목을 뒤로 젖혔다.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러웠다.
“재밌잖아. 이러고 노는 후배들 보는 거. 귀엽기도 하고.”
“악취미네요.”
“한이 너는 괜히 건드려 보고 싶게 반응하기도 하고.”
차라리 빨리 처먹고 뒤지자. 토하기밖에 더 하겠냐. 하는 마음으로 나는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이번 건 대답하기 쉬운 걸로 해 줄게.”
성은이 망극하네요. 빈정거리려고 했으나 잘 참아냈다. 혀가 꼬여서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한아,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민재 형은 눈을 접어 웃었다. 은지와 나를 이어 주는 역할에 너무 깊이 심취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라고 대답하면 된다. 이딴 진실 게임에서 꼭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아니라고 말해도 둘 중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건 없다고 말하면 된다.
“야 야, 너 지금 눈 풀렸어. 그만 마셔. 이게 그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어?”
하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술잔 안에 술을 따랐다. 민재 형이 조금 당황한 듯 내 손목을 잡았으나 싸늘하게 노려보며 그를 떨쳐냈다.
“이걸로 끝이에요, 진실 게임은.”
억세게 술잔을 그러쥐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점점 손에 힘이 빠졌다. 술잔을 놓치기 전에 입가에 가져다 대는데, 누군가 거칠게 내 손목을 낚아챘다.
쿵, 쿵, 쿵. 심장 박동 소리가 이렇게 매서운 까닭은 그의 향기가 났기 때문이다.
“시현아! 잘 왔네, 마침. 너도 같이…….”
민재 형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선배가 내게서 술잔을 빼앗고는 그것을 한 번에 들이켰다.
제법 많은 양이었는데 그는 물을 마시듯이 그것을 마셨다. 그의 목젖이 꿈틀거리고 미간이 좁혀지는가 싶더니, 그가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잔을 내려놓았다.
“뭐야, 장시현.”
민재 형의 멋쩍은 웃음에도 선배는 표정을 풀지 않고 싸늘하게 우리 셋을 훑어보았다.
“흑기사. 보면 몰라?”
낭만적인 말이었으나 나는 솜털까지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선배가 내게 낭만적일 이유도 없고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내가 소원을 말하면 되는 거지?”
“…….”
“너네 다 나가.”
술을 한 번에 들이켠 선배가 욕설을 짓씹듯이 말했다.
“수준 떨어지는 짓거리 그만하고 나가라고.”
“…….”
“못 들어 주겠으니까.”
한심하다는 듯이 민재 형을 바라보던 그가 불현듯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너.”
그는 인내가 한계치에 달한 얼굴을 하고 나를 보았다. ‘한아’도 ‘서한’도 아닌 ‘너.’ 그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앞으로 여기 오지 마.”
딱 떨어지듯이 단호한 말투. 선배는 그 말을 던져 놓고 주방에서 쓰레기봉투를 챙겨 밖으로 나가 버렸다. 두려움이 온몸을 덮쳤다.
그가 관성처럼 나를 끊어냈다.
그간 좁혔던 거리가 무색하도록.
***
나는 막무가내로 그를 쫓아 나갔다. 옆에서 민재 형이 말리는 듯도 했으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선배, 선배!”
도로 너머로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 그를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막무가내로 도로를 건넜다. 양옆을 살필 여유도 없었다. 오토바이 하나가 내 앞을 쌩 지나갔다. 빠앙. 클랙슨 소리에 그제야 선배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정신 못 차려? 차 오잖아!”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온몸에 오한이 들게 하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나는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입이 말을 뱉어냈다.
“선배, 왜, 왜…….”
“…….”
“왜 오지 말라고 해요?”
술에 취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비틀거렸으나 그는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다.
“이 정도는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
“여자 친구랑 헤어지면 연락해도 된다고, 옛날처럼은 지낼 수 있다고……!”
“그래서.”
선배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여자애랑 사귀었다 헤어지게?”
“…….”
“그러고 나선 위로해 달라고 징징거리면서 나랑 또 자고. 그러고선 또 다른 여자랑 사귀었다가 헤어지려고? 그게 네가 말하는 쿨하고 이기적인 방식이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폐부를 꿰뚫린 듯이 그의 말이 속 아팠다.
“한아, 네가 나를 어떻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
“나는 쿨하지 않아. 너만큼 이기적이지도 않고.”
불쑥 솟아오른 화를 조금 진정 시켰는지 그의 음성이 차분해졌다. 나는 그의 차분함이 두려웠다. 그게 꼭 그의 본모습 같아서.
“그날 알아듣게 말한 줄 알았는데.”
나 또한 그가 나의 말을 알아들은 줄로만 알았다. 옛날처럼 지내자는 나의 뜻을.
“눈앞에 알짱거리지 말랬더니 마치 나 보라는 듯이 여자를 데리고…….”
선배가 다시금 솟아오르는 날카로운 감정의 덩어리를 삼켜내듯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 후로 들려오는 것은 힘이 풀린 목소리였다.
“너는 나랑 상식의 선이 다른 애 같아.”
그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짚었다. 나는 있는 힘껏 항변하고 싶었다.
“어디가 다른지 알려 줘요…….”
이따금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선배의 집안.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던 콘돔 껍질과 서랍 한쪽을 가득 채운 콘돔들.
“나를 하룻밤 상대로 대한 건 선배였잖아요.”
“…….”
“나한테 나가라고 했잖아요. 볼일이 끝났으면 나가라고!”
이젠 반대로 내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하지만 선배의 냉정한 말이 나의 흥분을 뚝 끊었다.
“나는 남들 앞에서, 그것도 상대방 앞에서 하룻밤 경험에 대해 떠벌리지 않아.”
“…….”
“아까 네가 그랬던 것처럼.”
“…….”
그가 하는 말들은 머리가 아니라 몸 정가운데의 장기에 들어와 꽂혔다. 그가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테이블에서의 대화들을.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은지가 내게 고백한 것을, 아니면 원나잇을 정말 한 번만 해 봤다고 당당하게 소리친 것을?
선배는 명쾌하게 그것들을 짚어 주었다.
“정말 한 번이었다고 누구 들으라는 듯이 말하다가도 거짓말하지 말라니까 너, 걔네가 주는 술 다 받아먹었지. 거짓말이었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고 시인이라도 하듯이.”
“아니에요. 선배 들으라고 한 말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라구요.”
“사실 여부 관계없이, 한아, 그거 듣는 내 기분 어떨지 생각 안 해 봤겠지. 너는 그런 애니까.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여지 주는 애니까.”
함부로 나를 정의하는 말에 울컥 설움이 올라왔으나 가까스로 억눌렀다. 입술을 꽉 무는 와중에도 선배는 계속해서 나를 찔렀다.
“그쯤 되면 너라는 사람이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그냥 너한테 술 먹여서 취하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란 거 알 법한데도 너는…….”
“…….”
“너는 싫다고 한마디를 안 해.”
“…….”
“나랑 섹스할 때 그랬던 것처럼.”
속엣말을 다 뱉어내고도 그는 후련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표정, 꿈까지 쫓아와 나를 괴롭힐 게 분명한 그런 표정이었다.
“하다못해 너는 너 좋다고 쫓아다니는 애가 너를 그따위로 불러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지.”
이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묵직하게 목을 타고 올라오는 서러움을 꾹꾹 삼켜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의 표정을 보더니 기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기억도 못 하냐는 듯이.
“뭐라더라. 네가 걸레란 걸 사람들이 다 알아? 듣자 듣자 하니까. 그딴 말을 듣고도 웃어 줄 마음이 생겼니?”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내숭 부리지 말라는 은지의 말이.
하지만 그건 그냥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별명이었을 뿐이다. 악의를 담아 한 말이 아니었고 나도 그걸 알았기에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고작 그런 말을 문제 삼고자 하면 나는 남과 대화라는 걸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냥 소문이 그래서 그런 거예요. 걔가 좀 직설적인 타입이라…….”
선배의 표정이 단박에 비대칭으로 삐뚤어졌다. 나는 영문을 몰랐으나 그냥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을 해 봤자 득이 될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너는 참…….”
선배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삐딱하게 나를 보았다. 검은 눈에 허탈함과 멸시가 섞여 있었다.
“나는 네 소문 같은 것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는데, 너는…….”
“…….”
“정작 네가 그 소문을 믿으며 사는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머리가 멍했다.
“사람 바보 만드는 거, 참 쉽다.”
선배를 붙잡고서 오해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오해한 거라고.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가 뭘 오해했지. 그가 오해한 것은 없었다. 그가 본 것들은 모두 진실에 가까이 묘사되어 있었다. 선배가 듣는 줄 알았더라면 원나잇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테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고, 내겐 그 ‘걸레’라는 호칭이 익숙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선배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남기게 되었다.
과정은 중요치 않았다. 나의 의도 같은 것은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나의 상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선배야말로…….”
하지만 나도 그의 그 대단한 상식을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났다.
“선배야말로 사람 바보 만들잖아요!”
술이 확 깼다.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듯이 나는 소리쳤다.
“제가 다짜고짜 선배한테 키스하고 그게 불쾌했다면 죄송해요, 죄송한데요.”
나도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어안이 벙벙한 채로 얻어맞기만 할 수는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닫고 사는 게 아니었다. 남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별로 신경 쓰이지 않기에 태연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깊이 침투하는 것에는 꼭 그만큼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후회한다고 하면 제가 뭐가 돼요? 그거 기분 진짜 더러웠어요.”
선배가 미간을 구겼다. 나는 또박또박 혀에 힘을 주며 말했다. 주정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저는 진짜 처음이었거든요. 원나잇 같은 거.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는데 확실히 처음이었다고요.”
“…….”
“근데 선배는 아니었잖아요. 콘돔을 집에 그렇게 쌓아두고 살잖아요!”
선배의 표정이 점점 변했다. 가느다랗게 변하는 눈매에 심장이 튀어 오르는 것은 불가항력이었으나 그렇다고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내 소문이 어떻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요?”
“…….”
“신경 쓰인다면서 왜 이제 오지 말라고 하는데요!”
내가 대단한 걸 바랐나. 나는 그냥 선배와는 아주 천천히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이다. 1밀리미터씩, 스며들듯이.
이래서. 이래서 그랬던 거다. 이렇게 되어 버릴까 봐. 쉽게 가까워지면 쉽게 멀어져 버리니까.
나는 그와 서서히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그와 몸을 섞은 이후로 죄다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내 일상이 비틀렸다. 밥때를 놓쳐 살이 빠졌고 출석부에 결석 표시를 남겼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핑계를 대며 허둥지둥했다.
선배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했다. 그의 고요함은 나를 흥분시켰다. 애타게 만들었다.
그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피로하고 혼란스럽고, 떨쳐내고 싶어 하는 듯한 그런 눈빛.
“솔직해지자면…….”
그의 그 첫 마디를 듣는 순간 어깨가 흠칫 떨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봄날 밤의 날씨가 나를 그렇게 떨게 했다.
“너 때문에 일하다가도 짜증이 불쑥불쑥 솟아.”
“…….”
“거슬린다고.”
이토록 신경질적인 그는 처음이었다.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가 나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때문에…… 흔들려요, 선배?”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그처럼 태연하고 싶었으나 쉽게 되지 않았다. 선배는 자조적으로 한쪽 입술 끝을 올렸다. 그러나 그 미약한 웃음기는 순식간에 다시 사라져 버렸다.
“네가 나를 흔드는 게 아니라, 한아.”
그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그냥 내가 흔들리는 거지. 네가 나를 흔든다고, 시험에 들게 한다고 그렇게 믿으면서.”
꼭 고해 성사를 하는 사람처럼.
“너를 내가 더 일찍 알아봐서……, 너랑 조금 더 일찍 얽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주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런 환상의 온상은 비틀린 미성년의 자아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쳐 버리기 전에.”
“…….”
“그래서 글을 그만두기로 마음먹기 전에.”
나는 홀리듯이 그의 침잠한 목소리로 빠져들었다. 그가 하는 말들이 무슨 소린지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마지막 문장만큼은 오해의 소지가 없었다.
글을 그만둔다고.
왜……?
“무슨 뜻이에요……?”
덤덤하게 묻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떨렸다. 입술이 말랐다.
“무슨 뜻이냐구요.”
내 얼굴을 찬찬히 훑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아. 너는 꼭 타인의 판타지처럼 살지. 모두가 자기만큼은 너한테 특별하다고 믿게 하는 재주가 있어.”
“…….”
“그런 네 삶에 가타부타 할 생각 더는 없지만 내게 필요한 건 판타지가 아니라는 소리야.”
“…….”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내 앞에 알짱거리면서…….”
선배 주변의 공기가 일순간 사나워졌다 다시 잠잠해졌다.
“내가 계속 쓰고 싶게 만들지 마.”
그의 말이 음절 하나 빼놓지 않고 모조리 아팠다.
너무 아파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