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160화 [4차 통곡의 벽]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가, 아리스와 한나가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녀는 한나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생김새뿐만이 아니였다. 성격도, 하는 말과 몸짓조차도.
그녀를, 한나를 떠올리게만 했다.
그래서 그랬다.
‘저리가.’
아리스를 볼때면, 그녀가 떠올랐다.
손목에 피를 흘려가며, 마지막까지 나를 거부했던 한 소녀를 떠올리게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를 강하게 추억할 때마다. 어김없이 그것이 나타났다.
보일 리가 없는 그녀가, 내 눈앞에 나나타났다.
잊을 수 없는, 잊을 수 없던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
‘나한테, 손대지 마.’
그녀가 나타나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가 사랑했던 그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내 기억으로 이루어진 환상이.
여전히 피를 흘려가며,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한다.
‘네 도움 같은건 필요 없으니까... 저리, 꺼져 버려.’
그리고 또다시, 그녀는 나를 거절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 그대로. 그녀가 내게 남겼던 말을 다시금 내게 전한다.
알고 있다.
이것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그녀는 환상이라는 것을, 그저... 어딘가 맛이 가있는 내 머리가 제멋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인 환상일뿐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오랫동안 보아왔던 환상이었다. 아는 것이 당연했다. 익숙해졌다고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고작 환상정도에 흔들릴 정도도 아니었다.
그만큼 오랫동안 보아왔고,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환상이 나를 보며 속삭이듯, 다시금 되풀이하며 말한다.
‘저리가.’
‘나한테, 손 대지마.’
‘네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저리, 꺼져 버려.’
그래, 넌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내 기억속의 너는, 분명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너의 말을 듣지 않았었다.
그녀의 환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피로 얼룩진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기 위해서.
그러자 환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알고 있었다.
그저 환상이었다.
그저 거짓이었다.
그러니까 손에 닿으면, 부서지듯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도대체 왜.”
하지만, 환상은...
환상은 깨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내 눈앞에 있었다.
그녀가, 깨져나간 환상 속의, 한나의 모습으로.
그녀가 있었다.
아리스가.
한나를, 그녀의 모습을 빼닮은 소녀가.
내 앞에, 다시 그녀의 환상이 보이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환상을 향해, 한나를 향해 뻗었던 손은, 그런 그녀의 뺨에 닿은 채. 그녀의 피로 뺨을 더럽히고 있었다.
붉은 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어째서냐.”
아리스의 얼굴이, 그런 내 물음에 당혹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어째서... 너는.”
나를 버리고 떠나갔던 네가, 어째서 그런 차가운 곳에서 홀로 죽어가고 있었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네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녀가 죽어가고 있었던 이유조차도 몰랐다. 그리고, 영영 알 수 없었다.
네가 나를 거절했으니까.
단지, 그때...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녀를. 한나를 그대로 두면 죽을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힘없는 손으로 나를 밀쳐내고, 욕을 해가며 나를 밀어내려고 하던 한나를 억지로 업어들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그녀가 내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던지, 그런 걸 생각할 여규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단지 그녀가 살아줬으면,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것뿐이었다.
“어째서...”
단지 그것뿐이었다.
살아서.
‘걱정마! 이 프로 가이드만 믿어보라구!’
단지 살아서.
‘으음, 역시...! 넌 안경을 끼고 있는 편이 낫겠다. 안경이 어울리냐고? 아니, 안경을 쓰는 편이 조금이라도 얼굴이 가려지니까...’
그때처럼...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미안, 어제 조금 피곤한 일이 있어서... 대신, 오늘은 서비스로 아주 요리를 잘하는 가게를 알려줄게! 아, 혹시... 매운 거 못 먹는 건 아니지? 하긴,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그치?’
그저, 그것뿐이었다.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다고, 달라질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바보처럼. 뒤늦게 가서야, 그녀를 찾아간 주제에.
‘그거 알아? 너 엄청 멋진 거. 아니, 밥 사달란 뜻은 아니고...... 정말, 그렇게 티나?’
나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나중에 하고 싶은게 있냐고? 그건 왜? 아... 돈을 모으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글, 쎄... 뭐, 없는 것보단 있는게 낫잖아? 안 그래?’
그토록, 그녀가 돈을 모으려고 했었던 이유를. 그녀가 둘러댄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서, 아무렇게나 내뱉었던 말을 사과하고 싶었다.
‘너야말로 혼자서 이런 곳에 온 이유가 뭐야? 여긴 볼 것도 없는데... 응? 그냥? 뭐야, 그거. 바보 같아.’
그녀가 어째서 그토록, ‘밖’에 대한 것을 궁금해했었는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내뱉었던 말들을 사과하고 싶었다.
알고 있었다.
그래봤자, 이미 늦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러고 싶었다.
‘갑자기 왜 이러냐고? 이래서 동정들은... 이유가 그렇게 중요해? 뭐, 좋아. 그렇다면 알려줄게.’
‘...그냥이야, 그냥. 하고 싶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뭐, 걱정하지 마. 책임지란 말은 안할꺼니까. 거기에... 한방에 될 리도 없고 말야.’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래, 그냥...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깼어? 으음, 나 잠깐 볼일이 생겨서 나갔다 올게. 걱정마. 금방 돌아올테니까, 오늘도 멋진 곳을 구경시켜 줄테니까 넌 아침이나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가끔씩 그녀의 얼굴에서 엿보이던 그림자를 모른 척 했던 것을.
‘...저기로 가고 싶다고? 왜? 저긴 재밌는거 하나도 없는데. 그러지 말고... 내가 더 재밌는 거 알려줄 테니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표정이 왜 그래? 배라도 아픈 거야?’
‘...사람을 만났었다고? 누굴?’
‘......’
‘그래, 알았구나.’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었던 것을.
그저, 사과하고 싶었다.
‘그래, 나 창녀야. 다른 남자한테 가랑이를 벌리고, 먹고 사는 창녀.’
‘...왜? 새삼 들으니까 내가 더러워?’
‘거짓말하지 마...!’
‘결국 너도 똑같을 뿐이야.’
‘너도 내가 불쌍하니까, 그러니까 동정하고 있을 뿐이야? 아니란 말은 하지 마! 그럼 어째서...! 어째서... 그 사람한테 돈을 준거야?’
‘...봐, 맞았지? 저리가, 그딴 동정 집어치워! 내가 너한테 그딴 돈 몇 푼 받으려고 접근한 줄 알아? 넌... 내가, 내가 그런 여자로 보였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그래서, 그 사람한테 돈을 줬어? 내가, 너랑 잤으니까! 넌, 날 창녀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뭔데! 결국, 너도 똑같을 뿐이잖아. 결국... 너도 날 샀을 뿐이야’
나는 어째서.
그렇게 떠나간 그녀를 보고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는지.
아무것도 못하고서. 그저 후회했던 것을 후회했다. 뒤늦게 가서야, 그녀에게 사과를 하려고 했던 것도, 후회했다.
달리는 동안에도,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의 온기가 전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수없이.
후회와 회한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두통이 일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거리고, 다리는 욱신거렸다. 달리면 달릴수록, 호흡은 거칠어져만 갔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그녀와 나누었던 애정이.
끊임없는 후회와 회한 속에서 같이 떠올랐으니까.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다리가 꼬여서 넘어질 뻔했지만 그럼에도 뛰었다.
뛰고, 뛰었다.
단지 그녀가 살아줬으면 좋겠다.
살아서, 그녀가 나를 여전히 나를 싫어하더라도, 그녀가 여전히 나를 거부한다고하더라도, 그저 그녀가 살아줬으면, 그저 그것만을 바라면서.
살아만 있다면 언제가는.
언젠가는 그녀에게 사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나를 뿌리치고 뛰쳐나갔던 그녀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을테니까.
그녀가 설령 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녀가 미소지는 대상이, 그때가서는 내가 아니게 되었더라도. 그것만을 바랬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간신히.
그녀를 업고서, 나는 병원에 도착했었다.
하지만 그녀를 업고서 도착했던 병원에서는 나에게 청천벼락같은 소식을 전했다. 그녀보다 앞서 실려 왔던 환자의 수술로 인해, 혈액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간신히 한나를 업고 온 병원에서는, 그녀를 수술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다시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까운 병원으로 무작정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더 큰 병원으로 갔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와서 다른 병원으로 가는 것은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병원에서 수혈을 위한 혈액을 구하는 것조차도, 한나에게는 그것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위해 내 피를 사용해달라고 말했다.
한나와 짧지만은 않은 시간을 어울리면서. 그녀에 대한 것을 알아갔을 때.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제외하고서, 그녀에 대한 것을 알아갔을 때. 그녀와 내가 혈액형이 같다는 사실은 이미 들었던 것이었다.
내 피를 수혈 받는다면, 적어도 살릴 수만은 있었다.
다른 병원에서, 피가 도착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나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피였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죽지만 않는다면, 그거면 괜찮았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 누워서. 그녀를 위해 피를 뽑던 중에... 그녀가 깨어나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나는 내 피를 거부했다.
병원에서 취한 응급조치로, 간신히 정신을 차렸던 한나는 나를 보고서, 차라리 수술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내버려두라는 단호한 말로.
나를 거절했다.
‘저리가.’
‘네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저리 꺼져버려.’
멍하니,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녀의 말만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말만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결국, 뒤늦게 도착한 피와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던 그녀가, 싸늘한 모습으로 다시 내게 돌아올 때까지.
“어째서...”
그 말만을 망연히 되풀이하는 것 밖에,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