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처럼 천장이 높고 2층으로 된 은밀한 건물 안. 코르셋으로 허리를 꽉 조이고 가터벨트로 비단스타킹을 고정한 여인들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귀족들의 넋을 홀렸다.
자주색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2층 발코니 너머로 우람한 몸집을 가진 햄튼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하, 거 아무나 빨리 골라 궁으로 데려가면 안 됩니까? 이러다 날 새겠습니다."
나홀 연속으로 꼭두새벽에 집으로 귀가하게 생긴 햄튼은 팔짱을 끼고서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았다. 처자식이 있는 햄튼이 귀족들만 상대하는 이 고급업소에 발을 들인 이유는 전적으로 이스카 때문이었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 따라올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굳이 날 쫓아온 건 네놈 아니었나?"
이스카가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이맛살을 찡그렸다. 지배인이 엄선해 올려 보낸 코르티잔들의 교태어린 눈웃음과 음탕한 애무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카는 1층의 귀족들처럼 즐기는 기색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더럽게 맛이 없군. 보관을 어떻게 한 거지? 당장 다른 술을 가져와."
이스카가 포도주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지배인을 노려봤다. 한 병에 금화 열다섯 개가 넘는 최고급 포도주임에도 불구하고 맛이 텁텁했다.
"죄, 죄송합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당황한 지배인이 허둥지둥 허리를 굽혔다. 식성이 까다로운 귀족들 때문에 포도주를 마법으로 관리하고 있는데 왜 맛이 변질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군."
이스카는 짜증스러운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뭔지 몰랐기에 더욱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
다양한 여자들이 눈앞에서 교태를 떨어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마치 원하는 건 따로 있는데 자꾸 엉뚱한 것만 손에 움켜쥐는 느낌이었다.
"마음에 차는 아이가 없으시다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지배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무더기의 코르티잔들을 방을 들여보냈다.
"금발이 많기는 한데, 역시 그녀석의 백금발에 댈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니까."
커튼을 들춰 1층을 내려다보던 햄튼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혼자서 뭐라고 주절대는 거냐."
이스카가 인상을 찌푸리고서 햄튼을 바라봤다. 지배인이 들여보낸 코르티잔들은 그의 기분을 더욱 언짢게만 만들었다.
"그냥 염색과 마법으로 만들어낸 금발과 진귀한 백금발을 비교하는 건 역시 무리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햄튼이 안주로 나온 청포도를 날름 집어먹으며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참, 저하. 그 꼬맹이 좀 그만 괴롭히십쇼."
햄튼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손바닥을 탁 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꼬맹이라니?"
이스카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리프 말입니다."
햄튼은 달리 누가 있겠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차와 과자도 못 먹게 금지하고, 갑옷 손질에 서재 정리도 꼬맹이에게 시키고, 심지어는 복도 바닥까지 닦으라고 하셨다면서요? 딱 봐도 허약해 보이는 녀석인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애가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네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스카는 인상을 찡그리고서 술잔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까 포도주를 바꾸는 바람에 잔이 비어 있었다.
"저하, 제가 따라드릴게요."
지배인이 새로 들여보낸 코르티잔이 샐샐 눈웃음을 치며 포도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황자의 눈에 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의 행동은 이스카에게 불쾌감만 불러 일으켰다.
"누가 네년에게 술을 따라도 좋다고 허락했지?”
싸늘한 얼굴이 된 이스카는 술병을 기울이는 코르티잔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저, 저하. 저는 그냥......"
사색이 된 코르티잔이 덜덜 턱을 떨었다. 겁에 질린 그녀가 놓치고 만 포도주병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면서 값비싼 포도주가 카펫을 붉게 물들였다.
"햄튼, 궁으로 돌아갈 준비해."
"꺅!"
이스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코르티잔을 거칠게 밀쳐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여자가 볼썽사납게 구석에 처박혔다.
"저, 저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스카 저하! 다른 아이라면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지배인이 세상이라도 끝난 표정으로 이스카를 필사적으로 쫓아왔지만 황자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결국 아무도 안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그러게 아까 제 충고대로 눈에 들어오는 계집이 없어도 아무나 대충 골라잡으시지."
햄튼이 이스카에게 마차의 문을 열어주며 쯧쯧, 혀를 찼다.
"그거 아나, 햄튼? 네놈은 항상 입을 잘못 놀리는 게 문제야."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최악으로 치달은 상태였던 이스카는 저를 뒤따라 마차에 오르던 햄튼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컥!"
곰 같은 몸집을 가진 햄튼이 거하게 뒤로 나자빠졌다.
"출발해."
매몰차게 문을 닫은 이스카가 냉랭한 얼굴로 마부에게 명령했다.
"억! 저하, 잠깐만요 저하!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밤거리에 혼자 남은 햄튼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새카만 말들이 끄는 마차는 밤거리 저편으로 점점 멀어질 뿐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그를 태워주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궁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뒤틀리고 뒤엉켜버린 이스카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자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발견하지 못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불쾌한 감정이 잠식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푸륵, 푸르륵
마차를 끌던 검은색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황자의 궁 앞에 멈춰 섰다. 깊은 밤이라 황자의 궁 유리창은 대부분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저하, 오셨습니까."
"노예 녀석은 어디에 있지?"
이스카는 제게 인사하는 시녀장과 시녀들을 사물 취급하듯 지나치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3층에 있을 것이옵니다."
계단을 올라 3층에 도착하자 거실의 문틈 사이로 불빛이 흘러나왔다. 이스카는 검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스카는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
사위가 조용했다. 리프는 이스카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서 소파에 비스듬히 엎드려 있었다.
마치 리프가 엎드려 있는 소파 주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자는군."
문가에 서서 리프가 잠든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던 이스카는 뭔가에 이끌린 것처럼 걸음을 떼었다. 이스카는 제가 방금 전까지 화가 나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소파 앞에 멈춰 서자 새근새근, 하는 연약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손목이 쇠사슬에 얽매인 리프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다. 아마 이스카가 오늘도 여자와 밤을 보낼 거라 생각하고서 수갑을 찬 채로 혼자 머리를 감은 모양이었다.
이스카는 말없이 리프를 내려다보다가 길고 풍성한 금색 속눈썹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어린 고양이의 털처럼 감촉이 부드러운 속눈썹이 손끝을 간질였다.
새액, 색
마법으로 잠을 재운 것처럼 얌전히 잠든 소년의 얇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소파를 짚고서 고개를 숙인 이스카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열은 색을 띤 소년의 입술에 눈길을 둔 채로 축축하게 젖은 금발에 손을 가져갔다. 소년의 목덜미에선 우유를 데운 것처럼 달콤한 냄새가 났다.
달칵
누군가 문을 닫는 소리가 거실을 가로질렀다. 아마도 시녀나 근위병이었을 테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뭔가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르던 순간이 그 작고 희미한 기척으로 인해 산산이 깨져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아……! 오셨어요?"
잠에서 깬 리프는 이스카를 발견하고서 화들짝 놀랐다. 또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짝을 노려보는 이스카의 얼굴엔 불쾌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죄송해요. 저하가 돌아오실 때까지 깨어 있으려고 했는데."
리프는 이스카의 외투를 받기 위해 부산하게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옷 손질이랑 서재 청소는 다 해놨나?”
"아, 아뇨......"
잠에서 덜 깨 비틀비틀 거리던 리프는 몸을 긴장시켰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쳐 놓으라고 했을 텐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이스카가 외투와 장갑을 벗어 리프에게 휙 던지며 으르렁댔다.
"죄송해요. 이거 가져다 놓고 마저 다 해놓을 게요."
이스카의 외투를 끌어안은 리프는 '잠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제 행동을 후회하며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아주 잠깐만 눈을 붙일 생각이었지만 일이 제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저를 못살게 굴던 이스카가 주변에 없어서 한꺼번에 긴장이 풀렸던 게 분명했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데 거실 한복판에 우뚝 서서 저를 빤히 관찰하는 이스카의 시선이 느껴졌다. 리프는 속으로 저자가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저러나, 하고 가슴을 졸였다.
"에취."
외투를 걸어놓고서 밖으로 나오는데 기침이 나왔다. 머리카락이 닿은 어깨와 등 부분이 축축했다.
"당장 수건 가지고와."
침실로 향하던 이스카가 갑자기 험상궂은 얼굴로 리프의 팔을 움켜잡았다.
리프는 이스카가 저를 가로막자 흠칫 놀랐다. 자다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인데다가 위협적인 체구를 가진 남자가 갑자기 제 팔을 움켜잡으면 더럭 겁이 나는 게 당연했다.
"대답은?”
리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얼어붙어 있자 그를 내려다보는 이스카의 눈빛이 더욱 험악해졌다.
"가, 가져올게요."
리프는 이스카에게 팔을 붙들린 채로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폭신폭신한 수건을 들고서 이스카에게 돌아오는 리프의 머릿속에는 수건은 왜 가져오라고 한 걸까? 라는 의문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걸 왜 내게 주는 거지?”
이스카는 리프가 두껍고 부들부들한 수건을 내밀자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수건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네놈 머리가 젖어 있는 꼴 보기 싫어서 수건을 가져오라고 한 거다."
이스카는 말귀도 못 알아먹는 멍청한 놈, 이라는 눈빛으로 리프에게 도로 수건을 내던졌다.
"읍."
수건에 얼굴을 맞은 리프가 비틀댔다.
"제대로 말려. 네놈이 또 하루 종일 재채기하는 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으니까."
이스카는 셔츠 단추를 풀며 침실로 들어갔다. 머리를 다 말리고, 제가 시킨
일을 다 끝내기 전까진 잠을 잘 생각을 하지 말라는 얼굴이었다.
'이상한 일이군. 하루 종일 재채기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거실에 혼자 남은 리프는 수건에 맞아 빨갛게 된 코를 문지르며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스카의 목욕 시중을 처음 든 다음 날 몇 번 재채기를 했던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이스카가 가지고 있는 바스커빌의 연구일지를 분석하기 위해 서 트리아만 제국에서 파견한 마법사들이 황도에 도착했다.
"빌어먹을, 서 트리아만 놈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꽤 정교하게 해독했군."
틈만 나면 호프만의 마법진을 설계한 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라고 은근슬쩍 리프를 압박하던 러셀이 달라졌다. 러셀의 모든 관심과 주의는 서 트리아만 제국 마법사가 제공한 문서와 자료로 옮겨갔다.
러셀의 관심이 마법진에서 멀어진 건 분명 리프에겐 잘 된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리프의 불면증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게다가 바스커빌의 시체를 참수했다는 신성한 승리의 날 축제 일이 가까워져 오자 사람들은 들떴지만 반대로 리프의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탓인지 리프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불면증과 가위에 시달렸다.
황혼과 고뇌의 탑에서 지낼 때 리프가 새벽녘에 기꺼이 지하도서관 청소를 하러 나간 이유도 고질적인 불면증 때문이었다. 악몽에 밤잠을 설치다 힘없이 짚더미에서 일어나 잠으로부터 도망치듯 지하도서관으로 향한 것이다.
바스커빌의 연구일지 분석 때문에 얼굴을 보기 힘들어진 러셀이 일부러 시간을 내 리프를 찾아왔다.
"요새 네가 안색도 안 좋고 비실비실 거린다고 테사가 걱정하더라. 이거 영양제니까 알아서 꼬박꼬박 챙겨 먹어. 전에 보니까 밥을 깨작깨작 먹던데, 성장기 때 제대로 영양섭취를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키는 마법으로도 어떻게 못 해."
"감사해요."
작은 유리병을 받은 리프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다가 얼른 러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늘 불면증을 겪어왔던 터라 제가 다른 사람들을 걱정시켰을 것이라곤 생각을 못했다. 거울을 제대로 보지 않는 리프는 제 표정이 어둡다는 사실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
'윽, 쓰다......'
러셀이 준 영양제를 한 모금 마신 리프는 눈을 질끈 감고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불면증에는 효과가 없겠지만 그래도 러셀이 저를 챙겨준 게 고마워서 약을 억지로 마셨는데, 냄새도 고약하고 써도 너무 썼다.
'이걸 언제 다 마시지?'
리프는 오묘한 빛깔의 물약을 바라보며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러셀이 저를 위해 약을 가져다 준건 정말 고맙지만 너무 써서 도저히 다 마실 자신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처치곤란으로 느껴졌다. 리프는 러셀이 가져다 준 그 고약한 약이 귀족들이 제 자식들을 위해 한 병에 금화 몇 십 개씩 기꺼이 지불하는 키 크는 약이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러셀을 만난 후 리프는 복도 청소를 하기 위해 나무통에 물을 채웠다.
찰박, 찰박
낑낑대며 나무통을 나르는 리프의 양 옆으로 물이 한 움큼씩 쏟아졌다.
"미련하게 혼자 나르지 말고 우리한테 부탁해."
복도를 지키고 있던 근위병이 가느다란 팔로 힘겹게 나무통을 나르는 리프가 안쓰러웠는지 창을 옆에 세워놓고서 다가왔다.
"네놈 임무는 노예 일을 거들어주는 게 아닐 텐데?”
내무대신과 함께 3층으로 올라오던 이스카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내무대신은 대대적인 국정감사를 위한 서류를 산더미처럼 들고 있었다.
"저, 저는 그저……."
근위병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변명 따윈 집어치우고 네놈 위치로 돌아가기나 해."
서릿발 돋은 얼굴로 근위병을 지나친 이스카가 리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리프는 흠칫 긴장한 채로 제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스카를 올려다봤다.
"물통 하나 제대로 못 나르다니, 쓸모없는 놈."
이스카가 리프의 턱을 낚아채고서 좌우로 움직였다.
근위병과 내무대신, 그리고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시녀는 '저하는 왜 저 아이를 저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까.' 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색이 안 좋기는 하군."
눈썹을 꿈틀꿈틀 움직이며 리프를 관찰하던 이스카가 혼잣말을 툭 내뱉었다.
"서재에 새 책들이 들어왔을 거다. 가서 내용을 훑어본 후 분류별로 정리해 놔. 그리고 이제부터 복도 청소는 다시 시녀들에게 시킬 거니까 손 떼. 네놈에게 맡겼더니 도저히 봐줄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엉망이야."
이스카가 리프의 턱을 내던지듯 놓아주고서 근위병에게 나무통을 치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변덕스러운 작자군......'
리프는 서재로 향하며 쇠사슬을 만지작거렸다. 혼자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스카가 예전보다 제게 덜 심술궂게 행동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카가 제게 관심을 보인다거나 신경을 써준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덜 괴롭히는 것과 잘 대해주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리프는 그날 밤늦게까지 이스카의 서재에 틀어박혀 새로 들어온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3층 거실은 차관과 사무관들이 오후 내내 실어 나른 각종 국정서류들로 거의 점령되다시피 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리프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잠깐 오다가다 거실의 상황을 흘끗 살펴봤는데 이스카는 대신들과 감사에 대해 논의를 하느라 몹시 바쁜 듯했다.
'먼저 자도 되려나?'
하루 종일 서재에만 있을 순 없었기 때문에 리프는 이스카의 눈치를 보다가 침실에 딸린 골방으로 들어갔다.
불면증 탓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 리프는 문틈 새로 롤러드는 불빛을 바라보며 이스카가 저를 찾을 때까지 그냥 서재에서 책이나 읽고 있을 걸, 하고 후회했다.
한참을 뒤척인 끝에 간신히 눈을 붙였지만 악몽이 오래된 친구처럼 슬그머니 다가와 그의 곁에 누웠다.
리프는 꿈속에서 삼백 년 전, 처음으로 마법사들에게 냉대를 받았던 날의 기억을 헤매고 있었다.
원탁에 둘러앉은 원로마법사들과 각 왕국의 재상들은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로 키가 큰 노인을 바라봤다.
'존경하는 대마법사 바스커빌 님. 마왕이 강림할 거라니, 외람된 말씀이지만 연구를 너무 많이 하신 것 아닙니까?'
바스커빌의 발표가 끝난 직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하던 회의장에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8서클을 넘은 이후로 총기가 완전히 흐려졌어.'
'시골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다가 십 몇 년 만에 나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마왕 타령이라니, 참나…….'
'평생 연구에만 미쳐 살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군.'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은 게지.'
차가운 바닥에 누운 리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어떻게든 이 끔찍한 꿈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관에 갇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리프는 눈꺼풀조차 제 의지대로 들어 올리지 못했다.
"큭, 으윽."
가위에 눌린 리프의 몸이 온통 땀으로 젖었다. 소리를 외쳐 도움을 외쳐보고 싶어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귀를 가까이 가져가도 들릴까 말까한 억눌린 신음뿐이었다.
'흣, 제발 누가…….'
숨을 쉬기 힘들어진 리프가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돌바닥에 손톱을 세운 순간이었다.
벌컥
마법으로 봉해져 있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리프의 몸 위로 실내의 불빛이 쏟아졌다.
"으으윽, 읏."
"리프? 네놈 지금......"
밀실의 문을 연 이스카가 바닥에서 꼼짝도 못하는 리프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일어나! 정신 차리란 말이다."
리프의 상태가 위험하다는 걸 바로 눈치 챈 이스카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황자는 숨을 헐떡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리프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서 찰싹, 찰싹 소리가 나도록 뺨을 때렸다.
"읏! 쿨럭, 컥!"
이스카가 뺨을 서너 대 정도 때렸을 즈음, 볼이 빨갛게 부어오른 리프가 경련을 일으키며 기침을 토해냈다.
"망할 노예 놈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군."
이스카는 입술이 파리한 리프의 등을 두드리며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뭐가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리프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저하......"
이스카가 리프의 싸늘한 손을 주무르며 등을 두드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리프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스카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리프의 눈은 끝나지 않는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처럼 흐릿했다.
"드디어 눈을 떴군. 도대체 무슨 일인 거지? 전에도 이런ㅡ."
이스카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왜냐하면 악몽에 시달리다 간신히 깨어난 리프가 그에게 매달리기라도 하듯 답삭 안겼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스카는 어깨를 떨며 제게 매달린 리프의 등에 팔을 둘렀다. 리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숨죽여 울고 있는 듯했다. 이스카는 노예 놈 따위가 저를 덥석 끌어안은 게 몹시 불쾌했지만, 절박한 몸짓으로 제게 안겨 있는 리프를 차마 떼어낼 수가 없었다.
이스카는 어깨를 떨며 제게 매달린 리프의 등에 팔을 둘렀다. 리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숨죽여 울고 있는 듯했다. 이스카는 노예 놈 따위가 저를 덥석 끌어안은 게 몹시 불쾌했지만, 절박한 몸짓으로 제게 안겨 있는 리프를 차마 떼어낼 수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금색 속눈썹이 눈물로 흠뻑 젖은 리프가 이스카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로 힘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시간을 되돌려? 그게 무슨 뜻이지."
불편한 자세로 굳어 있던 이스카가 리프에게 물었다.
"헉."
익숙한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오자 리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간신히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긴 했지만 아직 잠결이었던 터라 제 등에 둘러진 팔의 무게라든지, 뜨거운 사람의 온기가 진짜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 죄송해요!"
뒤늦게 제가 누구를 끌어안고 있는지 자각한 리프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다시피 하며 뒤로 물러섰다. 너무 놀라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된 리프는 제 뺨이 얼얼하게 아프다거나, 이스카 앞에서 울었다는 사실 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죄송해야지."
몹시 언짢아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이스카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옷을 툭툭 털었다.
"네놈 때문에 어깨가 다 젖었군."
몸을 웅크리고서 이스카의 눈치를 살피던 리프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악몽 때문이라지만 이 나이에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내비쳤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꼴에 사내라고 운 게 창피한가 보지?"
이스카가 코웃음을 치며 리프에게 어서 일어나라는 턱짓을 보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리프는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잔말 말고 일어나기나 해."
이스카는 악몽을 꾼 여파로 팔다리가 무지근한 리프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이스카에게 손목을 단단히 붙들린 리프는 밀실 밖으로 비틀비틀 끌려가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커튼이 드리워진 황자의 침실 유리창은 먹물을 풀어놓은 밤바다처럼 새카맸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해가 뜨려면 한참 멀었다는 사실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얼음을 가지러 주방에."
리프의 손목을 단단히 붙든 이스카가 계단을 내려가며 대꾸했다.
'이 시간에 갑자기 왜 얼음을......'
대답을 들었음에도 리프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황자를 쫓아갔다. 아무래도 정신이 혼곤한 상태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젠장, 주방엔 처음 와봐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군."
주방에 들어선 이스카는 약탈자 같은 얼굴로 어둑한 실내를 살폈다. 비록 어두컴컴했지만 널찍한 주방은 한눈에 봐도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들어 있는 건가? 빌어먹을, 아니군."
마나석으로 작동하는 램프를 켠 이스카는 주방을 온통 다 뒤집어 놓을 기세로 이 서랍, 저 서랍 들쑤시고 다녔다.
'정말 살면서 주방에 한 번도 안 들어와 본 건가.'
주방 입구에 선 리프는 엄한 곳만 골라 헤집고 다니는 이스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벌컥벌컥 서랍과 찬장을 여는 이스카의 행동은 주방이란 곳을 처음 발견한 야만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황자라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주방에 내려와 봤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을 마구 부려대는 이스카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정말 한 번도 주방에 발을 안 들였던 게 맞는 것 같았다.
"저하, 얼음은 여기에 있어요."
보다 못한 리프가 주방 깊숙한 곳에 숨겨둔 궤짝으로 다가갔다. 마법진이 그려진 궤짝을 열자 크게 덩어리진 얼음이 보이고, 그 안에서 서늘하고 파르스름한 김이 피어올랐다.
"망할, 찾기 힘들게 숨겨놨군. 얼음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 너는 왜 여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주방을 난장판으로 만들던 이스카가 몹시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잔뜩 쓰고서 뒤를 돌아봤다. 황족으로 태어난 이스카는 얼음이 귀한 것이라 시녀장이 일부러 궤짝을 구석진 곳에 숨겨두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야 저하가 제가 끼어들 틈을 안 주셔서......"
리프는 어물어물 변명하며 커다란 집게로 얼음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더 작은 덩어리는 없나? 그렇게 많이 필요하진 않아."
이스카가 손을 휘휘 저으며 리프에게 다가왔다.
"이게 가장 작은 덩어리니까 원하시는 크기로 쪼개야할 거예요."
리프는 주방장과 시녀장이 큼직한 얼음을 탁자에 올려놓고서 조각칼 같은 것으로 쪼개던 광경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성가시군."
이스카는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궤짝에 담긴 네모난 얼음 덩어리를 내려다봤다.
"제가 쪼갤 게요."
리프는 이스카의 눈치를 살피다가 서랍에서 조각칼을 꺼냈다. 이런 일로 주방장이나 테사를 부르기는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됐어. 네놈에게 시켜봤자 뒤로 자빠지거나 다치기나 하겠지."
이스카는 그 가느다란 팔로 뭘 할 수 있겠냐는 듯 코웃음을 치며 리프의 손에서 조각칼을 빼앗았다. 리프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리프가 제 또래에 비해 키도 작고 팔심이 약한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각칼을 든 이스카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깨끗하게 얼음을 조각냈다. 리프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멀뚱히 서 있지만 말고 가서 얼음을 담을 자루를 가져와."
얼음을 잘게 조각낸 이스카가 언짢은 얼굴로 리프에게 명령했다. 리프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허둥지둥 이스카에게 자루를 내밀었다. 이스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리프는 그가 얼음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대고 있어. 네놈 뺨이 볼거리라도 걸린 것처럼 새빨개서 눈에 거슬려."
잘게 조각낸 얼음을 자루에 쓸어 담은 이스카가 그것을 리프의 뺨에 갖다 댔다.
"흣!"
리프는 제 피부에 닿은 얼음의 차가움보다 이스카가 얼음이 든 자루를 제 뺨에 갖다 댔다는 사실에 기겁했다. 귀한 얼음을 고작 손찌검을 당해 부어오른 뺨의 열기를 식히는데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리프로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게 당연했다.
"저하. 이건......"
"내 말에 토 달지 마."
리프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이스카는 얼음이 든 자루를 뺨에서 떼어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험악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리프는 어쩔 수 없이 얼음이 든 자루를 제 뺨에 지그시 눌렀다. 잘그락, 잘그락
하고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자꾸만 들려왔다.
파르스름한 마나 램프의 불빛이 바닥의 무늬를 따라 리프의 발치에 물처럼
번졌다. 이스카가 얼음을 찾느라 잔뜩 어지른 주방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네놈에게 차 심부름을 시키려다가 주방까지 내려와 버렸군."
이스카는 얼음주머니를 뺨에 대고서 제 눈치를 살피는 리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차를 끓일 게요."
이스카와 마주보고 서있는 게 부담스러운 리프는 황자의 혼잣말을 듣고서 얼른 찬장 쪽으로 다가갔다.
'차 심부름을 시키려고 한밤중에 날 깨운 거였구나.'
아침도 아닌데 황자가 왜 밀실의 문을 열었을까, 하고 궁금해 했던 리프는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까.'
리프는 찬장에서 찻잔과 찻주전자를 꺼내기 위해 발돋움을 하다가 흘끔 이스카를 바라봤다. 만약 이스카가 차 심부름을 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리프는 분명 아침까지 악몽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차피 고맙다고 말해봤자 이스카는 리프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찻잔을 하나 꺼낸 리프가 찬장의 문을 닫았다.
"왜 찻잔을 하나만 꺼내는 거지?"
리프를 감시라도 하듯 지켜보던 이스카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하나 더 꺼낼까요?"
얼음주머니를 뺨에 댄 채로 찻잎을 덜던 리프는 손을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래."
팔짱을 끼고서 비스듬히 벽에 등을 기 댄 이스카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이 시간에 손님이라도 오는 건가?'
리프는 찬장에 다시 손을 뻗었다. 파르스름한 마나 램프의 불빛은 리프의 등을 비춰 찬장에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들었다.
"잊어버리지 말고 우유도 챙겨."
이스카는 차가 다 준비 될 때까지 주방에서 떠날 생각이 없는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한 마디씩 참견을 해댔다.
리프는 우유는 왜,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전에 테사가 홍차에 대해 가르치면서 어떤 사람은 차에다가 우유를 넣기도 한다는 소리를 기억해냈다. 이스카에겐 홍차에 우유를 넣어먹는 취미는 없으니 아마 우유는 밤늦게 황궁을 방문할 손님의 몫인 게 분명했다.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부어 3층으로 올라갔다. 거실로 돌아온 이스카는 다시 서류더미를 훑기 시작했고, 그의 옆에 선 리프는 얼음주머니를 뺨에 대고서 차가 우러나오기를 기다렸다.
'손이 시리군.'
찻주전자 안에서 차가 거의 다 우러나왔을 즈음 리프는 얼음주머니를 다른 손으로 바꿔들었다. 어느 정도 녹은 얼음이 물이 되어 자루 안에서 찰랑찰랑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어디 봐봐."
리프가 꼬물대고 있던 기척을 느꼈는지 보고서를 읽던 이스카가 갑자기 리프의 턱을 움켜잡으며 얼음주머니를 옆으로 치웠다.
"붉은 기가 가라앉긴 했군."
리프의 턱을 놓아준 이스카가 다시 서류에 눈길을 던지며 찻잔 두 개에 차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손님이 오는 거 아니었나?'
리프는 얼음처럼 차가워진 제 뺨을 옷깃으로 문지르다말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손님이 온 것도 아닌데 왜 찻잔 두 개에 전부 차를 따르라고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쪼르륵, 소리와 함께 거실에 그윽한 차의 향이 퍼졌다. 이스카에게 차를 금지당한 리프는 저도 모르게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홍차를 내려다봤다.
"나머지 한 잔은 차를 반만 채워."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에 둘러싸인 이스카가 이번에도 영문 모를 명령을 내렸다. 리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둥이에서 적갈색 액체를 흘려보내던 찻주전자를 바로 들었다.
"여기요."
리프는 높이 차이가 나는 찻잔들을 이스카에게 내밀었다. 이스카는 은쟁반에 손을 뻗어 홍차가 절반 밖에 차지 않은 찻잔에 우유를 부었다. 리프는 찻주전자에서 찻잎을 꺼내다말고 적갈색 빛이 나는 홍차가 열은 캐러멜 색으로 변하는 광경을 명하니 바라봤다.
"마셔."
차에다 우유를 탄 이스카가 리프에게 턱짓으로 명령했다.
"네?”
찻주전자에서 건져낸 찻잎을 치우던 리프는 저에게 한 말인가, 하고 화들짝 놀랐다.
"귓구멍이 막힌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전에……."
리프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열은 캐러멜 색을 띤 차와 이스카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리프가 이토록 당황하는 이유는 이스카가 얼마 전 몹시 성을 내며 차와 과자를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내 말에 토 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스카가 닥치고 마시라는 듯 조용히 으르렁거렸다. 아무래도 여분의 찻잔은 정체 모를 손님의 것이 아니라 리프 때문에 꺼내라고 한 분위기였다.
"네......"
이스카의 협박 아닌 협박에 목을 움찔 움츠린 리프는 머뭇머뭇 찻잔에 손을 뻗었다. 황자가 변덕을 부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리프로서는 그러려니, 하고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따뜻하군.'
경직된 표정으로 이스카의 눈치를 살피던 리프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찻잔을 쥐니까 몸이 나른해졌다. 얼음주머니를 들고 있느라 손이 차가워져 있던 상태라 찻잔의 열기가 더욱 기껍게 여겨졌다.
리프는 우유를 타서 평소보다 독특해진 차의 향을 조심스럽게 맡으며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