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화 〉 366화
* * *
그렇게 이주가 흘렀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샤르를 안거나 그런 샤르가 지쳐서 쓰러지면 혼자서 멍하니 뒹굴거리는 무척이나 게으르고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딱히 전이랑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생활을 보낸 것 같지만 조금 달랐다. 그래도 그땐 인간적으로 무언가 하는 척이라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었으니. 아무튼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당연히 생기기 마련이었다.
새근새근...
나를 껴안은 채로 잠에 들은 샤르를 바라봤다. 그녀의 뱃속에서 작은 기운이 꿈틀거렸다.
안타깝게도 신의 힘은 유전되는 건 아닌 모양인지 평범하다면 평범했다.
다소 너무 건강해 보이긴 했지만.
내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자신의 주위로 마력을 퍼트리며 꼭꼭 숨으려 드는 것이 귀여웠다.
그래 봤자 숨을 곳이라곤 한정되어있는 데다가 내 눈을 피해서 숨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벌써부터 마력을 다루기 시작하는 것이 대견스러울 따름이었다. 스윽, 하고 내가 기운을 뻗어 보내서 그런 아이를 어루만졌다.
조심스레, 하지만 애정을 담아서.
처음에는 낯선 내 기운에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그것이 자신의 아비임을 알아차렸는지 얌전해지는 녀석이 보였다. 이윽고, 내 기운의 옆에 착 달라붙은 채로 잠에 든 것처럼 조용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기운을 거둬들였다.
딱히 내가 해를 끼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들, 내 기운은 아직 여리기만 한 아이에겐 지나치게 커다랬다. 아주 잠깐이라면 몰라도 오래 곁에 둬서 좋을 건 없겠지.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손을 뻗어서 샤르를 살짝 안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샤이나, 샤이나로 할까.”
풀네임은 샤이나로나. 태어날 샤르의 아이가 아들이든 딸이든 어느 쪽이든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샤르비오나, 부동하는 얼음이라는 뜻을 가진 샤르의 아이였지만, 거기서 따온 샤를 붙인 샤이나는 수줍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로나, 배려라는 의미를 담은 단어까지 뒤에 붙이자, 모두 합쳐서 수줍은 배려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 지어졌다.
내가 쳐다보자 꼭꼭 숨으려 들다가도, 쓰다듬어주자 내 곁에서 잠든 녀석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이걸로 여덟이 넘는 아이들의 이름을 지은 셈이라 그런지 금방 이름을 짓게 돼서 조금 뿌듯해졌다.
아직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해준 거라곤 이름을 지어주는 것뿐이긴 했지만, 뭐 그런 거야 차근차근 해나가면 되는 거니까.
차근차근.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해내가면 그걸로 됐다.
“...샤이나?”
들려온 샤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리자 졸린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샤르가 보였다.
“아, 미안. 내가 깨웠어?”
으응, 하고 고개를 저은 샤르가 내 품에 얼굴을 비벼왔다. 그런 샤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니 샤르가 하암, 하고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그보다, 샤이나라니?”
아주 살짝, 얼굴을 찌푸린 샤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질투하는 걸까.
샤이나, 여자 아이의 이름으로도, 남자 아이의 이름으로도 들리는 이름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다른 아내들과 달리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툴러서, 그저 살짝 인상을 찡그리는 정도로 질투를 드러내는 샤르가 귀여워서, 그런 그녀를 살짝 끌어안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 이름, 샤이나로나로 하려고. 어때? 괜찮아?”
“......샤이나로나.”
그런 내 말에 찡그렸던 인상을 풀고선 이름을 되뇌며 중얼거리던 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은 이름.”
다소 멍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직 잠에서 덜 깨서 그런지 내가 갑자기 아이의 이름을 지은 이유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질투한다고 생각했던 그 약간의 인상도, 그저 졸려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인데...
여느 때랑 마찬가지로 일어나자마자, 졸린 눈을 한쪽 손으로 비비면서도, 다른 손을 뻗어 드래곤 슬레이어를 어루만지는 샤르를 보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잠을 자는 시간을 빼면 꼬박 내게 시달려왔으니 행동이 몸에 배는 거야 어쩔 순 없겠지만.
안 그래도 꾹 참고 있는 건데 괜히 자극을 주면 더 참기 힘들어지는 법이었다.
손을 뻗어서 그런 샤르의 손을 잡았다.
“...으응? 왜 그래?”
평소랑 마찬가지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애무하던 중에 저지당하자 샤르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샤르, 뭔가 달라진 거 없어?”
“...달라진 거?”
고개를 갸욱이며 그렇게 묻던 샤르가 조심스레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샤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혹시, 나... 생긴 거야?”
그렇게 묻는 샤르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내가 붙잡고 있던 손을 그녀의 배에 가져다대자,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샤르가 이내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응, 그렇구나. 내 아이... 샤이나로나...”
한참을 그렇게 자신의 배를 쓰다듬던 샤르가 입을 열었다
“...넌, 어때?”
“뭐가?”
그런 내 물음에 우물쭈물하던 샤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시선을 내리깔며 샤르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네... 아이를 가진 거... 넌, 기분이 어때?”
그런 뜻으로 한 말이었나.
나는 샤르의 말을 들어서야, 그녀가 어째서 이런 걸 묻는지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세대의 드래곤.
지금 남아있는 드래곤들과 달리, 진정으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전 세대의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필요하기에 낳아진 드래곤들이었다.
애당초 이런저런 이유로 서서히 수가 줄어들어, 마침내 멸종의 앞에 섰던 그들이었다. 마왕의 저주가 쐐기를 박기는 했지만, 그 전부터 멸종위기였던 셈이었다. 덕분에 남아있던 드래곤들은 필요에 의해서 아이를 가졌고, 필요에 의해서 아이를 낳았다.
다음으로 의무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단지 그런 이유로.
샤르의 아비와 어미 또한 그랬다.
내가 본 샤르의 가장 어릴 적의 기억은, 그녀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샤르에게 금제를 거는, 그녀의 아버지의 모습이었으니까.
‘샤르비오나. 나의 딸이여. 부동하는 얼음이여. 그 이름대로 너는 만일을 대비하거라. 우리가 이제껏 그래왔듯이.’
스스로 제 자식의 감정을 봉인하며 그리 말하는 샤르의 아버지의 모습을, 나 또한 샤르에게서 받아든 기억을 통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수천 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 그토록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그것이 그녀가 품고 있는 가장 강렬한 기억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어째서 샤르가 이러한 것을 묻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말했다.
솔직하게. 내 마음을 샤르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샤르, 네가 내 아이를 가진 것이 무척이나 기뻐.”
“...기뻐?”
그래, 그렇게 말하며 샤르를 다시 품에 안았다.
꼬옥, 강하게 안아주었다.
“......”
그리고, 말없이 그런 내 포옹을 받아들이는 샤르에게 속삭였다.
“언젠가 태어날 그 아이를 안아줄 생각만으로, 훗날 그 아이가 커서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주는 것을 듣는 생각만으로, 그 아이가 더더욱 자라서, 언젠간 자신의 몫을 하는 것을 지켜보게 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나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뻤다.
분명 그 모든 나날이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자식이 그러하듯, 내 자식 또한 내 속을 박박 긁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게 있어선 그저 좋은 일이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샤르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고마, 워.”
당연한 것을 가지고서 그리 말하는 샤르의 등을 토닥거렸다.
“뭘, 나야말로 고맙지.”
이윽고, 내 품에 얼굴을 묻었던 샤르가 그대로 다시 잠에 든 것이 보였다.
상당히 피곤해 보인다 싶었는데 잠깐 정신이 든 것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그런 샤르를 침대에 눕혔다.
내 팔을 붙잡은 채로 잠을 자는 샤르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에루나, 거기 있지?”
그렇게 말하고서 아주 잠깐 기다리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도 좋아.”
끼익, 하고 문이 열리고 들어온 에루나가 나랑 샤르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그나저나 샤르 아가씨가 잠에 든 사이에 저를 부르시다니 드디어...”
“그런 거 아니니까 옷 벗지 말고.”
“그렇습니까? 그럼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게 말하고서 아쉽다는 표정도 없이 도로 벗으려던 시녀복을 입고서는 내 말을 기다리는 에루나에게 말했다.
“그냥, 뭐. 다들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다들... 입니까?”
“그래, 다들.”
내가 꼬박 얼음 속에 갇혀있던 이주, 그리고 신의 육체를 얻고 깨어나기를 하루. 거기에 온종일 샤르를 안으며 방에만 박혀있던 이주까지.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으니 딱히 무슨 일이 생겼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물론 알고자 하면 언제든 알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뭔가 좀 그랬다.
알고자 하면 그저 알아버린다는 것은, 아직 영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었다.
전지하다는 것은, 너무나 쓸데없었다.
모르는 것을 안다는 과정같은 것이 없이 쑤셔지는 정보들은, 너무나 표리되어있어서 금새 의식의 밑으로 가라앉아버리니까.
거대한 그릇, 그 밑으로 하염없이 가라앉아버리니까.
거기엔 어떠한 감흥이나 감동도 없었다. 그저, 아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니까, 말해줄래. 에루나?”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얼음에 갇혀있으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드리면 되는 겁니까?”
“아, 뭐. 겸사겸사 그래 주면 좋겠고.”
이건 나도 좀 궁금했다. 내가 모르는 것들도 있을 테고.
내 영역이라고 해봤자 아직은 천공섬과 기껏해야 란자카 왕국 정도에 걸친 것이 전부라서, 아무리 나라도 전부 아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내 대답에 에루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주인님께서 가장 궁금해하실 제국에 관한 것입니다만... 얼어붙은 도시와 주인님의 일로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마물들의 시체 탓에 마왕 그 자체가 헛소문이였다는 것으로 조작하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그렇기에 마왕 그 자체를 조작해서 이를 아리스에게 마무리시키는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마물이 상당한 숫자가 있었기에, 그중 적당히 강한 마물을 마왕으로 꾸미는 것은 그다지 어렵진 않았습니다. ”
“...아직도 남아있었어? 그리고 그걸 아리스가 처치했다고?”
그때 싹 다 죽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때 멜로니, 아니 마왕도 급하게 나왔던 모양새였고. 그게 전력은 아니었다는 거겠지. 그나저나 약한 마물이라고 해도 상당한 수준일텐데 그걸 아리스가 처치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네, 다소 도움을 주긴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아리스가 홀로 처치한 셈은 맞습니다. 덕분에 일이 편했습니다.”
그런 내 의문에 대답하듯 이어지는 에루나의 말에 납득했다.
사실상 아내들이 지원해준 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대충 어딘가에 처박혀있던 검이나 갑옷을 아리스에게 주는 것만으로도 남아있는 머물 정도는 가뿐하게 해치울 수 있었을 거다.
“그나저나, 편하다니 뭐가?”
“용사의 후예이자 400년 만에 재차 강림한 마왕을 죽인 용사라는 이름값은 여러모로 이용가치가 높았으니 말입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정신적 지주, 천신교와 갑작스레 등장한 마물들... 혼란스러운 와중에 인간들을 규합시키는데 충분했죠. 그 덕에 현재, 아리스는 라이어스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추대된 상황입니다. 어디까지나 추대된 상황이고, 아직 황제가 죽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아리스 또한, 제국의 혈통을 이은 방계의 가문의 영애이고 마왕, 실례. 멜로니가 그렇게 되고서 무너진 천신교의 중심과 함께 동요하던 세력들을 그대로 삼킨 드네아 공작가의 힘이 있으니 큰일이 아니면 그렇게 되겠죠.”
“오...”
그건 참... 출세했다고 해야 하나, 독박을 썼다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다.
애당초 아리스의 어머니인 앨리시스가 멀쩡하니 살아있기도 하고, 최상위 검주의 반열에는 들었어도 초월자인 앨리시스보단 턱없이 약한 그녀가 굳이 용사가 돼야 했을 이유는 하등 없었다. 더군다나 마왕으로 위장한 마물을 처치하고서 그 덕에 황제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황제 같은 건 귀찮다고 딸한테 냅다 떠넘겼을 앨리시스가 떠올라서 무심코 쓴웃음이 나왔다.
제 자식을 아끼기는 해도, 그래도 자신의 흥미가 우선인 미친년답다면 미친년다운 일이었지만.
“그래서, 아리스는 어쩐대?”
“그건 주인님이 하시기 나름일 것 같습니다.”
내가 뭘?
그렇게 묻는 얼굴로 에루나를 보자, 에루나는 여느 때와 같이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아리스에게 주인님께서 무사히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님께서 무사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주인님의 곁으로 돌아오려고 하겠죠.”
그런가?
그토록 날 증오하던 아리스였다. 내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돌아오거나 할 리는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혀를 차지는 않을까 싶었다. 목숨 하난 질기다고.
“...어째서 아리스가 굳이 마물을 처치하고 다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주인님?”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보는 에루나가 어쩐지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였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리스를 위해서 그냥 알리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네, 내버려 두면 알아서 남은 마물들을 악착같이 쫓아가 정리해주니 차라리 그편이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조금 그런데.
어찌 됐건 멜로니를 거두기로 한 이상, 그녀가 아직 마왕이었을 적에 저질렀던 일들도 내가 책임지는 게 옳았다.
죽은 인간들마저 살려낼 수는 없을지언정, 멜로니의 죄가 더욱 늘어나는 것까지는 내가 막아주는 게 옳았다.
그러니 마땅히 내가 해야 했던 일들을 아리스가 대신하는 건 조금 그랬다.
“지금 아리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그런 내 말에 에루나가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가보시려는 겁니까?”
“그래, 겸사겸사 남아있는 마물들도 정리하고.”
그런 내 말에 에루나가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감히 조언 드리자면, 지금 당장 찾아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건 왜?”
“며칠 전, 트라우마를 통해 정신을 공격하는 마물이 아리스에게 주인님의 형상을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르카 아가씨가 건넨 세계수의 투구 덕에 정신 보호를 받고 있어서 별문제는 없었지만, 지금 찾아가시면 그때의 마물과 비슷한 것으로 오해할 겁니다.”
어...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나저나 왜 그놈의 마물은 굳이 날 아리스한테 보여줬을까.
아리스한테 내 모습을 보여줘봤자 좋다고 칼을 휘둘렀을 텐데.
“...더군다나 지금의 주인님을 보면, 제가 아리스의 입장이었더라면 속이 터졌을 것 같으니 다소 시간을 두시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어째 오늘따라 에루나의 독설이 아주 따가웠다. 이유모를 에루나의 말에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그런 나를 보며 하아, 하고 한숨을 뱉은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말해봐야 그녀가 좋아할 리도 없겠죠. 이건 넘어가기로 하고, 그 다음은... 바록과 바쿠가 천공섬으로 아주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으응?”
별일이야 있었겠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소 뜬금없는 바록과 바쿠의 독립 이야기에 내가 눈을 깜빡였다. 그야 뭐, 천공섬이나 천공성이나 거기서 거기, 엎어지면 닿는 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천공성에 남아있는 수많은 방을 사용하고 있던 둘이 아예 천공섬에서 살겠다는 건 의아스러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에루나가 말했다.
“바록과 바쿠의 연인이었던 산악 엘프 여덟이 모두 아이를 가져버려, 그를 책임지기 위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여덟?
“...어, 음... 내가 알기론 둘뿐이지 않았나?”
바록이랑 바쿠, 둘 다 산악 엘프들과 사귀는 거야 알고는 있었다.
내가 직접, 그 둘의 연인이었던 두 산악 엘프를, 워낙에 바록과 바쿠와의 신장 차이가 심하다 보니 여러모로 애쓰라는 의미로 가신으로 삼아주기까지 했으니 당연했다. 근데 그게 왜 여덟으로 늘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그런 나를 보던 에루나가 말했다.
“주인님을 닮은 모양이지 않겠습니까?”
날 닮았다고, 그게 왜 늘어나는데?
둘 다 자식으로 여기고는 있다고 한들,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그것마저 닮을 리가. 있구나.
바록과 바쿠, 둘 다 내 가신이었다.
더군다나 내 영향으로 반거인족이라는 새로운 종으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했다. 내 영향으로ㅡ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음마가 되어버렸던 에네스타나 시오니스 자매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나야 넘쳐나는 성욕을 억누르면 그만이었고, 억누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에네스타나 시오니스 자매도 내가 감당하고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바록과 바쿠는 이야기가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런가.
그래서 마구 몽둥이를 휘둘렀나.
그래서 각자 네 명씩, 여덟으로 늘어나 버렸나.
뭐, 아내가 많아도 그 둘이나 그 아내들이 행복하다면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아내만 일곱에, 책임져야 하는 여자는 거기서 다시 여섯이 추가되어야 하는 내가 그 둘에게 뭐라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로서 약간의 조언은 해줘야겠지.
...뭐든 공평하게 하지 않으면 등짝이 남아있지 않을 거란 정도의 조언 정도는 해도 될 것이다. 그 두 녀석, 아무래도 영 여심에 둔감했었으니.
“그 다음으로, 로로는... 요즘은 크리샤 아가씨와 함께ㅡ”
이어지는 에루나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잔뜩 있었구나.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내가 없는 사이에 생긴 여러 일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지켜야 할 세계였다.
이것이 내가 지키고자 하는 세계였다.
그에 대한 걸 들으면서, 나는 재차 각오를 다졌다.
“이상으로, 끝입니다.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십니까?”
“아니, 됐어. 고마워, 에루나.”
그렇게 말하자, 그런 나를 바라보던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주인님께서 돌려주신 드래곤 하트로 새롭게 만드는 중인 몸이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곧 있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형편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래?”
나 때문에 로리한 체형이 되어버렸던 에루나였다. 전처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좀 더 나아진다는 모양이니 다행이었다.
“그거 다행이네.”
“네, 주인님께서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네 몸인데 네 마음에 들어야지 내 마음에 들어서 뭐하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야 내 마음에 들면 좋기야 하겠지마는. 그런 표정을 짓자, 나를 보던 에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가슴의 문제입니다만. 어떤 편이 좋으십니까?”
“...내 세계에는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어. 많으면 많을수록, 크면 클수록 좋다는 뜻이지.”
“그 말을 남긴 자는 주인님의 세계에서 살던 현자였던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큰 것은 작은 것을 겸한다는 말도 이쪽에 있으니.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는 에루나를 마주보며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샤와 아냐, 샤르 그리고 로로에게 들키면 아마 크게 혼이 나겠지마는. 마침 샤르도 곯아떨어진 상태고 아무 문제도 없었다.
나와 에루나 사이의, 완전한 비밀이 성립하고 나서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연보랏빛의 눈동자가 보였다.
“왜 그래, 에루나?”
“아닙니다. 주인님, 부디 기대하고 기다려주십시오.”
“...그래.”
에루나가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지야 알았다.
애당초, 신이 된다는 것 자체가 도박수나 마찬가지였다. 드래곤들이, 샤르가 계획을 꾸렸을 당시에도ㅡ 신의 그릇이 성공적으로 완성된다고 해도 새로운 신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한없이 희박했다.
즉, 지금의 나도 실패할 가능성은 잔뜩이란 소리였다.
“기대하고 있을게, 에루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서 내 마음은 변치 않았다.
“...그러니, 에루나. 모두에게 전해줘. 이제 슬슬 시작하자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