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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남편-367화 (367/370)

〈 367화 〉 367화

* * *

그 뒤에 내가 한 일이라고는 별거 없었다. 조금 더 게으름을 부리며 뒹굴뒹굴하거나, 로로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마야와 니아에게 간식을 주거나, 시오니스 자매들을 상대하거나, 멜로니를 돌보거나, 어찌 따져보면 내 손자인 셈이나 마찬가지인 바록과 바쿠의 아이가 잘 자라는지 구경하러 가보거나.

뭐, 그런 일을 하며 지냈다.

굳이 특별한 것이 있다면, 역시 아리스에 대한 일이었을 거다.

대충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아리스를 찾아갔더니 나를 본 아리스가 냅다 껴안으면서 울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덕에, 아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전했을 때 에루나가 그토록 톡톡 쏘아댄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설마하니 그 아리스가 나를 좋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야, 상태창을 통해서 보았던 그녀의 호감도는 언제나 바닥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근데 그게 어디까지나 내가 마왕이라고만 여겨서, 필사적으로 날 싫어하려고 했던 거였단다.

철이 들 무렵부터 천신교의 성녀로서 임명된 그녀였다.

그것이 자의가 아니었더라도, 아리스는 스스로를 성녀로서 알고서 자랐고 성녀답게 성장했다.

선하고, 올곧고, 악인을 베는.

당연히 마왕으로 알고 있었던 나는 악인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당시의 나는, 부덕한 자의 효과로 선한 자일수록 나에 대한 호감도가 뚝뚝 떨어지는 형편이었다.

그녀의 호감도가 항상 바닥이었던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근데 웬걸, 진짜 마왕이 따로 있었고 더군다나 그 마왕이 천신교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그 자신도 검은 성녀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왔던 이였다. 그리고 내가 그 마왕과 싸우다가 영영 깨지 못할 수도 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걸 들었을 때, 그제야 아리스는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렸다고 했다.

싫어해서 미안했다고, 오해했다고 미안하다면서 사과하며 오열하는 아리스를 품에 안고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할 여자가 또 하나 늘었다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미 그 전에도 몇 번이나 안았던 아리스를 아, 그랬니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일들이 있었다.

짧은 유예시간.

아내들이 보옥들을 천공성으로 옮기기까지 걸린, 일주일 남짓한 유예시간을 나름대로 알차게 보낸 셈이었다.

그리고.

우우우웅...!

눈앞에서 저마다의 영지 깊숙한 곳에 있었던 보옥들이, 모두 한데 모이자 서로 공명하며 더더욱 많은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지나치게 많은 마력에 드래곤들인 아내마저도 주위에 보호막을 펼쳐야만 여기에 있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나는 저마다의 기운을 흘리는 여섯의 보옥을 바라봤다.

마력들을 뿜어내는 보옥들은, 사실상 영구하게 마력을 뿜어내는 영구기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어떠한 대가도 없이, 그저 계속해서 막대한 양의 마력을 뿜어내는 보옥들은, 그것으로 하여금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든 망가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 보옥들이 유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해서, 단 여섯의 보옥으로 하나의 세계마저 지탱하고 있을 정도의 에너지 기관인 셈이었으니 과연 신들이 남기고 간 물건다웠다.

하나같이 조각나서 그 힘이 모호했던 편린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을 마주하자, 정말로 저걸 내 안에 담아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뭐.

별수 있나.

“루시아.”

“네, 그럼. 이지경님...”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마지막까지 반대했던 루시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방법이야 있을 수도 있겠지.

적어도, 나나 아내들만이라도 이 세계를 뜬다는 방법이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이 세계에 넘어왔던 마법진을 사용해서, 도로 내가 있던 세계로 도망친다거나 하는 방법이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다음은?

멸망하는 세계에서 도망친다고 한들, 단지 그뿐이었다.

처음 수천 년은 그래도 괜찮을 거다.

내 곁에 아내들과, 내 아이들이 같이 있어 줄 테니.

하지만 그 다음 수천 년은?

또 그 다음 수천 년은?

남는 것은, 애매하게 육체만이 신이 되어버린 나 홀로, 그렇게 영원을 살아갈 뿐인 미래뿐이었다. 그렇게 머지않은 미래에는 나는 나 스스로를 죽이고 말 거다.

무엇도 남지 않은 미래를, 마냥 홀로 영원히 지새우는 것은 사양이었으니.

그런 미래는 사양이었다.

이왕이면 좀 더 욕심부려서, 다 같이 해피 엔딩을 보는 편이 좋을 테니까.

뭘, 내가 신이 된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전능한 신이 된다면, 멸망할 예정인 이 세계도 구하고 결국은 필멸자에 불과한 아내들도 나와 마찬가지인 몸으로,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불로불사 같은 걸 주거나 하는 방법이 있겠지.

어디까지나,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였지만ㅡ

그 외에 남은 게 죄다 베드 엔딩이라면, 그나마 가능성이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싶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내게 다가온 루시아가, 천천히 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 루시아네스 파라모아에게 주어진 업. 창천으로부터 주어진 권리를 여기에 있는 이지경에게 양도한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선언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본래 루시아에게 이어져 있던 보옥과의 연결이 내게로 옮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대로라면 드래곤이 드래곤에게. 아직 보옥의 주인이 살아있을 적에 다음 보옥의 지배자에게 권리를 양도할 적에나 하는 행위를. 드래곤이 아닌 나에게 하는 것이었지만.

딱히 문제없이 루시아가 거느리던 보옥은 내게로 이어졌다.

아니,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내게 보옥이 이어지자 욱신, 무언가 커다란 것이 돌연 몸에 박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무거워서, 단지 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게 당연한 거였다.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많은 마력을 뿜어내는 것이다. 단 여섯이면, 세계마저도 지탱하고 유지하도록 하는 힘을 가진 신물이었다. 그것의 제어권을 가져왔는데 무겁지 않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런 것을 루시아가 여태껏 짊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이제라도 이걸 내가 대신 지게 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크리샤.”

“곧바로 괜찮겠어?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 이 바보야.”

“아직 괜찮으니까. 그래도 힘들면 말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그렇다면야.”

크리샤는 루시아처럼 말로 나를 설득하려 들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말했다. 어차피 이제 시간은 많으니까 좀 더 나중에.

적어도 아이들이 태어나고ㅡ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는 괜찮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건 꽤나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나도 내 아이가, 적어도 곧 태어날 듯한 아이샤를 보고 가도 상관없지 않나 싶었으니까.

제일 먼저 내 아이를 갖게 된 크리샤였다. 아직 인간일 적의 나와 드래곤인 크리샤 사이의 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크리샤의 아이라서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이상할 정도로 성장이 빠른 아이샤는, 벌써 곧 있으면 태어날 것으로 보였다.

아마 다음 달이나 그다음 달 즈음이면 태어나지 않을까 싶었다.

크리샤를 닮아서,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아이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그리고... 막상 그런 아이샤를 보고 나면, 나는 도망쳐버릴 것 같았다.

내 아이를 보게 되면, 지금처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일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질 것 같았다.

세계를 구하고 자시고, 그딴 것보다는 내 자식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하물며, 그것이 결국에는 아스라이 흩어질 뿐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조금만, 조금만 더...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고, 그대로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크리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내 말에 크리샤는 울었다.

한참을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바보, 멍청이, 그렇게 말하며 울던 크리샤는 내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정말로 바보 같아.”

지금처럼, 언제나처럼 나를 바보라 불렀다.

“그래, 널 엄청나게 사랑하는 바보 맞아.”

“...멍청이.”

그렇게 말한 크리샤가 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여기부터가 고비였다.

원래 보옥은, 하나의 드래곤이ㅡ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힘을 가진 드래곤이라고 해도 고작 하나만을 거느리는 게 한계였다.

그 한계를 깨기 위해서, 금기를 저버려서 탄생한 것이 마왕이었고. 그 마왕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마계에 버려져서, 그들이 보옥을 두 개 이상을 거느리는 게 가능한지는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애당초, 두 개 이상의 보옥을 거느리는 게 정말로 가능한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즉, 하나를 떠안는 건 가능할지언정 두 개부터는 전무후무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나, 크리샤네아 슈페리아에게 내려진 업. 대지로부터 주어진 권리를 여기에 있는 이지경에게 양도한다.”

꾸드득...!

주먹을 움켜쥐었다.

처음의 하나까진 별문제 없었는데, 두 개째의 보옥이 내게 이어지자 내 몸을 저마다 붙잡고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천과 대지.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두 영역을 지배하는 보옥이, 서로를 밀어내고 거부했다.

길들지 않은 말들이 내 손에 감긴 저마다의 고삐를 채간 채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것처럼. 겨우 두 개째인데도 불구하고 온몸에 주어지는 부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고삐를 잡아 쥐면 그만이었다.

조각을 움직여서 보옥과 나 사이에 연결된 끈을 동여매고, 움켜쥐자 한참이나 씩씩대며 날뛰던 기운들이 서서히 잦아 들어갔다.

그래, 그렇게.

날뛰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응, 다음. 아르카, 부탁할게.”

내 말에 다가온 아르카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아.”

나를 바라보는 녹색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네가아, 만약에 잘못되기라도 한다며언... 나는 그대로 영원히 잠에 들거야아. 알겠지이?”

그건, 정말이지 무서운 협박인데.

언제나 잠이 많은 그녀였지만, 그게 영원하다는 건 이야기가 달라졌다.

“걱정하지 마,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반드시 깨우러 와줄 테니까.”

“...그래애.”

꾸욱, 하고 내 가슴을 부여잡았던 아르카가 살짝 몸을 떨다가ㅡ 이내 입을 열었다.

“나, 아르카네아 브란시아에게 주어진 업. 청록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를 여기에 있는 이지경에게 양도한다.”

주르르륵, 내 안에서 이어진 보옥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창천과 대지, 그리고 모든 청록.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세 개의 영역이 내 안을 채워갔다. 뿌리가 대지에 내리고, 줄기를 하늘 높이 뻗어 보낸다.

마땅히 그래야 할 이치대로. 서로가 밀어내던 영역을, 뿌리와 줄기가 잇는 것이 보였다.

그로써, 나는 틀을 완성하고.

그로써, 내 안에는 작은 세계가 만들어졌다.

땅이 있고, 하늘이 있고, 그 사이를 잇는 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아샤, 아냐.”

어딘가 아득하게만 느껴져서, 조금 멍하니 아샤와 아냐를 부르자 내 곁으로 다가온 푸른 머리카락의 쌍둥이 소녀가 보였다.

...흐릿하게, 그저 푸르게만 보이는 둘이 꼬옥하고 나를 끌어안았다.

“오빠...”

“괜찮아...?”

언제나 무구했던 둘은, 그렇기에 가끔씩 나를 곤혼스럽게 했던 둘은 내가 신이 되니 마니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다.

그녀들은 너무나도 깨끗해서, 백지나 다름없어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본래 하나여야 했으나, 둘로 나뉘어버린 소녀들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나 성장이 느려서. 그렇기에 그녀들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은 아직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는 소리에 둘은 한참을 나를 말렸다.

그런 위험한 것보다, 우리랑 놀아달라고 둘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둘의 배 속에 있는 아이.

내 아이.

네레시우스와 에우리비아.

흐르고, 흘러가는 물처럼. 그 둘의 어머니인 아샤와 아냐처럼.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며 지은 그 아이들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 둘의 미래를 내가 정해버리고, 끝을 매듭짓는 짓 같은 건 나는 할 수 없었다.

손을 뻗어서, 마냥 푸르른 둘의 머리 위에 얹었다.

스윽, 스윽하고 조심스레 쓸어주며 말했다.

“부탁할게. 아샤, 아냐.”

그리고, 내 세계에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뿌리는 흐르는 물을 머금고, 푸른 잎사귀를 틔었다. 대지는 물에 적셔져, 더더욱 비옥해져 갔다. 창천은 물을 끌어 올려, 비로 흩뿌리고. 때때로 바람과 폭풍, 벼락을 내리쳤다.

그로 하여금, 내 세계는 더욱 완전해져 갔다.

그러나 이 세계는 너무나 추웠다.

온기가 없어서, 다만 너무나 추운 세계였다.

딱딱하게, 내 몸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내 몸이었던, 내 세계였든 간에, 나는 굳어가고 있었다.

내 세계는 작지만, 그렇기에 너무나 연약했다.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것이 내 안의 세계의 시간인지, 나 자신의 시간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다만 이대로, 굳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 르네.”

어렵사리 입술을 움직여서 카르네를 불렀다. 무언가가 내게 다가와, 그대로 나에게 안기는 것이 느껴졌다.

따듯했다.

이 온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 몸이 망가졌을 때, 추위에 떨던 나를 꼭 끌어안아서 온기를 전해주었던 이의 것이었다.

카르네.

카르네오스 듀락시아...

투정 많고, 그만큼 정도 많았던 어설프지만, 사랑스러웠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내 장난에 항상 골탕먹으며 울쌍을 지었던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미안한 것이 참 많았다.

여러모로, 그녀에게 못 해준 것들이, 다른 아내에 비해서 아주 많았으니. 그러나 그녀는, 내게 투정을 부릴지언정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고마웠다.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의식은 분명히 온전한데, 내 의식의 대부분이 내 안의 세계를 보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추위에 떨던 내 세계에 온기가, 불꽃이 피어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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