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화 〉312화
“미, 미친년?”
“두 팔이 없는 여자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리는 녀석들을 보였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을 뿐인데, 웬 걸. 월척이 걸린 모양이었다.
“알고 있나본데. 설명해보도록.”
혹시라도 부담스러울까봐, 그림자의 손으로 어르고 달래자 지극히 얌전해진 녀석들이 정보를 뱉어냈다.
두 팔도 없는 여자와, 그 무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낙오자들을 이끌고서 돌아다니는, ‘뿔’이 없는 특이한... 하지만 팔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전사보다도 강한 묘한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
다른걸 다 제쳐두고서, 팔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나와 루시아에 의해 양 팔이 잘린 엘리시스에 대한 정보와 일치했다.
“그래, 그래서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고?”
“그, 그것이... 저희 족장께서 마음에 드는 계집이라고, 얼마 전부터 ‘사냥’을 준비중이었습니다. 하, 하지만 저희는 어디까지나 식량조달을 담당하고 있던 지라...”
자세한 것은 모른다는 낙시안의 말에 정보창을 열어봤다. 호감도는커녕 공포에 질린 녀석들의 정보창에는 아무런 생각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꾸마. 너희 족장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겠지?”
엘리시스의 위치는 몰라도, 설마하니 자신들의 족장이 있는 곳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게 질문을 바꿔 묻자, 안색이 시퍼렇게 바뀌는 낙시안들이 보였다.
“어서.”
꾸우욱, 그림자의 손이 그런 낙시안들의 목을 더듬었다. 그러자, 결국 한 낙시안이 말했다.
“...저희들이 왔던 방향으로, 하루정도를 가면 있습니다!”
“네놈, 카잔...!”
“동족을, 부족을 배신할 셈이냐?!”
“어, 어쩔 수 없잖아! 이런 괴물한테...!”
사람을 괴물이라 하다니 실례였다. 하지만, 뭐 제대로 대답해줬으니 봐주기로 했다.
꽈득!
정보를 누설한 동족을 향해 매도하던 다섯의 낙시안들의 목이 그림자의 손에 꺾여 부러졌다.
“크륵...”
“끄윽...!”
힘 조절이 잘 안됐는지 한 명은 덜렁거리던 목이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지만, 나머지는 허옇게 거품을 물고서 부들부들 몸을 떨다가 절명했다. 생각했던 것보단 약한데? 바록이나 바쿠를 기준으로는 아슬아슬하게 목이 부러지지 않을 정도의 힘이였는데 그대로 죽어버린 낙시안들을 보니 조금 얼떨떨했지만, 뭘 어차피 죽일 생각이였으니 상관은 없었다.
내 기준으로 봤을 때 한 백번은 죽어도 모자란 쓰레기들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죽어버린 낙시안들에게서 관심을 끈 나는 덜덜 떨고 있는 카잔이라는 낙시안에게 다가갔다.
우득, 우드득...!
그 와중에 그림자의 손들이 시체들을 집어삼켰다. 사람은 자고로 아끼면서 살아야하는 법이었다.
원체 마력이 적은 낙스에, 그런 곳에서 살았던 낙시안들지라 시체를 포식자로 삼켰는데도 돌아오는 마력은 엄청나게 적었지만,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아, 아으...”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나와, 그림자의 손에 하나하나 붙잡힌 채 해체되어 포식자에 집어삼켜지는 동족들의 시체를 보며 결국 지려버리는 카잔에게 물었다.
“길안내, 해줄 수 있겠지?”
“...그, 그렇다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래, 넌 살려주마.”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카잔의 목에 그림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채워졌다. 꾸득꾸득, 촉수같은 그림자의 손들이 목에 감겨오는 것을 보며 카잔이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러니 성심성의껏, 열심히 안내하도록. 알겠지?”
그러면 적어도 길 안내가 끝날때까진 약속대로 살려줄테니.
“주인님~! 왜 이제 오시는 거에요!”
카잔을 끌고서 돌아가자, 꼬리를 휙휙 흔들며 니아가 그렇게 물었다. 양 손에 시뻘겋게 묻은 핏자국과 그런 니아의 손에 잡혀있는 낙시안의 모가지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몸통에서 떼어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가지를 손에 들고서 활짝 웃는 미소녀라니.
섬뜩하다면 섬뜩한 광경이지만 주체가 니아라서 그런지 귀여울 뿐이였다. 그도 그럴게 나를 보자마자 마구 달려드는 니아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미안, 조금 늦었지.”
그렇게 사과하며, 다가온 니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리고 더러우니까 그런 건 어서 버려버리렴.”
“네, 주인님~!”
내 말에 휙하고 모가지를 던져버린 니아가 헤헤 웃었다. 칭찬해달라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는 니아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바록과 바쿠 그리고 로로에게 시선을 옮겼다.
로로를 제외하고선 바록과 바쿠 역시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입고 있던 중갑이 피투성이가 돼서 서있는 두 거인을 보니 지옥에서 올라온 수문장 같아보였다.
깔끔하게 모가지만 떼어낸 니아와 달리, 둘은 완전히 분쇄하듯이 적들을 파헤쳐놓은지라 주변에 즐비한 사체들의 상태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피 한 방울 안 묻은 로로가 옆에 있으니까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였다.
지옥의 수문장 사이에 있는, 마냥 귀족의 영애같은 로로의 모습은 실로 그러했다. 뭐, 바록과 바쿠가 로로를 호위했다고 치면 그럭저럭 이해가 가는 그림이긴 한데... 문제는 바록과 바쿠가 처리한 인형들보다는 로로가 처리한 인형들이 더 많아 보인다는 거다.
아무튼 이 참상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로로를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 있던 바록이 내게 물었다.
“주인님, 그 자는...”
아무래도 데리고 온 낙시안이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뭔가 기대 섞인 눈으로 보고 있는데, 뭘 생각하는진 몰라도 적어도 바록의 예상과는 다를 거다. 아무튼 그런 바록의 말에 움찔하고 몸을 떠는 카잔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어째 넋이 나간 것 같으니까 정신 차리란 의미에서.
하지만 그런 내 의도에도 효과가 없었는지 멍하니 바록과 바쿠를 보며 카잔이 중얼거렸다.
“저, 저건... 거인...? 아니, 하지만...”
하는 수 없이 믿기지 않는 것을 본 것처럼 중얼거리는 카잔의 목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새롭게 길 안내해줄 녀석이지. 자기소개는 필요 없겠지?”
내 말에 그렇습니까, 하고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바록과 바쿠가 보였다. 그리고 나를 빤히 보는 로로의 시선도 느껴졌다.
“무슨 일 있어?”
“...그럼, 저 녀석은 어쩔거야?”
그렇게 말하며 마라를 가리키는 로로가 보였다.
고개를 돌려서 마라를 보자, 새로운 ‘길 안내’라는 말과 카잔을 보면서 초조한 듯이 몸을 꼬고 있는 마라 녀석이 보였다.
응, 역시 저 녀석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단지 마라의 ‘말’은 의사를 담을 만큼 고등적인 것이 아니라 ‘언령’에 영향을 받지 못할 뿐이고, 마라 자체의 지능은 꽤나 높은 듯 싶었다. 알아듣는건 할 수 있는 모양이니까. 이렇게 보니 더더욱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자신의 쓸모가 없어졌다고 여기는 것인지 그러고 있는 마라를 보고서, 로로에게 말했다.
“쟤는 데려가서 키울 거야.”
“...변태.”
터무니없는 음해였지만 다름아닌 내가 사랑하는 딸의 말이었다. 너그러이 봐주기로 하고서, 카잔에게 말했다.
“자, 그러니 어서 안내하렴.”
“크하하! 제법이구나! 역시... 좋은 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
쿠웅, 하고 주먹을 휘두르며 말하는 거한의 말에 엘리시스가 투막을 펼쳤다. 그녀의 의지는 이 세계에도 새길 수 있을 만큼 강대하고, 그녀의 투기 또한 그러했다.
그런 그녀가 의지를 담아, ‘막는다’라는 일념으로 만들어낸 투막은 그 무엇도 뚫을 수 없을 만큼 굳건했다.
오우거보다도 강한 완력을 보이고 있는 거한의 주먹을 막는 것도 모자라서, 그의 살갗에 도리어 흠집을 남길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크하하하하!”
겨우 흠집이다.
오히려 자신의 주먹을 받아내는 엘리시스를 보고서 기쁜 듯이 광소하는 거한은 마구 주먹을 휘둘러댔다. 그때마다 투막에 부딪혀, 살갗이 찢어지고 피를 흩뿌리는 주먹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먹을 휘두르고, 투막에 부딪혀 까진 살점 따위야 다시 주먹을 휘두를 쯤에는 전부 아물었으니 말이다.
투르크 부족의 족장, 쿠르자하는, 아니 투르크 부족은 뛰어난 재생능력과 생명력을 자랑하는 트롤, 그 선조격의 투르크의 혼혈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투르크 부족 중에서도 가장 강한 쿠르자하는 설령 목이 잘려나가도, 곧바로 붙이기만 한다면 재생할 정도로 강력한 재생능력을 자랑하는 이였다.
주먹의 살점이 떨어지는 것쯤은, 아니 팔의 뼈가 부러지는 것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반면 엘리시스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설령, 초월하여 세계에 의지를 새길 수 있을만큼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몸은 ‘아직’ 인간이었다.
의지만큼은 모든 것을 초월하였지만, 천부적인 육체만큼은 그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진작 잘려나갔던 두 팔을 재생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트롤도 아니고 그저 인간일 따름인 엘리시스에게 그런 재생능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단지, 투기로 만들어낸 가상의 ‘두 팔’과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러나, 투기는 마력과도 상극인 것과 동시에, 같은 투기에도 약한 구석이 있었다.
투기로만 이루어진 칼날은, 상대의 투기를 끊어내더라도, 그 속에 감춰진 두꺼운 가죽까지 베어내고, 살을 찢을 정도의 위력은 없었다.
설령 가능하다고 했더라도, 쿠르자하의 몸은 그정도의 상처는 가뿐하게 재생시켰다.
이래서야 백날, 파도가 몰려오는 백사장에 그림을 그리는 격이었다.
그렇기에, 쿠르자하는 흉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크흐흐... 재주도 좋군. 허나, 그뿐이다.”
쿠르자하는 자신의 투기를 뚫고 들어오는 엘리시스의 공격을 고작 ‘재주’로 취급했다. 엘리시스가 다루는 투기는, 그의 투기보다도 월등하게 상위에 존재했지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 탓이었다.
거기에, 엘리시스로써는 상황이 나빴다.
엘리시스의 투기는, 쿠르자하만을 상대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으아아앙~!”
“...괜찮으니, 울지마렴. 어머니는 강하시니까, 금방...”
갑작스레 기습해온 투르크 부족의 창에 맞아, 어깻죽지를 다친 딸. 보레아스의 호신과 그의 곁에 있는 아이들.
그녀는 그냥 ‘버려버리라고’ 말했지만, 말이라곤 지지리도 들어먹지 않는 딸아이가 기어코 거둬들인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상처도 돌보지 않고서, 울음을 터트린 갈색 피부의 작은 소녀를 감싸며 달래고 있는 보레아스를 보며 엘리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쾅, 쾅...!
그런 엘리시스가 펼친 투막을 뚫기 위해 무수히 창을 던져대는 남자들이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보레아스를 보고 있었다.
엘리시스는 족장의 것이었지만, 보레아스는 처음으로 엘리시스의 투막을 뚫고, 창을 맞추는 자의 것이라는 족장의 선언 때문이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기묘한 가죽을 입고 있는 여자였지만 보레아스 역시 낙스에선 볼 수 없는 보기드문 ‘암컷’이었기에, 투르크의 전사들의 사기는 엄청났다.
처음보는 암컷을 깔아뭉개고, 자신의 아이를 낳게하는 것은 투르크 부족의 명예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 암컷도, 꽤 제법인걸. 창을 맞고도 아직도 버티고 있으니”
“그래, 가슴도 크고.”
“옆에 있는 아이들은, 저 여자의 아이인가? 닮지는 않았지만... 애지중지하는 걸 보면 그럴 지도 모르겠군.”
“그럼 눈앞에서 잡아먹으면 꽤 볼만하겠는걸.”
영양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낙스에서, 보레아스의 커다란 가슴은 무릇 투르크 전사들의 음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투르크 부족의 습격 때문에 며칠을 굶주렸으나, 그렇다고 가슴이 당장 줄어드는 것은 아니였으니까.
깨지고 부서진 플레이트 아머 사이로 보이는 살갗을 보고서, 두 눈을 부릅 뜬 투르크의 전사들은 창들을 던져대며, 그런 농담을 했다.
상대가 단지 여자를 노리고 덤벼온 괴한만이 아니라, 식인까지 저지르는 몬스터나 다를바없는 것들임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 엘리시스는, 딸과 그 딸이 지키는 아이들을 위해, 투막을 더욱 두텁게 펼쳤다.
하지만, 그렇게 투막을 펼쳐 소모하는 투기는, 쿠르자하의 주먹을 막고 있는 것보다는 아니지만 엘리시스에게도 꽤나 부담이었다.
‘...두 팔이 멀쩡했다면, 아니, 적어도 검이 있었더라면.’
전에 상대했던 오우거들의 수준, 딱 그 정도에 불과한 투르크의 전사들과 쿠르자하정도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때보다도, 지금의 자신이 훨씬 더 강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가정일 뿐이었다. 지금의 자신은 두 팔은커녕, 검조차 없었다. 보레아스가 들고 있던 검은, 몇 번의 사냥을 통해 분질러먹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아껴 쓰는 거였는데 말이지.”
별안간 이상한 곳에 떨어져서, 이런 해괴한 자들의 습격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엘리시스는 크게 반성했다.
아니, 그보다...
멀찍이서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을 반성했다.
그 덕에 이런 사단이 난 것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엇도 위협이 되지 않았던, 엘리시스였기에 가능했던 오만이었지만. ‘두 팔’과 ‘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던 것을 반성했다.
‘아직, 나도 모자라다는 거겠지.’
하지만...
‘나를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는 시련은, 나를 강하게 한다.’
어릴 적, 처음으로 ‘집’ 밖을 나섰을 때 만난 수많은 몬스터들을 죽이고, ‘생존’하면서 깨우치고, 그녀의 의지의 중심이 된 그 격언을 되새기며. 엘리시스는 쿠르자하의 보인 틈새를 향해 ‘검’을 뻗었다.
푸욱!
정확히 심장을 노리고서 찔러들어온 투기의 칼끝이, 그의 살점을 도려내고, 피를 흘리게했지만.
얕았다.
“크합~!”
심장이 찔렸는데도, 절단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거리낌없이, 투막 밖으로 뻗어나온 엘리시스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는 쿠르자하를 보고서, 도로 투막 안으로 들어온 엘리시스가, 혀를 차는 쿠르자하를 노려봤다.
‘뛰어난 것은 신체능력뿐, 투기도 제법 잘 다루지만... 그래봤자야.’
틈이 보인다면,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견고하게 투막을 굳히며 엘리시스는,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쾅!
굉음과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드디어 깨졌구나!”
“뭐?”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엘리시스의 눈에, 여전히 멀쩡한 투막과 그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보레아스가 보였다.
페이크.
히쭉, 하고 웃고 있는 투르크의 전사를 보고서. 엘리시스는 자신이 보잘 것도 없는, 무척이나 어이없는 속임수에 속아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느낀 것은, 딸이 무사하다는 사실과, 그런 사실에서 찾아온 안도였다.
그것이 틈이었다.
아주 작은 틈.
초월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놓아주지 못했던 마지막 굴레.
‘자신의 아이와 남편’이라는, 초월자의 유일한 약점으로 생긴 작은 틈새가.
그 틈새가, 그녀의 의지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굳건했던 투기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ㅡ흐아!”
빠득, 하고 주먹을 휘두른 쿠르자하에 의해 엘리시스가 펼친 투막이 깨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새롭게 투막을 펼치려고 하는 엘리시스보다도 먼저, 우악스런 주먹이 엘리시스의 얼굴을 강타한 것도, 바로 그 뒤였다.
“어머니...! 윽...!”
새된 비명을 지른 보레아스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가, 꿰뚫린 어깨를 부여잡고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피를 뿌리며 날아가서 벽에 처박힌 어머니, 엘리시스를 바라봤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한 일을 당했는데도 보레아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되려, 나오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안에서조차도 나오는 것을 ‘거부’하며, 더욱 두껍게 바뀌는 엘리시스의 투막을 황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아, 아아...”
자신조차도 돌보지 않고서, 더욱 강하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펼쳐지는 어머니의 투막을 보고서 보레아스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 와중에, 쓰러지고서 피를 토하는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쿠르자하가 보였다.
“귀찮게 굴었으니 그 벌을 줘야겠지?”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을 가리고 있던 가죽을 벗어던진 쿠르자하와, 그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성기가 드러났다.
“안 돼, 안 돼...!”
이대로는 어머니가 모욕당한다, 자신 때문에 치욕을 당해버린다.
그 생각에 보레아스가 몸을 일으켜세웠다.
“으아아앙~!”
그런 자신을 붙잡고 우는 아이들이 보였지만, 지금으로썬 그 아이들을 달래줄 수 없었다.
“뭐야? 나오려는 거냐?”
“크흐흐흐, 그래. 그래야지. 어서 나와라, 우리가 잔뜩 귀여워해줄테니.”
그런 자신을 보며, 음흉하게 웃는 투르크의 전사들을 보면서. 보레아스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비할 수도 없는, 가느다란 투기를 손끝에 맺었다.
“......”
각오를 다지고서, 투막 밖에서 자기가 나오길 기다리는 투르크의 전사들을 보며, 보레아스가 땅을 박찼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투쾅!
굉음과 함께, 보레아스를 보며 창을 겨누던 투르크 전사의 머리가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