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4화 〉234화 (234/370)



〈 234화 〉234화
“안녕, 오랜만이야 인간 오빠!”

“반가워, 인간 오빠!”


아드리아, 광활한 바다로 이루어진 아샤와 아냐의 영지. 그 경계를 넘어서자 공간을 넘어온 아냐와 아샤가 활기차게 내게 인사해왔다.

푸른 바다처럼, 파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천진난만하게 미소 짓는 쌍둥이 소녀를 보고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내 이름은 이지경이거든...? 부르기 어려우면 차라리 베헤노스라고 불러주지 않을래?”


오래간만에 인간이니 뭐니하는 호칭으로 불리니 좀 어색했다. 사실 요즘은 이지경이란 이름도 어색할 정도였다. 가끔 내 이름이 주씨의 인님이라던가, 바씨에 보라던가, 뭐 그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름을 불리는 경우가 드물다보니 그랬다.

더군다나  외에는 이지경이란 이름보다는 루시아가 지어준 베헤노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도 잦아져서 그랬다.


그래서 이지경, 혹은 베헤노스 둘 중 하나로 불러달라는 내 말에 아샤와 아냐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지경 오빠나, 베헤노스 오빠나, 어느 쪽도 이상하잖아.”


“그건 그런데. 그래도 인간 오빠는 좀 아니잖아.”

“그럼 그냥 오빠로 하지 뭐, 그나저나 얼굴은 왜 그래?”


아샤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이며 그렇게 물었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던 지라 나는 준비해둔 대답을 했다.


“물렸어.”


“물려? 벌레한테라도 물린 거야? 엄청 큰 벌레였나보네!”


내 말에 그렇게 말하고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아냐를 보고서 씁쓸하게 웃었다.

물렸다. 그건 맞았다. 근데 벌레한테 물린  아니었다. 벌레보단 좀 크고, 벌레보단 훨씬 아름다운 사람한테 물렸다.


그래, 맞다. 아르카한테 물렸다.

에루나와 몰래  걸 당연하게도 걸려버린 뒤에 에루나의 대답을 듣고 잔뜩 토라진 아르카가 내 뺨을 잡아당기는 걸로 분이 안 풀렸는지 냅다  뺨을 물어버린 거였다. 몰래 하지말라는 말을 안 지킨건 내 잘못이니까 그래도 싸긴 했다.

다행히 이빨 자국은  남았지만 덕분에 발갛게 붉어진 뺨은 아직도 붓기가 가라앉지 않아있었다.

변신했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고, 아르카의 이빨은 드래곤의 이빨이였다.


아르카에게 물려서 아직도 쓰라린 뺨을 만지고 있자니, 그런 내게 아냐가 물었다.

“그런데 아르카는?”


“방에서 자고 있어. 깨면 바로 돌아갈 거니까 내버려두래.”

아무튼 그런 아르카를 열심히 달래준 덕분에 곯아떨어진 아르카는 내 방의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중이었다. 곤히 잠들기까지 꽤 고생하긴 했지... 섹스말고 그냥 순전히 애무로만 아르카가 만족할 때까지  번이고 보내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늦은 아침인 지금까지도 깨지도 않고 뻗어있는 거지만.


“그래? 아쉽다. 아르카도 아기 생겼다면서? 할 얘기가 잔뜩이었는데.”


“가서 깨우면 화내겠지?”


“잠에서 깬 아르카는 무척 예민하니까. 그냥 내버려두자.”


아냐의 말에 아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내는  둘째 치고 지금 방에서 잠들어 있는 아르카는 남에게 보여줄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정사의 흔적이야 치웠지만 알몸으로 잠들어 있으니 말이다.

“뭐, 별 수 없지. 그보다 오빠, 이거 선물!”


그리고 그런 내게 아샤가 웬 왕관을 내밀었다. 큼지막한 보석이 박혀있는 왕관이었다.


“...뭐야 이건?”


“선물로 받은 건데, 오빠 줄게. 예쁘지?”


“예쁘긴 하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예쁘긴 했다. 정말 어디 왕이 쓰던 왕관처럼. 그럴리가 없겠지만... 왕관이라니... 아드리아에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종족이 있었던가? 갸우뚱하고, 왕관을 바라보다가 아무튼 이런걸 받아도 당장 쓸데도 없고 해서 인벤토리에 왕관을 집어넣었다.


“에, 쓰는거 보고 싶었는데.”

“잘 어울렸을 텐데.”

그런 내게 실망했는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샤와 아냐가 보였다.

기껏 준 선물의 반응이 영 시원찮지 않자 토라진 듯한 어린 아이 같은 그 모습에 미소 지으면서 그런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머리 헝클어지잖아!”

“기껏 예쁘게 꾸민 건데!”

“좀 헝클어져도 둘 다 예쁘니까 걱정 마. 그래서   아침은 먹었어?”

예쁘다는 내 말에 베시시하고 웃으면서 정말? 하고 되묻던 아샤가 아침은 먹었냐는  말에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맞아맞아, 까먹을 뻔 했네. 오빠, 이거 선물!”


또?


그런 생각을 하며, 아샤를 보자 꽤나  물건인지 쩌어억하고 크게 벌어지는 공간이 보였다. 왠지 루시아에게 선물 공세를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옷이며, 검이며, 이것저것, 잔뜩 내게 선물해줬던 루시아가 말이다.


...그러고보니 소식도 듣지 못한지 꽤 됐는데, 나중에 에루나한테라도 물어보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간이 열리는 걸 기다리자, 이윽고 완전히 열린 공간 너머로 툭하고 무언가가 튀어나와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저, 여기가... 제 새 직장... 입니까요...?”

새하얀 빵모자를 쓴, 겁에 질린 아저씨였다.

지끈지끈...

아샤가 꺼내든 빵모자 쓴 아저씨의 정체를 알게 된 덕분에 머리가 아파왔다.


“후우...”

한숨을 내쉬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자니 조금 두통이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겁에 질린 채 엎드려 있는 아저씨를 보다가 내 부름에 달려온 에루나에게 말했다.


“이거 어떻게 하면 돼?”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면 됩니다.”

내 말에 그렇게 대답하는 에루나를 보고서,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샤, 아냐.”

“으응...”

“잘못했어요...”

추욱, 하고. 내게  소리를 들어서 주눅 든 모습으로 대답하는 둘을 보고서 말했다.


“원래 사시던 곳으로 도로 돌려보내드려.”


“에, 그치만...”

“그치만이고 자시고, 돌려 보내.”


“...알았어. 오빠.”

딱, 하고 아샤가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 열려진 공간이 보였다. 그런 공간을 가리키며 아샤가 말했다.

“미안, 오빠가 돌려보내라니까. 저기로 가면 돼. 그럼, 그 아저씨 옆으로  수 있으니까.”

“저, 저...”

그런 아샤를 흘끔 보다가 내 눈치를 보는 아저씨가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을 끌고  아샤가 내게 잔뜩 혼이 나서, 주늑 든 채로 그렇게 말하는 걸 보고 내쪽이 더 위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건 좀 아니지만, 오해를 풀기 위해 대화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말했다.


“걱정 말고 그냥 가요.”

내 말에 꿀꺽, 하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공간 너머로 걸어가는 아저씨를 보고서. 한숨을  내쉬고서 의지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에루나에게 말했다.


“기억, 지우는게 좋았을까?”

“딱히 알려져도 큰일은 없을 겁니다. 애당초, 천공성은 하늘에 떠다니는 성입니다. 여기가 어딘지 안다고해도  수 가 없습니다.”


“...괜한 소문 나는건 아닌가 몰라.”


알 수 없다, 오히려 그게 더 소문을 부풀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떠나간 빵모자 아저씨를 보고서 중얼거리는 아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간식 담당이 없어졌어.”


“간식 담당?”


어째 다른 담당도 있다는  한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이런 대형 사고를 저지른 이 개구뭉치들이, 다른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다.

“또 뭐 있어? 당장 다 꺼내.”

그런 내 말에 움찔, 하고 어깨를 들썩인 아샤가 공간 너머로 하나 둘, 꺼내들었다.


죄다 사람들이라서 하나니 둘이니 하기도 그렇긴 했지만.


“.......”


그게 다섯 사람 째가 되서야 열려진 공간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기 담당에 스프 담당... 하아아...”

“어? 어떻게 알았어? 맞아,  인간 아저씨는 고기 담당이고, 저 인간 언니는 스프 담당이야! 둘 다 요리를 잘해서 데려왔어! 어쩌면 에루나보다 잘할지도?”


“...저보다 말입니까?”


아샤의 상태창을 통해   있었던, 제각각의 사람들의 호칭을 보고서 한숨을 내쉬자 그런 나를 보며 놀랍다는 듯이, 그리고 자랑스레 그렇게 말하는 아샤가 보였다. 괜히 옆에 있던 에루나도 그런 아샤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보였다.


왜 저 두 사람이 요리를 잘하는걸 아샤가 자랑스러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괜히 가만히 있던 에루나를 도발하는지도 더더욱 모르겠다.

거기에 혼났다는 사실조차 잊어먹었는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아샤를 보고서,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아샤를 마주 바라봤다.

그러자 다시 찔끔, 하고 내 눈치를 보는 아사가 보였다. 푹, 하고 한숨을 내쉬고서 내가 말했다.

“다 돌려보내줘.”

“...요, 요리... 맛있는데... 오빠도 좋아할 것 같아서... 그래서 데려왔는데...?”

“마음은 고맙긴 한데... 그래도 돌려보내줘.”


“으응...”

추욱, 하고 어깨를 늘어뜨리고서 겁에 질린 인간들을 다시 돌려보내는 아샤를 보고서, 나는 그런 아샤 옆에 있는 아냐에게 물었다.


“아냐, 넌 없어?”


“있지만...”


“꺼내봐.”

내 말에 힐끔, 하고 아샤의 눈치를 보던 아냐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는 아냐를 보고서 공간을 열어 물건들을 꺼내들었다.

다행히 아샤처럼 아냐가  공간 너머로 사람이 튀어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에...

“......”

나는 하늘하늘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진 천 쪼가리를 하나 집어 들었다.

속옷.


그것도 여성용의... 무척이나 야한 속옷들이었다. 딱히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여러 가지로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보석이 박힌 보검이나, 갑옷, 팔찌, 그 외 다양한 취향들을 채우는 물건들이 잔뜩 있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인형도 있었다. 아마도 관절인형, 혹은 골렘... 응,  보니 골렘이다.

마도의 이치와 연금, 두 기능이 활성화되면서 파악된 바로는 확실히 골렘이었다. 단지, 에루나처럼 자아를 가지고, 움직이거나 그런  아니고... 좀 그렇고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는 골렘이었다.

어째 정상적인게 하나도 없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물었다.


“이게 다 뭐야?”


“남자들한테 주면 좋아한다고 해서...”


“...누가?”

대체 누가 여성용 속옷이랑, 저런 골렘같은 걸 받아서 좋아한다는 걸까. 문득 궁금해져서 그렇게 묻자, 아샤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왕관 준 아저씨가...”

그 말에 나는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던 왕관을 다시 꺼내들었다. 혹시나 싶어서 살펴보니, 안쪽에 음각된 이름 같은 것이 보였다.

카자흐 반디에세 란자카 3세...

진짜 왕관이였냐.

빵 모자를 쓴 아저씨부터 시작해서, 고기 담당에 스프 담당에, 이런저런 풀코스 담당의 요리사들이 하나같이 란자카 왕국이라는 곳에 궁정 요리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나 했는데...


설마 아샤와 아냐가 왕국을 통째로 털어온 건 아니겠지... 괜히 그런 생각이 들자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한테 선물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왕국을 털어온 드래곤이라니, 스케일이 커도 너무 컸다. 설마하니 그런건 아닐거라고, 그렇게 믿기로 하고서. 나는 가만히 바닥에 내팽개쳐진 것들을 바라봤다.


바닥에 너저분하게 퍼져있는 끈 팬티 같은 것들이 얼굴도 모르는 란자카라는 나라의 국왕의 취향이 잔뜩 반영된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번 집어든 팬티를 바라봤다. 이래서야 입어봤다 제대로 가려지긴 할까 싶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는 오히려 가려야할 부분만 쏙하고 빠져서, 오히려  부분만 드러내게 하는 팬티도 있었다.


대체 이런걸 누가 입는다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루시아나 크리샤, 아르카가 이런 속옷을 입는다면 어떨까하고 상상해봤다. 하나같이 야한 속옷들을 입은 세 연인들이 나를 바라보며, 침대 위에서 손짓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


조금 이해가 될지도...

그런 나를 흘끗 보던 에루나가 천천히 손을 뻗어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져있던 팔찌를 주워들며 말했다.


“이건 착용자의 정력이 증가되는 마법이 걸려있는 팔찌로군요. 확실히 남성들이 좋아할만한 물건이긴 합니다. 주인님께는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만. 속옷들은 착용자의 체격에 맞춰 크기가 조절되는 마법들이 걸려있습니다. 어린 소녀든, 미부인이든, 누가 입던 간에 몸에 잘 맞도록 말입니다. 이런 데에 마법까지 사용하다니 인간들도 제법입니다.”


이런 점은 배워둬서 나쁠 건 없겠습니다, 그렇게 태연하게 아냐가 가져온 물건들을 감평하는 에루나가 보였다.


그러다가, 속옷 하나를 손에 들고서, 에루나가 나를 바라봤다. 짙은 보랏빛에,  에루나가 입으면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던 속옷이었다.


“......”

어쩌시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듯한 에루나의 시선에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내가 말했다.


“일단 선물이니까, 받긴 해야겠지. 다는 아니고, 일부만...”

“정말?”

그런 내 말에 화색이  아샤와 아냐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에루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한 채로, 나는 속옷들을 주워다가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