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4)

리프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팔다리를 고깃덩어리처럼 축 늘어트린 소년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가 부업의 도구로 쓰던 책이 바닥에 널브러진 광경과 터널 저편으로 점점 멀어지는 램프의 불빛이었다.

"으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리프가 입술 사이로 신음을 흘리며 의식을 차렸다.

'왜 이렇게 팔이 아픈 거지?'

실눈을 뜨며 주변을 살폈다. 한데 철그렁, 철그렁 하는 소리가 갑자기 머리 위쪽에서 났다.

'뭐지?'

섬뜩한 예감이 들어 급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쇠사슬……!"

리프는 제 손목에 채워진 수갑과 천장에 연결된 쇠사슬을 발견하고서 눈을 부릅떴다. 그는 지금 양손을 하늘로 향한 자세로 어딘지 모를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철컹, 철컹!

"이봐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여기가 도대체 어디예요? 날 얼른 숙소로 돌려보내달란 말이에요."

제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리프는 유일한 출구를 향해 소리치며 몸을 마구 흔들었다. 목에 길게 난 상처가 따끔거렸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죄를 지은 마법사들을 가뒤놓는 곳인가?'

감옥의 천장과 바닥을 빠르게 훑어본 리프는 여기가 황혼과 고뇌의 탑 어딘가에 숨겨진 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발바닥을 대고 서 있는 돌에는 섬뜩하고 기이한 느낌을 주는 마법진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고문 방법은 삼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군.'

마법진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본 리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음각으로 깊게 새겨진 마법진 주변엔 검게 그을린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법사들은 대개 피를 보는 걸 싫어해서, 죄인이나 포로를 고문할 때 전기 충격을 줘 상대방을 통구이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끼이익, 쾅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신을 차렸군."

흑발 남자가 감옥의 문턱을 넘으며 리프를 위아래로 훑었다.

'황혼의 탑 수장은 어디로 간 거지?'

뭔가 예감이 좋질 않았다. 노예를 심문하는 자리인데 노마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낯선 남자 둘이 이스카 황자를 따라 감옥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황자의 측근들인가?'

리프는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손을 가늘게 떨었다. 한 명은 호아킨만큼이나 덩치가 큰 기사였고, 다른 하나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마법사였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리프에게 나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제가 여기에 갇힌 건…… 으, 은화를 빼돌렸기 때문인가요?"

꿀꺽 생침을 삼킨 리프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어눌한 목소리를 낸 순간 이었다.

짜악!

차가운 얼굴을 한 흑발 남자가 인정사정없이 리프의 뺨을 후려쳤다.

"어윽!"

철커덩, 철컹

리프가 중심을 잃고 비틀대자 천장에 연결된 쇠사슬이 날카로운 소음을 흘리며 크게 물결쳤다.

'앞이 안 보여......'

리프가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한동안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한 통증이 밀려온 것은 이스카가 그의 턱을 움켜잡았을 때였다.

"어디 또 한 번 내 앞에서 아둔한 노예인 것처럼 연기해봐."

이스카 황자가 리프의 눈을 내려다보며 사납게 이를 내보였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간신히 시력은 돌아왔지만 귓속에 지잉ㅡ, 하는 금속성 이명이 가득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리프는 황자의 입모양을 읽어 내용을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는 정말 왜 감옥에 끌려온 건지 몰, 아악!" 

짜악!

섬뜩한 마찰음이 감옥에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허억, 헉. 쿨럭."

입을 벌리고서 숨을 몰아쉬는데 비릿한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네놈은 은화를 우연히 발견한 게 아니야. 책속에 뭐가 들어있는 지 분명 미리 알고 있었어."

이스카 황자가 리프의 후드를 거칠게 벗겼다.

"?"

리프의 금발이 출렁, 하고 부드러운 물결을 이루며 황자와 측근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오!"

"허? 이거, 상당히......"

황자가 손찌검하는 광경을 무심히 지켜보던 측근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누더기를 걸친 노예가 귀족 중에서도 보기 드문 선명한 백금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이스카에게 손찌검을 당해 한쪽 뺨이 퉁퉁 부어오르고 입술이 찢어졌지만 그래서 그의 백금발이 한층 더 강조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

흑발 남자도 허를 찔린 사람처럼 턱을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그가 램프의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리프의 금발에 눈길을 준 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편지에 그려진 마법진 도면, 누구에게 넘기기로 되어 있었지?”

이스카 황자는 곧 원래의 험악한 표정으로 돌아와 리프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으윽!"

"엄살 부리지 말고 대답해. 널 매수한 사람은 누구고, 총 몇 번이나 연구를 뒤로 빼돌렸는지."

리프를 다그치는 이스카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젠장, 날 첩자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한 거였어.'

리프는 황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제가 이 일을 너무 안일하고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혼의 탑에 적국과 내통하는 마법사가 있고, 은화는 내통자가 내게 준 수고비라고 생각한 건가?'

쇠사슬에 매달린 리프의 등줄기로 오한이 내달렸다.

지금 리프가 처한 상황은 도둑으로 몰린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심각했다. 은화를 탐낸 무지한 노예인 척 연기하면 편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처럼 보이리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고작 4서클짜리 마법진일 뿐이잖아?'

마법연구가 기밀 취급을 받으려면 최소 5서클은 되어야한다는 게 리프의 생각이었다. 4서클의 마스터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5서클짜리 의뢰를 전부 무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리프의 기준에선 5서클 미만은 마법이 아니라 그저 어린애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그래서 다른 마법사라면 직속제자에게도 꽁꽁 숨기는 지식들을 얼굴도 모르는 타인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역시 뭔가 숨기고 있군."

악의 신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이스카가 리프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동요하면 안 돼.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 마법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해야 한단 말이다.'

리프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목을 움츠렸다. 노예가 마법이야기에 반응을 보이면 더 수상하게 보일 뿐이었다.

"어이, 꼬마. 네가 입을 다문다고 능사가 아니야. 곧 황혼의 탑 소속 마법사들을 전부 감사하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질 거다."

팔 근육이 터질 것처럼 두툼한 기사가 턱을 긁적거리며 충고했다.

철컹!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전면적인 감사가 실시될 거라고?'

황자에게 맞은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리프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태였는데 덩치 큰 기사가 던진 말이 리프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저 노예의 증언까지 확보하면 마스터 호프만이 황혼과 고뇌의 탑 수장 자리에서 경질되는 건 거의 확실해지겠군요."

편지에 그려진 마법진을 자세히 뜯어보던 마법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교활한 늙은이라 방심할 수 없어. 하지만 못해도 입지는 흔들어 놓을 수 있겠지. 팔만 왕국에 유출될 뻔했던 문서 건이 워낙 크니까."

이스카가 피식 웃으며 리프의 찢어진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리프를 괴롭히려는 의도라기보다는 그저 무의식적인 행동인 것 같은 낌새였다.

"으읏."

황자가 입술의 상처를 꾹 누르자 리프는 온몸을 경직시켰다. 상처에서 방울방을 흘러나온 피는 리프의 입술과 혀끝을 새빨갛게 적셨다.

'내가 모르는 원가가 있어......'

밤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황혼과 고뇌의 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노예는 정보를 접할 길이 없는 정치적인 사건임이 분명했다.

"네가 도마뱀의 꼬리인지, 아니면 몸통인지 따위는 중요치 않아. 네가 아무리 무고함을 주장해도 들어줄 사람은 없어."

이스카의 커다란 손이 리프의 목으로 내려왔다.

"황제와 법관들이 신경 쓰는 건 네 주머니에서 세상에 한 번도 발표된 적 없는 마법진 도안이 나왔다는 사실이지."

입가에 미소를 띤 황자가 리프의 목을 감싼 손에 힘을 가했다.

"컥!"

목을 졸린 리프의 작고 하얀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한 번도 발표된 적 없는 마법진 도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편지에 그려진 마법진은 흔히 사용되는 4서클 마법진을 조금 응용한 형태였을 뿐이란 말이다.'

리프의 항변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니, 말할 기회가 주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철컹, 철컹!

'수, 숨 막......'

호흡곤란으로 시야가 까맣게 물든 리프는 어떻게든 황자의 손을 떼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팔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리프의 발은 돌에 새겨진 마법진 위를 미끄러지기 바빴다.

"적과 내통하고 있는 자가 누군지 말해. 배후의 이름을 밝히면 내 지위와 이름을 걸고 널 살려주겠다."

황자는 개의 목줄을 늘리는 것처럼 손아귀에서 힘을 슬쩍 뺐다.

"켈룩, 컥! 쿨럭."

간신히 숨통이 트인 리프가 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배후 따위, 없, 쿨럭!"

지친 얼굴을 한 리프는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제 의사를 전달했다. 애초에 그를 사주한 사람이 없는데 배후의 이름을 밝힐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유감스럽군."

어깨를 으쓱 추어올린 이스카가 마법사에게 '그걸'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젠장.'

리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스카가 마법사에게 뭘 지시한 건지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파지직, 파직!

마법사가 황자의 명령대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감옥에 파르스름한 빛이 번득인 순간, 리프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돼지와 닭을 키우는 축사보다 허름한 노예 숙소에 침통한 분위기가 흘렀다.

"리프 왜 안 와? 리프 어디 갔어?"

남들보다 덩치가 두 배쯤 큰 호아킨이 흰 손수건으로 곱게 싼 새알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성장기인 리프에게 먹이려고 숲에서 일부러 새알을 챙겨왔건만 정작 리프는 이틀 째 숙소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바토, 마법사의 시중을 드는 노예들과 이야기해본다고 하더니 리프의 소식에 대해 전혀 들은 것이 없는 게냐?”

며칠 새 더 주름이 깊어진 티아고 영감이 간절한 눈빛으로 바토를 바라봤다.

"감옥에서 노예가 심문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인 건지는 저희들도 알 도리가 없대. 마법사들에게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바토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시중드는 노예들의 말로는 황혼의 탑에 큰 사건이라도 터지려는 모양인지 마법사들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다고 했다. 마법사들이 광적으로 집착하는 연구도 제쳐두고서 하루 종일 머리만 쥐어듣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도 보통 심상치 않은 게 분명했다.

"아직은…… 무사한 게지?”

감옥이라는 소리에 티아고 영감이 손을 떨었다.

판자로 지어진 숙소는 홍수 피해라도 입은 것처럼 쑥대밭이 되었다. 어젯밤, 노예관리인을 앞세운 사병들이 숙소에 들이닥친 탓이었다. 사병들은 리프의 소지품을 전부 내놓으라며 세 사람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느낌이 좋지 않아 리프가 만든 물건들을 숨기려 했지만 사병들은 기어코 그것들을 뒤져 찾아냈다.

"무사할 거라고 믿고 싶지만, 그것도 알 방법이......"

바토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애써 의연한 척을 해보려 했지만 바토의 눈엔 눈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리프는 이들에게 아들 같은 존재였다. 젖먹이였던 리프를 돌보기 위해 사내 셋이 돌아가며 젖동냥을 다니고, 제 몫의 식사를 덜어 리프에게 나눠줬다.

어린 리프가 열이라도 나 시름시름 앓으면 세 사람 모두 어떻게든 약을 구하려고 노예 관리인의 다리를 붙잡고 자비를 호소했다.

티아고 영감과 바토, 그리고 호아킨에게 있어서 리프는 고된 노예생활을 버티게 만들어주는 희망이자 빛이었고,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은 꿈같은 존재였다. 한데, 온 정성을 기울여 키운 그 소중한 아이가 황혼의 탑 어딘가에 감금되어 얼굴도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리프……. 리프, 나 이제 장난감 만들어 달라고 떼 안 쓸 테니까 빨리 돌아와. 내가 다 잘못했어."

호아킨이 바닥에 웅크리고서 울기 시작했다. 지능이 낮은 호아킨은 밤에 외출을 나갔던 리프가 제 의지로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걱정 마. 곧 돌아올 거다……"

티아고 영감이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만 호아킨의 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호아킨을 달래는 티아고 영감의 목소리엔 확신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문에 달린 쇠창살 말고는 사방이 꽉 막힌 컴컴한 감옥 바닥에 금빛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이런 걸 인과응보라고 하는 거군.'

양쪽 손목에 쇠사슬을 단 채로 바닥에 널브러진 리프는 어吾속에서 피식, 소리 내어 웃으려 했다. 하지만 전기고문을 당하느라 만신창이가 된 탓에 리프는 입꼬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전기고문은 채찍질을 당하는 것처럼 몸에 외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프의 가녀린 육체엔 가혹한 채찍질을 당하는 일 이상 가는 충격이 누적된 상태였다.

어둠속에서 얼마간 눈을 뜨고 있자 어렴풋하게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됐다.

'이걸 고안해낸 게 브오나로티 왕국과의 전쟁 때였던가? 아니, 어쩌면 열넷에 참전했던 루마콘 전투였을지도 모르겠군.'

마법진 위에 쓰러져 있는 리프는 돌바닥에 음각으로 파인 굴곡을 온몸으로

느끼며 제 추악한 과거를 떠올렸다.

한때 카논 대륙 전역이 전쟁에 열을 올리던 시기가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잠깐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대륙을 양분한 카드모스 진영과 발만 진영의 분쟁은 거의 몇십 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졌다.

'단체로 광기에 휩싸인 시대였지.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적국의 마법사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고문하고…….'

바스커빌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악마의 고문도구라고 불리는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군 수뇌부가 겉으로는 포로에게 일절 상해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고통을 가할 수 있는 고문마법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그에게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적 동맹국 마법사들의 치를 떨게 만들었던 마법을 제가 몸소 체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터라, 리프는 이 상황이 지독하게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만든 마법이긴 하지만 효과가 굉장하군.'

삼십년 전쟁 당시, 상관들은 포로들에게서 정보를 얻어내기가 수월해졌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바스커빌을 칭찬했다. 바스커빌은 상관들이 웬 호들갑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 말들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하지만 직접 마법진의 위력을 실감하고 나니 상관들이 그에게 보낸 일관된 찬사는 결코 과장이나 아첨이 아니었다. 그딴 칭찬 따위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갑지 않았지만.

감옥의 문을 열리자 복도의 불빛이 쏟아졌다. 그 불빛 때문에 리프의 눈엔 이스카 황자의 윤곽만 보였다.

"오늘은 배후가 누구인지 말할 마음이 생겼나?"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진 리프의 곁으로 다가온 이스카가 물었다.

"제가......드릴 수 있는, 으으. 말씀은 이미 다 드렸......"

돌바닥에 뺨을 댄 리프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여 대답했다. 매번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을 주고받는 상황이 지겨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절차이기도 했다.

"빌어먹게 끈질기군.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뭐지? 충성심? 두려움?"

이스카는 마법진 위에 내팽개쳐져 있는 리프를 신기한 생물을 바라보듯 바라 봤다.

'하아.'

리프는 따가울 만큼 노골적으로 저를 훑어대는 이스카의 시선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기운만 빠질 것을 알기에 리프는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혼자 온 건가. 오늘은 측근들이 보이지 않는군.'

몸을 일으켜 세울 힘이 없는 리프는 눈동자를 굴려 이스카의 발치를 좌우로 살폈다.

"햄튼과 러셀을 찾는 건가."

리프의 표정을 읽었는지 황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대로 소개를 받은 적은 없지만 햄튼이 기골이 장대한 기사고 러셀이 옷차림이 곡예사처럼 요란한 마법사였다는 건 리프도 알고 있었다.

"내 보좌관들은 노예를 매일 만나러 올 만큼 한가하지 않아."

이스카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럼 당신은 보좌관들과 달리 퍽 한가한 모양이군.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될 걸 굳이 손수 노예를 심문하러 오는 걸 보니.'

지독하게 피로한 리프는 눈꺼풀을 닫으며 속으로 빈정거렸다.

기이잉, 철컥, 철커덩

바닥에 뉘여 있던 쇠사슬이 서서히 팽팽해지고, 천장에서 귀에 거슬리는 금속음이 들렸다.

"어흑!"

바닥에 쓰러져 있던 리프는 제 팔을 잡아당기는 장치의 힘에 의해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픈 리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폐기물 처리장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취미가 있다더니, 흥미로운 수집품을 많이 가지고 있더군."

이스카 황자가 리프에게 유리병에 든 마나석 조각을 보여줬다.

'저건......"

팔과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져가던 리프는 흠칫 턱을 굳혔다. 부스러기에 가까운 저 마나석은 리프가 감옥에 감금되던 날 밤, 청소도구실에서 재생시킨 마나석이 분명했다.

'어디까지 뒷조사를 한 거지? 청소도구실을 뒤졌으면, 티아고 영감들이랑 같이 사는 숙소도…….'

리프는 온몸의 피가 심장으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도 알아볼지 궁금하군. 네 소지품이 아니라 다른 녀석의 베개 속에서 나온 물건이긴 하지만."

이스카 황자가 차갑게 웃으며 이번엔 너덜너덜한 마법장치를 꺼냈다. 이젠 작동하진 않지만 그건 리프가 호아킨에게 만들어준 장난감이었다.

철컹, 철컹!

"으으으, 으.”

안 돼, 제발 그 사람들까지 끌어들이지 마.

이스카를 바라보는 리프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쇠사슬에 매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모습을 한 리프는 당장이라도 쓰러질듯 크게 휘청거렸다.

마신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황자가 굳이 호아킨에게 준 선물까지 보여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소중한 사람에게도 손을 뻗힐지 모른다는 위협.

"이제 네가 숨기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드나?"

이스카가 리프의 금발을 어깨너머로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개자식!'

리프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흑발 남자를 죽일 듯 노려봤다. 쇠사슬만 없었으면 분명 황자고 뭐고 한 대 쳤을 것이다. 이 몸으론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겠지만.

"첩자를 상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릴 거라고 생각하다니 순진하군."

이스카는 눈초리를 사납게 든 리프의 머리카락을 제 입가로 가져가며 피식 웃었다.

"나는, 첩자가 아니......"

리프가 입술을 열자 이스카는 또 똑같은 말을 반복할 거냐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하도서관에 관한, 어떤 소문을 듣고서. 흣, 그게 진짜인지 확인해보려고……. 마법사들의 거래, 크윽."

눈이 풀린 리프는 끝까지 들으라는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스카에게 손찌검을 당해 볼 안쪽에 생긴 상처 때문에 한마디, 한마디 꺼내는 게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다.

"지하도서관에 출몰한다는 4서클의 마스터에 관한 소문 말이지?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더군. 마침 편지에 그려진 마법진도 4서클짜리라 몹시 솔깃했어."

이스카 황자가 저도 들어본 적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고 있었어? 어떻게 그걸?'

리프는 움찔 어깨를 뒤틀며 호흡을 멈췄다.

"마법사들을 차례로 심문 중인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줘서 말이야."

이스카는 황혼의 탑 마법사들이 별 영양가도 없는 소리나 해대서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명으로 감사가 시작되자 마법사들은 이걸 평소에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경쟁자를 눈앞에서 치워버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취조실 책상에 앉은 마법사들은 동료를 모함하기 위해 은밀한 사생활뿐만이 아니라, 밝히지 않기로 맹세한 비밀,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내 폭로하는 쓰레기 같은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미신 같은 내 주의를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정말 어리석군.”

이스카가 실망이라는 듯 쯧쯧, 혀를 차며 제 손에 감은 리프의 금발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큭!"

리프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초점이 오락가락 흔들렸다. 그가 동요를 내비치는 이유는 두피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이 아니라, 이스카가 지하도서관에 관한 소문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떡하지? 나름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리프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스카 황자가 지하도서관의 일을 뜬소문 취급 할 것이라곤 예상을 못했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세간의 상식으론 성미가 극도로 까다로운 마법사들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제 연구를 맡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리프는 마법사들에게 의뢰를 받는 당사자였기 때문에 남들에겐 그 일이 그럴싸하게 꾸며낸 괴소문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리프, 목마르지 않나?”

이스카가 리프의 금발을 놓아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 이름을 알고 있어?'

리프는 이스카가 제 이름을 입에 담자 흠칫 등을 긴장시켰다.

'새삼스럽게 뭘 놀라……. 뒷조사까지 했는데 내 이름 정도야 알고 있는 게 당연한 거지.'

리프는 동요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호흡을 골랐다. 그러나 이름을 알고 있는 것과 직접 언급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제국의 황자씩이나 되는 자가 노예의 이름을 부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황궁에서 황혼의 탑으로 널 만나러 오는데, 문득 네가 물마시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이스카 황자가 자비라도 베풀듯 수통을 열어 거칠어진 리프의 입술에 가져갔다.

'필요 없어.'

리프는 온힘을 쥐어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스카는 리프의 턱을 붙잡고서 수통을 기울였다. 대신 목을 축이는 게 아니라 리프의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끼이익, 철컹!

"으으......”

이스카가 수통을 뒤로 물리자 리프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팔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 때문에 리프는 수통까지 다가가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야만 했다.

"마시고 싶나?”

이스카는 빙글빙글 웃으며 수통의 물을 바닥에 쏟았다.

'빌어먹을!'

절박한 얼굴로 이스카를 바라보던 리프는 분노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스카가 바닥에 뿌린 물은 돌바닥의 홈을 타고 흘러 리프의 발까지 적셨다.

"으읏."

방금 전까지 리프는 제가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별로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입술에 수분이 닿자, 물을 마시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격렬한 갈증이 몰려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서 바닥의 물이라도 마시게 해달라고 이스카에게 애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설에 따르면 마법진 위에 이렇게 물을 흘려두면 위력이 더 세진다고 하더군."

이스카가 홈을 따라 퍼지는 물의 궤적을 눈으로 쫓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나보고 겁이라도 먹으라는 건가.'

쇠사슬에 매달린 리프는 붉게 충혈 된 눈을 들어 올려 이스카를 노려봤다. 신경이 유리파편처럼 날카로워진 탓에 리프는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넌 이정도 쯤은 버텨내겠지. 하지만 그 자리에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있다면 어떨까."

이스카가 쇠사슬을 움켜잡으며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철커덩, 차르륵

'설마…….'

리프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가령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이라든가, 지능이 낮은 거인이라든가."

이스카가 티아고 영감과 호아킨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순간, 리프는 심장이 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들었다.

"안 돼요. 전하, 제발……!"

리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스카에게 분노하거나 화를 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정말 그 두 사람을 감옥으로 끌고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숨이 턱 막혀서 다른 건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티아고 영감들은 원죄를 짓고 태어난 저와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 무고하고 순박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

"네가 알고 있는 걸 털어놔."

이스카는 정부에게 밀어라도 속삭이듯 리프의 뺨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내통자가 누구인지만 말하면 돼."

리프는 목에 뭔가 걸린 사람 같은 얼굴로 이스카를 올려다봤다.

"살아서 감옥을 나가게 해주는 건 물론이고, 네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내통자가 누군지는 몰라요……." 

금발이 앞으로 쏟아지도록 고개를 푹 숙인 리프가 입술을 달싹였다.

"결국 할 말은 그것뿐인가?”

이스카는 더 이상은 인내심을 발휘하기 힘든지 한숨을 내쉬며 리프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칼을 뽑기도 귀찮아서 손으로 목을 비틀어 처리하려는 거였다.

"하지만!"

이스카가 손아귀에 힘을 가하려는 순간, 리프가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눈썹을 비튼 이스카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더 말해보라는 듯 손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리프가 허튼 소리를 지껄이면 바로 목을 비틀어버리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전하가 가져간 마법진 초안, 누가 그린 건지 알아요."

이스카는 그제야 살기를 거두고서 리프의 말에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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