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4화 〉344화
콰아아아아ㅡ!
뻗쳐나간 투기의 칼날이 마수의 몸을 찢어발겼다. 사방으로 검게 물들고, 진물과 고름을 토해내는 살점들이 비산했다. 그렇게 한 마수의 몸을 찢어발긴 칼날은곧장 다른 마수를 베어 넘긴다.
베고, 또 베고, 베고, 또 베고.
투기의 칼날이, 칼날에서 칼날로 뻗어 나갔다. 점점 줄기를 뻗쳐나가는 나무처럼 이리저리 갈래를 나누어가며 마수들을 쫓아 베어버린다.
건물을 지나치고, 보호막에 둘러싸인 인간들을 피하고.
확산과 증폭.
그것을 반복하면서, 퍼져나간다.
오직 마수만을 노려서, 목을 베고 몸을 자르고, 허리를 끊어낸다.
어느새, 광휘에서 뻗쳐나가는 하나의 투기의 칼날로 시작되었던 것이 거대한 힘의 줄기로부터 사방으로 칼날을 갈래갈래 뻗쳐 보내는 기묘한 형태를 이루어서마수들을 난자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꺾이고 휘어서 꿈틀거리는 칼날들이 마수들의 몸을 해체하는 것은 꽤나 장관이였지만 이를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
꽈직...!
신의 편린으로 이루어진 전능자의 손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건틀렛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이름만 전능하지, 사실은 전능하지 못한 건틀렛이. 수천, 수만, 수십만을 넘어서서 뻗쳐나가는 투기의 칼날을 제어하는 것에 벅차서, 그로 인해 무너지고 있었다.
몇 중으로 증폭하고, 또 단죄자의 검으로코팅하듯이 다시 증폭시킨. 내 모든 능력치를 개혁하는 자로투기로 전환해서 오로지 강하게 분출시킬 뿐인 투기의 칼날을.
그 칼날이 마수를 베어내기 위한 검로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과정을 전부 제어하는 건, 아무리 편린이라도, 신의 힘이 담겨있다고 해도 힘들었던 모양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여태껏 사용해왔던 편린은 그렇게 만능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였으니 말이다.
마력을 보고, 또 과거를 볼 수 있던 주시자의 눈도 로로의 과거를 보고서, 그것에 아주 약간의 개입을 했을 뿐만으로도 몇 주 가까이 사용할 수 없게 됐던 것처럼.
심장이 터져나가서 완전히 죽음에 이를 뻔했을 때, 그 상처를 완전히 복구시켰던 불멸자의 심장이 한동안 사용할 수 없었던 것처럼.
또 가능성을, 미래 예지에 가깝게 보여주는 헤아리는 자로 내게 주어진 가능성을 엿봤을 때도 그렇게 됐던 것처럼.
편린은 단지 이미 떠나가버린 신들이 남겨두고 갔을 뿐인 힘의 파편일 뿐이었다.
완전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았다.
파편은 파편이다.
한때,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알려진 신들과 완전히 같은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조차도 그렇게 많은 편린을 흡수하고서도 고작 반신에 이르렀을 뿐. 완전한 신이 되지 못한 거고.
아무튼, 그런 힘이였기에 한계가 있었지만... 아직은 투기의 칼날을 제어하기 힘들 뿐 불가능한 건 아니였다.
그래도 이대로라면 금방 뻗어버릴 것이 분명하니까, 조금 힘을 보태기로 했다.
끄드득...
발치에서 뻗쳐나온 그림자의 손이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쩍, 쩍하고 금이 가던 전능자의 손에 둘러싸며 고정했다. 그리고 금이 간 사이사이의 틈새로 스며들어가기 시작했다.
무너져가는 전능자의 손이 그것만으로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됐다. 비록 내 힘을 더해서 강제로 당장 붕괴하는 것을 억누른 것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나는 여전히 광휘를 계속 휘둘렀다.
치이익...!
그리고 그런 내 눈에 광휘가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하나를 어떻게든 해결했다 싶었더니, 또 다른 문제가 터져버렸다.
게다가 이번 건 꽤 큰일이었다.
전능자의 손이 붕괴한다고쳐도, 어차피 신의 힘이 담긴 편린이 어딜 가는 건 아니였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 곧 멀쩡해질 테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어디로 가버리는 물건이였다.
루시아가 내게 처음 선물해줬던 검.
처음으로 받은, 연인이 내게 준 선물이.
내가 가장 아끼던 검이 눈앞에서 녹아내리고, 그와 동시에 증발하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거대한 투기. 그를 담은 매개체로 쓰이고 있는 광휘도 한계에 이른 것 같았다.
투기 자체가 검을 보호해주기도 하는 만큼, 거기에 광휘를 만든 재료가 루시아의, 드래곤의 이빨인 만큼 오래 버티긴 했지만 힘을 가득 담아서 거의 마구 휘두르다시피 한 덕분에 박살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검술을 배울 걸 그랬다.
솔직히 내 검술 자체는 지금도 에네스타의 발치에 겨우 미치는 수준이였다. 아마 능력치를 전부 제한하고서 검으로만 에네스타랑 맞붙는다면, 전이랑 똑같이 두들겨 맞을 거다.
그런 만큼, 지금 광휘를 휘두르고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에네스타라면 좀 더 검에 무리가 가지 않는 방법을 알고, 그렇게 했을 거다.
깨달음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힘만 잔뜩 세져서 초월자에 이르고, 반신까지 오게 된 나랑 달리 그녀는 순수하게 수백 년에 가까운 수련을 쌓고 쌓아서 검주에 이르고, 드래곤의 가디언까지 됐던 진짜 실력자였으니까.
고작 베헤노스 검술의 등급이 S급에 미치는 수준인 나와는 달리, 에네스타는 여러 검술을 전부 SS급 이상으로 익힌 진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의 달인은 아니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토록 단련했던 에네스타와 달리, 정작 내가 그런 그녀보다 한 단계 위인 초월자에 스스로올라섰다.
그게 물처럼 퍼마신 영약이라던가, 그런 영약을 알아서 흡수해주던 개변자라던가,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다곤 해도.
아무튼, 힘 자체는 초월자가 됐을 당시에 이미 에네스타를 압도할 수준에 이른 것이였다.
거기에 편린을 흡수해서, 반신에 이르고... 그런 과정에서 다시 자잘했던 것을 버리는 대신 완전하게 반용이자 반신이 되기까지 한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더 강해졌다.
그래서,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뭘까?
칼날들을 제어하느라 머리가 한계까지 돌아가고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사방팔방에 있는 마수들을 주시자의 눈으로 쫓느라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면...
사실 전부 아니고, 그냥 이런 말이 하고 싶어서였다.
기교고 기술이고 뭐고, 그런 건 그를 압도하는 힘 앞에서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치이이익...!
손을 뻗어 광휘의 칼날을 쥐고 붙들어 잡았다. 까드득, 용화한 왼손이 광휘를 우겨쥐자, 녹아내리던 광휘에 검은 비늘이 돋아나듯이, 내 힘으로 덮어 쓰여지기 시작했다.
그 광휘를 붙잡고 있는 손은 무슨 용암에 담근 것처럼 엄청나게 뜨거웠지만 뭘, 한번 크리샤한테 통째로 불탈 뻔했을 때 비하면 그리 뜨겁지도 않았다.
대충 버티면서, 증발하려던 광휘를 내 힘으로 둘러 보호했다.
그리고 여전히 광휘를 휘둘렀다.
이미 도시의 절반 가까이를 덮은 투기의 칼날이, 그런 내 의지에 따라 쫓고, 쫓는다.
어느덧, 이쪽으로 달려들기는커녕 내게서, 칼날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마수들을 끝없이. 끈질기게 계속 쫓아가 결국에는 대가리를 쳐냈다.
쳐내고, 찌르고, 꿰뚫었다.
자르고, 베고, 부섰다.
칼날의 분열이 가속화했다.
베고 쳐내고 찌르고 꿰뚫고 자르고. 마수를 찢어발긴 칼날이, 그런 마수의 몸을 집어삼키며 더 많은 칼날을 뻗어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 전역에 이글거리는 투기의 칼날이뻗쳐 나오게 됐을 무렵.
“카륵...”
마지막 남아있던 마수의 목이, 투기의 칼날에 꿰뚫리고 그대로 잘려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썩은 고름과 같은 피가 땅을 적시기도 전에 아귀때처럼 투기의 칼날들이 마수의 시체를 집어삼키자, 그 위로 다시금 투기의 칼날이 피어났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스러진 마수의 몸이 있던 곳 위로, 검은 투기의 칼날이 꽃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쓰으읍...”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투기를 거둬들였다.
단번에 회수되기 시작한 투기. 덕분에 조금은 숨을 돌릴 정도는 됐다.
또, 한계까지 몰려서 완전히 부서질까 말까하는 전능자의 손에서 광휘를 떼어내고서, 도로 비활성화시켰다.
치이이이익...
“앗, 뜨.”
그 탓에 비늘도, 전능자의 손도 없이 맨손으로 쥐게 된 광휘로부터 살갗이 익는 소리와 함께 엄청나게 뜨거워서 쥐고 있던 광휘에서도 손을 떼냈다. 그리고 그제서야 상당한 몰골이 되어버린 광휘를 볼 수 있었다.
루시아의 어금니를 통째로 변환시켜 만든 광휘가 반쯤 녹아서,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간신히 검심이라고 할만한 부분만 남고, 모조리 녹아버린 광휘는 본래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없이 처참한 모습이였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아름다운 검의 모습은 온데간데도 없이 흉한 몰골이였지만. 다행히도 완전히 부서지진 않았다. 특히 루시아가 새겨둔 자동 복구 마법이 아직 남아있으니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어떻게든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덕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였다.
여기서 광휘를 분질러 먹었더라면 루시아를 볼 낯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광휘나 전능자의 손이나, 어느 쪽이든 당분간은 쓸 수 없게 됐다.
뭐. 수십만에 이르던 마수를 일거에 찢어발긴 대가치고는 싼 편이었지만.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도 전혀 모르는 것을 방해하느라광휘가 이 모양이 된 건 조금 안타깝긴 했다.
“그럼 이제...”
단순하게 마수만을 쳐 죽였을 뿐이라서, 마수들이 죽으면서 뿌린 마력들이 아직도 도시의 중앙에 고인 구정물처럼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구정물 같다고 말한 이유는, 말 그대로 구정물처럼 탁하고 질척거리는 마력들인 탓이였다.
처음 인간들을 마수로 바꿔버리기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마력.
잘은 몰라도 저 정도라면 대마법인지 뭐시긴지하는 것도 충분히 발동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력량이였다.
적어도 고위 마법을 수십 번은 사용하고도 남을 법한 마력이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위협이였다. 단순한 농담인 게 아닌 게 아니라, 만전 상태인 내가 마력을 전부 쏟아내더라도 저 정도는 안 됐다.
수십만이나 되는 인간을, 사실상 갈아모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것도, 그냥 모은 것도 아니고.
저주에 의해서 강제로 마수화하는 순간.
인간이 가장 공포에 질리고, 절망하는 순간에 강제로 뽑아낸 마력들이였다.
저 마력들이 시궁창 같은 이유였다.
투기와 마찬가지로, 사용자의 의지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마력이였다. 아마 저기에 모여있는 마력으로 저주같은걸 펼치면 장난아니게 강력한 저주가 만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모여만 있을 뿐, 마법이든 저주든 발동하지는 않고 있었다.
이유는 뻔했다.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이였다.
저만한 마력을 모으는 것도 모으는 거지만, 사용하는 것도 까다로운 것이 당연한 법이였으니.
그러니까...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낸 내가 날개를 펼쳤다.
그런 내 등 뒤로 아내들이 말을 걸었다.
“이지경님.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이 바보야. 그 모양이 됐으면서 바로 뛰쳐 갈려고? 너 진짜 미쳤지?!”
“미쳤다고 해야 할까아,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까아.뭐어. 어느 쪽도 같은 것 같지마안.”
“이런 건 우리한테 맡기라고~?”
“응응, 오빠는 조금 쉬고 있어도 돼.”
“발동한 것도 아니고, 준비중이라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당장 마력이 모여든 곳으로 날아가려던 나를 붙잡은 아내들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아, 생각해보니까. 여기에 모인 드래곤만 여섯이나 있었다. 마법의 종주. 마력의 지배자. 이 세계를 만들어낸 신들로부터 창조되기를, 투기 자체를 다루는 거인과 더불어서, 마력을 다루기 위해 창조된 종족.
비록골렘의 몸이라서 본신에 비하면 턱없이 마력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뭘, 마력이라면 이미 여기에잔뜩 있었다.
““““““나, 여기에 마력을 바쳐 바라건대.””””””
영지도, 본신도 아닌 골렘이라서 무영창으론 한계가 있는 탓에 일제히 영창을 하기 시작하는 아내들의 목소리가 화음이 되어, 마치 하나의 노랫소리처럼 어우러졌다.
“바람이여.”
“대지여.”
“불이여.”
“나무여.”
““물이여.””
“태초부터 창공에 흐르던 바람이여, 매듭을 풀어라.”
“영원을 견뎌내는 시작의 땅이여, 매듭을 굳혀라.”
“영원과 함께하는 생명의 기둥이여, 매듭을 묶어라.”
“영겁을 태우는 시초의 불꽃이여, 매듭을 태워라.”
““영원토록 흘러가는 태초의 푸른 물이여, 매듭을 적셔라.””
우우웅, 하고 기껏 모아두고 있던 마력들이 일제히 아내들한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검은 마력 쪽에서도 전부 빼앗기기 전에 발동시키려는 듯,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보다 아내들의 영창이 끝나는 것이 먼저였다.
콰아아아아!
세상이 바뀐다.
그렇게만 보였다.
자그마치 여섯이나 되는 드래곤에 의해서 펼쳐진 마법들이 일으키는 변화는 그렇게 부를만 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회오리와, 갈라지는 대지. 온갖 곳에서 솟아오르는 넝쿨들과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꽃. 그리고 쏟아지는 물까지.
단순히 마법이 발동되는 영향으로 일어나는 현상만으로도, 이미 조금 전과는 완전히 별세계나 마찬가지가 됐으니까.
그리고, 그런 마법들이 순식간에 방금까지 자신들이 자양분 삼았던 마력 뭉텅이에게 처박혔다.
마법은 발동되면 무섭지만, 발동되기 전까지라면 그다지 무서울 것도없는 건 이세계의 상식이였다.
그러니까 마법사를 상대할 땐 상대가 영창을 하지 못하게하고, 순식간에 끝내라고 하는 모양이였고. 그런 만큼, 순식간에 펼쳐져서 마법의 근간이 되는마력 자체를 공격하는 것은 무척이나 효율적이고 확실한 방법이였다.
게다가 그것이 드래곤들이 행사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오...”
이 정도면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아직 발동도 되지 않은 마법은 꼼짝도 못하고 강제로 파기당할 것 같았다. 아무리 대마법이 발동하기 직전이였더라도, 마법에 대해서는 달인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한 수준의 강자들인 아내들이 일제히 합심해서 공격하는 것이니까 얼마 걸리지도 않겠지.
근데...
“...왜 멀쩡해?”
꿀렁꿀렁...
아내들이 펼치는 마법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불안정하게 흔들거릴 뿐. 큰 타격도 없어 보이는 마력이 보였다. 아니, 오히려...
“도로 흡수하고 있잖아...?”
아내들이 마법을 펼치기 위해 뽑아갔던 마력을,마법에 두들겨맞으면서도 다시 회수해가며 덩치를 키우는 것이보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적이 있었던 짓이였다.
마력 그 자체를 먹어치우고,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은...
마왕이 가진 힘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린 내가 아내들에게 마법을 멈추라고 하려던 찰나에, 마력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이였다.
거대한,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마력으로 만들어진 문.
그리고 그 문이 열리는 것과 함께, 문 너머에서 검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드레스를 입은 미녀가 걸어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느적거리는 검은 마력을 걸쳤을 뿐인, 사실상 알몸이나 마찬가지인 미녀. 하지만 그보다 시선이 가는 것은, 그런 여자에게 돋아나 있는 양의 그것과 같이 생긴 뿔이었다.
400여 년 전, 이 땅에서 드래곤들에게 죽임당한 마왕과 같은 모양의 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저 여자가, 그 때 그 마왕이 죽기 전에 언급했던 딸이라고.
마왕의 딸.
왕의 자식.
왕이 없어진 후에는, 당연하게도 그 위치를 계승하는 존재. 즉, 400년 전에 죽은 마왕을 대신해서 마왕이 됐을 이의 등장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나만이 아니였을 것이다. 까드득, 하고 초조한 듯이 입술을 깨무는 아내들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마왕과 드래곤.
침략자와 방어자.
파괴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딱 잘라서 말할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이 세계에서 마왕과 드래곤의 관계였다. 당연히 좋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만큼, 아내들의 모습도 엄청나게 흉흉해 보였다. 그때 싸늘한 표정으로 루시아가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저 빌어먹을 년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는 걸까요?”
...내가 잘못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