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275화
“그렇습니까?”
뭔가 맺혀있는 것이 많아 보이는 보레아스의 말에 대충 호응하며 대답하자, 마치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처음 본 것인냥 신나 보이는 기색의 보레아스가 보였다.
“너는 다른 놈들과는 달리 말이 잘 통하는군.”
옛날의 에네스타를 보는 듯한 천상기사인 그녀가 저러는 모습을 보니 꽤 귀여웠다.
“그런데, 남성은 질색이라고 했으면서 그 병사는 잘만 도와줬군 그래?”
응?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보레아스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혹시 이 병사랑은 사이가 좋지 않은건가... 그게 아니면 내가 잘못봤다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게 반쯤 안겨있다시피한 병사를 흘끔 쳐다봤다.
역시 잘못본게 아니였다. 물론 아리스보다도 작기는 했지만.
“여자잖아요, 이 사람.”
성별적으로는 확실히 여성인 병사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네놈, 아무리 날 도와줬다고 해도 그런 모욕을ㅡ!”
격하게 반응하며 내게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버둥거리는 병사가 보였다. 하지만 나보다 한참은 약한 근력으로 그래봤자 끄떡할리도 없었다. 그나저나... 반응이 이상하다.
분명 여자인데, 그걸 이렇게나 격하게 부정하는 것이 말이다. 내 감각이 틀릴 리가 없는데. 아무리 이 골렘에 카마수트라 같은 사기적인 능력은 없다고는 해도, 애당초 이 골렘은 근본부터가 그렇고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골렘이었다.
가장 중요한 게 다리 사이에 달려있지는 않지만. 그쪽으로 쓸 만한 특성인 섹스돌을 통해서 병사의 성별이 뭔지는 확실하게 구분이 가능했다.
무언가로 억누른 것인지, 평평하다싶을 정도로 가슴이 작고, 단련하기만 했을 뿐 특별히 경지에 오른 것도 아니라, 근육만 늘어났을 뿐인 엉덩이도 딱딱하긴 했지만 이 병사는 분명 여성이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부정하는 걸 보면 뭔가 있는 모양이긴 했다. 가만 보니 얼굴도 향이 없는 분같은 걸로 칠해서, 남성으로만 보이게 화장한 모양이고, 머리도 염색도 한 모양인지 검은 머리카락의 뿌리는 옅은 회색빛이기도 했다.
...회색이라.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등 뒤가 오싹오싹하기까지 한 것이... 약간 쎄한 그런 기분이었다. 눈앞의 보레아스도, 내게 안겨져있는 병사도, 딱히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이는 없는데도 이런 감각을 느낀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안고 있던 병사를 품에서 놓아줬다.
화장만 벗기면 꽤 예쁘장할 것 같은 병사가 갑작스레 내가 팔에서 힘을 놓자, 내게서 멀찍이 떨어지고서 나를 노려봤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는 과장스레 몸을 털어냈다.
“실례. 뭔가 착각했던 모양이네요. 당신이 남성분일 줄은 몰랐어요.”
“무, 물론이다. 내가 여자일 리가 없잖나! 하지만 사과했으니... 이번만큼은 용서하지.”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하는 병사에게서 관심을 껐다. 그 대신에 아까보다도 더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 보레아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보레아스씨?”
“음? 내 이름을 알고 있었나?”
유명하다면 유명한데도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 보이는 듯한 보레아스가 말했다.
“타인에겐 이름보다는 용갑기사단의 단장으로 자주 불려서 조금 어색하긴 하군. 그래, 왜 불렀나. 베헤?”
재미있다는 듯이 이쪽을 보며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보레아스가 보였다. 저런 점도 에네스타를 비슷한 것이, 당장이라도 나랑 대련하고 싶어 한다는 게 정보창을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심사 말이에요. 저는 다른 방식으로 하면 안 될까요?”
“나와 대련이 싫다는 건가?”
당연히 싫지.
오우거처럼 대가리가 빈 몬스터도 아니고, 검주와의 대련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옥같은 지는 에네스타와 아리스 덕분에 차고 넘치게 알고 있으니까. 하물며 골렘이란 걸 들킬지도 모르는 위험성도 있으면 더더욱 검주인 보레아스와 직접 대련하는건 삼가고 싶었다.
“하지만 심사는 대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나와 대련을 하지 않겠다면...”
쉬익!
바람이 찢어지는 파공성은 뒤늦게 들려왔다.
그보다 앞서서 눈앞에 번쩍이는 빛이 쇄도했다. 소리조차도 뒤늦게 들려오는 찰나의 순간. 나는 겨우 두발자국을 뒤로 옮기는 것으로 목을 벨 기세로 휘둘러진 보레아스의 검을 피해냈다.
보고서 그랬던 것은 아니였다. 보고서 움직여본들 이미 늦어버린 후니까. 이미 충분히 대비하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과 며칠 전의, 골렘의 몸에 아직 적응이 덜 된 시점이였다면 그대로 목이 날아갔을 지도 모르겠다만.
더군다나, 아무리 첫 공격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보레아스가 두 번째로 다시 검을 휘둘렀다면 그것까지 피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경고. 그런 의미에서 온 공격이였기에 단순히 뒷걸음질 친 것만으로 피할 수 있었다.
스윽, 하마터면 베일 뻔한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보레아스를 바라봤다. 내 시선에 입가에 미소를 띤 보레아스가 말했다.
“넌 단순히, 드네아 공작가에 무단으로 침입한 침범자가 되는 것인데. 그래도 좋나?”
극도로 예리한 투기가 둘러싸인 보레아스의 검이 보였다. 푸른빛이, 오롯하게 칼날에만 맺힌 채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아주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오직 칼날에 집중된 투기를 보고서 나는 무심코 감탄했다.
극단적으로 예기를 강화시킨 타입의 투기. 절삭력만큼은 가장 무시무시한 형태의 투기였다. 저런 거에 베이면 아무리 강철을 비롯해, 여러 금속으로 이루어진 몸에 내 그림자의 손으로 감싸 강화시킨 골렘이라도 싹뚝하고 잘릴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그녀의 검에 맺힌 투기는 날카로워보였다.
오로지 벤다는 이치만을 따른 투기, 단 한 점을 뚫기 위해 벼려낸 아리스의 것과는, 유동적인 검술에 따라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투기를 가진 에네스타와의 것과는 다른 투기.
검술만이 아니라 성품의 영향을 받는 투기가 저런 형태를 취한 것은. 눈앞에 있는 검사가 극도로 절제되고, 완성되어있는 검사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었다.
이유야 어쨌건, 나 또한 검술을 익히고 투기까지 어찌저찌 깨우친 몸으로써. 검주로써, 그리고 검사로써 이 정도까지 단련된 보레아스를 보고 있으면 역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눈앞에서 형형한 빛을 뿜고 있는 투기를 두른 검이 있다. 마냥 대단하다고 감탄하고 있을 처지는 당연히 아니였다.
“으음...”
병사가 내가 검을 다룬다고 했을 때 명복을 빈다고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사가 검사로서, 검을 맞대고 싶어 하는 것은 일종의 욕망이였다.
자신이 인정한 검사를 본 검사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더 강해진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전사라는 족속들이란 것을 태생부터가 전사들인 낙시안들을 거두어들인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보레아스도, 그러한 전사이리라. 지금도 내 반응을 살피며, 기대하고 있다는 걸 감추지도 않고 있으니.
검주씩이나 되는 검사에게 인정받았다는 점은 조금 기쁘긴 하지만.
‘곤란한데 정말로.’
방금 전의 일격으로 보레아스의 실력은 잘 알았다. 본격적으로 대련이 시작된다면, 그녀의 공격을 전부 피하거나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검술만으로는 나보다 보레아스가 몇 수는 위였으니까.
하지만 물러선다고 하면?
“자, 어떨 텐가. 베헤?”
그대로 정말로 침입자 취급해서 공격해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든 맞붙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력만 인정받으면 되니까, 굳이 대련할 필요는 없죠?”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엘라제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담기 시작했다.
“보고서 결정하시길.”
그런 내 말에 의아함과 동시에 호기심을 담은 눈빛으로 나를 보는 보레아스의 시선을 느끼며.
꾸욱.
힘을 준다.
더욱. 더더욱. 더 많은 힘을.
단 한 번의 일격을 위해서. 힘을 끌어모으고, 당겨올리고, 부풀린다.
꾸드드드득!
“호오?”
거듭해서 변화하기 시작한 골렘의 몸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종아리부터, 허벅지, 어깨와 가슴, 팔, 그 밖에 '검'을 다루기 위한 근육들이 팽창하듯이. 그림자의 손에 의해 재구성되기 시작한 신체가, 오직 단 한 번의 일격을 위해서 변화하기 시작한 신체가 느껴졌다.
근육을 본떠서 만든, 갈래갈래 나눠진 금속으로 된 실들 사이로 스며들어간 그림자의 손이 그러한 금속들을 엮어서, 고정하고, 강화시키는 것을 느꼈다.
연결. 강화. 고정. 팽창...
짧은 순간 순간, 새롭게 강화를 거듭하는 근육이 마침내 일을 냈다.
투두둑!
입고 있던 가죽옷이 급격하게 부풀어 오르는 신체에 비명을 지르던 끝에 결국 터져나갔다. 실밥이 터진 것처럼, 뜯겨져나간 이음매 사이로 드러난 근육들은. 내가 보더라도 흉악하다 싶을 정도였다.
애당초 내 신체는 원래부터가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장인이 조각한 조각상과도 같았던 내 몸은 만 명에 한 명 꼴의 재능을 지닌 신체랍시고 만인지상이라는 특성까지 부여받았던 몸이었으니 말이다.
그랬던 것이 한층 진화해서, 이제는 한 등급 위의 특성인 무결지체가 됐다. 그런 몸을 본떠서 만든 골렘의 몸 역시 완벽하긴 그지없었다.
그랬을 텐데 그게 지금은 극도로 부풀어 올라서, 스테로이드를 왕창 들이부은 마초처럼 되어있었다.
“……”
경악한 듯이 입을 벌리고서 굳어버린 보레아스가 보였다. 그런 보레아스와 눈이 마주쳤다.
“...으음.”
차마 못 볼거라도 본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보레아스를 보고서.
어마무시하게 변해버린 몸에 과부하를 걸고서, 엘라제를 휘둘렀다.
콰자자자작!
채찍처럼 휘둘러졌을 터인 엘라제가 마치 공성추라도 된 것마냥 연무장을 박살내버렸다.
이 몸은 투기를 쓰지 못한다.
생명체가 아니라 그런지, 이미 깨우친 투기를 아무리 써보려고 해봐도 쓸 수 없던 탓이었다.
본래 가진 힘의 몇 배가 되는 힘을 낼 수 있는 투기. 그것이 없는 골렘의 몸으로. 그런 투기를 재현시켰다.
투기 자체를 재현한 것은 아니였다. 투기가 육체에 끼치는 영향을, 내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재현시킨 것 뿐이었다.
그 결과물이 이거였다.
단순하게 힘만으로, 단 한 번 휘두른 검에 의해 벌여진 파괴. 극도로 높인 신체능력으로 이루어진 일격은.
내가 보더라도 능히 검주급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한 번뿐인 일격이 끝나고서, 다시 빠르게 쪼그라들어서 본래대로 돌아간 몸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움직이거나 하는 데는 별 문제없었지만, 방금 걸로 인해 이 골렘의 수명이 10년은 줄어버렸다.
어차피 한 번 쓰고 말거라서 별로 아쉽지는 않았지만.
“어떻습니까?”
나는 당연한 것처럼, 험악하게 다뤘는데도 불구하고 멀쩡하기만 한 엘라제를 허리에 다시 차고서는 태연한 얼굴로 보레아스에게 그렇게 물었다.
이 정도라면 굳이 대련할 필요도 없이, 실력을 입증한 셈이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이거로군. 어머니께서 얘기하셨던, 그 말의 의미가.”
반짝반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던 보레아스가 다가왔다.
“투기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이정도의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하물며 그토록 단련된 신체와… 그런 신체를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극한으로 숨긴 능력까지. 투기를 그토록 단련한 와중에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체질의 문제인가? 허나, 그쯤은 별 문제 없을 터.”
뭔가 일이 이상하다고 느낀 내가 몸을 뒤로 빼는 것보다 빨리 내게 다가온 보레아스가 와락,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어머니가 말씀한 대로다. 분명 어린 시절 들었던, 그때 그 말의 의미를. 나는 느끼고 있으니.”
두 뺨을 붉히며, 천상의 기사였던 보레아스가 마치 첫사랑에 빠진 처녀처럼 말했다.
“분명 이것이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는 걸 의미하는 거겠지. 베헤, 나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주지 않겠나?”
다짜고짜 유부남에게 청혼한 보레아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야 보레아스는 내가 유부남인 거야 모르겠다만, 그래도 초면에 청혼 같은 짓을 할 줄은 정말로...
“...으으음?”
가만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던 것 같은데. 만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그것도 한 명도 아니고 일곱이나 되는 드래곤들에게 단체로 꼬셔주겠다느니 뭐니 했던 것이 나였다.
순식간에 할 말이 없어진 내가 멈칫하자 그런 내 반응을 고민한다고 여겼는지 보레아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대와 나의 자식이라면 분명히 건강한, 그리고 무척이나 뛰어난 아이가 태어날 테지. 그대가 나와 결혼해준다면 비록 많은 것을 약속하지는 못하지만 한가지만은 그대에게 줄 수 있음을 약속하마. 앞으로의 내 인생을 그대에게 주마.”
열정적이다 못해 데여서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그녀의 말에 내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흐으응? 우리 딸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
대체 언제부터,
아니. 어떻게 나타났는지도 미처 알아차릴 새도 없이. 내 옆에서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그녀가 있었다.
회색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뒤로 땋아 넘긴, 기사다움 그 자체인 보레아스와 달리 검만 허리춤에 차고 있을 뿐, 가볍기 그지없는 차림으로.
“나도 이야기에 껴주지 않으련? 보레아스.”
제국의 초월자, 엘리시스가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