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162화
내가 그녀의 앞에서 마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럴 리가 없겠지.
내가 마왕이 되지 않았을 적에도, 이미 부덕의 군주란 칭호가 있었으니 그녀에게 호감을 얻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의 나를, 마왕으로만 여기고 있는 아리스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을.
내게서 시선을 돌린 채, 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아리스를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욱신거리는 머리가, 떠오르는 기억들이 나를 괴롭혔다. 지나치게, 그녀를 닮은 아리스를 볼 때마다 다시금 보이기 시작하는 환각이 고통스럽게 했다.
이래서는, 안됐다.
지금이야... 에루나와 로로 덕분에 어떻게든, 제정신을 차렸지만. 이래서야 또 언제 이런 짓을 벌일지는,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저주처럼, 끈덕지게 나에게 얽혀있는 한나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은 아마, 계속해서 그럴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증상이 심해진 계기를 떠올렸다. 그것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크리샤를 안고서, 내 상태창에도 떠올라있는... 용인이라는 종족의 비율이 상승한 이후부터였다.
그 뒤로, 나는 전보다 명확하게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한 것을, 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아마, 맨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의 당시였더라면. 지금처럼... 아리스를 보더라도 환상을 보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그 당시의 나는, 더 이상 그녀의 환상을 보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기억은, 결국은 희미해지기 마련이었다. 게임으로 도망친 나였지만, 게임을 하다, 지쳐 쓰러지듯 잠에 드는 나날을 보내던 시절에는, 그녀를 떠올리지 않았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아마. 그 당시의 나는 아리스를 보더라도, 지금처럼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으로써는... 또, 아무것도 모를 뿐인 그녀에게. 불합리하게 분노하고, 불합리하게 폭력을 휘두르려고 할 뿐이겠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녀가 알고 있는 나는, 여전히 마왕이었다. 잔인하고 사악해야할 터인 마왕. 인간으로써, 아리스로써는 혐오해야 마땅한 악.
그런 내가 노예 따위로 분노하는 이유를 그녀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금방 잊어버릴 게 분명했다.
그래서는 안됐다.
그 뒤에 남아있는 것은, 타다 남은 재와 같이. 그저 아무것도 없이 공허함 뿐이었다. 그저, 떠올랐던 기억으로 인한 괴로움과, 짙은 후회뿐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카울.”
“네, 네...!”
내 부름에, 허겁지겁 내 앞까지 기어온 카울이 부복하는 것이 보였다. 추욱, 하고 다리 사이로 말려내려간 꼬리가, 마치 잔뜩 혼이 난 강아지의 그것을 닮아있었다.
그렇다고 카울이 강아지마냥 귀엽다는 건 아니였다.
강아지처럼 귀여운 건 카울이 아니라 니아였다. 같은 개꼬리나 귀가 달려있다고 하더라도, 카울은 니아와 강아지에 비하면 귀염성이 매우 부족했다. 얼마나 부족하냐면, 굳이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부족했다.
...그래, 이거면 됐다.
이제는 농담이 떠올릴 정도로 진정이 된 머리로, 카울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추후에 다시 이야기하지. 그러니 너도 네 종족들을 데리고 가 다른 이들을 도와라. 그들의 말을 듣고서, 네 처분은 그 뒤에 결정할 테니 노력하라.”
“아, 알겠습니다...!”
내 말에 황급히 대답한 카울이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읍을 하고서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아마 카울이 동족을 부르기라도 하는지, 늑대의 그것을 꼭 닮은 하울링이 울려 퍼지는 것을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다가, 나는 여전히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아리스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리스. 너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린다.”
그런 내 말에, 훽하고 고개를 돌린 채로 말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거군요. 좋아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저는 절대로...”
자기는 굴복하지 않을 거라느니, 뭐니 하고 말을 늘어놓는 아리스에게. 내가 말했다.
“명령한다. 아리스.”
그녀의 말대로.
나는 그녀를 보며 한나를 떠올렸다. 그녀의 모습을, 그녀와의 기억을 추억했다. 그렇게 하면, 괴로움뿐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녀를 곁에 두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에루나의 조언에 의해서 그녀를 찾아나선 것이 아니었더라도, 아마 나는 결국 다시 아리스를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크리샤에게 부탁해서, 그녀를 살려달라고만 하면 그만인 것을, 굳이 시녀로 두어 내 곁에 두었던 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부 내 욕심에 의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그 욕심을 끊기로 했다.
솔직히. 이걸 끊는다고 할 수 있는가 싶긴 하지만.
나는 아리스를 향해, 말을 이었다.
“너에게 천공섬의 관리를 명한다. 너는 앞으로... 천공섬에 머무르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모든 것을 관리하라. 또한... 그에 대한 것은, 앞으로 시녀장인 에루나를 통해서만 내게 보고하고... 앞으로, 너는 나를 보지 않아도 좋다.”
내 말에 동그랗게 눈을 뜨는 아리스가 보였다.
“...네게 걸린 마법에 대해선, 내가 따로 부탁해서 조건을 바꿀 테니까 걱정 말고.”
“그런걸 걱정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보지 않아도 된다면, 조금 괴로운 건 참을 수 있으니까.”
명백한 거부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아, 명심해둘 건... 너를 통해서, 천공섬을 관리한다고는 했지만 네게 부여한 권한은 어디까지나 에루나의 허락 아래에 있는 것이니 이상한 짓은 안하는 게 좋을 거다.”
“......알고 있어요.”
“그럼 다행이지만... 아, 그리고 또... 천공섬에 대한 첫 번째 원칙으로... 내 영지에서 머무는 이들은, 모두 힘을 합쳐야할 동지이지, 노예와 주인 같은 관계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해라.”
“...이유는 뭐죠?”
내 말에 그런 질문을 해오는 아리스에게, 내가 말했다.
“그야 당연한 것이지 않나. 그들은 모두 내 노예다. 노예끼리, 서로 누군가의 주인이고 노예이고 하는 짓을 마왕인 내가 용납할 리가 없잖나?”
웃으면서.
나를 마왕이라고만 여기는 소녀에게.
“너 역시 마찬가지다. 아리스.”
마왕을 연기하며 그렇게 말했다.
“너를 풀어주는 것이라는 착각 하지 마라. 너 역시... 나의 것임을 잊지 말아라.”
그녀의 전부를, 오롯이 내가 소유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나에게. 그녀에게서 계속해서 한나를 보는 나에게. 일단은 이것으로 만족하라고 스스로 되뇌며. 그렇게 말을 했다.
“너는 나, 마왕 베헤노스의 소유다.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라.”
“...뭐하고 있어?”
뒤척이는 소리와 함께, 내 허리춤을 껴안으며 몸을 일으켜 세운 크리샤가, 빼꼼하고 내 어깨에 턱을 얹으며 그렇게 물었다.
보면 알텐데 굳이 물어오는 크리샤에게, 읽고 있던 책을 보여주며 대답했다.
“책 읽어.”
“그건 알고 있거든? 뭘 읽고 있는지 물어본 거야.”
크리샤의 말에, 나는 내가 읽던 책을 크리샤에게 건네주었다. 내게서 책을 건네받은 크리샤가 음음, 하고 책을 읽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야 그럴 것이, 그 책은 이전에 내가 읽다가 때려쳤던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어떤 초월자가 엘프를 사랑하게 되어서, 둘 사이의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을 기록해두었던 그 책 말이다.
솔직히, 앞부분은 거의 염장이나 지르는 책이었지만, 후술로 갈수록 진지한 책이었기 때문에 뭔가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읽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책의 앞부분. 즉, 한창 염장을 지르며 꽁냥거리는, 표현만 조금 고급졌지 사실상 관능소설, 혹은 야설에 가까운 부분을 읽은 크리샤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당연했다.
“뭐, 뭐야... 이런 건 왜 읽는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을 덮었던 크리샤가 이내 책의 제목을 확인하고는 더더욱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고서, 내가 말했다.
“그야, 누구씨가 하도 재촉하니까 그렇지.”
그 누구씨가 내 말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잘 익은 토마토와 같은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내, 내내내, 내가 언제 재촉했다고...”
그렇게 말을 더듬으면서 변명하는 시점에서 신뢰성이라고는 저 멀리 던져버린 크리샤였지만, 귀여우니 상관없었다. 허둥지둥 팔을 움직이는 크리샤의 팔로 당겨 끌어온 나는 그런 크리샤를 내 앞에 앉히고서 말했다.
“그래, 그럼 어제 그렇게 조르던 건... 누구였을까.”
그렇게 속삭이면서. 새빨갛게 익은 크리샤의 귀를 깨물었다.
“하앙...♥”
흠칫하고, 내 품안에 안긴 채 몸을 떠는 크리샤의 입 밖으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크리샤였지만, 어젯밤의 정사로 인한 효과가, 전신에 걸쳐져 퍼져있는 상태효과인 민감 덕분에, 겨우 귀를 깨물었을 뿐인데도 가볍게 절정한 탓이었다.
얼마 전이었더라면, 괜히 크리샤를 자극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고, 하루 종일 쥐여 짜였을 테니까 이런 짓은 안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귀를 물리는 것으로 절정해서, 그대로 스위치가 올라가버린 크리샤가 나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런 크리샤에게 먼저 선수를 쳐서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무작정 한다고 생기는 건 아니니까. 지금은 좀 참아.”
“으응...”
내 말에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이왕 보기 시작한 거, 마저 보는 건 어때?”
“...이 책?”
“그 책.”
“너는...? 보고 있었던 거잖아?”
“난 거의 다 봤으니까 상관없어. 그리고... 결국 너랑 나랑 해야 하는 일이니까, 나만 본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
내 말에, 얼굴을 붉히던 크리샤였지만, 이내 내 말대로 책을 펼쳐 진지한 얼굴로 읽기 시작했다. 하긴, 흥미는 있었을 것이다. 제목부터가 이종간의 교합이었다. 부제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어서 그렇지, 지금의 크리샤에게는 무척이나 관심이 있는 소재일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들어서... 크리샤가 무척이나 초조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 며칠 뒤,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날이 지나면...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곳. 천공성. 지금은 천공섬이 된 내 영지가 크리샤의 영지인 슈페리아에서 넘어가 아르카의 영지인 브란시아에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크리샤와 함께 있을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내가 이전에 약속한 대로. 그러니까, 일 년 안에 그녀들을 모두 사랑하겠다고, 또 일 년 안에 그녀들이 모두 나를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한 약속대로.
현재의 천공성은 느릿한 속도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덕분에 대충, 각각의 드래곤들의 영지에서 한 달에서, 두 달 사이의 기간정도를 머무르며 날고 있는 천공성은, 대충 일곱 명을 모두 만나는데 일 년 정도가 걸리게끔 되어있었다.
그렇게 천공성이 해당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에, 해당 영지의 드래곤을 반하게, 그리고 그 드래곤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 나와 드래곤들이 한 약속이었다.
나로써는 터무니없는 타임어택 조건이 깔려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애당초 이것조차도 내 고집을 들어준 것이니, 내가 뭐라고 할 말은 없었다. 여태까지는 어찌저찌, 잘 풀리기도 했고 말이다.
문제는... 바로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있었다.
이제 일주일도 안되서, 나는 다른 드래곤. 정확히는 다음 영지, 브란시아의 주인인 아르카의 곁으로 가야만 했다. 그것이 약속이었으니 말이다. 딱히, 그 동안 다른 드래곤들을 만나면 안된다는 말은 없었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리도 없었다.
크리샤도 지금이야 하루 종일 천공성에, 정확히는 내 침실에 머무른다 싶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됐건 그건 천공성이 있는 이곳이 그녀읭 영지 안이기 때문이었다. 영지 밖으로 나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다.
더욱이, 나도... 막상 아르카와 곁에 있을 때는 함부로 크리샤와 만날 수도 없었다. 이미 드래곤의 질투는 겪어본 바였다. 아무리 알고 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아르카와 이야기라도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크리샤가 무슨 감정을 느낄지는 뻔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크리샤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크리샤는 더더욱 내게 집착했다. 정확히는... 지금도 내가 바란다면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크리샤가 내게 부여했던 퀘스트의 클리어 조건인...
그래.
임신에 집착하고 있었다.
내 아이를 갖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하루 종일 뼈가 삭도록 쥐여짜이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도통 소식이 오지 않았다.
뭐, 예상은 한 것이었다. 루시아 때도, 하루 종일을 붙어 지냈을 때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듯,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열심히 책을 탐독하고 있는 크리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눈앞에 퀘스트 창을 띄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