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272화 [광휘의 꽃]
《광휘의 꽃, 루시아네스 파라모아.》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서 루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작스레, 그것도 자신이 펼친 결계를 넘어서 공간이동을 해올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루시아는 떠올린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서,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자매들이였다면 굳이 저런식으로 문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거고, 요정향에 문제가 생긴거라면 자신이 먼저 눈치챘을 것이다.
그 밖에 허락된 이 중 하나인, 자신의 가디언이었던 에네스타는 검술은 뛰어났지만 마법의 재능이라곤 바닥을 치는 수준이니 스스로 공간이동이라는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몇 명으로 좁혀졌다.
목줄을 차고 있는 초월자들과, 자신이 허락한 몇 안되는 이들.
그리고, 예상대로 그 몇 안되는 이 중 하나였다. 하지만 루시아가 생각했던 이 중에서도 가장 의외의 인물이기도 했다.
“...에루나?”
전보다 색이 더욱 옅어진,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녀. 에루나를 보고서 루시아는 하던 일을 멈췄다. 우웅, 하고 루시아의 손이 떨어지자 황금빛의 보옥의 떨림이 멈췄다. 완전히 움직임을 중단한 보옥에서 시선을 떼고선,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그것도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무슨 일인가요?”
파라모아의 깊은 숲 속에 위치한 요정향에서, 더욱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자신의 레어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에루나에게 루시아는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그녀의 방문은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불과 1년전만 해도 이런 에루나의 방문은 그리 놀랍지도, 갑작스런 일도 아니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때의 에루나는 모든 드래곤의 보모이자 유모, 동시에 모두의 부모와도 같은 입장이였다면 지금은 오직 단 한사람, 이지경을 위한 골렘일 뿐이었다.
물론 우리 중에서 그 누구도, 그런 그녀가 자신의 영지를 찾아오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진 않겠지만. 아마 지금의 에루나가 이런 식으로 찾아오면 모두가 자신처럼 의아해할 것이 분명했다.
그야 그녀가 주인을 찾은 이상, 그녀는 드래곤들의 유모가 아닌, 오직 한사람만을 위한 골렘이였으니까. 자신의 반려인, 이지경을 위한 골렘이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전이였다면 몰라도, 지금은 그녀가 이지경의 곁에서 떨어질 이유가ㅡ
“...혹시 이지경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갑작스레 그녀가 자신을 찾아올만한 이유로는 오직 그것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기묘한 일을 겪고는 했었다. 마치 온갖 행운으로부터 시험받는 것처럼. 주위에, 그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온갖 것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갓난아이조차도, 펄펄 끓는 용암이 뿜어져 나오는 화산에 내버려두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그는 언제나 위험에 빠지고는 했다.
드래곤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그의 몸을 지키는, 그런 드래곤의 공격조차 튕겨내는 기묘한 보호막이 있음에도, 검에 찔려 심장이 뚫리거나 하는 재수라곤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만이 아니였다. 그는 스스로 위험을 자처하는 경향이 있었다.
때로는 그를 위해 낙스에서 구해온 소녀를 위해서. 때로는 자신의 심장을 찔렀던 소녀를 위해서.
또 때로는...
바보처럼, 굳이 뻗지 않아도 되는 손을 뻗고야 만다. 굳이 잡을 필요가 없는 손을 잡아주고야 만다.
그는 그런 사람이였다.
이번에도 그럴 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에 이른 순간, 순식간에 밀려드는 걱정으로 빠르게 묻는 루시아의 말에 에루나는 평소처럼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선 말했다.
“주인님은 무척이나 건강하십니다. 오히려 너무 건강하셔서 탈일 정도로. 오늘도 아샤 아가씨와 아냐 아가씨가 탈진하실 때까지... 아주 기운차셨으니 말입니다.”
“...그런가요.”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것과 함께, 에루나의 말에 양 뺨이 홍조를 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루나가 뭉뚱그려서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루시아가 아니였다.
대체 아샤와 아냐가 그와 함께 무엇을 했는지, 그의 뭐가 기운찼는지는 말하느니 못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욱신, 하고. 걱정이 사라지기 무섭게 피어오르는 감정이 심장을 조여오는 기분을 느끼며,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지만,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무사히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괴로웠다. 그것이 필요에 의한 것임을, 자신 또한 동의한 일임을 알면서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게 설령 자신과 자매처럼 지내온 아샤와 아냐라고 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자신과 동등한 그녀들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동등하기에, 언제라도 자신이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 또한 들었으니까.
그렇더라도, 루시아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는 것과 함께 다시 가면을 고쳐 썼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에요. 아, 혹시 아샤와 아냐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주러 온 건가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에루나가 여기까지 올만한 다른 이유를 묻자, 이번에도 에루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아직입니다. 주인님께선, 아직 아샤 아가씨와 아냐 아가씨가 준비가 부족하다고 하시더군요.”
“준비, 인가요. ...그렇군요.”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에 사태를 파악한 루시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동시에 속으로 감탄했다.
에루나를 통해서 이야기는 간간히 전해 듣기는 했지만, 최근의 이지경이 벌인 일들을 떠올리면 새삼스레 고작 몇 개월 만에 그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조차도 최근에 알아차린 사실을, 그 역시 어느 정도 눈치 챘음을 알아냈으니 말이다.
하긴 그러니 크리샤와 아르카가 아이를 갖게 된 거겠지만.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과거에 비해 놀랍도록 변한 그를 떠올렸다.
가장 처음, 그에게 안겼던 만큼. 루시아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자매들은 모르는, 그의 면면조차도.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가 제 품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보였을 때가 떠오르네요. 그때는, 정말로 귀여웠었죠.’
적어도 루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의 이지경이 들었다면, 그때의 루시아도 귀여웠다고 말하겠지만.
지식만 겨우 알고 있는 채로, 자신에게 마음의 벽을 치던 이지경을 유혹하기 위해 별의 별 짓을 다했던 루시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추억을 때때로 미화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추태는 잊히게 되는 법이다.
아무튼 루시아가 기억하고 있는, 이지경이란 남자는 무척이나 순진하고, 착해빠진. 이세계에서 소환된 드래곤의 반려자였다.
자신들의 사정만으로 소환당했음에도 불구하고서, 그런 자신들을 이해해준 무척이나 착한 사람. 솔직하게, 그에게 호감을 갖기 전까진 그가 너무나 착할 뿐인, 그런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한때는 이용해먹기 좋은 인간이라고, 그렇게 여겼던 적도... 분명 그랬던 적도 있었다. 고작 몇 주도 안되는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본 이지경은 화를 내는 법도 모르는, 그런 바보 같은 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였다.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을 때의 모습을 봤으니까. 그저 그가 남들에 비해서 더 높은 임계점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때 알 수 있었다. 그도 화를 낼 줄 안다는 것을, 또 그도 슬퍼할 줄 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들이 행한 것들이, 단지 그에게 있어서 그리 의미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기에, 그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란 것도 그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지경이 자신의 품에서 울었던 것을 떠올린 루시아는,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가면이 아닌, 진정으로 기쁘게 미소 지었다.
이것만큼은 오직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그와의 추억이었다. 아직 변하기 전의 그에게서만 볼 수 있었던 모습이였으니까.
이것이 비틀린 독점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기뻤다.
그와의 추억은, 오직 그때만 존재했던 그와의 추억은 오직 자신만의 것이니까.
그때의 그는, 더 이상 없다.
그는 바뀌었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라는 것을, 드래곤의 입장으로써 무척이나 좋은 방향이라는 것을 루시아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가 미숙했던 시절의, 그랬던 그의 곁에서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것이,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와의 추억은, 가슴 속 깊숙히서부터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검은 감정을 억눌러줬다.
그래, 이거면 됐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비틀린 감정이, 비틀리는 또 다른 감정들을 억눌러주는 지금은 이걸로 좋다, 고.
하지만...
‘...점점 그와 멀어진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네요.’
가장 처음, 그와 만났기에 그가 아직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을 알고 있기에, 그가 변해가는 것을 에루나를 통해 전해들을 때마다 가슴이 메여왔다.
점점 더, 드래곤들의 호감을 얻는 일이 빨라져가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더더욱 그랬다.
그가 꽁꽁,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적에 그의 곁에 있었던 만큼.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자신이 얼마나 고민하고, 또 언제나 자신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었으니까. 그에 반면, 다른 자매들은 그가 먼저 손을 뻗었다. 그 점은... 한편으로 부럽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쯤을 모를 루시아가 아니였다.
이제까지, 그에게 안긴 드래곤들 중에서 아이가 없는 것은 자신뿐이였으니까.
아샤와 아냐도 아직이지만, 이미 드래곤과의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그라면, 얼마가지 못해서 아샤와 아냐의 임신 소식을 들려줄 것이다.
아샤와 아냐가 부족하다는 준비라는 것도, 무엇인지는 대충 예상이 가기도 하고.
둘은 드래곤으로서도 미숙했지만, 확실히 인간으로서 변해있는 모습 역시 미숙한 몸이였으니 말이다.
그의 말대로 준비가 부족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점에선 확실히 저의 실수였어요.’
지식이 부족했다.
경험이 없었다.
그렇기에 실수했다.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닌 것을 간과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몇 번이나 그에게 안기더라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임신을 하기 위한, 수정이 되도록하는 마법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 전의 생물의 생태부터 파악했어야 했다.
...지금이라면 다르겠지만. 자신도, 그도 여러모로 준비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려면...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의 말도 안 되는 계획대로 천공성에 모두가 모이는 일이 없는 한은 그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분명ㅡ
한순간, 모두의 곁에 자신들을 닮은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때. 자신만이 홀로 있는 것을 상상한 루시아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주위에 있는 모두가, 품에 아이를 안고서 자신을 비웃는 모습을 상상해버렸으니까.
그마저도ㅡ 아이를 갖지 못한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그런 상상을.
아아.
그건 정말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상상이었고, 망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