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7화 〉167화 (167/370)



〈 167화 〉167화

시간이 흘러, 어느덧 천공성이 크리샤의 영지인 슈페리아로부터 벗어나는 시기가 찾아왔다.


즉, 작별의 시간이 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영영 작별이라는 건 아니었지만, 루시아때와는 달리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정말로 괜찮겠어?”

“대체 몇 번이나 물을 셈이야? 괜찮다니까. 그냥 너만 배웅해주고, 내 영지로 돌아갈 거니까 걱정하지마.”

크리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이런건 처음이라 그런지 더욱 그러했다. 막상 크리샤는 그런 나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결국 한숨을 내쉰 크리샤가 이내 내 팔을 잡아당겨서, 자신의 아랫배 위에 얹으며 말했다.

“봐, 이 아이도 가만히 있는데 아버지가 되놓고서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그렇게 말하는 크리샤의 말에, 나는 내 손가락 끝이 닿은, 크리샤의 아랫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작 일주일만에 눈에  만큼 변화가 있을 리가 없는만큼, 그런 그녀의 아랫배는 일주일 전과 비교해도 딱히 변한 구석은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고동이 느껴진다거나, 무언가 반응이 있을리도 만무했다.

다만, 손가락 끝 위로 크리샤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가, 아까부터 마냥 불안하기 만한 내 마음을 조금은 진정시켜주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진정만 됐다싶을 뿐이지 여전히 걱정되는  똑같았다.


퀘스트가 완료되었다고 들려왔던 알림이나, 크리샤의 상태창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믿겨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눈을 떼는 순간, 거짓말처럼 전부 사라져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역시, 아르카한테 부탁해서 일주일이라도 같이 있는 게...”


그 말에 꾸욱, 하고 내 팔을 잡고 있던 크리샤의 악력이 강해졌다.

“나보고, 너랑 아르카랑 같이 있는 걸 보고 있으라고?”


“.......”


“날 신뢰해주는건 고마운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네가 날 떠나서, 아르카한테 가야한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싫거든?”

여태까지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말을 고백하는 크리샤가, 붙잡은 팔목으로부터 그녀의 떨림이 전해져왔다.

“크리샤...”


“정말로, 정말로 싫어... 하지만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참고 있는 것뿐이야.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가 이제와서 이런다는 사실이 우습다는 것도 알고 있고...”


드래곤들 중에서도 가장 나에게 적대적이었던 크리샤의 말에 순간 가슴이 메여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크리샤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난 정말로 괜찮아. 그야, 너랑 나의... 이 아이도 있고.”


아직 부풀지도 않은 자신의 아랫배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어루만지며. 무척이나 따스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 크리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괜찮다고  때 얌전히  들어.”


“...응, 미안.”

“사과하지도 말고. 허리도 펴. 당분간 보기도 힘들어질 텐데 마지막 모습으로 이런 것만 보여줄 거야? 나한테만 그러는 거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잖아?”

크리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크리샤가 요 일주일 사이에 무척이나 많은 것이 바뀌었듯이, 나 역시 바뀌어야하는 법이었다.

나 역시 평범한 남자였다. 그러니까...


자식 앞에서, 조금은 멋져보이고 싶은 아버지라는 것을 동경하는, 평범한 남자라는 소리였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였지만, 벌써부터 이럴 수만 없었다.

나는 옆에 있던 에루나를 보고서, 입을 열었다.


“에루나, 크리샤를 잘부탁한다.”


나 대신에 일주일가량을 크리샤의 옆에서 편의를 봐주기로 한 에루나가 그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샤 아가씨와, 작은 주인님에 대한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령  몸이 바스라진다하더라도, 반드시 지켜낼테니 말입니다.”


태연한 얼굴로 다소 과장스런 말을 해오는 에루나였지만, 덕분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사실 육아는커녕 임신이고, 산후조리고 뭣도 모르는 내가 크리샤 옆에 있는 것보다는, 이미 일곱이나 되는 드래곤들이 자립할 때까지 키운 전력이 있는 에루나쪽이 훨씬 믿음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크리샤가 아직 어릴적... 그리고, 알이었을 적과는 달리, 내 아이라서 그런 것인지, 그게 아니면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로 임신한 탓인지, 평범하게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 지금과는 조금 경우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에루나의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이런 걸로 걱정할 필요도 없이, 완벽하게 크리샤를 도와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물론, 에루나도 내 체질적인 문제로 인해 그리 오랫동안 있을 수도 없는 만큼 여전히 걱정스러운 부분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건 크리샤를 믿기로 했다.

적어도  며칠 동안, 크리샤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임신 중에 주의해야할 점, 이라는 책을 몇분만에 독파하고서, 곧장 그대로 행했던 크리샤였으니 말이다.

물론 아버지가 된 몸으로써 임신중인 크리샤를 두고 가야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괴롭지만... 어쩔  없는 게 있는 법이었다.

크리샤의 말대로, 약속은 약속이었다.

크리샤를 포함한 드래곤들이, 약속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알고 있는 내가, 이러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크리샤를 두고 가지 않겠다고 말한더라면, 크리샤도... 그리고 아르카와, 다른 드래곤들... 루시아도 나에게 실망할게 분명했다.


“...또 그런 얼굴이나 하고. 정말이지.”

그런 나를 본 크리샤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다가오더니 이내 내 뺨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내 일생의 반려, 이지경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자, 표정 펴고,  웃어봐.”

짧은 입맞춤, 그리고, 그런 나를 축복한다는 말과 함께 귓가에 들려온 알림소리를 들으며. 크리샤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매만지던 내가 물었다.


“...갑자기 웬 뺨?”

이왕이면 입술이 좋은데.

그런 내 말에 크리샤가 얼굴을 붉혔다.


“이, 입술에다가 하면... 그, 하고... 싶어지니까... 내가 얼마나 참았는... 아, 아무튼 그걸로 참아! 그리고 자꾸 내 걱정을 하는데 나보다는 네 몸이나 신경 쓰라고! 나보다 훠얼씬 약하면서, 쓸데없이 누굴 걱정하는 거야?  혼자 두고 가는  신경 쓰이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런 걸로 널 탓할 생각도 없으니까 자꾸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지을 필요도 없고! 게다가 에루나도 있으니까, 딱히 문제도 없을거라고? 그리고...”


어째 말을 이으면 이을 수록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는 것처럼, 거듭하며 내게 말하던 크리샤가 다가오더니, 이윽고 꾸욱하고. 내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볼 때, 이 아이의 이름 지어 오는거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에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보통 아버지 쪽이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살아갈 육신을, 아버지는 아이에게 평생 동안 그 육신과 함께할 이름을 선물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크리샤와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내 몫이었다.

“으응.”

나는 그런 크리샤의 말에 조금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라.

이런 것도 유전인지는 몰라도, 크리샤가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이후로 이름을 지어줘야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들었을 때.


수없이 고민해봤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것들이, 이름이 없었다.


막상 멋진 이름을 지어주자고 생각해도, 머릿속에 맴도는 이름이란 것들의 꼬라지라는 것들이 죄다 꽝이었다. 적어도 아버지나,  이름을 지어주었던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이름이 꽝이라는 것만은 인지할 수 있던 나를 자랑스러워해도 좋았다.

아무튼, 드래곤의 이름을 지을 때는, 이미 옛저녁에 잊혀서 사용하지도 않는 고대 문자로 짓는 것이 상식이어서 한층 난이도가 오른 이름짓기는 나에겐 너무나 어려운 과제였다.

그냥 한글로만 지으면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기는 한데.. 크리샤의 이름, 고결한 대지를 의미하는 이름에서 따고,  이름의 의미인 축복받은 땅을 따서. 둘을 합치면 짜잔, 이고은이라는 예쁜 이름이 나오니 말이다.

참고로 뜻은 고결한 은혜였다.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고은, 발음도 얼마나 좋아. 거기에 남자아이가 태어나도, 여자아이가 태어나도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물론  이름을 이 세계에서 쓸  있는 것이 아니니 쓸 데 없는 생각이었다.

“...응, 좋은 이름 잔뜩 생각해올 테니까 걱정 마.”


크리샤가 내준 과제에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방금 막 다짐해놓고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기에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크리샤를 바라봤다.


자기가 말하고도 막상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는지 시선을 내리깔고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크리샤가 보였다.

사랑스러웠다.

조심스레, 팔을 뻗어 그런 크리샤를 껴안으려던 내 등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에?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로 그 크리샤를 잘도 홀린 모양이네에.”

또각, 하고. 그런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가... 마지막은, 바로 내 귓가에서 들려왔다.

흠칫하고 놀라서 옆을 돌아보자, 초록빛의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서있는 아르카가, 이윽고 내 목을 감싸며 말을 이었다.

“안녀엉, 오랜만이네에? 크리샤아.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인간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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