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빌런 공국, 아니 제국을 상대로 독립을 선포한 오빌런 왕국 병영의 막사 안.
백발을 길게 기른 단아한 인상의 노 마법사가 촛불 앞에서 고대 예언서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녕 세계의 멸망을 막을 방법은 없는 것인가…….'
바스커빌은 저 혼자 짊어진 막대한 임무에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오빌런 왕국의 왕과 병사들은 연전연승의 기쁨에 취해 한바탕 막사 밖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바스커빌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마왕의 강림을 막기 위해 오빌런 대공과 손을 잡았지만 회의를 느꼈다. 아무래도 오빌런 대공이 딴 생각을 품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아무리 마도 병기를 개발해도 곧 대륙에 나타날 마왕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대륙 각지에 퍼져 있는 드래곤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보았지만 무시당했다. 위대하고 고고한 생명체인 드래곤들은 나약하고 허점투성이인 인간들의 몰락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전장에서 오빌런 왕국의 독립을 돕는 동안 바스커빌에게 개인적으로 축하할 일이 생겼다. 혹은 오빌런 왕국 전체의 경사로 여겨질 일이기도 했다. 마왕을 막을 방법에 대해 고심하던 바스커빌이 인간은 넘을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9서클이란 거대한 장벽을 돌파한 것이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기쁨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왜냐하면 9서클이라 하더라도 시간을 멈추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 고대 예언서에 적힌 그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스커빌과 인간들은 마왕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준비를 하기는커녕 전쟁이라는 이름의 아무 의미 없는 살육에만 열을 올리기 바빴다.
바스커빌은 고독하고 외로웠다.
마왕과 맞서 싸울 준비를 홀로 하는 동안 바스커빌은 철저히 혼자였다. 그를 이해해 주는 이도, 그를 믿어주는 이도 주변에 없었다. 심지어는 우군이었던 오빌런 왕국조차 바스커빌이 9서클이 되자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몇 만의 군대와도 홀로 대적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바스커빌이 혹 왕국을 찬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다.
오빌런 왕국의 억측과 달리 바스커빌은 권력욕 따위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든을 훌쩍 넘은 나이라 살만큼 살아 삶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심 많고, 탐욕스러우며 또한 나약한 존재였기에 바스커빌이 저희들과 다르게 청렴하고 올곧은 인간이란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욕심이 없거나 정치적인 기반이 약하면 그가 가진 힘은 오히려 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바스커빌이 진정한 악인이었다면 후대의 평가와 역사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대륙의 다른 왕국들은 바스커빌이 9서클에 들어섰다는 정보를 쉬쉬하며 은폐하거나, 적국이 퍼트린 허무맹랑한 허풍일 뿐이 라는 흑백선전을 했다. 군과 백성의 사기를 꺾을 수 있는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바스커빌이 도움을 요청했을 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드래곤들도 레어밖으로 나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무지렁이에 불과한 인간이 감히 저희들과 견줄만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몹시도 불쾌했던 것이다.
멸망의 순산이 시시각각 가까워져오던 어느 날. 마왕을 막아낼 방법을 찾을 수 없어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바스커빌은 그 동안 멀리하던 께름칙한 어떤 책을 펼쳤다.
'과연 이 책을 연구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군…….'
바스커빌은 고뇌에 찬 얼굴로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태초의 언어로 기록된 흑마법서. 이것은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기에 바스커빌은 제발 이 힘을 쓰는 상황이 오지 않기만을 신께 빌고 또 빌었다.
툭, 툭-
동굴의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사방에 피 냄새가 가득했다. 시체에서 떨어져 나온 살덩이가 썩어가면서 풍기는 시큼하면서도 메스꺼운 냄새.
'여기는 어디지.'
리프는 혼곤한 얼굴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축축한 동굴 벽과 촛농이 녹아내린 누런 빛깔의 초들이 어렴풋이 보이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뒷골목의 하수구와 푸줏간을 연상시키는 불쾌한 냄새 때문에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동굴의 주인인 흑마법사가 가래가 들끓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리프를 뉘인 제단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거뭇한 핏 자국이 무늬처럼 짙게 배어 있었다.
'저 자는……!'
제단에 결박된 리프는 어깨를 뒤틀었다. 어둠속에서 걸어 나오는 흑마법사를 보고 제가 이스카의 적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군. 분명 마나 한 줌 없는 평범한 노예인데."
후드를 뒤집어 쓴 흑마법사는 아까 리프가 마법진을 이용해 저를 공격하려고 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니지, 마나는 부차적인 문제야. 마나를 떠나서 어떻게 일개 노예일 뿐인 존재가 마나 대순환의 기본 법칙을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7서클을 목전에 둔 이 몸께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거늘."
흑마법사는 리프의 손등에 드러난 노예의 문장을 노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여태껏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마법학적 난제에 부딪히기라도 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주인님께 제물로 바치기 전에 내 너를 조사해봐야겠구나, 고귀한 영혼을 가진 아이여."
추악한 얼굴을 가진 흑마법사는 정신지배 마법을 써서 리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저를 추적하고 있을 황군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지만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내 몸에, 손대지……."
제단에 결박당한 리프가 몸을 들썩이며 반항했다. 제 얼굴을 만지는 흑마법사의 손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어째서!"
흑마법사는 리프에게 정신지배 마법이 통하지 않자 눈을 홉떴다.
정신 지배가 통하지 않는 정우는 두 가지뿐이었다. 이스카의 종복처럼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거나 저와 동급 이상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 이거나.
황자의 궁을 급습했을 때도 리프는 정신 통제 마법에 잠식당하지 않았지만 흑마법사는 햄튼을 상대하느라 그 사실을 알아 챌 경황이 없었다.
"이익! 고결하고 특별한 영혼이라 다르긴 다르군. 하지만 어디 이래도 버티나 보자."
흑마법사는 자존심에 흠집이라도 난 것처럼 이를 악물고서 리프에게 저주보다 지독한 고통의 마법을 걸었다.
"아악! 큭."
리프가 잇새로 신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아아악!"
눈물로 시야가 흐려진 리프의 눈앞에 이스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도와달라는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않았다. 흑마법사에게 고문을 받고 있었지만 리프는 제 안위보다 이스카를 더 염려했다. 제가 인질로 붙잡혀버려 이스카가 곤경에 처하기라도 했을까봐 죄스러운 마음만 들었다.
"이젠 내게 복종할 마음이 들었을 것 같군."
간악한 흑마법사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어지간히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내나 신관이라도 이 정도 고문을 당하고 나면 마음에 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흑마법사의 착각과 달리 리프에게 고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읏, 당신이 누구 명을 받고 날 납치했는지…… 몰라도, 으윽. 이스카 님에게 해가 될 증언 따윈 절대 하지 않아."
리프의 금발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었다. 리프는 악독한 고문에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흑마법사를 노려보는 눈빛만큼은 형형하고 또렷했다.
"이스카리오테 황자? 고귀한 영혼을 가진 아이여, 지금 네가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비록 황궁에 들어온 이유는 황태자 때문이었지만 하찮은 인간들의 황위 다툼따위 이제 내 알 바 아니다. 곧 이 몸께서 대륙의 지배자가 될 테니까."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한 흑마법사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턱을 쳐들고서 코웃음을 쳤다.
적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니었단 말인가?
모진 고문을 견디느라 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리프가 눈을 부릅떴다.
'그럼 도대체 왜 저 흑마법사가 날 여기로 데리고 왔단 말인가.'
흑마법사는 혼란스러워하는 리프를 내려다보며 득의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크크크, 넌 내 주인님을 이 땅에 강림하게 할 제물이다. 주인님의 도움을 받는다면 바스커빌도 이루지 못한 9서클의 문턱을 넘는 것도 꿈은 아니지. 대륙의 위대한 수호자인 드래곤들조차 내 발치에 두게 되는 거다!"
흑마법사는 그 어떤 인간도 가지지 못한 막대한 힘을 손에 넣는 순간을 상상하며 광소를 터트렸다. 인간계에 강림한 마족은 계약자의 소원을 반드시 들어줘야 했다. 그리고 흑마법사가 고귀한 제물을 많이 바칠수록 마족은 더 강한 힘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 이! 천하에 나쁜 놈. 네놈은 분명 지옥에 떨어질, 악!"
"닥쳐!"
흑마법사는 분노에 치를 떠는 리프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렇지 않아도 고문 때문에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리프는 의식이 흐려졌다.
이스카.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릴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입술이 찢어진 리프는 몽롱한 눈으로 이스카의 이름을 애타게 되뇌었다. 흑마법사를 막지 못하면 저만 제물로 바쳐지는 게 아니라 바스커빌이 삼백 년 전 간신히 지켜낸 대륙이 큰 혼란과 위험에 빠지고 말았다.
"너무 두려워할 것 없다, 찬란한 영혼을 가진 아이야. 너 혼자만 제물로 바쳐지는 것도 아니니까."
흑마법사는 음산하게 웃으며 소맷부리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냈다.
'나 혼자만 제물로 바쳐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이지?'
눈꺼풀이 무거웠다. 리프는 수백 개의 촛불의 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칼을 보며 숨을 헐떡였다.
"정말 성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백금발이야. 한편으로는 사람을 홀리는 게 요사스럽기도 하고. 크크크, 널 처음 봤을 때 이 찬란한 백금발 때문에 제물로 바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흑마법사는 리프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다가 새하얀 목 언저리에 칼을 가져갔다.
"큭."
서걱, 서걱
리프는 고통이 엄습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칼날이 제 목에 닿는 감각 대신,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 무슨 짓을…… !"
"이 아름다운 금발이 피에 젖어 망가지게 할 수야 없지."
리프의 긴 금발을 자른 흑마법사가 성물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고 탁자로 향했다.
흑마법사의 손에 들어간 리프의 금발이 수백 개의 촛불의 불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탁자 옆에는 연구 일지 같은 남은 책과 피 묻은 서류들이 탑을 이루듯 겹겹이 쌓여 있었다.
"크흐흐, 정말 부드러워. 비단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야."
흑마법사가 제 머리카락에 뺨을 비벼대는 모습을 본 리프는 소름이 끼쳤다. 아니, 소름이 끼치는 정도가 아니라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 이제 눈을 꺼낼 차례군. 네 고혹적인 푸른 눈동자를 벽에 장식해둔다면 정말 아름다울 거야."
리프의 머리카락을 탁자에 내려놓은 흑마법사가 빙글 몸을 돌려 리프에게 다가왔다.
"흣! 시, 싫어. 하지 마. 하지 말란 말이다!"
늙은 흑마법사가 제 눈을 도려 내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리프가 격렬하게 몸부림을 쳤다.
"저, 저하! 이스카 님!”
절박하게 이스카를 부르는 리프의 눈가에 공포가 깃들었다. 여기서 아무리 외쳐봤자 제 목소리가 들릴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리프는 이스카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미 한 번 죽어봤기에 죽음이나 고통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스카를 제 두 눈으로 다시는 못 보게 된다는 게 무섭고 괴로웠다.
"네 푸른 눈동자도 내가 잘 보관해주마. 영원히 시들지 않도록."
미친 자의 얼굴을 한 늙은 흑마법사가 리프의 눈가를 향해 예리한 칼끝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완전무장을 한 황실 기사들과 정예병을 태운 준마들이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선두엔 악귀처럼 무서운 얼굴을 한 이스카가 있었다.
분노로 충혈 된 눈, 미처 닦아내지도 못한 타인의 피. 러셀은 미친 듯이 말을 모는 제 주군을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리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런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다. 러셀은 제발 리프가 무사하기만을 빌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스카는 리프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러셀은 광기에 차 황족들을 고문하고 도륙하는 이스카를 지켜보며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을 몇 번이나 느꼈다. 오랫동안 이스카를 곁에서 보좌해 왔지만 그런 무시무시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본능에 각인 된 근원적인 공포.
러셀은 만약 악의 화신이란 게 정말 있다면 그게 바로 이스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스카가 향하고 있는 곳은 흑마법사의 은신처였다.
햄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의식을 잃기 직전, 리프를 납치한 자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보고 했다.
회의실은 삽시간에 지옥의 밑바닥처럼 끔찍한 고문실로 바뀌었다.
리프 때문에 악마로 돌변한 이스카는 귀기서린 눈으로 황족들의 피부와 근육을 산 채로 잡아 듣고 파헤쳤다. 흑마법사를 황도로 불러들인 배후가 황후란 사실을 알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히히힝!
"저기입니다!"
근위기사가 말을 멈춰 세우며 하수구의 입구를 가리켰다. 고귀한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지가 잘린 문둥이 같은 몰골이 된 황후가 흑마법사의 은신처라 일러준 장소가 바로 저곳이었다.
끼기기긱! 쾅!
이스카는 하수구를 가로 막고 있는 두꺼운 쇠창살을 단숨에 칼로 베어버렸다. 하수구에선 온갖 오물 냄새가 났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리프, 어디 있는 거냐!"
이스카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시궁쥐가 돌아다니는 하수구는 비좁고 눅눅했다. 흑마법사의 근거지가 그리 멀지 않음을 알려주듯 횃불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마법진이 언뜻 보였고, 이 세상의 생명체가 아닌 것처럼 끔찍한 마물들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달려들었다가 이스카가 휘두른 칼에 처참하게 찢겨졌다.
리프를 찾아 헤매는 이스카의 눈동자는 피가 뚝뚝 떨어질 것처럼 시뻘건 빛을 띠었다. 러셀은 횃불이 이스카의 눈동자를 비출 때마다 저항하기 힘든 공포를 느꼈다. 이스카의 눈동자 색이 변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할 정신적 여유조차 없었다.
"빌어먹을, 리프!"
이스카는 이를 악물었다. 양쪽 다 붉게 변해버린 눈동자에서 불로 달군 쇠꼬챙이로 찔러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제 안에서 괴물이 날뛰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이스카는 갑갑한 제약 때문에 리프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저, 저하! 이스카 님!”
이스카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절박하게 저를 부르는 리프의 목소리가 하수구 저편에서 들려왔다.
겁에 질린 리프가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스카는 그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삐-, 삐-!
리프의 각막을 긁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던 칼날이 멈췄다.
"이익, 벌써 황자가 여기까지 들이닥치다니!"
침입자를 알리는 경고음이 가득 울려 퍼지자 흑마법사는 황급히 탁자로 향했다.
'황자? 설마, 이스카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위기를 넘긴 리프는 전신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스카가 여기 왔다.
"윽. 으읏!"
어서 이스카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과 흑마법사의 흉계를 알려야한다는 조급함에 휩싸인 리프는 제단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흥,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아직 좋아하긴 일러. 네가 제물로 바쳐질 운명이란 건 바뀌지 않는다."
흑마법사는 가래가 들끓는 목소리로 웃으며 두꺼운 연구서를 휙휙 넘겼다.
'저 자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리프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흑마법사가 들춰보는 두꺼운 책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만약 저 책이 제가 생각하는 물건이 맞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바스커빌의 유산을 훔친 것은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을 대비하기 위해서지."
리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흑마법사가 바로 서 트리아만 제국 마법사들을 죽이면서까지 바스커빌의 연구일지를 훔친 흉수였다. 하지만 그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아직 7서를에 도달하지 못한 흑마법사가 바스커빌의 마법을 시전하면 마나 폭주 현상이 벌어질 것이란 점이었다.
"그만 둬! 당신 능력으론 감당할 수 없는 마법이란 말이다."
"닥쳐라, 고귀한 영혼을 가진 아이여."
흑마법사는 성난 얼굴로 리프의 뺨을 때렸다.
"윽!"
고목나무처럼 메마른 흑마법사에게 뺨을 맞은 리프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저기 불빛이 보인다!"
정예병과 기사들의 고함소리가 어둠저편에서 들려왔다. 미로 같은 지하수로에는 철거덕거리는 소음이 위협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세가 등등하군. 원래는 네놈들도 전부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흑마법사는 동굴 입구를 노려보며 완드를 집어 들었다.
기사들이 든 횃불이 화르륵,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리프, 무사하다면 대답해라, 어서!"
어둑한 동굴 저편에서 이스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스카의 붉은 두 눈은 횃불 때문에 형형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리프는 이스카의 양쪽 눈이 전부 붉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챌 정신이 없었다.
"이스카 님, 오지 말아요. 여기 오면 위험하다고요!"
리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이스카를 향해 절박하게 소리쳤다. 이스카가 저를 구하러 와줘서 기뻤다. 하지만 이스카가 마나 폭주에 휘말리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
"지금 그 말을 진심으로 한 건 아니겠지?"
그러나 이스카가 리프의 경고를 귀담아 들을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리프의 절박한 외침은 이미 반쯤 미쳐 있는 이스카를 더 광폭하고 성마르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어리석게도 도망치지 않는 구나. 그래, 어차피 도망쳐봤자 마법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 마지막으로 만용을 부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흑마법사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검은 보석이 박힌 완드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만용? 만용을 부리는 건 네놈 쪽이겠지."
타인의 피를 뒤집어 쓴 이스카가 싸늘한 얼굴로 검기를 일으켰다.
흑마법사는 두 눈이 붉게 변한 이스카를 보고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가공할만한 바스커빌의 마법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제 본능의 경고를 무시해버렸다.
"너희들 모두 흔적도 없이 불태워주-, 컥?"
제 능력을 과신한 흑마법사가 완드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마나가 역류하며 섬광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크윽, 무슨 일이지?"
"다들 피해!"
마나 폭주가 일어나자 결계가 쳐진 것처럼 공간이 둘로 나뉘었다.
결계 바깥엔 이스카와 제국의 기사들이, 결계 안쪽 영역엔 리프가 있었다. 마나 폭주를 일으킨 흑마법사는 결계 안쪽에도 바깥쪽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섬광이 터진 순간 그의 몸도 산채로 잘게 조각나 동굴 곳곳에 들러붙었기 때문이었다.
"위험합니다. 피하셔야 해요!"
러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회오리바람처림 새하얀 마력 폭풍은 모든 것을 찢어발길 기세로 팽창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리프가 있는 경계 안쪽이 안전한 건 결코 아니었다. 폭풍의 중심엔 마력이 폭주하고 있었고 곧 폭발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스카는...... 무사한 걸까?'
섬광에 휩쓸려 경계 안쪽에 남은 리프가 힘겹게 숨을 삼켰다. 마력의 뒤틀림 때문에 온 몸이 옥죄어 왔다.
이스카가 다치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결계처럼 사방을 에워싼 마력 폭풍 때문에 밖을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안쪽에 남은 이가 저뿐이란 사실이었다. 간신히 주위를 확인한 리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 폭풍에 휩쓸리지 않은 사람들은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충분히 대피할 수 있을 것이다.
리프를 구속하고 있던 밧줄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묶여 있는 게 아닌데도 리프는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납게 회전하는 마력 폭풍에 손이라도 댔다간 흑마법사가 그랬던 것처럼 리프도 산산조각이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
죽음을 예감한 리프는 눈을 감고서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너무 체념이 빠른 것 같기도 했지만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 같은 건 없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도 리프를 구해내 지 못했다.
마력 폭풍이 일어나면 뒤틀린 마나가 자연적으로 소멸될 때까지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이는 바스커빌이 아니라 위대한 수호자인 드래곤들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규모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바스커빌이 죽던 날 그 수많은 드래곤들이 마나 폭풍을 뚫지 못하고 바스라지지 않았던가.
"이스카."
가만히 눈을 감은 리프는 탄식하듯 이스카의 이름을 읊조렸다.
과거에 이미 한 번 죽음을 겪어봤기에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이스카를 다신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리프의 가슴을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아직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는데 이별이 너무 급작스러웠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군."
리프는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여태껏 한 번도 욕심이란 것을 내본 적 없었다. 바스커빌이었을 때도 심심한 성격이었던 건 마찬가지라 뭔가를 잃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이스카와 함께 있으면 기쁘고 행복했다. 행복미란 감정을 처음 느껴본 리프는 앞으로 더 이상 이스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스카가 제게 웃어주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싫었다. 저는 행복해질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바스커빌이 삼백 년 전, 목숨을 바쳐가며 세계의 멸망을 멈추긴 했지만 그 때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너무 많은 생명이 죽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어떤 존재를 배신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저하, 제발! 안 됩니다. 드래곤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리프는 구할 수 없단 말입니다."
경계 너머에서 러셀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리프의 귓가에 희미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직후, 마력의 뒤틀림에 매몰되어가던 리프는 딱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했던 존재의 기운을 느꼈다.
리프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저를 저주한 존재는 삼백 년 전에 사라졌다. 그런데 어째서 왜 그것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숨 막혀......"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저를 집어삼키려는 마력의 뒤틀림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독하게 잔인하군.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건가.'
리프는 제가 상처 입혔던 존재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의식을 잃었다.
자네 그 소문 들었는가. 망령이 나 마왕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고 떠들어대던 대마법사 바스커빌 말이야. 몰라? 이 친구 참 소식 한 번 어둡구먼.
아 글쎄, 놀랍게도 바스커빌이 사실은 마왕을 불러낼 속셈을 가지고 있다더군.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바스커빌을 음해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저런 헛소문을 흘리고 다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오빌린 왕국과 전쟁 중인 나라에서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퍼트린 소문일 수도 있고, 소기의 목적을 거의 다 미루었기에 바스커빌을 팽할 기회만 찾는 오빌린 왕국의 위정자들이 만들어낸 중상일 수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시에 수많은 이들이 바스커빌을 악역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이렇다 할 정치적인 비호세력은 없는 편이 좋다. 고결하고 명망 높은 인물의 몰락은 언제나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게다가 드래곤들까지 9서클에 들어선 괘씸한 인간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바스커빌만큼 희생양에 적합한 상대도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만 승리하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드디어 마왕의 침략을 막는데 온 힘을 쏟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자 함정이었다.
용병으로 구성된 천오백 명의 병사와 함께 전장에 나선 바스커빌이 지평선 저편에서 목격한 광경은 오빌린 왕국의 병사들이 연합군과 함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더 이상 바스커빌이 필요 없어진 오빌린 왕국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연합군과 손을 잡은 것이다.
바스커빌은 충격에 빠졌다. 저야 살만큼 살았지만 그에게 딸려 보낸 병사 천오백은 영문도 모른 채 몰살당해야 했다.
바스커빌은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연합군들과 싸우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십만에 달하는 적군을 상대하며 천오백 명의 목숨을 지키는 일은 제아무리 바스커빌이라도 그리 쉽지 않았다.
결국 전장에서 살아남은 건 바스커빌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연합군의 부탁을 받은 드래곤들이 그를 처단하기 위해 대륙 전역에서 몰려왔다.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는 건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바스커빌은 태초의 언어로 만들어진 흑마법서를 떠올리며 소환진을 완성했다.
사실 이건 도박에 가까웠다. 제가 '그것'을 소환하는데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제발 부름에 응답해다오, 이름 없는 존재여.'
바스커빌은 제 생명력과 마나를 모두 쥐어짜 차원의 문을 열었다.
'누구냐.'
오로지 세계의 멸망과 파괴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왕 혹은 마신이라고 불리는 그것의 목소리는 바스커빌의 예상과 달리 차분했다.
'바스커빌.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그대와 만나길 원한 자.'
'바스커빌. 그렇군.'
그것은 신기하다는 듯 연신 바스커빌의 이름을 되뇌었다. 마치 단어를 처음 배운 아이 같은 반응이었다.
바스커빌은 불편한 감정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낯선 존재를 향한 호기심과 호감.
그것은 바스커빌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스커빌에게 흥미를 느낀 건 비단 바스커빌이 소환자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바스커빌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저를 다그쳤다. 제게 호의를 보이는 존재는 마왕이었다. 그리고 이 변덕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쿨럭, 내가 그대를 불렀으니 소원을 들어다오.'
바스커빌은 피를 토해내며 본론을 꺼냈다.
'청하라, 인간. 그대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다.'
'나는 네게 봉인 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을 멸망시킬 수 없도록.'
'그것이...... 진정 그대가 원하는 바인가?'
바스커빌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하게 잔인하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건가.'
그것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그렇다.......'
바스커빌의 얼굴 위로 결국 죄책감이 스쳤다.
'제대로 놀아났군.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넌 날 원한 게 아니라 인간들을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라니.'
그것은 소환이나 계약과는 관계없이 바스커빌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존재가 저를 배신했다. 그것이 느낀 분노와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렇게 인간들이 소중하다니, 네 청을 들어주마. 하지만 기억해라. 나는 너를 영원히 증오하고 저주할 것이다. 너에게 또 배신당하지 않도록.'
'이해한다.'
바스커빌은 울컥 검붉은 피를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겐 저를 미워할 권리가 있었다.
'정녕 내 것이 되어줄 수는 없는 거냐?'
바스커빌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것이 목소리에 간절한 감정을 담아 제게 묻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마왕의 하수인 따위 되고 싶지 않다.'
바스커빌은 그것이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진 말을 했다. 저는 곧 죽을 것이고 그것은 봉인 될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틀어진 관계가 된 이상 그것은 저를 철저히 미워하는 게 나았다.
'내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에 바스커빌은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일부러 입을 닫은 것도 있었지만 목구멍에 피가 가득차서 말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를 낼 수 가 없었다.
대화도 바스커빌의 기억도 여기서 끝이 났다.
바스커빌이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리프는 불쑥 생각했다. 그때 제가 뭐라고 대답했어야 했을까.
아니, 그때 그것은 침묵하는 바스커빌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답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봉인되었고, 저는 곧 마력 폭풍에 휩쓸려 죽을 테니까.
그런데 의문스러운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그것의 기운이 점점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존재감이 강해질수록 리프의 의식 또한 선명해졌다.
"리프!"
이스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프는 환청이겠거니, 라고 생각했다. 마력 폭풍이 폭발하기 직전인데 이스카의 목소리가 이리 분명하게 들릴 리 없었다.
하지만 이스카는 제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라도 하듯 리프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앞으로 몸이 쏠린 리프는 설마? 라고 생각하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스카 님?"
마력 폭풍의 균열 사이로 상체가 끌려나온 리프의 눈앞에 이스카가 있었다. 처음엔 제가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윙윙, 하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 마나 폭풍과 짧게 흩날리는 제 머리카락, 그리고 손목을 움켜잡고 있는 이스카의 악력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마나 폭풍에 균열을 낼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인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게다가 이스카의 두 눈이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심지어는 리프가 전에 보았던 기이한 형태의 마법진도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봉인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그 안에 있을 셈이냐?"
이스카가 눈썹을 비틀었다.
이스카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 순간 리프는 이스카에게서 흔들리지 않는 감정의 견고함을 느꼈다. 이스카의 눈동자는 색깔만 다를 뿐, 저를 바라보는 눈빛과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변한 게 없었다.
믿어도 되는 걸까. 선택은 제 몫이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못 걷겠어요."
리프는 이게 과연 옳은 걸까, 라는 혼란을 느끼면서도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군."
이스카는 설핏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리프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앗!"
느닷없이 허공에 떠오르게 된 리프는 습관적으로 이스카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제게 익숙한 감각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스카의 단단한 팔, 체취, 온기.
리프는 입술을 깨물며 이스카에게 있는 힘껏 매달렸다.
좋아한다. 이사람이 좋았다.
여러 가지로 의문스럽고 불안헀지만,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이스카는 리프가 제게 매달려오자 가녀린 아이라도 달래듯 등을 두드렸다. 너른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어 비록 리프는 보지 못했지만 이스카의 얼굴엔 안도와 기쁨이 떠올라 있었다.
삼백 년 전에는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닿기조 못했지만, 이젠 둘 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기에 서로 만질 수 있었다.
금발 소년과 키가 큰 남자는 마력 폭풍이 사그라질 때까지 그렇게 서로를 말없이 끌어안고서 체온과 감정을 나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