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쾅, 쿵쾅, 탕, 탕탕
황궁의 중앙광장에서 공사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인부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중앙 광장에 무대와 노대를 설치하고 있는 이유는 곧 있을 축제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저하, 축제 선포식 때 저하께서 연설하실 원고이옵니다."
내무대신이 이스카에게 돌돌 말린 종이를 내밀었다. 와병 중인 황제 대신 축제를 총괄하고 책임지게 된 이스카는 대연회장 발코니에서 중앙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읽을 것도 없이 고루하고 지루하군. 분량을 절반 이하로 줄여."
'어지럽군. 팔다리도 흐물흐물하고.'
리프는 제 몸에 비해 너무 큰 옷을 머리로 꿰어 입으며 비틀거렸다.
옷을 갈아입으라고 잠시 쇠사슬을 풀어준 이스카는 재상의 사무실에서 가져온 서류와 서한 같은 걸 훑어보고 있었다.
'저 자가 입던 옷인 건가?'
리프는 손가락을 뒤덮는 셔츠의 소매를 접어 올리다말고 이스카를 흘끔 바라 봤다. 이스카가 저에게 던져준 옷은 셔츠며 바지 할 것 없이 전부다 두 뼘 이상 길었다. 게다가 팔과 다리에 닿는 감촉도 하인이 입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다 입은 건가? 수선이 필요하겠군."
서류를 옆에 내려놓은 이스카가 리프를 위아래로 슥 훑어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프는 이스카가 쇠사슬을 들고서 제게 다가오자 움찔, 어깨를 튕겼다. 어른과 아이만큼 체격 차가 나서 그런지 이스카가 가까이 다가오면 위협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괜히 긴장이 됐다.
"내일 시녀들이 네가 입을만한 옷을 몇 벌 가져다 줄 거다."
이스카가 리프의 목에 쇠사슬을 채웠다.
"네."
리프는 이스카의 손끝이 제 피부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에게 얌전히 목을 맡기고 있다는 사실은 리프에게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손 내밀어."
이스카가 이번엔 리프의 가느다란 손목에 쇠사슬을 가져갔다.
'쇠사슬 따위 채우지 않아도 도망치지 않을 거란 말을 해도 믿지 않겠지?'
리프는 흘끔 이스카의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철컥, 하고 족쇄처럼 생긴 수갑이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니 손목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무거워졌다. 이스카가 쇠사슬을 채우지 않고 그냥 넘어갔으면, 하고 바랐지만 너무 큰 기대였던 모양이었다.
노예의 인장이 찍힌 리프에게 도망칠 곳 따윈 없었다. 리프가 집이라고 여기는 장소는 티아고 영감들과 함께 잠을 청하던 황혼과 고뇌의 탑 노예숙소뿐이었다. 삼백 년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고, 바스커빌로서 살던 삶과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마법진을 그린 자의 정체에 대해선 오늘도 할 말이 없나?"
밀실의 문을 연 이스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늘 하는 질문을 던졌다.
"......"
리프는 고개를 숙이고서 침묵을 지켰다.
"입을 조개처럼 다무는군.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이스카가 창문 하나 달리 지 않은 어둑한 골방에 리프를 밀어 넣었다.
쾅
문이 닫히고 빈 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고요하군.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야.'
골방에 갇힌 리프는 딱딱한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비밀의 방은 리프가 홀로 잠을 청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또 견디기 힘들 만큼 조용했다. 노예숙소에서 살 땐 호아킨이 코를 고는 소리나 바토가 이를 가는 소리, 티아고 영감이 잠꼬대 하는 소리가 풀벌레 소리와 섞여서 적막을 느낄 틈이 없었다.
노예숙소는 사람이 생활하기에 결코 쾌적한 장소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성인 남자 셋과 소년이 비좁은 숙소에서 부대껴 잠을 자야 했기에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참 잘 자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팔다리가 가슴에 턱하고 올라와 잠에서 깨어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하지만 리프는 널찍한 바닥에 혼자 팔다리를 뻗고 누워 있는 것보다 비좁고, 냄새나고, 불편하더라도 친숙한 사람들과 등을 맞대고 잠을 청하길 원했다.
밀실의 틈새로 침실의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저 너머에 이스카 황자가 있다는 건 알지만 딱히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나른하군.'
리프는 스르륵 눈꺼풀을 감았다. 비록 바닥은 딱딱했지만 갓 목욕을 마치고 나온 상태인데다가 피부에 닿는 옷의 감촉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워서 자연스럽게 졸음이 밀려들었다. 황궁에 끌려온 이후로 쉽게 눈을 붙이지 못 했던 리프는 그날 처음으로 밤새 뒤척이는 일 없이 곧바로 잠이 들었다.
어젯밤 머리를 제대로 말리고 자질 않아서 그런지 아침에 눈을 뜨자 가벼운 감기 기운이 느껴졌다. 몸이 으슬으슬한 정도까진 아니고 코끝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에취."
목이 까끌까끌해서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하필이면 이스카의 아침 식사 시중을 드는데 재채기가 나왔다.
커다란 발코니 창을 통해 눈부신 아침햇살이 거침없이 리프의 몸 위로 쏟아졌다. 리프는 제 몸보다 커서 자꾸만 어깨 아래로 롤러내리는 옷을 억지로 걸치고 있었다. 어제 이스카가 겉옷을 찢어버리는 바람에 리프의 금발도 오래간만에 햇빛을 봤다.
"식사하는데 뭐하는 짓이지?"
군단장의 서한을 읽으며 아침을 먹던 이스카가 얼굴을 구겼다. 등을 돌리고 기침을 했는데 마치 리프가 그의 음식에 침이라도 튀긴 것 같은 반응이었다.
"죄송해요, 에, 에취. 에취."
리프는 사과를 하다가 또 재채기를 했다. 이번엔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역효과가 났는지 연달아 재채기가 나왔다.
"네놈."
이스카가 눈을 사납게 치든 순간이었다.
"저하, 노예 아이가 입을 만한 옷을 찾아보라고 하시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시녀장이 거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거기에 내려놔."
못마땅한 눈으로 리프를 노려보던 이스카가 시녀장에게 턱짓으로 명령했다.
"어머나!"
우아한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거실로 들어오던 시녀장이 리프를 발견하고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리프는 소매로 입을 가리고서 콜록, 콜록 기침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처음 마주친 것도 아닌데 시녀장이 저를 신기하다는 눈길로 쳐다보는 게 이상했다.
"세상에, 정말 러셀 경과 햄튼 경이 말씀하신 대로네."
반듯하게 개켜진 옷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시녀장은 치맛자락을 붙들고서 리프에게 한걸음에 달려왔다.
"후드를 쓰고 있을 땐 몰랐는데 어쩜 이렇게 예쁠ㅡ."
"러셀과 햄튼?"
은쟁반 위에 올라온 또 다른 편지를 듣던 이스카가 시녀장의 말을 잘랐다.
"네. 러셀과 햄튼 경이 제게 이 아이에 대해 귀띔을 해주셨거든요."
노부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소녀처럼 두 손을 맞잡았다. 리프를 바라보는 노부인의 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런, 빗질을 해야겠구나. 머리카락이 다 엉켰어."
시녀장이 돌연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빗질?"
못마땅한 눈초리로 시녀장을 주시하던 이스카가 노예에게 왜 그딴 걸 해줘야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저하, 제대로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머리카락이 상하옵니다. 너무 많이 엉켰을 경우엔 잘라내야 하기도 하지요."
시녀장은 공손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대꾸했다.
"잠시만 기다리렴. 빗을 가지고 올 테니."
시녀장이 리프에게 부드럽게 웃어주고는 치맛자락을 붙잡고서 거실 문밖으로 나갔다. 황실 예법이 궁에서 뛰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녀장의 발걸음은 몹시 조급했다. 리프의 신분이 어떻든 저렇게 아름다운 금발이 망가지도록 방치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심하게 엉켰나?'
리프는 시녀장이 소파에 내려놓은 옷을 주섬주섬 안아 들고서 제 머리카락을 내려다봤다. 평소에 머리카락에 신경을 써 본적이 없던 터라 빗질을 하자는 시녀장의 말이 퍽 이상하게 들렸다.
황혼과 고뇌의 탑에 있을 때 호아킨이 종종 머리카락을 빗어주긴 했지만 그건 그저 소꿉놀이의 일환이었다. 덩치는 크지만 지능이 낮아 일곱 살짜리와 다를 바 없는 호아킨은 리프가 만들어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일 다음으로 리프의 금발을 정성들여 빗어주는 걸 좋아했다.
"이리와."
식사를 마친 이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리프에게 명령했다. 옷을 가지고 밀실로 가려던 리프는 걸음을 되돌려 쭈뼛쭈뼛 이스카에게 다가갔다.
"너저분하게 엉켜있긴 하군. 그러게 왜 사내놈이 머리 따위를 기르는 거냐."
리프를 빤히 내려다보던 이스카가 리프의 금발을 움켜쥐며 이죽거렸다.
"저하, 설마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명령하시려는 건 아니지요?”
시녀장이 솔이 풍성한 빗을 가지고 거실로 돌아왔다.
"......"
이스카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산발이 돼서 내 눈에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해. 머리가 길든 짧든, 못생겨보이는 건 어차피 똑같을 테니까."
리프의 머리카락을 한참동안 만지작거리던 이스카가 떨떠름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물론이죠, 전하. 제가 잘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궁정 예절이 뼛속까지 깊게 밴 노부인이 치맛자락을 양쪽으로 붙잡고서 이스카에게 고개를 숙였다.
'보기 싫으니 당장 자르라고 명령할 줄 알았는데…….'
리프는 자꾸만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옷을 끌어올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 머리를 기르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리프는 속으로 태평하게 이발을 하면 어깨가 가벼워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홀가분하게 자르는 것도 나쁘진 않았을 텐데 아쉽군.'
솔직히 말하면 리프는 제 머리카락이 무겁고 귀찮았다. 아까 기침을 해 이스카의 눈총을 받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쓸데없이 머리가 길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머릿결이 워낙 좋아서 따로 특별한 관리를 해줄 필요 없이, 빗질만 매일 하면 되겠어."
시녀장 테사는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리프의 금색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빗질을 하고 나면 금빛 비단처럼 사르륵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황홀해서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어쩜 피부가 우유처럼 하얄까. 이럴 줄 알았다면 우중충한 잿빛 외투가 아니라 눈 색깔에 맞춰 파란색 옷을 준비해 오는 건데."
나이 지긋한 노부인은 감탄을 거듭했다. 그동안 무뚝뚝하고 커다랗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황자를 모시느라 인생의 낙이 하나도 없었는데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소년이 황자의 궁에 들어와서 기분이 한껏 들든 것이다.
"에취, 에취!"
이스카가 쇠사슬을 풀어줘서 겉옷을 입는데 또 재채기가 나왔다.
"어머, 감기에 걸린 거니?”
빗을 챙겨 거실을 나서던 테사가 걸음을 되돌렸다.
"아뇨. 그냥 목이 따끔거리는 정도예요."
리프는 흘끔 이스카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제 앞에서 재채기를 했다고 황자가 또 화를 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이스카는 못마땅한 표정만 지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목감기에 좋은 음료를 가져다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렴."
테사는 이스카가 마실 홍차와 리프에게 줄 뜨거운 음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어때, 좀 괜찮니?”
시녀장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약차를 후후, 불어가며 마시는 리프를 인자하게 바라봤다.
"네."
쌉싸래한 맛이 나는 약차를 꿀꺽 삼킨 리프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목구멍 안쪽이 따뜻해지니까 코끝을 간질이던 따가운 기운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향이 참 좋군. 빛깔도 불그스름하니 곱고.'
약차를 홀짝이던 리프는 이스카가 마시는 홍차라는 것에 흥미를 보였다.
'어떤 식물의 잎사귀를 말린 건지 궁금하군.'
삼백 년 전, 바스커빌이 살던 시대엔 차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즐길 음료라고는 기껏해야 포도주, 암말의 젖을 가공한 시드르, 당밀을 증류한 럼, 과일주, 곡물을 발효시킨 맥주 정도가 다였다. 일반적으로 차라는 건 나무껍질이나 그늘에 건조시킨 야생딸기 따위를 끓인 물에 타먹는 음료를 일컬었다.
"남쪽 대륙에서만 재배할 수 있는 아델키스다."
리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홍차를 바라보자 이스카가 차의 품종을 알려줬다.
"그렇군요…….”
이스카가 차를 쳐다보는 제 시선을 눈치 챘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리프는 움찔,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공기 중에 퍼지는 그윽한 향기가 점점 진해졌다. 아델키스의 향에 이끌린 리프는 저도 모르게 발돋움을 하면서 코를 킁킁거렸다.
"테사, 찻잔 하나 더 가지고와."
"예, 저하."
시녀장은 냉큼 치맛자락을 붙들고 거실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쪼르륵
테사는 새로 가져온 찻잔에 붉은 빛을 떤 차를 따랐다.
"마셔."
이스카가 강압적인 태도로 리프에게 차를 권했다.
'마셔도 되는 걸까. 남쪽 대륙에서만 나는 식물의 잎사귀라면 시대가 변했어도 분명 값이 꽤 나갈 텐데.'
리프는 찻잔에 선뜻 손을 뻗지 못하고 머뭇머뭇 이스카의 눈치를 봤다. 뭔가 꿍꿍이 같은 게 있으면 어쩌나, 하는 의심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마시라고 하면 마셔. 내가 두 번 명령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스카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리프를 노려봤다.
"마, 마실게요."
리프는 화들짝 놀라 찻잔에 손을 뻗었다.
테사가 찻잔을 미리 데워놓았는지 섬세한 무늬가 입혀진 도자기에서 따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어?"
흘끔 이스카를 곁눈질하며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리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찻잔을 내려다봤다.
"차가 입맛에 맞나 보군."
리프가 금색 속눈썹을 깜빡거리는 모습을 보고 이스카가 빈정대듯 웃었다.
"굉장해요!"
차를 처음 마셔본 리프는 발그레하게 뺨을 물들이고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하면서도 쓰고, 첫 향은 부드러운데 마지막에 감도는 맛은 독주처럼 강렬해요."
"독주? 술을 마셔 본 적 있나보지?"
리프가 재잘대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이스카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 그게. 아뇨……"
잘 숙성된 최상급 포도주라도 맛본 것처럼 잔뜩 흥분했던 리프는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흐음."
이스카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아델키스는 향이 그윽하지만 관리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란다. 온도에 민감해서 하루만 잘못 보관해도 맛이 변질되어버리거든."
곤정에 처한 리프를 구해준 건 시녀장 테사였다. 그녀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아델키스란 차에 대해 설명했다. 찻잎 10g에 금 두 덩이가 넘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리프는 하마터면 차를 마시다가 체할 뻔했다.
'10g에 금 두 덩이? 맙소사, 이건 무슨 고등 마법 연구에 사용하는 재료 수준이로군.'
물론 마법을 연구하다보면 아델키스보다 몇십 배는 더 비싸고 희귀한 재료를 써야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건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 마법이었다. 바스커빌이었던 시절에도 사치를 부려본 적 없는 리프는 아델키스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싸다고 느껴졌다. 귀족 중에서도 대지주 수준의 부호가 아니면 기호식품으로 즐길 엄두를 낼 수 없는 음료였다.
'어째서 이렇게 비싼 차를 나에게 마시라고 한 거지?'
리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절반 쯤 남은 홍차를 내려다보다가 이스카를 흘끔 곁눈질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아델키스의 가격을 듣고 나니까 몇 모금 남지 않은 홍차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저히 입을 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게다가 왠지 이스카에게 빚을 진 느낌마저 들었다.
"테사, 저 녀석에게 차 끓이는 법을 가르쳐. 내일부터 내 차 시중을 들게할 거니까."
이스카가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저하."
이스카의 찻잔에 차를 채워주던 시녀장이 두 손을 모으고서 공손히 대꾸했다.
'차 시중을 들게 하려고 아델키스를 마시게 한 거였군.'
리프는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테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차를 제대로 끓이려면 차 맛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 같았다.
다만 왜 하필이면 노예인 저에게 차 시중을 들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보단 시녀들이나 시종에게 차 예법을 가르치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좀처럼 파악하기 힘든 사내야…….'
리프는 홍차를 홀짝거리며 물끄러미 이스카를 바라봤다.
씁쓸하면서도 맛이 강렬한 아델키스는 꼭 이스카 같았다.
"뭘 쳐다보는 거냐."
리프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스카가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어, 음.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리프는 이스카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저기, 저하."
고개를 숙이고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리프가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게, 흠흠. 아델키스를 맛볼 기회를 주신 거…… 감사해요."
리프는 한참을 머뭇대다가 멋쩍은 얼굴로 간신히 하고자 하는 말을 꺼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워낙 비싼 차를 얻어마셨으니 고맙다는 말은 해두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네놈 좋으라고 마시라고 한 것 아니야."
이스카가 퍽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지 않아도 고맙다는 말을 하기가 멋쩍었던 리프는 이스카의 냉랭한 대꾸 때문에 더 민망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젠장, 저하!"
러셀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거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러셀의 뒤에는 햄튼이 따라왔다.
"황제폐하가 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현란하기 짝이 없는 의복을 오늘도 입은 그의 손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 한 장이 꽉 쥐여져 있었다.
"서론은 필요 없으니까, 그 노망난 노인네가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쳤는지나 말해."
이스카는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난다는 듯 이마를 손으로 짚고서 불경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아무리 황자라지만 그래도 저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리프는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햄튼과 러셀은 태연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는 시녀장 테사까지도 황자의 불측하고 불손한 발언을 듣고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서 트리아만 제국에서 바스커빌의 연구일지를 열람하고 싶다는 요청을 해 왔답니다."
러셀이 분해 죽겠다는 듯 이를 아득바득 갈며 말했다.
"황혼과 고뇌의 탑에서 발견 된 그거? 어차피 바스커빌의 연구일지는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이스카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바스커빌의 연구일지…….'
리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지하도서관의 악마 노릇을 하며 수정해준 마법진이 노출 된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그의 옛 연구일지까지 보려고 하는 마법사까지 나타났으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게 당연했다.
"네놈이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온 걸 보면 치매에 걸린 황제가 그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허락을 했다는 소리겠군."
러셀의 보고를 들은 이스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네. 라일라 황녀가 서 트리아만 제국의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폐하께 입김을 넣은 모양입니다. 그녀의 모친인 삼황비도, 남편도 전부 서 트리아만 제국 출신이니까요."
러셀이 구깃구깃해진 황제의 명령서를 이스카에게 넘겼다.
"서 트리아만 제국의 마법사에게 바스커빌의 연구일지를 열람하게 해주면 그 대가로 지금까지 해독에 성공한 암호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라."
이스카는 협약에 대해 서술한 명령서를 슥 훑어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이스카가 확인이라도 하듯 다시 사타구니를 더듬으며 물었다. 겁에 질린 리프는 빠르게 도리질을 쳤다.
"내가 널 처음 봤을 땐 이상할 정도로 네가 미웠다. 처음 본 노예인데 네 얼굴을 보니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지."
이스카가 미약에 취한 것 같은 얼굴로 리프의 쇄골에 입술을 가져갔다. 황자는 호흡을 골랐지만 피부에 닿는 숨결은 점점 거칠어지기만 했다. 식물들로 둘러싸인 유리 온실의 천장에선 별들이 반딧불처럼 반짝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분노가 가라앉고, 네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지더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네가 날 봐주길 원했고, 널 가지고도 싶어졌어. 그러니까 너도 점차 내게 익숙해질 거다."
리프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은 이스카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리프가 긴장을 풀도록 유도했다. 황자는 온몸으로 아직은 널 안지 않을 거니까 안심하고 제 품에 안겨 있으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요……."
리프는 또 다시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고목나무처럼 뻣뻣하게 사지를 굳히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스카의 등에 팔을 두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괜찮아. 나도 모르겠는 것 투성이니까."
이스카는 제 욕망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그는 지금 당장 리프의 온몸에 잇자국을 남기고 싶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 욕심을 채우려고 했다간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을 알기에 이를 악물고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저 말이 진짜일까? 이 자도 정말 나처럼 혼란스러운 건가…….'
리프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타인을 좋아해 본 게 처음이란 이스카의 말을 곱씹었다. 제 몸에 억지로 밀어붙여지는 노골적인 성적 욕망이 불편하긴 했지만 아까처럼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낯설고 두려운 게 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하고 안도한 것이다.
"넌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 잘 모를 거다."
위험한 눈을 한 이스카는 리프가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겠다는 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스카는 제가 이 정도로까지 욕구를 참은 이유가 뭔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숲에서 처음 리프를 가졌던 날, 그는 양껏 리프를 취한 게 아니라 딱 하룻밤 밖에 안아보지 못했다. 리프를 갈구하는 그의 갈증과 허기는 충족되기는커녕 간신히 혀끝만 적신 수준이었다.
제 무의식에 각인된 욕망을 인지한지 얼마 안 된 상태로 리프를 또 취하려고 했다간 절제나 자제력 따위를 발휘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물론 성마른 몸짓으로 리프의 몸을 망가트려도 절대 놓아주지 않을 테지만, 기왕이면 온전한 상태로 제 곁에 두고 싶은 게 당연했다.
"그런데 정말 여길 만져줘도 기분 좋은지 모르겠는 거냐?”
이스카가 리프에게 다시 팔베개를 해주는 자세를 취하며 리프의 페니스를 만지작거렸다.
"......"
리프는 단숨에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아까보다 덜 긴장되기는 한데 부끄러워서 몸서리가 쳐졌다.
"널 어찌해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
이스카는 미간을 찌푸리고서 리프의 전신을 훑어봤다. 그 상태로 한참을 고심하던 황자는 혹시 하는 얼굴로 리프의 보송보송한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 순간 리프의 얼굴이 한층 더 빨갛게 익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스카가 제 뺨에 입을 맞추자 가슴이 짜르르 하고 울렸다. 이스카가 손에 쥐고 있는 말랑한 페니스에도 조금 힘이 들어갔다.
"이게 네 수준인 거냐. 정말 갈 길이 멀군."
이스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유리천장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리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방금 그가 말한 대로 갈 길이 첩첩산중으로 멀긴 하지만 아예 가망이 없는 게 아니란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군.'
리프는 홧홧해진 뺨을 손으로 식히다가 딴청을 부리듯 별을 올려다봤다. 제 몸에 닿는 이스카의 뜨끈한 페니스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밤하늘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온실에 이스카와 단 둘이 있고, 사방에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불편하거나 어색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이스카가 느릿하게 해먹을 흔들기 시작했다. 요람에 누운 것처럼 졸음이 몰려온 리프는 이스카의 옷깃을 슬그머니 움켜잡은 채로 잠이 들었다. 이스카는 리프를 아프게 하고 겁나게 하지만 한편으론 그를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네?”
러셀이 눈을 부릅떴고 리프는 쇠사슬이 짤그랑, 하고 울리도록 손을 떨었다.
"어차피 황제의 인가가 떨어진 사안이야. 돌이킬 수 없다면 최대한 우리 쪽에 유리하게 만들어야지."
이스카가 테이블 위에 발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명령서에 '열람'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니 서 트리아만 제국 놈들을 여기로 오게 만들어. 복사본을 넘기는 게 아니라 제국 땅, 네 연구실에서만 바스커빌의 연구일지를 볼 수 있도록 한다면 어설픈 수작 따윈 부리기 힘들겠지."
"아……!"
"어떤 머저리가 작성한 문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잘 됐군. 허술한 구석이 많아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용할 여지는 아까 그것 말고도
충분하겠어."
이스카는 다시 한 번 명령서를 훑어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공동 연구를 주장해 보는 것도 나름 괜찮겠군. 공동 연구를 하면 싫든 좋든 놈들이 우리와 정보를 공유해야하니까. 서 트리아만 제국 놈들은 고대 마도병기를 제작하는 설계도를 손에 넣고 싶은 거겠지?”
"네, 분명히."
"하지만 중요한 건 황혼과 고뇌의 탑에서 발견한 바스커빌의 연구일지에 뭐가 적혀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지."
황제가 서명한 명령서를 테이블 위에 던지는 이스카의 입가에 음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단순한 신변잡기를 기록한 쓰레기인지, 아니면 진짜 고대 마신 전쟁 시대의 마법을 연구한 결과물인지는 해독을 해봐야 안다는 말씀인 거지요?”
러셀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신비주의자였던 바스커빌은 연구일지를 저 혼자만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체계의 언어로 기록했다. 그 덕분에 많은 국가들이 고대 마도 병기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바스커빌의 연구 일지를 뒤에서 몰래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잠깐만. 바스커빌의 연구일지에 마왕을 소환하는 방법이 적혀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팔짱을 끼고 있던 햄튼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음, 그러고 보니까 그 생각을 못 했네."
러셀은 햄튼이 웬일로 일리가 있는 지적을 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라도 잡 듯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바스커빌이 미친 건 8서클에 들어선 이후라는 게 정설이지만, 흑마법을 연구한 시기는 그것보다 훨씬 전일 가능성도 있긴 하단 말이지."
러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거실을 산만하게 돌아다녔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티포트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이 채워졌다.
'바스커빌은 미친 게 아니었다는 말을 러셀에게 해봤자 분명 비웃음만 사겠지.'
리프는 차를 우려내기 위해 티포트의 뚜껑을 닫으며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카논 대륙에 마왕을 불러오려 한 사악한 흑마법사.
인간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9서클의 영역에 도전하는 과욕을 부리다가 정신이 비틀려버린 천재.
십만에 달하는 병사들을 제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제물로 바친 무자비한 학살자.
바스커빌이 살아있던 시절에도 말년엔 망령이 난 게 아니냐고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대륙 연합군이 승리한 채로 삼백 년이나 흐른 지금은 바스커빌이 미치광이라는 평가를 받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난…….'
리프가 서글픈 얼굴로 쇳덩이를 찬 제 손목을 꽉 움켜잡은 순간이었다.
"차를 도대체 얼마나 우려낼 셈이지?"
이스카가 기척도 없이 리프의 등 뒤로 불쑥 다가왔다.
"죄, 죄송해요."
유령처럼 기척 없이 황태자의 궁으로 향하던 노인은 빨랫감이 잔뜩 든 통을 들고서 어디론가 향하는 어린 소녀를 발견했다. 어리고 순수할수록 영혼의 가치는 올라가는 법이었다. 흑마법사는 보라색 빛이 도는 입술 끝을 슬그머니 비틀며 소녀에게 접근했다. 근처에 근위병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지만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탁실을 찾아가던 소녀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공간 저편에서 손을 쓱 뻗은 흑마법사에게 납치 되었다. 소녀가 서 있던 자리엔
옷가지들과 바구니만 남아 흙바닥에 흐트러졌다. 근위병들은 소녀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척척 열을 맞춰 건물 귀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잠시 후 소녀는 하수구와 연결된 어느 지하 동굴에서 눈을 떴다. 축축하고 어둑한 지하실 중앙엔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주변엔 피를 촉매제로 사용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지하 동굴 곳곳에선 누런빛을 떤 수백 개의 양초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흑마법사여, 저 아이도 전하의 병환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제물인가?"
금실 자수가 놓아진 자줏빛 공단 외투를 입은 고귀한 여인의 목소리가 촛농 자국이 종유석처럼 말라붙은 지하 동굴에 울려 퍼졌다. 나이가 지긋한 여인은 발가벗겨진 소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겁에 질린 소녀는 제발 도와달라는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하지만 지체 높은 귀부인은 입에 재갈이 물린 소녀의 몸부림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황후 마마."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늙은 흑마법사는 황후를 상대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탐욕스러운 황후가 흑마법사의 거짓말을 알아챌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몇 세기에 걸쳐 흑마법사들이 척살 되고, 흑마법을 다룬 서적들이 발견되는 족족 불살라진 덕분에 흑마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인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굴 천장과 울퉁불퉁한 벽을 타고 철커덩, 철커덩하고 쇠사슬이 흔들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녀의 울부짖음은 짐승처럼 절박했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든 칼이 소녀의 가슴에 꽂힌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해......"
노인은 심장이 파헤쳐진 소녀의 육신을 내려다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촛불이 사납게 동굴 벽을 배정으로 일렁거리고, 흑마법사의 그림자가 소녀의 육체를 제단에서 끌어내리는 광경을 연출했다. 처참하게 망가진 소녀의 시체가 하수구 끝자락에 걸려 발견 된 것은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낀 다음날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