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116화
내 눈의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통찰을 사용하고 있는 중에 뭘 잘못 본다는 게 말이 안됐다.
그러니까.
내 눈의 착각이 아니라면. 지금 저 새끼가 내 앞에서...
“아니... 저 녀석이 저 년이랑 입을 맞추던 알몸으로 같이 춤을 추던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무 상관도 없었다.
아무 상관도.
나랑 녀석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원수... 는 아니더라도, 썩 좋은 관계라고는 할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 그래, 크리샤. 도저히 눈뜨고 못 볼꼴을 봐서 그런 거야. 그래서 짜증이 난 게 분명해.
거기에,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참에 이 모습을 찍어다가 루시아 녀석한테 보여주면, 대체 무슨 이유로 저딴, 아무 여자한테나 발정나서 입을 맞추는 쓰레기 같은 자식한테 빠져서 눈이 돌아간 건지 모를 그 녀석도 제정신을 차릴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 진짜!”
그래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건 왜일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이유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저 두 연놈을 떼어놓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런 다음에...
그런 다음에, 뭘 어쩌겠다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충동과 이성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녀석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고오오...!
“...마력을 흡수하고 있어?”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의 마력을 흡수한 상태에서, 더욱 많은 마력들을. 내가 주변에 흩뿌려놓았던 마력들로도 모자라서, 주변에 기절해있는 검주들과 마법사, 자연 그 자체에서 떠돌고 있는 마력까지.
모조리 빨아들이는 녀석이.
정확히는 녀석의 이마에 돋아난 뿔이 보였다. 그 뿔이 점점 커져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뿔이 커지면 커질 수록 주변의 마력을 흡수하는 속도 역시 빨라져만 갔다.
“이 현상은...”
기억 속에 있었다.
나의 기억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오래된 기억 속에.
마왕.
다른 차원 너머에서 소환되었던, 400여 년 전에 퇴치되었을 터인 마왕이 저질렀던 짓 중 하나.
“황폐화...”
일대의 마력을 모조리 흡수해서,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드래곤으로써는 용납해서 안되는 행위 중의 하나였다. 그야, 이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마력이 없어진다는 것은, 곧 그 땅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진짜 마왕이라도 된 거야 뭐야?”
인간이 마왕이 됐다는 건, 전례조차 없었던 일이었다.
죽어가던 녀석이 갑자기 팔팔해졌나 싶었더니, 마룡이나 마왕같이 불길한 마력을 품더니, 끝내는 마왕 같은 짓거리까지 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상황이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좋아, 이건 어디까지나. 드래곤으로써. 이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자로써 그런 거니까.”
우우웅...!
손끝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아까까지 치밀어 올랐던 분노가, 마력으로 바뀌어서. 한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단 때려눕히고, 어떻게 된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봐주겠어.”
아직까지, 이 일대는 아까 전에 펼쳐뒀던 ‘영원의 밤’이 발동중이었다. 넓은 범위의 세계를 도려내서, 반전 세계화하는 그림자 속성과 공간 속성이 섞인 마법인 영원의 밤이 발동중이니 이곳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파괴는 별다른 힘을 쓰지 않아도 복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날뛸 수 있다는 소리였다.
원래는, 여기에 온 인간들을 손봐줄 생각으로 쳐뒀던 마법이었지만 그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을 들어 올리자 여태까지 모이고 있던 마력들이 작은 구슬의 형태를 이루었다.
“날아가 버려.”
우선 아까부터 짜증나게 붙어있는 저 둘을 떼어낼 생각을 하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공간속성의 고위 마법.
굴절하는 세계.
위력을 조절하기 위해, 영창을 생략해서 만들어낸 굴절하는 세계의, 그 발동의 트리거가 되는 구슬이 여전히 입맞춤 삼매경인 두 녀석의 위로 떨어졌다. 본래대로라면, 그 일대를 통째로 우그러뜨려버리는 위력을 가진 마법이었지만, 본래의 것보다 절반가량 작은 구슬이.
그리고 그 순간.
녀석이 머리 위로 떨어지던 구슬에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설마...”
키이이잉...!
녀석의 손에 움켜쥔 구슬이, 사방으로 마력을 퍼트리며 공간을 우그러뜨리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뻗쳐나간 마력이 그대로 녀석의 손을 통해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위력을 줄였다고는 해도, 고위의 마법을. 그것도 내가 펼친 마법을 막아낸 것만이 아니라, 도리어 흡수해버렸다.
하지만 그딴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구슬의 마력을 흡수해버린 녀석은 재차 아리스라는 인간 녀석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이번에는 혀까지 집어넣어서.
“하...”
그래...
어디 해보자 이거지...?
내 마법을 막아낸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런 것보다. 나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 녀석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보다는 저딴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듯이, 저렇게까지 열중해하는 모습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 마력을 바쳐 바라건대.”
대체 얼마 만에 해보는, 진짜 영창인지 모를 것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나마 약식으로라도 영창을 했었던 것은... 저 녀석이 멋대로 온천에 쳐들어왔을 때였지.
그래, 그때도 저 녀석은 저랬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아니, 오히려 나랑 루시아랑 비교해가면서, 나보다 루시아가 더 낫다느니 뭐니 하는 엉터리 같은 소리나 하고...
“밤보다 깊은 어둠. 빛조차 덮어 지우는 어둠을.”
녀석이 나한테 했던 말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래,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났다. 녀석은 나랑 같이 있을 때도, 항상 루시아의 이야기만 했었다.
짜증이 치밀어오를 정도로, 녀석의 입에서는 루시아의 이야기만 나왔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내가 앞에 있는데도, 녀석은...
어째서 지금 그런 것들이 생각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안 그래도 머리까지 뻗쳤던 분노가 폭발할 것 같았다.
너 같은 건...
뿌드득...!
너 같은 건!
“바라노라, 이 땅에 영멸하는 어둠을.”
녀석을 향해 손을 뻗어 마지막 영창을 시작했다.
“검은 구...(Black Ho...)”
“안됩니다, 크리샤 아가씨.”
아니, 하려고 했다. 눈앞에, 에루나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양팔을 벌린 채로. 에루나가 녀석을 가렸다.
“...에루나?”
“네, 아가씨. 접니다.”
“어떻게...”
영원의 밤이 펼쳐지고 있는 이상, 본래 범위 안에 있었던 이들 외에는 다른 누군가가 이곳으로 넘어올 수 없었다. 일종의 결계, 아니, 아예 다른 공간을 만들어서 그 안에 가둬버리는 마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에루나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실례, 시간이 없어서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무리하는 중이라서.”
“무리라니...”
에루나의 말에 그제야 보인 것은, 검게 녹아내린, 에루나의 하반신이었다. 아니, 하반신뿐만이 아니라. 몸 이곳저곳에 그런 상처들이 있었다. 몸 곳곳에, 미스릴 실로 짜낸 피부가 벗겨져서. 그 밑에 드러난 드래곤의 뼈와 이빨이 섞인 금속이 시커멓게 녹아내린 에루나의 모습을 보자 영창을 마무리 지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지만, 그런건 아닙니다. 이건... 아가씨의 마법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내 탓이 아니라니, 그럼 대체 누가 너한테...”
“그보다 중요한건 주인님 쪽입니다.”
아무래도, 조금 늦어버린 모양이지만 말입니다, 하고.
평소답지 않게 내 말을 자른 에루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저주가 풀린 것과 용화는 둘째치고서, 저건 저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적어도... 계획되어졌던 일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저주라니? 그보다, 용화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였어? 계획되어졌던 일은 또 뭐고?”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에루나가 녀석에게 다가갔다.
“원래는 제가 주인님의 저주를 봉인할 때 사용하려고 했던 거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히려 다행이군요.”
푸욱!
그러고선, 스스로의 가슴을 찔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스스로의 가슴을 찌르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나타난 것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거였으니까.
“그건...!”
“사용한지 400년은 지났지만, 명색이 드래곤 하트니까 대가로썬 충분할겁니다. 괜찮습니다. 예비는 더 있으니. 지금보다 힘은 약해지고, 조금은 잠들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몸을 바꿔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관리는 했지만... 음, 조금 걱정되긴 하군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주인님이, 후회할 일을 막으려는 것뿐입니다. 분명, 주인님께서 지금의 일을 알게 되면 후회하실 테니까요. 주인님께서 바라는 일을 이루는 것, 그것이 저의 역할이니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였다.
내가 아는 녀석은, 에루나가 저런 짓을 하는걸 바랄 녀석이 아니었다.
조금 짜증나는 녀석이지만, 적어도 그런걸 좋아하는 쓰레기는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크리샤 아가씨.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에루나가 그렇게 말하고서.
미소 지었다.
“사실 이보다 더한 것까지 생각했던 적도 있으니까요.”
《드래곤의 반려, 이지경》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이라서 그런지, 뭔가 전개가 엄청 병신 같았는데... 내가 갑자기 검을 맞질 않나, 심장이 터지질 않나... 그러다가 마왕이 되어버렸다.
어린 애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꿈을 꿨다.
이상하다.
잠에 든 기억이 없는데...
게다가, 그 꿈에서. 이번에는 에루나까지 튀어나왔다. 그것도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정신이 드셨습니까, 주인님?”
“...에루나?”
아니, 에루나는 또 왜? 잠깐만,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게 맞긴 한 건가?
상처투성이의 에루나라니, 아무리 봐도 믿겨지지 않는 모습이니 꿈인게 분명하겠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에루나가 저렇게까지 다친 모습을 본다는 건 영 불편했다.
“으음...”
그때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에루나가 입을 열었다.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괜찮습니다, 주인님. 제 품이라면 언제든지 빌려 드릴 테니, 낮잠이라도 주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니, 내가 애도 아니고...”
무슨 아이를 재우듯이 그런 소리를 해봤자... 하지만 꿈치고는 에루나가 할 법한 소리였다. 조금 생뚱맞은 소리를 자주 하는 녀석이니까. 게다가 확실히 졸리기도 했다. 꿈속에서 졸리다니 조금 이상하지만. 거기에 꿈이라서 그런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무척이나 피곤했다.
“그렇습니까? 아쉽게 됐습니다. 이 몸으로 주인님을 안는 것은 아마 힘들어질 것 같으니, 이번에는 제 어리광 좀 받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고 할 때, 그런 내 입술에 에루나의 입술이 닿았다. 아주 짧은 입맞춤. 보고 있던 것이 아니었더라면, 스쳐지나간 것도 모를 만큼.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서.
내게서 떨어진 에루나를 바라봤다.
“무슨 짓이야?”
“생각해보니 어리광을 부리는 거라면 이쪽이 더 나아보였습니다.”
뻔뻔하게. 평소와 같이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한 에루나의 말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때.
투둑, 하고.
그렇게 말하는 에루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져서, 쪼개지고. 조각이 나 떨어졌다. 그 밑으로 회색빛의, 무기질적인 금속의 색깔이 비쳐보였다.
“어...”
“부끄러우니 보지 말아주십시오.”
내 눈을, 손으로 가리며 에루나가 말했다.
“아무리 골렘인 저라도, 민낯을 보이는 것은 부끄럽습니다.”
“민낯이 아니라...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에루나?”
“괜찮습니다. 별 일 아닙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지금 이것이 꿈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지금 내게 또렷하게 전해져오는 에루나의 감정이. 지금 일어나는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내 눈앞에서 벌어졌던 방금 그게...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쉽지만,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그런 내 귓가에, 에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꾸만 감기려고 하는 눈을 억지로 떠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눈꺼풀에 뭔 짓이라도 한 것처럼, 엄청나게 무거워서.
“에루나, 대답, 해.”
“......”
“에루나!”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있으면 대답을, 하란 말이야.”
지금에 와서는 눈꺼풀만이 아니라, 입도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나에게 에루나가 말했다.
“아쉽군요. 좀 더 주인님을 제대로 보필하고 싶었습니다.”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지 말... 읏...”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에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어둠이 눈앞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