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i
1장. POCO A POCO
포코 아 포코 : 조금씩
눈이 내렸다. 물기를 머금은 차가운 것들이 서울을 죄 덮었다.
폭설에 바쁘게 오고 가는 시민들의 안색이 어두웠다. 눈이란 실내에서 구경할 때나 낭만적인 법.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들에게 있어서 눈은 신발과 양말을 더럽히는 존재일 뿐이었다. 온통 새하얬던 눈이 여러 사람의 발길질로 인해 구정물로 변해 갔다.
차갑고 매정하고 평범한 서울의 겨울 풍경 속, 한 남자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우산조차 없이 건물 간판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는 무감각했다.
올려다보느라 살짝 드러난 흰자와 날카로운 눈꼬리 역시 경직된 분위기를 풍겼다. 바람 때문에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짙은 흑발이었고, 흰 피부와 연붉은 입술과 대비되어 싸한 감상을 일으켰다.
남자는 녹아 질퍽거리는 눈을 밟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피로한 듯 눈 부근을 꿈틀거리기는 했으나 지친 한숨 같은 건 조금도 내뱉지 않으며.
“어서 와.”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그를 반가이 맞이했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 검은 앞치마를 맨 이는 친구 이현석으로, 밝고 활기 넘치는 성격이었다.
“백시후, 진짜 왔네?”
백시후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사람 좋게 웃는 친구를 향해 묻는 목소리가 고요했다.
“말해 놨잖아, 찾아가겠다고.”
“그렇다고 진짜 올 줄은 몰랐지. 본인 사업하느라 원체 바쁘시니. 와 줘서 고맙다, 코트 벗고 편한 자리에 앉아.”
자리에 앉으라는 말에 시후는 시선을 옮겨 주위를 둘러보았다. 덤덤하던 검은 눈동자에 연민이 옅게 깔렸다. 재즈 음악이 흐르는 바 안에는 손님이 세 명밖에 없었다.
“손님이 많이 없지?”
그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현석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뭐, 개업한 지 한 달밖에 안 됐잖냐.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월세만 세 자리 숫자인 이 가게에서 손님 세 명은 턱없이 부족한 성과였다. 시후는 밝아 보이는 친구의 속이 사실 곪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굳이 입 바깥으로 힘들겠단 소리를 꺼내는 대신 묵묵히 자리를 찾아 앉았다. 굳세게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친구를 존중하는 마음에서였다.
“뭐 먹을래? 메뉴판 보고 골라 봐.”
“……네가 자신 있는 걸로.”
현석은 주방으로 재빠르게 들어갔다. 홀로 남은 시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자신을 맞이하며 눈을 빛내던 친구에게서는 기운이 넘쳐 흘렀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에너지임을 시후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좋아 보이네.”
혼잣말을 읊조리는 그의 눈 밑에는 청회색 그림자가 걸려 있었다. 찬 기운이 묻어나는 코트를 벗는 동작에서도 생기 같은 건 없었다. 고요하며 차분하고, 지친 느낌이 없잖아 있는 움직임이었다.
잠시 후 올리브오일로 맛깔나게 버무려진 샐러드와 함께 와인 한 잔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시후는 글라스 말고 보틀로 달라며 주문을 바꿨다. 가장 비싼 와인 병 주문에 현석은 장난스레 손뼉을 쳤다.
“역시 재벌 3세. 돈 쓸 줄 알아.”
“오버하지 말고.”
덤덤하게 받아치는 목소리에는 당황해하는 티가 없었다. 재벌 3세라는 명칭이 틀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친구도, 시후 본인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원 그룹. 50년 넘는 세월 속 수많은 고비를 헤치며 명실상부 대한민국 톱에 든 기업. 그 거대한 기업을 이끄는 백 회장의 차남이 백시후였다. 현재는 아버지의 지시하에 상원 그룹 계열의 호텔 경영을 이끌고 있는 호텔 상원의 대표이기도 했다. 현석은 시후의 안색을 살피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여기 오려고 괜히 무리한 건 아니지? 연말이라 바쁠 텐데.”
“네 개업 축하도 못 해 줄 정도는 아냐.”
친구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한 빈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바빠도 와인 몇 잔 마실 시간 정도야 있었다.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대신, 시후는 보란 듯이 느릿하게 술을 마셨다. 여유가 묻어 나오는 모습에 현석은 피식거렸다.
“가게 들어왔을 때 뭐 부족한 거 안 보였어? 피드백 좀 해 봐.”
“피드백은 왜.”
“왜긴. 대표이사님이시잖냐. 경영을 누구보다 잘 아실 분이지.”
“이현석.”
시후는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여기선 그런 거 말하지 마.”
“그런 거가 뭐야. 아, 네 지위? 왜?”
왜냐고. 시후는 현석의 해맑은 질문을 천천히 곱씹었다. 마치 입 안으로 들어온 와인을 음미하듯. 덤덤하던 얼굴에 회색빛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일 생각나게 하니까.”
긴 설명이 필요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시후는 ‘대표이사님이니, 경영이니 그런 이야기 듣는 게 부담스럽다. 여기서만이라도 편하게 있다가 가고 싶다’ 등의 덧붙임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상대는 그런 시후의 성격을 이해할 줄도 알뿐더러, 눈치도 빠른 사람이었다.
“얼굴에 아주 힘들어 죽겠다고 써 있네. 뭐, 번아웃이라도 온 거냐?”
“…….”
“지칠 만하겠다. 우성 알파라고 군대도 안 갔잖아. 대학 졸업하자마자 바로 입사했었지?”
시후는 대답하는 대신 음식에 손을 대었다. 묵직해지는 분위기에 현석은 그만 이야기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기가 많으나 그럼에도 적당히 선을 넘지 않는 현석의 배려가 좋았다. 시후가 굳이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 중 하나였다.
시간이 물처럼 매끄럽게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재잘재잘 이야기하던 현석이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래도 곧 손님들 몰려올 거야, 알바생이 오거든.”
“알바?”
“어, 동생 친구인데 애가 착해. 잘생겼고.”
잘생겼다는 덧붙임에 손님들의 몰려듦을 이해했다. 시후는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인 후 바 전체를 감상했다. 구석진 곳에 위치한 피아노는 어두운 조명을 받아 은은한 광택을 뽐내고 있었다. 시후는 별생각 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 피아노 칠 줄 알았나.”
“아니, 전혀. 저건 다른 사람이 칠 거야.”
다른 사람? 아까 말한 아르바이트생을 말하는 것인가. 질문을 담은 눈빛을 던졌으나 현석은 대답하는 대신 웃기만 했다. 크게 궁금했던 건 아니었기에 시후는 금방 관심을 껐다.
“어디 가? 설마 벌써 가는 건 아니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현석이 두 손을 내저으며 막는 시늉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자리가 꽤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반응에 시후의 입가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미세한 변화만으로 차갑던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담배.”
“아아! 다녀와, 빈 접시 치우고 있을게.”
시후는 빈 접시를 부지런하게 치우는 친구에게 잠깐 시선을 두었다. 밝음이 넘쳐 흐르는 현석에게서는 30대 초반의 청년다운 생기가 있었다. 이제 막 개업한 젊은 사장님을 훑던 시후의 이맛살에 힘이 들어갔다.
그도 잠시, 묵묵히 등을 돌려서는 바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코트를 다시 걸치는 남자의 머리 위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쳤다. 머리카락 몇 올이 반듯한 이마를 간질였다. 시후는 흐트러진 머리칼이 나부끼도록 놔둔 채 코트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건물과 건물 사이로 들어간 그의 입에는 담배 하나가 물려 있게 되었다. 시후는 그것을 죽 빨아들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납게 내리던 눈이 어느새 뚝 그쳐 있었다.
시후는 입에 머금고 있던 연기를 뱉었다. 회색 연기가 입김과 함께 섞여 공중 위로 올라갔다.
‘얼굴에 아주 힘들어 죽겠다고 써 있네. 뭐, 번아웃이라도 온 거냐?’
현석이 건네던 말이 아직도 귓전에 뱅뱅 맴돌았다. 친구의 말을 곱씹던 것도 잠시, 시후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주위 사람들도 모르던 제 상태를 단번에 알아차리다니. 눈썰미가 좋은 친구에게 새삼 감탄했다.
번아웃. 현석이 던진 단어는 지금의 시후를 나타내기에 가장 적절했다. 요즘 들어 시후는 모든 일에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일할 때도, 그 외의 일상을 보낼 때도 이렇다저렇다 할 감정이 일어나질 않았다.
재미없다, 모든 것이. 목구멍으로 들어온 연기조차 매캐하게만 느껴졌다.
“……담배만 버렸군.”
그가 나직이 혼잣말하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용 담배 포켓을 꺼냈다. 검은색 바탕에 은색 문양이 새겨진 포켓 안으로 피우다 만 담뱃대를 집어 눌렀다. 그런 시후의 얼굴에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보단 이럴 시간에 현석과 말 한마디라도 더 섞는 게 낫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구두 신은 발을 느리게 움직였을 때였다. 겨울 공기에 식은 귓등에 낯선 소리가 닿았다. 시후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무심결에 상체를 돌린 그가 안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이 가늘어졌다. 시후는 포켓을 쥔 채로 소리 낸 이를 찾았다.
건물의 창문에서 나오는 불빛 아래, 한 남자가 담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연기를 불며 한쪽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신발로 쌓인 눈을 밟는 소리가 정적을 울렸다. 시후는 방금 들은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상대는 반듯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빛 아래 드러난 부드러운 눈매나 말끔한 뺨은 아직 앳된 느낌을 주었다.
시후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 시후의 눈빛을 느꼈던 걸까,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돌렸다.
몇 살일까? 20대 초라기엔 잠잠한 표정이 어른스러웠고, 그렇다고 20대 후반이라기엔 어린 티가 가득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시후는 초면인 남자를 지나치게 꼼꼼히 뜯어봤음을 깨달았다.
그 시선에 불쾌할 법도 하건만, 남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말끄러미 보는 시선을 당돌하게 마주할 뿐이었다. 그는 연기를 길게 흘리며 눈을 반쯤 내리떴다.
“날이 춥네요.”
첫 마디를 뗀 사람은 남자였다. 적절한 거리를 둔 채 남자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온기를 담은 웃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지금 나한테 묻는 건가? 어색한 티 하나 없는 말투가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시후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상대를 가만히 관찰했다.
부조화를 이루는 사람이다. 말끔한 얼굴은 탈선 한 번 안 했을 것 같은 모범생 이미지였다. 좋게 말하면 선하게 생겼고,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하게 생겼다. 그런 반듯한 느낌을 주는 남자의 손에는 다름 아닌 담배와 포켓이 들려 있었다.
“……그래요.”
마침내 시후는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다른 이였으면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와 말을 섞는 건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거기다 상대가 비즈니스 관계도 아니며 앞으로도 만날 일 없는 타인이라면 더욱.
“추운 날이군요.”
그런데도 시후가 대답한 건 남자가 자신처럼 포켓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샌님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흡연자이고, 그러면서 포켓까지 가지고 다니며 깔끔히 뒤처리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나쁘지 않았다. 시후는 방금 든 생각을 곱씹었다.
‘나쁘지 않다, 라.’
갑자기 남자가 발을 디뎌 거리를 좁혔다. 시후만큼 다리가 긴 그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네. 담배 피우기 좋은 날씨는 아니죠.”
다시 말을 걸며 남자는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시원스럽게 휜 입가 옆에는 보조개가 나타나 있었다.
꽃처럼 화사하기 짝이 없는 미소에 시후는 흥미를 느꼈다. 아까보다 더 꼼꼼하게 뜯어보던 시후는 그의 눈매 근처에 점 하나가 찍혀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보조개와 눈물점이라는 특징이 더해진 것만으로 반듯하기만 했던 느낌이 많이 가셨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아니, 남자애는 생각보다 보는 맛이 있었다.
시후는 온순함과 당돌함 사이를 오고 가는 상대의 얼굴을 감상하다 담배 하나를 더 꺼냈다. 아까와 달리 무언가를 입에 넣고 빨아 보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그러자 상대는 큰 몸을 움직이더니 바람을 등지고 섰다. 뭐 하냐는 뜻을 담은 눈빛을 보내자 그는 긴 속눈썹을 천연하게 깜빡였다.
“라이터 켜기 힘드실 것 같아서요.”
눈을 찬찬히 감았다가 떴다 하는 모양새는 아이 같아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다소곳하지만 그다지 낯 가리지는 않는 말투에 시후는 묻고 싶었다. 너 몇 살이니?
남자애는 고개를 살짝 숙이곤 시후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맹랑하다는 느낌은 둘째 치고, 상대가 ‘숙였다’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날 내려다본다고.’
우성 알파 특성상 장신인 시후로서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같은 우성 알파인 친동생을 제외하곤 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우성 알판가? 그러나 코끝을 스치는 건 겨울 특유의 찬 냄새밖에 없었다. 명백히 베타라는 뜻이었다. 그때 상대방이 예의 바르게 한마디 더 했다.
“아니면 제가 대신 켜 드릴까요?”
이번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짧은 반말에도 상대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동자를 여기저기 굴리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자신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면서도 손에는 어느새 포켓 대신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아.”
라이터를 들어 보이는 남자의 안색이 밝았다. 마침내 떠올리게 된 결론이 마음에 든다는 눈치였다.
“저 라이터 잘 켜요.”
“…….”
“바람이 많이 부니까, 돕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왜 굳이. 내가 애도 아니고.’
그렇게 말해서 한 번 이 어린애를 놀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계속 같은 질문을 던지면 당황할 것을 시후는 알았다.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막 입술을 떼었을 때였다.
“아하, 하.”
멋쩍어하는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나직하게 울렸다. 시후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상대의 귀를 주시했다.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도 보일 만큼 귀가 붉어져 있었다.
“…….”
긴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진 시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매서운 바람 때문에 귀가 붉어진 것만은 아님을, 눈치 빠르게 깨달았다.
초면인 주제에. 날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른 채 불에 뛰어든 나방 같은 꼴이 웃긴다. 시후는 잠깐 어울려 주기로 판단을 내렸다. 당돌한 듯 굴어도 붉어진 귀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아니면 짐짓 밝게 꾸민 웃음소리에 수줍어하는 기색이 재밌어서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래요, 그럼 도와줘요.”
시후는 입에 담배를 물며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라이터를 든 상대의 상체가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음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떡 벌어진 어깨와 가슴이 훌륭했다.
‘괜찮은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라이터를 든 손이 움찔거리며 힘을 주었다. 추위에 얼었을 손등 위로 핏줄들이 퍼렇게 섰다.
뒤늦게 긴장한 듯 동요하는 티에 시후는 그만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애티가 풀풀 나는 이 꼬마를 흔들고 싶다는 충동이 다시 치받쳐 올랐다.
“불.”
낮게 단어 하나를 툭 뱉자 석고상처럼 굳어 있던 상대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달각’ 하는 소리와 함께 주황빛 불이 솟았다.
시후는 힘을 줘 단단해진 남자의 손을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달아오른 담배 끝이 발갛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
“…….”
고요한 적막임에도 시후는 상대가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챘다. 능구렁이 같은 놈들만 봐 와서 그런가. 꽤 귀엽게 느껴졌다.
시후는 상대가 라이터를 치우기 직전, 눈동자만 움직여 올려 보았다. 갑자기 자신을 응시할 줄 몰랐는지 남자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아까처럼 웃어 보지, 왜.’
보조개가 꽤 예쁘던데. 유쾌함이 올라온 시후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웃음을 삼킨 그는 먼저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채 옆으로 얼굴을 돌리며 흰 연기를 가볍게 내뿜었다. 바람이 연기를 사방으로 흩어 내며 시후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흰 이마를 가볍게 찔렀다. 어쩐지 거슬려진 시후는 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자신을 말없이 지켜보는 상대에게 짤막한 말을 건넸다.
“그쪽은.”
“네?”
상대의 바리톤 음색은 한겨울 목을 감싸 주는 목도리를 떠올리게 했다. 포근하고 따스하다. 시후는 손가락 사이에 끼어 둔 담배를 들어 보였다.
“그쪽은 담배 안 태울 거냐고.”
뜻을 읽은 남자가 마주 미소 지었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보조개가 다시 드러났다.
“괜찮아요, 전.”
“그래요?”
시후는 특유의 무감각한 음성을 내었다.
“그럼 더는 볼일 없겠네.”
이만 가 보라는 뜻에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묘한 얼굴이었다. 당황했는지 동요하는 눈은 천진무구한 분위기를 내었지만, 그 아래 박힌 눈물점은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순진한 걸까. 아니면, 꽤 까진 애일까.
시후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담배를 뱉었다. 까만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입술 사이로 연기와 함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콜록.”
“이런.”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 시후의 입꼬리가 일직선을 그리며 찬찬히 내려앉았다.
“미안.”
그리고 건조한 사과를 뱉음과 동시에 상대의 한쪽 손을 움켜쥐었다. 라이터를 쥐고 있지 않던 손이었다. 돌발 상황에 놀랐는지 남자가 움찔거리며 붙잡힌 피부 위로 퍼런 핏줄이 돋았다.
“그……!”
싫으면 뿌리치고. 속으로 읊조리며 시후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타인의 피부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추운 야외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얼은 손을 녹여 주겠다는 듯, 시후는 엄지를 세워 살결을 어루만지듯 훑었다. 다정하면서도 어딘지 진득한 면이 없잖아 있는 스킨십이었다. 마치 애무라도 하는 듯이 만지작대며 시후는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아…….”
상대는 손을 뿌리치거나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 대신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귓구멍 안으로 파고드는 소리에 시후는 만족감을 느꼈다. 역시, 목소리가 좋다.
손에 열기를 남기기 위해 시후는 한참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피부를 집요하게 누르고, 손가락 사이를 비벼 대었다.
그러는 동안 상대는 멍한 얼굴로 한참 시후를 바라만 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꼭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놀리는 기분이 들어 묘한 감상이 일어났다.
까진 건 아녔군.
상대를 파악한 시후는 먼저 손을 떼었다. 접촉했던 부위에 뜨거움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시후는 입고 있던 코트에 손을 문대었다. 그러다 어느새 남자가 인상을 쓰고 있음을 발견했다.
“뭐, 하신 거예요?”
조용한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상대는 코트에 문대는 시후의 손에다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시후는 그 손을 주머니 안에 넣으며 대답했다.
“손잡았는데.”
남자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민망한 건가 싶었는데 의외로 상대는 머뭇거림 없이 물었다.
“왜 잡으셨어요?”
이번에는 무덤덤하던 시후의 얼굴이 조금 허물어졌다. 놀라서 쩔쩔매기만 할 줄 알았지, 설마 왜냐고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다.
“……바람이 많이 부니까.”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시후는 그대로 상대의 곁을 지나쳐 걸었다. 쌓인 눈이 밟히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질 때, 상대가 다시 물었다.
“바람이 많이 분다고 제 손을 잡았어요?”
“춥잖아요, 손 좀 녹여 줄까 했지.”
“…….”
“그냥. 돕고 싶어서.”
아까 상대가 했던 말과 비슷했다. 자신을 흉내 냈음을 알아차렸는지, 남자는 헛웃음을 뱉으며 제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하하.”
먼저 자리를 뜬 사람은 시후였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뒤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뒤통수에 꽂힌 시선이 느껴졌으나 굳이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손목에 와 닿는 공기가 어쩐지 덜 차갑게 느껴졌다.
* * *
시후를 싫어하는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성 알파가 그렇게 문란하다며.’
백시후는 우성 알파였다. 다른 이들보다 페로몬이 유별나게 짙으며 번식력 또한 뛰어난 족속. 반감을 가진 자들은 그런 시후를 ‘문란’이라는 단어로 규정하고 빈정댔다.
거기에 시후는 별다른 반감이 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다. 여러 사람과 잤고, 거기에는 한때 자신을 ‘걸레’라고 부르며 혐오하던 이도 있었다. 스스로 다리를 벌리던 상대를 내리누르며 시후는 가볍게 인정했다.
‘그래, 문란하지.’
30대를 맞이하기 직전까지 시후는 셀 수도 없는 이들과 몸을 겹쳤다. 땀 혹은 정액 아니면 페로몬이 묻어나는 접촉은 하나같이 진득했다.
옛 과거의 일들과 비교하면, 오늘 마주 잡았던 스킨십은 평범한 악수에 가까웠다. 손가락 좀 비벼 댄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맞닿았던 손에 열기가 뚜렷하게 남아 사라지질 않고 있었다. 시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제 손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 보았지만 손에 새겨진 감각이 사라지기는커녕 가시처럼 박혀 따끔거리기만 했다.
뒤늦게 아쉬운 감정이 올라왔다. 모처럼 흥미가 일었는데 이대로 끝이 나게 생겼다. 그는 여기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와인 바는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며 웃는 현석의 얼굴이 한층 더 환해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손님들이 많이 올 것이라고 자신하던 현석이 생각났다. 그 이유가 뭐였더라.
“어서 와!”
아르바이트생이 온다고 했었나. 생각을 되짚던 시후의 귓전에 반가워하는 현석의 목소리가 닿았다. 지인이라도 놀러 왔나 싶어 현석 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시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언뜻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꿈틀거리는 안면 근육이나 힘이 들어간 손등은 분명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는 눈썹에 힘을 준 채로 현석 앞에 선 청년을 주시했다.
놀랍게도, 상대 역시 이미 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어쩌면 현석이 아닌 자신한테 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역시나 상대는 놀란 눈을 한 채 보조개가 드러난 미소를 한껏 보냈다.
그 남자애다, 라이터를 켜 주었던.
두 사람이 묘한 시선을 주고받자 사이에 낀 현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냐고? 손가락 장난 좀 친 걸 아는 사이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후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상대가 입술을 떼었다.
“담배 피웠어요, 같이.”
그러면서 남자애는 눈꼬리를 둥글게 휘었다. 해사한 웃음은 그 나이대에서만 나올 법한 맑음이 있었다. 잘생겼다던 그 아르바이트생이 분명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시후의 추측이 맞았다. 남자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옷을 갈아입으러 직원실로 들어갔다. 그런 남자애의 뒷모습으로 많은 손님의 시선이 꽂혔다. 어디를 가나 이목을 끄는 매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후는 닫힌 직원실을 향해 날렵한 턱을 들었다.
“이름 알고 싶은데. 저 애 말이야.”
“아, 이름? 예준이야, 유예준.”
유예준. 부드러운 어감이라 혀를 굴리기 편했다. 시후는 낯선 이름을 입 안에만 넣어 굴려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쟤한텐 말하지 마.”
현석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뭘?”
“내가 이름 물었다는 거.”
시후는 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냥 나에 대해 말하지 마. 내 이름도 알려 주지 말고. 직업은 더욱.”
뻔뻔한 요구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의 이름을 캐냈으면서 정작 제 정보는 막는 자신이 웃겼다. 자신의 모순됨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시후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고는 와인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조명에 반사된 와인이 발갛게 빛을 발했다.
쌉쌀한 맛이 입 안 전체를 촉촉하게 적셨을 때였다. 유예준이 직원실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현석처럼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은 반듯하며 단정한 외모를 돋보이게 했다.
보기 좋네. 그림이라도 감상하듯 무심히 평가하며 시후는 잔을 내려놓았다. 차분한 마음과 달리, 테이블 위에 올라간 손가락들이 뜨거워졌다. 아까 예준의 피부를 어루만졌던 부위였다.
톡, 톡.
열기를 치우기 위해 테이블이라도 두드릴 때였다. 꼭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예준이 바로 다가왔다. 긴 다리를 가진 그는 몇 걸음만으로 시후와의 거리를 좁혀 버렸다.
“여기 손님이셨네요.”
반가워하는 기색이 담긴 목소리가 따뜻했다. 예준은 촘촘하고 긴 속눈썹을 밑으로 깔며 공손하게 덧붙였다.
“현석이 형 친구 되세요?”
‘형’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걸 보아 두 사람은 꽤 가까운 사이가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동생 친구라고 했던 사실이 생각났다. 시후는 몇 초간 바라만 보다가 느릿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낮은 음색은 경직된 점이 없잖아 있었으나, 예준은 당황하지 않았다.
“친하신 것 같아서요.”
눈치 없는 바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시후가 “흠” 하고 소리 내자 예준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덧붙였다.
“친구가 아니면……. 친한 동생 되시나요?”
시후는 웃는 대신 와인을 마셨다. 같잖은 덧붙임에는 응수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예준이 멋쩍어할까 봐 걱정됐는지, 사람 좋은 현석이 대신 장단을 맞춰 주었다.
“친구 맞아. 짜식, 이 와중에 동생이냐고 묻네. 내가 쟤보다 나이 들어 보이냐?”
“…….”
“어어? 왜 아무 말이 없어?”
이러다 민망해지는 건 예준이 아니라 현석이가 되겠다. 친구를 위해 시후는 입을 열어 주기로 했다.
“볼일 봐요, 이만.”
알은체 그만하고 네 할 일이나 하라는 뜻이었다. 그때까지 차분함을 유지하던 예준의 이마에 힘이 들어갔다.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에 서린 건 반항심이었다.
잠깐 식었던 흥미가 다시 올라왔다. 적당히 순해 보이고 적당히 날카로운 분위기가 신선하다.
잠시 후,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유예준이었다. 사장님 친구와 척을 져 봤자 좋을 게 없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는 시후가 말한 ‘볼일’을 하기 위해 걸어갔다.
“이현석, 넌 사람 좋은 게 문제야.”
“어? 왜?”
시후는 멀어져 가는 아르바이트생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옷을 입고 있음에도 드러난 근육이 훌륭했다. 넓은 어깨와 두꺼운 흉통, 그리고 허리에서 엉덩이로 빠지는 선 역시 나무랄 데 없었다.
“나라면 저런 애 직원으로 안 뒀어.”
“뭐가 어때서 그래. 쟤가 얼마나 착한데, 서글서글하고.”
반항 어린 눈빛을 못 봤는지 현석이 두 손까지 내저었다. 시후의 희고 매끈한 이마에 힘이 들어갔다.
‘이현석이 남자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닐 테고.’
남녀 가리지 않는 시후와 달리 현석은 한 여자만 만나 진득하게 연애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현석과 성적으로 얽힌 건 아닐 테다. 친구가 알면 기절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시후는 턱을 괴었다.
술기운이 잔잔하게 올라오자 검은 속눈썹이 점차 묵직해져 왔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독기가 빠지고 대신 나른한 기색이 자리를 잡았다. 멈춰 있던 손가락이 다시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 톡, 톡.
취기가 강해지니 모든 게 귀찮아지기 시작해 왔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모르는 애를 놀리는 것도 이제 즐겁지 않다. 눈을 감으며 시후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이제라. 언제는 즐거웠던 적이 있기는 한가.
심장이 요동치고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동요를 느꼈던 적이 까마득하다. 이대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든, 여기에 남아 있든 자신은 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건조하고, 정적이고, 권태로운 백시후겠지.
그런 시후의 뒤통수를 두드린 건, 예상외로 피아노 음이었다. 거멓게 죽어 있던 눈동자에 빛이 들어왔다.
“?”
갑자기 울리는 건반 소리에 소란이 뚝 멎고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삽시간에 바뀐 공기를 느낀 시후는 피아노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예준이었다. 단정하게 옷을 입은 그는 건반을 하나씩 두드려 보고 있었다. 한 음, 한 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시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피아노 친다는 사람이 쟤였나.’
피아노라니. 음대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오히려 체대생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시후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예준의 손가락 쪽으로 눈꺼풀을 내렸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이 길어 피아노를 치기 안성맞춤이기는 했다. 문득 상대가 어떤 곡을 연주할지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쇼, 대표님.”
연주를 기다리는 시후의 귀에 대고 현석이 장난스레 속삭였다. 회사와 관련된 말은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그새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주의를 한 번 더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한숨 쉬었을 때였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지루함에 처져 있던 입매가 점차 일직선으로 굳어져 갔다. 시후는 피아노 쪽으로 모든 신경을 던졌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마저 경직된 채로.
* * *
취기가 팔꿈치를 타고 온몸 전체로 찌르르 퍼져 나갔다. 시후는 손가락 뼛속까지 스며드는 술기운을 느끼며 잔을 내려놓았다. 시야가 어지럽고 목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정도를 모르고 술을 마셨음을 시후는 쉽게 인정했다. 이렇게 마셨던 때가 언제였더라. 흐릿한 머릿속을 느릿느릿 되짚어 보았으나 정확히 떠오르는 날짜가 없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시후에게 있어서 술은 거래처 사람들을 대할 때나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들을 취하게 해 빈틈을 파고들지언정, 자신이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은 결단코 없었다.
그랬던 시후이니만큼, 무분별하게 잔을 기울인 현재 상황이 조금 신선하게 느껴졌다.
‘왜.’
그는 나른한 기분과 묘한 현기증 속에서 가만히 생각했다. 답지 않게 과음을 한 까닭이 무엇일까. 회사 사람들이 없어서? 친구의 가게이기 때문에? 아니, 그것들도 이유가 맞겠지만 더 큰 원인이 분명 있을 것이다.
“괜찮으세요?”
잡념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시후는 무시하려고 했으나, 어째선지 그 음성이 귓바퀴에 들러붙어 떼어지지 않았다. 그는 귀를 타고 내려오는 간지러움을 이해할 수 없어 하며 고개를 들었다.
“……취하셨어요.”
조용하게 알려 주는 이는 눈물점과 보조개를 가진 청년이었다. 시후는 거기에 특징 하나를 더했다. 눈물점과 보조개를 가진,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
“피아노.”
시후는 단어 하나를 무심하게 뱉은 뒤 잠깐 침묵했다. 솔직한 감상을 꺼내고 싶으나 욕구보다는 거부감이 더 컸다. 취기에 엉망이 된 머리가 과한 칭찬을 남발할 게 분명해서였다.
술이 깬 다음 날, 감성적이었던 자신을 부끄러워할 것임을 시후는 확신했다. 그래서 시후는 다른 말을 꺼냈다.
“음악 전공했어요?”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상대는 눈썹 사이에 힘을 주었다. 찌푸려진 얼굴에 서린 건 민망함이었다.
“네, 전공하고 있어요.”
“……하고 있다고?”
“네.”
“…….”
아직 대학생일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시후는 예준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몇 살일까. 앳된 눈매가 시선을 잡아끈다.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져 있던 시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때, 예준이 한숨처럼 중얼댔다.
“……안 어려요, 저.”
“?”
“몇 살인지 생각하고 있잖아요, 지금.”
그렇게 읊조리는 예준은 아까보다 더 찡그려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것이 어린 취급을 받은 게 꽤 불쾌한 모양이었다.
멋쩍어할 땐 언제고. 시후는 실소를 흘리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으응, 그래요?”
“…….”
조명 때문일까, 내려다보는 예준의 뺨이 붉어진 것 같았다. 시후는 묵직한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였다. 치받쳐 오른 취기에 호흡이 가빠졌다. 입술을 벌린 그는 소리 없이 산소를 빨아 마셨다. 혀 위를 타고 목구멍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탁.
무언가 내려놓는 소리가 시후의 귓전을 두드렸다. 예준이 어느새 물이 담긴 잔을 내밀고 있었다.
“한 곡 더 연주해야 해요.”
엉뚱한 말에 시후는 잔을 받지 않은 채로 올려만 보았다. 무슨 말을 하냐는 시선을 건네자 예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입매 옆 보조개가 보기 좋게 생겨났다.
“제가 챙겨 드릴 수 없단 말이에요.”
“그쪽이, 날 챙긴다고?”
“네.”
“현석이가 있는데 뭐 하러 그쪽이 날 챙겨요.”
예준은 당황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장님 많이 바쁘세요. 손님들 맞이하느라 형 신경 못 써 줄 거예요.”
예상 못 한 호칭이었다.
“형?”
“싫으세요?”
그렇게 말하며 예준은 눈웃음을 쳤다. 선량해 보이면서도 묘한 색기가 도는 미소였다. 시후는 상대의 얼굴에 박힌 눈물점과 보조개가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함을 한 번 더 깨달았다.
“이름 알려 주시면 호칭 바꿀게요.”
어쭈. 시후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꼬마 주제에 여우 짓 좀 하는데.
흥미가 돋았다. 술기운을 계속 불러일으키던 그의 피아노 연주만큼이나 재미있었다. 시후는 다리를 꼬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못 알려 주겠네요. 형이란 호칭, 꽤 마음에 드니까.”
예준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들고 있던 물잔을 내밀었다. 투명한 유리컵에 있던 물이 잘게 찰랑거렸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르고 시후는 오른손을 뻗어 잔을 받았다. 그러나 취한 이는 평범하게 잔을 받아 마실 생각까지는 없었다. 잔과 함께 예준의 손가락까지 만진 건 그 때문이었다.
톡, 톡.
“!”
손톱을 세워 살결을 두드리자마자 잠잠하던 예준이 움찔, 동요했다. 여우는 여우인데, 어설픈 여우구나. 그 점이 꽤 귀엽다.
“고마워요.”
즐거움을 느낀 시후는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제 가족이나 절친한 지인들 외에는 도통 내지 않는 음색이었다.
타인에게 절대 하지 않을 웃음소리까지 흘리고는 시후는 목을 수그렸다. 그리고 예준의 손을 쥔 채로 물잔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잔을 기울이며 물을 받아마시자 예준의 손가락이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시후는 잔에서 입을 떼고는 예준의 손가락들을 감상했다. 길고 잘 뻗은 손가락들은 확실히 피아노를 치기 좋아 보였다. 그는 이 손이 건반을 두드리던 첫 순간의 충격을 되새기며 입술만 달싹였다.
“기대할게요, 다음 곡.”
“……좋아하는 곡 있으세요?”
한발 늦게 질문을 건네는 음색이 살짝 쉬어 있었다. 당혹감인지 아니면 흥분 때문인지, 시후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재즈는 잘 모르는데.”
“전공하는 건 클래식이에요. 재즈를 더 좋아할 뿐이죠.”
시선을 마주하자 예준은 고개를 한 번 끄떡였다. 무엇이든 괜찮다는 뜻이었다.
“……음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라서. 그래도 괜찮다면 피아졸라, <겨울>로.”
“<겨울>.”
“할 수 있어요?”
예준은 어느새 제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둔 물잔과 시후를 번갈아 보곤 알겠다는 표정을 그렸다.
“할 수 있으니까, 형은 물 좀 더 마셔요. 더 취하면 힘들 거예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예준은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다. 계속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은 여전했다. 시후와 맞닿았던 손이었다.
아쉽다는 듯이 행동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시후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예준이 피아노 연주에 한껏 집중할 때, 남은 와인을 마셨다.
더 취하면 힘들 거라니. 그걸 모를 정도로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니란다. 시후는 웃음과 함께 와인을 삼켰다. 그리고 짙어진 술기운을 즐기며 바 전체를 감싸는 음악을 감상했다.
홀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예준에게선 빛이 났다. 길게 뻗은 손가락을 유연하게 움직일 때마다 강약 조절된 음이 터졌다.
한 번 강렬하게 두들기고 난 뒤 예준은 바로 소리를 낮추며 고개를 살짝 젖혔다. 시후는 그가 눈을 감은 채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
분명 곡의 제목은 <겨울>이건만, 예준의 연주에서 배어 나오는 건 여름을 생각나게 하는 열기였다. 시후는 제 귓속을 파고든 음들이 아랫배를 후끈하게 데우는 걸 생생하게 느꼈다.
예준은 다시 건반 쪽으로 몸을 수그렸다. 건반만을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에 서린 건 나른한 흥분이었다.
야하다. 목젖을 보일 정도로 고개를 젖힐 때나, 아니면 지금처럼 건반을 끈적하게 훑는 시선이. 꽤 야릇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시후는 자신이 단단히 취했음을 조용히 인정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를 성적으로 훑고 있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알파 향을 풍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공기에 묻어 나오는 건 우디 향의 제 페로몬이었다. 이 중 오메가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느닷없이 숨이 막혀 쓰러질 정도의 농도였다.
시후는 페로몬을 바로 조절한 뒤 꼬고 있던 다리에 힘을 주었다. 돌처럼 단단한 하반신을 비비자 그 사이에 있던 물건이 빠르게 묵직해져 왔다. 술을 먹었으니 축 늘어져야 정상인 것을, 흥분한 좆은 딱딱하게 곧추세워져 있었다.
그것을 잡아 수음할 정도로 정신이 나간 건 아니었다. 그래서 시후는 예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가만히 몸만 굳혔다. 언젠가 제 물건이 자연스레 식어 가길 기다리며.
* * *
“왜 이렇게 많이 마셨냐.”
카드를 건네며 현석이 웃었다. 옷을 갈아입으러 직원실로 들어간 예준은 아직 나오질 않았다. 직원실로 시선을 보내며 시후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기분 좋아서.”
“안 좋아서가 아니라?”
“…….”
“요즘 많이 힘드냐?”
맨정신이었으면 대답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제 상태를, 그것도 썩 좋다고 보기 힘든 현재를 타인과 공유하는 건 은근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어서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후는 취기를 핑계로 느슨하게 답해 주었다.
“그래, 버거운 건 맞아. 약간이지만.”
솔직하게 답해 올 줄은 몰랐는지 현석이 토끼처럼 눈을 댕그랗게 떴다. 그도 잠시, 무슨 일이냐는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시후는 옅은 미소만 한 번 보낸 뒤 카드를 빼앗듯 가져갔다.
“야야, 백시후. ……시후야!”
문을 열자 등 뒤에서 놀란 목소리가 울렸다. 시후는 문고리를 쥔 채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그래.”
시후는 담담히 덧붙였다.
“때늦은 사춘기라도 왔나 보지.”
그는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곤 가게 바깥으로 나갔다. 다행히 현석은 그를 쫓아 나오지는 않았다. 누군가와 제 상태를 시시콜콜 떠들고 싶지는 않았던 시후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몇 시인지도 모를 밤공기가 차가웠다. 코트와 정장 안을 파고드는 한기 속에서 시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얗다 못해 창백했던 눈 주위가 어느새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때늦은 사춘기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시후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구두로 바닥에 쌓인 눈을 짓이길 때마다 몸이 붕 뜬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올라오는 짜릿함에 시후는 짧게 웃었다.
‘스무 살 애도 아니고.’
술에 취해 실실대는 꼴이라니. 시후는 걸음을 움직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 꼴을,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 상태를 어떻게 바꿀까. 제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지금이 불쾌했다. 이러다 회사에서도 볼썽사나운 모습이 될까, 신경이 바짝 곤두세워졌다.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으로?
“조심해요.”
구두가 얼음 서린 바닥에 살짝 미끄러졌을 때였다. 예상외의 음성이 시후의 귓불을 스쳤다. 시후는 균형을 잃은 제 상태보다 그 목소리에 더 놀랐다. 그러나 겉으로는 건조한 얼굴을 유지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미끄러져요.”
쫓아온 상대는 다름 아닌 예준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옆으로 다가와서는 시후의 팔 한쪽을 움켜쥐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악력이었으나, 어쩐지 얼얼하게 느껴졌다.
“뭐예요?”
시후가 묻자 예준은 긴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찬 공기에 노출되었음에도 뺨과 입술의 생기가 가득했다. 겨울이 아닌 한여름 뙤약볕 아래의 소년처럼 혈색 좋은 모습이었다.
마음에 든다. 긍정적인 감상이 들자 예준의 얼굴 위를 맴도는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시후는 제 팔을 움켜쥔 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서로의 어깨가 닿은 건 시후의 명백한 고의였다.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한데.”
“……퇴근 시간이라서요.”
“으음.”
“나왔는데, 형이 눈에 들어왔어요.”
형이라고 발음하는 입술 모양새가 귀여웠다. 시후에게 ‘형’이라는 친근한 호칭을 부르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들에게는 느낄 리 없는 찌릿한 감정 속에서 시후는 물었다.
“내가 눈에 들어왔다고요?”
“……네.”
팔을 잡은 예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담담한 척 말하고 있지만 꽤 긴장해 있음이 분명했다. 시후는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알코올의 위력에 머릿속이 어지럽고 몸이 둔해져 갔다. 그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예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툭.
이마에 돌처럼 단단한 것이 닿았다. 그것이 예준의 어깨임을 시후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모처럼 취했겠다, 약간의 일탈을 해 볼까. 시후는 20대 때나 해 볼 법한 짓을 벌이기로 했다. 고개를 들어 상대의 목덜미에 코를 갖다 댄 것이다.
“아.”
예준의 나지막한 탄성이 희열을 선사했다. 시후는 고개를 들어서는 상대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역시”
느른하게 읊조리며 시후는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전혀 못 알아차리는 거 보니 베타 맞네.”
“뭘…….”
울림 있는 목소리에 예준의 입가가 달싹였다. 시후는 그쪽으로 찬찬히 눈꺼풀을 내리며 덧붙였다.
“페로몬 말이에요.”
“…….”
“내 페로몬. 지금 장난 아니거든. 알파면 불쾌해했겠고, 오메가면…….”
속삭이는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적어도 지금 같은 반응은 아니겠죠.”
거짓 없는 고백이었다. 짙은 페로몬은 아까부터 쉼 없이 예준의 목덜미를 조르고 있었다. 목젖을 누르고 피부를 지분대며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베타인 상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눈만 크게 뜰 뿐이었다.
페로몬이 통하지 않는 꼬마라. 이건 이것대로 신선하다. 평소 베타에게는 별다른 성욕이 일지 않았던 시후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제 시후의 시선은 예준의 입술 아래 날렵한 턱과 그 아래로 떨어지는 목선을 살피고 있었다. 노골적인 눈빛을 받은 예준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그 솔직한 반응에 등허리가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시후는 잡히지 않은 팔을 움직였다. 희고 긴 손가락이 예준의 손목을 감았다.
“이리로.”
예준은 당황한 티를 내면서도 순순히 시후의 뒤를 쫓았다. 덕분에 시후는 그를 어느 빌딩 사이에 난 어두운 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좁은 길은 어둠이 가득히 드리워져 있었다. 바닥에는 녹지 않은 눈과 담배, 그리고 쓰레기가 어지러이 뒹굴었다.
시후는 제 앞에 있는 빈 캔을 신경질적으로 치웠다. 갑자기 동한 흥분만 아니라면 결단코 들어오지 않을 공간이었다.
더러움에 인상을 쓰던 시후는 곧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오늘따라 안 할 짓만 계속 하네.”
“안 할 짓이요?”
“내가 여기로 끌고 온 이유, 모르겠어요?”
예준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시후는 발치까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얼굴을 내밀었다. 상대의 목 부근에 코를 갖다 대었으나, 옅은 스킨 향을 제외하곤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았다.
베타가 맞긴 맞군. 새삼스럽게 확인한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모르겠으면 이만 가 보고.”
“…….”
“바보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예준은 놀란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모습을 감상하며 시후는 그의 가슴 위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터치에도 예준은 뭐에 찔리기라도 한 듯 상체가 크게 들썩거렸다.
긴장감이 섞인 적막 속에서 예준은 이제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았다. 동요하는 눈꼬리를 살피며 시후는 예준이 별별 상상을 다 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가슴을 짚고 있던 검지와 함께 다른 손가락으로 상대를 가볍게 떠밀었다.
툭.
예준이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시후는 당황한 상대를 봐주지 않고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어느새 예준은 건물의 차가운 벽에 기댄 모습이 되었다. 동그랗게 변한 갈색 눈동자에 여러 가지 빛깔의 감정들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깨달음’이 있음을 시후는 어렵지 않게 읽어 냈다. 모처럼 풋내 나는 반응을 마주하니 웃음이 올라왔다.
“그래, 알아차려야지.”
기특하다는 듯이 속삭이자 예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커다란 손을 들어 제 머리를 헤집었으나 시후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뭘 그렇게 놀라요. 바깥에서 발정 처음 났나.”
“…….”
“그래. 베타니 그럴 수도 있겠군.”
‘발정’이라는 단어에 미간을 찡그리던 예준은 다시 손을 내렸다.
“알파세요? 아니면 오메가?”
“알파.”
시후는 가볍게 대꾸하며 예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목조목 뜯었다. 벽에 기대어 있는 예준은 드물게 잘생긴 남자였다. 우성 알파인 시후보다도 큰 체구는 시선을 사로잡았고, 반듯하며 선한 얼굴 역시 물처럼 말간 느낌이라 좋았다.
‘너무 설익었는데. 먹어도 되나.’
뒤늦게 망설임이 올라왔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기에는 모처럼 취해 있던 참이었다.
시후는 반 발자국 앞으로 내디딤과 동시에 상대의 턱을 잡았다. 손바닥에 닿는 피부는 겨울바람에도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키스는 해 본 적 있죠?”
예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대답 대신 흘러가는 침묵에 시후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것도 안 해 봤냐는 눈빛을 던지자 예준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물들어 갔다.
키스도 안 해 봤다, 이건가? 남과 입술도 비벼 본 적 없는 녀석이 용케 여기까지 따라왔다.
“……첫 키스는 좀 그런데.”
그러자 의외로, 놀란 듯 가만히 있던 예준이 물었다.
“왜요?”
푹 잠긴 목소리에 울컥한 기색이 옅게 서려 있었다. 자신을 애송이 취급하는 게 분한 모양이었다.
“무거워지니까.”
“…….”
“난 가벼운 걸 지향하거든.”
시후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턱을 쥐던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자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가 막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예준이 그의 손목을 쥐고는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서로의 그림자가 겹쳐질 정도로 밀착된 거리였다.
“여기까지 와서 그만하게요?”
조용히 묻는 예준은 아까와 달리 차갑게 굳어 있었다. 무표정해진 얼굴은 선한 미소나 발그레한 붉은 기가 사라지니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었다. 칼처럼 날카로운 인상을 주며 예준은 식어 있던 시후의 손을 주물렀다.
꾹, 꾹.
느릿하게 살결을 누를 때마다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만두려 했던 시후의 생각이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다시금 몸이 달았을 때, 예준은 시후의 손바닥에 제 뺨을 갖다 대었다. 껍질을 벗긴 달걀만큼이나 매끄러운 피부였다.
“가르쳐 줘요.”
“…….”
“키스.”
시후는 눈동자를 움직여 자신을 붙잡은 손을 응시했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손가락들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무겁게 생각 안 할게요.”
“무겁게 생각 안 하겠다고요?”
“네.”
“…….”
“그러니 알려 줘요. ……가볍게.”
시후는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을 정확히 짚어 냈다.
그래, 내가 원하는 건 일탈이다. 첫 키스 따위의 책임이나 뒷감당이 아니라.
시후는 잡히지 않은 손을 올려 엄지로 예준의 아랫입술을 쓸어 주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살덩이가 보드라웠다. 눈꼬리는 사납게 치켜세운 주제에, 여기만큼은 잘 익은 과육처럼 말랑했다.
찬찬히 비비자 예준이 “아” 하고 소리를 내며 입술 사이를 벌렸다. 입술이 만져진 것만으로 느끼는 반응이 시후를 짜릿하게 했다.
“바보는 아니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시후가 감상을 뱉었다. 이어 예준이 뭐라 대꾸하기 전, 서로의 입술을 포개었다. 충격을 받은 건지 상대의 몸이 삽시간에 빳빳해져 갔다.
‘힘 풀고.’
그는 손가락으로 예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뜻을 전했다. 그리고 검고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타인의 입술을 즐겼다. 한겨울의 공기와 달리 따뜻한 열기를 품은 살덩이가 마음에 들었다. 시후는 몸으로 상대를 누르며 입술을 계속 지분거렸다.
“음.”
이번엔 시후가 낸 신음이었다. 마치 만족한 고양이가 ‘그르릉’ 하고 내는 소리와 흡사한 반응이었다. 입술이 닿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짜릿할 줄은 몰랐다. 한창 성욕을 주체 못 하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미소가 피어올랐다.
‘욕구 불만이었나.’
언제 섹스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페로몬에 휩쓸려 짐승처럼 뒤엉켰던 감각만 어렴풋하게 생각날 뿐.
그 순간 예준이 몸을 밀며 행위를 정지시켰다. 본격적인 키스를 시작하려고 했던 시후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혀를 촉촉하게 적신 타액을 삼키며 눈을 떴다.
“잠, 깐, 만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예준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들썩이는 얼굴이 토마토 색깔이었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반응에 시후의 눈빛이 짙어졌다.
어지간히 경험 없는 티 낸다. 동정일 게 분명한 모습이 재미를 불러일으켰다. 시후는 “하”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취향은 아닌데.”
입술을 겹치는 순간에서야 떠오른 옛 파트너들. 그들은 모두 시후보다 훨씬 체구 작은 오메가들이었다. 날씬한 허리를 움켜쥔 채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는 섹스는 꽤 나쁘지 않았다. 그들 특유의 향은 알파를 부추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 옛 파트너들과 달리 예준은 평범한 베타였다. 시후의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고, 아랫배를 들쑤시며 욕구를 자극하는 페로몬 같은 건 없었다. 거기다 장신인 시후보다도 키가 큰 데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허벅지는 외양적 취향과도 거리가 멀었다.
“흠…….”
그런데 왜일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꾸 마음이 동하는 건. 시후는 “이상하지” 하고 읊조린 뒤 헐떡이는 예준의 몸을 힘껏 밀었다. 한참 숨을 고르고 있었던 예준은 휘청거리며 벽에 부딪혔다.
“미안.”
가볍게 사과한 뒤 시후는 다시 입을 겹쳤다. 느릿했던 처음과 달리 두 번째 입맞춤은 거칠었다. 말캉한 입술을 거침없이 빨며 시후는 긴 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비싼 정장으로 감싼 다리가 닿은 곳은 예준의 고간이었다.
당황했는지 예준이 입을 더 크게 벌렸다. 시후는 그 안으로 곧장 혀를 집어넣었다. 혀끝을 곧추세워 숨겨져 있던 살결을 거침없이 탐했다. 뜨겁고 질척한 안 역시 말랑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누군가의 혀가 들어왔을 리 없는 그곳을 혀로 진득하게 쓰다듬으며 손을 움직였다.
스윽.
시후는 그렇게 돌처럼 굳은 예준의 몸을 매만졌다. 가쁘게 들썩이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가 미끄러지듯 올라가선 목덜미와 턱을 쓸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키스는 멈출 기미조차 없었다. 서로의 혀가 뒤엉켰다가 떨어질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아.”
숨을 고르기 위해 시후가 먼저 입술을 뗀 순간이었다.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 예준이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두꺼운 겨울 코트를 입고 있음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세찬 악력이었다.
그런 채로 예준은 제 쪽으로 시후를 잡아당겼다.
“지금 뭐 하는…….”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려는 순간에 아랫입술에 혀가 닿았다. 능숙하던 시후와 달리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제 피부를 핥는 순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강한 쾌락이 훅 치받쳐 올랐다.
돌발 상황에 상대의 고간을 희롱하던 시후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몸 구석구석 퍼지다 못해 뼛속까지 스며든 성감이 신선했다. 고작 입술이 핥아진 게 다다. 그런데도 러트라도 온 듯 몸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좋은데?’
생각보다, 훨씬 더.
시후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상대를 살폈다. 두 눈까지 꾹 감은 채 제 입술을 핥는 예준의 얼굴은 여전히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킥, 하고 웃는 대신 시후는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자신을 탐하는 붉은 혀를 가볍게 빨아 주었다.
“!”
장난스럽게 빨자마자 예준이 물가로 나간 물고기처럼 크게 꿈틀거렸다. 흥분과 긴장감으로 범벅이 된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했다. 하아, 하아. 난잡한 숨소리들이 서로의 귓등을 날카롭게 긁었다.
“어때요.”
물기 어린 숨, 끈적한 열기, 그리고 나른하지만 명확한 발음으로 이루어진 질문이었다. 시후는 손으로 제 아랫입술을 닦으며 덧붙였다.
“뭐 좀 배웠어요?”
“음, 잘 모르겠어요.”
순순히 대답하던 예준은 갑자기 미소를 그렸다. 긴장과 놀람이 사라지고, 대신 기뻐하는 감정이 얼굴에 서리기 시작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동자와 폭 패인 보조개를 보인 채 예준은 뜻밖의 발언을 던졌다.
“한 번 더 하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 봐라. 어이없는 것도 잠시, 폭포 같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시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아하하” 하고 웃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요새 가슴을 꾹 누르던 압박감이 어느새 사라졌다. 이유 모를 후련함에 시후는 입매를 시원하게 당겨 올렸다.
“당돌하네, 예준 씨.”
이름을 불러 주자 갈색 눈에 빛이 반짝, 하고 떴다.
“그래, 한 번 더 하죠. 아무쪼록 배운 게 있으면 좋겠…….”
‘배운 게 있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가르친 보람이 있지’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피로로 무거워진 속눈썹을 깜빡이기도 전 별안간 벽에 몸이 부딪쳤다. 쿵, 마찰음이 귓등을 요란하게 때렸다.
돌발 상황에 시후는 상대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뭐 하는 거냐는 뜻을 담은 눈동자에 곧 느낌표가 떴다.
예준은 오랫동안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뱉고 있었다. 미세하게 움찔거리고 있는 입술에 흥분한 기색이 풍겼다.
신경이 곤두선 것 같은 얼굴을 마주하며 시후는 발정 난 개를 떠올렸다. 덩치 크고 사나운, 누군가의 몸에 올라타 허릿짓을 하고 싶어 안달 난 수캐.
바로 다음 순간, 수캐 같은 아이는 그에게로 몸을 밀착하며 두 손으로 뺨을 잡아 올렸다. 그대로 냅다 입술을 붙이는 행동에 시후의 손가락이 꿈틀, 움직였다.
예준은 여전히 시후의 얼굴을 고정한 채로 키스를 이어 갔다. 말랑한 제 것과 시후의 것을 비비며 흥분을 부추겼다.
젖어 들어가는 입술을 느끼며 시후는 천천히 몸에 힘을 풀었다. 제멋대로 굴게 놔두자, 예준이 곧장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첫 키스인 주제에 대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시후가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불처럼 뜨거운 것이 느릿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이곳저곳을 탐했다. 그때까지 여유를 지키고 있었던 시후의 신경이 점점 곤두세워지기 시작했다. 안을 들쑤시고 혀와 혀를 뒤엉키고, 타액을 주고받는 행위가 꽤 진득하니 농밀한 구석이 있었다.
“잠깐, 음.”
산소가 부족해진 시후가 먼저 입술을 떼며 숨을 토했다. 흐트러진 숨소리를 몇 번 내기도 전에, 예준이 다시 입을 겹쳤다. 그러더니 혀끝을 살짝 세워서는 입천장을 주욱 긁었다. 곧추세워진 것이 여린 살갗을 문지르자 머릿속이 거품처럼 부글거렸다.
시후는 제 얼굴을 감싼 예준의 손목을 잡아챘다. 단단하게 붙잡은 악력이 강했으나, 예준은 기어코 입맞춤을 끝내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시후를 흥분시켰던 행위를 한 번 더 할 뿐이었다.
“!”
욕이 목구멍 위로 난폭하게 튀어 올랐다. 그조차 모조리 유예준에 의해 먹혀 버려 시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급한 김에 손톱이라도 세워 피부를 찌르자 예준이 눈을 뜨고 시후를 살폈다. 상대가 입천장을 긁어 주는 걸 좋아하는지 관찰하는 의도가 선명하게 서려 있었다.
제 얼굴을 집요하게 훑는 눈빛에 시후는 이맛살을 구겼다. 예준은 여전히 눈을 마주한 채 혀로 입천장을 긁어 댔다.
‘뭐야.’
얼굴 붉히던 때는 언제고 끈질기게 상대방의 성감을 찾는 게 능숙하다. 첫 키스라더니 거짓말이었나? 아니면, 익히는 게 빠른 편일까? 벌써 느끼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새 정장 바지 안에 감춰진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시후는 예준의 머리를 잡아서는 뒤로 당겨 젖혔다. 아까와 달리 예준은 순순히 입맞춤을 그만둔 채 제 목울대를 보여 주었다. 긴 목을 치아로 뜯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 속에서 시후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첫 키스라더니. 거짓말인가 보네요?”
여전히 머리가 붙잡힌 채로 예준은 하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신 시후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들을 찬찬히 움직였다. 피부를 지분거리는 체온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처음 맞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의외로 웃음이 서려 있었다. 머리채가 잡힌 건데도 좋다고 웃는 예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후가 인상을 쓰는 사이 다음 덧붙임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그런 말 하시는 거 보니, 저 꽤 잘했나 봐요.”
그 말에 시후는 잡고 있던 머리를 놓아주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색 머리카락이 새집처럼 부풀어 올랐다.
“잘난 척은. 그 정돈 아니에요.”
시후는 방금까지 격렬한 키스를 나눈 사람답지 않게 차분한 음성을 내었다. 입천장이 성감대임을 찾아낸 건 제법이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어설프기 짝이 없는 키스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마음속의 또 다른 자신이 시후에게 속삭였다. ‘그 별것 아닌 입맞춤에 속옷까지 젖은 건 뭔데.’
생각에 잠긴 시후의 뺨으로 입술이 다가왔다. 부드러운 살덩이는 선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피부를 배회하는 애무에 시후는 “윽” 하고 신음하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목덜미에 닿는 입술이 온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아.”
탄성을 내던 예준은 곧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도 약하구나.”
시후는 실소를 뱉었다.
“입천장과 목덜미. 또 어디가 약해요?”
“그걸 내가 말해 줘야 할까요?”
“…….”
목선을 훑던 입술이 돌연 귀로 다가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치고는 적극적인 스킨십이었다. 설마 제 귀를 노릴 줄은 몰랐던 시후의 어깨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럼 제가 찾아낼게요.”
귓바퀴와 귓불을 훑는 숨결이 자극적이었다. 시후는 피하려고 했으나 예준의 입술이 먼저 닿았다. 이러다 혀라도 귓구멍에 들어올 기세에 신경이 곤두섰다.
“거긴 건들지 말고.”
“왜요? 여기도 약한…….”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는 예준의 턱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거칠게 입을 맞추며 혀뿌리를 뽑을 기세로 빨아 대었다. 귀엽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꺾을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시후의 코끝에 낯선 향이 다가왔다. 긴 속눈썹 아래 있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시후는 격렬하게 퍼부으려던 입맞춤을 멈춘 채 후각에 집중했다.
‘향?’
시후는 먼저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난잡한 숨소리를 내는 상대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흥분하면 어떤 눈빛을 하게 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젖은 입술이 어떤 식으로 달싹이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어떤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
“…….”
“형?”
예준의 코앞으로 얼굴을 내민 시후는 그러나 제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옅게 나던 향이 어느새 싹 사라져 있었다. 남은 건 한기 어린 정적과 예준의 당황한 읊조림뿐이었다.
“왜 그래요?”
“착각인가.”
그 말에 예준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기색을 읽은 시후는 고개를 저었다. 이마 위에 있던 머리카락 몇 올이 부드럽게 나부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뭘 찾고 있는 눈이던데요?”
“내가?”
“네.”
그렇게 대답한 예준은 손을 올려 똑같이 시후의 뺨을 감쌌다. 한겨울 추위에 오랫동안 노출되었던 사람답지 않게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시후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떴다 사라졌다. 자신이 발정 났음을 감추지 않으려는 꼬마는, 확실한 베타였다. 저토록 달아올랐음에도 시후를 어쩌려는 페로몬 향 같은 건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 착각이 맞았나 보다. 아무래도 술기운에 꿈과 현실을 오락가락하는 게 분명했다. 홀로 판단을 내린 시후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음” 하고 예준의 신음이 귓가에서 나직하게 울렸다.
다시 시작된 키스에 시후의 등줄기가 오싹, 하고 떨렸다. 그는 남아 있던 취기가 머리 꼭대기로 확 치받쳐 오름을 느끼며 원하는 대로 혀를 놀렸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할 때, 크고 단단한 손이 허리를 받쳤다.
키스에 몰입하고 있던 시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순순히 허리를 잡혀 준 채 입을 더 크게 벌렸다. 제 혀 위에 닿는 말캉한 것이 지나치게 뜨거워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잘하네.’
가르칠 맛이 나는 애다. 그 생각을 끝으로 시후는 눈을 완전히 감았다. 암흑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와 그를 삼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