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6화 〉186화 (186/370)



〈 186화 〉186화

이겼다, 하고 크리샤네아는 그런 루시아네아의 얼굴을 보고서 자그맣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루시아네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주 조금뿐이었지만, 그것조차 대단한 일이었다.

고작 해봐야 이마에 작게 주름이 졌을 뿐인 찡그림뿐일지라도. 항상 감정을 숨기고서 잘난 척하며 웃던 루시아네아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구겨졌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의 표정이. 가면이 일그러진 것은, 그녀를 알고 지내오면서 여태껏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기분이 좋아진 크리샤네아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루시아네아의 표정이 일그러진 원인이기도 한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있을 거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이렇게 모두 모이라고 한 거 아니었어? 짧게 끝나는 거라면 그러고 있어도 상관없지만.”


한호흡.


순식간에 도로 가면을 고쳐 쓴 루시아네아가 미소 지었다. 그러고서,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띈채로 말했다.

“...배려 고마워요, 크리샤. 당신도 누군가를 생각할 정도로 성장하기는 하는군요?”

자신의 말에 자리에 앉으며 루시아네아가 내뱉은 말에 크리샤네아는 역시 슬며시 미소 지었다. 미소 지은채로, 이쪽을 보고 있는 루시아네아를 보면서. 마주 웃었다. 예전이였더라면 방금 걸로도 기분이 나빠졌을 것이었다.  자신보다도 밑으로 낮춰보는 것처럼 말하는 루시아네아의 말은 항상 신경을 건드렸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혀 기분 나쁘기는커녕.


입가를 비튼다. 누군가를 통해 자주 보았던 그 웃음을 머릿속으로 기억해낸다.


지금도 떠올리면, 조금은 짜증이 나는 그 미소를. 입가를 비틀어 꾸며낸다. 이미 웃고 있지만, 거기에 더욱 더. 그때의 웃음을 덧씌워 칠한다. 그러고서, 크리샤네아는 입을 열었다.

“으응, 그래? 딱히 변한 건 없는데...? 역시 아이가 생기면 달라지려는 거려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정말로 그렇게 무심코 말했다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서. 아차, 하고 입을 가렸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서 말했다.

“아, 미안. 루시아는 아직 모르겠구나. 내가 실수했어. 아직, 루시아는 아이가 없었지.”

악의는 없었다는 듯이 놀리는 것도 무엇도 아니라는 것처럼. 태연하게.

타인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원래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방금 걸로 상할 자존심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것 정도는,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야 자기도 당해봤던 일이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당한 만큼은 알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그 바보 녀석이 날 놀렸을 때도 이런 기분이였으려나.’

막 영지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시종일관 이쪽의 신경을 박박 긁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이제와서는 좋지만은 않아도, 이렇게 피식하고 웃을 정도의 추억거리가 되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지만.

‘일단 그것보다...’

크리샤네아는 루시아를 따라 주변에 앉은 다른 자매들을 바라봤다.

붉은 염화처럼,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재미있다는 얼굴로 빙글빙글 말고 있는 카르네오스와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꺅꺅거리며 조잘거리고 있는 푸른 머리카락의, 여전히 꼬마애 같은 아샤네오나, 아냐세오스.


거기에...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새하얀 은발에. 전혀 속을 들여다  수 없는 무표정한 소녀. 자신의 자매이기도 하지만 루시아네아보다도 훨씬 속을 알 수 없는 샤르비오나까지.


정말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오지 않는 그녀까지 이곳에 모였다는 사실에, 크리샤네아는 아주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와 함께 이야기  것이 있다고 루시아네아에게 들었지만 들었던 것은 그게 끝이었다. 그 이야기할 것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없었다. 애당초 주제가 무엇인지, 얼마나 이야기하는 것인지 얼만큼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단지 유추할 수 있는 것만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같은 시기에, 하필이면 그가 자리를 떠난 직후에, 그와 같이 있는 아르카를 제외한 모두에게 모이라고  것은,  이유는 하나뿐이니까.

지금의 일을 이지경에게 숨기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였다.


숨긴다면 무엇을? 그리고 어째서?


전자는 여전히 몰랐지만, 후자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야, 자신도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한테 미움 받기 싫다.

그 녀석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면ㅡ 분명 그 같은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그 녀석에게서, 그 망할 인간 여자를 숨겼던 것처럼. 결국 그 바보가 멋대로 찾아내서, 멋대로 억지를 부려서, 멋대로 자기 걸로 삼아버렸지만.


어쩌면 그때처럼, 썩 재미없는 일이 있을 지도 몰랐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루시아네아는 자신과 동격이었다. 힘이라면 이쪽이 우위에 있을 지는 몰라도, 드래곤으로써. 또 그 드래곤들을 이끄는 이로써는 자신보다는 루시아네아가 위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로드.

고작 일곱밖에 남지 않은, 드래곤들의 로드였다.

그런 그녀가, 녀석에게서 숨겨가면서까지 해야할 일이 있다는 건... 그만큼,  녀석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을 하거나, 혹은...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의 선은 지키겠지마는...’

그 선이라는 것이 필요에 의해서 얼마든지 들쭉날쭉할 수 있는 거라는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도, 그 선을 지키면서 개수작을 부리는 방법쯤은 얼마든지 떠올릴 수도 있었다. 지금도 몇 가지인가 떠올릴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에, 크리샤네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녀석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 이유도. 또, 굳이 이렇게 모두가 모여야 하는 이유도 얼추 들어맞았다.


예를 들어...

‘내 뱃속의 아이를,  바보 녀석의 자식이라는 핑계로 공동으로 육아하자는 말을 꺼내던가?’

이유로 들것이야 자신도 당장에 몇이나 댈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드래곤의 아이를 경험도 없는 자가 혼자서 양육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나을 것이라는 둥, 크리샤네아라는 개인에게 맡기기엔 불안하다는 둥, 다른 드래곤들... 자신들도 결국 아이를 낳고 길러야하니까 경험을 쌓는 김에 같이 키우자, 라는 둥.

논리로 밀어붙이면 충분히 반박할  있는 것들이었지만, 상대는 그 루시아네아였다. 힘으로는 몰라도 궤변, 말로는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내 아이를 빼앗기고 만다.

낳은 건 분명 나라는 건 틀림없지만. 동시에 ‘모두의 아이’가 되는 셈이었다. 나만의,  바보 녀석과 나 사이의 특별히 존재하는 하나뿐인 ‘자식’이라는 특별함을 빼앗겨버린다.


 아이인 것과 동시에 모두의 아이가 되는 셈이니까.

빼앗기고 만다.

‘그럴 수는 없지, 만약 정말로.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려고 모인 거라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다짐했다.

설령 피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때처럼 밖이라면 몰라도. 이곳에서라면. 영지 안에서라면 이길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귀찮은 루시아네아를 치고서, 그 다음에는 샤르비오나와 카르네오스를 동시에 치고. 그 다음에는 아샤네오나와 야냐세오스를 친다.

물론, 그 다음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그것도 시간을 들인다면 어떻게든 될지도 몰랐다.

적당히 스무 명 정도 낳는다면, 어떻게든  테니까.

‘그것도 나름 괜찮... 지가 않지.  바보가 화낼 테니까’

그것 말고도 걸리는 것이 옆에 있기도 하고.


흘끔, 크리샤네아는 옆에 서있는 에루나를 보고서 한숨을 토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에루나. 다들 갑자기 찾아오느라 깜빡했는데. 차 좀 부탁해도 될까?”


“물론입니다, 크리샤 아가씨. 이미 준비해두었으니...”

허공에 찻잔들과 다과를 꺼내드는 에루나를 보고서, 크리샤네아가 말했다.


“아니, 그거 말고... 갑자기 이상하게 좀 시큼한 게 먹고 싶은데?”

배를 어루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그런 크리샤네아를 훑어보다가. 곧 에루나가 고개를 숙이고서 대답했다.

“금방 준비해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열화해서, 나약해진 몸 때문에. 간단한 공간 이동마법조차 함부로 쓰지 못하고서 걸어서  밖으로 에루나가 나가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크리샤네아는 여전히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루시아네아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야기 하고 싶다는 게 뭐야, 루시아.”



침묵이 내려앉았다.


검고, 고요한 흑요석과 같은 눈동자와 찬란히 빛나는 황금. 그로 만든 보옥과 같은 눈동자가 서로 마주치고서 그저 침묵만이 흘렀다.

허튼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라도 하듯이. 대놓고 마력을 풀풀 흘려대는 크리샤네아와 어디 해보라는 듯이 마찬가지로 마력을 숨기지 않는 루시아네아 덕분에 상대적으로 정신연령이 어린 아샤네오나가 당황해서, 아냐세오스에게 안겨서 그런 둘을 보며 덜덜 떨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맞붙을 것만 같은 분위기 속에서. 침묵을 깬 것은 혹한처럼 시린 마력이었다.

샤르비오나 크락시아.

일곱 자매들 중에서도 가장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선, 루시아네아를 뛰어넘는 드래곤이.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서로 마력을 뒤섞어가며 맞붙던 크리샤네아와 루시아네아의 사이에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죽일 거야?”


그렇게 쉽게 죽고 죽는 거라면, 이렇게 싸우기도 전에 진작 둘  하나는 없어졌을 터였다. 다른 자매들은 몰라도 크리샤네아와 루시아네아가 대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였으니 말이다.


그런 둘은 가만히 바라보던 샤르비오나의 말이 이어졌다.

“...그 이상으로 뿜어내면, 못 버틸지도.”


못 버틴다니 뭐가, 하고 크리샤네아가 퉁명스레 대답하려다가. 샤르비오나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서 안색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핏기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로, 허겁지겁 뿌려대던 마력을 갈무리하고서.


배를 감싸 안았다.

마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응, 괜찮아.”

갑작스레 뚝하고 사라진 크리샤네아의 마력 덕분에 순간 몸이 휘청였던 루시아네아도 배를 감싸 안고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크리샤네아를 보고서 한숨을 토하며 자리에 앉았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험악한 침묵이 아니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크리샤네아. 원래는 이럴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었다는 것만 믿어주세요.”


얼마나 지났을까, 루시아네아가 얼굴을 감싸 쥐고서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 진정한 모양이고. 나도 잘못했으니까.”

그런 루시아네아의 사과를 크리샤네아가 받기까지 했다.


사십 여년의 용생 동안, 서로 사과하고 그를 받는 광경이 처음으로 펼쳐진 거였다.

“정말로,  크리샤가 저렇게 얌전해질 줄이야. 보고도  믿겠는걸~?”

“안 싸워? 안 싸우는 거야? 아냐?”


“응, 그런 모양이네. 언니.”

들릴 새라 소곤소곤 그렇게 이야기하는 다른 자매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서. 크리샤네아는 샤르비오나를 보고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머리에 피가 올라서, 하마터면 홀몸이 아니란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덕분에 만약에라도 저지를 뻔한 계획도 전면으로 수정했다.


만약에, 아이를 가지고 허튼 수작을 한다면 모두 눕혀서라도 아이만을 지킬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애당초 이루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냉정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영지 안이라고 해도, 드래곤들을 상대로 상처없이 이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만약에라도 상처를 입는다면, 그것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곳이라면...

그럴 바엔, 차라리 아이를 살릴 수만 있는 쪽이라도 좋았다.


한숨을 토하고서. 크리샤네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란 게 뭔데?”

조금 빙글 돌아가서, 다시 처음의 주제로.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조심스레. 어디까지나 ‘이야기’하는 입장으로.

“당신에게, 거듭 사과할 줄은 몰랐는데... 다시  번 사과할게요. 크리샤.”

그런 크리샤네아에게, 루시아네아가 고개를 숙이고서 말했다.

“혹시라도 당신이 거짓말로 아이를 가졌다고 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던 것, 용서해주세요. 본래는 확인도 할 생각이었지만... 당신의 반응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니겠죠.”

“뭐야, 그것 때문에 이렇게 모인거야? 장난쳐?”

“그것만이 아니니까 또 그렇게 흥분하지마세요. 정말이지... 방금 조금은 당신을 다시 봤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루시아네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우루루.

온갖 물건들이 쏟아져내렸다.


“...야, 잠깐...”

처음에는 갑자기 뭘 꺼내나 싶었던 크리샤네아였지만 익숙한 물건을 보고서, 이내 루시아네아가 꺼낸 물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익숙한 것들이  물건들에 섞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이야기해보죠. 크리샤네아, 부디 거짓 없이 진실로만 대답해주길 바랄게요.”


가면, 이라고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무척이나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를 가졌을  사용한 것들이 이중에 있나요? 그럼 어떤 거였나요? 비율은? 뭐랑 같이 썼었나요? ㅡ중요한 거니까 혼자 알고만 있지 말고 서로 공유해야죠?”


크리샤네아 본인도 애용했었던 미약이고, 정력제고, 기타등등 여러 도움을 주는 물건들을 가득히 꺼내들고서.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네아를 보고서.


“......일단, 이건 별로더라.”

크리샤네아는 한 미약을 집어 들고서 진지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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