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

부엉이가 우는 깊은 밤.

"리프! 리프!"

덩치가 오우거처럼 큰 남자가 짚더미 위에서 자는 소년의 어깨를 흔들었다.

"왜......"

한껏 몸을 웅크린 리프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어서 사위는 아직 컴컴했다.

"이, 이거. 롬멜 마법사님이 필요 없대. 이것도 저번처럼 네가 바,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어 줘."

지능이 일곱 살 주준인 호아킨이 리프의 코앞에 뭔가를 내밀었다. 솥두껑처럼 두꺼운 호아킨의 손바닥 위에는 마나가 바닥난 마나석 부스러기와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진 금속판이 꽃잎처럼 곱게 포개져 있었다.

"후우, 이거 가지고는 재료가 부족해서 안 돼."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고서 호아킨의 손바닥을 내려다본 리프는 저리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도로 짚더미 위에 돌아누웠다.

"리프, 제발. 응? 나 새 장난감 만들어 줘. 반짝반짝, 요정 같은 거 또 보고 싶단 말이야."

짚더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호아킨이 떼를 쓰며 리프의 팔을 흔들었다. 하지만 리프는 눈을 질끈 감고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리프가 나 장난감 안 만들어줘서 슬퍼. 호아킨, 울 거야."

아무리 떼를 써도 리프가 상대해주지 않자 호아킨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거, 잠 좀 자자."

"그냥 만들어 준다고 하려무나, 리프."

숙소의 벽 자리를 차지한 티아고 영감과 콧수염 바토가 꽉 잠긴 목소리로 항의했다.

티아고, 바토, 호아킨, 이 세 사람은 갓난쟁이였던 리프를 돌아가며 돌봐준 가족 같은 존재들이었다.

"만들어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정말 이것 가지고는 안 된다고."

리프가 결국 인상을 팍 찌푸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게 손톱만큼이라도 마나가 있다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불행이도 리프는 마나가 몸에 쌓이지 않는 체질이었다.

"리프 화났어? 호아킨 미워?”

덩치는 산만한 호아킨이 리프의 눈치를 살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화 안 났어. 그러니까 울지 마."

리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자 그의 금빛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지푸라기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그, 그럼 만들어줄 거지?”

방금 전까지 을상을 짓고 있던 호아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생긴 건 딱 오우거인데 하는 짓은 여우가 따로 없었다.

"그래."

어필 수 없이 만들어주겠노라 허락을 한 리프는 뻑뻑한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제가 조달해 와야 할 재료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성가셔 죽겠군. 애초에 왜 그딴 장난감을 만들어줘서......'

황혼과 고뇌의 탑 구석에 마련된 폐기물 처리장에서 망가진 회로를 연결시킬 재료를 긁어 모아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등이 아파왔다.

"리프! 대륙 연합군들이 마왕이랑 대역적 바스커빌을 이렇게, 이렇게 쓸어버리는 그림 있잖아. 이, 이번에는 그 그림을 움직이게 만들어줘."

리프가 외투를 걸치는데 호아킨이 옆에서 손짓 발짓을 해보였다.

"안 돼, 이놈아! 그림을 흡수해서 움직이게 만들려면 지옥씀바귀풀로 정제한 인어의 눈물과 마나 원소를 분해한 정수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런 고급 재료들이 쓰레기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줄 알아?”

흥분한데다가 마법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원래 제 말투가 튀어나와버렸다.

"리프는 만날 안 된다고만 해. 치, 치사해."

뺨을 잔뜩 부풀린 호아킨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으윽."

리프는 속으로 '이 무리한 요구만 해대는 귀족 같은 놈아!' 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마법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정말 속이 터지는 일이었다. 이론이나 원리에 대해 설명해줘도 도통 알아먹질 못하고 같은 주장만 반복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호아킨. 바스커빌은 마왕 같은 거 세상에 풀어놓으려 한 적 없어. 내가 벌써 몇 번이나 말했잖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바스커빌이 흑마법을 배운 이유가 제 편을 들어 줄 마왕을 불러내기 위해서였다고 하던걸?"

바닥에 털썩 엉덩이를 붙인 호아킨이 노예의 낙인이 찍힌 손으로 지푸라기를 비비꼬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게 다 음해고, 중상이라니까."

리프는 두통이 인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램프를 집어 들었다. 램프에 불이 붙이자 좁고 축축한 노예 숙소가 노르스름한 빛으로 둥그렇게 밝아졌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것이라지만 대륙 연합군 놈들이 삼백 년 전에 떠벌린 거짓말들은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었다.

"리프, 도대체 누가 자꾸 너한테 그런 헛소리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그 사람을 멀리하렴."

황혼과 고뇌의 탑 노예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티아고 영감이 바가지에서 물을 떠 마시며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래. 바스커빌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바토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티아고 영감의 말을 거들었다.

"......"

리프는 후드를 머리에 덮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타락한 8서클의 흑마법사를 옹호하는 인간이 제정신일 리 없잖니."

눈썹까지 새하얗게 센 노인의 목소리가 허름한 숙소에 나지막하게 울렸다.

"바스커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고 악인이다."

"알아……."

눈을 내리든 리프의 입에서 침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숙소의 문 틈새로 바람이 숨어들어오자 램프를 든 리프의 그림자가 두 개로 갈라져 벽 위에서 나비처럼 흔들렸다.

"이만 재료 구하러 갔다 올게."

제 발끝만 바라보며 주먹을 쥐락펴락하던 리프가 호아킨이 제게 준 금속판과 마나석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쏴아아, 쏴아아-

황혼과 고뇌의 탑 주변에 심어진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불길한 빛깔이군.'

감옥처럼 높다란 담장 위로 일그러진 붉은 달이 떠 있었다. 리프는 당장이라도 피를 뚝뚝 흘릴 것 같은 붉은 달을 올려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아우우, 아우우! 

키이이! 킥, 카악!

붉은 달의 영향인지, 어둠 저편에서 키메라들이 공포에 질린 것처럼 높게 울부짖었다. 지금쯤 당직 사육사는 이놈들이 단체로 약이라도 잘못 먹었나, 하고 당황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램프를 외투 속에 숨긴 리프는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길을 이용해 폐기물 처리장으로 향했다. 이미 새벽 두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연구에 미친 마법사들은 밤이라고 해서 잠드는 법이 없었다.

덜그럭, 덜커덕ㅡ

"이것도 쓰레기, 이건…… 역시 쓰레기군."

폐기물 처리장에 도착한 리프는 램프를 들고서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허접한 미완성품들을 가차 없이 옆으로 내던졌다.

"홈. 대상을 추적하는 화염마법인가. 시도는 좋았지만 마법진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타버렸군. 실패작이긴 해도 가능성은 보여. 이 녀석은 스승만 잘 만나면 삼사년 안에 5서클 초입에 들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까맣게 그을린 금속판을 흘끗 살펴본 리프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황혼과 고뇌의 탑 소속 마법사를 칭찬을 했다.

그러나 방금 리프가 칭찬한 마법진을 그린 마법사는 올해 칠십육 세의 노인으로, 어제부로 마법사 생활을 청산하고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탑 밖으로 외출만 할 수 있어도 이 고생은 안 해도 될 것을.'

리트는 램프의 불빛으로 폐기물을 비추다말고 높게 솟은 담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봤다.

지하도서관에서 부업을 한 덕분에 리프에겐 많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모아둔 돈이 있었다. 시내의 마법 상점에 갈 기회만 주어지면 리프는 제게 필요한 기본적인 마법 재료를 전부 사 올 수 있었다.

재료의 질 같은 건 최하급이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호아킨과 티아고 영감, 그리고 바토의 눈이나 즐겁게 해주려고 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중시하는 내구성이나 정교함 따위는 리프가 알 바가 아니었다.

'돈이 있어도 쓸 수가 없으니 답답하군.'

노예인 리프는 황혼과 고뇌의 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호아킨, 티아고 영감, 바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모든 노예들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개중엔 마법사들의 시중을 들다가 시내로 심부름을 나가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간교하고 간사했다. 돈을 몇 푼 쥐여 주며 마법 상점에서 물건을 구해달라고 했다간 제가 모시는 마법사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 사실을 고해바칠 것이 분명했다.

재료보관 창고에서 물건을 슬쩍 빼돌리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하나같이 편집증에 강박증이 심해서, 말려둔 풀 한 포기만 없어져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난리를 피워댔다.

'대충 이 정도면 어떻게 될 것 같군.'

리프는 고물들을 가방에 챙겨 넣은 다음 쓰레기의 산을 내려왔다. 거대한 붉은 달이 포대자루를 뒤집어 쓴 것 같은 그의 몸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폐기물 처리장을 빠져나온 리프가 향한 곳은 노예들의 숙소가 아니라 지하도서관이었다. 숙소에서 쪼그리고 앉아 작업을 하면 호아킨과 바토가 자꾸 어깨너머에서 기웃거리기 때문에 정신이 사나웠다. 반면 지하도서관은 담력시험 기간도 아니라 한밤중에 가면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끼이익ㅡ

리프는 노예들이 출입하는 뒷문을 열고 지하도서관에 들어갔다. 청소도구를 보관하는 방으로 들어간 그는 램프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달그락, 달그락

가방을 뒤집어 탁자에 잡동사니들을 부려놓은 리프는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끝이 뾰족한 공구를 손에 든 리프는 폐기물 처리장에서 습득한 금속판에 홈을 파서 마법진을 고쳤다.

원래 마법진의 글자 하나를 수정하려고 해도 어마어마한 양의 계산이 필요하지만 리프에겐 그런 과정이 필요치 않았다.

뚜벅, 뚜벅

마나가 거의 다 바닥난 마나석을 금속판 위에 올려놓은 순간이었다.

청소도구실 문 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여럿 들렸다.

'누구지?'

긴장한 리트는 황급히 램프를 껐다.

"이쪽 방향입니다."

어둠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고요한 복도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백 년 넘게 숨겨 놨다니, 간도 크군. 언제까지 제국을 기만할 생각이었지?"

이번엔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노인에게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저도 얼마 전에야 우연히 '그것' 이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전임자들 또한 결코 고의로 숨긴 건 아닐 겁니다."

노인이 숨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제 결백을 주장했다.

"누가 비리라도 저지른 건가?"

탁자 아래 숨은 리프가 귀를 쫑긋 세웠다. 어두컴컴한 문틈 사이로 마나램프의 파르스름한 불빛이 스며들었다. 곧이어 사람의 발이 연달아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복도에서 인기척이 사라진지 십분 쯤 지났을 때 리프가 탁자 아래서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뚜프의 불빛이 탁자를 밝혔다.

"이제 다시 작업을 시작해 볼까."

뚜둑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꺾은 리프는 부싯돌 역할을 할 약품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마나석과 금속판을 옆으로 치운 리프는 우선 폐기물 처리장에서 주워온 마법 장치부터 분해했다. 리프가 노리는 건 마법진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바른 약물들이었다.

후드를 쓴 소년은 마법진 위에 말라붙은 약물들을 종류별로 살살 긁어내 종이에 담았다. 하지만 리프가 얻을 수 있는 약물 가루의 양은 콧김만 불어도 다 사라질 만큼 적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 리프는 뭔가 대단한 걸 만들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극소량이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마나석 부스러기와 금속판을 다시 탁자 중앙으로 가져온 리프는 마법을 점화하는 자리에 촉매제 가루를 솔솔 뿌렸다.

파지직ㅡ, 파직

촉매제 가루가 뿌려진 순간, 파르스름한 전기가 금속판을 휘감았다. 방금 전까지 죽은 물고기처럼 방금 전까지 탁한 빛깔을 띠고 있던 마나석 부스러기들은 어느새 은은한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잘해봐야 두 번 정도 쓸 수 있겠군. 뭐, 그 정도면 충분하지만.”

마나석을 되살리는데 성공한 리프는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로 탁자를 정리했다.

'지하도서관까지 온 김에 부업거리가 들어왔나 확인해 볼까.'

마법장치 잔해들을 구석에 대충 밀어둔 리프는 빗자루를 챙겨들고서 문밖으로 나갔다. 만에 하나라도 지하도서관에서 마법사와 마주치면 청소하는 척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끽끽, 끼이이

환풍기가 소음을 흘리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지하도서관의 공기는 폐광처럼 탁했다.

'저놈의 환풍기는 시끄럽기만 하지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후드로 얼굴을 절반쯤 가린 리프는 환풍기를 흘끗 노려보며 모퉁이를 돌았다. 다음 갈림길만 통과하면 리프가 마법사들에게 의뢰를 받는 책장이 나왔다.

"다들, 잘도 이 구석진 장소까지 찾아오는군."

제목이 없는 책을 꺼내 의뢰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리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감탄이라기보다는 비아냥에 가까웠다.

"그만큼 절박하단 뜻인 건가."

몸집이 호리호리한 리프는 봉투를 뜯으며 개미굴처럼 복잡한 터널을 흘끗 옆으로 바라봤다.

마법사들은 어지간하면 사서들을 시켜 책을 찾아오게 하기 때문에 지하도서관에 내려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직책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사서를 시키는 비율도 증가해서, 오래간만에 지하도서관에 내려왔다가 길을 잃는 고위마법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빨리 끝내고 자러 가야겠어.'

리프는 하품을 하며 청소도구실에서 빗자루와 함께 챙겨온 목탄을 꺼냈다.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마법진 도안에서 틀린 곳을 찾아 수정하는 리프의 손길은 빈틈없이 정확했다.

도안 수정을 마친 리프가 편지를 도로 봉투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이걸 처음 발견한 장소로 데려가라고 하니까 왜 같은 자리를 계속 빙빙 도는 건지 설명해 봐."

"죄, 죄송합니다. 전하. 소인은 절대 시간을 끌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지하도서관에 너무 오래간만에 내려오는 바람에......"

터널 저편에서 파르스름한 마나램프의 불빛이 일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빗자루를 챙겨오길 잘했군.'

인기척에 당황한 리프는 반사적으로 편지와 은화 열 개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졸음이 싹 달아났다.

"거기 누구냐!”

램프의 불빛을 본 노인이 큰 소리를 내며 삿대질했다.

"수장 어르신."

후드를 쓴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노인에게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황혼과 고뇌의 탑 수장이 이 시간에 지하도서관엔 어쩐 일로 내려온 거

지?'

고개를 깊게 숙인 리프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그가 노인의 얼굴을 보고 놀란 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게다가 전하라니......'

리프는 허리를 굽힌 채로 눈동자만 굴려 노인 옆에 서있는 남자의 발을 바라 봤다.

리프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니 라면 황혼과 고뇌의 탑 수장은 분명 저 흘발남자를 '전하' 라고 불렀다.

"뭐야, 청소하는 노예였군."

리프의 하얀 손등에 찍힌 낙인을 본 노인이 실망이라는 투로 중얼거렸다. 뭔가 큰일이라도 벌어져서 옆에 있는 남자의 관심이 다른 데로 쏠리길 원하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글쎄, 내 생각엔 단순히 청소만 하는 노예 같진 않군."

황혼과 고뇌의 탑 수장에게 전하라고 불린 남자가 갑자기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헉."

목에 서늘한 칼이 닿자 리프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는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어리군."

흑발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스윽, 하고 칼날을 움직였다. 칼날이 닿은 자리에서 뜨끈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 리프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이스카 전하?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마탑의 수장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스카라는 남자를 바라봤다. 방금 전에 그가 바라는 대로 흑발 남자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렸지만 노인이 원했던 상황은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눈이 침침해서 못 봤나보군. 하긴 노안이 와도 백번은 왔을 나이지." 

흑발 남자가 노인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서, 설마."

불길한 예감이 든 리프는 눈을 부릅뜨고서 키가 훌쩍 큰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딴 것들이 왜 네 주머니에 들어있는 건지 설명해 보실까?"

흑발 남자가 리프의 주머니에서 편지와 은화를 꺼냈다. 제국의 황자가 아까 그 광경을 봤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리프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침착하게 굴어. 저들은 아직 아무 것도 몰라.'

제 목에 칼을 들이댄 흑발 남자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노마법사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리프가 꿀꺽 생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괜한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하면 안 돼.'

리프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며 행여 무의식적으로라도 뒷걸음질을 치지 않으려고 발바닥에 힘을 줬다. 노예인 그가 이 상황을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멍청하게 터널저편으로 달아나려는 시도라도 했다간 황자라는 남자의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왜 대답이 없는 거지?"

편지를 슥 훑어본 흑발 남자가 다시 리프에게 시선을 던졌다. 램프의 불빛 탓인지, 전사처럼 체격이 건장한 남자의 한쪽 눈이 새빨간 핏빛으로 변했다 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저는……"

황자와 눈이 마주친 리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흑발 남자의 왼쪽 눈이 붉게 보인 건 그저 램프의 불빛이 만들어낸 착시 현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꼭 제 영혼을 노리는 악마와 맞닥트린 것처럼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떨렸다.

"이, 이스카 전하. 호, 혹시 거기 그려진 게 마법진 초안입니까?"

흑발 남자의 어깨너머로 편지를 흘끗 들여다본 노마법사가 이상할 정도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흑발 남자는 등 뒤에서 노마법사가 시체 같은 낯빛으로 발을 동동 구르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나보군."

삐쩍 마른 노예가 움찔거리기만 하자 짜증이 났는지 흑발 남자가 눈썹을 크게 비틀었다.

살면서 인내심을 발휘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그는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칼을 높게 들어올렸다.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벙어리처럼 입술만 달싹거리던 리프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드디어 대답할 마음이 생긴 건가."

흑발 남자가 허공에서 칼의 궤도를 바꾸며 팔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됐나 봐요. 머릿속으론 은화를 사서님이나 마법사님께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너무 큰돈이라……"

리프는 실수로 값비싼 도자기라도 깨트린 노예처럼 갑자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그래서, 은화를 어디서 발견한 건지 당장 말해 보거라! 저 마법진 초안도 같이 발견한 게냐?"

리프가 우연히 은화를 발견했다고 고하자, 노마법사가 몹시 급한 얼굴로 다그쳤다.

"예, 같이 발견했어요."

리프는 눈을 질끈 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의 몸으로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서 감당 못할 벌을 받는 것과 제 입으로 마법지식과 돈을 거래하던 장소를 노출시켜 부업을 그만두는 것. 어느 쪽을 선명하는 게 현명한 건지는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제가 그만 실수로 이 책을 떨어트렸는데 은화랑 편지가 들어, 읍!" 

리프가 비장한 얼굴로 제목 없는 책에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어수룩한 노예인척 연기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이스카 황자가 책 모서리를 당기는 리프의 양쪽 뺨을 한 손으로 꽉 쥐어짜듯 짓눌렀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딴 어설픈 수작 따윈 통하지 않아."

왼손엔 칼을 들은 흑발 황자의 눈동자가 램프의 불빛 때문에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읍읍!"

남자의 손에 입이 틀어 막히다시피 한 리프가 겁에 질린 눈으로 책장을 더듬었다. 아직도 출혈이 멈추지 않아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포대자루를 기워 만든 리프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사지가 뻣뻣하게 굳었지만 필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는 그의 손끝에 걸린 마법서들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날 연달아 실망시키는 군, 마스터 호프만. 황혼과 고뇌의 탑 수장씩이나 된다는 자가, 마법진 도안을 훔친 노예의 말을 의심 한 번 안 해보고 덥석 믿어?"

장검을 칼집에 갈무리한 흑발 남자가 노마법사를 향해 사납게 이를 내보였다.

"저, 전하? 저는 그저……"

책임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은 노마법사가 고목나무처럼 바짝 마른 손을 덜덜 떨어댔다.

"이 노예를 심문할 방을 마련하도록."

이스카 황자가 벙벙한 옷을 입었을 뿐, 체구가 가녀린 리프를 짐짝처럼 제 어깨에 걸쳤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마스터 호프만은 잠시 죄책감 어린 눈으로 리프를 바라봤다가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명령에 복종하겠노라 대답했다.

"헉! 놔, 놔요. 놔주세요! 마법사님! 제발 저 좀 구해주세요!”

심문이란 소리에 머릿속이 새하얘진 리프가 노마법사에게 팔을 뻗으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마스터 호프만은 허리를 깊게 숙인 채 노예의 필사적인 목소리를 외면했다.

"시끄럽군."

흑발 남자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직한 손으로 리프를 기절시켰다.

"으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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