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292화
“...죄송합니다. 나의 주.”
잔뜩 고개를 수그리며 송구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도 보지 못하는 에네스타를 보고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에네스타가 임신한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에루나도 에네스타도 아니고, 로로였다. 여느 때처럼 에네스타와 대련하던 도중에 그녀에게서 묘한 냄새가 나는 것을 로로가 눈치챈 것이었다.
그렇게 로로의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싶어서 에네스타를 살펴본 에루나가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어떻게 할지 고민 끝에 결국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내게 온 것이다.
그게 오늘이였다.
정작 에네스타가 임신한 것은 벌써 며칠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아이를 임신한 에네스타에 대한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됐다.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에루나를 비롯한 모두였지만, 그 이유야 뻔했다.
내 곁에 있는 드래곤들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녀들과 내가 한창 아이를 만들고 있는 와중에 정작 그녀들이 아닌 에네스타가 임신한 사실을 알릴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기다렸다.
어떤 결과가 있을지, 자신이, 혹은 아이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른 채로. 에네스타는 그저 기다렸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사과해오는 에네스타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말해줬어야 할까.
차마 생각이 나지 않아서 나온 건, 그런 말뿐이였다.
잘못한건 나다.
괜히 자격지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였다. 진짜, 이번에는 내 잘못이였다.
아샤와 아냐를 안기 전에, 미리 가득 마력을 부어넣고자 에네스타와 에오시스 자매들을 안았을 때 깜빡하고 피임을 안 해버린 탓이니까.
내 정액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씨없는 정액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성과 관련된 것이라면 거의 만능에 가까운 기능, 카마수트라 덕분이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에네스타나 에오시스 자매들과 할 때는 피임에 철저했다. 그녀들 역시 내 종족이었던 인간보다는 상위격의 종족이었던 터라 임신 자체가 그리 쉽진 않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샤와 아냐를 임신시키겠다는 생각만 가득해서 그런지 요번에 그녀들에게 냈던 정액 중에 피임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내 정액은 어마무시하게 강한 놈들이였다. 상대가 드래곤이라서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거지, 마음만 먹으면 인간 정도는 일발로 임신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러니 아리스하고는 절대로 앞으로는 하지 않았던 거고.
아무리 그녀가 검주라고는 해도, 또 내가 주의를 한다고 해도 한 마리라도 살아남은 종자가 있더라면 덜컥 아이를 가져버릴 거다.
단 하나뿐인 씨앗이라도 인간은 저항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만큼, 에네스타가 임신한 것은 전적으로 내 실수였다.
인간에서 벗어나고, 드래고니안이 됐다는 사실을 조금 우습게 봤다. 드래고니안이 대체 뭔지는 아직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적어도 인간보다는 격이 높은 종족이라는 것을 상기하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
격의 차이가 심할수록 아이를 갖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이세계의 법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설렁한 부분은 있었다.
상위 격을 가진 여자를 하위 격의 남자가 임신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그 반대로 상위 격을 가진 남자가 하위 격을 가진 여자를 임신시키는 것은 비교적 쉽다는 거였다.
난자와 정자의 특성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창과 방패, 그렇게 비유하면 우습긴 하지만 대충 그런 꼴로 이루어지는 생태에선, 역시 공격 쪽이 방어 쪽보단 유리한 법이다. 거기에 공격 쪽이 물량이라면 더더욱. 전쟁과 비슷한 이치였다.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니까. 안그래도 일반적인 사정량에 비해 훨씬 많은 내 정액들은 특히 그랬다.
아무튼, 그런 걸 깜빡해버려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인간과 엘프, 아니 음마였을 적엔 몰라도 드래고니안과 음마는 아무래도 드래고니안쪽이 훨씬 상위격이였던 모양인지, 한 번의 실수가 이런 결과를 낳고 말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루시아와 아샤, 아냐가 빤히 에네스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기가 싸늘하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를 책하거나, 욕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아니, 뭐라도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저 빤히 에네스타를 보고 있는 그녀들이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에네스타의 임신 사실을 숨길 수 있지도, 숨겨서도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급하게 루시아와 아샤도 깨워 사실을 밝히긴 했지만, 역시 불안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어찌 보면 사생아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이를 가진 에네스타를, 숨겨두는 것으로 보호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드래곤의 시선을 피해서 뭔가 숨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이미 경험으로 뼈저리게 깨우친 뒤니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볼 수도 없었다.
애꿎은 에네스타에게로만 향하는 세 드래곤의 시선에, 나만이 부담을 느끼는 것이 아니였으니까. 거기에 홀몸도 아닌 에네스타가 느낄 부담은, 태아에게도 위협적일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내가 나서서 뭐라고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그보다 먼저, 루시아가 에네스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진심으로 축하해요, 에네스타. 그리고 만약 당신과, 그 아이가 좋다면 하는 말이지만 나중에 당신의 아이를 제 아이의 가디언으로 삼아도 될까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오는 루시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네스타가 느릿하게 얼굴을 들어올렸다.
“...루시아님.”
울먹울먹, 하고 자신의 전 주인이었던 루시아가 잡아준 손을 황송하다는 듯이 올려다보는 에네스타의 눈동자에 맺히는 눈물이 보였다.
지금은 내 가디언이자, 동시에 애첩같은 느낌인 에네스타였지만, 한때는 루시아의 가디언이였던 에네스타였다.
심지어 에네스타가 루시아보다 나이도 많다.
루시아가 태어나고서, 에루나의 손에서 벗어나 독립했을 때. 그녀가 스스로 처음으로 만든 가디언이 에네스타였다. 그로부터 몇십년을 가까이, 가디언으로써 에네스타를 곁에 둔 것도 루시아였다.
둘 사이에 모종의 계약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거기까진 나는 알지 못하는 일이였다. 별로 알아야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유대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두터운 유대라도, 사랑이란 감정 앞에서 쉽게 깨지고 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유독 질투심과 독점욕이 강한 드래곤이라면 더더욱.
그런 와중에, 자신의 전 주인이었던 루시아보다 먼저 임신한 걸 알게 된 에네스타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루시아가 얼마나 아이를 고대하는지 알고 있는 에네스타였다.
무척이나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각오를 마치고 여기까지 온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방금의 루시아의 말은 그런 에네스타를 용서함과 동시에 그녀와 아이마저 보호하겠음을 약조하는 말이었다. 에네스타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의 가디언으로 삼겠다는 말은,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서 자라는 것을 자신이 지켜주겠다는 말과 동일했다.
에네스타의 아이가 죽어버린다면, 자신의 아이의 가디언으로 삼을 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넘어야할 산은 많았다. 소식만 전해두고 아직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당장 크리샤나 아르카가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에 그런 둘 말고도, 여기엔 드래곤이 아직 둘이나 남아있었다.
바로, 아샤랑 아냐였다.
“에네스타라고 했지?”
“흐응, 오빠의 아이라...”
아직 순진무구하기만한, 그런 소녀같은 외형을 하고 있는 둘이었지만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그녀들 역시 질투라는 감정에 집어삼켜지면 흉포하기 그지없는 흉성을 드러낼지도 몰랐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싶었지만, 만약이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기우였다.
“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랑 네 아이랑 친구하면 되겠네!”
“언니, 오빠의 아이니까 친구랑은 조금 거리가 먼데.”
“응? 아빠가 같으면 친구하면 안되는 거야?”
“으음, 그건 아니겠네. 우리처럼 말이야.”
“응, 그치?”
이히히, 하고 그렇게 말하는 아샤와 아냐를 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 역시 딱히 에네스타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질투하거나, 신경쓰는 기색은 없어보였다.
아니, 아직 갖지도 않은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줬다는 생각에 신이 나보이기 까지 했다. 아샤와 아냐의 반응을 보아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만이 아닌 듯 싶었다. 마찬가지로 그런 둘의 눈치를 보며 걱정하던 에네스타가 그제야 배를 감추듯이 두 팔로 얼 싸고 있던 것을 푸는 것이 보였다.
근데...
“...배가 벌써 저렇게 나왔어?”
에네스타 팔에 감춰져 잘 보이지 않았는데, 벌써 3개월은 됨직하게 불어온 에네스타의 배를 보고서 중얼거렸다. 아니, 3개월이나 됐다고는 해도, 비교 대상이라고 할만한게 크리샤밖에 없긴 했지만... 딱 봐도 그런 크리샤보다 훨씬 배가 나와있는 에네스타였다.
“이제 고작 이주일정도, 많아봐야 몇 주일텐데.”
실수를 했던 것은 저번이 마지막이기도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에네스타나 에오시스 자매들과 관계를 맺은 것은 주기적이였던 탓에 쉽게 계산이 나왔다. 그런데, 저 정도면 에네스타를 처음 안았을 때 임신한 것과 마찬가지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그럴리는 절대로 없으니까, 이상했다.
“...뭐 문제 있는건 아니지? 에루나.”
그 말에 에루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것이 걱정되어 몇 번인가 더 살펴봤지만 지극히 에네스타와 아이, 둘 다 건강했습니다.”
“...그래?”
너무 건강하게 빨리 크는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에네스타만 그런 것이 아니였다.
크리샤도 그렇고 아르카도 그렇고 되새겨보면 시간에 비해서 배가 많이 불어있었다. 에네스타가 유독 빠른 것이지, 둘 사이에서 가진 아이도, 일반적인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지나치게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는 셈이였다.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이라 그런 걸까.
그리고 에네스타의 경우에는 그보다 좀 더 뒤. 내가 드래고니안이 되고 난 뒤에 생긴 아이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드래고니안과 음마의 혼혈.
드래곤과 인간, 그리고 드래곤과 음마의 혼혈이다.
성장이 빠른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으려나...
“...애가 건강하면 됐지. 뭐.”
에네스타는 전에는 요정, 지금은 음마인데 거기에 인간이였던 드래고니안까지 섞였으니 엄청난 혼종이 태어날 것 같았지만, 생각하길 관두기로 했다.
어찌됐건 내 자식이다.
혹시라도 부모의 나쁜 점을 닮아서 잘못되지만 않길 바라면서, 몸을 일으킨 내가 여전히 엎드려있는 에네스타의 팔을 잡아 일으켜세웠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몸도 불편하면서.”
“나의 주...”
“내 아이를 가져줘서 고맙다. 에네스타.”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루시아와 아샤, 아냐의 앞에 선 만큼 더더욱 그러했다는 것도.
그 와중에 아무 말도 않고 있는 나를 보며, 그녀가 속으로 울고 있다는 사실도.
미안하고, 고마웠다.
만약에라도, 아주 진짜 만약의 경우에라도 루시아나 아샤, 아냐가 에네스타에게 해를 끼치려고 했다면, 그녀를 지킬 작정이긴 했지만. 그 사실을 표현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내 행동으로 인해, 괜히 셋을 자극하는 일이 일어나선 안됐다. 혹시라도 내가 에네스타를 지키려고 했다면, 그로인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아무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유가 있더라도, 에네스타를 안심시켜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거듭,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런 마음을 담아서 에네스타를 얼싸안자, 내 품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하는 에네스타가 보였다.
천생이 기사였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마치 아이처럼, 내 품 안에서 울었다.
이 역시 내가 부족한 탓이였다.
그녀를 안심시켜주는 것이 너무 늦은 탓이였다.
그러니까, 가슴팍이 좀 축축해지는 거야 신경쓰지않기로 했다.
“패앵...!”
...코를 푸는 것도 용서해주기로 했다.
나는 에네스타가 진정할 때까지, 그녀에게 품을 내주고서 등을 토닥여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