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4)

쿵쾅, 쿵쾅, 탕, 탕탕

황궁의 중앙광장에서 공사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인부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중앙 광장에 무대와 노대를 설치하고 있는 이유는 곧 있을 축제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저하, 축제 선포식 때 저하께서 연설하실 원고이옵니다."

내무대신이 이스카에게 돌돌 말린 종이를 내밀었다. 와병 중인 황제 대신 축제를 총괄하고 책임지게 된 이스카는 대연회장 발코니에서 중앙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읽을 것도 없이 고루하고 지루하군. 분량을 절반 이하로 줄여."

인장을 뜯어 돌돌 말린 종이를 편 이스카는 빼곡하게 적힌 글씨를 슥 한 번 훑어보고서는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다시 작성해오도록 하겠습니다."

내무대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숙였다. 밤새 공들여 작성한 연설문을 퇴짜 맡은 탓인지 내무대신의 얼굴에 주름이 갑자기 하나 더 늘었다.

"남은 일정은 어떻게 되지?”

팔짱을 끼고서 말없이 제 궁이 있는 서쪽을 응시하던 이스카가 갑자기 툭 질문을 던졌다. 그의 머릿속엔 오늘 새벽, 저를 빤히 올려다보던 리프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예?"

내무대신은 '내가 벌써 가는귀가 먹은 것인가?' 라고 의심할 만큼 크게 당황했다. 뭘 확인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데다, 철두철미하기까지 한 그의 주군은 원래 다음 일정 같은 걸 물어보는 분이 아니었다.

"어디 긴히 방문하셔야할 곳이라도……?" 

"아니, 없어."

이스카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리프의 새하얀 얼굴을 뇌리에서 억지로 지워버렸다. 짬을 내서 리프를 만나고 오려면 얼마든지 만나러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만 해선 관계에 진전이 없었다.

"이스카리오테! 이 반란군 수괴 같은 놈! 어서 나와 면상을 보여라."

퀭하게 마른 남자가 중앙광장에 난입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황태자군요. 사냥을 나갈 만큼 팔팔해졌다더니, 이거 진짜 마족과 계약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내무대신이 못 볼꼴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놈이 역심을 품은 게 아니라면 축제 때 드래곤들을 배알할 권리를 당장 내놓아라. 황위를 이을 정당한 후계자인 이 몸에게 어서 복종하란 말이다."

"전하, 제발 그만 하십시오! 어미의 부탁입니다."

광장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추태를 부리는 황태자를 뜯어말리는 이는 오직 황후뿐이었다. 관료들과 귀족들, 그리고 시종들은 난동을 피우는 황태자 주변을 크게 우회해 지나가거나 뒷걸음질로 슬금슬금 멀어졌다.

"아들을 위해 체면을 똥통에 처박는 치욕까지 감내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모정이로군."

이스카는 황태자의 다리에 매달린 황후가 측은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하지만 창가에 비스듬히 기댄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한 때 위협적이었던 황후파의 세는 이제 꺾일 대로 꺾여, 털 빠진 늙은 개만도 못했다. 황후와 황태자는 황태자가 건강해지기만 하면 다시 권세를 되찾을 수 잇을 것이라 믿었겠지만 그들의 정치 생명은 이미 명을 다한 지 오래였다. 심지어 오늘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그나마 붙어 있던 몇 안 되는 지지 세력들도 전부 떨어져나갈 테고.

"거, 개가 왈왈 짖어 대서 시끄러운데 사람 좀 내려 보내서 치울까요?”

햄튼이 귀를 후비며 창밖을 흘끔 바라봤다.

"아쉽지만 일꾼들이 밑에서 작업을 하는데 방해가 되니 이쯤에서 슬슬 쫓아내는 게 좋을 것 같군.”

이스카는 두 모자가 망신을 당하는 광경을 더 지켜볼 수 없게 되어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가 곰 만한 햄튼은 속으로 '내가 주군으로 모시는 양반이긴 하지만 정말 성격 한 번 고약하게 나쁘다니까." 라고 중얼거리며 근위병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중앙 광장을 조망한 이스카는 대연회장 1층으로 내려갔다.

"근데, 오늘은 꼬맹이한테 안 가보실 겁니까?"

부인이 싸준 샌드위치를 간식으로 우적우적 먹으며 햄튼이 물었다.

"바쁜 것 안 보이나?”

"에이, 저하가 언제 그런 거 일일이 따지셨다고."

햄튼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넣었다.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저 녀석이 들쑤셔놨군.'

이스카는 골치가 아프게 됐다는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금 당장 리프를 만나러가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망과 제가 원하는 상황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참아야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거세게 충돌했다.

얼마 전부터 리프가 제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슬슬 리프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바꿔야 했다. 당근과 채찍, 밀고 당기기는 인간관계의 기본이었다.

"거, 머리 굴려가며 밀고 당기기를 백번 해봐야 아무 소용없는데."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주제에 용케도 기혼자가 된 햄튼이 솔직한 게 최고라는 식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인부들이 건축자재를 들고 돌아다니는 중앙 광장 저편에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햄튼을 노려보다가 무심결에 활짝 열린 대연회장 문에 시선을 던진 이스카는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환각인가?'

곱게 차려입은 금발 소년이 마차에서 내렸다.

이스카는 처음엔 제가 환각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새벽에 저를 빤히 올려다보던 리프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니 환각을 봐도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환영임이 분명한 리프가 오늘 새벽처럼 쇄골이 훤히 드러나는 잠옷 차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금발 소년은 제 옷차림이 어색한지 단추가 잔뜩 달린 조끼를 만지작거렸다.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옷을 차려입은 리프 곁에는 시녀장 테사가 있었다.

"설마……?"

이스카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금발 소년이 제가 만들어낸 환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사고가 정지하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리프가 저를 만나러 왔다.

이스카는 손에 들고 있던 설계도면을 내팽개치고서 대회의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하? 저하, 잠깐만요. 도대체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햄튼과 내무대신이 깜짝 놀라 이스카를 쳐다봤지만 그들의 외침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중앙 광장은 여기가 과연 황궁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시끄럽고 사람이 많았다. 자재를 들어 나르는 인부들 사이엔 칙칙한 후드를 뒤집어 쓴 음침한 노인도 섞여 있었다.

황자의 궁에서 출발한 마차가 광장에 멈춰 섰다. 시녀장 테사와 함께 마차에서 내린 리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마차의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이렇게 자수가 많이 들어간 옷을 입어 본 건 전생에 예복을 입었을 때 외엔 처음이로군.'

사물을 검게 반사하는 유리창에 비친 제 상반신을 보고 있으려니 작게 한숨이 나왔다. 리프가 과거에 입었던 의복 중 가장 호화스러웠던 옷은 6서클 마스터 칭호를 받기 위해 입었던 순백의 로브였다.

테사와 마리엔느는 화려한 옷을 입은 리프를 보고 유서 깊은 귀족가의 막내 도련님 같다며 아낌없이 칭찬을 했다.

하지만 정작 리프는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이 영 어색하기만 했다. 특히 조끼와 셔츠가 허리를 강조하듯 그의 몸을 꽉 조여서 움직일 때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이 보면…… 꼴사납게 이게 뭐냐고 화를 내려나.'

리프는 이스카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머쓱한 얼굴로 제 뺨을 문질렀다. 소매에 달린 프릴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실 리프는 마법사로서 산 기간이 너무 오래 길어서 그런지 미추에 둔감한 편이었다.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 완벽한 대칭적 균형을 이룬 마법진이나 논리적인 언어로 구성된 마법수식, 혹은 자연 경광 정도가 다였다.

이런 리프가 제가 걸친 옷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이스카때문이었다. 이스카가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었다고 대뜸 인상을 쓸까봐 걱정이 된 것이다.

이스카는 종종 리프를 못마땅하다는 눈길로 바라보며 못난이라고 중얼거렸다.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한 이스카가 저리 말할 정도라면 저는 썩 봐줄만한 외모가 아닌 게 분명했다.

쿵, 쾅쾅, 탕탕!

"긴장 풀렴. 저하는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공사 소음이 시끄러운지 테사가 한쪽 귀를 막으며 장담했다.

"벼, 별로 그런 것 때문에 긴장한 게 아닙니다. 전 그저 저하가 밖에 나올 때 얼굴을 가리라고 하신 명령 때문에……."

테사에게 속내를 들켰다는 사실에 당황한 리프가 귀를 빨갛게 물들였다. 하 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정말 그럴까?' 라는 기대가 일어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허어, 저 소년. 어느 댁 자제인지 혹시 아시오?”

"모르겠습니다. 저만한 미모를 가진 귀족 자제라면 도성에 소문이 나도 진즉 파다하게 났을 텐데."

광장을 지나다니던 귀족들이 수도에서 숲의 정령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리프를 바라보며 술렁거릴 때였다.

"어?"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 리프의 머리에 겉옷을 덮어 씌웠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지자 리프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리프가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제 얼굴을 뒤덮은 옷에서 익숙한 체취가 났기 때문이었다.

"저하……?"

보쌈을 당하는 신부처럼 머리에 외투를 뒤집어 쓴 리프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저를 습격한 남자에게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헉!"

괴한이 반 강제적으로 봉사가 된 리프의 가녀린 손목을 움켜잡더니 번쩍 안아 올렸다.

"저, 저하! 리프?"

"시녀장님?"

치맛자락을 붙들고서 발을 동동 구르는 테사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리프는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지만 이스카의 외투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테사를 볼 수 없었다.

이스카는 대회의장으로 향했다. 광장에 있던 귀족들은 얼굴이 하나같이 창백해진 채로 구석으로 흩어졌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으며 광장을 가로지르는 이스카는 리프를 쳐다보는 것들은 죄다 눈을 멀게 만들어버리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쾅!

"다들 나가!"

보쌈이라도 하듯 리프를 안고서 대연회장으로 들이닥친 이스카가 소리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햄튼과 내무대신이 서둘러 대연회장을 빠져 나가자 사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대연회장에 단 둘이 남게 되자 이스카가 리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옷 너머로 들려오는 이스카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네 녀석 때문에 내가 얼마 놀랬는지 아느냐?" 

역시…… 멋대로 궁을 벗어나서 화가 난 모양이다.

"죄송해요……"

리프는 이스카가 제게 덮어씌웠던 겉옷을 머뭇머뭇 잡아당겼다. 시야가 훤히 드러났지만 그의 시선은 발치를 향해 있었다.

"책망하는 거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다른 놈들에게 네 얼굴을 보여준 건 확실히 불쾌하긴 했지만."

이스카는 리프에게 눈길을 주었던 귀족들을 아주 씹어 먹을 것처럼 살벌하게 노려봤으면서 이제와 시치미를 뚝 뗐다.

'화가 난 게 아니었나?'

못된 장난을 치다 벌을 받게 된 아이처럼 기죽어 있던 리프는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스카의 목소리에서 노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언짢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스카의 묵직하고 차분한 저음엔 평소와 다르게 들뜬 기색이 완연했다.

리프는 원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올렸다.

"네가 날 만나러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스카가 리프의 뺨을 쓰다듬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경망스러운 햄튼 놈의 말 대로였다. 밀고 당기기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중앙 광장에 서 있는 제 작은 새를 발견한 순간, 리프의 애를 태워보겠다는 같잖은 계획 따윈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져버렸으니까.

"요망한 놈."

이스카는 어리바리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리프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 순해빠지고 어수룩한 녀석에게 정치적으로 노련한 제가 가차 없이 휘둘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싫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결단코 아니었다.

"윽."

이스카의 가슴에 얼굴을 박은 리프의 신음이 화려하고 웅장한 대연회장의 천장을 타고 멀리 울려 퍼졌다.

"너는 지금 내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 절대 모를 거다."

이스카가 장담이라도 하듯 확신에 찬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리프는 오히려 그 때 깨달았다.

이 사람은 정말 날 좋아하는 구나, 하고.

이스카가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리프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들었던 고백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그것을 수용하기엔 리프의 몸도 정신도 너무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제게 쏟아지는 이스카의 다정함이 왜 특별하고 타인과 다를 수밖에 없는 건지,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하와 함께 있다 보면 네가 뭘 원하는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거야'

시녀장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바스락ㅡ

리프는 테사가 맡긴 서류가 들어있는 안주머니 위를 만졌다. 이걸 이스카에게 주고나면 그는 황자의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야 뭔가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단서가 보이는 것 같은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저하 옆에 있으면 일하시는데 방해가 되겠죠?"

리프가 무의식적으로 불쑥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이스카가 눈썹을 비틀며 반문했다.

"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리프의 얼굴이 구제불능일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연히 이스카는 그 모습을 보고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다.

"시, 신경 쓰지 마세요.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에요.”

리프가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이스카가 눈을 번득번득 빛내며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별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건 네 소관이 아니다, 리프."

이스카의 입꼬리가 삭 올라갔다. 비단 셔츠에 감싸인 리프의 팔을 제 가슴 쪽으로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는 불길하리만치 다정했다.

"진짜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에요! 제발 부탁이니까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저하 일 하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다니까요.”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걸까.

당황할 대로 당황한 리프는 손목을 비틀며 이스카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허리를 꽉 조이는 불편한 조끼와 비단셔츠 때문에 갑옷 속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네가 처음으로 원하는 걸 말했는데 그럴 수야 없지."

음험한 미소를 입가에 떤 이스카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이 순진하다 못해 뻣뻣하고, 요령까지 없어 사랑스러운 존재가 그냥 부탁을 한 것도 아니고 저와 같이 있고 싶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그런데 그걸 못 들은 걸로 해달라니, 헛웃음이 나올 만큼 가당치 않은 소리였다.

"오늘은 특별히 황궁 밖으로 나가 보는 것도 좋겠군. 날이 날이니만큼 황도에 사람들이 바글대겠지만."

"예?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을……!"

이스카의 손에 대연회장 밖으로 질질 끌려가던 리프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나와 같이 있고 싶다고 말했잖느냐."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리프가 펄쩍 뛰었다. 하지만 이미 리프의 말을 저 좋을 대로 편집해 들은 이스카에겐 씨알이 먹힐 리 없었다.

대연회장 건물 계단 아래엔 내무대신인 비스바덴 정과 햄튼, 그리고 시녀장 테사가 서 있었다. 하지만 이스카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리프가 테사나 햄튼에게 말을 건넬 틈 따윈 없었다.

"저, 저하! 잠깐만요!"

어느 틈엔가 마차에 밀어 넣어진 리프가 창백한 얼굴로 바둥거렸다.

"축제 준비는 비스바덴 정이 알아서 잘 처리할 거다. 그러니 내 일을 방해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이스카가 일탈이라도 벌이는 소년처럼 씩 웃었다.

그 순간 리프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

리프는 명한 얼굴로 이스카를 올려다봤다. 저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는 이스카가 예뻤다. 마치 사방에 모래밖에 없는 황량한 사막에 생명력을 잔뜩 머금은 꽃이 핀 느낌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마차가 리프의 심장처럼 흔들거렸다.

곧 황제가 될 권력자에 저 보다 덩치가 두 배쯤 큰 사내.

저 사람에게 예쁘다는 수식어 따위를 붙인다는 게 어불성설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눈꼬리가 접힌 모습 보고 있노라면 숨이 턱 막혀서, 리프는 생각을 고쳐먹을 마음이 조금도 생기질 않았다.

카드모스 제국의 수도 한 복판에 선 리프는 그야말로 딴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정말 못 알아볼 만큼 달라졌군.'

거리는 활기찼다. 귀족만큼은 아니지만 풍성하고 화려한 색감의 의복을 걸친 사람들과 이색적이고 다양한 종류의 상점들,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모의 남녀, 그리고 가로등 아래로 늘어져 흔들리는 축제 현수막…….

자극적인 문구의 축제 홍보물들을 발견한 리프의 얼굴이 흐려졌다. 하지만 그는 곧 어떤 다짐이라도 하듯 이스카의 손을 꽉 잡았다.

내일 모레가 바로 축제였다. 밖으로 나온 이상 어딜 가든 축제와 관련된 것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이스카가 기껏 저를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황도로 데리고 나와 줬는데 괴로운 과거를 떠올리며 즐거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지?”

"아, 그게…… 저기 홍차 전문점이 있어서요."

리프는 급히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어쩌지, 어쩌지 하며 주변을 곁눈질하는 리프의 눈에 홍차 잎을 파는 가게가 불쑥 들어온 것이다.

"저길 들어가 보고 싶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거냐. 바쁜 것도 아니니 잠깐 들르도록 하지."

말을 하지 그랬냐는 듯 피식 웃은 이스카는 길을 건넜다.

"앗, 그게 아니라……."

리프는 이스카에게 끌려가듯 겅중겅중 걸음을 옮겼다. 원래 그는 이스카에게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다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홍차가게가 가까워지자 그 말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 너머엔 홍차 잎을 담은 철제 통들이 차곡차곡 전시되어 있었다. 견물생심이라고 그 광정을 보고나니 안에 들어가 구경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버렸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어서 오십시오."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남자가 주인인지 계산대 저편에서 이스카와 리프를 반겼다.

"찾으시는 차가 있나요, 도련님?”

도련님이란 소리에 움찔 당황한 리프는 이스카를 올려다봤다. 아마도 분에 맞지 않는 비단옷을 입고 있어서 리프를 부유한 평민쯤 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둘러보려는 거니 방해하지 말도록."

이스카는 주인장의 착각을 정정하기는커녕 태연한 얼굴로 리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인상 좋은 주인장은 제게 명령을 내리는 이스카를 보고 꿀꺽 생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알겠습니다."

잠시 잔뜩 얼어붙었던 그는 곧 귀족을 대할 때보다도 훨씬 더 공손한 태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주인장이 얼굴만 보고 이스카가 황자나 황족이란 사실을 알아본 눈치는 아니었다. 아마도 주인장은 이스카의 옷차림과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으로 막연히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고 짐작한 듯했다.

"저기, 저ㅎ……."

리프는 소곤대는 목소리로 이스카를 부르려고 하다가 얼른 저하라는 단어를 목구멍으로 삼켰다. 단 둘이 있다면 모를까 주인장이 들을지도 모르는데 이스카의 신분을 드러내는 호칭을 사용해도 되는 걸까, 라고 생각한 것이다. 

'저하라고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리프가 철제 홍차 통을 만지작거리며 난감해 하고 있는데 이스카가 언짢아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홍차 통을 빼앗았다.

"내 이름을 부르면 되는 걸 뭘 그리 곤란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거냐."

이스카는 설마 내 이름도 모르는 거냐는 눈빛으로 리프를 노려보았다.

"아, 알긴 알지만."

"그럼 불러."

사각사각 소리가 나도록 홍차 통을 흔들어보고는 제자리로 내려놓은 이스카가 리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치 뭔가 기대라도 하는 사람처럼.

"지금요?”

"그래."

이스카의 어조가 단호해서 리프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노예가 황족인 이스카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건 국법에 어긋났다. 하지만 이스카가 그 사실을 몰라서 리프에게 이름을 불러보라는 요구를 한 건 아닐 터였다.

"어서."

"이스카님……."

이스카가 종용하자 리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래도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변성기가 찾아온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났다.

'더워.'

딴청이라도 부리듯 손을 뻗어 도자기로 된 홍차 통을 만지는 리프의 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스카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나니까 가슴 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성이나 직책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건 친밀한 사람들끼리 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왠지 이스카와 좀 더 가까워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착하구나."

통유리로 오후의 햇살이 강하게 비쳐들었다. 이스카는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고서 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른한 빛에 휩싸인 이스카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만져보고 싶다. 리프는 멍한 눈으로 이스카를 올려다보며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의 귓가엔 찰랑, 찰랑하고 부드러운 빛깔의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

가까워졌다고 느낀 건 리프뿐만이 아니었는지 이스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불현듯 리프는 아까 대연회장에서 느꼈던 감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이스카가 기뻐하는 모습이 좋았다. 이스카가 기뻐하는 하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었다.

"방금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내 이름을 불러라, 리프."

"하지만 황궁에선 함부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바 아니다."

이스카가 강경한 태도로 리프의 말을 잘랐다.

"중요한 건 내가 그걸 원한다는 거지. 넌 싫은 거냐?”

리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껏 고개를 저었다.

이스카를 이름으로 부르는 거, 싫기는커녕 오히려…… 그러니까 오히려.

딸랑, 딸랑

홍차 전문점에 손님이 들어왔는지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이 들어 오자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휩싸인 리프는 황급히 제 앞에 가득 쌓인 홍차 상자들을 살펴보는 척했다.

하지만 홍차의 상표 따위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는데다가, 가게로 들어온 여자들이 얼굴을 붉히며 이스카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홍차 전문점에서 나온 리프는 아까는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을 의식하게 됐다. 이스카의 주변에 얽혀드는 여인들의 뜨거운 시선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네 녀석 지금, 내가 옆에 있는데 여자들을 곁눈질 한 거냐?"

리프가 저 아닌 딴 사람을 쳐다본다는 것을 알아챈 이스카가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리프가 이성에게 호기심을 품을 나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카는 그것을 용인하거나 이해해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리프가 드물게 화가 난 사람처럼 얼굴을 굳히고서 걸음을 재우쳤다. 그는 저를 불편하게 하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노인네가 참 추하기도 하지, 라고 중얼거리며 속을 까맣게 태웠다.

"저 녀석이."

이스카는 헛웃음을 흘리며 제 손을 잡아당기는 리프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도리어 제가 역정을 내다니 기가 막힌다는 눈빛이었다.

'이상하군.'

이스카는 저를 잡아끄는 리프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리프의 반응을 보아하니 방금 부정한 대로 딱히 여자들에게 관심이 있어서 쳐다본 게 아닌 것 같은 눈치였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스카는 의혹을 품었다.

그러나 그는 곧 리프가 한눈을 판 게 아니라면 됐다는 생각하며 리프에게 붙잡힌 손에 시선을 던졌다. 쿵쿵 소리가 나도록 발걸음을 내딛는 리프가 제 것을 빼앗기기 싫다는 듯 그 어느 때보다 제 손을 꽉 붙든 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리프가 이리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분수대가 힘차게 물을 뿜어대는 광장에는 여행객들과 시민들로 북적였다.

이스카와 함께 황도 곳곳을 돌아다니다 광장에 들른 리프는 인파를 흘끗 바라보다 뭔가를 발견하고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광장 중앙에 바스커빌의 모습을 본 딴 허수아비가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신경 쓰지 마……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잘 알고 있잖아.'

모처럼 즐거운 기분에 휩싸여 있던 리프는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교수대 옆엔 사람들이 지나가다 돌팔매질을 할 수 있도록 죽창과 상자에 돌이 가득 담아 두었다. 곧 신성한 승리의 날 축제인데다가 바스커빌을 대역적으로 알고 있는 시민들은 매우 당연하다는 듯 돌을 주워들어 이미 만신창이가 된 바스커빌의 인형을 향해 집어던졌다.

"안색이 안 좋군. 많이 걸어 다녀서 피곤한 거냐."

리프가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가늘게 몸을 떨자 이스카는 궁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마차를 부르려 했다.

"피, 피곤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비틀거리던 리프는 이스카의 옷깃을 꽉 움켜잡고서 고개를 저었다.

"내 눈엔 안 괜찮아 보여.”

"정말이에요.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것뿐이에요."

이스카의 품에 기댄 리프는 눈을 질끈 감고서 저건 단지 인형에 불과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당한 처우를 받는 건 괴롭지만 그들을 탓할 순 없었다. 진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또한 바스커빌은 그 어떤 대가나 칭송을 바라고서 마왕의 강림을 저지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앉을 곳을 찾는 게 좋겠군."

이스카는 무엇 때문에 놀란 거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스카는 그저 교수대에 매달려 삐걱삐걱 흔들거리는 바스커빌의 모형을 잠시 말없이 노려보다가 리프를 벤치로 데려갔다.

벤치에 앉은 리프는 이스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오빌런 공국과 대륙 연합국들이 평원에서 마지막 결전을 치르던 날처럼 석양이 빠르게 지기 시작했다. 지평선에 걸린 석양은 마치 녹아내리는 것처럼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저 멀리 보이는 새하얀 신전들과 가로등 그리고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도 전부 피를 뒤집어 쓴 것처럼 새빨갛게 보였다.

"바스커빌이 악인인 건 맞지만, 몇 가지 잘못 알려진 일들이 있다."

"잘못, 알려진 일들이라니요?”

힘없이 이스카의 어깨에 기대 있던 리프가 움찔 놀라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또 갈라져 나왔다. 어쩌면 또래보다 성장이 늦된 그의 몸에 변성기가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예를 들면 오빌런 공국과의 일화 같은 것들. 사람들은 사악한 바스커빌이 오빌런 공국의 통치자를 흑마법으로 현혹시켜 전쟁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그 시대 정황을 따져보면 오히려 이용을 당한 건 바스커빌 쪽이었지. 그렇다고 해서 바스커빌이 마왕을 불러내려고 했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지만 말이다."

리프는 이스카가 뒷말을 잇기를 기다리며 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이스카의 옷깃을 꽉 쥔 그의 눈동자엔 과거의 일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새림니르 오빌런은 교활하고 질 나쁜 전형적인 야심가였다. 제국으로부터 독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지만 실상은 제국을, 더 나아가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길 속셈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그걸……."

눈을 크게 벌린 리프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대륙연합군과 드래곤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왜곡된 역사를 이스카가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놀래게 만든 것이다.

"바스커빌의 연구일지에 대한 보고서를 러셀에게 받고 있으니까."

이스카는 무심한 얼굴로 리프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헝클어트렸다.

"몇 가지 정황상 납득이 가질 않는 기록이 있어서 사료를 뒤져보니 저런 결론이 내려지더군."

"그렇군요."

고개를 숙인 리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바스커빌에게 가해진 부당한 오해 중 하나 풀렸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준 이가 다름 아닌 이스카란 점이 리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불길하리만치 붉던 노을이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하늘에 땅거미가 내려왔다. 어둑하고 파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둔 신전 방문자들의 모습이 그림자인형처럼 까맣게 보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씩 제갈 길을 찾아 흩어지는 광경은 쓸쓸함과 공허함을 자아내기 만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리프는 외롭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제가 손에 쥐고 있는 찻잔과 머리 위로 흐르는 구름의 물결, 어깨에 닿은 이스카의 체온. 오히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이스카와 공유하고 있다는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기분이 좋았다.

충실한 일과를 마치고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부드럽고 평화로운 감각이 리프의 어깨를 감쌌다. 어쩌면 과거에 한 번 죽었던 제가 다시 태어난 건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리프는 마왕을 막아낸 대가로 불행을 짊어지게 됐다. 바스커빌에게 씌워진 오욕과 감당하기 힘든 음해들. 사람들을 구했으니 저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늘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이스카와 함께 지내면서 처음으로

행복하단 감정을 느낀 것이다.

'행복…… 하다고?'

리프는 놀란 얼굴을 하고서 찻잔을 벤치에 내려놓았다.

충격에 빠진 리프는 고장 난 기계인형처럼 이스카를 올려다보았다. 사위가 어두워져서 이스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게 안타깝고 조바심이 났다.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이 어둠을 제 손으로 치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그러는 거지?”

이스카의 차분한 저음이 듣기 좋았다.

리프는 불현듯 제가 오늘 아침에 이스카에게 하고자 했던 말의 조각이 무엇이었는지 제 마음 속에서 찾아냈다.

이스카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해서 같이 있고 싶었다. 그리고 이스카도 저와 함께 있을 때 같은 감정을 느끼길 원했다.

이스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길 원했던 것은, 제가 이스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저는……."

리프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감정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오늘 아침과 달리 그는 제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명확히 알게 됐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엔 제 마음을 전해야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처음 느껴본 이 설레는 감정을 이스카에게 전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에겐 비밀이 있었다. 말할 수도 말해봤자 믿어주지 않을 게 분명한. 초조한 기분에 휩싸인 리프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간절한 눈빛으로 이스카를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궁으로 돌아가서 하도록 하지. 시간이 많이 늦었어."

이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안 돼요."

리프는 반사적으로 이스카의 팔을 붙들었다. 그 순간 어떤 계시라도 내려온 것처럼 거리에 일렬로 선 가로등이 탁탁, 소리를 내며 켜졌다.

"왜, 궁에 돌아가기 싫은 거냐?”

주홍빛 가로등을 등진 이스카가 물었다.

"네. 조금만 더 밖에 있다가 가요."

리프는 가로등의 불빛이 눈부시다고 생각하며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궁으로 돌아가면 제 감정을 전할 용기를 내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하늘에 설탕을 뿌린 것처럼 별이 반짝거렸다.

조명을 허공에 여러 개 단 야외 선술집은 축제라는 특수를 맞아 발 디딜 틈 없이 복작거렸다. 여행객들과 황도의 시민들, 그리고 축제 선포식 때 등장할 드래곤 때문인지 타국에서 온 마법사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주문하신 케르비시아 나왔습니다!"

여급은 맥주잔을 한 손에 네 개씩 들고 테이블 사이를 바삐 움직였다. 손님들은 암말의 젖을 가공한 시드르, 슈납스라고 불리는 독한 소주, 럼 등등에 고기를 곁들어 먹으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정말…… 정신없네요."

이스카와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은 리프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방에서 낯선 억양이 혼재해 들려오고 각양각색의 계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했다. 쇠퇴해가는 마법, 정치 및 외교 문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사업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 여자를 유혹하는 방법 등등 선술집은 그야말로 세계의 축소판이었다.

"익숙해지면 재미있을 거다."

이스카가 피식 웃으며 흑맥주를 마셨다. 입이 워낙 까다로운 사람이라 서민이 마시는 조악한 음료는 마시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스카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보통 맥주랑 다르게 검은 빛을 띤 맥주를 두 잔이나 비웠다.

"지금도 충분히 재미있어요."

리프는 우유 잔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조금 시끄럽긴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정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리프는 방탕하면서도 자유스러운 분위기화 활력이 넘치는 이곳이 퍽 마음에 들었다. 기회만 된다면 또 이스카와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래. 다른 사람이나, 혼자가 아닌 '이스카와 함께'

리프는 맥주를 마시는 이스카를 몰래 몰래 훔쳐봤다. 저 사람이 좋았다. 이기적이고 사납지만 그만큼 아름다운데다 다정한 면모도 가지고 있는 사내.

리프는 이스카에게 제 감정을 어떻게 전달해야할지 몰라 답답했다.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면 충분한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황궁에 돌아가지 않았는데 너무나 어려운 일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꽃이라도 있다면 이스카에게 바치련만.

리프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제 빈 손을 바라봤다. 꽃바구니를 든 아주머니가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꽃을 파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건 바로 그 때였다.

제게 꼭 필요한 것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나자 리프는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리프는 아주머니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들고 있는 바구니 속 빨간 장미들이었지만.

'어떡하지?'

리프는 애가 탔다. 얼른 저 꽃을 사서 이스카에게 주고 싶지만 그에겐 돈이 없었던 것이다.

황혼과 고뇌의 탑 지하도서관에 숨겨둔 은화들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 은화들이라면 꽃바구니를 통째로 사고도 남는다는 생각을 하니 제 빈 손이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유령처럼 기척 없이 황태자의 궁으로 향하던 노인은 빨랫감이 잔뜩 든 통을 들고서 어디론가 향하는 어린 소녀를 발견했다. 어리고 순수할수록 영혼의 가치는 올라가는 법이었다. 흑마법사는 보라색 빛이 도는 입술 끝을 슬그머니 비틀며 소녀에게 접근했다. 근처에 근위병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지만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탁실을 찾아가던 소녀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공간 저편에서 손을 쓱 뻗은 흑마법사에게 납치 되었다. 소녀가 서 있던 자리엔

옷가지들과 바구니만 남아 흙바닥에 흐트러졌다. 근위병들은 소녀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척척 열을 맞춰 건물 귀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잠시 후 소녀는 하수구와 연결된 어느 지하 동굴에서 눈을 떴다. 축축하고 어둑한 지하실 중앙엔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주변엔 피를 촉매제로 사용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지하 동굴 곳곳에선 누런빛을 떤 수백 개의 양초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흑마법사여, 저 아이도 전하의 병환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제물인가?"

금실 자수가 놓아진 자줏빛 공단 외투를 입은 고귀한 여인의 목소리가 촛농 자국이 종유석처럼 말라붙은 지하 동굴에 울려 퍼졌다. 나이가 지긋한 여인은 발가벗겨진 소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겁에 질린 소녀는 제발 도와달라는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하지만 지체 높은 귀부인은 입에 재갈이 물린 소녀의 몸부림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황후 마마."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늙은 흑마법사는 황후를 상대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탐욕스러운 황후가 흑마법사의 거짓말을 알아챌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몇 세기에 걸쳐 흑마법사들이 척살 되고, 흑마법을 다룬 서적들이 발견되는 족족 불살라진 덕분에 흑마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인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굴 천장과 울퉁불퉁한 벽을 타고 철커덩, 철커덩하고 쇠사슬이 흔들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녀의 울부짖음은 짐승처럼 절박했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든 칼이 소녀의 가슴에 꽂힌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해......"

노인은 심장이 파헤쳐진 소녀의 육신을 내려다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촛불이 사납게 동굴 벽을 배정으로 일렁거리고, 흑마법사의 그림자가 소녀의 육체를 제단에서 끌어내리는 광경을 연출했다. 처참하게 망가진 소녀의 시체가 하수구 끝자락에 걸려 발견 된 것은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낀 다음날 아침이었다.

커다랗고 노란 달이 탑 꼭대기 층에 걸린 것처럼 지상 가까이에 떴다. 이스카가 입혀준 녹색 외투를 입은 리프는 비좁은 성벽의 계단을 올라갔다.

방어를 위해 답답하리만치 좁은 계단을 벗어나자 탁 트인 밤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리프는 이스카와 나란히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성벽 위를 걸었다. 밤하늘은 늘 봐오던 것이지만 높은 곳에서 별을 올려다보려니 기분이 색달랐다.

'황혼과 고뇌의 탑이로군.'

이스카와 천천히 성벽 위를 산책하던 리프는 저 멀리 보이는 황혼의 탑을 발견하고서 흉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흉벽의 높이가 높아 발돋움을 해도 시야가 잘 확보가 되질 않았다.

리프는 발판 대신 딛고 올라설 물건이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스카는 그런 리프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냐."

팔짱을 끼고서 삐두름한 자세로 서있던 이스카가 결국 리프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런 게 아니라, 헉."

갑자기 눈높이가 달라지자 당황한 리프는 반사적으로 이스카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방금 전까지 흉벽에 가로막혀 잘 보이지 않던 황도의 풍경이 저 앞에 펼쳐지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스카가 저를 떨어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바스커빌이었을 때 까지만 해도 여든 평생 고소공포증 같은 게 있는 줄 모르고 살았는데 다시 태어나니 체질이 바뀐 모양이었다.

"절대 안 떨어트릴 거니까 긴장 풀어."

저를 못 믿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이스카가 리프와 눈을 맞추며 인상을 찌푸렸다.

"알아요. 그냥 조금 놀라서 그런 것뿐이에요."

이스카에게 어린애처럼 안긴 리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이스카의 기분이 상한 것 같은데 어떻게 오해를 풀어야할지 몰라 고민이 되었다.

"땅바닥만 보지 말고 천천히 구경해. 정신머리 없는 도시지만 야경은 제법 봐줄만 하니까."

이스카는 리프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손바닥으로 단단히 등을 받히고는 흉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짚게 만들었다. 황자가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리프는 슬그머니 이스카에게 몸을 기댄 채로 황도를 내려다봤다. 황혼과 고뇌의 탑을 이렇게 멀리서 떨어진 곳에서 바라본 게 오래간만이라 오묘한 감정이 가슴에서 일었다.

"꽃이 갖고 싶은가 보군."

리프가 절박한 표정으로 꽃바구니를 바라보자 이스카가 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이스카는 리프가 꽃바구니를 쳐다본 이유를 완전히 잘못 짚었다. 꽃을 원하긴 했지만 그건 리프가 갖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왜 받질 않는 거냐."

탐스럽고 새빨간 장미꽃을 리프에게 내민 이스카가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간절한 눈으로 꽃바구니를 쳐다보던 리프가 정작 꽃을 가지게 됐는데 기뻐하지 않아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한 송이가 아니라 꽃바구니 전체를 원했던 모양이군."

이스카는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피식 웃으며 저만치 멀어진 아주머니를 다시 불러 들이려했다.

"아니에요!"

리프는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무릎에 바지를 움켜쥐었다.

"뭐가 아니라는 거지?”

이스카는 도통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비틀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통찰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지만 그도 연애나 사랑이란 감정 앞에선 리프만큼 둔하긴 마찬가지였다.

"저는 꽃을 갖고 싶었던 게 아니라……."

리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스카에게 제 감정을 전해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리프?"

조바심이 난 리프의 눈에 이스카가 마시던 맥주가 박혀 들어왔다. 그 순간 리프는 급하게 맥주잔에 손을 뻗어 시큼하고 텁텁한 액체를 제 입에 털어 넣었다. 과거에 술을 즐기진 않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이란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기묘한 힘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네 녀석 지금 뭐하는 짓이냐."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난 이스카는 숨도 쉬지 않고 꿀꺽꿀꺽 맥주를 삼키는 리프를 저지하려 했다. 이스카가 주문한 흑맥주는 보통 맥주보다 몇 배는 더 독했다. 하지만 리프는 밑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맥주잔을 입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탕!

리프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한가득 들어 있던 맥주를 단숨에 비운 그의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나는 당신을 으으읏, 좋, 좋……."

저를 화난 얼굴로 쳐 다보는 이스카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야했다. 하지만 세상이 너무 빙글빙글 어지럽고 숨이 찼다. 게다가 눈앞에 보이는 이스카가 두 명, 아니 세 명으로 늘어나기까지 했다.

"이스카님 지진이 났나 봐요. 바닥이 자꾸 흔들거려요." 

리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이스카에게 호소했다.

"이 망아지 같은 녀석!"

리프가 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스카가 이를 갈았다.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스카의 가슴에 푹 고꾸라진 리프는 기절이라도 하듯 의식을 잃었다.

흑맥주 한 잔에 혼절했던 리프가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건 달리는 마차 안에서였다.

"네놈, 앞으로 입에 술 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리프를 제 무릎에 뉘인 이스카가 으르렁거렸다. 분명 처음 마셔 보는 술일 테지만 그래도 이스카는 리프가 그 자리에서 기절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술......"

눈꺼풀을 들어 올린 리프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눈에 초점이 없는데다가 가쁜 숨을 쉬느라 입술이 살짝 벌어진 리프의 얼굴은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하게 익어 있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이스카 니이임……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

눈꺼풀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이스카를 빤히 올려다보던 리프가 앙증맞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

"이스카님은 웃으면 눈꼬리가 접혀서 예뻐요."

이스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리프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세웠다. 리프의 금발이 비단처럼 사라락,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리프의 파란 눈동자는 오직 이스카만을 담고 있었다.

"예쁘……."

이스카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표현에 말문이 막혔다.

"네놈, 취했군. 흰소리 그만하고 다시 자라."

인상을 찡그린 이스카는 곧 주정뱅이는 상대할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리프를 다시 재우려고 했다. 곧 궁에 도착할 테지만 잠든 리프는 그가 안고서 침실로 데려가면 그만이었다.

"저어, 아안 취했어요. 진짜아."

얼굴이 발그레한 리프가 고개를 마구 젓자 금발이 사락사락 흔들렸다.

"모든 주정뱅이들이 그렇게 말해."

이스카가 한숨을 내쉬며 몽롱한 눈을 한 리프의 어깨를 누른 순간이었다.

"더워......"

몸에서 열이라도 나는 것 같았다. 혼자서 도리질을 치던 리프는 꼬물꼬물 조끼의 단추를 풀었다. 하지만 술에 취해 세상이 흔들려 보이는 탓에 단추를 비트는 손가락이 자꾸 엇나가기만 했다.

밤거리를 달리던 마차가 비탈길에 들어섰는지 덜컹덜컹 흔들렸다.

"이스카 님 저 더워요."

곤란하다는 얼굴로 제 조끼를 내려다보던 리프가 고개를 돌려 이스카를 올려다봤다. 답답하고 더운데 저 혼자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어서 도와 달라고 호소라도 하는 것 같은 간절한 눈빛이었다.

"너......"

이스카는 흐트러진 모습을 한 리프가 촉촉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자 꿀꺽 생침을 삼켰다.

"젠장."

아랫배에 열기가 모였다. 이스카는 초조한 사람처럼 손을 쥐락펴락하다가 눈을 감고서 몇 초 동안 심호흡을 했다.

이 아이는 지금 취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유혹적이긴 하지만 어떤 의도가 있어서 저러는 게 아니었다.

"네놈, 아침에 정신을 차리면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맞을 줄 알아."

이를 악 문 이스카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빤히 저를 쳐다보는 리프의 조끼에 손을 가져갔다.

"왜요? 혼나는 거 싫은데……."

리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다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시끄러워. 네놈 때문에 내가 지금!"

이스카는 눈을 사납게 치떴다가 이내 말을 삼켰다. 취한 녀석에게 화를 내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재차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스카의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리프는 그 광경이 신기하다는 듯 어린애처럼 우와, 우와 하고 감탄을 하며 좋아했다.

"고개 들어봐."

조끼 단추를 다 푼 이스카가 브로치가 달린 리프의 셔츠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목이 답답할 것 같아 셔츠의 단추도 풀어주기로 한 것이다.

리프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을 옥죄고 있던 셔츠가 풀어지자 이스카가 남긴 울긋불긋한 멍 자국이 드러났다. 이스카는 제가 집착적으로 남긴 흔적이 마차의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드러나자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거 아세요?”

등받이에 나른한 자세로 기대고 있던 리프가 불쑥 제 셔츠 깃을 벌리는 이스카의 손을 잡았다.

"뭘…… 말이냐."

이스카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나왔다. 셔츠 안쪽의 뽀얀 리프의 살결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이미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저하의 손. 정말 예뻐요."

리프는 이스카의 손을 제 뺨에 가져가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리프는 이스카의 손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제 얼굴을 다 덮을 만큼 큼직하고, 손가락은 곧고 길다. 손톱의 발달도 정갈했다.

"그놈의 예쁘다란 소리 좀 제발……."

이스카는 리프의 입에서 또 예쁘다는 소리가 나오자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제국의 황자로서 살아온 그에게 '예쁘다' 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었다.

하지만 이스카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제 손을 붙들고 뺨을 비비는 리프가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를 향해 저리 수줍고 요염하게 웃어주는 모습을 보니 새삼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스카 님이 얼마나 예쁘냐면, '브랑게스의 추측' 이나 '마나질량 간극 가설' 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워요."

술에 취한 리프가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저는 노예니까 고급 마법 이론 같은 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미처 떠올리지도 못했다.

"그래, 알았다."

이스카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프가 고급 마법 이론에 대해 언급 했을 땐 잠시 눈빛이 날카로워졌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스카는 그것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스카님. 저는 말이에요."

이스카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리프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스카를 응시하는 리프의 눈동자는 가슴을 가득 채운 어떤 감정 때문에 넘칠 것처럼 흔들거렸다.

말해야 해.

한참을 머뭇거리던 리프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좋아해요. 많이 좋아해요."

리프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술에 취했지만 아예 정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리프는 드디어 이스카에게 제 마음을 전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래, 알았다."

이스카는 픽 웃으며 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프의 고백을 고백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제 손이 좋다고 말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드디어 말했다고 설레던 리프의 표정이 흐려졌다. 이스카가 제 고백을 가볍게 넘겨버리자 속이 타들어갔다. 정신이 몽롱하긴 했지만 직감적으로 이스카에게 제 감정이 전달되지 않았음을 알아챈 것이다.

조바심이 난 리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리프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자 이스카의 안색이 변했다.

"왜, 속이 안 좋은 거-."

리프의 몸 상태를 관찰하던 이스카는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리프가 기습이라도 하듯 그에게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리프에게 입맞춤을 당한 이스카는 눈을 부릅뜬 채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지?'

리프는 몸짓으로 제 감정을 전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스카의 옷깃을 꽉 움켜잡고서 절박하게 입술을 비벼댔다.

이스카에게서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났다.

리프는 머리가 더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스카에게 배웠던 대로 입술과 혀를 사용했다.

리프의 입맞춤은 여전히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술에 취한 탓도 있어, 빨갛고 작은 혀로 꼬물꼬물 이스카를 건드리는 게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아랫도리가 흥분한 상태였던 이스카의 이성을 날려버리기엔 그 어린애 장난 같은 입맞춤으로도 충분했다.

격정에 휩싸인 이스카가 사납게 리프를 밀어 붙였다.

"읏!"

이스카에게 몸집으로 밀린 리프의 마차의 벽에 닿았고, 이스카도 양손으로 문짝과 등받이를 짚었다.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네 녀석이. 네가 날 자극한 거다."

이스카가 잠시 입술을 떼고서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리프는 뭐라고 항변하려 했지만 다시 이스카가 입술을 덮쳤다.

조용하던 마차 안에 거친 숨소리가 가득 찼다.

이스카의 입맞춤은 리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거칠 것 없고 난폭하고, 현란했다.

이스카의 혀에 입 안이 온통 헤집어진 리프가 요염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뽀얀 턱엔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미칠 거 같다, 리프."

리프의 신음은 그 어떤 최음제보다 자극적이었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큼 흥분한 이스카는 리프의 몸을 거의 쥐어뜯다시피 했다. 새하얗고 보드라운 리프가 제 입맞춤을 받아들이기 위해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요염했다.

덜컹, 히이잉!

밤거리를 내달리던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스카는 거칠게 문을 열고나가 리프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과적한 입맞춤 때문에 진이 빠겼는지 비틀비틀 걸음을 내딛는 리프는 당장이라도 잠이 들 것 같은 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 어? 집이네. 언제 왔지."

이스카에게 손목을 단단히 붙잡힌 리프가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새하얀 황자의 궁과 정원을 두리번거렸다. 술기운이 전신에 퍼져 몸이 천근만근한데다 시야도 침침했지만 제가 몇 달 동안 지내온 공간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집이라고?'

이스카는 등줄기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리프의 손목이 으스러지도록 꽉 움켜잡았다. 리프가 저와 함께 지내는 궁을 두고 '집' 이라고 표현했다. 이스카는 저 깊은 곳에서 들끓는 환희와 희열 때문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파요……."

의식이 가물가물한 리프가 눈을 비비며 이스카에게 손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리프. 너란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더 날 더 들었다 놨다 해야 직성이 풀릴거냐. 응?”

이스카는 꽉 비틀어 쥔 리프의 손목을 풀어주기는커녕 손아귀에 더 힘을 줬다. 감당하기 힘든 적정에 휩싸인 그는 이 가녀린 손목을 놓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느슨하게 풀어줘도 제 황금빛 작은 새가 신기루처럼 훌쩍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쾅!

"저하, 리프와 황도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식사는 하셨-."

마차의 바퀴 소리와 말의 투레질 소리에 이스카의 귀가를 직감한 시녀장 테사가 서둘러 마중을 나왔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이스카는 그녀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무런 대꾸도 않고 지나쳤다. 테사는 이번엔 리프를 바라봤다. 하지만 얼굴이 발그레한 리프는 술기운 때문에 이미 눈이 반쯤 감긴 상태라 그녀가 저를 쳐다봤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우우."

시야가 가물가물한 탓에 계단을 오르던 리프가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이스카는 다리에 힘이 풀린 리프를 사람만한 인형 다루듯 들어올려 제 팔에 앉혔다. 몸이 편해진 리프는 이스카의 옷깃을 슬며시 쥐며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술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이스카의 체취가 너무 좋아서 아랫배 쪽에 따끈한 열기가 모였다.

쾅, 찰칵!

이스카는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문부터 잠갔다.

"어?"

어느새 제 등에 푹신한 침대가 닿자 리프는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살폈다. 이스카는 그런 리프를 위험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거칠게 서랍의 문을 열었다.

덜컥, 덜그럭

이스카는 리프의 바지를 벗기며 초조하게 서랍을 뒤졌다. 서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키고, 곧 초조하게 서랍을 뒤집는 이스카의 손에 기름병이 쥐어졌다.

"저하. 눈이……?”

제 몸에 올라타 바지를 벗기는 이스카를 졸린 눈으로 멀뚱히 올려보던 리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스카의 눈동자가 숲에서 그랬던 것처럼 붉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 저하가 아니라 이름을 부르라고 했잖느냐."

이스카도 제 눈이 붉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급히 제 눈을 손바닥으로 가린 이스카는 이를 악 물고서 맹렬하게 눈동자 안에서 날뛰는 것을 억눌렀다.

리프에게 들키면 안 된다.

날 것에 가까운 이스카의 본능이 절규라도 하듯 그렇게 소리쳤다. 

찌이익!

한쪽 눈을 가린 이스카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그는 리프의 몸에 올라탄 채로 제가 단추를 풀다만 셔츠를 우악스럽게 찢었다.

"이스카 님……?"

옷이 찢겨져 나가는 소리에 흠칫 놀란 리프가 어깨를 움츠렸다. 굶주린 커다란 짐승이 제 몸에 올라탄 것처럼 정계심이 이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술기운에 잠식된 리프는 너무 졸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하는지 짐작을 하지 못했다.

간신히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온 게 느껴졌다.

"네가 그렇게 다리를 오므리고 있으니까 잘 볼 수가 없잖느냐."

두 눈으로 리프를 담을 수 있게 된 이스카가 리프를 타박하며 늘씬한 하반신에 시선을 던졌다. 선정적인 느낌을 주는 새하얗고 긴 리프의 다리를 따라 시선을 거슬러 올라가자 수줍은 곳을 감춘 도톰한 엉덩이가 보였다.

"네 가장 은밀한 곳을 보여 다오. 넌 착한 아이니까 그럴 수 있지, 응?”

이스카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리프에게 낮게 속삭이며 제 앞섶을 풀어 헤쳤다. 그의 큼직한 손은 비밀스러운 곳을 들여다보기 위해 리프의 엉덩이를 꽉 잡아 비틀었다.

"읏."

이스카에게 가장 내밀한 곳을 보여줘 버린 리프가 본능적으로 제 성기 아래쪽을 손으로 가리려 했다.

"못된 아이가 될 셈이냐?"

이스카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리프의 손을 저지했다.

리프의 손을 치운 이스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성난 제 물건을 받아들일 리프의 그곳이 눈앞에 빠끔 드러나자 숨이 더 가빠져왔다.

이 가녀린 몸이 절 받아들이기엔 너무 작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아이를 안으려 하는 제가 최악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예쁘다고 해사하게 웃으며 손에 뺨을 비비던 이 아이를 지금 당장 가지지 않으면 그는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네가 다 자랄 때까지 기다려 보려 했는데, 내가 내 인내심을 너무 과신했던 모양이다."

이미 페니스가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스카는 리프의 새하얀 가슴에 손을 뻗었다. 제가 찢은 옷 사이로 슬쩍 드러난 유두는 차가운 공기가 닿아서 그런지 쫑긋 곤두서 있었다.

"이스카 님 뭘하시려는…… 거예요?”

술기운이 온 몸에 퍼져 모든 감각이 둔해진 리프가 숨을 할딱거리며 물었다. 이스카가 그의 목을 핥으며 유두를 문지르자 따끈하다고 느꼈던 사타구니가 답답하고 괴로워졌다.

"기분 좋은 일을 하려는 거다."

이스카는 한 손에 다 들어올 것 같은 리프의 새하얀 다리를 벌리며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아플 만큼 단단해진 그의 페니스는 어서 저 미성숙하고 여린 몸을 찢고 들어가고 싶다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기분 좋은 일…….'

의식이 몽롱한 리프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경계심을 풀었다. 밤마다 이스카에게 나쁜 짓을 당한 탓에, 리프는 지금 제게 일어나는 일을 몽정이라고 생각해버렸다.

"네가 좋아서 미칠 것 같다."

이스카가 리프의 그곳에 손가락을 넣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으응.”

허리 안쪽에서 달큰한 울림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몽정이라 생각해서 긴장이 풀어진 리프는 그만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리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이스카는 리프의 그곳을 부드럽게 풀어주던 행위를 멈췄다.

새액, 색

"네놈......"

리프를 유심히 살핀 이스카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의 검붉은 페니스는 잔뜩 성이 나 있는데 리프가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건지 편안한 얼굴을 하고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부엉이가 높게 울었다.

이스카는 잠든 녀석을 덮칠지, 아니면 한껏 비틀린 욕망을 참아야할지 고민하며 리프를 심난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침대 위에 금발을 흐트러트린 리프의 몸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밤이 깊어질수록 이스카의 고민 또한 깊어져만 갔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리프가 알코올이 단 한방울이라도 섞인 음료를 마실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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