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7화 〉277화 (277/370)



〈 277화 〉277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보다 좋은 상황은 아니였다. 골렘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마력수도 대부분 빠져나간데다가 핵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그림자의 손으로 대체된 상황이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순수하게 내 마력으로만 이루어진 동체는, 보다 천공성에 있는 나와 가까운 힘을 낼 수 있게 됐다는 이점이 생겼지만... 그게 손실을 메꿀만큼 큰 메리트인  아니였다.

말이 본신에 가까운 힘이지 매우 효율이 나쁘니 말이다.

고작 몇 분.

딱 그 정도가 여러 의미로 이 몸의 한계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엘리시스가 알 턱이 없으니,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최대한 여유롭게, 이죽거린 내가 손을 뻗었다.

우우웅!

주변에 있는 모든 그림자들로부터 차례대로 그림자의 손들이 뻗어 나왔다. 꾸물거리며, 어둠에서 피어오르듯 솟아오른 수십 개의 그림자의 손들이 저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광휘를 움켜쥔다.

거기에 이어서 등 뒤에 뻗어 나왔던 거대한 두 그림자의  역시 더더욱 날개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빠듯하게만 느껴지는 한계가 바로 코앞까지 들이밀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전부 해볼 참이었다. 뽑을 수 있는 대로 전부 뽑아먹을 생각으로 그림자의 손의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

고오오오오...!


좌우로 넓게 펼쳐져있던 그림자의 손들이, 날개처럼 펼쳐져있던 끝부분이 마치 날카롭게 바뀌기 시작했다.


보다 전투적이고, 날렵하게.

쥐기 위한 손이 아닌, 베어내기 위한 칼날처럼.


“...멋진 모습인걸.”

경계하듯이, 내가 모습을 바꾸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시스가 변화를 마친 나를 보고서 그렇게 말했다.


“칭찬 고맙네.”

그런 엘리시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주변을 봤다.


내 주위를 돌며, 날 보호하듯이 움직이는 그림자의 손들과... 등 뒤로 뻗어 나온 칼날처럼 날카로운 날개들. 마치 수많은 검으로 둘러싸인 듯한 모습이였다.


확실히 엄청 멋진 모습이긴 했다.

여유가 있었더라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그럴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펑!

땅을 박차고 튀어나간 내 옆으로 맹렬한 속도로 그림자의 손들이 쏘아져나갔다. 제각기 다른 검술을, 베헤노스 검술과, 라이어스 제국 검술과, 시오니스 검술... 거기에 아리스의 검술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검술들을 펼치며 그림자 광휘를 움켜쥔 손들이 엘리시스를 향해 휘둘러졌다.

“...고작 그거뿐이라면 좀 실망인데.”


“그럼 다행이네. 아직 더 남았거든.”

콰지직!

그림자의 손을 튕겨내려던 엘리시스의 발밑이  하고 꺼져 들어갔다.

그림자의 손들과 함께 사용하기로는, 이미 그녀의 딸인 아리스에게도, 다른 검주인 에네스타에게도 실험을 거쳐서 실적이 있는 무척이나 효율적인 대지 속성의 마법. 파열하는 대지가 무영창으로 시전된 것이였다.

이젠 내 국민 콤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써먹는 마법이었고, 그때마다 제법 효과가 좋은 수단이였다.

하지만...

“이딴 잔재주로.”


발밑이 갑자기 꺼졌는데도 균형조차 잃지 않고서, 달려오는 나를 향해 곧장 검을 휘두르려는 엘리시스가 보였다.

“괴물 같은 년...”


남들은 검에 두르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는 투기를, 꺼져버린 발밑에 마치 판처럼 깔아서 받침대로 삼은 엘리시스를 보니 그런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이쪽도  개가 넘는 수단이 남았다.


누가 보면 하루 종일 섹스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일과에는 매일 같이  시간씩 대련과 수련이 끼여 있었다.


그때마다 매번 얻어터지기만 해서 몰랐지만... 여기에 와서 보니 나도 꽤나 세다는 걸 알기까지도 했다.

고작 초월자다.


드래곤인 마누라보다는 훨씬 나은 상대.

에네스타나, 로로를 상대로는 진심으로 할 수 없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ㅡ.”


엘리시스에게 베여서 사라진 그림자의 손들이, 다시금 주위의 그림자에서 뻗어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그림자로 된 광휘를 쥐고 나오지 않았다.


 대신, 저마다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이 손가락을 휘저었다.


바람의 칼날, 솟아나는 나무, 나무의 창, 그림자의 창...

저마다의 그림자의 손에서 펼쳐진 수많은 마법들이. 그동안 드래곤들에게서 흡수했던 수많은 마법들이 쏟아져서 엘리시스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단죄자의 검.”

더더욱 칠흑처럼 물들은, 그림자로 만든 광휘를 움켜쥔 내가 검을 휘둘렀다.



“크푸흡...”

입을 벌리자 얼마 있지도 않았던 마력수가 입 밖으로 토해져나왔다. 통증은 없었지만, 곤죽이 되어버린 살점과 함께 목 밖으로 꿀렁이며 나오는 마력수는 엄청나게 불쾌했다.

간신히 너덜너덜해진 팔을 손에 쥔 내가 엘리시스를 바라봤다.

고작 몇 분.


그 사이에 쏟아부은 마법의 수만 해도  수도 없이 많았다. 처음의 일격도, 단죄자의 검 역시 엘리시스에게 꽤나 유효하게 먹혀들어갔고.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결과는 엉망진창이 된 나와, 옷만 찢겨져서 알몸이나 다를 바 없어졌지만 최초의 단죄자의 검으로 찢겨져나간 오른팔을 제외하곤 멀쩡하기 그지없는 엘리시스뿐이었다.

“사기잖아...”


두터운 투기의 막.


검주급은 돼서야 몸에 두르는 투신을, 나로서는 도저히 뚫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력과 반발하는 투기의 특성 때문이었다. 투기를 뚫기 위해선, 같은 투기가 아니면... 보다 더 강력한 마법만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야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아예 통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끽해봐야 초급 마법정도에 불과하기는 하더라도, 수백이 넘는 마법들이었다. 그걸 그냥 몸으로 받아내면  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걸치고 있던 옷이 아니라, 몸 자체에 투기를 둘러 강화한 것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어마무시한 양의 투기였다.

그리고...


“잔재주는 이걸로 끝?”

백가지가 넘는다고 자신했던 모든 수단을, 그저 무력만으로 찍어누른 장본인이. 초월자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흐응, 끝인가보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서있는 나를  엘리시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검을 휘둘렀다.


스팟, 하고. 엘리시스의 두 다리를 묶고 있던 나무줄기가, 그녀의 검에 의해 끊어졌다. 내가 펼친 최후의 마법이 지나치게 허망하게 툭하니 끊어져버렸다.

“꽤 제법... 응, 저번의 오우거 때 이후로는 꽤 재밌었어.”

잘려나간 오른팔에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엘리시스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그렇게나 투기를 써댔으면서도, 아직도 짙은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투기를 검에 두른 채로. 자신의 나신을 감출 생각도 없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엘리시스를 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어째서 곧장 오른팔을 버린 거지?”

“아, 그거...?”


마법과 함께, 처음으로 날린 단죄자의 검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오른팔을 버리는 것으로 쳐내버린 엘리시스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야 이 몸이 진짜 몸이 아닌, 그저 골렘뿐이라고 해도 엘리시스는 아니였다. 엄연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팔을 내주고서, 되려 내 허리를 잘라버렸던 엘리시스를 이해할  없었다.


그 탓에  그래도 개판이였던 몸이, 싹뚝 잘려버린 핵과 함께 더욱 개판이 나서  모양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거기서 그런 식으로 반격할  알았다면, 나 역시 어떻게 대응했을 텐데.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여서 그러지 못했다.


덕분에 시작부터 걸음을 잘못떼고 시작해버린 셈이 된 나는 계속해서 밀린 끝에 이 꼴이 되버렸다.

그래서 물었다.


나중에라도 도움이 될 테니까.

“...그 검, 검게 물든 검 말이야. 그건 쪼오금, 위험해보였거든. 근데 네 잔재주들이 꽤 귀찮게 굴어서.”

그래서 버렸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 엘리시스의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피할 수도 있지 않았나?”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나보다 하수인 상대한테서 도망치니.”

미친년.


결과적으로, 눈앞에 있는 저 년이 상당히 돌아버린 년임을 확인한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피할 수는 있었지만, 피하기 싫어서 팔을 버린 미친년의 대답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빙그르르, 그런 나를 보며 재밌다는 듯이 검을 돌리며 다가오던 엘리시스가 보였다. 팔이 뜯겨져나갔는데도 저 태도다. 아마 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에야 저럴 것 같았다.

그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약속대로 널 때려눕혔으니. 이제 우리 딸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보아하니 우리 딸이랑 잘 아는 사이같던데.”

“...아, 그거.”

몸 상태를 확인해본다.

아직은 복구가 가능한 듯 싶긴 했지만, 그럴 필요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엉만진창인 몸이였다. 그래서 말했다.


“잘 알지. 그렇게 잘 조여 주는 여자는 얼마 없으니까.”

우뚝, 하고 내게로 다가오던 엘리시스가 발걸음을 멈췄다.

씨익, 하고 내가 입가를 뒤틀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고서, 적어도 이건 제대로 먹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렇게 했다.


“네 딸 개쩔더라고. 얼마나 쩌는지 너는 모를 걸... 아, 그래. 내가 선물해준 꼬리도 봤어야하는데. 그건 좀 아쉽군.”


살랑살랑 흔들리는게 보기 꽤 좋다고, 감상평을 들려주듯이 내뱉은 그 말에. 검을 움켜쥔 엘리시스의 손에 핏대가 솟아올랐다.

"...무슨 의미야? 그거."

"네 딸 엉덩이 개쩐다고."


재차 묻는 엘리시스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엉덩이.


꼬리.


결국, 내 말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한 엘리시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서, 내가 마지막에 마지막에 가서야 이겼다는 충족감을 느꼈다.

휘익, 하고 바람을 찢으며 엘리시스의 검이 휘둘러졌다.

정확하게 내 목을 노리고서.


응, 끝이다.

목적이였던 마왕의 딸의 정체는 확인도 못해버리고 말이다. 재수 옴 붙었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휘둘러진 엘리시스의 검이, 내 목을 쳐내기 직전에 빛이 번쩍이며... 내게 향하던 엘리시스의 검이 꺾여나갔다.

ㅡ멀쩡했던 엘리시스의 왼팔과 함께.


후두둑. 얼굴 위로 떨어지는 핏방울들이 내가 잘못본것이 아님을 알려줬다. 허공을 붕 떠서 날아가는 저 팔이, 그리고 그  끝의 손에 쥐여진 검이 저게 엘리시스의 팔이였음을 증명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하지만 그런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한 것이, 느껴졌다.

“어...”


오싹, 하고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과 함께. 갑자기 환해져버린 주위를 보고서. 나는 무심코 하늘을 쳐다봤다.

“......”


저걸 생명체라는 잣대로, 그 누가 수긍할 수 있을까.

신이나, 초월적인 현상. 드래곤이 사라진 시대. 드래곤이 잊혀진 시대. 단순하게 옛 이야기로 치부되는 세계에서. 그렇게밖에 여겨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연재해나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질 법한 것이 거기에 있었다.


인간의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만 여겨지는 거대한 것이  날개를 펄럭인다.

태양을 가리고도, 오롯하게 그 존재만으로도 하늘을, 지상을 밝히는 존재가.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루시아...?”

내게 보여줬던, 본신의 모습보다도 훨씬 거대한... 모습의 그녀가 보였다. 내게 단  번 보여주고, 그때에도 부끄럽다고 금방 도로 모습을 바꿨던 그녀가. 거대한 불길을 등에 진 것만 같은 새의 모습을  채로.


“ㅡ좆됐네.”

나지막하게,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루시아의 입이 열렸다.


ㅡ추락하는 별.

너무나도 거대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가 그녀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마치 웅장한 노랫소리처럼. 하늘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진 직후.


하늘에서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루시아의 위로 수천 갈래의 빛줄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불타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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