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4)

"폐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적통한 후계자인 황태자가 있는데 신성한 승리의 날 주관을 재상 대리에게 맡기시겠다니요!"

팔다리가 삐쩍 마르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침실을 찾은 황후는 체면 따윈 다 잊어버린 듯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노쇠한 황제의 침실엔 자주 빛 커튼이 침대 위에 천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흠흠."

제스터와 라일라는 축제를 선포하고 관장하는 제국의 대리자로 저를 선택해 달라고 졸라 댔다. 그들이 이토록 축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축제 선언문을 읽는 자가 바로 제위를 물려받을 후계자임을 만천하에 공언하는 자리와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신성한 승리의 날 축제엔 세상에 몇 남지 않은 드래곤들까지 참석하기 때문에 더 후계자로서의 권위가 섰다.

"간사하고 사악한 것들."

황제의 침실에서 나온 황후는 쿵쿵대며 회랑을 건넜다. 분노에 찬 그녀는 제게 충분히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녀 하나를 삼 층 난간 밖으로 밀어트렸다. 제위는 그녀가 분신처럼 사랑하는 황태자의 것이 되었다. 지금은 비록 황태자가 병석에 누워있지만 그녀는 제 아들이 병마를 훌훌 털고 일어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오직 황후와 황태자 본인뿐이었다. 제국의 모든 의사들과 마법사들은 황태자에겐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악, 악, 살려주세요. 전하, 제발. 악! 아악."

문이 굳게 닫힌 황태자의 침실 저편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는 한숨을 내쉬며 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색이 완연한 황태자는 이단심문관이나 사용할 법한 날카로운 도구로 시녀를 고문하고 있었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된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황후는 에메랄드 반지를 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시종에게 어서 저걸 치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황태자에게 고문을 당하던 시녀가 시종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자 방에는 눈이 누렇고 앙상하게 마른 황태자와 황후 두 사람만이 남았다.

"어마마마는 모르십니다. 제가 얼마나 큰 두려움에 휩싸여 사는지! 언제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 될지, 아니면 폐위되기 전에 죽을지 몰라 하루하루가 피가 마른다고요."

속옷차림으로 제 방에서 광증을 부리던 황태자는 질질 짜며 황후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황후는 그런 제 아들이 애처롭다는 듯이 성심성의껏 어르고 달랬다.

"전하는 꼭 건강해지실 겁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말입니까! 저명한 신관, 마법사, 심지어는 주술사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는데."

황태자는 꽥 소리를 지르며 물건들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는 체력이 바닥났는지 금세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전하,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분명 어딘가에 전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다 집어치우고 우리 흑마법사를 불러요, 어마마마."

황후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황태자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 전하."

황후는 흑마법사라는 말에 안색이 창백해져서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흑마법사는 금기의 단어였다. 흑마법사 뿐만이 아니라 흑마법사를 돕는 사람,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까지 죄다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하는 게 제국의 법이었다.

"어마마마, 제가 나을 방법은 흑마법사와 계약하는 것밖에 없어요. 우리는 몰락하는 배란 걸 정말 모르시겠어요? 흑마법사를 불렀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아도 어차피 이스카 그 놈이 제위에 오르면 떠돌이 개처럼 처참하게 쫓겨날 신세라고요."

황태자는 필사적으로 황후를 설득했다.

"제 몸만 건강해지면 제국이 벌써 제 것인 것처럼 설쳐대는 저 불한당, 역귀, 깡패 같은 놈들! 전부다 한꺼번에 쳐낼 수 있어요. 이스카 놈이 아무리 잘난 척 해봤자 황태자는 저니까, 귀족들도 다시 우리 편이 될 것이고요. 어마마마는 반편이들 따위가 설쳐대는 꼴이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황후는 라일라와 제스터 및 궁정인들이 저를 업신여겨 보던 시선을 떠올리며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도덕이나 윤리보다 제 자존심이 더 중요한 황후는 결국 아들이 간청한 대로 흑마법사와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며칠 후 황후와 황태자는 거금을 풀어 수소문한 끝에 연락이 닿은 흑마법사를 은밀히 궁으로 불러들였다.

"황태자 전하를 좀먹는 병마를 쫓아내는 것은 저와 계약한 마족의 힘을 빌리면 일도 아니지요. 저를 찾아주신 고귀한 분들을 위해 덤으로 눈엣가시 같은 경쟁자들까지 제거해드리겠습니다."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는 흑마법사의 말은 황태자와 황후를 흡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이 무척 밝았다.

침대에 옆으로 누운 리프는 금색 속눈썹을 들어 올려 시리도록 하얀 달을 올려다봤다. 둔부 사이엔 연고가 담뿍 발라져 있었고, 침대에 눕기 전엔 의원이 지어준 약을 먹었다. 며칠 전 이스카에게 고약한 일을 당했지만 리프의 몸은 서서히 나아가는 중이었다.

달빛이 내려앉는 침실에선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등 뒤에선 체온이 느껴지고 목덜미엔 숨결이 닿았다. 침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며 허리에 둘러진 팔의 무게 역시 익숙했다. 이스카의 품에 안긴 리프는 경직되어 있었다. 밤이 늦었음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처럼 악몽 때문에 잠을 설치는 건 아니었다.

'글쎄, 아마도 네가 좋은 것 같다.'

이스카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리프는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이스카가 며칠 전 던진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감정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이스카가 말한 '좋다' 라는 개념은 리프에게 조금 낯설고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스카가 언급한 감정은 티아고 영감이나 호아킨이 저를 좋아해주는 감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테사가 제게 품은 다정한 감정과도 역시 달랐다.

리프는 여태껏 살면서 이성에게든 동성에게든 고백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한 번도 타인을 이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일이 없었다. 과거에 팔십 넘은 노인이었지만 바스커빌은 오직 연구만이 인생의 전부였기 때문에 책이나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신기루 같은 감정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이스카의 고백은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듯 리프에게 혼란을 가져왔다. 저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피상적인 감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리프로서는 더욱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직면하게 된 난제를 풀어보기 위해 리프는 숲에서 돌아온 날 이후로 매일 밤 고민했다. 그러나 언제나 도관처럼 정갈하게 정돈 되어 있었던 리프의 머릿속은 이스카라는 존재로 인해 이제 물건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줄 모르는 소년의 방처럼 어지럽혀 졌다.

'좋다' 라는 감정을 파악해보기 위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연정을 떠올려 보아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스카가 제 몸을 억지도 덮친 후 담담하게 내비쳤던 감정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늪 같았다. 신기하고 의아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늪에 손을 가져가 봐도 여전히 이스카의 감정은 불가해한 영역에 남아 있었다. 이건 마치 갓 마법어를 외운 학생이 1서클짜리 수식을 풀기도 버거운데 돌연 누군가 강압적으로 8서클짜리 마법서를 펼쳐 보라고 시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 허리에 감긴 이스카의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리프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스카의 손을 슬쩍 들어 올린 그의 가느다랗고 풍성한 금발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커다란 창을 통해 흘러드는 은색 달빛이 침대와 이스카의 얼굴에 내려 앉아 있었다. 리프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스카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살금살금 자세를 바꿨다.

'윽.'

침대 위에 무릎을 꿇던 리프는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이스카의 페니스가 드나들었던 아랫배 안쪽과 꼬리뼈 쪽에서 짜르르한 통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원망스러운 감정이 인 리프는 이스카의 얼굴을 관찰하는 대신 침대에서 내려왔다. 잠옷만 입은 리프는 맨발로 침실의 문을 향해 다가갔다.

리프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다가 문득 손목이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움직일 때마다 잘그락 소리가 나던 쇠사슬은 이제 그의 몸에서 사라졌다. 리프는 생소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제 양쪽 손목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쇠사슬에 묶여 지내던 시간보다 쇠사슬 없이 살던 세월이 더 김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신기한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숲지기의 오두막에서 이스카에게 억지로 몸을 연 후 리프에게 생긴 변화는 비단 쇠사슬뿐만이 아니었다. 늘 뒤집어쓰고 지내던 후드도 이스카와 단 둘이 있을 땐 벗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이스카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서 당장 다시 후드를 쓰라고 명령하긴 했지만 어쨌든 리프에겐 큰 변화였다. 황혼과 고뇌의 탑에서 지낼 때도 리프는 거의 하루 종일 머리카락과 얼굴을 가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 머리카락이 싫지 않은 건가.'

리프는 문짝 앞에 선 채로 제 금색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유리창을 통해 흘러드는 달빛 때문에 그의 백금발은 은색 비슷하게 보였다.

'내가 좋아져서…… 머리카락도 마음에 들게 된 걸까.'

가느다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리프는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스카가 했던 말과 달라진 행동들에 대해 생각하면 제가 반편이에 천치라도 된 듯 생각하는 게 어려워졌다.

리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흘끗 뒤를 돌아 이스카의 잠든 모습을 바라봤다.

"저하, 잠시 나갔다 올 게요."

입술을 달싹여 작게 속삭이고서 침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달빛 때문에 아무도 없는 거실이 낮처럼 환했다. 리프는 울렁거리는 심장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이스카와 한 공간에 있다가 도망치듯 밖으로 나오니까 마음이 안정 되었다.

리프는 산책이라도 하듯이 거실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난 며칠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던 터라 좀 움직이고 싶었다. 게다가 불 꺼진 거실을 혼자 빙글빙글 돌아다니니까 지하도서관을 배회하던 시절 생각도 났다.

비틀비틀 가구 사이를 돌아다니던 리프는 발코니로 통하는 유리창을 올려다봤다. 달빛이 환해서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스카가 쇠사슬을 풀어주면서 궁 근처는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리프는 그 이후로 아직 밤중에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의 가녀린 몸이 이스카의 육체를 억지로 받아들이느라 무리를 한 탓에 요 며칠 제대로 운신도 하지 못 할 만큼 심하게 앓아누웠기 때문이었다.

잠옷만 입은 리프는 외투를 찾아 후드를 쓰고서 복도로 나갔다. 한밤중이긴 하지만 보초를 서고 있는 근위병과 마주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후드를 쓴 것이다.

난간을 붙잡고서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간 리프는 주방으로 통하는 뒷문을 열고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온 리프가 밤하늘에 별이 가득 박힌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향한 곳은 후원에 마련된 유리온실이었다. 침실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아직 정원을 돌아다닐 만한 체력은 없었다.

사방이 유리로 된 온실로 들어간 리프는 후드를 벗었다. 희귀한 녹색 식물들에 둘러싸인 그는 고개를 들어 유리천장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상하다......"

문득 리프는 혼자서 별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고서 제 팔뚝을 쓰다듬었다. 방금 전까지 이스카의 체온에 기대고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그런지 밤의 냉기가 외투와 잠옷 사이로 스며드는 감각이 더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바스커빌이었을 때뿐만이 아니라 황혼과 고뇌의 탑 소속 노예로 살아가던 시절에도 그는 늘 혼자서 별을 올려다보곤 했다. 티아고 영감들은 고단한 삶 때문인지 천문학이나 별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불쑥 외롭다는 느낌이 드는 건지 리프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스카가 달라진 것처럼 저도 뭔가 변한 걸지도 몰랐다.

"이건, 여행자의 눈물이로군."

유리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떨어트렸던 리프는 갑자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유리정원을 가득 채운 진귀한 식물 사이에서 기괴하게 생긴 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여행자의 눈물을 온실에 가져다 놓은 건지 모르겠군. 기르기 까다로울 뿐만이 아니라 독성이 강해서 관상용으로 삼을 만한 식물은 아닌 것을 ……. 열매를 가공하면 고급 마법 재료를 대체하는 시료로 쓸 수 있ㅡ."

의아하단 얼굴을 하고서 여행자의 눈물에 손을 뻗던 리프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 온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독성이 강한 줄 알면서 왜 만지려는 거냐."

이스카가 혀를 쯧, 차며 온실의 유리문을 닫았다. 분명 리프가 침실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황자는 깊게 잠들어 있었는데 언제 여까지 내려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때문에 깨신 건가요?”

손을 멈칫 뒤로 물린 리프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니, 처음부터 잔 적 없어."

이스카는 온실의 식물 사이를 가로지르며 리프에게 다가왔다. 잠옷 위에 외투를 걸친 리프는 이스카가 자는 척 하고 있었다는 말에 당황했다. 왜 황자가 잠들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일부러 잠든 척 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뭘 그리 놀래. 요새 네놈이 옆에 있으면 잠이 안 오는 게 당연한 거지."

코앞으로 다가온 이스카가 밀가루 반죽 같은 리프의 하얀 뺨을 잡아 늘렸다.

'나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거라면.'

이스카에게 뺨을 꼬집힌 리프의 얼굴에 죄책감 같은 것이 번졌다. 이스카와 한 침대를 쓰고 나서부터 악몽을 꾸지 않게 된 게 신기하다고만 생각했지 저 때문에 이스카가 불편해서 잠을 못 자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하, 이제부터 따로……"

"무슨 말을 못하겠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야."

리프가 이제부터 따로 떨어져 자자고 말하려는 순간 이스카가 인상을 찡그렸다. 리프가 제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어처구니 없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잠자리가 불편하신 거잖아요."

"그런 의미로 불편한 게 아니라니까."

이스카는 설명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리프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함께 있으면 괴로워지는 제 아랫도리 사정을 이해시키기엔 리프는 성적으로 너무나도 미숙했다.

"윽."

"눈치 없는 놈."

이스카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욕망과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애꿎은 리프의 뺨이며 입술, 머리카락 등을 괴롭혔다. 하는 짓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스카의 표정은 나름 심각했다.

"아우, 우."

지붕이 뻥 뚫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유리 천장 아래로 별빛이 쏟아졌다. 몸집 차이가 심하게 나는 탓에 리프는 이스카의 커다란 손을 떨쳐내지도 못하고 가만히 뺨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 곤충 껍데기처럼 생긴 식물 이름이 여행자의 눈물이라는 건 어떻게 안 거냐."

리프의 말랑말랑한 피부를 만져대는 것보단 딴 데 주의를 돌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는지 이스카가 질문을 던졌다.

"책에서 읽었어요. 쿠겔이라는 마법학자가 서부 귀향지에서 집필한 저서가 있는데, 거기서 여행자의 눈물을 짤막하게 언급했거든요."

리프는 얼얼한 양쪽 뺨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카를로는 약 백여 년 전에 활동하다 역사에서 잊힌 마법사였다. 하지만 리프는 여행자의 눈물이라는 식물의 존재를 바스커빌이었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당시엔 재료에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는 위치인데다가 베가 광석이 풍부했기에 여행자의 눈물을 가공 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학자인데 자세히도 알고 있군. 네놈, 혹시 지하도서관에서 일은 안하고 매일 구석에 숨어 책만 훑어댄 거냐."

이스카가 온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리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프를 바라보는 이스카의 입가엔 어렴풋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황혼의 탑 노예관리인도 아닌데 솔직해져도 돼, 리프. 네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이스카는 리프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게 만들었다. 

'이상해.'

리프는 이스카가 제 이름을 부르자 높은 곳에 올라간 것처럼 속이 울렁울렁하고 심장이 불편해졌다. 그의 귓가엔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이스카의 목소리가 또 다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정적인 상태를 좋아하는 리프는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이 감각이 괴롭고 싫었다.

"안색이 안 좋군. 몸 상태가 나빠진 거냐?”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제 목에 팔을 감은 리프의 낯빛을 살피며 이스카가 물었다. 황자는 리프의 입에서 '그렇다' 라는 대답이 나오면 바로 그를 안고서 침실로 돌아갈 기색이었다.

"아니에요.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새파랗게 어린놈 주제에 꼭 온 세상 시름은 다 짊어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군."

이스카는 피식 웃으며 리프를 조심조심 으I자에 내려놓고는 온실에 해먹을 설치했다. 리프는 유리로 지어진 값비싼 시설에 해먹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햄튼 녀석이 몰래 숨어서 농땡이를 치려고 가져다 놓은 물건이지. 이리 와. 여기 누워 있으면 좀 편할 거다."

리프는 몸집이 황소처럼 큰 햄튼이 해먹에 꾸역꾸역 올라타는 광경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져서 그만 소리 내어 웃었다.

"웃지 마."

이스카는 리프를 안아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리프는 제가 웃는 모습이 보기 싫은 건가, 하고 움찔 어깨를 긴장시켰다.

"아예 웃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웃지 말라는 거다."

이스카는 리프 제 옆에 뉘이며 억지스러운 명령을 내렸다. 리프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하지만' 이라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이스카가 제멋대로인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내게 웃어준 일은 없는 것 같군."

침대에 누웠을 때보다 리프와 더 밀착하게 된 이스카가 불만이라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웃어보여야 하는 걸까.'

이스카에게 팔베개를 받은 리프는 손가락으로 입술의 양쪽 끝을 잡아당겼다.

"됐어, 하지 마.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니까."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이스카는 리프의 손목을 움켜잡아 입가에서 손을 떼게 만들었다.

'어?'

이스카에게 양쪽 손목을 붙들린 리프는 당황한 얼굴로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해먹이 비좁은 탓에 저와 이스카가 다리가 엉키는 미묘한 자세를 취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스카가 제 몸을 억지로 열고 들어왔을 때처럼.

이스카에게 깔리게 된 리프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켰고 그런 리프를 내려다보는 이스카의 눈동자에는 음욕이 깃들었다.

"네가 좋아."

이스카는 리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 저하."

이스카를 올려다보는 리프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이스카의 손이 제 사타구니를 더듬자 리프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사실은 네가 좋은 건지 아니면 이게 다른 감정인 건지 확실하지가 않아. 여태껏 난 다른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없으니까."

품이 낙낙한 잠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은 이스카가 리프의 페니스를 살며시 쥐었다.

'시, 싫어.'

리프는 몸을 덜덜 떨었다. 이스카가 저를 범하던 순간의 통증이 떠올라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널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네가 아파하고 싫어해도 네 몸속에 들어가고 싶어 돌아버릴 지정이야. 하지만 한편으론 네가 내 손길을 기분 좋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이스카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힘겨운 표정을 지으며 리프의 페니스에서 손을 떼어냈다. 리프를 성적으로 흥분시켜볼 생각이었지만 리프가 너무 겁을 집어먹어 쾌감을 쾌감으로 인식할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왜 이렇게 어린 거냐. 왜 이렇게 약하고 미성숙해서......"

이스카는 한숨을 내쉬며 덜덜 어깨를 떠는 리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리프는 뜨겁게 달아오른 이스카의 성기가 제 몸에 닿자 움찔 허리를 튕겼다.

"네 여기를 만져주면 기분이 좋나?"

이스카가 확인이라도 하듯 다시 사타구니를 더듬으며 물었다. 겁에 질린 리프는 빠르게 도리질을 쳤다.

"내가 널 처음 봤을 땐 이상할 정도로 네가 미웠다. 처음 본 노예인데 네 얼굴을 보니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지."

이스카가 미약에 취한 것 같은 얼굴로 리프의 쇄골에 입술을 가져갔다. 황자는 호흡을 골랐지만 피부에 닿는 숨결은 점점 거칠어지기만 했다. 식물들로 둘러싸인 유리 온실의 천장에선 별들이 반딧불처럼 반짝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분노가 가라앉고, 네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지더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네가 날 봐주길 원했고, 널 가지고도 싶어졌어. 그러니까 너도 점차 내게 익숙해질 거다."

리프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은 이스카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리프가 긴장을 풀도록 유도했다. 황자는 온몸으로 아직은 널 안지 않을 거니까 안심하고 제 품에 안겨 있으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요……."

리프는 또 다시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고목나무처럼 뻣뻣하게 사지를 굳히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스카의 등에 팔을 두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괜찮아. 나도 모르겠는 것 투성이니까."

이스카는 제 욕망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그는 지금 당장 리프의 온몸에 잇자국을 남기고 싶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 욕심을 채우려고 했다간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을 알기에 이를 악물고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저 말이 진짜일까? 이 자도 정말 나처럼 혼란스러운 건가…….'

리프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타인을 좋아해 본 게 처음이란 이스카의 말을 곱씹었다. 제 몸에 억지로 밀어붙여지는 노골적인 성적 욕망이 불편하긴 했지만 아까처럼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낯설고 두려운 게 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하고 안도한 것이다.

"넌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 잘 모를 거다."

위험한 눈을 한 이스카는 리프가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겠다는 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스카는 제가 이 정도로까지 욕구를 참은 이유가 뭔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숲에서 처음 리프를 가졌던 날, 그는 양껏 리프를 취한 게 아니라 딱 하룻밤 밖에 안아보지 못했다. 리프를 갈구하는 그의 갈증과 허기는 충족되기는커녕 간신히 혀끝만 적신 수준이었다.

제 무의식에 각인된 욕망을 인지한지 얼마 안 된 상태로 리프를 또 취하려고 했다간 절제나 자제력 따위를 발휘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물론 성마른 몸짓으로 리프의 몸을 망가트려도 절대 놓아주지 않을 테지만, 기왕이면 온전한 상태로 제 곁에 두고 싶은 게 당연했다.

"그런데 정말 여길 만져줘도 기분 좋은지 모르겠는 거냐?”

이스카가 리프에게 다시 팔베개를 해주는 자세를 취하며 리프의 페니스를 만지작거렸다.

"......"

리프는 단숨에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아까보다 덜 긴장되기는 한데 부끄러워서 몸서리가 쳐졌다.

"널 어찌해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

이스카는 미간을 찌푸리고서 리프의 전신을 훑어봤다. 그 상태로 한참을 고심하던 황자는 혹시 하는 얼굴로 리프의 보송보송한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 순간 리프의 얼굴이 한층 더 빨갛게 익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스카가 제 뺨에 입을 맞추자 가슴이 짜르르 하고 울렸다. 이스카가 손에 쥐고 있는 말랑한 페니스에도 조금 힘이 들어갔다.

"이게 네 수준인 거냐. 정말 갈 길이 멀군."

이스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유리천장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리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방금 그가 말한 대로 갈 길이 첩첩산중으로 멀긴 하지만 아예 가망이 없는 게 아니란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군.'

리프는 홧홧해진 뺨을 손으로 식히다가 딴청을 부리듯 별을 올려다봤다. 제 몸에 닿는 이스카의 뜨끈한 페니스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밤하늘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온실에 이스카와 단 둘이 있고, 사방에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불편하거나 어색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이스카가 느릿하게 해먹을 흔들기 시작했다. 요람에 누운 것처럼 졸음이 몰려온 리프는 이스카의 옷깃을 슬그머니 움켜잡은 채로 잠이 들었다. 이스카는 리프를 아프게 하고 겁나게 하지만 한편으론 그를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말을 탄 초대 황제의 조각상이 중앙에 세워진 분수가 거품이 인 물줄기를 힘차게 뿜어냈다. 새하얀 대리석을 가져다 만든 회랑의 기둥 사이로 햇살이 비쳐드는 황궁의 분위기는 차분하면서도 밝았다. 새들이 난간에 앉았다가 부산하게 날갯짓을 했고 머리를 케이크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귀부인들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모 귀족 부부의 침대 사정에 대해 귀엣말을 나눴다. 마음은 바쁜데 황궁 예법을 어길 수 없어 차선책으로 정보로 뒤뚱뒤뚱 회랑을 건너는 관료들의 모습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회랑 구석엔 새카만 후드를 깊게 눌러쓴 노인이 홀로 서있었다.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바쁜 걸음으로 제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노인의 분위기는 음침한 장의사처럼 이질적이었다. 생기에 찬 얼굴을 한 궁인들은 낙낙한 소맷자락에 두 손을 교차해 넣은 노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모퉁이를 지나쳤다.

황궁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늪에서 갓 건져낸 익사체처럼 불길한 기운을 흠뻑 머금은 노인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새빨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그들을 향해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모습 또한 볼 수 없었다.

"러셀, 황태자의 병세가 눈에 띄게 완화되었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게 사실이야?”

멀리서도 눈에 띄는 덩치 큰 기사가 현란한 옷차림을 한 남자와 함께 회랑을 건너왔다.

'흐음.'

흉측하게 늙은 노인은 회랑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귀족 남자들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을 한 남자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단번에

알아챘다. 그러나 노인은 마법사가 제 존재를 눈치챌까봐 긴장하거나 경계하는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름이 지층의 단면처럼 짙게 드리워진 노인의 얼굴엔 노골적인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러셀이라는 마법사는 기껏해야 4서클 중후반. 그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보다 고위 마법사인 노인의 위장마법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노인이 만들어낸 미세한 공간의 일그러짐을 눈치 채려면 그보다 서클이 높거나 최소한 동급 수준의 마력을 몸에 품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물질계 마법 수준이 퇴보와 정체를 거듭하며 평균하향화 된 덕분에 이제 이 세상에 그보다 뛰어난 인간 마법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병세가 차도를 보인 건지, 저승의 문턱을 넘기 전에 반짝 상태가 좋아진  건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어쨌든 황태자가 밤중에 제 궁 밖으로 기어 나온 모습을 시녀들이 목격하긴 했다더군."

러셀이 흥, 하고 코를 울리며 턱 높이까지 쌓인 책들을 고쳐 안았다. 회랑 복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러셀은 피가 뚝뚝 떨어질 것처럼 시뻘건 눈을 가 진 노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황후가 송장과 다름없는 황태자를 치료하려고 지금까지 별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잖아."

"일단 무슨 짓을 한 건지 조사하고 있으니까 곧 밝혀지겠지. 어차피 황태자 가 기적처럼 몸이 멀쩡해진다고 해도 판도를 뒤집진 못 해."

무거운 검은 후드로 몸을 감싼 노인은 제 고용주에 대한 러셀과 햄튼의 대화를 듣고도 불쾌해 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누가 득세하든, 누가 제위를 물려받든 노인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 노인은 제게 도움을 요청한 황태자의 안위와 영달 따위에도 관심이 없었다.

몇 살인지도 가늠하기 힘들만큼 끔찍하게 늙은 흑마법사는 회랑을 오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며 영혼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됐어! 이제 황혼과 고뇌의 탑 수장을 우리의 입김이 닿는 인물로 앉힐 수 있겠군요. 2황자와 3황녀의 똥줄이 바짝 타는 냄새가 여기까지 나지 않으십니까?"

황위 계승권 4위인 이스카리오테 카드모스의 책사 러셀이 주먹을 불끈 쥐며 제 주군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스카 황자는 호프만의 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턱을 비스듬히 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하,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어."

이스카가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딴 생각에 빠져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다 발만왕국으로 유출시키려던 마법진이 호프만의 것이란 사실을 밝혀낸 덕분입니다. 지금 기분 같아선 그 예쁘장한 노예 녀석에게 뽀뽀라도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군요."

"누구를 말하는 거지?”

수하들이 무슨 말을 하든, 하루 종일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던 이스카가 갑자기 반응을 보였다.

"누구라니요?"

광대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러셀이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네가 뽀뽀라도 해주고 싶다는 노예 말이야."

귓가에 스치는 이스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리프는 허둥지둥 찻주전자에 손을 뻗었다.

"됐어, 내가 따르지. 어린놈이 벌써 수전증이라도 생긴 모양이로군."

이스카가 등 뒤에서 팔을 뻗어 찻주전자를 들어 올리는 리프의 손을 제지했다. 손을 가늘게 떠는 리프가 미답지 않은 기색이었다.

'읏.'

리프는 이스카의 몸이 제 등에 밀착하자 리프는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옆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싶은데 테이블과 이스카의 몸 사이에 갇혀버려서 리프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스카가 어찌나 바짝 몸을 붙이고 있는지 그의 단단한 팔 근육이 옷 너머로 느껴질 정도였다.

노예 주제에 감히 비켜달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리프는 체념한 얼굴로 이스카와 테이블 사이에 가만히 끼어 있었다.

'손가락이 무척 길고 정갈하군.'

딱히 시선을 둘 데가 없어 테이블을 응시하던 리프는 찻잔에 차를 따르는 이스카의 손을 보고 문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열은 분홍빛이 도는 손톱 반달이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반듯했다.

'잘생긴 손이야.'

리프는 티포트에서 찻잎을 건져내는 이스카의 손을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쳐다봤다. 손에다가 잘생겼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조금 어색했지만 그 단어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표현이 없었다.

검을 다루는 사람들은 으레 손이 투박하기 마련인데, 이스카의 커다란 손은 손바닥이 조금 딱딱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만큼 완벽했다.

"리프."

입술을 살짝 벌리고서 찻잔을 든 이스카의 손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러셀이 그를 불렀다.

"리프!"

"예……?"

이스카를 즐즐 쫓아갈 기세로 손가락에 넋을 빼고 있던 리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러셀을 올려다봤다.

"리프, 호프만의 마법진을 수정한 마법사에 대해 언제 쯤 말해줄 거냐. 아는 게 있으면 뭐든 좀 털어놔봐. 아주 사소한 단서라도 상관없어."

러셀이 강압적인 어조로 리프를 채근했다. 평소에도 리프와 마주칠 때마다 매번 지나가듯 물어보곤 하던 질문이지만 오늘은 러셀의 분위기가 꽤 심각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리프는 쇠사슬을 손에 꼭 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 마법사를 헤치려는 게 아니야. 그저 서 트리아만 마법사 놈들에게 꿀리지 않을 인재가 필요한 것뿐이지. 정보를 제공해도 너한테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게."

러셀이 갑자기 조바심을 낸 이유가 바스커빌의 연구일지를 열람하러 올 서 트리아만 제국 마법사들 때문인 모양이었다.

"네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짤그랑

필사적으로 러셀의 시선을 외면하던 리프가 어깨를 움찔 튕겼다. 티아고 영감과 호아킨들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는……."

리프가 동요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인 순간, 이스카가 찻잔을 세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리프, 찻물 다시 끓여와."

"저하, 잠깐만요. 오늘은 꼭 리프에게!"

"내 말 안 들리 나? 당장 다시 끓여와. 차에서 떫은맛이 나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으니까."

이스카는 러셀의 말을 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타오라는 말은 리프에게 한 것이지만, 맹수처럼 사납기 짝이 없는 이스카의 시선은 러셀을 향해 있었다.

"감히 내 명령에 토 달지 마라, 러셀."

이스카가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심장이 파헤쳐진 소녀의 육신을 내려다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촛불이 사납게 동굴 벽을 배정으로 일렁거리고, 흑마법사의 그림자가 소녀의 육체를 제단에서 끌어내리는 광경을 연출했다. 처참하게 망가진 소녀의 시체가 하수구 끝자락에 걸려 발견 된 것은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낀 다음날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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