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273화 [광휘의 꽃]
그라면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녀들은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확신하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인간은 변한다.
그는 변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까지 그가 얼마나 바뀌어왔는지를 보아온 자신은 그 사실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불안했다.
착하기 그지없는 그가, 상냥하기 그지없는 그가, 그 누구보다도 당당히, 사랑해 마지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그가... 언제까지나 상냥할 거라곤, 언제까지나 그럴 거란 보장이 있을까?
언제까지나 그가 자신을 사랑해줄거란 보장은?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인간은, 그녀가 알고 있는 인간은 그런 존재였다. 영원한 사랑을 바라면서도, 영원이란 말을 손쉽게 내뱉으면서도. 금새 그 마음이 바뀌어버리는. 영원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시간만에 그 감정이 시그라드는 그런 존재였다.
그도 인간이었다.
그도 분명 변할 것이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감정과, 현실을 직시하라는 이성이 맞물려서 마음을 좀먹어간다.
야금야금.
검게 죽어서, 약해진 부분부터 조금씩.
“...그래서, 에루나. 이지경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샤와 아냐에게 일이 생긴 것도 아니라면,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건가요? 그것도 직접... 당신은 지금, 그럴 여력이 없지 않나요?”
불안과 질투.
아무리 억눌러도, 자꾸만 새어나오는 추한 감정들이 다시 뛰기 시작한 심장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들은 뱀처럼 교묘하게, 심장을 조여올 뿐 치명적인 고통을 주진 않았다.
단지 속삭일 뿐.
이대로 둬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를 보고 싶지 않느냐고. 그에게서 가장, 아니 유일하게 사랑받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느냐고.
너무도 달콤해서, 도리어 마음을 싸늘하게, 냉정해지게만 드는 유혹들. 하지만 그렇게나 뿌리쳐도, 조금씩 자신을 좀먹어가는 유혹들이었다. 충동적일 뿐인 그 유혹에 점점 혹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결국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 것이란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루시아는 아직까지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지경이란 남자에 대한 믿음으로.
불안하기 그지없어도, 신뢰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아닌 그를 믿음으로써,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써 마음을 지탱했다.
그렇기에 루시아는 에루나에게 물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이지경님이 자신을 찾은 적은 없었나요, 혹은 그가 자신에 대해 무언가 말한 적은 없었나요, 하고. 정말로 묻고 싶었던 말 대신에.
“에루나, 굳이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직접 찾아온 이유가 대체 뭔가요?”
감정을 억누른 루시아의 이성은, 에루나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녀가... 자신의 몸의 상황을 알면서도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당신은 좀 더, 이지경님의 곁에 있고 싶었던 것이 아니였나요? 이럴수록 그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도 알고 있지 않나요?'
그렇게 묻는 듯이, 루시아가 에루나를 바라보자 에루나 역시 그런 루시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와 연보랏빛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루시아였다. 에루나의 두 눈이 마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서. 루시아가 무심코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꾸욱, 하고. 지나치게 풍만한 가슴을, 자신의 손으론 전부 가릴 순 없었지만. 그걸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루시아가 다시 에루나의 시선을 받아내자, 길었던 침묵 끝에 에루나의 입술이 열렸다.
“루시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다른 아가씨들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손이 가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랬던 가요? 저도 상당히 개구쟁이였던 걸로 기억하는걸요?”
“대부분은 크리샤 아가씨나, 아샤 아가씨, 아냐 아가씨가 원인을 제공했었으니 말입니다. 그에 비하면 루시아 아가씨께서는 무척이나 얌전하셨습니다.”
갑작스런 옛 이야기에, 루시아가 의아하던 찰나에 에루나가 말을 이었다.
“루시아 아가씨. 당신은 가장 먼저 보옥을 지배할 수 있게, 다른 자매들 중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성장하셨고, 가장 솔선해서 모두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언제나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고 계시지요.”
그래서, 하고 에루나가 말했다.
“제일 먼저, 루시아 아가씨께 온 겁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들께 선물을 보내라 하셔서 말입니다.”
“선물이요?”
선물이란 말에 루시아가 눈을 반짝였다. 하물며, 사랑하는 연인의 선물이라는 말에 더더욱 그랬다. 그런 루시아를 보면서 에루나가 공간을 열어 잘 포장된 꾸러미를 건넸다.
선물을 받아든 루시아가 에루나를 바라보자, 에루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에루나를 보고서 포장을 뜯은 루시아가 꾸러미의 내용물을 확인하고서 얼굴을 붉혔다.
“이건... 속옷, 이네요.”
그야, 남편에게 선물이랍시고 받은 물건이 야하기 그지없는 속옷이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것도 천이라고는 자신의 손바닥만큼은 썼나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저렴하게 사용한 속옷이라면 더더욱. 끈과 아주 약간의 천으로만 이루어진 속옷을 보며 루시아는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조심스레 드레스 위로 몸에 속옷을 대본 루시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자신의 가슴을 가리기는커녕, 오히려 유륜과 유두를 드러내도록 되어있는 브라도 그렇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 활짝 열려져 있는 팬티도 그렇고... 이게 정말로 속옷인가 싶었다.
차라리 헐벗은 쪽이 덜 야할 것만 같은 속옷을 보고서. 그가 자신이 이런 속옷을 입기 바라는 걸까, 하는 그런 의문 또한 들었다.
...그가 기뻐해준다면, 입어달라고 부탁한다면 아마 자신은 기꺼이 입을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확실히 이 속옷의 의미가, 정말로 속옷의 기능을 하기보다는 밤의 유희를 더욱 즐겁게 하기 위함임을 눈치 챘으니 말이다. 이걸 입고서, 그의 앞에 서면 얼마나 기뻐해줄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 방에 있는... 그가 전에 선물해주었던 장난감이 그리워질 정도로.
“...하아♥”
무심코 새어나온 뜨거운 한숨과 함께, 자신의 몸을 쓸어내린 루시아는 그새 입고 있는 속옷이 젖어든 것을 느꼈다. 아주 잠깐, 그저 상상했을 뿐인데도 애액과 모유로 젖어버린 팬티와 브라를 느끼고서, 첫날밤을 앞 둔 색시처럼 얼굴을 붉히는 루시아를 보고서, 에루나가 말했다.
“그럼 저는 크리샤 아가씨한테도 선물을 전하러 가보겠습니다 ”
그런 그녀의 말에, 이런 선물이 자신에게만 보내진 것이 아님을 실망하면서도, 수긍한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이 그에게 선물을 받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되니까.
아무리 그래도, 아쉽다는 마음조차 없는 것은 아니기에 한참 뜸을 들인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에루나, 이지경님께 선물은 잘 받았다고, 다시 밤을 보낼 날을 고대하겠노라고, 그렇게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알려주실 수 있나요? 에루나. 어째서 이런 일을 한 건가요? 굳이, 당신이 직접 올 이유는 없잖아요? 전하기만 할 뿐이라면, 굳이 당신이 아니여도 되지 않았나요?”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루나가 말했다.
“루시아 아가씨께... 때때로 감정을 터트리는 것도 좋다는 말씀을 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루시아는 멈칫했다.
그 사이에 에루나가 고개를 숙이고서,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이동 마법을 통해 되돌아간 것을 보고서. 루시아는 그저 에루나가 떠나간 곳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감정을 터트린다라, 에루나. 그러면 안된다는 것쯤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았나요?”
드래곤들의 종주. 로드라는 입장으로써. 자신은 모든 드래곤들의 억제력이 되어야했다. 모두 중에서 누군가는 했어야만 했던 일.
그 일을, 가장 적합하다고 여긴 자신이 도맡았을 뿐이었다.
그런 자신이 감정에 흔들리는 드래곤이여서야, 말이 되질 않는 일이었다. 드래곤들을 중재하고 억눌러야하는 자신이 되려 불안한 존재여서는 얼토당토않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터트린다라...”
에루나의 조언을 떠올린다.
만약.
자신이 조금 욕심을 부린다면.
어쩌면 다른 자매들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주지 않을까? 물론 맨입으로 그러겠다는 건 아니었다. 양보를 바란다면, 자신 또한 양보해야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임신 중이기에 관계를 맺지 못할 크리샤와 아르카를, 그리고 아직 그에게 이렇다할 호감이 없는 카르네와 샤르를 어떻게 설득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조금 이르게, 아주 잠깐뿐이라도 다시 그와 함께 있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들고 있던 속옷을 다시 한 번 쳐다보던 루시아의 눈이 멈칫했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던 가정으로, 들떴던 심장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손끝에서부터 핏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과 함께. 혀 위에 꿀처럼 달콤하게만 여겨졌던 것들이 순식간에 쓰디 쓴 맹독처럼 다가왔다.
비상한 만큼, 추락하면 아픈 법이었다. 높이 오를수록, 그만큼의 낙차는 괴로움으로 다가오는 법이었다.
기뻤던 만큼, 자신이 눈치채버린 사실에 루시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달싹이려는 입을 다시 굳게 닫고서.
굳어버린 눈빛으로 그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멈춰있던 루시아가 이내 움직였다.
“카에네스, 들리나요?”
똑똑, 품에서 수정을 꺼내 두드리며 루시아가 말하자, 이윽고 수정이 빛을 내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립니다. 위대하신 우리들의 여왕이시여. 파라모아의 정당한 지배자시여.
라이어스 제국의, 요정향의 사신단으로 가있는 카에네스의 대답에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대량의, 여성용의 속옷을 구입한 자를 찾아주실 수 있나요? 범위는... 그래, 지금 당신이 있는 라이어스 제국... 인간들의 제국으로 충분하니까요.”
-네? 네. 여성용의 속옷을 대량으로 구매한 자... 알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알아오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의아스러운, 하지만 그럼에도 복종의 뜻을 밝히는 카에네스의 대답에 그렇게 말한 루시아가 수정을 집어넣고서 이지경에게 선물 받은 속옷을 바라봤다.
다시 살펴봤지만, 드워프나 엘프, 혹은 인어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속옷은 아니였다. 애당초 앞 선 세 종족은 이런 속옷을 만들지 않거나, 입지를 않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종족들이었다.
물론 그의 부탁이라면 만들기야 했겠지만... 어디까지나 이 속옷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의ㅡ.
그와 같은 인간들의 전유물이였다.
성에 대해서, 이토록 노력을 더하는 종족은 인간을 제외하면 그리 많지 않고, 이런 것을 만들 재주도 없었으니까.
문득,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여자가 떠올렸다.
그의 곁에 있는, 그의 노리개로써 허락된 인간인 여자가.
이런저런 제한을 두긴 했지만, 그와 살을 섞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거기까진 그의 곁에 있는 에네스타나 에오시스 자매들, 거기에 에루나와 다를 바가 없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만큼은, 그가 원해서 곁에 둔 여자라는 점에서 차이가 생겼다.
그런 그녀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도 인간이였다.
어쩌면.
어쩌면...
아닐 것이라고 부정하면서도, 혹시나하는 생각이 떨쳐지질 않는다.
입술을 깨물고서, 루시아는 가슴 위로 속옷을 꾹 품에 끌어안았다.
불안으로 떨리는 손으로, 그가 선물해준 것을 움켜쥐고서. 그것이 자신을 지탱해줄거라고 믿는 것처럼.
“아닐거에요. 아닐거야. 그렇죠...?”
황금빛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흔들흔들.
물 위에 뿌려진 먹물이 번지듯이.
검게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