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204화
“슬슬 포기해도 괜찮은 거얼? 사정이란 걸 하며언, 무척이나 기분 좋은 거 아냐아?”
“...아니, 괜찮으니까 됐어.”
정말로 괜찮지는 않지만.
계속되는 아르카의 '교육'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스펀지처럼 경험을 빨아들이듯. 점점 능숙하게 자극해오는 아르카의 발가락에 벌써 몇번이나 사정하고 싶었다.
사정 조절이란 기능이 없었다면 진작 싸고도 남았을 게 분명했다.
누운 자세로, 거기에 아르카가 밟고 있는 탓에 꾹, 하고 복부에 닿아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싼 정액이 어디로 튈지도 뻔했다.
발로 밟혀서 사정하는 것도 모자라서 자기 정액을 뒤집어 쓴 꼴을 떠올리면 쓴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건 좀 많이 추하겠는데.'
물론 그게 굳이 억지로 참은 이유의 전부는 아니였다.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도 없었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인 것은 아니였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아르카가 엄지 발가락으로 드래곤 슬레이어의 끝을 문질러오며 말했다.
“그렇다면 뭐어, 네 마음대로 해도 되지마안...? 그래도오 마음이 바뀌면 얼마든지 싸도 좋다구우?”
키득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아르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배알이 꼴려서 싫었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유였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종이 한 장 차이라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 종이가 더럽게 두꺼운 모양이었다.
굴욕을 참는 것도, 자존심을 접는 것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기는 싫었다.
모순된 감정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승부욕이 특출났는지도 모르겠고… 이걸 승부라고 칠 수도 있나 싶었지만.
물론 단순히 지기 싫어서 그런 것만도 아니라, 내가 자존심을 굽히고서 아르카가 원하는 대로 한다쳐도 얻을 게 없어보여서 그런 것도 있었다.
필요하다면 감수한다쳐도, 날 풀어준다는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도.
"읏…♥ 흐읏…♥"
인질로 잡혀있는 에네스타가 구석편에서 입술을 깨물고서 신음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꿈틀거리는 나무줄기들이, 그런 에네스타의 몸을 끈덕지게 어루만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르카가 날 풀어줘서 움직일 수 있다쳐도, 에네스타가 문제였다.
그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내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올린 에네스타가 죄송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억지로, 종족 때문에라도 예민한 몸을 애무당하는 와중에도 신음을 참고 있는 것은 그런 탓이었다.
자신의 탓으로 내가 이런 꼴이 됐다고, 그런 와중에 자신이 쾌락에 허우적일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에네스타의 속마음이 눈에 들어왔다.
딱히 그런 걸로 뭐라할 생각도, 그것가지고 기분이 상하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지금 상황을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는 에네스타를 보고서.
에네스타의 정보창을 바라보던 내가 얼굴을 굳히고서, 입을 열었다.
"이제 에네스타는 놔줘도 되지 않아? 어차피 볼일이 있는 건 나잖아."
"…흐응, 아직도 신경쓸 여유가 있나봐아? 이런 꼴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그런 내 말에 눈웃음을 지은 아르카가, 드래곤 슬레이어를 짓밟았다.
"큿…"
신기한건 이제 거칠다싶이 밟아오는 아르카의 행동에도 아프기는 커녕 기분만 좋다는 거였다. 그만큼 아르카가 발로 하는 애무에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내가 이런 일에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별로 익숙해지고 싶진 않았지만. 적응의 동물답다고 해야 할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해야 할지.
점점 이런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내가 있었다.
기다리면, 버티다보면. 분명 기회가 올 거다.
대체 언제쯤 올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빨리 좀 와줬으면 좋겠다…
이러다가 정말로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설마 밟혀야지 느끼는 마조가 될리야 없겠지만, 이런 취미를 즐기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럼 이건 어때애? 지금 당장 사정한다며언… 그럼 저 엘프는 풀어주는 거야아. 괜찮은 생각 아니야아?"
그런 나를 보고서 꾹꾹, 하고 발가락으로 꼼지락거리면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애무하던 아르카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그렇게 말해왔다.
아르카를 올려다보자, 눈을 빛내며 내 말을 기다리는 아르카가 보였다.
꽤 괜찮은 제안이였다.
나 혼자의 굴욕이나 자존심은 얼마든지 접어줄 생각은 있었으니까. 그 대가로 에네스타의 안전을 얻는 거라면 생각해볼만 했다.
단지…
찌릿찌릿하고, 그런 아르카의 제안에 뒤통수가 따가웠다.
내가 보기엔 이득으로만 보이는 제안이었지만, 본능적으론 그럼 안된다고 몸이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내 생각보단 감을 믿는 쪽이 훨씬 낫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르카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에네스타를 풀어주면 안되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감을 믿기로 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아르카에게 보란듯이 고개를 젓고서, 입을 열었다.
"…됐고, 아르카. 이제 더 할 것도 없지 않아? 슬슬 이것도 익숙해져가는데."
"그렇게 허세부려도 풀어주지 않을 거라고오? …흥, 싫다면 됐어어. 고집불통같으니라고오."
내 말에 눈을 찌푸리고서, 다시 드래곤 슬레이어를 밟아오기 시작하는 아르카가 보였다.
"…아르카 이건 좀 아픈데?"
"…..."
내 대답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억하심정이 담겨있는 발놀림에 그렇게 말해봤지만 그런 나를 무시하는 아르카가 보였다.
찌릿찌릿, 하고 아파오던 뒤통수도 멀쩡해졌고.
어째서 그랬던 건지는 이유야 모르겠지만…
일단은 계속해서 버텨보기로 했다. 우선 사자심을 활성화시켜서 끓어오르는 음욕을 진정시켰다.
정신계열의 상태이상에 저항력을 올려주는 기능이었지만, 기본적으론 평상심을 유지시켜주는 기능인만큼 활성화시키자 음욕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사정 조절이 있으니까 참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런데도 굳이 지구력의 소모를 감수하면서도 사자심까지 활성화시킨 이유는… 그냥 그대로 있다가는 참지 못하고 아르카의 말에 홀랑 넘어갈 것 같아서였다.
사정하면 기분 좋다, 그런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들어… 아니, 바로 얼마전까지만해도 금욕의 반동때문인지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힘들었다.
아까도 그랬다. 평상시였다면… 아무리 에네스타가 유혹해와도 바로 그렇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 결과 이런 꼴이 됐으니까 자업자득이라면 자업자득이었다.
또 내 욕망에 홀랑 넘어가고 싶진 않으니까, 사자심은 그 예방책이었다.
"…역시, 치사해애."
생각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별의 별 생각을 다하고 있던 귓가에, 또 다시 그런 아르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사하다니 뭘…"
이번으로 두 번째 듣는 아르카의 말에 그렇게 물어봤지만, 돌아온 것은 숨통을 조여오듯, 조여드는 나무줄기였다.
“…...”
"…이제 됐다는 거야아. 계속 밟기만 하는 것도 지루하고오. 재미 없으니까아."
꾸우욱, 하고. 점점 조여드는 나무줄기에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워졌다.
갑작스레 마음이 변한 듯한 아르카를 보고서, 본능이 격하게 경고해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아, 대신 저 엘프나 데리고 놀아볼까하는데 어때애? 어제의… 일도 있고 하니까아."
스윽, 하고서. 그렇게 말하며 내게서 떨어지려는 아르카를 보고서. 우드득, 팔을 묶고 있던 나무줄기째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어디까지나 '몸'만.
무리하게 몸을 일으켜세운 탓에 양 팔이 덜렁거렸다. 여전히 내 양손은 나무줄기에 묶여있던 탓이었다.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무리한 탓 때문에 생긴 피해라서 차원을 넘은 자로도 소용없었다.
탈골된 두 팔을 흘낏 쳐다봤다가. 나를 내려다보는 아르카를 바라봤다.
"……"
"……"
연녹빛 눈동자가 싸늘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아르카의 눈동자에 비친… 아르카를 노려보고 있는 내가 보였다.
울긋불긋, 핏줄이 곤두서서 일그러진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흉했다.
아니, 흉악했다
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구나,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내가 졌어. 그러니까 에네스타는 풀어줘."
하지만 결국, 패배를 인정한 것은 나였다. 일그러뜨렸던 표정을 피고서, 그렇게 말했다.
더이상 자존심을 세울 수 없었다.
에네스타의 안전은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니까. 에네스타는… 내가 정을 준 몇 안되는 이 중 하나였다. 괜히 내 탓으로 에네스타가 이 이상 험한 꼴을 보는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맨 입으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아르카가 몸을 돌렸다.
딱, 하고.
아르카가 손을 튕기자, 나무줄기에 감겨있던 에네스타가 사라젔다.
"아르카…"
"…네 침실로 보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애. 풀려났다고 덤벼오면 귀찮으니까, 재워두긴 했지마안."
그리고.
스윽하고, 새하얀 발가락이 보였다.
내 입가에 대고서 꼼지락, 꼼지락하고 움직이는 아르카의 발가락이 보였다.
“혀로 핥아. 어때애? 개처럼... 핥짝핥짝하고오."
“...나보고, 네 발을 핥으라고?”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싫다면 상관 없지마안? 널 여기에 두고 가면 그만이니까아.”
그런 나를 보면서, 키득거리는 아르카가 보였다. 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보고서, 내 반응을 보고서, 즐겁다는 듯이.
그런 아르카를 보면서, 더욱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아... 어쩔꺼야아? 핥을 거야아? 아니면, 말거야아?”
미소 지으면서, 그렇게 묻는 아르카를 보고서.
입을 벌렸다
“하아...♥ 그렇게나 핥고 싶었던 거야아? 미안해애? 내가 진작 말했어야 됐는데에? 싸는 것보다아… 이쪽이 더 좋았던 거네에♥”
그런 나를 보면서, 즐겁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는 아르카가 보였다.
나를 내려다보면서, 어서. 하고 재촉하는 아르카를 보였다.
반쯤은… 아르카가 내게 이러는 이유를 이해하고 있어서. 그래서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르카가 나를 공격해왔을 때, 나는 오로지 방어에만 집중했다.
대 마법사전. 루시아로부터 기초를 배우고, 에네스타와 수없이 수련했던 나였더라면 아무리 아르카라고 해도 공격해오기 전에 어떻게 할 방법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참았다.
또 반쯤은… 내가 잘못한 결과여서 아르카의 행동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에네스타와 관계를 맺으려고 했던 것 역시 내가 잘못한 일이었다.
설마하니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지만. 그게 머리로는 이해하더라도 감정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인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네스타가 날 모욕해도 그저 견디고만 있었다.
그렇게 두 번. 나는 나 스스로 나를 제한했다. 어쨌거나, 내가 맞을 짓을 하긴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끝이었다.
세번째… 에네스타까지 건드리려고 했던 건 이제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카마수트라를 활성화시켰다.
복수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