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러멜 색이 나는 차를 한 모금 머금은 리프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홍차에 우유를 타서 비리고 이상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혀끝에 감도는 맛이 고소하고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악몽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던 리프는 굶주린 작은 짐승처럼 홀짝홀짝 차를 마셨다.
달콤하고 고소한 차는 리프의 오래된 기억을 자극했다. 어린 리프가 열이 펄펄 나거나 가위에 눌리면 티아고 영감과 호아킨이 몰래 축사에 숨어들어 양젖을 짜다주곤 했던 것이다.
최대한 아껴 먹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카가 우유를 부어준 차는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리프는 벽난로의 불꽃이 사그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빈 찻잔을 내려다봤다. 단지 맛있는 걸 다 먹어버려서 안타까운 게 아니라 저를 돌봐주던 사람들의 따뜻한 애정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것 같아 외롭고 쓸쓸해진 것이다.
서글픈 얼굴을 한 리프가 빈 찻잔을 양손으로 꼭 쥐고서 멍하니 서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 마셨으면 들어가서 자도 돼. 차는 테사에게 치우라고 해두지."
이스카가 둥글게 말린 서류의 인장을 뜯으며 턱짓으로 침실의 문을 가리켰다.
"그냥 여기에 있을 게요……."
빈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침실을 흘끗 바라본 리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젖은 담요를 휘감고 있는 것처럼 몸이 노곤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방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캄캄한 밀실에서 또 혼자 잠을 설치는 것보단 차라리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거실에 나와 있는 게 심적으로 편했다.
"자기 싫어하는 이유가 뭐지? 또 악몽을 꿀까봐 두려운 건가."
리프를 무심한 눈길로 관찰하던 이스카가 잉크의 뚜껑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리프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황자의 질문에 움찔 놀랐다. 제가 왜 거실에 남아 있으려고 했는지 이스카가 눈치 채고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황혼의 탑에서 지낼 때도 가위에 눌리는 일이 많았나?"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어요. 가위에 눌려도 금방 깼고요. 옆에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리프는 티아고 영감과 호아킨, 그리고 바토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렸다. 제게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입으로 말하고 나니까, 평소에 꾹 억눌러오던 티아고 영감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큰 파도가 되어 돌아왔다.
"옆에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얘기군."
이스카는 눈을 내리뜨고서 슬픔에 잠겨 있는 리프의 팔을 붙잡았다.
"저, 저하?"
화들짝 놀란 리프는 저를 침실로 끌고 들어가는 이스카를 겁먹은 눈으로 올려다봤다.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해."
커다란 침대에서 베개를 하나 집어 든 이스카는 새하얀 양털 카펫 위에 그걸 툭 던졌다. 리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양털 카펫 위에 떨어진 베개와 황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왜, 설마 침대에서 재워주길 바라는 거냐?”
이스카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리프에게 이를 내보이며 셔츠를 훌러덩 벗었다. 아마 황자도 이제 잠자리에 들 모양이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리프는 햇살 냄새가 나는 베개를 안아 들고서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래도 이스카가 아까 사람이 있으면 가위에서 금방 깬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인 듯했다.
하지만 사방이 꽉 막힌 밀실에서 잠드는 것 보단 따뜻하고 보드라운 양털 카펫 위에서 잠드는 쪽이 나은 건 누가 봐도 자명했다. 리프는 이스카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대신 주춤주춤 카펫에 몸을 뉘였다.
'기분이 이상하군.'
리프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항상 딱딱한 돌바닥에서만 자다가 등이 따뜻하니까 왠지 어색했다. 게다가 양털이 뺨에 닿는 감촉이 간지러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침대에선 잠시 거실에 다녀온 이스카가 이불을 덮고 눕는 기척이 났다. 황자가 램프의 불을 끄자 침실이 어둑해졌다. 하지만 리프가 갇혀 지내던 밀실처럼 어두컴컴하진 않았다.
창문 너머로 작은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졌다. 낯선 환경에 던져진 리프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분명 이스카에게 이끌려 침실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졸렸는데 참으로 이상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눈이 감기겠지, 라는 생각으로 리프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벽지의 무늬를 구정하고 모서리에 금세공을 한 서랍, 화려하고 이국적인 도자기까지 꼼꼼히 살폈음에도 눈꺼풀의 무게가 여전한 것이다.
'황자는 자고 있을까.'
푹신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얹은 리프는 양털을 손끝으로 비비다가 저 위에 있는 침대를 흘끔 올려다봤다. 황자의 숨소리가 들리기는커녕 그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데 리프는 이스카의 존재가 신경이 쓰였다.
"왜 여태 안 자고 꼼지락거리는 거지?"
잠이 오지 않는 리프가 양털 위에서 조심스럽게 엎치락뒤치락 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 저 위에서 이스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이 움직일 때마다 쇠사슬 소리가 나서 거슬려."
이스카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계속 밑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기척을 내면 다시 밀실에 가두겠다는 경고 같아 리프는 황급히 눈을 감았다.
"네 머리카락은 네 어미를 닮은 건가?"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는데 이미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스카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닐 거예요, 아마."
리프는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가 자는 척해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아마?”
이스카는 대답이 왜 그 따위냐는 듯 물었다.
"어머니를 본 적이 없어서 머리카락 색이 뭔지 몰라요."
리프의 모친은 리프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리프의 아비 또한 어미와 마찬가지로 황혼과 고뇌의 탑 소유의 노예로 리프가 태어나기 전에 사고로 죽었다. 어느 마법사가 실험을 잘못해서 연구실에 폭발이 일어난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랬었지, 내가 괜한 걸 물었군."
이스카는 리프에 대해 조사했던 자료들을 떠올렸는지 더 이상 리프의 어미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저 자. 어쩌면 날 그리 싫어하지 않는 게 아닐 지도 몰라.'
베개를 베고서 양털 카펫에 누운 리프는 후드 사이로 흘러나온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싫어하지 않는 것과 신경 써주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오늘 황자가 제게 해준 행동들을 돌이켜 보면 나름 신경을 써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저하는 일 말고 다른 취미가 없으신 것 같아요."
쇠사슬 소리가 날까봐 뒤척거리는 걸 자제하고 있던 리프는 돌연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
"취미?"
이스카는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연무장에서 대련으로 몸을 푸실 때 빼곤 늘 정무를 보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오늘도 그렇고……."
리프는 괜한 얘기를 꺼냈다고 후회하며 애꿎은 양털을 괴롭혔다. 황자의 여가 따위 제가 신경 쓸 바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 이스카가 거의 매일 매춘부를 불러들였던 일을 떠올려 보면 어쩌면 황자의 취미는 여색일지도 몰랐다. 귀족이나 왕족 중엔 여자를 품는 행위를 취미로 여기는 자들이 제법 많았다.
"일 따위 좋아서 하는 게 아니야. 피붙이라는 것들이 죄다 머저리에 꼴통이라 어쩔 수 없이 뒤치다꺼리를 하게 된 것뿐이지."
이스카가 베개를 고치며 코웃음을 쳤다.
만약 러셀이나 햄튼, 혹은 내무대신이 이스카의 말을 들었다면 뒷목을 잡았을 게 분명했다. 치매에 걸린 황제를 포함하여 이스카를 제외한 대부분의 황족들이 손쓸 도리 없이 무능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스카는 '정치' 라는 이름의 전쟁의 축소판을 그 누구보다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스카는 체스를 두듯 정치판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걸 좋아했다. 정적을 차근차근 제거하거나, 독에다 몰아넣고서 서서히 몰락하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는 게 바로 이스카라는 사람의 성품이었다.
하지만 리프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이스카의 말을 진짜라고 믿어버렸다. 더불어 피붙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에 파묻혀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안 됐다는 마음도 몰래 품었다. 그동안 리프가 곁에서 죽 지켜본 바로는 이스카가 재상 대리로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의 양은 하루 종일 골방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는 마법사를 떠올릴 만큼 과중했다.
"네놈이 내게 자발적으로 뭘 물어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군."
널찍한 침대를 혼자 쓰는 이스카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랬나?'
슬슬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한 리프는 기억을 더듬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스카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네놈은 노예니까 내게 사사로이 질문 따위를 던지면 안 되는 게 원칙이긴 하지. 하지만 내 시중을 드는 몸종이니만큼 나에 대해 잘 알아야 하니,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물어보도록 해."
"그렇게 할 게요."
침대 아래에 누운 리프는 이스카가 저를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스르륵 눈꺼풀을 닫은 리프의 목소리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리프가 고개를 끄덕여가며 대답한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너무 졸려서 몸에 익은 습관대로 행동한 것뿐이었다.
리프는 금방 수면의 파도에 휩쓸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깊은 잠은 아니었고, 선잠은 아직 악몽의 여파가 모래처럼 까끌까끌하게 남은 리프를 오래 전에 무의식 저편에 묻어둔 오래된 기억으로 인도했다.
"으......"
리프의 무의식은 삼백 년 전의 과거를 헤맸다.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어떤 '존재' 로 인해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차원의 결계가 둘러진 땅엔 마치 세상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쉴 새 없이 날카로운 천둥 번개가 내려쳤다. 광활한 대지를 뒤덮었던 병사들의 시체는 허공으로 떠올라 거대한 육괴 덩어리를 형성했다.
불투명한 반원형 장막 저편에선 드래곤들이 결계를 녹이기 위해 피처럼 붉은 화염을 뿜어냈다.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 흔들리고, 찢겨지고, 붕괴되고 있었다. 드래곤들은 결계를 뚫기는커녕 표면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고, 몇 몇은 자기장에 휩쓸려 치명상을 입었다.
다른 차원의 존재로 인해 오염된 결계 안.
저주 받은 땅에 홀로 남겨진 노인은 내장 조각이 섞인 피를 쏟으며 거대한 존재를 올려다봤다. 노인은 제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감히 내 호의를 악용하다니 영악하군. 하지만 나는 너를 영원히 증오할 것이다, 인간이여.'
격노에 휩싸인 거대한 존재의 목소리가 사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거대한 존재의 분노를 산 대상은 피에 젖은 대지에 홀로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노인이었다.
"으, 으읏."
양털에 파묻힌 리프의 몸이 꿈틀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가위에 눌린지 얼마 되지 않았고, 누군가 저를 만지는 감각이 느껴졌기에 리프는 노예 숙소에서 지낼 때처럼 금방 눈을 뜰 수 있었다.
"저하."
눈꺼풀을 들어 올려 저를 내려다보는 이스카의 얼굴을 본 순간 제가 무슨 내용의 꿈을 꿨는지도 잊어버렸다.
"사람이 옆에 있으면 괜찮다면서."
맨발로 침대 밑으로 내려와 리프를 깨운 이스카는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제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 헉!"
정신을 차린 리프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세우며 황자에게 바른대로 실토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스카가 갑자기 그를 안아 올리는 바람에 리프는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저, 저하!"
리프는 이스카에게 들린 자세 그대로 경직됐다. 느닷없이 몸이 허공으로 들린 탓에 후드가 훌러덩 벗겨졌고, 리프의 금발도 이스카의 두꺼운 팔 아래로 쏟아졌다.
"그럼 처음부터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설명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이스카는 리프를 안은 채로 침대로 올라와 이불을 덮었다. 리프 때문에 자다가 깨서 그런지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했다.
"저, 저, 저하."
순식간에 침대 위로 올라오게 된 리프는 이스카의 가슴에 코를 박은 채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제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이스카의 팔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어서 침대의 푹신함 따위는 느낄 경황이 없었다.
"할 말 있으면 아침에 해."
리프를 품에 안은 이스카는 이젠 아무 소리도 듣기 싫다는 듯 베개를 고쳐 베며 눈을 감았다.
"수, 숨 막혀요."
리프가 간절한 얼굴로 호소했다. 그는 제 입술에 닿을락 말락하는 이스카의 피부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숨결, 옷 너머로 느껴지는 뜨끈한 체온 때문에 도저히 신경을 어디에 둬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호아킨과 바토, 티아고 영감과 함께 냄새나고 좁디좁은 숙소에서 뭉쳐 살긴 했지만 잘 때는 어느 정도 떨어져 지냈다. 한 겨울엔 추위 때문에 가깝게 모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타인과 밀착해서 잠을 잤던 적은 없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놈이군. 빨리 자."
이스카는 제 품에서 움찔거리는 리프의 뒤통수를 꾹 누르듯 감싸더니 다른 손으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뭐, 뭐지?'
이스카의 행동에 당황한 리프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등에 전해지는 규칙적인 진동 때문에 리프는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이스카의 느릿한 심장 소리 또한 리프의 눈꺼풀을 무겁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누군가에게 안겨 있어야 한다는 건 굉장히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제 등을 지탱하는 단단한 팔 때문에 왠지 안심이 됐다. 이스카의 체온은 몹시 뜨거워서 마치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 날, 타닥타닥 불꽃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거대한 털짐승에게 기대어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긴장이 풀린 리프는 저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았다. 푹신하고 단단한 존재에게 끌어 안겨진 리프는 제 머리에 닿은 것이 베개가 아니라 이스카의 팔뚝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 밤은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새액, 색
황자의 침실에 고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프의 등을 한참 동안 두드리며 재운 이스카는 팔을 움직여 자세를 바꿨다. 살짝 입술을 벌리고서 깊게 잠이 든 리프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팔베개를 하던 손을 뺀 것이다.
"못생겼지만 자는 모습은 나름 귀엽긴 하군."
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리프를 내려다보던 이스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리프의 입가에 손을 가져간 그는 잠시 후 리프의 것에 제 입술을 겹쳤다. 말랑하고 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전해지자 전기가 내달리는 것처럼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스카는 이 생경한 느낌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왕진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의사가 늠름한 체격을 가진 남자의 가슴에 고깔 모양의 기구를 댔다.
"심장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저하."
한참동안 기구에 귀를 기울였던 의사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갑자기 의사를 부르라는 이스카의 명령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햄튼과 러셀은 역시 그러면 그렇지, 라는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제대로 진단한 것 맞나?”
의사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옷깃을 벌린 이스카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는 요 며칠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슴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심장이 따끔거리는 그 증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악화됐다.
이스카는 살면서 한 번도 감기에 걸려 본 적 없었고, 그 어떤 질병에 노출되어 본 일 또한 없었다. 심지어는 정적이 독살을 시도 했을 때도 멀쩡했고,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도 너무나도 태연하게 군대를 지휘했다. 건강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제가 감히 괴롭다는 감각을 느낄 리 없었다.
"저하는 세상 그 누구보다 건강하십니다. 저하가 아프신 거라면 저희들은 걸어 다니는 시체보다 못하단 말입니다."
오랫동안 황자의 외가에서 주치의로 일해 온 의사는 아픈 곳 없이 멀쩡하기만 한데 도대체 왜 저를 닦달하는 거냐는 얼굴로 왕진가방을 챙겼다.
"그 말에 책임 질 수 있나? 네 명예와 목숨을 걸고 아무 문제도 없다고 말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이스카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의사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마치 촌부에게 엉터리 약을 파는 사기꾼이라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저하, 역정부터 내지 마시고 증상을 자세히 설명해 보십시오. 그 원인 모를 통증이라는 게 언제부터 생기신 겁니까."
서 트리아만 제국 마법사들과 공동연구를 하느라 얼굴이 말도 못하게 초췌해진 러셀이 진땀을 빼며 이스카를 진정시켰다. 황자에게 위협을 당한 초로의 의사는 방금 제가 말한 대로 마치 시체처럼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다.
"기억나지 않아."
이스카는 거친 숨을 뱉어내며 의사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럼 주로 언제 통증을 느끼시는 겁니까."
"처음에는 그 녀석과 함께 있을 때만 가슴께가 따끔거리더니 얼마 전부턴 혼자 있어도 갈비뼈 안쪽이 불편하더군. 마치 누군가 여기에 칼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느낌이야."
인상을 잔뜩 쓴 이 스카는 제 침 대에 누워 곤히 잠든 리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심장 부근을 더듬었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 노예 놈의 면상을 떠올리자 또 다시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렸다.
"그건......"
뭔가 눈치를 챈 러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수염이 까칠하게 자란 그는 얼른 의사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 녀석이 누군데요?"
하지만 뇌까지 근육으로 꽉 들어찬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종종 불러일으키는 햄튼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면 안 될 질문을 입에 올렸다.
"내 노예."
이스카는 목에 가시라도 낀 사람처럼 언짢은 얼굴로 대꾸했다.
"저하 소유의 노예가 한두 명입니까?"
팔짱을 낀 햄튼이 아리송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프."
"리프요? 설마, 저하. 컥?"
몸집이 곰 같은 햄튼이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뭔가 말하려는 순간에 러셀이 그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왜 걷어차는 거야! 아무리 봐도 이건 내가 로잘린을 만났, 억!"
"그 입 다물지 못해?”
러셀은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건 줄 알아, 이 멍청아?' 라는 표정을 지으며 햄튼의 발가락을 사정없이 지팡이로 찍었다.
"왜 그러는 거지?”
이스카가 수상쩍은 기류를 감지하고서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아무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 녀석이 또 제 부인 자랑을 하려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러셀이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이스카는 잠시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햄튼이 시도 때도 없이 부인 자랑을 늘어놓아 노총각인 러셀의 신경을 긁는다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셀은 황자가 단추를 채우며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무 말도 못하게 한 거야."
발을 감싸 쥔 햄튼이 아파 죽겠다는 눈으로 러셀을 노려봤다.
"정말 모르겠어?”
러셀은 한심해 죽겠다는 듯 혀를 찼다. 독단적이고 이기적이며 폭군에 가까운 이스카의 성격이라면 옆에서 아무리 리프에 대한 마음을 알려줘 봤자 인정하지 않으려 들 것이 자명했다. 이런 경우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제 감정을 스스로 깨닫게 내버려 두는 게 현명했다.
그날 밤 이스카는 일을 마치고서 처소로 돌아왔다. 리프는 황자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리 와 봐."
서재로 들어간 이스카가 리프를 불렀다. 리프는 책을 덮고서 황자에게 다가갔다. 황자는 한참동안 물끄러미 리프를 바라보다가 쇠사슬을 만지작거렸다.
"불편하지 않나?"
"그야 그렇긴 하지만......."
리프는 새삼스럽게 왜 그런 걸 묻는 거냐는 표정으로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나는 풀어주지 않을 거다. 네가 이걸 차고 있지 않으면 안심이 되질 않으니까."
이스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쇠사슬을 풀어준다 하더라도 리프가 도망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스카는 왜 굳이 리프에게 쇠사슬을 채워두고 싶은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치매에 걸린 황제를 대신해 재상 대리로서 제국의 정무를 돌보는 이스카의 일정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처럼 늘 정확하고 빠듯하게 돌아갔다. 그의 수면 시간은 평균 네 시간이었고 황도 외각의 시찰을 나가기 위해 마차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서류를 살폈으며 식사 때는 귀족 및 제국의 자금줄을 쥐고 있는 거대 자본가들을 만났다. 오찬과 만찬을 기득권층의 숨통을 쥐락펴락하며 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하루 일정을 흐트러짐 없이 소화하는 그의 집중력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을 질려 버리게 만들 만큼 대단했다. 전날 밤 연회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셔도, 국정에서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당일에도, 제국의 공식적인 행사를 황제 대신 집전하면서도 이스카는 빈틈없이 분 단위로 정무를 해치웠다.
한데 괴물처럼 완벽한 이스카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통 정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제게 결제를 받으러 오거나 보고를 하러 온 가료들이 무슨 말을 꺼내든 종국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리프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시스 지역에서 유통되는 은화의 은 함유량이 줄어들었다는 보고가 들어 와서 조사 중입니다. 벨가이 왕가에서 새 화폐를 찍어내면서 몰래 은화의 무게를 줄인 것으로 추정…… 저, 저하. 듣고 계십니까?"
황자에게 정기보고를 올리던 재무대신과 외무대신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혹시 잘못된 정보를 황자 앞에서 읊은 것인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듣고 있으니까 계속 해."
유리창을 등지고 의자에 앉은 이스카는 재무대신과 외무대신을 흘끗 바라보고서 건성으로 대꾸했다. 뭔가 딴 생각에 빠진 게 분명해 보이는 그의 시선은 다시 먼 곳을 향했다.
"흠흠, 자유도시 엘베에서 제국의 금화를 기축통화로 책정하는 법안을 통과 시키도록 원로들을 포섭 중입니다."
금화.
금색.
금발.
잠깐이나마 귀족 각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던 이스카의 머릿속에 또다시 리프가 떠올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리프의 연하고, 말랑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곤란하군."
이스카는 리프를 떨쳐버리려고 노력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에겐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데 귀찮은 파리처럼 자꾸 리프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바람에 도통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저, 저하?"
"무, 무슨 문제라도……?"
황자의 혼잣말에 재무대신과 외무대신의 안색이 곧 죽을 환자처럼 파리해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목소리는 이스카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이스카의 머릿속에 오늘 아침, 제 침실의 풍경이 늪지대의 안개처럼 두텁게 자리 잡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벽의 어스름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시간. 이스카는 제 품에 안겨 잠든 리프를 깨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스카가
침대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프가 비칠비칠 자리에서 일어나 눈 을 비볐다. 마치 저를 감싸고 있다가 떨어진 온기를 본능적으로 찾기라도 하듯이.
'더 자도 돼.'
어둑한 유리창을 등진 이스카의 목소리를 들은 리프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는 듯 침대 위에서 뒤척거리더니 이스카의 온기가 남은 자리로 꼬물꼬물 이동했다. 그 순간 이스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만족감과 찌릿, 하고 가슴을 관통하는 달콤한 통증 같은 것을 동시에 느꼈다.
드르륵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리던 이스카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험악한 얼굴이 되어 집무실을 나온 이스카가 말을 타고 향한 곳은 바로 그가 소유한 황자의 궁이었다. 왜 자꾸 리프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으니 직접 얼굴을 보고 원인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푸르륵, 푸르륵
정원을 가로질러 궁 앞에 도착한 이스카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근위병에게 아무렇게나 말고삐를 던지고서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던 황자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꽃이 만개한 정원 저편에서 눈에 익은 작은 머리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스카는 당장 발걸음을 돌려 정원 속으로 들어갔다.
원예가위를 들고 있는 리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후드를 쓴 리프의
옆엔 시녀장 테사가 챙이 넓은 모자에 장갑을 끼고 서 있었고, 그들의 발치엔 가위로 잘라낸 꽃을 담은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어……? 오셨어요."
실내를 장식할 꽃을 자르다가 이스카를 발견한 리프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재상의 집무실에서 한참 정무를 보고 있어야할 이스카가 아무런 기별도 없이 궁으로 돌아온 게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저하, 이 시간엔 어인 일이십니까."
반사적으로 예를 갖춰 인사한 시녀장 테사는 별 일도 다 있다는 듯이 황자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정원으로 다가온 황자는 시녀장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를 지나쳤다. 이스카는 제가 왜 이 시간에 궁으로 돌아왔는지 조차 대답해주지 않았다.
'뭐지,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일단 가위를 바구니에 내려놓은 리프가 제 앞으로 바짝 다가온 황자를 의 아하다는 눈으로 올려다봤다. 정원을 에워싼 장미냄새와 이스카의 향수 냄새, 그리고 이스카의 고유한 체취가 한 데 뒤섞여 리프의 머리를 조금 어지럽게 만들었다.
"......"
이스카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리프를 뚫어져라 내려다봤다. 리프를 쳐다보는 황자의 눈빛은 마치 아무리 노력해도 단서를 찾을 수 없는 난해한 낱말 퍼즐이라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여전히 이유를 모르겠군."
미간을 찌푸린 이스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리프의 양쪽 뺨을 쭉 잡아 늘렸다.
"저, 저하?"
시녀장 테사가 기겁한 표정을 지었고, 이스카의 큰 키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리프는 억, 소리도 못 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랑말랑하고 보들보들한 게 꼭 우유푸딩 같군."
이스카는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리프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도, 아우으……. 왜, 으."
황자에게 뺨을 붙잡힌 리프가 뭐라고 열심히 말을 하려고 했지만 대차게 발음이 셌다. 이스카가 리프의 뺨이 밀가루 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물거리는 탓이었다. 다행히 이스카가 볼을 세게 붙잡은 건 아니라서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갑자기 궁으로 돌아온 이스카가 다짜고짜 왜 이러는 건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저하, 차를 준비할까요?”
예상 밖의 사태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테사가 정신을 가다듬고서 이스카의 주의를 끌었다. 황궁에서 수십 년간 일해 온 궁정인의 노련미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필요 없으니까 물러가도록."
이스카는 한참동안 주물럭거리던 리프의 뺨을 놓아주며 대꾸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여전히 리프의 속눈썹과 조그만 입술, 새하얀 피부에 머물러 있었다.
테사가 물러나자 꽃으로 둘러싸인 정원엔 이스카와 리프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사귀와 꽃들을 흔들었다. 바람 때문인 건지 코끝을 스치는 장미향이 한층 더 짙어졌다.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나신 건가요?”
리프는 도대체 왜 제 뺨을 가지고 장난을 친 거냐고 황자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스카도 왜 제가 그런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스카는 단호한 말투로 부정했다.
"그보다 이 꽃들은 다 뭐지?"
"시녀장님이 1층 응접실에 장식할 꽃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도와드리고 있었어요."
리프는 이스카가 처소에 뭘 두고 가서 그걸 가지러 왔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안색이 많이 좋아졌군."
"저하 덕분에 이제 악몽을 안 꾸니까요……."
리프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세모꼴로 뾰족한 장미가시를 만지작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자의 침대에서 같이 자게 된 뒤로 가위에 눌리지 않게 됐다. 불면증도 거짓말처럼 깨끗이 사라져서 요새 리프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래, 내 덕분이지."
리프를 쳐다보며 대꾸하는 황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부드러워졌다. 분명 방금 전까지 마법수식을 풀지 못해 몇 달을 고민하던 마법사처럼 답답해하던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이스카의 눈빛에 우쭐한 감정과 함께 여유가 깃든 것이다.
"곧 다시 등청하셔야겠네요."
탐스럽고 새하얀 장미나무를 등진 리프가 원예 가위를 던져둔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리프의 시선은 재상의 집무실이 있는 새파란 하늘 저편을 잠시 향했다. 멀리서 아득하게 분수가 물을 뿜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청 안 해. 생각이 바뀌었어."
이스카는 리프의 손목을 낚아챘다. 재상의 집무실에 그의 결제를 받아야할 서류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는 감정이 치솟았다.
"저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저, 이거 시녀장님께 가져다 드려야 해요."
이스카에게 손목을 붙들린 리프가 황자와 보폭을 맞추기 위해 발을 급하게 놀렸다.
"이딴 건 테사보고 알아서 가져가라고 해."
이스카는 리프가 들고 있는 바구니를 빼앗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앗!"
리프는 당황한 얼굴로 이스카의 옆얼굴을 올려다봤다. 바닥에 훌어진 꽃들과 바구니를 주우려고 했지만 제 손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이스카 때문에 새하얀 장미꽃들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타."
근위병에게 말을 불러오게 한 이스카는 리프의 허리를 붙들고서 훌쩍 들어올렸다.
"헉!"
느닷없이 말안장에 올라타 눈높이가 달라진 리프는 눈을 부릅뜨고서 본능적으로 말의 갈기를 움켜잡았다. 말에 탄 건 너무 오래간만이라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고작 계단 두어 칸 높이 정도 올라선 것뿐인데도 땅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쇠사슬 때문에 내 허리를 붙잡는 것보단 앞에 태우는 게 낫겠군."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이스카는 리프 등에 가슴을 댄 자세로 말에 올라탔다. 이스카와 밀착하게 된 리프는 움찔 어깨를 긴장시켰다. 요 며칠 황자와 한 침대를 쓰긴 했지만 훤한 대낮에, 그것도 사방이 탁 트인 야외에서 황자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어색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리프가 이 당혹감을 제대로 내면에서 인지하고 소화하기도 전에 이스카가 말을 출발 시켰다.
히히힝
"헉!"
이스카와 리프를 태운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리프는 아찔한 속도감과 정면에서 마구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눈이 따끔거렸다.
"저, 저하! 조금만 천천히."
푸른색 후드가 바람에 휩쓸려 벗겨지고 리프의 금발이 짙은 녹음을 배경으로 흩날렸다.
"떨어질 일 없으니까 날 믿고 긴장 풀어."
리프의 허리에 팔을 감아 단단히 붙든 이스카가 귀에 대고 호언장담을 했다. 황자는 열다섯의 나이로 쟁쟁한 기사들을 물리치고 마상시합에서 우승한 실력자였다.
"긴장을 풀라고 말하셔도 그게 그렇게 간단히, 으헉!"
목을 잔뜩 움츠린 리프는 나뭇가지가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광정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분명 나뭇가지에 부딪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마에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간이 콩알 만한 녀석이군. 날 믿으라고 했을 텐데?”
한 손으로 고삐를 쥔 이스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스카가 뭔가 조치를 취한 모양인데, 리프는 눈을 감고 있느라 그 광경을 보질 못했다.
"절대 제 담이 작은 게 아닙니다, 저하!"
간신히 실눈을 떴다가 도로 감은 리프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변했다. 마음이 다급한 탓인지 원래 말투가 튀어나왔다. 심장이 몇 번 들썩들썩하고 나니까 이스카와 밀착하고 있다는 거부감이나 어색함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황자를 몰래 노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뒤를 돌아보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달그락, 달그락
"아직도 눈을 감고 있나."
말의 고비를 당겨 속도를 늦춘 이스카가 리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부터 뜨고 있었어요."
"거짓말 하지 말고 얼른 눈이나 떠."
이스카가 코웃음을 치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리프는 제가 눈을 감고 있다는 걸 황자가 어떻게 확신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슬쩍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
말안장에 홀로 앉은 리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신비로운 호수가 시야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아까 눈을 뜨고 있었다고 거짓말 할 셈인가?"
이스카가 리프를 말에서 내려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햇살을 반사하는 호수의 반짝임과 울창하게 솟아올라 호수를 감싼 수목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호수의 풍경에 넋을 빼앗긴 리프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푹신한 수풀에 발을 디뎠다. 현재 뿐만이 아니라 전생에서도 인생의 대부분을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보낸 리프는 멀리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바스커빌이었던 시절, 오로지 마법에만 매달렸던 그는 마법사로서 높은 성취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안식년을 가지기는커녕 반나절의 휴가조차 즐긴 일이 없었다.
"자주오세요?"
말에서 내려온 리프는 제가 아직도 이스카의 옷깃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 채 질문을 던졌다. 이스카는 리프가 제게 가까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오진 않아. 사냥할 때 오다가다 지나치는 일은 종종 있지만."
이스카는 리프의 금발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대꾸했다. 새하얀 목이 무방비하게 드러나자 황자는 순간적으로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어떤 충동을 느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두리번거리지만 말고 멱이라도 감아보지 그래?"
이스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추기자 리프는 정말 그래도 되나? 라는 얼굴로 고민을 했다. 이곳은 황실 소유의 숲이었다. 노예가 멋대로 호수에 들어갔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족인 이스카가 허락했으니 발 정도는 담가도 될 것 같았다.
만약 며칠 전이었다면 저자가 또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저러나, 의도를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프는 이스카가 악몽을 꾸는 저를 달래준 이후로 경계심을 많이 푼 상태였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서 호수에 발을 담근 리프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호수의 물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얼음물처럼 차갑게만 느껴지던 물의 온도에 익숙해졌다. 리프는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으며 발에 닿는 자잘한 모래의 부드러운 감촉을 즐겼다.
쏴아아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들이 허공에서 비 내리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수영은 안 할 건가?”
호수에서 발만 담그고서 주변을 돌아다니는데 이스카가 물었다.
"수영할 줄 몰라요."
뒤를 돌아본 리프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긴, 탑에서만 지냈으니 헤엄치는 법을 배울 일이 없었겠군."
이스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갑자기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졌다. 아마 황자도 물속으로 들어올 생각인 모양이었다.
"너도 벗어.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이스카가 리프에게 다가와 수갑을 풀어줬다. 리프는 탄탄한 이스카의 몸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며 주섬주섬 셔츠를 팔 밖으로 끄집어냈다. 목욕 시중을 할 때 이스카의 나체를 보긴 했지만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곳에서 잘 단련된 몸을 보는 건 사뭇 느낌이 달랐다. 거뭇한 음모와 성기가 유독 더 도드라지는 느낌이었다.
리프는 이스카가 있는 곳까지 살금살금 다가갔다. 팔로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나한테 기대."
수심이 갑자기 깊어져서 조금 당황하고 있는데 이스카가 리프를 제 품에 끌어들였다. 이스카의 체온에 익숙한 리프는 긴장을 풀고서 황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물은 차갑지만 이스카와 밀착한 곳은 따뜻해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착하군."
이스카는 리프가 제게 전적으로 의지한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신기해요."
이스카에게 매달린 채로 호수를 돌아다니게 된 리프가 하늘을 뒤덮다시피 한 나뭇가지들을 올려다보며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부력 때문에 발이 둥둥 떠오르는 감각이 낯설면서도 즐거웠다.
"손을 잡아줄 테니까 움직여봐."
이스카는 부드러운 태도로 리프에게 수영을 가르쳤다. 하지만 리프가 제 도움 없이 혼자서도 물에 떠 있을 수 있게 되자 점점 불쾌해졌다. 그 음습한 감정은 리프가 제 품을 벗어나 차박차박 물장구를 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팽창했다.
"물에 들어왔으면 잠수도 해 봐야지."
"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리프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이스카가 리프를 붙든 채로 돌연 물속으로 깊이 잠수했다. 느닷없이 수면 아래로 끌려들어간 리프는 그야말로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난동을 피워댔다.
"어푸, 켈룩! 사, 사람 살!”
"어이, 진정해."
이스카는 리프가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자 어필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물 밖으로 나왔다.
"도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땅을 밟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한 리프는 몸을 웅크리고서 이스카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봤다.
"조금 장난을 친 것뿐인데 누가 보면 내가 네놈을 죽이려고 한 줄 알겠군."
이스카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몸을 덜덜 떠는 리프의 어깨에 외투를 덮어줬다. 차가운 물에 있다가 나와서 체온이 떨어진데다가 정기를 일으키듯 놀라기까지 해서 그런지 원래는 분홍빛이어야 할 리프의 입술이 파리하게 질렸다.
"조금만 가면 숲지기의 오두막이 있으니까 거기서 불을 쬐도록 하지."
대충 옷을 꿰어 입은 이스카가 리프를 안아 올렸다. 물에서 진을 뺀 리프는 내려달라는 말도 못하고 얌전히 황자의 품에 안긴 채로 이동했다.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이스카의 말은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터벅, 터벅 주인을 알아서 쫓아왔다.
오두막으로 들어온 이스카는 리프를 남은 침대에 내려놓고서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오두막은 어둑하긴 했지만 꾸준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지 의외로 깔끔한 편이었다.
새하얀 재가 쌓여 있던 벽난로에 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어디선가 수건을 찾아온 이스카는 주섬주섬 옷을 입는 리프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제가 할 게요."
황자가 제 머리를 말려준다는 게 부담스러운지 리프가 수건을 움켜잡았다.
"됐어."
이스카는 말을 탔을 때처럼 리프를 제 앞에 앉힌 자세로 꿋꿋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냈다.
"시중을 드는 건 제 몫인데......"
"알아."
이스카는 리프의 하얗고 작은 귀를 수건으로 문지르며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황자도 제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수영을 해서 몸이 나른한데다가 누군가 머리를 만져줘서 그런지 졸음이 살금살금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벽난로에서는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고 창문이 굳게 걸린 오두막은 어두웠다. 덧문의 틈새로 빛이 새어들긴 했지만 어찐지 밤도 낮도 아닌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머리를 말리는 이스카의 손길이 느려졌다. 그 탓에 리프의 눈꺼풀이 더 무거워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륵 눈이 감긴 리프는 이스카가 깔아준 외투 위에 비스듬히 엎드려 누웠다.
"그새 잠이 든 거냐."
이스카의 옷자락을 살짝 움켜쥔 채로 잠든 리프의 귓가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편해진 건가."
한참동안 리프를 내려다보던 이스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 불면증에 시달렸을 뿐만이 아니라 흠칫대며 저를 겁내하던 녀석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제 옷에 뺨을 대고서 잠을 청하고 있으니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 듯했다.
"하지만 난 편하지 않아. 네놈 때문에."
이스카는 후줄근하게 늘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리프의 새하얀 목에 코끝을 가져가고서 눈을 감았다. 딱딱한 침대를 손으로 짚고서 리프의 몸에 바짝 다가간 그는 한참동안 리프의 목에서 나는 달짝지근한 냄새를 맡았다.
"네놈 몸에서 내 냄새가 나."
리프의 목에 입술을 가져간 이스카는 순도 높은 아편을 눈앞에 둔 마약중독자 같은 기분을 느꼈다. 벽난로에서 타닥, 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났다.
이스카는 아주 천천히 입술을 벌려 리프의 새하얀 피부를 혀로 핥았다. 그 순간 이젠 익숙하기까지 한 짜릿한 감각이 이스카의 등줄기를 할퀴었고 하반신에 피가 몰렸다.
"미치겠군......"
페니스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뜨거워진 이스카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호흡을 골랐다. 머리로는 제가 도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하면서도 리프의 피부에서 입술을 떼어내지 못했다. 그는 리프의 몸에 제 성기를 비비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리프의 목을 빠는 것 말고도 뭔가 더 한 짓을 저지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 전에 리프와 목욕하다가 발기했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스카는 지금 제가 성적으로 흥분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스카는 리프를 제 침대에 재우면서 가끔 입을 맞추는 것 말고는 별 다른 짓을 하지 않았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리프가 제 품에 안겨 있을 때만 안심하고 잠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을 만끽했다. 오로지 제게만 의지하고, 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져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만족감 말고 다른 걸 손에 넣고 싶었다.
이스카는 아플 정도로 딱딱해진 제 페니스에 손을 가져가며 리프에게 입을 맞췄다. 리프의 말랑한 입술을 혀로 핥으며 제 것을 문지르자 그의 목구멍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큭."
리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를 부를까요?”
내무대신이 종에 손을 가져가며 이스카에게 물었다.
"됐어."
이스카는 엉거주춤 서있는 리프에게 다시 포도주를 따르지 않고 뭐 하는 거냐는 눈짓을 보냈다. 포도주 때문에 피를 흘린 것 같은 모습이 된 리프는 종종걸음을 쳐 테이블로 다가갔다.
"저 노예는 어디서 데려온 아이입니까."
내무대신은 황자에게 포도주를 따라주는 리프를 흘끔 쳐다봤다. 이스카 황자가 얼마 전부터 거지꼴을 한 노예를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 것 없어."
이스카는 흥미를 가지지 말라는 투로 못을 박고서 화제를 바꿨다.
"황비가 후궁에 관한 의제를 올리면 바로 인허할 생각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도록."
"인허하신다고요?"
내무대신이 깜작 놀랐는지 꿩의 배를 가르던 손을 멈췄다.
"보기보다 비정하군, 비스바덴 경. 나도 측은한 마음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야. 아무리 우리와 적대관계라고 해도 모정에서 비롯된 애절한 행위를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이스카는 피가 뚝뚝 흐르는 스테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며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가져갔다.
"측은, 도리……."
포크와 나이프를 든 자세로 얼어붙은 내무대신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배려나 동정심 같은 건 이스카와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내 생각에 황태자의 다섯 번째 비 자리엔 스펜서 백작의 여식이 어울릴 것같군."
이스카가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썰며 말을 덧붙였다.
"아!"
내무대신은 이스카의 의중을 그제야 알아챘는지 무릎을 탁, 쳤다.
"스펜서 백작이라, 정말 안성맞춤이군요. 소문에 스펜서 가문의 여식들은 남자아이를 잘 낳는다고 하니 황비도 기뻐할 겁니다."
내무대신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고 주억거렸다.
스펜서 백작은 황비파이긴 하지만 황태자비의 아비인 갤러거 정과 원수지간과 다름없었다. 다시 말해 다섯 번째 후궁의 존재는 그렇지 않아도 세가 기우는 황비파에 분열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스펜서 백작 딸이 아들을 쑴풍쑴풍 잘 낳는 여자면 우리한텐 안 좋은 거 아니야?"
이스카와 내무대신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햄튼이 러셀에게 귀엣말을 던졌다.
"황태자 자체가 아이를 못 낳는 몸인데 후궁이 아들을 낳는 체질이든 딸을 낳는 체질이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러셀은 정치에 까막눈과 다름없는 햄튼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까지만 대꾸했다.
"후궁에 관한 의제가 올라왔을 때 라일라 황녀나 제스터 황자가 뒤에서 그녀를 추천하면 모양새가 더 그럴듯하겠지."
"물론입니다."
내무대신이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포도주잔을 비웠다.
'이번엔 실수하지 말아야지.'
포도주병을 품에 안고서 매의 눈으로 식탁을 주시하던 리프는 빈 잔을 채우기 위해 재빨리 내무대신에게 다가갔다.
"멈춰. 지금 뭐하는 짓이지?”
조심조심 포도주를 따르는데 이스카가 리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잔이 비면 바로바로 채우라고 하셔서……."
이스카가 험악한 표정을 짓자 리프는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
"멍청한 놈, 내가 언제 다른 사람 시중까지 들라고 했어."
"아......"
리프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눈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에 달고 있는 쇠사슬에서 짤그랑, 짤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이스카의 요구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삼백 년 전과는 황궁의 예법이 많이 바뀌었나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노예로 태어나긴 했어도 리프는 거의 어두컴컴한 지하도서관에서만 지냈다. 그래서 그는 저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시중을 드는 일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모셔야하는 지도 잘 몰랐다.
"흐음, 음……"
그러나 리프의 추측과 달리, 황궁을 몇십 년 동안 드나든 내무대신의 얼굴엔 의아하단 기색이 가득했다.
"이 감귤 소스, 새콤한 것이 아주 풍미가 좋습니다. 러셀 경."
현명한 비스바덴 경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아무 것도 못 본척했다. 이스카 황자의 성격이 워낙 제멋대로인데다가,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셀 수도 없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욕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이스카는 굶주린 짐승처럼 리프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제 검붉은 페니스를 주무르던 커다란 손이 리프의 바지 속으로 들어갔다. 한 줌이 될까 말까한 성기를 손에 쥔 이스카는 그것을 세우기 위해 기둥을 슬슬 문질렀다.
"으응......”
이스카의 몸에 깔린 리프가 움찔거렸다. 이스카가 만지고 있는 성기도 말랑말랑하다가 어렴풋하게 힘이 들어갔다.
"일어나."
이스카는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며 리프의 비부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따끈하고 비좁은 그곳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저절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여기에 제 성기를 밀어 넣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이스카는 말 그대로 미칠 것 같았다.
"으응, 읏."
리프의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이스카의 손가락은 따끈하고 부드러운 그곳에
이미 한 마디 정도 들어간 상태였다.
"읏?"
희미한 통증을 느꼈는지 잠에서 깬 리프가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괜찮아. 긴장할 것 없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밖에 없는 이스카는 쉬, 하고 속삭이며 어깨를 굳힌 리프에게 입을 맞췄다.
"저, 저하……?"
쪽, 소리와 함께 이스카의 입술이 떨어지자 리프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지금 제가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이스카는 리프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다시 입술을 꾹 눌렀다. 더불어 이스카의 손가락은 리프의 그곳에 한 마디 더 들어갔다.
"헉!"
리프는 어깨를 튕기며 침대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톱니바퀴가 정지한 것처럼 사고가 멈췄다. 제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따끔하고 둔탁한 통증에 놀라야할 지, 아니면 이스카가 제게 입을 맞췄다는 사실에 먼저 경악해야할지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혼란에 빠진 리프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입술을 달싹인 순간, 이스카의
혀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스카의 숨결은 마물처럼 거칠었지만 리프의 애널을 쑤시는 손길과 입술을 희롱하는 입맞춤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리프의 몸은 성적 쾌락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미성숙했다. 너무 큰 자극을 주면 전에 욕실에서 리프의 몸을 건드렸을 때처럼 공황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하옷. 저, 저하. 왜 이러시는 거예, 읏."
타액으로 입술이 빨갛게 젖은 리프가 본능적으로 이스카의 팔뚝에 손톱을 세웠다. 이스카가 제 귀를 혀로 핥으며 오목한 허리를 쓸어내린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기 때문이었다. 리프는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과 입맞춤을 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저를 어루만지는 이스카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경황이 없었다.
"괜찮아, 긴장 풀어. 네게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니까."
이스카는 다정한 목소리로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리프의 가늘고 하얀 다리를 잡아 벌리고서 마구잡이로 성기를 쑤셔 박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머릿속 혈관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필사적으로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는 지금 구애를 하려는 거지 강간을 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리프가 반항하든 그렇지 않든 어차피 안을 거긴 하지만.
"네 여기를 범하는 사람은 아마 내가 처음이겠지."
술에 취한 것처럼 정욕에 휩싸인 이스카는 리프의 성기를 애무하며 애널을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허윽!"
하반신이 휘저어지는 감각에 놀란 리프가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스카는 그런 리프의 입술을 혀로 핥으며 애널을 꾹꾹 느리게 쑤셔대는 손가락의 개수를 늘렸다.
"아파요, 그만, 읏."
생살이 벌어지는 느낌이 고통스러운지 리프가 발끝을 모으며 바르르 몸을 떨었다. 이스카가 제게 뭘 하려는 건지 어렴풋이 알아챘는지 리프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끼었다. 이스카는 금색 속눈썹이 젖어드는 광경을 내려다보며 리프의 그곳도 저렇게 촉촉하게 젖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랑 하기 전에 한 발 빼 놓는 게 낫겠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이스카는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다시 제 성기에 손을 가져갔다. 리프를 성적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인정한 상태에서 덮쳤다간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리프를 만신창이로 만들 게 분명했다.
열기를 빼기 위해 수음을 하는 이스카의 오른손은 여전히 리프의 그곳을 들락거렸다.
"으읏."
리프는 셔츠의 밑단을 움켜잡고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스카의 손가락이 제 은밀한 곳을 들쑤시는 감각이 민망하고, 따갑고 아팠다. 싫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요새 황자가 제게 잘해주긴 했지만 이스카의 원래 성격은 제멋대로에 난폭한 사람이었다. 리프는 이 스카를 밀어냈다가 흉포하게 돌변할까봐 무서웠다.
이스카가 무슨 생각인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리프의 턱을 움켜잡고서 제 하반신을 보게 만들었다. 리프는 이스카가 검붉게 달아오른 페니스를 손으로 위로하며 헐떡거리는 광경을 보고 온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여태껏 살면서 타인이 수음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 없는 리프에겐 입맞춤을 당한 일보다 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몇 배는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많이 놀랐나 보군."
이스카는 여유는 없었지만 픽 웃으며 리프의 손을 잡아끌어 제 물건을 만지게 했다. 리프는 움찔 목을 움츠리며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이스카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기 때문에 억지로 크고 뜨거운 성기를 만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이스카는 리프의 귓가에 속삭이며 리프가 제 성기를 수음하게 만들었다.
"나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진 리프는 세뇌라도 당한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타인의 노골적인 욕망과 직면하게 됐다는 상황이 리프를 두렵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스카의 목욕시중을 들면서 그가 발기한 광경을 몇 번 보긴 했지만 그 땐 단순한 생리현상이 라고만 생각했을 뿐, 제게 발정한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 너 때문에."
욕망으로 목소리가 잔뜩 갈라진 이스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이며 리프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성적으로 앳된 리프와 수준을 맞추기 위해 깊게 혀를 넣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이스카는 리프의 말랑하고 촉촉한 혀를 슬쩍슬쩍 건드리며 집착적으로 입술을 빨아댔다.
'머리가 어지러워.'
입술이 빨갛게 부어오른 리프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스카가 셔츠를 걷어 올리는 바람에 드러난 유두가 쫑긋 일어섰다. 리프가 힘겹게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있는 성기는 한층 더 단단해지고 뜨거워져서 마치 불로 달군 쇳덩이를 만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스카의 페니스를 만지고 있는 저 또한 용광로 속에 들어간 것처럼 몸에 열이 올랐다. 이스카가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는 그곳의 아픔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쓸려 저만치 멀어졌다. 마치 지독한 열병이 이스카와 밀착하고 있는 피부를 통해 제게 전염되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큭."
이스카는 수음을 하는 걸 포기했다. 성욕을 한풀 꺾어 놓으려고 했지만 숨결이 흐트러진 리프가 흐릿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자 머리 뒤쪽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금 당장 리프의 몸에 제 물건을 파묻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좀 아플 거다."
리프의 등을 안아 올린 이스카는 몇 가닥 남지 않은 이성을 부여잡고서 그렇게 속삭였다. 리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이스카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스카는 리프가 옴짝달싹 못하도록 꽉 끌어안은 채로 제 허리에 다리를 감게 만들었다.
"아악!"
좌우로 벌어진 리프의 둔부 사이로 이스카의 뜨거운 성기가 박혀 들어갔다. 겁에 질린 채로 이스카에게 안겨 있던 리프는 몸이 쪼개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쿡, 조금만 참아."
리프를 으스러지도록 꽉 끌어안은 이스카가 자꾸만 달아나려는 리프의 허 리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젖기는커녕 제대로 풀어주지 않은 리프의 애널은 이스카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걸 단단히 거부했다.
"아악, 악! 싫, 으읍,......"
이스카의 어깨에 뺨을 기댄 리프는 진저리를 치며 눈물을 쏟아냈다. 이스카는 그런 리프의 등을 어루만지며 막무가내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큭, 쉿. 괜찮아. 착하지."
뭔가에 막힌 것처럼 리프의 비좁은 애널이 성기를 옥죄어서 이스카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제 페니스가 리프의 몸을 벌리며 들어가는 감각 때문에 머릿속이 오싹오싹했다. 아직 다 들어가진 않았지만 이 작고 가녀린 몸이 저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만족이 돼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아윽, 으으읏.”
리프는 어린애처럼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리프의 속눈썹은 눈물로 흥건하게 젖었고,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턱에 이슬처럼 맺혔다. 어서 이 지독한 고통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이스카의 굵직한 페니스는 리프의 그곳을 뚝뚝 찢으며 끊임없이 박혀 들어왔다.
뜨끈한 내벽이 페니스를 감싸기 시작하자 이스카는 짐승처럼 크르릉 목을 울리며 전율했다. 리프의 몸이 보여주는 반응은 아주 사소한 거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이스카의 모든 신경과 감각은 전투를 치루는 순간처럼 날카롭게 벼려졌다. 리프가 신음하는 소리, 제 어깨를 적시는 뜨거운 눈물, 결합부위에서 주룩 흘러내려 제 덥수룩한 음모와 외투를 적시는 붉은 피의 감촉까지 최음제 같은 역할을 했다.
"흐윽, 윽! 윽."
이스카의 등에 손톱을 세울 여력도 없는 리프는 두껍고 이질적인 것이 제 몸속으로 들어오는 감각을 받아들이며 부들부들 어깨를 떨기만 했다.
"하아, 리프 너는……."
뿌리까지 리프의 몸속에 페니스를 박아 넣은 이스카는 따끈하고 비좁은 감각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제가 리프를 차지했다는 감각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스카는 리프의 금발을 움켜쥐고서 뺨을 비벼댔다. 그저 삽입을 한 것뿐인데도 끊임없이 등줄기에 전율이 내달렸다.
"빌어먹을, 넌 내 거다."
단 한 번도 절박한 감정이란 것을 느껴본 적 없던 이스카는 리프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서 얕게 허리를 움직였다. 리프의 그곳이 성기를 너무 꽉 죄고 있어서 삽입운동을 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는 쿨쩍쿨쩍 소리가 나도록 끈질기게 허리를 흔들었다.
"아, 아, 아읏. 아파......"
이스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스카의 어깨를 이로 깨물었다. 전기 고문도 견뎌 냈는데 이스카에게 몸이 한껏 열리고 정복당하는 감각은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감히 황자의 몸에 이를 세웠다간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여유가 없었다.
"리프, 큭."
이스카의 페니스는 꿈틀꿈틀 움직이며 리프의 몸을 억지로 열고, 파고들길 반복했다. 허리를 흔들며 리프의 몸에 제 존재를 새기는 이스카의 몸짓은 필사적이었다. 그는 제가 왜 이렇게 미치도록 리프를 갈구하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만족스러워서 그런 의문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만약 황제가 된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충족감은 발끝도 따라 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리프는 이스카의 뜨거운 입김이 제 피부에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허리를 뒤틀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정신을 잃고 싶은데 그렇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시야만 부옇게 흐려지기만 할 뿐 의식은 또렷했다.
이스카의 페니스가 천천히 드나드는 감각이 머리까지 분명하게 전해져서 숨을 쉬기가 괴로웠다. 하지만 힘들어 하는 사람은 리프뿐만이 아니었다. 제 목을 잘근잘근 씹으며 허리를 흔드는 이스카 또한 칼에 찔린 사람처럼 절박하고 괴로워 보였다.
비좁은 오두막에 이스카의 거친 숨소리와 리프의 신음소리가 뒤섞였다. 이스카가 리프의 몸에 사정한 정액과 찢어진 애널에서 흘러내린 피가 외투를 끈적끈적하게 적셨다.
'황자의 눈이 또……'
이스카의 과격한 허리짓을 받아내던 리프는 커다랗게 눈을 벌렸다. 새까매야 할 이스카의 한쪽 눈이 피처럼 붉은 빛을 띠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새빨간 눈동자 중앙에 뭔가 마법진 같이 생긴 것이 박혀 있었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장작불이 작가 줄어들었다.
오두막의 틈새로 흘러드는 햇살은 자취를 감췄다. 숲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리프의 몸에 페니스를 박아 넣은 채로 몇 번이나 사정을 한 이스카는 여전히 갈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축 늘어진 리프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는 곧 심호흡을 하고서 리프의 몸에서 떨어졌다. 제 물건을 무리하게 받아들인 리프의 그곳이 너무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찢어지고 울퉁불퉁해진 애널을 보고도 그는 여전히 발정했지만 리프의 몸이 상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평생 데리고 살 제 것이 망가지면 저만 손해였기 때문이었다.
"돌아, 가는, 거예요……?"
너무 울어서 목소리가 잔뜩 쉰 리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래."
이스카는 리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벽난로 옆에 던져 놓았던 외투로 리프의 몸을 감쌌다. 이스카는 리프를 안고서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쇠사슬은 일부러 채우지 않았다. 리프를 품고 나니까 굳이 쇠사슬을 채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리프를 품에 안은 이스카는 말을 천천히 몰아 궁으로 돌아갔다. 지칠 대로 지친 리프는 까무룩 의식을 잃어 그의 가슴에 뺨을 대고 잠들었다.
"도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 헉."
"저하?"
황자가 사라져서 안절부절 못하던 러셀과 햄튼은 리프를 안고서 말에서 내리는 이스카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시녀장 테사 또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바로 알아챘다. 리프의 손목에서 사라진 쇠사슬, 보쌈이라도 한 것처럼 머리카락 한 올 내놓지 않고 리프의 몸을 꽁꽁 사맨 외투, 만족스러운 정사를 치른 사내 특유의 나른함이 모든 것을 짐작케 했다.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테사는 짐승이라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이스카를 쏘아본 후 그렇게 말했다. 러셀과 햄튼 또한 이스카를 곁눈질 하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마치 어린 신부를 강탈한 범죄자라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다들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기가 너무 일렀던 것이다.
"……그렇게 해."
의원을 불러오겠다는 말에 이스카는 몹시 불쾌하다는 얼굴로 고민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리프의 몸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었지만 치료가 필요한 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의원이 다녀간 후 이스카는 리프를 제 침대에 뉘이고서 비스듬히 옆에 앉았다. 의식을 차린 리프는 이스카의 손이 닿을 때마다 겁이 난다는 듯 움찔거렸다. 이스카는 리프가 저를 거부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최대한 이해심을 발휘해 참았다. 겁탈당하 듯 첫 관계를 치렀으니 리프가 움츠러드는 게 당연했다.
"곧 너도 즐기게 될 거다."
이스카는 이불 속에 숨은 리프의 이마에 키스하며 그렇게 속삭였다. 리프는 움찔 어깨를 튕기며 몸을 긴장시켰다. 이스카는 리프의 옆에 누워 가녀린 몸을 꽉 끌어안았다. 리프는 반사적으로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스카가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내 것이 되었다는 걸 받아들여. 그럼 쇠사슬을 채우지도 않을 거고, 황궁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자유도 주마."
이스카는 몸을 딱딱하게 굳힌 리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약속했다.
검게 물든 침실의 유리창 너머로 붉은 달이 보였다.
"왜 그러시는 건데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리프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여 물었다. 어차피 이스카는 황자고 저는 노예일 뿐인데 왜 굳이 저런 약속을 하는 건지 의아했다.
"글쎄, 아마도 네가 좋은 것 같다."
이스카의 담담한 고백은 리프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