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240화
마왕.
400여 년 전이 땅에 강림해서, 자그마치 십 수만이 넘었던 군대를, 인간을, 국가를 지워버렸던 괴물들의 왕.
아니, 단지 400여 년 전만이 아니였다. 기록상으로는 2000년 전에도, 1만 년 전에도, 그 유명한 전설 중 하나인, 신마대전... 신들의 싸움 중에서도 강림해서, 세계를 위협했던 전설적인 괴물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마물들, 즉 몬스터들은 그런 마왕들의 부하들의 후손이나, 그때 열렸던 마계의 문을 통해 넘어온 존재라고 알려져 있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서 일어나는 천재지변, 그 자체인 존재가 마왕이었다.
그런 마왕이 강림했다는 소리에 카자흐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십 수 년이 넘도록 국가를 좌지우지한 왕답게, 표정을 고쳤다. 그러나 그런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철혈이라는 이름이 붙은 재상인 뮬런이 놓쳤을 리가 없었다.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전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거두절미하고, 콕 집어서 찔러오는 뮬런의 말에 카자흐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국의 재상이 독대를 하자고 하여 신하들을 물렸건만, 터무니없는 농담을 들어서 그러했소. 본왕을 웃기려고 했다면... 썩 좋은 농담은 아니였소.”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가설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하는 카자흐의 말에 뮬런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입니다. 전하.”
“말도 안 되는 농담하지...”
말을 잇던 카자흐가, 굳어져가는 뮬런의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소. 마왕이 나타났다는 그 말... 증거가 있소?”
“있습니다.”
증거가 있지 않으면 헛소리 말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던 카자흐의 귀에, 뮬런의 대답이 울려 퍼졌다.
“...증거가 있단, 말이오?”
마왕이 나타났다. 그 증거가 있다는 뮬런의 말에 카자흐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리고, 그런 카자흐를 보며. 뮬런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것이 마도구의 일종이란 것을 알아차린 카자흐가 물었다.
“그 안에 그 증거가 있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뮬런이 주머니에서 꺼내든 것은 작은 주머니에 들어있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팔’이였다.
“그건... 오우거의 팔이 아니오? 그게 어찌하여 마왕의 증거라는 말이오?”
“그냥 오우거의 팔이 아니옵니다. 전하. 잘 보십시오.”
뮬런의 말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오우거의 절단 된 팔을 바라보던 카자흐가 경악했다.
푸른 투기의 기운이, 오우거의 팔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투기.
그것은, 그걸 다루는 기사이기도 한 카자흐도 잘 알고 있는 힘이었다. 하지만, 그런 힘을 오우거가 다룬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야 그도 그럴게, 몬스터들은 투기를 다룰 수 없었으니까.
“투기라니... 죽은 지가 대체 얼마나 된 것이오?”
“이제 이주 째가 되어가는군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전하?”
“......으음.”
낮게 침음하며, 카자흐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이 뮬런이 내보인 오우거의 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오우거의 팔에서 미약하지만 흘러나오고 있는 푸른 기운. 그것을 잘못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틀림없는 투기다.
하지만 투기는 죽은 자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은 뒤에도 바로 사라진다는 것은 아니었다. 투기를 다루는 자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경향이 강해졌다. 어느 검주는 검을 빼들고서 죽고서도, 3일간 검으로 투기를 뿜어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오우거를 보라.
죽어서, 팔만이 남았을 뿐인데도 이주가 되어가도록 투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 말은, 이 오우거가 검주... 그 이상의 투기를 다뤘다는 소리였다.
“말도, 안되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이건 그 일부입니다. 이러한 오우거가 무려 스물이 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투기를 다루는 오우거가 스물이라고?”
그건 재앙 그 자체였다.
“아닙니다. 투기를 다루던 오우거는 여섯... 나머지는 평범, 아니 평범하지는 않겠군요. 그 오우거들 모두 지성을 지녔다고 하니 말입니다.”
“투기에, 지성까지 갖췄다는 소리오? 오우거가? 한낱 몬스터에 불과한 존재가? 그게 말이 된다고 하는 소리요?”
“그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실재했으니, 그야말로 마왕의 강림. 그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뮬런의 말에 신음하던 카자흐가 물었다.
“...이 오우거를 벤 자가 누구요?”
투기를 다루는 오우거다. 재앙, 그 자체나 다름없는 괴물이다. 검주조차도 상대하기 어려운, 아니 검주가 상대나 할 수 있을까 싶은 그런 괴물이다.
“대체 그 누가, 이런 괴물을 잡아 죽였다는 말이오?”
카자흐의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문에, 뮬런이 대답했다.
“전하, 말하기 부끄럽습니다만... 제 아내, 엘리시스 드네아가 이 오우거를 베어죽였습니다.”
“그대의 아내가...? 아니, 어떻게...”
“...제 아내, 엘리시스 드네아가 초월자이기 때문입니다.”
초월자.
그 말에 카자흐는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이어진 뮬런의 말에, 그런 카자흐의 입은 더더욱 벌어졌다.
“그리고 제 아내는 지금... 그때 입은 상처로 요양중이옵니다.”
제국의 재상으로 알려진 뮬런, 그 아내가 초월자라는 것도 믿겨지지가 않는데... 아니, 애당초 투기를 사용하는 오우거란 것도 믿겨지지 않는데, 그런 초월자마저 그 오우거를 상대하다가 입은 상처로 요양중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전력으로는, 절대로 이 오우거를 잡을 수가 없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카자흐의 손끝이 떨렸다.
괴물.
그런 괴물을, 자신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투기를 다루는 오우거라도 한 마리라면... 십 수 명의 검주와 군대를 동원하면 어찌저찌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초월자가 상대했다는 여섯 마리라고 하더라도, 제국의 군대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오우거와 동급,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괴물들이 더 있다면? 그런 괴물을 다루는 존재를, 카자흐는 직접 면전으로 보지 않았는가.
게다가... 그런 존재들마저 따르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카자흐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왕, 그 이름이 떡하니 카자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인간은 자고로 지나치게 큰 충격을 받으면, 그 사실을... 부정하고자 하기 마련이었다. 한참 떨리던 카자흐의 손이, 꾸드득하고 쥐어졌다. 이내 결심한 카자흐가 뮬런을 보며 말했다.
“믿지 못하겠소. 그대가 본왕을 속이기 위해... 마법으로 이런 것을 만들었을 지도 모르지.”
“...투기와 마력은 상극이라는 것을 잊었습니까?”
“제국이라면 그런 법칙조차도 어찌하는 방법을 찾았을지 모르지 않소?”
고개를 내저으며 그렇게 말한 카자흐가 입을 열었다.
“...오늘 본 것은 잊도록 하겠소. 이만 물러가시오. 그리고 상황이 나아지면, 제국과의 거래도 계속될 테니 안심하고......”
“증거가 더 있습니다.”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소?”
“제 딸아이, 아리스 드네아... 그 아이는 천신교의 성녀입니다. 그리고, 제 아이를 찾기 위해 아리스가 실종된 장소로 찾아간 아내가... 마주한 것이 이 오우거였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마왕이 강림했다는 증거입니다.”
“이야기는 제법 그럴듯하게 꾸몄지만...”
성녀를 납치한 마왕, 그렇게 주장할 셈인가.
그야말로 클리셰, 그 자체인 이야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굳게 다짐하고서ㅡ 이 일을 모른 척하기로, 설령 그것이 인류를 반하는, 괴물의 편에 서는 일이라도... 어떻게든 잡아떼며 모른 척 하려 한 카자흐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그리고, 얼마 전에... 천신교의 또 다른 성녀가 탄생했습니다.”
성녀의 탄생, 그 말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의 기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나거나, 그에 준한 일을 이룬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 성녀였으니까.
뮬런의 딸, 아리스 또한 그러했다.
그녀가 검주가 된 날에, 천신교에서 엄중히 보관중이었던 천검이 그녀의 앞으로 스스로 날아갔으니까.
신의 기적, 이적을 이루었기에 아리스는 천신교의 성녀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탄생한 성녀... 제 2의 성녀가 이룬 기적은.
“예언이 있었나이다. 마왕의 도래, 그에 대한 예언이. 새롭게 탄생한 성녀가 이룬 이적이였나이다.”
ㅡ전하. 하고 뮬런이 안색이 꺼멓게 죽어서, 후두둑하고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하는... 젊지만, 젊어 보이지 않는 란자카의 국왕을, 카자흐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에 거하는 만마의 왕이, 괴물들의 사랑을 받는 자, 하늘로 거꾸로 솟아오른 대지를 땅에 내리 꽂을 마왕이. 그가 땅으로 내려와 세상을 불태우리라는 예언이, 마왕의 강림을 알리는 예언이 있었나이다.”
“성녀님... 성녀님...”
눈물을 흘리며, 비루한 거지가 한 소녀의 손을 잡고 숨을 헐떡였다. 병들고,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져있는 거지였다. 지금 당장 마지막 숨을 토하고 숨이 멎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거지였다.
그런 거지가 고름이 흘러내리는 손으로 소녀의 손을 꾹, 잡으며 말했다.
“제발... 제발, 쇤네를 살려주십시오. 기적을... 이적을... 부디...”
검은 안대를 눈 위에 두르고, 얇고, 하얀 두루마기 같은 옷을 걸친 소녀가 그런 거지의 손을 부드러운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그런 거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이 당신의 소원인가요?”
하아, 하고 요염하고 달콤한 한숨처럼, 거지의 귀를 애무하는 듯한 소녀의 목소리에 몽롱하게, 거지의 두 눈이 풀렸다.
그런 거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거래를 하도록 하죠. 저는... 당신의 목숨을 살려드리도록 할게요... 그 대신에... 당신은 저에게 뭘 해주실 수 있나요?”
사랑을 구애하는 소녀처럼, 음란하기 그지없는 탕녀처럼. 수줍고도, 유혹적인 그 목소리에 죽어가던 거지의 양물이 솟아올랐다. 마지막 생명을 불태울 기세로 치솟은 그, 흉물을 보면서 소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ㅡ아무래도, 당신이 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이는군요.”
하지만, 하고.
“이번만은 선불로 해드리도록 할게요.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멋도 모르고, 그런 소녀의 말에 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커, 으, 아극... 어억...”
무언가에 붙잡힌 듯, 허공으로 떠오른 거지의 몸이 이리저리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 몰래, 눈여겨보고 있던 제물과 복수를 위해 갈아두었던 검을... 빼앗아간 이가 어디에 있는지... 드디어 찾았으니까요.”
원수의 후손과 후손이, 서로를 죽이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가 처참하게 돌아가신 이레로 차근차근 준비해왔던 것들을, 한순간에 빼앗아간...
하지만, 도리어 그 덕분에... 일이 빨라졌다.
본래는 제물을 취하고, 성녀로 내세운 아리스를 통해 동쪽의, 검은 용부터 차례대로 무너뜨릴 계획이었지만...
“마왕, 감히 내 것을 취하는 것도 모잘라서... 그 이름을 취한, 무례한과 함께... 이 세상에서 몸뚱아리만 커다란 도마뱀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벌써 찾아올 줄이야.”
부르르, 몸을 떨며. 검은 성녀는.
마침내 완성된 새로운 노예의 뺨을 쓰다듬었다.
“...크르르.”
본래 거지였던 괴물이 온몸에서 질척하게 고름을 흘리며, 그런 성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더이상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낮게 흘렸다.
그런 거지의 울음소리를 천상의 연주라도 되는 냥, 황홀한 듯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검은 성녀가 중얼거렸다.
"나의 아버님... 드디어 복수의 때가 찾아왔어요... 400년을 기다려온, 달콤한... 복수의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