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135화
자락스가 죽었다.
로로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스물일곱 번째.
자락스를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고서 다진 고기처럼 살이 찢기고, 두드려 맞은 끝에. 움막 구석에서 로로가 기절해있던 동안.
자락스는 죽었다.
자락스를 죽인 자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낯선 여자였다.
자신을 에루나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낯선 여자.
자신의 유일한 목적이자, 삶의 목표였던 자락스를 죽인 여자.
그 여자가, 에루나가 로로에게 말했다.
“분하십니까?”
분했다.
자락스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됐다. 자신의 손으로.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서 죽어야만 했다. 그런 식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에 불과한 이에게 죽어서는 안됐었다. 그런 로로를, 보랏빛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을 한 그녀가, 로로와 시선을 마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해지면 그만입니다.”
평생을 자락스를 죽이기 위해 노력했던 로로에게, 그리고 그런 자락스를 손끝으로 죽였다는 여자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리지만.”
그렇게 말을 이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여자의 손을 뿌리친 로로가 에루나를 노려봤다.
그렇게 노려보다가, 이내 바록과 바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말대로.
강해지기 위해서.
복수의 대상을 빼앗긴 복수귀는, 자신의 사냥감을 빼앗은 그 여자를, 반드시 이기겠노라고 다짐하고서.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너에게 주어진 부당한 운명은, 너의 주인인 내가 거두마.”
두 눈으로, 피눈물을 쏟으며. 그 남자는 로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보랏빛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여자를 쫓아 온 땅에서, 처음으로 본 남자는.
로로를 보고서, 슬피 울며 그렇게 말했다.
‘...왜?’
그 땅에 닿기 전까지, 여자에게 배웠던 여러 가지의 것들. 자신이 곧 낙스라는 땅에서 벗어나, 우난나라는 이름의 대륙으로 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땅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모셔야된다는 것.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로로였지만. 로로는, 자신을 보며 울고 있는 남자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곧 그 남자의 손이 머리에 닿았을 때.
상냥하게, 어머니의 이후로.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듯한 손길을 느꼈을 때 알 수 있었다.
“아.”
나지막하게, 로로의 입 밖으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온몸에 얽혀있던 무언가로부터. 피의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로로의 머릿속에 이미 죽어버린 자락스가 했던 말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죽게 되더라도, 우리의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말은 진실이었을 거다.
그 사실은, 당사자인 로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몸이 자랄수록 느끼고 있었다.
보다 강한 피를.
보다 우수한 존재를 낳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그저 증오스러웠던 자락스에게, 본능적으로 끌렸던 것을.
그것이 자락스가 말하던 피의 숙명임을, 로로는 알 수 있었다.
피의 숙명,
혹은... 피의 저주.
이 저주받은 땅에서.
그곳에 격리된 수많은 종족들은 서로 죽이고, 잡아먹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미쳐버린 동족을 죽여 잡아먹고, 병들어 죽은 동료를 잡아먹었다.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왔던 위협에. 세월을 거듭할수록 흐려져가는 이성을 붙들어 잡기 위해서. 우리들의 본능에 스스로 새겼던 굴레.
서로 몸을 섞고.
보다 강한 피를.
한때 강성했던, 우리들의 선조의 피를. 보다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보다 뛰어난 피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본능에, 자신 역시 얽매여있다는 것을 로로는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로는 필사적으로 자락스를 죽이려고 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여자의 몸이 되어갈 수록. 자신이 변해가는 것을, 증오를, 복수를 잊어가는 것이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자락스는 강했다.
성장할수록, 로로는 강해졌다. 근육이 붙고, 좀 더 날렵해졌으며, 아주 조금의 소리도 없이, 자락스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은신술까지 터득했다. 거기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더라도 하룻밤사이에 나을 정도로 재생력이 뛰어나졌다. 그렇다 해도 자락스를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로로가 성장할수록 강해졌듯이, 자락스 또한 점점 더 강해져만 갔으니까.
그리고 그 힘의 대가라는 것처럼.
점점 흐릿해져가는 증오에. 복수심에 로로는 혼란스러웠다.
시간을 지날수록, 점점 더 온몸을 얽어오는 피의 숙명에.
오래도록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에 내려온 저주에.
점점 더 얽혀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랬던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로로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런 로로의 눈에 비친 것은, 초점을 잃어가는 남자의 오른쪽 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남자가 자신을 위해서 치룬 대가임을 로로는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남자에게 어째서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풀썩, 쓰러지는 남자의 주위로. 보랏빛 머리카락의 괴물과, 그 괴물보다 더한 금빛 머리의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갔으니까.
로로가 그 사이를 뚫고서, 죽은 듯이 쓰러져서 잠에 든 남자를 깨우고,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냐고 물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대신.
로로는 생각했다.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복수의 대상이었던 자락스는 이미 죽어 없었다.
자신도 이제 와서 눈치 챈 것이었지만, 마냥 다른 누군가를 계속해서 증오하던 것도. 보랏빛 머리카락의 괴물에게 느꼈던 저항심도 이제는 옅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것조차도, 저주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로로는 생각했다.
일족에서 가장 강했던 자.
본능적으로, 자락스의 아이를 원했던 피의 저주가. 그를 죽인 여자를 용서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저주는 없었다.
자신에게 얽혀있던 피의 숙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눈앞의 사내가 대신해서 거둬들였으니까. 내가 짊어지고 있던 저주를. 숙명을. 남자가 대신 거둬들였으니까.
'너에게 주어진 부당한 운명은, 너의 주인인 내가 거두마'
"...주인."
오늘 막 얼굴을 본, 나의 주인이 거둬들였으니까.
그리고 그 주인이, 괴물에게는 이지경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신은 베헤노스라는 이름으로. 두 이름으로 불리었던 남자의 말이 로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는 나의 암살자로 임명하마. 이제부터 너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내 곁에서, 나를 지켜라.'
지키는 것.
죽이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키는 것.
자신에게 부여된 새로운 숙명에. 운명에. 로로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응, 지킬게."
그의 곁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그를. 나보다 훨씬 약한 주제에. 자신의 것을 희생해서 구해준 그를.
"...당신을, 지킬게. 나의 주인님."
그리고 언젠가는...
ㅡ나는...
깊은 곳.
한없이 낮게 가라앉았던 의식이 부상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척이나 따스한 곳, 무척이나 아늑해서, 그저 그렇게만 계속 있고 싶었던 곳에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느닷없이 끌어올려졌다는 감각도.
멍하니, 눈이 부시게 반짝거리는 천장이 비쳐보였다. 알록달록, 보석들로 장식된 천장이. 그런 천장을 멍하니 보며, 소녀는 생각했다.
나는...
나는 누구?
이름이, 존재가, 흐릿하게 잊혀서. 희뿌옇게 옅어져서,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멍하니 뜨인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로로."
로로.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소녀는, 로로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런 로로의 눈에, 어머니가 지어주었던 그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는 남자가 보였다.
나의 주인이자.
내가 지키기로 맹세했던 남자가.
절박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깼으면 좀 도와주라."
알몸의, 귀가 뾰족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저들에 대한 것은 알고 있었다. 자신과 같이, 남자를 모시던 이들이었다.
...조금, 무언가 분위기가 변한 것도 같았지만.
“나의 주...♥”
특히나, 저 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여자는 자신의 가슴을 주인의 팔에 대고 문지르고 있었다. 저것이, 바록과 바쿠. 낙스에서 함께 왔던 둘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던 여자의 모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요염한 표정을 지으면서.
동일인물로는 보이지 않는 여자의 모습을 본 로로가 말문이 막혔다.
“......”
동시에 가슴 깊이서 끓어오르는 감정에 눈살을 찌푸렸던 로로였지만, 이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뿌득, 뿌드득...
마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뼛소리를 울리는 육체를 조정하고서.
주먹을 움켜쥐자, 스물스물하고. 주먹 주위로 짙고 어두운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기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검고 질척하게.
“...투기?”
조금 달랐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검고 질척하게 움직이는 그것이 주먹을, 팔을, 어깨를 넘어서며 몸을 감싸오자 투기를 사용했을 때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힘이 온몸에서 흐르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팡!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로로는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