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304화
“너, 요즘 씻는 게 점점 오래 걸리지 않아~? 너 때문에 다들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응~?”
에루나의 말대로, 나름 후딱 끝내고 돌아갔는데도 그렇게 불평하는 카르네가 보였다. 뚱한 표정을 보니 단단히 삐친 것이 분명했다.
이유로는 늦어버린 아침 식사를 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아닌 것도 뻔히 보였다.
‘남는 시간동안 뭐할지 잔뜩 생각해뒀었는데~!’
빙글빙글, 머리카락을 꼬는 카르네의 마음속은 여전히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식사하기 전에 잠깐 있는 시간동안 뭔가 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깜빡하고 늦은 것도 사실이라 솔직히 사과했다.
“미안, 깜빡 졸아버려서.”
솔직히 사과한다고 했지, 솔직하게 늦은 이유를 말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카르네가 으, 하고 신음을 흘리다가 공략대상을 바꿨는지 에루나를 보며 말했다.
“...에루나, 너도 같이 있었을 거 아냐~? 얘가 자는데 그냥 내버려둔 거야~?”
하지만 나조차도 당하지 않는 카르네의 공격에 에루나가 당해줄 턱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카르네 아가씨. 워낙 곤히 잠드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시종일 뿐이지, 주인님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 이 역시 제 불찰인 만큼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그렇다고 그럴 필요는 없고... 아, 됐으니까 어서 고개 들라구~!”
태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에루나가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자, 카르네도 당황해서 손을 흔들며 그런 에루나를 일으켜 세웠다.
드래곤들의 보모. 에루나에게 약한 것은 모든 드래곤들의 특징이었다.
문자 그대로, 알에서 깨어나 갓 태어났을 적부터 그녀들을 보살핀 것이 에루나였던 탓이였다.
나도, 에루나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되새긴 카르네가 으으음, 하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 아니면... 다, 다음에는 나도 네가 씻는걸 도와줘도, 되는 데~?”
흘끔, 방금까지 강압적으로 말했던 것은 온데간데없이 살짝 두 뺨을 붉히며 그렇게 말해오는 카르네가 보였다.
첫날에 된통 당했던 탓인지 나와 목욕을 그토록 거부했던 그 카르네가 먼저 그런 제안을 뻗어온 것이었다.
오늘의 성취 덕분에 나름 자신감이 붙은 걸지도 모르겠다. 카르네의 성장에 눈물을 감출 수 있었던 내가 말했다.
“아니, 에루나가 도와주고 있으니까 괜찮아.”
어쩔 수 없었다. 카르네가 같이 욕탕에 들어오면, 목욕을 핑계로 에루나의 몸으로 성욕을 해소하던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니 말이다. 아니, 할 수야 있기는 한데 위험부담이 좀 크니까 사양이었다.
“그, 그래~? 뭐, 뭐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추욱, 하고 어깨를 늘어뜨리는 카르네를 보니 조금 미안하긴 했다.
“...뭐, 가끔씩은 괜찮으려나.”
“지, 진짜지~? 아싸~!”
내 말에 다시 어깨를 피며 좋아하는 카르네를 보고서, 양심의 가책이란 것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
반면 이번에는 에루나가 어쩌려고 그런 말을 했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지만 말이다. 애써 시선을 피해서, 최대한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침대 맡에 앉아있던 루시아들을 바라봤다.
“...아무튼, 루시아. 아샤, 아냐. 오래 기다렸지?”
“아뇨, 괜찮아요. 오히려 에루나가 고생했죠. ㅡ수고하셨어요. 에루나, 이지경님을 ‘씻기는데’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
“조금 많이 ‘더러운 것’이 쌓이는 것이 빨라지시긴 하셨지만, 아직까진 저 혼자서도 괜찮습니다.”
카르네에게 들키지 않게 말을 돌려 말하는 거지만 씻긴다느니, 더럽다느니 하는 걸 옆에서 듣자니 조금 쪽팔린데...
“그런가요... 다행히 이대로 계속 성장한다면... 곧 안정기에 이를 거라고 했으니까, 그때는 우리들도 도와줄게요. 그렇죠, 아샤? 아냐?”
“응, 우리 아기도 무럭 무럭 크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오빠.”
그렇게 말하는 세 아내가, 일주일 사이에 꽤 크게 부풀은 배를 어루만졌다.
역시, 저것도 아마 내 영향이겠지.
이제 겨우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눈에 띄게 부풀은 아내들의 배를 보고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에 없는 크리샤나 아르카는 아마 더욱 커졌을 거다.
그녀들도, 슬슬 이곳으로 불러올 때가 되긴 했는데... 음, 역시 카르네부터 어떻게 하고서 생각해야겠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가운데, 아내들과 카르네가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만~? 저 녀석을 씻기는 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혼자보단 둘이, 둘보다는 셋, 넷이 더 하기 쉽잖아요?”
“맞아, 카르네. 이 욕심쟁이야!”
“그러면 안 돼. 알겠어? 응? 모르겠다고?”
어째 자기가 따낸, 같이 목욕하는 권리에 편승해오려는 세 아내들을 보고 카르네가 불만을 터트린 모양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3대1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 모르겠다고 안했거든... 왜, 왜 그렇게 노려봐~? 아, 알겠어! 다 같이, 다 같이 하면 되는 거잖아~!”
카르네도 잘 설득한 것 같으니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역시, 혼자서 감당했을 때보단 여럿이 도와주는 지금이 편하긴 했다.
“...아, 그리고 이지경님.”
“응?”
그때, 루시아가 그런 나를 돌아보며, 여전히 투닥거리느라 바쁜 아샤와 아냐, 그리고 카르네 몰래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ㅡ슬슬 카르네도, 할 건가요?”
“으음...”
루시아의 말대로 이제 슬슬 카르네도 진도를 빼긴 해야 했다. 아까도 생각했던 것처럼 홀로 있는 크리샤와 아르카를 하루 빨리 천공성으로 불러오려면 카르네도 어떻게든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거, 조금 미루려고.”
“미룬다고요?”
내 말에 의아해하는 루시아가 보였다.
“그 얘기는 있다가 밥 먹으면서 하자.”
슬슬 아샤랑 아냐를 말리지 않으면 카르네가 또 울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자 루시아가 아샤와 아냐의 협공에 두들겨 맞으며 울상이 된 카르네를 돌아보고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군요. 그래서 이지경님이 직접 낙스에 가고 싶다고요?”
모두와 함께 식사하면서 엘리시스와 보레아스의 일을 대충 설명하자, 전말을 전부 들은 루시아가 내게 그렇게 물었다.
“그래, 허락해줄 수 있을까?”
그런 내 말에 고민하는 루시아가 보였다.
“...확실히 그녀들이 낙스에 있는 거라면, 낙스를 여는 것 자체는 동의해요. 하지만 이지경님이 직접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짧다면 짧은 고민이 끝난 루시아가 말했다. 그런 루시아에게 내가 물었다.
“그럼? 또 에루나한테 다녀오라고 할까?”
“......”
내 말에 입을 다무는 루시아가 보였다. 그런 루시아의 시선이 에루나를 향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뻔했다.
지금의 에루나는, 과거와 달리 제대로된 몸이 아니였다. 그때랑 비교해서 아주 조금정도의 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에루나보고 낙스를 다녀오라고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지금의 에루나는 낙스에서 버티기 힘들겠죠. 하지만 에루나 말고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낙스를 공개해도 되는 사람이 에루나 말고 더 있다고?”
낙스는 드래곤들이 철저하게 숨겨왔던 비밀 중의 하나다. 그런 곳을 다녀오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이가 몇이나 될까? 거기에, 낙스에서도 살아 돌아올 만한 실력을 갖추고 드래곤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칠 일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아마 없을 거다.
내가 알기로는 가디언을 두고 있던 것은 루시아가 전부였고, 루시아의 가디언이었던 에네스타도 솔직히 말해서 낙스를 다녀올만한 실력자가 아니였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내 아이를 갖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보는 루시아의 눈빛에 담긴 걱정을 내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낙스는 그만큼 위험한 곳이었다.
“나도 혼자 다녀온다는 말은 안할 거야. 낙스 출신의 아이들이랑 같이 다녀올 거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이미 낙스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들. 그곳에서 왔던 아이들이라면 낙스를 공개해서 생길 위험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아내들에게 위해를 끼칠 일도 없었다.
어찌됐건, 그 아이들은 내 아이들이였다.
가신 시스템에 묶여서, 그렇게 생겨버린 감정일지라도. 그 아이들은 나를 주인이자, 가족으로, 그리고 부모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찌됐건, 그 아이들을 한정한다면 배신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거기에 애당초 낙스 출신인만큼, 낙스를 다녀오는데 무척이나 도움이 될 몇 안 되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내 설득에 루시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는 동의할게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 동의일뿐이에요.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고 계시죠?”
“알고 있어.”
그거면 충분했다.
루시아의 말에 내가 그렇게 말하고서는, 내 옆에 있는 아샤와 아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샤랑 아냐도 동의해줄 수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오빠가 어디 갔다 온다는 소리지?”
“언니랑 아냐도 가면 안 돼?”
“응, 미안하지만 안 돼.”
낙스가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그곳이 험악한 오지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낙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마력이 적은 땅이었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에는 마력이 깃들어있다. 하물며 숨을 쉬는데 필요한 공기에도, 마실 물에도, 음식에도 깃들어 있었다. 그런 세계에서 마력이 적다는 것은, 반대로 말해서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공기도, 물도, 먹을 수 있는 음식도.
그 무엇도, 무척이나 적거나, 극독과도 같은 곳. 그런 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땅에서 드래곤은 더더욱 취약했다.
마력을 지배하는 종족.
그렇게도 불리는 드래곤들도, 그 자신들도 거대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생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반 마력, 반 생명. 그런 존재인 드래곤들이 마력이 ‘적은’ 땅에서 어떻게 될지는 안봐도 뻔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아샤와 아냐가 졸라와도 이번만큼은 무리였다.
“으으음...”
“오빠랑 떨어지기 싫은데...”
그런 내 말에 잔뜩 싫은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샤와 아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내가 말했다.
“부탁할게, 응? 돌아오면 같이 놀아줄 테니까.”
내가 그렇게까지 하자, 아샤랑 아냐 역시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대신, 다녀오면 아샤랑 잔뜩 놀아줘야하니까?”
“안 그러면 울거야.”
둘의 말에 내가 알겠노라고, 손가락까지 걸어가며 약속했다. 그러자 귓가에 맹세니 어쩌니하는 소리의 알림이 들려왔다.
어느새 나도 함부로 약속을 하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벌써 셋의 동의를 받은 셈이었다. 크리샤와 아르카의 경우에는 에루나에게 부탁해서 전해뒀으니까, 곧 대답이 돌아올 거고...
남은 건...
“카르네, 부탁해도 될까?”
“...싫어.”
그런 내 물음에 카르네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걱정했던 루시아나 아샤와 아냐는 생각보다 선뜻 동의해준 반면,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카르네가 오히려 반대하자 나도 놀라서 그런 카르네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런 나를 마주보며 카르네가 말했다.
“인간들이 서로 치고 박던 말던, 전부 죽지만 않으면 딱히 상관없는 일이잖아~? 근데 왜 굳이 그런 인간들을 구하겠다고 네가 그런 곳까지 간다는 건데~? 엘리시스? 보레아스~? 누군지도 모르거든? 그러니까 싫어, 난 절대로 동의 못해.”
“어, 음... 카르네? 내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아, 글쎄 난 싫다니까~?!”
버럭, 하고 그런 내게 소리를 지른 카르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튼, 난 동의하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서, 훌쩍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곤란한데.”
눈앞에 떠올라있는 카르네의 정보창을 보고서,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