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9화 〉349화
아직 크리샤와의 사이가 영 좋지 않았을 적에 루시아와의 개인 교습을 통해 철저하게 배웠던 것이 있었다.
바로 대 드래곤 전투술이였다.
모두가 크리샤가 인간혐오라고만 생각했을 때, 내가 크리샤에게 으직할 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루시아가 주입하듯이 배우게 한 거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철저하게 대 드래곤, 즉 엄청나게 수준이 높은 마법사와의 전투를 상정한 전투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단순한 호신술이라고 알고 배웠던 것이 알고 보니 빡친 크리샤를 상정해서, 내가 에루나나 다른 드래곤들의 도움을 받기 전에 한방 컷이 나는 걸 방지하기 위한 훈련일 줄은 루시아에게 듣기 전까진 몰랐지만, 아무튼 그때 루시아에게 배운 것의 요점은이랬다.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마법이 채 완성되기 전에 끝없이 몰아치고 절대로 마법을 발동할 틈을 주지 않는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치였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면 당연히 상대하는 입장에선 좆같을 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런 점에서 마왕에게도 이때 배운 대 드래곤 전투술이 주효할 거라고 생각했다.
드래곤도 그렇고 마왕도 그렇고 결국은 마력을 사용하는 마법이 주력인 존재들이였다.
그러니까 그 마법만 쓰지 못하게 하면, 훨씬 일이 수월하게 되는 법이였다.
그러니까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한다.
철저하게.
그럼 뭘 해야 할까?
우선은 이거였다.
상대의 아가리를 봉인시키고 본다.
설령 상대가 드래곤이라고해도, 그러니까 무영창으로 고위 마법을 뻥뻥 갈겨댈 수 있다고 해도 그런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무영창이고 영창이고 마력을 모아서, 그걸 마법으로 바꾸는 과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였다.
영창이든 마법이든 결과적으론 마력을 모아서 마법으로 바꾸는 과정이 얼마나 빠르고 자연스러운가의 차이일 뿐이였다.
그것이 드래곤 정도의 수준이 되면 숨쉬듯이 간단해서 그럴 뿐, 설령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 과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란 것이였다.
그러니까, 그 마력을 모을 수 없게... 모은다면 모으는 대로 마력째로 내부를 뒤흔들어버릴 수 있는 일격을 꽂아넣을 수만 있더라면, 마법사는, 설령 드래곤이라고 할 지라도 마법을 써보지도 못하고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였다.
물론 그러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긴 했다.
하나, 마법사가 마법을 발동하기 전에 그 마법사에게 일격을 꽂을 수 있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였다.
대 드래곤 전투술에서도 가장 어려운 점이 이거라고 할 수 있었다. 마법을 다루는 쪽에서도 자신의 약점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기본적으로 그들은 적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움직이기 마련이였다. 드래곤, 아니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마법사만 해도 가디언이든 시종이든 골렘이든 자신을 대신에 적의 발을 묶는 수단을 갖고 있고 말이다. 그걸 전부 고려해야 하니까 당연히 까다롭기 그지 없는 일이였다.
둘, 기본적으로 마법사라고해서 비실비실 약할 거라고만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이 세계에서 마력이란 생명체든 무생물이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힘이였다. 설령 상극인 투기를 다루는 기사라고해도 적을지언정 아예 없는 경우는 없다는 거다. 일종의 생명력, 아니 존재력이라고 봐도 좋았다.
투기가 있다면 마력을 대신해서 투기가 그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마력을 엄청나게 쌓으면 그만큼 신체능력도 엄청나진다는 거다. 내구도도 그렇고, 신체 그 자체의 방어력도 그랬다. 거기에 마법사라면 기본적으로 자길 보호하기 위한 마법도 몇 중으로 걸고는 하니까, 당연히 전제조건으로 그런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선 내구도고 방어력이고 보호마법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전부 다 깨부술 공격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다행히도, 난 그 두 조건을 만족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조건은 편린, 역치의 날개로 마왕년의 코앞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신의 힘이라면서 마냥 만능은 아닌 어정쩡한 성능 덕분에 가슴에 구멍이 하나 생겨버리긴 했지만, 거인의 공격을 마냥 피하기만 해서는 절대 다다를 수 없었던 마왕년의 앞에 올 수 있었으니 값싼 대가였다.
두 번째 조건은, 보통은 투기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였다. 마력과 상극의 투기라면 조금이라도 내부에 쑤셔넣는 걸로 마력을 쓰는 존재라면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투기를 쓸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 대신에 열 배가 넘게 증폭된 능력치를 모두 근력으로 꼬라박은 거로 해결했다.
투기가 없으면, 그 투기만큼의 근력으로 떼우면 되는 법이였다.
덕분에 한계 이상의 힘을 담은 육체가 주먹질 한 번 한 번마다 뼈마디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해줬지만, 몸에 구멍이 몇 개 더 생기는 것보단 역시나 값싼 대가일 뿐이였다.
아무튼, 두 조건을 만족했으니 마왕년을 끊임없이 철저하게 줘패야 했다는 거다.
마법을 쓰지 못하게.
머리통이 통째로 뜯겨나가는가 싶더니 , 등 뒤로 빨대가 꽂힌 것처럼 연결되어있는 검은 마력 구슬을 통해서 전해 받은 마력으로 곧바로 재생까지 해버리는 마왕년의 마력이 바닥이 날 때까지 그래야만 했다.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근데 그럴 수 없었다.
머리가 한 번 터지고서도 돌아오더니, 뭔가 헤까닥했는지 갑자기 나에게 안겨 오는 마왕년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마왕년을 도발하기 위해 엉덩이를 팡팡해주겠다고 외쳤을 때부터 아내들의 심기가 팍 상한 것이 느껴지던 와중이였는데 내 가슴팍을 더듬으면서, 되도않는 유혹을 해재끼는 마왕년을 보고서 황급히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마법까지 쓴 모양이였는데, 카마수트라가 유혹 자체의 면역을 갖게 해주는 능력이라서 나한텐 아무 소용도 없어서 다행이였다.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중요한 건 마왕년이 내게 찰싹 달라붙어서, 남사스러운 소리를 했다는 거였다.
기껏 쥐게 된, 언제든지 마왕년을 두들겨 팰 수 있는 거리를 내준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렇게까지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이쪽을보고 있는 아내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내가 그런 거 아니야! 쟤가 나한테 달라붙은 거야!”
진짜다. 난 진짜 아무것도 안했다. 진짜 미친 듯이 억울했다. 실제로 마왕년의 뿔을 움켜 쥔 손이랑 얼굴과 명치에 찐한 키스를 했던 무릎을 제외하곤 이쪽에서는 일절의 접촉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외치면서 마왕년이 닿았던 가슴팍을 털어내기까지 하며 거리를 벌리자 설마 내가 거절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왕년의 모습이 보였다.
“아으...?”
뿌리쳐진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멍청한 소리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주 쬐금 너무했나싶은 생각도 들었지만,그것도 잠깐이였다 .
다른 새끼도 아니고 나랑 아내들한테 죽으라며 흉흉하기 짝이 없는 물건을 휘둘러대며 공격을 해재낀 년을 동정해줄 만큼 상냥한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마왕년이야 어찌됐건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 고개를 돌려서 아내들의 표정을 살펴봤다.
제각각의 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그런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고만 있어서 더욱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내들이 보내오는 시선이 압력을 가진 것처럼 마구 꽂히는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그래서, 뭐? 할 말이 있던 거 아니야?”
그런 와중에 날 구해준 것은 담담한 얼굴로 그렇게 말을 꺼낸 크리샤였다.
“그, 크리샤도 봤겠지만 방금 그건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보다시피 저게 멋대로 달라붙은거라...”
“흐응, 그러시겠지. 그래서 뭐해? 아까 말했던 대로 빨리 엉덩이나 두들겨대지 않고서.”
“크, 크리샤? 그건 그냥 단순한...”
“단순한, 뭐?”
“...전략적인, 그, 도발이였을 뿐인데.”
“헤에, 흐응. 용언까지 써가면서 맹세한 그게, 단순한 도발이였다고?”
한층 더 싸늘해진 크리샤의 시선이 아파서 버티기 힘들었다.
“...하아.”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좋겠는데,마왕년이랑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을 보면 입술이 바짝 마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한숨이 종종 보고는 했던 종류의 한숨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대충 내가 아리스를건들게 된 날이라던가, 덜컥 에네스타를 임신시킨 다음이라던가, 로로가 내게 충격적인 고백을 하게 직후에라던가.
그래, 대충 내 하반신의 신뢰도가 감소했을 때의 한숨이였다.
아리스나 에네스타, 그리고 로로는 그래, 내가 할 말이 없긴 했다.
그래도 이건 진짜 억울했다.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처맞기만 했던 년이 갑자기 이 지랄을 떨 줄을 누가 예상이라도 하겠냐고.
가슴을 관통했던 마법보다 훨씬 치명적인, 마왕년의 가정파괴 공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마 이걸 노린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치명적인 공격이었으니 말이다.
역시나 사악하기 짝이 없는 마왕다운 행위였다.
원인 제공을 한 건 나인 것도 같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였다.
아무튼, 빠르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던 중에... 이렇게 된 이상, 마왕년을 마저 공격하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마왕년을 마무리 지으려고 고개를 돌렸을때였다.
“어...”
자신의 오른쪽 뿔을 손에 쥔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마왕년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피가, 부러진 뿔의 단면에서 꿀렁꿀렁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 피가 아니였다.
피가 아니라. 액체로만 보일 정도로 , 고농도의 마력이였다.
두근, 두근.
맥동하듯이 부러진 뿔로부터 흘러내리는 검은 피와 같은 마력이 이내 어마무시하게 증폭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 이런 굴욕... 차라리 전부ㅡ ”
그리고 그런 나에게,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마왕년이 보였다.
“아니, 이 시발련이?”
잠깐 한눈 판 사이에 광역으로 자폭기를 쓸 기세인 마왕년을 보고서 기겁한 내가 주먹을 뻗었다.
키이이이잉ㅡ
이미 사전에 펼쳐둔 듯한 마법들이 그런 내 주먹을 가로막았다. 막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지연시킬 목적으로 뿔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제외한, 자신의 마력을 전부 들이부은 듯한 마왕년의 마법은 확실히 효과적이였다.
미처 내 주먹이 닿기 전에, 마법이 완성됐으니까.
마왕이란 종자가, 스스로 뿔을 부러뜨려가며 저질러버린 일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자그마치 세계의 법칙마저 다시 써버릴 정도의 저주를 이 세계에 걸어버린 행위였다.
그만큼 엄청난 힘을 지닌 것이였다.
사실상,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행위라서마왕 스스로도 어지간하면 하지 않는 행위였지만. 그런 것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였다.
그것은, 장관이였다.
키잉ㅡ
키이잉ㅡ
키이이이잉ㅡ
몇십, 몇백 중으로 새겨지는 마법진들이 서로 겹치는 것이 보였다. 서로 다른 색깔의 물감이 섞이며 번지는 것처럼 수백의 마법진들이 겹쳐가면서 새로운 문양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오오오오ㅡ
마력의 붓이 덫씌우는 대로 흐려지고, 짙어지고, 또 번져가면서. 세계를 침식해간다. 말로만 들었던 대마법이란 게 이런 걸까,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였다.
하지만 아름답기 짝이 없는 광경과 달리 그것은 나와 내 아내들의 목숨을 노리고 펼쳐지는 마법이였다.
피할 수 있을까?
무리였다.
이미 한 번 사용한 역치의 날개도 쿨타임이 있었다. 당장 쓸 수는 없었다. 망할 신의 힘이란 게 너무 쓰기 까다로웠다. 아니, 애당초 역치의 날개를 쓸 수 있다고 해도 문제였다.
내 바로 뒤에 아내들이 있었으니까.
역치의 날개의 효과가 미치는 것은 오직 나, 개인에 한정될 뿐이였다.
그렇다면 막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오만했다.
드래곤의 종특이 발동한 모양이였다. 절반뿐이라곤 했지만, 절반이나 드래곤이라 그런지 마무리도 짓지 않은 적을 상대로 너무 멍청하게 행동해버렸다.
뭐, 결국은 변명이였다.
생각보다 쉽게 두들겨 팼다곤 해도 마왕년은 마왕이였다. 허투루 보면 안 되는 상대를 너무 얕잡아봤다.
날개를 펼쳤다.
바닥이 나버린 마력을 대신해서, 정신력이든 생명력이든 죄다 써서 펼친 날개로 아내들을 감쌌다.
이걸로는 막을 수는 없을 거다. 당장 펼쳐지는 마왕년의 마법을 보는 순간 이건 죽었다 싶었으니까. 그래도 할 건 다했다.
덕분에 난 아리스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칼침만 맞아도 뒈질 만큼 빈사 상태가 됐지만, 상관없었다.
죽어야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면 나 혼자로 끝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ㅡ
“멸망의ㅡ”
마왕년의 마법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순간이였다.
ㅡ...그렇게는 안 돼.
쩌적, 하고 하늘이 깨졌다.
그렇게만 보이는 광경은, 마왕년이 펼쳐둔 교란 마법이 깨지는 광경이였다.
그리고 깨진 마법과 함께, 하늘을 벌리며 나타난 것은 그대로 마왕년을 향해 내리꽂혔다.
무수한 빛이 난반사하며 만들어내는 듯한 일곱 빛깔의 프리즘들이 마왕년의 몸 위로 내리 부어진다. 그런 빛 속에서, 마왕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ㅡ”
단말마처럼, 그렇게 토해내는 마왕년의 말과 함께.
푹!
푹푹푹!
빛은, 곧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되어서 마왕년의 몸에 꽂혀 들어갔다. 아니 꽂혀들어간다는 어폐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빛 그 자체가 얼음이 되어서,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마왕년의 몸에 나타난 것에 가까웠으니까. 빛이 얼음덩어리가 된다는 개념 자체를 비틀어내는 광경. 순식간에 무수한 얼음으로 된 창에 온몸이 내리꽂힌 마왕이 피를 토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마왕의 펼친 마법은 멈추지 않고서, 서서히 세상을 덮고 있었다.
이미 펼쳐진 마법은 아무리 시전자가 맛탱이가 가더라도, 멈추지 않는 법이였으니까.
ㅡ...늦어서 미안 .
우웅ㅡ 그렇게 선언하며.
얼음처럼 투명한, 마치 거대한 크리스탈을 통째로 깎아 만든 듯한 거대한 새가.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이며 내 앞에 내려왔다.
“...샤르 ?”
ㅡ응 .
대수롭지 않게, 아마도 평소와 같은, 무슨 생각인지 전혀 모를 무표정을 짓고 있을 것만 같은 평탄한 목소리로 대답한 샤르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샤르라면, 그녀라면 적어도 아내들을 데리고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샤르...”
ㅡ미안해, 조금급하니까.
내가 말을 걸기 무섭게, 그렇게 말을 자른 샤르가 날개를 펼쳤다.
ㅡ나여기에 나의 맹약에 따라 선언한다.
날개가 부스러지며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크리스탈처럼 투명했던, 샤르의 날개들이 마치 녹아내리듯이 사라져가는 것이 보였다.
봄날에 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뜨거운 햇살에 얼음이 부스러지는 것처럼.
그녀가 녹아내린다.
ㅡ나, 샤르비오나 크락수스. 영원한 동토의 지배자가 이천 사백하고 사십 이년. 그 세월 간 나 스스로 제한한 것을 대가로 바친다.
감정을 제한하고.
말을 제한하고.
마력을 제한하고.
감각을 제한했다.
주시자의 눈을 통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그래왔던 그녀의 인생이, 아니 용생이 보였다. 그녀의 과거가 비쳐 보였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도려내고, 내친 그녀가 쌓아온 업들이 보였다.
살아가면서 당연히 느껴야했을 모든 것들을 박탈당했던 그녀가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기다려왔는지, 그동안 무엇을 생각해왔는지, 무엇을 바래왔었는지.
그 모든 것들이.
ㅡ그리하여 모든 것은 얼어붙으리라.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가 선언한 그대로,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한기가.
쩌저적ㅡ
샤르를, 그녀를 중심으로 마왕년이 펼친 마법도, 세상도, 그 무엇도. 전부 얼어붙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쏴아아아ㅡ
녹아내리고, 녹아내린 끝에. 은발의 소녀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게 다가온 그녀가 뒷꿈치를 들며, 쩌적하고 얼어붙기 시작한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것마저도 힘겹다는 듯이, 마치 당장이라도 녹아서. 눈처럼 사라질 것 같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약속한 대로. 내 때가 오면 모두 설명해줄게.”
“...약속했다?”
숨기려고 하는 것을 알았기에 묻지 않았다. 자신의 때가 된다면 알려주겠노라고 했기에 묻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제와서 또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에, 재차 그녀에게 약속했다. 그런 내 말에 소녀가, 은빛처럼 맑기만한 소녀가 어렴풋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응. 약속했어.”
그리고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