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른 새벽 혜주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이 덜 깨 꽉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한아.
나는 새벽 1시부터 5시까지 통화 방해 모드를 걸어 놓는다. 이따금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진동이 나의 단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가장 위험하다.
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내며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6시. 통화 금지 모드가 해제되었을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에도 누나의 음성은 깨끗하고 깔끔했다.
-자고 있었니?
목소리만 들어 봐도 뻔한 걸 누나는 굳이 물었다.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그런 기색조차 없었다.
“자고 있긴 했는데, 통화할 수 있어. 왜?”
-네 사물함에 넣어 뒀던 논문 자료들이 좀 필요해서.
누나는 직설적이었다. 이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해서 안부조차 묻질 않는 저 당당함.
“……언제까지 필요한데?”
-내일.
“…….”
차가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좀비 같은 모양새로 일어나 앉자 그제야 조금 선명한 목소리가 나왔다.
“퀵으로 보내 줘?”
-너 분리 공정 듣지?
“어어.”
-거기 나 아는 후배 통해서 받을게.
그다지 달가운 방법은 아니었지만 별수 없었다. 까라면 까야지. 나는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그리고, 한아.
“응.”
-궁금해서 그러는데 겸사겸사 좀 물어보자.
“응?”
-한순간도 나를 좋아한 적 없니?
“…….”
차분한 목소리였음에도 잠이 확 깼다.
-나를 보고 웃을 적에 한번 행복했던 기억도 없니?
“…….”
-함께 영화를 볼 때 늘 지루했었니?
아아. 나는 옅은 신음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질문이라면 이제 꿈에서도 술술 답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럼 어떤 문제니?
“그런 게 다 아니라, 그냥 내가 관심이 좀 받고 싶었어. 그게 다야.”
누나가 코웃음을 쳤다.
-관심? 네가?
“…….”
-인스타도 안 하는 네가? 천하의 쓰레기 같은 소문을 가진 네가?
“…….”
-마조히스트가 아닌 다음에야.
누나는 전혀 흥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고르고 느린 숨이 전해져 왔기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차분히 물었다.
“누나, 그래서 나 붙잡을 거야?”
-아니.
“그럼 자질구레한 건 따지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
“네일 아트 같은 말은 왜 했어. 나쁜 소문을 퍼트린다고 했으면서.”
-한아, 겁먹지 마.
“…….”
-설사 미련이 있어도, 나는 안 붙잡아, 너.
“…….”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
-그 수많은 연애 중에 너, 단 한 순간, 한 번이라도 너 스스로 좋았던 적이 있었는지. 그런 게 다 부질없는 의미 부여라는 건 알지만. 나는 순전히 나 좋자고 너랑 사귀었는데 너도 그랬던 게 맞기는 한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라도.
“…….”
-생각해 보면 너는 늘 애매모호하게 행동하니까, 잘 모르겠어서.
내가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누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를 못 했구나, 내 말.
“아냐, 이해했어.”
-…….
“걱정하지 마. 나도 충분히 좋았어.”
-……됐어, 그럼.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질질 끌리는 것 없이. 녹아내리는 것 없이.
두툼한 서류 봉투를 수업에 안고 가자 누나의 친한 후배라는 누군가가 그것을 내게서 낚아채 갔다. 얼굴을 모르는 걸 보니 나보다 두 학번 아래거나 두 학번 위 이상인 듯했다.
그는 잊지 않고 나를 향해 경멸의 시선을 한 번 날려 주었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농구부 매니저 은지는 그 모든 것을 유심히 보다 말을 걸었다.
“오빠,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전방 두 책상 정도에까지 들릴 법한 목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류 봉투를 받아 가던 누나의 후배가 나를 다시 째려보았다.
다짜고짜 엿을 먹은 나는 멍한 얼굴로 은지를 쳐다봤다.
“술 많이 취한 것 같던데. 브릿지에서.”
어제 그 자리에 이 애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취기가 올라와서 먼저 들어갔었어. 근데 너 여기 안 앉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왜요?”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은지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했다.
“어제 좀 많이 먹긴 했죠, 다들. 세어 보니까 거의 반 궤짝이던데.”
“……형들은 원래 그래. 운동부라 그런가.”
“집에 가서 토를 하는데, 먹었던 안주들이 그대로 올라오는 거예요.”
“…….”
“근데 냄새가 너무 역해서 더 토기가 심해졌던 것 같아요.”
“…….”
“근데 그때 서빙 해 주던 알바생 얼굴 생각하니까 좀 나아졌어요. 그 키 크고 친절하게 웃는 사람.”
“…….”
정신없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 선배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뾰족하게 말이 나갔다.
“그래서 어쩌라고?”
“아는 사이 같던데, 뭐 하는 사람이에요?”
“관심 있어?”
“없음 물어보겠어요?”
골 때리는 애였다. 짜증이 나서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관심 가지지 마.”
“왜요?”
“가지지 말라면 가지지 마.”
“제 마음인데 왜 제 마음대로 못 해요?”
“그럼 나한테 소개해 달라고 하지 말든가.”
“그럼 누구한테 해요?”
“민재 형한테 해.”
“그 오빠 어려워요.”
보통은 반대였다. 친절하고 사람 좋은 민재 형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고, 엉망인 소문을 가진 나를 기피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그건 차치하고, 나는 어떻게든 이 멋모르는 새내기를 단념시켜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너 스무 살 아니야?”
“그런데요.”
“선배랑 네가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는 알아?”
“몇 살인데요, 그 사람?”
“……스물다섯.”
어딘가 말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 나이랑 딱 맞는데요?”
“어디가 딱 맞아.”
“5의 배수잖아요. 경계선의 나이.”
아, 뒷목이 뻐근했다.
“네 나이에 스물다섯은 노땅이야, 그냥. 네 친구들한테 물어봐. 스물다섯 남자 어떻게 생각하냐고. 다 욕하지. 소문나. 이상한 남자 만난다고.”
“오빠가 그런 말 하니까 좀 웃기네요.”
아주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았다. 이를 악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고 순화해서 이야기하자.
“나이뿐만 아니라 학과도 너랑 안 어울려. 너 기백도 모르는 남자랑 사귈 수 있어? 미적분도 다 까먹었을걸.”
“문과예요?”
“……응.”
“저 문과 남자가 이상형이에요. 톨스토이 좋아해요.”
“…….”
언젠가 ‘안나 카레리나’를 읽다가 쏟아지는 이름들의 향연에 책을 던져 버렸던 나는 그만 말을 잃었다. 왠지 선배라면 톨스토이를 좋아할 것 같았기에.
“아르바이트도 세 개나 해서 여자 만날 시간 없댔어.”
물론 선배는 내게 그렇게 말한 적 없다. 그냥 추측과 민재 형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조합해 본 것뿐이다.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이네요. 요즘 청년 같지 않게.”
모든 걸 다 막는 방패 수준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의 사랑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강력해 보였다. 급격하게 힘이 빠진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 말은 안 하고 싶었는데.
“……어차피 그 선배, 못 잊은 첫사랑도 있어.”
“…….”
“존나 예뻤대.”
“…….”
은지의 표정을 확인하진 않았다. 그저 침묵이 그의 답이었을 뿐이다. 이번엔 그가 나의 공격을 막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장렬한 패배로.
교수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나는 수업 시간 내내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노트북 필기 파일에 ‘희윤’이라는 이름을 입력하고 깜짝 놀라서 지우기도 했다.
책에다가 쓴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럼 자국이 남으니까.
희윤.
그 이름을 들은 날부터 나는 종종 선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한아.’ 나를 부르는 그 톤으로, ‘희윤아.’ 그러는 것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 희윤이라는 직접 본 사람은 민재 형이 유일하다. 그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시종일관 칭찬 일색이었다.
‘엄청나게 예쁘지, 장시현 전 여친.’
늘 첫말은 그러했다.
‘호불호 없이 과탑 씹어 먹을 얼굴이야. 청순한데 도도하고. 성격도 좋아. 하도 잘 웃어 줘서 이상한 남자 새끼도 많이 꼬였었고.’
상상해 보자. 청순하지만 도도하다는, 도무지 상상이 잘되지 않는 그 얼굴을. 청순한데 도도한 게 도대체 뭔지 여자에 대해 해박하지 못한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머리는 길고 눈은 고양이 눈이고, 뭐 그런 건가.
‘그러다가 둘이 사귀고부턴 날파리 꼬이는 게 싹 없어졌잖아. 저들도 아는 거지. 장시현 정도 돼야 넘볼 수 있는 여자라는 걸.’
선배쯤은 돼야 넘볼 수 있다는 건 무슨 뜻이었을까.
선배가 술집에서 손님으로 딱 한 번 본 은지마저도 반하게 만들어 버리는 얼굴과 분위기를 가져서일까. 그래, 그렇다면 이해가 영 안 되는 말은 아니다. 선배는 어떤 여자랑 사귀든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어떤 여자를 옆에 세워 두어도 잘 어우러지는 그림일 것이다.
좋은 집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곧은 신조, 우월한 얼굴, 친절한 말투, 다정한 웃음소리.
그 모든 걸 다 가지고도 겸손한 이기적인 남자.
그는 제게 가장 큰 흠이 있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지만, 그에게 흠이 있다면 그건 나를 울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수업이 끝나고 짐을 챙기는 나를 은지가 다시 불렀다.
“소개시켜 주기 싫어하는 오빠 마음은 잘 알았어요. 부담스러울 수 있단 것도.”
“…….”
“그럼 그냥 다리만 놔 주세요.”
단념한 게 아니었나. 선배란 사람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다섯 살이나 어린 애가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다니.
“오늘 저랑 같이 그 술집 가면 안 돼요?”
“안 돼.”
나는 백 팩 지퍼를 잠그며 일어섰다. 내 굳은 표정에도 불구하고 은지는 생기 넘치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사랑에 빠져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럼 저 혼자라도 가요?”
나는 픽 조소했다.
“그러든가.”
어차피 오늘은 목요일. 선배는 오늘 브릿지에 없다. 물론 저 애에게 그걸 알려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도 쉽게 얻은 정보가 아니니까. 내가 세 번째 여자 친구와 헤어진 날에야 겨우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월화수는 브릿지, 목금은 햄버거, 토일은 카페.
집에 가는 길에 햄버거집에 들러서 제일 만들기 복잡하고 힘들다는, 치즈가 잔뜩 들어간 버거를 사서 먹어야지. 비록 선배의 포지션이 카운터가 아니라서 얼굴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릴에서 일하는 선배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먹으면 유치한 승리감에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다음 수업에서 은지는 강의실에서 나를 보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왔다.
“오빠 알고 있었죠! 목요일은 그 사람 알바 안 한단 거.”
나는 그가 또 내 옆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복도 쪽 자리에 짐을 풀며 어깨를 으쓱했다.
“치사하게 그걸 말을 안 해 주네.”
“진짜 갈 줄 몰랐어.”
“덕분에 친구한테 욕 처먹었어요. 김치찌개에서 화장품 맛 난다고.”
나는 그게 내 탓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냥 무시했다.
“솔직히 오빠도 안주 땜에 가는 거 아니죠? 그냥 친하니까 팔아 주려고 가는 거죠? 그게 어떻게 맛있어. 진짜 미각 잃은 장금이 아니고서야.”
주변 사람들이 소란을 인지하고 이곳을 흘깃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50분. 수업 시작까지는 10분이 남아 있었다. 끼익.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은지야.”
“네.”
“잠깐 나와 봐.”
무시하고 무시해도 계속 떠들어댄다. 이러다 진짜 소문이라도 나겠다. 강제로 일곱 번째 공개 씨씨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냥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귀다 헤어질 여자 친구가 필요했다.
빈 강의실로 들어섰다. 은지가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나는 차분하게 물었다.
“너, 소문 좋아해?”
“소문이요?”
“그래, 소문.”
“그냥 그런데요.”
“남 일이니까 그냥 그런 거지, 네 일 되면 달라질걸?”
“그래서요?”
“사람들 앞에서 나한테 말 걸지 마.”
“우리 조별 과제 같은 조인데요?”
“과제 일로 말 거는 거 아니잖아.”
은지는 또랑또랑한 그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기어이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릴 때까지.
나는 나만 좋자고 이런 꼰대 같은 충고를 하는 게 아니다. 물론 우리 둘의 이야기가 얘깃거리로 퍼지면 나 또한 손해를 보는 건 맞지만 새내기인 그가 나보다 더 큰 피해를 입는다는 뜻이다. 딱히 남 좋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는 도의적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저기요.”
고개를 돌렸을 때 은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무표정과 비소, 그 사이 어디쯤.
“제가 2학년 선배한테 들었는데요, 나쁜 남자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종잡을 수 없는 딴소리였다.
“걸/레/새/끼.”
“…….”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아까 내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근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니까 다들 그냥 돌려서 말하는 거래요. 좋게.”
“…….”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그 말을 하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웃는 거예요. 다 같이 누구를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과 내부에서 나의 평판, 이름값에 대해 온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거 좀 재수 없지 않아요?”
“…….”
“멋대로 떠들고, 낙인찍어 버리고, 취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 면죄하고, 사상 검증하고, 바보처럼 남의 말을 다 믿고, 웃고…….”
“…….”
“재수 없어요, 엄청나게.”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55분.
“그런 게 재수 없다면 더더욱 나와 엮이지 않는 편이 좋아.”
“…….”
“대학에서의 4년 동안은 내내 그런 재수 없는 패턴이 계속 반복되니까, 네 선배들이 나를 피하라고 했으면 새겨듣는 게 현명하다는 뜻이야.”
최대한 돌려 말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사친 같은 것을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딱히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고, 농구부에서 가끔 형들이랑 농구나 하다가 졸업하고 싶었다. 열 번의 씨씨를 했어도 나는 여자가 어려웠다.
사람과의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좁히는 은지는 위험한 애였다. 내게나, 선배에게나.
“오빠 은근히 꼰대네요.”
정곡을 찔렸는지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사장님 말로는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이라는데요?”
“뭐가?”
“그 알바생 알바하는 날이요.”
“…….”
“이름도 알게 됐어요. 장시현. 맞죠?”
“…….”
“오늘 화요일이니까 같이 가요.”
또 한 발자국 성큼 들어와 버린다.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들고서.
나는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에 브릿지에 가자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
***
말하자면 적과의 동침이었다.
선배를 노리는 세 살이나 어린 후배와의 단독 술자리.
달갑지 않은 모양새였으나 그런 것을 따지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나는 브릿지라는 한마디에 홀려서 내 발로 이곳에 왔고 잘잘못을 따지기엔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의 선배는 너무 근사했으므로.
화요일인데도 호프집은 제법 붐볐다. 나는 일부러 마른안주를 시켰다. 같은 그릇에 숟가락이 오가는 게 싫어서. 선배는 서비스만 챙겨 주고는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술을 가져다줄 때 내게 눈짓으로 가만히 묻기는 했었다. ‘또 누구야?’ 하고.
그래서 강제로 은지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오가는 선배 눈에 이상해 보이지 않게.
“제가 친구한테 물어봤거든요? 다섯 살 차이 나는 남자에 대해서요. 오빠가 물어보랬잖아요.”
“…….”
“근데 제 친구들은 잘생겼으면 장땡이래요. 못생긴 스무 살은 답도 없대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친구들 말이 맞긴 하다. 그럼 잘생긴 스무 살 만나면 되잖아. 사랑에 빠진 소녀에게 그렇게는 말할 수가 없어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는 오빠는 왜 연상만 사귀어요?”
“아닌데. 동기랑도 만나 봤어.”
연상 킬러라던데. 그의 작은 목소리를 애써 모른 척했다.
“나이는 별로 안 중요해. 졸업까지 얼마나 남았냐가 중요한 거지.”
“……그 발언은 좀 쓰레기 같았다.”
“네 선배들이 하는 말 죄다 헛소문은 아니라니까.”
그와 나는 웃지도 않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블랙 코미디 같은 대화가 몇 번 더 오갔다.
“근데 오빠 좀 취했어요?”
“왜.”
“원래는 되게 차가워 보이는데, 술 들어가니까 입꼬리가 좀…….”
그런가. 취한 나를 거울로 비추어 본 기억이 없었다. 확실히 나는 술이 약한 편이긴 했다. 눈앞의 신입생은 아주 멀쩡해 보였으니 말이다.
턱.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섬세하지 못한 손길에서 선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른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공과 서한?”
“……누구세요.”
모르는 남자였다. 어디선가 봤다면 기억했을 법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저 덩치에 저 얼굴이면 기억을 못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부정적인 쪽으로.
“본인 맞아요?”
“그런데요.”
남자가 공격적으로 웃었다.
“너 잘 걸렸다, 이 새끼야.”
“네?”
“감히 뻔뻔한 낯짝 들고 술을 처먹으러 와?”
쿠당탕. 넘어졌다는 자각이 들기도 전에 꼬리뼈의 통증으로 내가 넘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직후에 찾아오는 복부의 통증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저 남자가 나를 때렸고, 나는 날아가다시피 엎어진 것이다.
“이 씹새끼. 여자 마음 가지고 노니까 좋냐?”
눈앞의 남자의 운동화가 보였다. 왕발이었다. 운동화가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로 끈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너 같은 새끼들이 남자 망신시키고 다니는 거야!”
그 말과 함께 남자의 운동화가 다시 내게로 날아왔다. 헉. 나는 잔기침을 토했다.
“저기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은지가 그를 확 밀쳤다. 둘의 몸집이 거의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 저 겁 없는 여자애가 대체 어디서 저런 깡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당신 뭔데 사람을 쳐요? 무법자예요?”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모르나 본데, 너도 정신 차려. 저 새끼 존나 여우 새끼야. 너도 한 번 먹고 나면 버릴걸?”
“그래서 그쪽이 먹히고 버려지셨어요?”
“뭐?”
듣던 중 가장 역겨운 소리였다. 아픈 와중에도 나는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그것도 아니면서 제삼자가 무슨 권리로 이런 식의 폭력을 행사하는데요?!”
“나 이 새끼가 갖고 놀다 버린 애 남자 친구다, 왜!”
“혼자 소설 쓰고 앉으셨네요?”
“아오, 이걸 진짜!”
“저기요! 하얀 코트 입으신 분. 당장 경찰 불러 주세요!”
남자는 화가 주체되지 않는지 연신 코뿔소처럼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저 새끼 껍데기에 속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 씨발, 껍데기도 껍데기 나름이지.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았구만. 정신 차리라고.”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배를 움켜쥔 채로 웃자 남자는 미친 사람을 보듯이 나를 봤다.
아니, 나도 진지하게 대꾸해 주고 싶었는데. 너무 웃겨 가지고.
“진짜?”
비틀비틀 일어섰다. 은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홀로 고군분투한 그에게는 여러모로 미안할 법한 상황이었으나 내 인생에 그런 마음은 가져 본 적이 없다.
나는 내게 이로운 감정들만 취하고 나 좋을 대로 사는 법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놈이니까.
“진짜 그렇게 생각해?”
키득거리며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끅끅. 배를 얻어맞아 웃음소리가 내가 듣기에도 좀 무서웠다. 쌓여 있던 술도 한 번에 확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음속의 말을 잘 내뱉지 않는 내가 이렇게까지 할 리가.
“네 눈깔엔 이 얼굴이 안 잘생겼어?”
남자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근래에 이렇게까지 나를 웃게 한 사람이 없었는데 기분이 째지는 것 같았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네 역겨운 면상 보고 있을 내 전 여자 친구가 불쌍해서 한마디 해 줄까 하는데.”
“이 씨발 놈이!”
“이 얼굴 보면 모르겠어? 나랑 만났던 여자 다 얼빠야. 너는 걔네 장난감도 안 돼.”
남자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취했고 그의 무력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얼굴은 여자에게밖에 맞아 본 적이 없어서 힘이 가늠이 잘 안 되는데, 그저 치아가 나가지만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입꼬리가 쑥 내려갔다.
잔뜩 화가 난 듯한 표정의 선배가 그 앞에 있었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
선배는 남자의 두꺼운 팔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느릿하고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남의 영업장에서 이게 웬 무례한 행패시죠?”
“아, 놔 봐요. 놓으라고.”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말리고 있다는 것에 취해 더더욱 난동을 피웠고 덕분에 얼굴에 맥주가 튄 선배는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적당히 하세요. 영업 방해로 신고할 거니까 경찰서로 같이 좀 가시죠.”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직선적인 시선은 제 일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남자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사무적이고도 냉랭한 얼굴. 나는 그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본다. ‘희윤’에 대해 이야기하는 민재 형을 만류할 때와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오빠, 셔츠에 그거, 피는 아니죠?”
내게 가까이 다가온 은지가 물었다. 나는 고추장과 간장 등의 소스로 엉망이 된 옷을 그제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그렇네.”
“아까 한 말 정정할게요.”
“…….”
“못생기고 늙은 남자가 제일 끔찍한 것 같아요.”
주변 상황은 최악이었다. 즐거운 음주 생활을 방해받아 황당해하면서도 반쯤은 흥미로워하는 사람들과 깨진 맥주잔과 엎어진 음식들.
다 선배가 치우고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다. 나 때문에.
엎질러진 것들이야 걸레로 닦아야 하는 것이라고 해도 유리 파편들이라도 좀 모아 두고 싶어 허리를 숙여 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드는데, 손목을 낚아채는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아. 나는 신음하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떨구었다.
선배였다.
“따라와. 서한.”
그가 내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선배는 나를 주방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입을 꾹 닫은 채였다. 나를 때렸던 남자와는 이야기가 되었는지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채 문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선배는 여전히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일터를 망쳐 버렸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떼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다시 다물어 버렸다. 술은 선배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술이 깨서 지금은 완전 멀쩡했다. 하지만 정신과 다르게 몸은 조금 느린 편이니 말을 더듬을 수는 있겠다.
“옷 갈아입어.”
그의 음성이 순간적으로 오한이 들 정도로 이토록 차가운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갈아입고 경찰서로 가.”
“선배, 저기.”
선배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구석에 있는 쇼핑백에서 회색 후드 티 하나를 꺼내어 내게 건네고 돌아섰을 뿐이다. 반듯하고 싸늘하게.
선배의 냄새가 은은하게 묻어 있는 옷을 입은 나는 선배의 말대로 경찰차에 올랐다.
선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 몽롱한 기운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선명한 것은 오로지 선배의 표정뿐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조사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와. 서한.’
그의 매정함이 계속 계속 나를 춥게 했다.
***
한참이 흐르고야 선배는 경찰서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만 한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흐름이 객관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선배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경찰에게 다가갔다.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귀가 먹먹해 잘 들리지 않았다. 사장님이 곧 오셔서 …… 네, 변호사 선임도 할 겁니다. …… 벌금형이라도…….
이 얼굴이 안 잘생겼냐는 말은 하지 말걸. 선배도 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빠, 왜 이렇게 죽상이에요. 맞은 데 많이 아파요?”
“아니, 선배한테 미안해서. 그거 다 어떻게 치워.”
“저한테는요?”
“별로 안 미안해…….”
경찰은 우선 집에 돌아가 계시라 이야기했고 나는 미련 없이 나가 버리는 선배의 뒤를 급히 쫓아 나갔다.
“선배……!”
내가 부르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가 버렸을 것이다. 그의 무감한 눈을 보자 몸이 굳었다. 선배가 발길을 돌려 내게로 걸어왔다.
“죄송해요. 제가…… 제가 그러려던 게 아니라.”
“알아. 너도 봉변당한 거.”
안다고 하면서 그는 아직도 차가운 목소리였다.
“내일 병원 가서 진단서 끊어. 그래야 합의할 때 유리하니까.”
“……그냥 합의해 줄 거예요.”
선배가 멈칫했다.
“선배한텐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같이 가서 치우면…….”
“그럴 필요 없어.”
이상하게 그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아.”
“네?”
“왜 그렇게 살아?”
왜, 그렇게, 살아.
한밤중의 길거리에서 나는 머릿속이 정지되어 버렸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를 만큼.
“그 여자앤 또 누구야. 벌써 다른 여자 만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얼굴도 모르는 남자한테 얻어맞질 않나. 그것도 여자 문제로.”
“…….”
“그러고도 그냥 합의를 해 주겠다고 하질 않나.”
다른 건 다 상관없었다. 선배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은지가 내가 만나는 여자가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걔랑은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냥…….”
하지만 선배를 소개시켜 주려고 온 자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일 뿐이에요.”
“요점이 그게 아니잖아, 한아.”
선배와 나는 다른 곳을 본다. 언제나. 같은 사안을 두고도 대화가 수월했던 적이 없다. 나는 세로로, 그는 가로로 이야기하는 기분. 교차점에서 딱 한 번씩만 만날 수 있는, 그런 사이.
“나는 너를 잘 모르겠어. 어떤 애인지, 왜 그러는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왜 그렇게 모호하게 살아.”
“…….”
“너의 모호함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보잖아. 오늘 온 그 여자애도 네게 마음이 있어 보이던데. 그럼 그 애 미래 남자 친구에게 또 이런 일 안 당한다는 보장 있니?”
“…….”
“그 상황에서 도발은 왜 해. 그러다 상대가 너를 어떻게 할 줄 알고.”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선배의 말은 평소보다는 조금 빨랐지만 큰 파동은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을 정도로 조곤조곤한 어조였다.
“모호한 게…… 나빠요?”
말을 내뱉고 보니 새삼 나는 선배에게 훌륭한 지적 대화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질문 수준이 유치했다. 모호한 게 나쁘냐니. 당연히 좋은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닐 텐데.
하지만 선배는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잖아.”
“…….”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선배는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옷은 다음에 돌려줘.”
그러고 보니 내게 긴팔 후드를 빌려주어서인지 그는 반팔 차림이었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선배의 후드를 빨았다. 밤에 세탁기를 돌릴 수가 없으니 손빨래를 해야 했다.
나는 깊이 생각하는 걸 싫어한다. 타인의 말 한 마디에 의미 부여하는 것도 싫다. 누군가 내게 그렇게 구는 것도 싫고. 그렇게 파고들고 파고들다 보면 사람이 바보가 되어 버린다.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선배의 옷을 주무르면서 나는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그 맛없는 술집 안주. 오늘도 역시나 맛없었지. 선배 손맛의 문제인 걸까. 뭐 그런.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코끝이 시큰거렸다.
억울했다. 잘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그런 감정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억울했다. 이러다간 복장이 터져 죽을 만큼.
선배는 나를 알 수가 없다고 했으나 나는 그의 앞에서 나를 모두 열어 보였다. 다만 할 말이 많지 않았을 뿐.
차라리 여자에 대해 빠삭하게 알아서 선배와 그런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었다면 나에 대한 그의 평가가 달랐을까? ‘모호한 놈’으로 기억되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연애나 사랑 따위에 대하여 대단한 통찰력이 있었다면, 그래서 선배의 연애 이야기를 상세히 듣고 조언이라도 해 줄 수 있었다면, 더 쓸모 있게 느껴졌을까.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었다. 다짜고짜 사람을 패던 그 미친놈.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맥락도 없이 꼴같잖은 사랑에 눈이 멀어 끼어든 그 새끼가 이상한 거다. 법도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나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날 선배의 옷을 들고 브릿지에 갔으나 ‘금일 휴업’이라는 팻말만이 나를 반겼다. 허탈함에 돌아섰으나 수확 없이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릴 적에 부모님에게 시험지를 숨긴 일이 있었다. 게임에 한참 빠져 있을 때라 성적이 반 토막 났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그런 부분에서 지나치게 엄격하신 편은 아니었으나 성적 저하의 원인인 게임을 제재할 게 분명했다.
방안 구석구석에 시험지를 조각내어 숨기고 나서 그날, 그다음 날, 그다다음 날 시험지를 숨긴 것을 들킬 때까지, 괜히 부모님에게 가서 더 자주 말을 걸었다. 그들에게서 어떤 말이라도 들어야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마음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지금이 딱 그랬다.
민재 형에게 전화를 걸어 선배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평소답지 않게 보채는 내게 민재 형은 술 마셨냐며 미친놈이라고 욕을 했다.
선배가 산다는 원룸 건물 앞에서 천천히 담배를 태웠다. 이것만 다 피우고 전화를 걸어야지. 그렇게 세 대를 내리. 숨긴 시험지도 없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여보세요.
“선배.”
-……한이니?
그의 목소리가 꼭 별 같았다. 멀고 아득했다.
“선배 집 앞에 와 있는데…….”
-…….
“옷 드리려고요.”
선배는 한참 말이 없었다.
-지금 밑에 있다고?
“네, 현관에요.”
-잠깐만. 내려갈게.
그가 외투를 챙겨 입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니코틴을 한 번에 너무 많이 흡입해서인지 조금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유리창 너머로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조금 부스스한 차림의 선배를 보는 순간 나는 핸드폰을 든 손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넘치는 열정으로 타오르는 남자보다 적당히 힘을 푼 남자가 더 태가 나 보이기 마련이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무방비한 선배의 모습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이 나를 긴장시켰다.
“한아.”
그는 그렇게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 일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잠에 취한 듯 목소리가 조금 풀려 있었다.
“죄송해요. 자고 있었어요?”
“아니, 잘까 하고 있었어. 좀 피곤해서.”
“아아…….”
“…….”
“민재 형이 집 알려 주셔서…… 브릿지는 닫았길래…….”
나는 눈에 띄게 횡설수설했다. 그는 그저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조금 다듬었다.
“사장님이 오늘은 쉬자고 하셔서. 옷 주러 온 거야?”
“네.”
“다음에 줘도 되는데.”
“빨리…… 드리고 싶어서요.”
선배는 픽 웃었다.
“그거 없다고 나 얼어 죽을까 봐?”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어제 내게 ‘왜 그렇게 사냐.’고 물었던 사람은 다른 사람 같았다. 어제만 다른 사람이고, 나머지는 다 같은 사람 같았다. 선배는 옛날 모습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여유롭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어제는 내가 조금 심했어, 한아.”
“…….”
“나도 경황이 없고 당황해서 그랬어. 그래도 친한 동생한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선배. 제가 죄송하죠.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보내기가 조금 그렇네. 들어왔다 갈래?”
그가 예의상 하는 말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더듬거리면서도 똑바로 말했다.
“네, 네.”
“…….”
“선배만 괜찮으시다면…….”
나는 그의 이면을 더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