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278화
《광휘의 꽃, 루시아네스 파라모아.》
ㅡ최근에 여성용의 속옷을 대량으로 구입한 자에 대한 정보들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카에네스가 전해온 정보가 담긴 보고서를 루시아는 말없이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또 읽어본 뒤에야 덮었다.
“하아...”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저 단순하게 대량으로 속옷을 구입한 자에 대한 정보였기에 그에 해당되는 이가 몇인가 있었다.
상인.
부호.
그 밖에 여럿이.
그러나 그 중에서 한 명. 몇 번이고 확인해서 다시 읽은 이에 대한 정보가 적혀져있는 보고서가 루시아의 손에서 구겨졌다.
출신지 불명의 검은 머리카락의 용병.
채찍 같은 검을 사용하는 베헤라는 이름의 남자.
단편적인 정보였지만, 너무나도 뚜렷한 증거들이 거기에 있었다.
루시아는 쉽사리 이 베헤라는 이름의 인간이 자신의 연인인 이지경임을 알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도, 검을 사용하는 인간도 많았지만. 베헤라는 이름만큼은 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땅을 의미하는, 인간들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잊힌 고대의 언어.
기나긴 수명을 지닌 엘프조차도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된 이름을 가진 남자가, 자신이 직접 그에게 지어주었던 이름을 한 남자가 이 세상이 또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와서 인간들은 사용하지도 않는 그 발음은, 틀림없이 그라는 증거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채찍과도 같은 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자신이 선물한 검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루시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주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기억력이 나쁜 것이 아니였으니.
여러 정황상, 이 베헤라는 용병이 그라는 것을 확정한 루시아는 눈을 찌푸렸다.
그라는 걸 알게 됐기에, 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
어째서 천공성에 있을 그가 인간들의 나라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 그가 그곳에 있는지... 루시아는 알 수 없었다.
그에게서 들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고마워요. 카에네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자에 대한 정보를 모아주세요.”
ㅡ알겠습니다. 여왕이시여.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 그것이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님을 루시아는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모른다는 것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라는 것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지식들. 그로 인해 무지라는 것을 몰랐던 그녀였기에. 그로인해 그에게서 얻었던 미지의 경험이란 기쁨을 알게 됐던 그녀였기에, 그렇기에 마냥 사랑스럽게만 여겨졌던 무지가.
이토록 외로운 것이라는 사실도. 루시아는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다.
“......”
꾸욱, 이미 구겨진 보고서를 다시 구긴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도, 그에게 묻는다면... 분명히 알려줄 것이 분명했다.
가장 쉬운 길.
가장 빠르게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
하지만 구태여 가장 쉬운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에게 묻기만 하면 풀 수 있는 오해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도. 그저 자신이 지나치게 의심한 것에 불과한 일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도.
루시아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진실임을 알 수 없었으니까.
한 번 피어오르기 시작한 의심이 그를, 그의 말을 부정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에게 그가 거짓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속삭일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그 감정을 부정 해봐도, 의심이란 녀석은 바보처럼 그의 말만 믿는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해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견뎌낼 수 있을지, 루시아는 더 이상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어져버렸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가 그럴 리가 없다고. 그렇게만 신뢰를 보내올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짧은 순간 몇 번이고 갈등한 끝에, 결국 루시아가 선택한 것은 그가 무언가 이유가 있어 그러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 것이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럼 부탁할게요. 카에네스.”
...정말로 믿었다면.
그랬더라면 카에네스에게 그러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이중적인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루시아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 그렇게 며칠이나 지나고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의 곁에는 수북하게 쌓인 종이들로 가득했다.
카에네스가 구해오기 시작한, 베헤라는 이름의 가명을 한 이지경에 대한 정보들이 적혀져있는 보고서들로 가득해진 방에서 루시아는 편집적으로 몇 번이고 그것들을 다시 읽었다.
그가 어떤 상인의 딸과 식사를 한 것이라든지.
그와 이야기한 웨이트리스라든지.
그가 스치듯 지나갔던 귀족의 영애라든지.
자잘하다면 자잘한 것까지. 베헤라는 용병에 대한 모든 것들이 루시아의 앞에 모여들었고, 그 모든 것을 루시아는 전부 읽었다.
특히나 루시아의 눈에 들어온 것들은, 그가 만난 여성에 대한 것들이었다.
대부분... 아니, 거의 모두가 그저 우연히 지나쳐갔을 뿐임을 루시아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가기만 하는 질투심과 의심을 억누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가 자신들 몰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마음이, 혹시라는 생각에 물들었을 때.
루시아의 마음은 결국 꺾여나갔다.
아닐 것이라고 굳게 믿고자 해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있었다.
혹시나.
어쩌면.
그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드는 자신이 있었다.
무언가.
자신에게 무언가... 우리들에게 무언가가, 그가 부족함을 느낀 무언가가 있던 걸까.
그에 일거수투족에 대한 것들을 읽어나가면서, 그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가면서, 그에 대한 의심은 도리어 자신에 대한 불안으로 바뀌어갔다.
그에 대한 강한 신뢰는, 일그러진 신뢰는 되려 자기비하로 이어졌다.
머리카락부터, 몸매, 어투, 성격까지.
무엇 하나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부족하다고 여긴 적이 없던 것들마저.
이제와선 불안했다.
불안하고, 불안해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때 루시아의 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보였다. 찬란하게 반짝이던 금발의 끝이 갈라진 것이 보였다.
“...안 돼!”
비명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가, 그가 아름답다고 해주었던 머리카락이. 그것이 상해버렸다.
“안 돼... 안 돼...”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깨물었던 엄지손톱도 뜯기고, 일그러져서 흉측해져있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푸석푸석해진 피부가, 눈 밑에 드리운 다크서클이. 이제껏 보지 못한 것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가 사랑해주었던 것들이 망가지고 있었다. 그가 아름답다고 말해주었던 머리카락도, 그가 부드럽다고 말해주었던 살결도, 전부 망가져버리고 나면. 그에게 버림받고 말 것이 분명했다.
“...이래서는, 이래서는 안돼요.”
연거푸 시전한 치유 마법으로, 손상됐던 머리카락이나 손톱들이 순식간에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푸석푸석해졌던 피부도, 눈 밑의 다크서클도 전부 눈깜짝할 사이에 없어지고서. 다시 원래대로...
하지만...
“.....”
이래봤자 무슨 소용인걸까.
그가 옆에 없는 이상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카에네스? 들리나요.”
ㅡ네, 여왕이시여.
하루에 몇 십번이고 반복된 물음에 이젠 곧장 대답해온 카에네스의 목소리에 루시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그렇게 여기면서도 루시아가 물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망가져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지금 그는... 베헤라는 용병은 뭘 하고 있나요?”
ㅡ그것이... 실은 방금 막 드네아 공작가로 들어간 참입니다. 죄송합니다. 여왕이시여. 일전의 일로 당장 정보를 구하는 것은...
얼마 전 에루나의 부탁으로 구해다 주었던 드네아 공작가에 대한 정보. 그 탓으로 심어두었던 자는 드네아 공작가에 더 이상 없었다.
오랜 세월. 엘프조차도 늙어갈 세월을 버텨온 제국의 귀족가. 그 저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던 탓이었다. 카에네스로서는 드네아 공작가에 심어둔 세작은 겨우 무사히 탈출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하지만 그 또한 변명이리라. 금방 다시 그곳의 정보를 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 뒤로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면서. 루시아의 명령을 바로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죄송스러워하는 카에네스의 목소리에 루시아는 한참 끝에 입을 열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ㅡ면목 없습니다. 여왕이시여. 그리고, 감히 말하옵니다. 부디...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렇게 딱 잘라서 카에네스에게 말한 루시아는 그대로 연락을 위했던 수정의 마력을 회수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충동적으로 꺼내놓고 있었던 아티펙트를. 원경의 구슬을 바라봤다.
대상이 어디에 있던, 원한다면 그 즉시 그 자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드래곤들에게 있어서도 보물급의 마도구.
그것은 대대로 로드들에게 이어져온 아티펙트였다.
대상을 비춰 보이는 마도구야 많다. 특정한 장소를 비춰 보이는 마도구도 많다.
그러나 그것이 드래곤들에게 있어서도 특별한 이유는 원경의 구슬이 가진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넓은 범위와, 설령 드래곤조차도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설령 몇 중으로 된 보호마법을 몸에 두르고 있더라도, 원경의 구슬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만큼 강력한 마도구이기 때문이었다.
질서자.
그렇게 자칭하는 드래곤들을 감시하는 드래곤, 로드에게 있어서는 필요불가피한 아티펙트이기도 했다.
그것을 가만히 응시한다.
수천 년을 살아가는 드래곤에게 있어서도, 스스로 살아온 세월과 비교해서도 무척이나 짧은 몇 십 분이였다.
동시에 영겁과도 같이 길었던 몇 십 분 이였다.
“괜찮아요, 루시아. 괜한 걱정이잖아요? 그가... 그가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다시 기어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도리질 치고선.
꾸욱, 원경의 구슬을 손에 쥔 루시아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잠깐만. 잠깐이면 되니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조금은 나아질 지도 몰랐다.
오히려 괜한 의심을 하고 있기에 더욱 질투가 심해졌을 뿐이다.
그가 무사한 모습을 본다면. 그의 얼굴을 본다면... 다시 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여기고서. 루시아는 스스로 제한해뒀던 원경의 구슬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나 여기 마력을 바쳐 바라노니.”
내가 원하는 자의 모습을 비추라.
그렇게 영창이 끝나고서.
원경의 구슬은 그녀의 바람을 이뤄줬다. 그 누구든, 그 어딘가에 있던 간에 비쳐 보이는 아티펙트가.
영혼을 쫓아, 비춰 보이는 아티펙트가 빛을 발했다.
이윽고 황금빛의 보석과도 같았던 루시아의 눈동자에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의 얼굴이 비쳐보였다.
불과 몇 주 만에 보는 얼굴이.
그리고, 그런 그의 얼굴을 담는 루시아의 눈동자 역시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원경의 구슬은 대상과, 그 주위의 모습을 비춘다. 그렇기에 루시아는 볼 수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여인을.
열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주변의 상황같은 건 더이상의 루시아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의 곁에 자신이 아닌, 자매들이 아닌, 그리고 그가 아끼던 자들이 아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만이 보일 뿐이었다.
아.
“아으아. 아... 아아아아아아아...”
나신으로 서있는 엘리시스의 모습을 본 루시아는 영혼이 끊어지는 것만 같은 절규를 내뱉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날뛰는 마력이 사방을 찢어발겼다. 어지러이 나부끼는 종이들이 갈가리 찢겨져서, 흔적도 남지 않고서 사라져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주한 마력을 루시아는 제어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움켜쥐고서, 비명을 내질렀다.
어째서.
꽈악, 심장을 죄여오는 통증에 비명을 내지르면서. 가슴 위를 부여잡은 루시아의 눈동자가 그렇게 물었다.
눈동자에 비쳐 보이는, 그저 비쳐 보일 뿐인 이지경에게 그렇게 물었다.
어째서...
평소였다면 눈치채고도 남았을, 조금만 냉정했더라면 알아차렸을 일조차 이성을 잃은 루시아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반쯤 나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엘리시스와 그 앞에 있는 연인의 모습일 뿐이었다.
단지 그 뿐.
콰드드득!
결국, 날뛰는 마력들이 루시아가 거하고 있던 레어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가진 강대한 마력은, 그것만으로도 거대한 폭력이였다. 아무리 튼튼히 지어진 레어라고 하더라도, 버틸 도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후두둑, 쏟아지는 파편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루시아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황금빛의 거대한 날개가 무너진 잔해 속에서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