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 365화 [부동하는 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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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하는 얼음, 샤르비오나 크락시아.》
“샤르비오나. 나의 딸이여. 부동하는 얼음이여. 그 이름대로 너는 만일을 대비하거라. 우리가 이제껏 그래왔듯이.”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이름을 붙이시며 말했던 그것으로, 나의 운명은 정해졌다.
그 모든 은색용이 그랬듯이.
드래곤들은 저마다 다른 특징을 타고났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정해지는 역할들이 있었다.
금색용.
바람과 번개, 그리고 저 머나먼 곳에서 내리는 거대한 운석까지.
창공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재현하는 마법들과 빼어난 자기통제력을 타고나는 그들은 대대로 모든 드래곤들의 로드를 맡아왔다. 설령 로드급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모든 금색용의 지혜는 언제나 존중받아왔다.
흑색용.
대지와 공간, 그중에서 빼어난 자들, 로드급에 이른 자들만이 다루는,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시간마저 역행시킬 수 있는 마법까지.
하나만으로도 강력한 속성의, 공간과 시간 마법을 다루며, 대지와 같은 굴강한 육체와 힘을 가진 그들은 언제나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렇기에 가장 날카로운 창이 되어서, 언제나 전투에 있어서 선봉에 섰던 자들은 대부분이 흑색용이었다.
녹색용.
순식간에 거목을 자라게 하고, 일반적인 나무 그 이상의 강도를 지니게 하는 등, 식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을 타고난 녹색용들은 그 힘만으로 따지자면 여섯 색의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뿌리와 같이 굳건하게 드래곤들을 지탱해오던 자들. 대부분이 다루는 식물 마법을 통해서, 세계 곳곳에 뿌리내린 세계수에 관여할 수 있던 그들은 언제나 드래곤들의 뒤를 지켜왔다.
때때로 세계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초월자나, 괴물들의 영웅. 이레귤러라고 불리는 이들을 가장 먼저 찾아내고, 자처하여 그런 그들의 피를 손에 묻히고, 목줄을 채우던 그들이 없었더라면. 이 세계는 진작에 더 많은 혼란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적색용.
모든 것을 태우는, 모든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숨결을 뿜어내는 이들. 이들이 토해내는 숨결은 하나같이 위태롭고 강력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스스로조차도 함부로 내뱉지 않았다.
한번 내뱉어진 숨결은, 그 자신조차도 쉽게 꺼트릴 수 없기에,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것을 태울 때까지 영원히 타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드래곤들의 적에게는 설령 그 자신마저 불탈지언정 숨결을 아끼지 않았던 자들. 온몸에 투기를 두르고, 휘두르는 거인과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이들 적색용들이었다.
어지간한 고위 마법조차도 통하지 않는, 천성적으로 마력에 저항하는 투기를 타고나는 거인들에게 거의 유일하게 피해를 줄 수 있던 것은, 적색용들이 토해내는 영원히 타오르는 업화였기 때문에, 그들의 숨결은 가장 많은 거인과 그들 스스로를 죽였다.
청색용.
바다 그 자체를 움직일 정도의 강력한 물 마법과 치유 마법을 다루는 청색용들은 가장 드넓은 영역을, 바다를 총괄하며 관리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다루는 물 마법은 바다에서는 이루 말할 필요가 없이 강력했기에, 깊은 바닷속에서 살아가는, 드래곤에게조차 위협이 될 수 있는 수많은 괴물을 억누르고 통제해왔다.
평화롭기 그지없어진 와중에도, 끊임없이 들끓는 무수한 괴물들을 관리하며 종으로 부려온 청색용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이 세계는 더욱 오랜 전쟁에 시달리고, 더욱 많은 생명들이 죽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은색용.
우리는 타고난 얼음 속성의 마법들을 다뤘다.
그리고, 제약을 통해 마력을 저장하는 마법을 다뤘다. 그것은 흑색용이 다루는 시간과 공간 마법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마법의 궤를 달리하는 특별한 마법이었다.
그렇기에, 은색용에게 주어진 역할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감정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희로애락, 그것은 많은 마력을 저장해둘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대가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은색용은 성장해감에 따라서 차례대로 자신에게 제약을 걸어갔다.
감정 다음에는 감각을.
감각 다음에는 마력 그 자체를.
그다음으로는 말, 언령 그 자체를 제한하고.
끝내는 자신의 자아마저 제한했다.
그리고, 마침내 드래곤에게 있어서도 해결하기 버거운 시련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스스로가 제약을 걸어가며 저장해둔 마력을 대가로 이를 이겨내 왔다.
일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은색용 하나하나가 자신들이 치러온 대가로 하여금 대마법에 이르는 마법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고, 대부분의 시련은 이러한 은색용들의 대비로 인해 어떻게든 이겨내올 수 있었다.
그래, 그렇기에.
나를 제외한 유일한 은색용이였던 내 아버지도 그 의무를 다했다.
우리들의 멸종을.
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 스스로 수천 년간을 살아가며 마력을 담아온 심장을 우리에게 내놓았으니까.
아버지를 설득할 필요조차 없었다.
수천 년을 살아가는 드래곤일지라도, 결국에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생물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그 수천 년을 살아온 고룡이었고, 머지않아서 자연스레 죽음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보다 젊은 세대의 드래곤들인 우리들의 요구를, 그저 들어주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은색용이었기에 그랬으리라.
어쩌면, 끝내 스스로의 자아마저도 제약하셔서, 그때의 아버지는 누군가 필요로 여긴다면 그 힘을 내놓는, 그저 단순한 도구 같은 존재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렇게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은.
끝끝내 죽음을 맞이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내게 아무런 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저주였다.
태어나는 순간 감정을 제한했을 텐데도.
담담하게,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심장을 비틀어 짜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분명, 그러한 감각조차도 제한했을 텐데도.
이유 모를 통증은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설령 그것이 의무였다고 할지언정, 어떻게 그렇게 선뜻 자신의 심장을 내놓을 수 있는 거냐고. 설령 당신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예정이었다고 한들, 어째서 좀 더 살아가고자 하지 않느냐고.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을 묻고 싶었다. 스스로도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알 수 없어질 만큼, 아주 많은 것들을.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에게 묻고 싶기에, 말을 꺼내기 위해 앞으로 나온 나를.
그가, 아버지가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심장을 잃고 죽어가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에게도 자신과 같은 역할을... 그러한 역할을 바라듯 그저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인 그 시선은, 그 수많은 묻고 싶은 것들을 입 밖으로 낼 수 없게 했다.
추위를 느낄 리가 없는 몸일 텐데도, 몸이 떨릴 정도로. 그 시선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마침내 그 눈동자에서 생기가 가시고 나서야, 그제서야 나는 주저앉았다.
“...샤르비오나.”
그런 나를 아네모네스가 미안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머뭇거리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죄송...”
“...됐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자, 그 시선이 거둬지고나자ㅡ 떨리던 몸도 가라앉아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의 죽음 또한 슬프지 않았다.
슬픔을 느낄 수 없었기에 그렇다고 한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사과하지마. 아네모네스.”
네가 필요로 했기에,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는 그녀의 사과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죽음으로 하여금 그 쓰임이 다하면 족하다고 여겼으리라. 나 또한 그녀의 사과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샤르비오나.”
“...그 이상은.”
움찔하고, 나와 시선이 마주친 아네모네스가 몸을 떨었다.
“나를, 우리를 모욕하는 거로 알겠어. 아네모네스.”
“...네, 알겠어요. 샤르비오나. 그럼...”
마법진을 준비하죠.
그렇게 말하는 아네모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걸음을 옮겼다.
쏴아아ㅡ
모든 드래곤들의 죽음이 그러하듯.
아버지의 육신이 마력으로 변하며 흩어지는 것이 등 뒤로 느끼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마법진을 만드는 데는 자그마치 20년이 흘렀다.
실존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외차원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있는 차원을 연결하는 마법은, 그야말로 대마법 중에서도 최상위에 올려놓아야 할 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차원과 연결하는 것만이라면 어려울 것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연결한 차원에서 반드시 구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 우리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적당한 생물이라는 조건이 하나 추가되는 것만으로도 마법진의 난이도는 터무니없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년에 걸쳐서 수많은 차원을 헤집은 끝에 우리는 마법진을 통해서 넘어온 하나의 물건을 얻을 수 있었다.
동그란 원반 모양의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인공적인 형체의 물건이었다. 그 자그마한 것에, 미세한 크기로 이루어진 집적된 회로만 해도, 이것을 만들 정도 수준의 지성체가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되는 생물이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딱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지성체인 것은 아니었지만 지성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의 차이는 명백했다. 적어도 상대가 생물이라는 범주에 있다면, 지능이 높을수록, 그리고 그 지성의 결과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해당 개체의 크기나 가지고 있는 능력의 수준은 얼추 추측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물건이 그러한 추측의 도움이 되는 물건인 건 확실했다. 이 물건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크기의 물건을 사용할 법한 생물이라면, 최소한 우리 세계의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와 같은 형태의,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나 드워프, 엘프보다는 더 높은 수준의 지성을 지닌 이들이 분명했다.
그 정도의 지능을 갖춘 생물이라면, 적어도 우리가 부여할 예정이었던 종족변환 마법에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지능은, 대부분이 고도로 발달한 영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니.
설령 그 세계에 마법이 존재하지 않더라고 해도, 차원을 넘어오는 도중에 영혼이 뭉개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차원과 차원의 사이를 연결하는 마법진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필요한 것은 너무나 많았다.
우선은, 마력의 문제였다.
자그마한 원반에 불과한 것을 넘어오게 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마력이 소모되었는데, 하물며 그만한 지성체의 영혼을 통째로 이곳으로 옮기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실패는 용납될 수 없었고, 우리는 선택해야만 했다.
“뭐, 이럴 때야말로 제일 먼저 나서는 게 언제나 우리였으니까. 필요한 거라면 별수 없지.”
카이네르야는, 고고한 마지막 흑색용은 그렇게 말하고서 제일 먼저 전생의 마법을 펼쳤다.
남은 것은, 그녀의 힘과 지식을 이어받은 알과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그녀의 육신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수천 년을 산 드래곤이었다.
비늘부터, 드래곤 하트, 뼈와 살 그 모든 것이 엄청난 마력을 품고 있는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차례대로, 우리는 해당 차원에서 제각각, 다른 물건이나 생물들을 소환했다.
소환할 때마다 그녀가 이 세계에 남기고 간 것들이 사라졌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나야. 이 내가 두 번째인 것도 자존심이 상하니까 후딱 끝내주지.”
카르디에마, 항상 서두르기만 했던 붉은용은 먼저 떠나가버린 카이네르야가 남긴 알을 슬픈 눈으로 보며 그렇게 말을 하곤 전생의 마법을 펼쳤다.
남은 우리는, 카르디에마가 남기고 간 것을 통해서 계속해서 마법을 실험했다.
“그나저나, 소환할 매개체는 뭐가 좋을까? 괜히 애먼 걸 소환해버리면 안 되잖아?”
그렇게 말했던 아일라아드는, 맨 처음으로 소환했던 원반를 보더니 말했다.
“저거,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딱 봐도 무언가에 쓰이는 물건 같은데. 저 모양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상대가 마법을 전혀 모를지도 모르니, 저 원반을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 마법이 알아서 발동하는 식으로...”
몇 가지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마법을 다시 다듬은 아일라아드는 만족스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 먼저 간다.”
그렇게 또 하나.
남은 우리는 떠나보낸 그리며, 다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얼추 완성된 마법진은 더이상의 실험이 필요하지 않았으니,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남은 우리가 아직 알에 있을 때, 그리고 아직은 연약한 헤츨링일 때 우리를 보살필 가디언이 필요했다.
“이번은 내가 할게, 슬슬... 쉬고 싶었으니까.”
우리는 테메테네스의 심장과 뼈, 그리고 아직 남아있던 동료들의 것을 통해 하나의 골렘을 만들었다.
수백 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걸릴지도 모르는 세월 동안 우리를 지켜줄 가디언을, 스스로 성장하는 골렘을 만들었다.
“에루나 투아레. 이 골렘의 이름은 에루나 투아레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스스로를 가꾸는 골렘, 준비하는 시종이니. 그럼 샤르비오나.”
아네모네스는 나를 바라봤다.
우리들의 마지막 안배.
어쩌면, 도중에 무언가가 잘못될 수도 있었으니.
세월을 지새울수록, 더더욱 많은 마력을 저장해둘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은색용인 나야말로 마지막 안배로서 적격했다.
“...당신에겐, 여러모로 미안했어요. 하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아네모네스 역시 전생의 마법을 펼쳤다.
남은 건, 이제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남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마저도 환생하기 위해 알로 돌아간다면, 아무리 지식과 힘만이 아니라, 모든 기억을 온전하게 이어받을지라도 나약한 헤츨링의 몸이 되는 것은 변함이 없었으니. 아네모네스의 육신으로 에루나의 서브용 골렘을 작성하고, 우리가 깨어날 동안 보옥들이 날뛰는 일이 없도록 조정하고, 그리고...
어째서 나만이.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어째서 나만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차례대로 떠나간 동료들을, 형제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온 이들의 시체를 헤집고, 심장을 마법진의 연료로 삼고, 재료로 삼아 가디언을 작성해가면서.
...어째서 이러한 기억들을 오직 나만이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떠올랐다.
차갑고, 무정한 은빛으로 빛나는 그 두 눈동자.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의무를 다했고, 나에게도 그 의무를 바랬던 아버지의 눈동자가 잊히질 않았다.
그는, 아마 나를 자신의 딸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이성의 괴물이라고도 불리는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자식과 부모의 정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필요에 의해 희생할지언정, 그를 슬퍼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묻고자 했지만, 묻지 못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제가 태어난 것이 기쁘셨던가요?”
차마 그 대답을, 그토록 차가운 눈으로 날 바라보는 아버지에게서 듣는 것을 할 수가 없어 묻지 못했던 그 말이 입에 맴돌았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대답을 해줄 이는 이미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한 번이라도, 나를 딸이라고 여기신 적이 있으셨나요?”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걸로, 끝.”
마지막으로 마법진의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 위에 놓여있는 알들을 바라봤다.
나보다 먼저 떠나간 그들은 이제 마법진을 통해 소환할 준비가 마칠 무렵에나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럴 것이다.
“에루나.”
스윽, 하고 곁으로 다가온 골렘이 보였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홀로 있었는지, 기억은 없었다. 다만, 그동안 곁에 있던 골렘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 자아조차 지니고 있지 않은 그녀였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스스로 자아를 만들어낼 그녀였다.
설령, 지금의 기억은 갖고 있지 않을지라도. 내가 깨어난 다음에도, 그녀는 있을 것이 분명했다.
“너는... 너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해.”
희생 위에 쌓아온 우리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희생으로써 다시 살아남고자 하는 너무나도 빈궁하고, 잔혹하며,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신을 만든다는 터무니없는 일을 하고자, 우리들의 멸종을 막고자, 애먼 차원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던 이를 부르고, 그를 통해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그가 이 세계를 위해 희생할 이유는 그 무엇도 없는데도.
그런 주제에, 그런 우리가 만들어낸 골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스웠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말했다.
그건 내 욕심이었다.
내가 바란, 나였을지도 몰랐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가 바라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로 그것이 내가 바랬던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저 물끄러미 나를 보는 에루나에게 말했다.
“...그것이, 설령 우리를 배반하는 일이 될지라도.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니까. 너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아마, 그녀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나는 환생 마법을 준비했다.
“......”
가만히, 그런 내 눈에 고개를 끄덕이는 보랏빛 머리카락의 골렘이 보였다.
그리고ㅡ
마침내 마법진을 통해 그가 넘어왔다.
이지경이라고 밝힌 그는, 당초 우리가 계획했던 것과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이성을 잃고, 우리를 덮쳐서 아이를 만드는 것에 푹 빠졌어야할 그는, 이상하게도 영 엉뚱한 제안을 우리에게 해왔으니 말이다.
“......”
그러나 나는 침묵했다.
마법진이 발동하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을, 우리를 보살폈던 보랏빛 머리의 골렘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네가 그런 거야?’
계획이 틀어졌음을 알았지만, 나는 지켜보기로 했다.
그것이 우리가 만들고, 내가 스스로 선택하라고 했던 골렘이 한 일이라면. 마땅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기에, 언제나처럼.
나는 지켜볼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