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222화
뿌드득, 하고. 오우거의 주먹에 얻어맞은 초월자의 다리가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휘둘러진 검날에, 그런 초월자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오우거의 팔이 잘려나갔다.
부웅, 하고. 허공을 날 듯이 날아갔던 초월자가 그런 자신을 노리며 찔러오는 오크의 창을 붙잡고, 멈춰섰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써걱, 하고. 크게 원을 그리며 그어진 칼날에 수십의 오크들이 베어넘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선 초월자가, 사방을 둘러봤다.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날아온 방향이, 적진의 한 가운데라니.
설마하니 이걸 노렸나...
“하핫...!”
재미있다.
목숨을, 희생을, 자신을 도외시하는 몬스터들의 전술에 쾌활하게 미소 지으면서. 초월자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우드득!
비틀려 부러졌던 뼈가, 다리가, 단련을 거듭한 초월자의 근육의 지탱을 받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래봤자, 겨우 응급처치에 불과했지만 상관없었다.
초월자의 검을, 푸른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투기가 감아왔다.
오우거의 살가죽을 베기엔, 지금의 검으로는 너무 얕았다. 그러니까, 좀 더...
좀 더 날카로운 날을.
우우웅...!
투기가 진동했다. 초월자의 이치에, 그녀가 쌓아올린 ‘업’에 응답하기 위해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일렁이는 투기가, 마치 톱날처럼 형태를 이루는 것을 보고서. 초월자는 검을 휘둘렀다.
후웅, 하고 베어진 투기의 칼날이 달려들던 오크의 머리를 찢어발겼다. 다시, 후웅하고 베어진 칼날이 고블린들의 허리를 잘랐다.
이거라면 됐다.
새로운 ‘칼날’의 효과를 확인한 초월자가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 다시 해볼까?”
그리고 그런 초월자의 말과 함께, 괴물들이 그런 초월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휘둘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휘둘러졌다. 그때마다 피가 흩뿌려졌다. 칼날에 달라붙은 핏물이, 지방이, 척수가, 뇌수가 타오르듯이 증발한다.
초월자의 검은 더럽힘을 모른다. 올곧게, 언제나 ‘벤다’는 이치를 위해, 완전하고 무결한 ‘무기’였다. 미스릴과 흑철, 부드러움과 견고함을 동시에 지닌 검은 끊임없이 휘둘러졌다.
벤다, 베어낸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의 오크를 베었을 쯤일까.
오천의 고블린을 찢어발겼을 쯤일까.
검을 휘두른다. 오우거의 살가죽을 찢어발기고, 오크의 머리를 날려버린 검은 끝내 동강, 하고 반쪽의 날이 부러져 날아갔다. 아무리 투기를 둘러 강화한 칼날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상대는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니었으니까, 투기로 검을 강화해서 휘두르는 초월자가 있다면... 상대 역시, 투기로 주먹을 강화해서 휘두르는 오우거가 있었다.
끝내, 오우거의 완력에 짓뭉개지듯이 꺾여나가서, 날아간 칼날을 본 초월자가 한순간 멈칫했다.
그 사이를 찔러오듯, 고블린의 창이 찔러 들어왔다.
너덜너덜해진 검을 휘두른다.
카카각, 불꽃을 튀기며 창과 부딪힌 검이, 고블린의 창날을 베어버리고는 완전히 부러지고 말았다. 미처 투기를 두르지 못한 칼날은, 고블린의 허술한 창에 그 수명을 다해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건 무기가 가진 내구의 한계였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린 오크의 창날이 허리춤을 쑤시며 들어왔다.
찔린다.
그 찰나에, 초월자의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창날을 검고리로 걸어 꺾고서, 그대로 발로 튕겨내 오크의 목을 꿰뚫었다.
오우거가 포효하며, 주먹을 휘둘러온다. 오크의 목을 꿰뚫었던 창을 뽑아들고서, 집어던져 달려들던 오우거의 머리를 박살냈다.
머리가 박살난 오우거가 쓰러지는 순간에, 화살들이 퍼부어졌다.
투기를 휘두른다. 움켜쥔 주먹으로부터 뻗어나간 투기들이 쏟아져 내린 화살의 비를 쳐부쉈다.
다시 오우거... 화살을 막는 사이에 휘둘러져오는 주먹이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피할 수 없다. 그러면... 포기한다.
콰지직!
오우거의 주먹과, 주먹을 교환한다. 우드득, 거완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력에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주먹에 금이 갔는지 포효하는 오우거의 머리를 손날에 투기를 둘러 베어낸 초월자의 복부에 창이 파고들어왔다.
푸욱!
몸을 노리고 찔러온 고블린의 창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처는 얕았다. 고작해야 고블린이었다. 반격하기 위해, 창을 차내고, 주먹을 휘둘러, 고블린의 머리를 터트리다가. 날아오는 화살이 보였다. 동시에 돌진해오는 오우거의 모습이 보였다.
또 다시 이지선다...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공격과, 그렇지 않은 공격.
어떤 것을 택할지는 불보듯이 뻔했다.
초월자가 눈을 빛냈다. 냉혹할 정도로, 자신의 몸조차도 도구의 연장선으로 보고서... ‘쓸모가 없다’ 여긴 것을 다시 버렸다.
퍼퍼퍽, 어깻죽지를 파고드는 화살촉을 느끼면서, 으스러진 주먹을 휘둘렀다.
퍼석, 달려들던 오우거의 머리가 파산한다. 후두둑 쏟아지는 피와 함께, 아려오는 어깨의 통증이 느껴졌다.
화살의 끝을 부러뜨리고서,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재차 찔러 들어오는 고블린의 창을 빼앗아 휘두른다.
부러진 어깨를 휘젓는다.
으스러진 주먹과 주먹을 맞부딪혀 더욱 부순다.
휘둘러진 창대에 맞는다.
바닥에 산비해있던 화살촉에 찔린다.
다시.
다시.
다시...
영원처럼 계속될 것 같은 싸움이, 끝을 보여 갔다. 무수해보이던 군단이 계속해서 스러지고, 전혀 상처입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몸이 너덜너덜해져갔지만.
결국에는 끝이 보여 갔다.
그 끝에서, 초월자는 헐떡이며 팔을 휘둘렀다.
퍼석, 하고 남아있던 마지막 오크가 창을 꼬나 쥔 채, 손가락 끝에서 솟아난 투기에 목이 잘려 쓰러졌다.
걸음을 옮기며, 초월자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반쪽짜리 검을 손에 들었다. 자신의 검이었다. 너덜너덜, 완전히 ‘검’의 형태를 잃어버린 것을 보고서.그 검의 끝에, 투기를 둘렀다.
그리고, 투기로 이루어진 칼날의 끝을 오우거의 목에 겨누었다.
그르륵, 하고. 목에 겨누어진 칼날에도 오우거는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피거품을 토했다.
두 팔이 잘린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오우거를 바라보며 초월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겼네?”
살이 전부 찢어져서 피가 흘러나오는 주먹을 움켜쥔다. 부러진 팔과 다리의 뼈를 근육으로 억지로 지탱하고, 으스러진 갈비뼈를 투기로 만든 가느다란 실로 꿰어 고정했다. 찢겨진 장기의 감각을 지우고, 몸에서 흐르는 독기가 몸을 녹여오는 것을 잊었다. 화살촉과 함께 뜯겨져나간 어깻죽지의 통증을 무시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치명상이었지만. 그것은 어느 것 하나라도, 평범하지 않은 인간인 초월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였다.
죽음에 이르지 않는 모든 시련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초월자는.
전신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이죽거렸다. 있는 힘껏 웃었다.
몸은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승리했다. 결국은 살아남았다.
이만의 고블린의 목을 베고, 오천의 오크를 도륙내고, 스물이 넘는 오우거를 찢어발기고. 투기를 사용하는 오우거들을 모조리 베어 넘겼다.
부수고, 찢고, 베고, 찌르고, 차고, 때리고, 온갖 ‘전투’에서.
승자는 자신이었다.
이제...
하나만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하하,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죽을 뻔 했네.”
아직 어렸을 적, 몬스터의 토벌을 나섰다가 독시를 맞고 어질한 상태로 고블린들의 창에 찔렸을 때를 떠올랐다. 엉망진창이 돼서,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레처럼 계속해서 몰려드는 고블린들을 죽이고 죽이고 죽였다.
죽음의 앞에서, 그녀는 검을 휘두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검주가 되었다.
과거, 검주로 각성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초월자, 앨리시스는 말했다.
“그래서... 너희, 정체가 뭐야?”
군단을 이룬 몬스터.
괴물들로 이루어진 군대.
그를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마왕,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밖에 없다. 하지만 기어코 그 사실을, 오우거의 입에서 듣기 위해서 말했다.
의심과, 확신은 다른 법이었다. 아직까지는 의심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알아내야만 했다.
오우거는 그런 초월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 인간... 우리 동족을, 모조리 베어죽인 인간, 이여.”
“...그래, 왜 불러? 나한테 전부 도륙 난 오우거야?”
“그대가 회복에 전념한, 다면... 쿨럭... 얼마나 걸리지?”
오우거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앨리시스가 자신을 바라봤다. 팔이 부러지고, 화살을 맞았던 어깻죽지가 이어진 오우거의 완력에 우악스럽게 찢겨나갔다. 갈비뼈가 완전히 으스러지고, 장기마저 찢겨졌다.
회복에 전념한다면, 아무리 회복 포션을 물처럼 퍼마시면서 회복에 전념해도.
적어도 일주일은 요양해야할 부상이었다.
“...3일정도려나?”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알려줄 생각이 없는 초월자의 말에, 오우거가 ‘그런가’ 하고 대답하고서.
돌연, 초월자를 덮쳐들었다.
투기로 이루어진 칼날이, 오우거의 목을 관철했다. 오우거의 두터운 이빨이, 초월자의 팔의 중간을 물어뜯었다.
콰직, 하고.
온전했던 오른팔마저, 오우거의 이빨에 뜯겨나가는 부상을 입은 초월자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려다가.
목이 관통되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오우거를 봤다. 싸늘하게, 초월자는 그런 오우거를 노려봤다. 하지만 오우거는 마지막의 공격으로 힘을 잃고, 시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굳이 목을 베어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이걸로, 일주일은 되겠...”
그렇게, 말을 잇던 오우거의 눈에서 빛을 잃는 것을 보고서.
초월자는, 앨리시스는 팔에 난 상처를 바라봤다.
이걸로 이주일은 꼬박 침대에서 요양하게 생겨버렸다.
“...지독하긴. 결국 누가 배후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팔에 난 상처를 지혈하는 앨리시스의 등을 타고,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읏...!?”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압도적인 무언가의 기척.
그를 느낀 앨리시스가 이미 죽어버린 오우거를 바라봤다.
죽었다.
확실했다.
하지만 그럼 대체 누가?
기감에 전혀 닿는 것이 없는데도, 스스로 공포를 느낄 정도의 존재감을 갖고 있는 누군가가 응시하는 듯한 느낌에, 부러진 검을 들고서 사방을 주시했던 앨리시스는, 아무리 주변을 살펴봤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기척의 주인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방금 같은 기척이 느껴지기는커녕, 마치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게... 아주 조용하게 느껴졌다.
그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착각, 이었나.”
결국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서, 다시 상처를 살펴본 앨리시스는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이래서야, 조사는 무리겠네... 일단, 돌아가서 쉬어야겠어.”
또 남편인 뮬런한테 한소리 듣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투덜투덜, 앨리시스는 걸음을 옮겼다.
“......”
펄럭, 하고. 그림자처럼 일렁거리는 두 날개를 휘두르면서, 크리샤네아는 절뚝거리며 돌아가는 초월자를 응시했다.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 순간 주변을 둘러보던 초월자였지만. 마법으로 기척을 지워없애자 이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조금, 모자랐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오우거가, 조금이나마 힘이 더 있었더라면. 뜯겨져나가는 것은 초월자의 팔이 아니라 몸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정은 어차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계획, 오우거를 이용해서 초월자는 막는 것은, 대충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모처럼 만들어낸 스물여덟의 오우거들이, 거기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투기까지 각성해버린 여섯의 오우거가 죽어버리긴 했지만...
“...흥.”
숫자가 좀 더 모였더라면, 오우거가 서른이 아니라, 원래 계획했던 대로의 오십의 오우거가 전부 모였더라면... 저 초월자를 사로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초월자가 완전히 떠나간 것을 확인한 크리샤네아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약속했었으니까.”
두 팔을 잃고, 목을 관통된 채로 죽어있는 오우거의 앞에 선 크리샤네아가 손을 뻗었다.
“너희는 이제부터... 나, 크리샤네아의 가디언이 될 거야. 종으로써 인정해주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만.”
죽은 자를 되살려내는 것은 간단했다.
공간 마법을 특기로 사용하는 크리샤네아에게 있어선, ‘시간’마저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살려낸다고 하더라도, 죽은 자를 완전히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은 사자는 사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살려낸 오우거를 과연 하나의 종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잠깐 고민했던 크리샤네아는 미안, 하고 짧게 사과하고서. 마법을 발동했다.
꾸드드득, 땅에서 치솟은 그림자들이 죽은 스물여덟의 오우거를 덮쳐들었다. 꾸륵, 꾸륵하고. 그림자들이 끈적지게 오우거들의 사체를 삼키고서, 땅속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지자, 불퉁스럽게 초월자가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던 크리샤네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지금.
부상을 입은 초월자를 죽이려든다면 아주 손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 굳이 큰 힘을 쓸필요도 없었다. 그림자의 손, 그 중 몇 가닥만 뻗어 보내도 끝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면 내기의 내용인,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기고 말게 된다.
그러기엔 상품으로 걸려있는 것이 조금 아까웠다. 상품과, 초월자를 죽이는 것의 무게를 가늠한 크리샤네아는 이내 초월자를 포기하기로 했다.
오우거들은 충실히 명령을 이행했다.
저 정도의 부상을 입은 초월자라면,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마법사들과 포션을 사용하더라도,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요양해야만 하리라.
적어도, 루시아네아보다는 우위에 섰다는 거였다. 그걸 스스로 무너뜨릴 생각은 없었다.
“...쯧.”
혀를 차고서.
다시 손을 휘젓자, 엉망이 되었던 대지가 꿈틀거렸다.
쿠와아아아아아...
수만의 그림자의 손들이 땅 속에서 솟아올라왔다.
그리고 죽어나간 고블린과, 오크들을 덮기 시작했다. 꾸물, 꾸물... 몇차례 요동치듯이 움직이던 그림자의 손이 다시 땅속으로 스며들자.
고요한 대지만이 남아있었다.
시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고요한 대지가.
“...정리도 끝났으니까. 이제 내가 할 일은 끝인가?”
솔직한 심정으론, 지금 당장 돌아가기는커녕, 초월자를 쫓아가... 본신의 모습으로 그대로 밟아 뭉개고 싶었지만...
“...별 수 없지.”
지금의 몸으로, 본신으로 변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중얼거린 크리샤네아는 다음 차례인, 아샤와 아냐에게 신호를 보내고서 다시 날개를 펄럭이고서 영지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