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화 〉 3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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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처음부터 그런 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즉, 애당초부터 내 몸 자체가 편린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있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는 거다.
내가 모르던 사이에.
그렇게 준비가 되어있었던 거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방법은 있어요. 단지, 우리가 관여할 수 없는, 타력에 의한 방법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자, 존재할 수는 없는 자. 우리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그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과거를 보던 중에 듣게 되었던, 전대 드래곤들이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나누던 드래곤들의 과거.
드래곤들의 멸종이 아닌, 세계의 멸망에 대해 의논하던... 지금의 아내들의 전신이기도 한 전대 드래곤들의 이야기가.
어렴풋하게 뭔가 있을 것 같다고만 생각만 했던 게, 이쯤이 되면 힌트가 너무 많아서 모른 척 할래야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전제를 바꾸면 모든 것들이 맞물리게 된다는 소리였다.
드래곤들이 원했던 것이, 드래곤들의 멸종을 막는 데 필요한 다른 차원의 남성이 아니였다면?
“아니, 그건 아니겠지.”
마왕의 저주는 거짓이 아니였다.
마왕의 저주을 해결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지껏 내가 알고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이고, 진짜로 날 소환하게 된 이유가, 목적이 따로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대체 뭘까?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그들이 원하던 결과물이 나 자신이였으니.
나 자신이 그들이 원했던 것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ㅡ신의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 그 자체.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듯이, 전제를 바꾸는 것만으로 이야기의 전말이 대충 그려졌다.
마왕의 저주로 멸종할 위기에 처한 드래곤들.
당연히 드래곤같은 존재들이 가만히 멸종을 기다리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멸종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마왕의 저주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 건 당연한 수순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과정에서 밝혀져선 안 되는 진실을 알아버렸다.
이 세계가, 신들이 떠나간 시점에서부터 멸망이 확정된 세계란 진실을.
얼마의 유예가 남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멸망 앞에 놓인 세계의 주민들이 자신들이란 걸 말이다.
멸종과 멸망은 당연히 이야기가 다른 법이였다.
종의 멸망과 세계의 멸망은 단위 수부터가 달랐다.
설사, 드래곤이 멸종한다고하더라도... 이 세계는 크나큰 재해가 있을지언정 어떻게든 남아있을 것이다.
400여년간, 드래곤이 이 세계에 없던 시간 동안 혼란이 있었을 지언정 이세계가 망하지는 않았으니.
결국, 세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드래곤의 멸종은 좀 규모가 큰 변화가 있을지언정, 기껏해야 하나의 종이 멸종했을 뿐인 이야기란 소리였다. 드래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거인들과 마찬가지로, 드래곤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뿐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세계 자체가 멸망해버린다면...
그건 정말로 끝이나 다름없는 것이였다.
역사의 뒤안길은커녕, 무엇도 남지 않는다.
그런 그들이 내가 신의 힘을, 편린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배해놓은 이유야 뻔하디뻔한 이야기였다.
“신들이 없어져서 멸망하려고 한다면... 신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였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했을 거란 걸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반쯤 드래곤이 되어서 그런지 드래곤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고 해야 할까, 행동방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덕분이였다.
그렇다면 드래곤들은, 어떻게 신을 만들려고 했었을까.
적어도 무슨 방법이 있으니까 시도라도 했을 테니...
“으음...”
도무지 머리를 굴려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쉽게 생각하자면 신들이 남겨놓았던 편린을 모조리 흡수한다는 건데, 대체 몇 개나 있는지조차 모르는 걸 찾아다니라고 여행할 수 있는 몸도 아니였다.
“결국, 샤르인가.”
샤르비오나를, 눈처럼 새하얀 소녀를 떠올렸다.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히.
드래곤들이 남겨놓은 마지막 안배였을 그녀를.
얼어붙어 가면서, 그 순간에 볼 수 있었던 그녀의 과거를 생각하자면 확실했다.
유일하게 환생이 아닌 전생을 한 드래곤.
힘과 지식만을 이어받은 것만이 아니라... 온전하게 다시 태어나기를 선택했던, 과거에도 지금도 유일한 은색용이였던 그녀라면.
전대의 드래곤들의 획책했던 계획을 마무리 짓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게 어떤 방식이든 간에.
“신이 된다라...”
이미 반은 신이라서 그런지 그다지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였다. 뭣보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놈의 신이 되어야 한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자주 틀려먹는 직감이었지만 할 땐 하는 녀석이니 이번엔 믿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뭐,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 정해야겠지만.”
이유가 어찌 됐건 간에, 내가 속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종의 멸종.
그를 막기 위해 날 소환했다는 것 자체야, 이미 알고 있었고 이해하고, 스스로도 받아들인 사실이였으니 넘어간다고 쳐도.
내 예상이 맞는다고 치면... 드래곤들이, 샤르비오나가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날 이용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였다.
상념이 깊어졌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하면 좋을지 스스로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배신감?
서운함?
아니, 그건 아니였다.
속았다고는 할지언정, 그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였다.
그렇다면 뭘까?
하지만 그 상념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똑똑, 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이지경님. 모두 도착했어요. 지금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조심스레 그렇게 묻는 루시아의 목소리가 방 너머로 들려왔다.
“아, 응. 괜찮으니까 들어와.”
내 대답에 끼익,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오는 루시아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루시아나 크리샤와 마찬가지로 골렘으로 온 모양인지 하나같이 로리화한 아내들을 보니 상당히 기분이 묘해졌다.
로리화했는데 전이랑 그리 큰 차이가 없는 아샤와 아냐가 보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하긴 원래부터 로리였으니까, 하고 납득을 하면서도.
그녀들 사이에 있는, 홀로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샤르를 볼 수 있었다.
“......”
새하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로, 반쯤 얼어붙은 상태인 샤르가.
살짝 예상했던 거랑 다른 모습에 할말을 잃었던 내가 물었다.
“썩 좋아 보이진 않는데, 몸은 괜찮은 거야? 샤르.”
“...보이는 것보단 나쁘지 않아. 나보다는 네가 더 걱정이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는 샤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내가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긴 했다.
“그래, 그럼...”
얼어붙은 지로 이주가 지났다.
본래 남아있었던 카르네와의 일주일이 삭제되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건.
지금은 샤르 차례란 소리였다.
“약속했었지, 샤르. 네 차례가 된다면 알려주겠다고.”
“응, 약속했어.”
“그럼 말해줘.”
그런 내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샤르가 내게 다가오려는 순간, 샤르의 곁에 마치 막아서듯이ㅡ 정확히는 내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듯했던 아내들이 자세를 바꾸는 것이 보였다.
허공에서 수많은 마법진들이 그려졌다.
샤르를 겨냥한 채로 펼쳐지는 마법들에, 내게 다가오려던 샤르가 멈춰섰다.
“샤르비오나, 당신은 마왕만이 아니라 이지경님까지 얼려버린 혐의가 아직 남아있어요. 결과적으로 이지경님을 구한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지경님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것도 사실.”
척, 하고 루시아가 손에 쥔 검이 샤르의 목을 겨누는 것이 보였다.
광휘가 왜 저기서 나와.
아니, 그보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하지만 루시아를 말리기엔,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루시아만이 아니라, 샤르를 보는 시선이 하나같이 싸늘했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고하도록 하세요.”
“...그래, 알겠어. 루시아네스. 다시 태어났다고는 해도, 너는 결국 아네모네스와 똑같구나.”
“...저를 어머니의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샤르비오나.”
“그것도 결국 너잖아, 잊어버린 거야?”
“전 그녀랑 달라요.”
“그래, 다르겠지. 다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결국엔, 똑같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샤르가 손을 뻗었다. 자신의 목에 겨눠지고 있던 광휘를 붙잡는 순간, 쩌적하고 얼어붙는 광휘가 보였다.
루시아의 이빨을 벼려만든 광휘가 맥없이 얼어붙는 광경은 상당히 놀라웠다. 드래곤의 이빨로 만들어진만큼, 마력 그 자체의 내성이 어마무시한 물건인데도 단 순간에 얼어붙게 했다는 거 자체가, 샤르가 루시아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너, 그 이상 움직이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런 샤르의 앞을 이번에는 크리샤가 가로막았다.
이미 소환해낸 수백 개의 그림자의 손들이 꿈틀거리며 샤르의 주위를 둘러싸는 것이 보였다.
“...걱정하지 마. 나는 그를 해할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샤르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난 단지 약속을 지킬 생각뿐이야. 카이네르야.”
“...아까부터 루시아랑 나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주겠어? 난 크리샤니까.”
“그래, 알고 있어.”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샤르가 나를 올려다봤다.
마치, 하문을 기다리는 것인냥.
무릎을 꿇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샤르를 보면서.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물을게. 샤르. 드래곤들이 날 소환한 이유가, 진짜 이유가 뭐야?”
“진짜 이유라니 그게 무슨ㅡ”
샤르를 제외하고서, 다른 아내들은 환생을 거쳤다. 기억을 잃고, 오직 힘과 지식만을 어버이가 되는 전대의 드래곤들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덕분에, 내가 말하는 진짜 이유고 뭐고 알 턱이 없었다.
그녀들은 나를 소환한 이유가 오직 드래곤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 마왕의 저주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타 차원에서 온 남자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였으니.
다만, 샤르는 아니였다.
“우리가 널 소환한 진짜 이유.”
나지막하게, 루시아의 말을 자르며 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신들에게 버림받은 이 세계에 새로운 신을 세우기 위해서야.”
샤르의 말에 모두가 경악하는 것이 보였다.
나도 그랬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었으니. 근데 샤르의 발언으로 그 예상이 맞았다고 확정 난 셈이었다.
“...신을 세운다니, 왜?”
하지만 결국 예상하였던 거다.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내가 그렇게 물었다.
나야 이미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야 알고 있었지만, 아직 영문을 모르는 아내들을 위해서였다.
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소환한 게 사실이라면, 내가 보았고 예상했던 것들이 전부 사실인 셈이였으니 굳이 물어볼 이유가 없었지만, 샤르가 내뱉은 사실들이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인 아내들을 다를 테니.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알았는지, 주위를 둘러본 샤르가 말을 이었다.
“신들은, 본래부터 이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들이였어. 정확히는... 그들은 바깥에서 와서 아무것도 없던 이 땅에 자신들이 원하던 것들을 만들어냈어.”
드래곤.
거인.
그 밖에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을 만들어낸 신들은, 이 세계에서 유희를 즐겼다.
“용들이 신들이 마시는 음료를 따르고, 거인들이 그들의 시중을 들었던 시대. 신들의 시대였어.”
하지만 결국 그들은 바깥에서 온 존재들이였다.
언제든 떠날 수 있던 존재들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떠나갔다.
유희를 즐기기 위했던 세계를 버려두고서.
이유는 단순했다.
질렸기 때문이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결국에는 질리고 말아버리는 것처럼. 이 세계는 유희에 질려버린 신들에게 버림받았다.
단지 몇몇 존재들만이, 이 땅에 남겨둔 편린과ㅡ 세계를 만들기 위해 다루었던 보옥들을 둔 채로 버려져 버렸다.
“그 결과, 드래곤과 거인들은 전쟁을 벌였지. 서로가 서로를 탓하며. 너희의 탓으로 신들이 우리를 버리고 떠나가버렸다고.”
수만 년 전, 드래곤과 거인이 벌인 대전쟁.
그건 신들에게 버림받은 피조물들의 아우성이였다.
버림받은 사실을 부정하고 부정하다가, 결국 서로를 탓하며 제 형제와 같이 태어났던 이들을 죽이고 죽였다.
“드래곤들은 승리했지. 모든 거인들을 죽이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종족들을 죽였어. 살아남은 몇몇 이들을 거인들이 다스리던 낙스, 기간토피아를 떼어내 가두고, 봉인했어.”
하지만 신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리가 없었다.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이유는,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였으니까. 단순히, 이 세계에 질려버렸기 때문이였으니까.
“하지만 드래곤들은 부정했지.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 그 결과, 모든 것들이, 이 세계가 신들이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어찌해야 신들이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올까?
고민을 하던 드래곤들은...
“신들이 남겨주고 간 보옥, 그걸 보다 효율적으로 다스려서, 이 세계를 꾸미기로 마음먹었어.”
그것이 신들이 예정해둔 안배였음을 당시의 드래곤들은 몰랐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샤르의 말에 내가 물었다.
“예정해둔 안배였다니?”
“...세계는 단순하지 않아. 버림받은 세계라고는 하더라도, 결국은 세계. 멸망하는 데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한 법이야. 한번 만들어진 이상, 아무리 신들이라고해도 아무렇게나 쉽사리 멸망시킬 순 없으니까. 인과율, 마땅한 대가가 필요해. 하지만... 이미 버려진 세계를, 언젠가 버려버릴 예정이였던 세계를 신들이 대가를 치룰 생각은 없었겠지.”
그렇기에 애당초, 그런 실수를 범하도록 창조되었던 드래곤과 거인이였다.
어느 쪽이 승리하던, 결국에는 그렇게 되도록 창조된 드래곤과 거인이였다.
오만하고, 질투심 많은 드래곤과 맹목적이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던 할 수 있던 거인들.
그들이 신들이 떠나가자 전쟁을 일으킨 건 당연한 수순이였고, 그 뒤에 승자였던 드래곤들이 범한 실수 역시 당연한 것이였다.
“거인들이 그 힘으로 땅을 일구면 우리는 보옥으로 그 땅을 가꿨지. 하지만 이미 멸망시킨 거인들의 몫을 우리가 온전하게 할 수는 없었어. 그러기 위해선, 보다 강한 힘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죄를 범했어.”
여섯 개의 보옥.
그 보옥을 다스리기 위한, 여섯의 드래곤들.
그들은 서로 피를 섞었다.
“본래 신들에게 금기로 여겨졌던 일을 저질러버렸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그랬듯이.
불완전한 피조물은 늘 그렇듯이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을 전능하고 전지했던 신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내버려 둔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랬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ㅡ
“우리의 피는 혼탁해지고, 그 핏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강한 힘과, 영원한 허기짐을 느끼게 되었어.”
그렇게 마왕이 태어났다.
예정된 멸망의 수순으로써.
죽어도 죽어도, 계속해서 부활하며. 대를 잇고, 더욱 강해지는.
언제나 배고픔에 허덕이며, 결국 세계를 먹어치우고, 스스로 먹어치우며 자멸해버리는 가엾은 존재가.
“제 어미의 배를 가르고 태어나, 제 아비의 목을 물어뜯고 삼키면서 울던 어린 드래곤. 아니, 태초의 마왕은 그렇게 태어나고.”
버림받았다.
제 아이에게 죽임당한 드래곤들을 제외한, 당시의 보옥을 지배했던 남은 네 드래곤들은 태내에 잉태되어있던 아이들과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만들어낸 공간에, 마계에 마왕을 내던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잊기로 했어. 모든 드래곤들이, 서로의 피를 섞으면 안된다는 말만을 남기고서.”
마왕은, 그렇기에 몇백 년, 몇천 년을 주기로 다시 돌아와 세계를 삼키기 위한 악적으로 남았다.
드래곤은 그렇기에, 그런 마왕으로부터 세계를 지키기 위한 질서자이자 지키미로써 자신들을 기억했다.
“우리가 뿌리고, 우리가 거두는 게 마땅한 업보를, 인과율을 그렇게 칭했지.”
아홉 번의 마왕이 나타났고.
아홉 번의 마왕이 죽임을 당했다.
처음의 마왕은, 둘의 드래곤이 어찌저찌 이겨낼 수 있었다.
두 번째의 마왕은, 셋의 드래곤이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었다.
세 번째 마왕은...
결국, 뿌린 대로 거두듯이, 드래곤들은 더는 마왕을 압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온 거야. 드래곤들은 계속해서 수가 줄었고, 마왕은 계속해서 강해져만 갔지.”
그리고 저주받았다.
이미 다음 대의 마왕을 이길 수 있을지 모를 지경까지 줄어버린 드래곤들인데, 더 이상 대를 잇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마왕의 저주.
“우리는, 그 마왕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수많은 서적과, 기록들을 찾았어. 그리고, 우리가 범한 그 모든 진실들을 알게 됐어.”
신들에게 버림받아, 죄를 범하고. 결국 그 죄에 잡아먹히게 된 운명을 알게 되었다.
“허탈했어. 선대가 저지른 일들 때문에 멸망하게 된다니. 어이가 없었지.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어. 그러니까.”
우리는 신을 만들어내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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