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111화
대롱대롱.
발목을 그림자에 잡힌 채로 거꾸로 매달려있는 내 눈에 잔뜩 화가 난 크리샤의 얼굴이 비쳐보였다.
“그래서... 대체 뭔데? 오랜만에 인간 얼굴을 보니까 반갑기라도 했던 건 아닐 테고.”
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크리샤가 그렇게 물었다.
그 크리샤가 말이다.
화를 내는 것도 일단 참고서 이유를 물어본 거였다.
“호감도가 오르긴 올랐구나...”
이제 겨우 10의 천장을 뚫은 정도기는 했지만. 오르긴 오른 모양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대로 땅에다가 내리꽂고 싶어졌으니까 빨리 본론부터 말해.”
“넵.”
본론이라.
크리샤의 말에 고민했다. 이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건 둘째 치고, 그러려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우선, 내가 로로의 저주를 대신 안게 된 이유부터 설명해야 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기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로 본론만 말했다.
“저 검이 필요해.”
“그래?”
아리스가 쥐고 있는 검을, 편린의 파편이 깃든 천검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크리샤가 말을 이었다.
“간단하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서 크리샤가 걸음을 옮겼다.
대롱대롱.
여전히 나를 거꾸로 매단 채로. 아리스가 있는 곳으로.
“다 좋은데 나 좀 내려주면 안되냐?”
“넌 거기서 반성이나 하고 있어.”
이러고 있으면 머리에 피 쏠리는데.
“대, 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크리샤가 다가가자 주위에 넘실거리는 그림자들을 경계하며, 아까 나한테 예의를 갖추라고 말했던 검주가 그렇게 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크리샤에게.
촤아악!
“허업...!”
그런 검주를 향해 그림자가 뻗어나가다가 이내 우뚝, 하고. 검주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그림자를 보며 기겁한 검주의 얼굴이 보였다. 안색이 심각하게 창백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검주의 발밑. 멈추지 않았던 다른 그림자의 끝이 땅 속 깊숙이 파고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네가 알 바 아니니까 저리 비켜.”
스으읏, 하고 검주의 콧등 앞에 멈춰있던 그림자가 스치듯이 지나쳐가자. 그런 검주의 콧등이 칼에 날카롭게 베인 듯 피가 흘러나왔다.
"어, 어떻게... 투신을...?"
잘은 모르겠지만 모종의 방어가 꿰뚫렸다는 것이 검주의 얼굴이 저렇게 창백해진 이유였나 보다.
투신이라... 나도 할 수 있으려나. 원리는 알겠는데. 검주의 몸을 보니 옅은 푸른색의 투기가 몸 주위를 코팅하듯이 얇게 둘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거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필요 없겠지만. 나에겐 저 검주도 막지 못하는 크리샤의 그림자도 막아낸 ‘차원을 넘은 자’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도 맞으면 공마냥 뻥뻥 날아다니기는 하니까 있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이 기능 ‘투신’을 습득하셨습니다.]
얻었네? 전에는 그냥 책을 읽거나, 별 짓 안해도 금방금방 얻었던 기능이였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쌩으로 기능을 습득했다.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더니 얻은 거라 기분은 좋았다.
나는 새로 얻은 투신이라는 기능을 확인해봤다.
「이름 : 투신」
「등급 : 초보(F)」
「효과 : 몸 주위에 펼친 투기의 막을 통해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충격의 일부를 흡수합니다. 상위 기능 ‘투기’의 등급에 따라 흡수하는 충격의 양이 증가합니다. 기능 ‘투기’의 등급 외에도 수련에 따라 투기의 막을 펼칠 수 있는 범위와 견고한 정도가 증가합니다.」
「설명 : 육체와 장비를 통하지 않고 투기를 발현하는 단계의 첫 번째이다. 몸 주변에 얇은 투기의 막을 펼쳐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막아낼 수 있다. 상위기능 ‘투기’의 등급에 따라 흡수하는 충격량이 10%씩 증가한다. 또한 투신의 등급에 따라 강도와 범위가 10%씩 증가한다.」
투신의 효과와 설명을 읽어보니 수수하게 쓸 만한 능력이었다. 받은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니만큼 내가 갖고 있는 ‘차원을 넘은 자’ 특성과도 어울릴 것 같았다.
재수 좋게 쓸 만한 기능을 얻은 나는 크리샤와 검주쪽을 바라봤다.
"그딴 잔재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너 바보지?"
태평하게 상태창을 확인하고 있는 나와 달리, 투신이 깨진 사실에 경악하는 검주의 말에 크리샤가 매몰차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너무했다. 투신의 내용을 확인해보니 꿰뚫렸다는 게 놀랄 만은 했다. 검주가 보유하고 있는 투신의 등급은 무려 B, 투기의 등급은 C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단단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부숴놓고서 단순한 잔재주라고 폄하하는 크리샤의 말이 심하게 너무했다.
아니, 너 드래곤이잖아.
왜 자꾸 인간이랑 자기랑 동일선상에 두려는 건지 모르겠다. 종족 차별이다 그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내 눈에 흘끗하고 뒤를 돌아보는 검주가 보였다. 나 역시 그런 검주의 시선을 따라 뒤를 바라봤다.
다른 검주들이 느릿하게 간격을 벌리는 것이 보였다. 예전에 봤더라면 도망이라도 치려고 저러나 싶었겠지만, 지금은 어째서 저러는지 알 수 있었다.
검의 간격.
각자가 쥐고 있는 검의 길이. 도약할 수 있는 거리. 그만큼의 공간의 거리를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웅...!
마법사로 보이는 이들이 이쪽을 보며 뭐라 중얼거리는 것도 보였다. 그런 마법사들의 주위로 각양각색의 마력이 피어올랐다.
“한바탕할 것 같은 분위긴데.”
그리고 그런 일련의 모습을 본 내 감상은 이랬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는지 크리샤가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날 보면서 한숨이야?”
“너랑 있으면 짜증나는 일만 자꾸 생기는 것 같아서 말이야.”
터무니없는 모함이었다. 이번에는 아무 짓도 안했으니까.
그런 크리샤를 보고서,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었던 검주도 주춤주춤하고 거리를 벌리려고 할 때였다.
“딱 한 번 경고할 테니까 잘 들어.”
크리샤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렇게 말했다. 스르륵, 크리샤의 주위로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방금까지 솟아올랐던 그림자들이 장난 수준에 불과했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도록.
수십, 수백의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이전에 내가 멋대로 온천에 쳐들어갔을 때처럼. 순식간의 수백의 그림자들이 솟아올라 검주들의 주위를 감싸자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소음 가운데. 또렷하게 크리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해봐. 지금 내가 한 경고의 의미, 그 작은 뇌로도 이해할 수 있게 확실히 알려줄 테니.”
이 이상은 장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 내가 그만두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모두, 멈추세요.”
나지막하게. 한 소녀의 목소리가 주위에 울렸다.
작은 목소리. 하지만 마치 옆에서 말한 것처럼 들려온 소녀의, 아리스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물론, 나와 크리샤의 시선도 아리스를 향했다.
“제가 아는 분이니까. 모두 검을 거두세요.”
“하지만...”
“명령이에요.”
아리스의 말에 뭔가 말하려던 검주가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서, 검을 거뒀다. 그 검주를 시작으로 하나 둘, 망설이면서도 검을 거둬들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검주들이 검을 거두자, 아리스의 시선이 이번에는 뒤에서 마법을 영창하고 있던 마법사들에게 향했다.
“마법사분들도 영창을 해제해주시길 바래요.”
아리스의 말에, 한 마법사가 다가와 물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네만, 그래도 괜찮겠소?”
“...저 분이 마음만 먹으면,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상관없어요.”
“...하긴, 그럴 것 같긴 하구려.”
검주들과는 달리, 크리샤의 그림자들의 본질. 하나하나가 중급마법에 준하는 것들이 수백이나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알고 있는 마법사도 그런 아리스의 말에 영창을 멈추고 물러났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인 가운데. 아리스가 말에서 내려와, 천천히 크리샤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이... 저 분이 말씀하셨던 크리샤네아 슈페리아신가요?”
“그래, 맞아. 그것 말고는 저 녀석이 말한 건 전부 거짓말이니까 명심하고.”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거짓말쟁이인 것 같잖아. 항의의 뜻으로 내가 꿈틀거리자 발목을 붙잡고 있던 그림자의 힘이 강해졌다.
얌전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내 항의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당하고. 아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당신이 제 꿈에서 뵌, 그 분이시고요. 맞나요?”
“그것도 맞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얌전히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크리샤와 아리스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내 눈에, 돌연 바닥에 무릎을 꿇는 아리스가 보였다.
“아, 아가씨?”
그런 아리스를 보며 시녀가 경악하는 것도 보였다.
“경거망동하지마세요. 아네스.”
“하, 하지만... 아가씨가 바닥에 무릎을 꿇다니... 하물며, 정체도 모르는 저...”
“괜찮아요. 이분은 마땅히 제가 무릎을 굽혀도 상관없는 분이시니까요. 그렇죠? 위대한 존재시여.”
아리스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위, 위대한 분이라니... 설마...?”
한 검주가 얼떨떨한 얼굴로 크리샤를 바라봤다.
“뭘 봐?”
“헙...”
그런 검주를 크리샤가 째릿하고 노려보자 헛바람을 집어삼킨 검주가 몸을 떨었다. 크리샤의 눈이 짐승의 그것처럼 변해서, 검주를 위 아래로 훑어봤다. 나도 가끔 루시아가 저럴 때 바짝 쫄았는데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는 광경을 처음 봤을 검주는 오죽했을까.
덜덜 떨고 있는 검주가 안쓰러워서 내가 입을 열었다.
“그냥 본 것 가지고 그렇게 노려볼 필요는 없...”
“넌 제발 그 입 좀 닥쳐. 입까지 틀어막아줘?”
“서러워서 진짜...”
크리샤의 말에 나 역시 거꾸로 매달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나를 흘끗 쳐다봤던 크리샤가 다시 아리스에게 말했다.
“어쨌든, 그 검. 우리가 필요하니까 이리 넘겨. 순순히 넘긴다면... 뭐, 대체할 물건 정도야 얼마든지 줄 테니까. 검이 아니라, 다른 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고.”
크리샤의 말에, 천검을 바라보던 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한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말해봐.”
“이곳에 마왕이 강림한다는 예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것도... 당신께서 저한테 전해준 예지인가요?”
“하? 마왕?”
아리스의 말에 심히 속이 뜨끔했지만, 나는 잠자코 둘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마왕 같은 소리하네.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너한테 그딴 소리를 했을 것 같아? 내가 필요한건 그 검이고, 마침 네 녀석이 내 땅에 오려고 하던 게 보여서 조금 도와줬을 뿐이거든?”
“그러니까, 그 꿈에 대한 것만, 드래곤님께서 하신 일 인거라는 거군요.”
고개를 끄덕인 아리스가, 천검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렇다면 드래곤님의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요. 마왕이 강림한다는 예지를 받은 이상, 이 검이 저희에게 필요할 테니까요.”
아리스가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뿌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크리샤가 있었다.
“...저기,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런 말을 하며 크리샤가 상냥하게,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등골이 짜릿짜릿한게, 여태껏 느겼던 위기 감지랑은 차원이 달랐다.
쉽게 말해서 더럽게 오싹거렸다.
“나는 부탁하는 게 아니라 명령하는 거야. 그 검을 넘기라고.”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다시 크리샤랑 아리스가 대치하기 시작하자, 아리스의 뒤에서 둘을 지켜보던 검주들과 마법사들이 재차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좋게 말로 끝나나 싶었더니 그런걸 바란 게 잘못이었던 모양이다.
이러다 사고라도 날까 싶어서, 나는 크리샤 몰래 발목에 감겨있던 그림자를 잡아 뜯었다. 찌직, 하고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던 투귀화의 제한 시간 덕분에 그림자를 뜯어내는 것은 쉬웠다.
폴짝, 하고 조용히 땅으로 내려온 내 눈에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크리샤가 보였다.
“좋게 말로 하려니까... 역시 인간들은...”
크리샤의 말이 끝마쳐지기 무섭게 후욱, 하고 그림자가 아리스와 검주들을 향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아리스와 검주들 역시 그런 그림자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도 보였다.
“크리샤!”
그런 크리샤를 부르자, 뒤를 돌아본 크리샤가 그림자에서 풀려난 나를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이내 동그랬던 눈이 확하고 도끼눈이 되긴 했지만. 이따가 한 소리 제대로 듣게 생겼다.
그리고 그런 내 눈에 보인 것은 크리샤가 나에게 한눈을 파는 사이에 멈칫한 그림자들 틈새로 검을 휘둘러오는 검주들이였다.
예전에 루시아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드래곤의 약점.
그건 드래곤이 폴리모프 했을 경우에, 모습을 바꾼 종족의 능력을 따라간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 때 입은 상처는 본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만에 하나라도 저 검들 중에 하나라도 크리샤의 몸에 닿게 된다면...
다름이 아니라 무려 검주의 검이다. 아무리 크리샤라도 가벼운 상처로 끝날 리가 없었다.
크리샤의 팔을 잡아당기고, 그대로 끌어안았다. 나는 괜찮았다. 내게는 ‘차원을 넘은 자’가 있었다. 에네스타의 검조차도 막아내는, 절대적인 보호. 이 세계로부터 보호받는 특성이 있었다.
“읏?!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
그런 내 행동에 화를 내려던 크리샤가, 내 등 뒤로 휘둘러져오는 검주들의 검을 보고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내게 닿았던 검주들의 검이 나에게 닿기 무섭게 허무하게 튕겨나갔다.
두근...!
누군가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크리샤의 심장소리? 아니, 크리샤의 심장소리가 아니었다.
나의 심장 소리.
하지만 내 것이 아닌 심장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소리와 함께.
“어라...?”
푸욱, 하고.
가슴 사이로 꿰뚫려 나온 은백의 검이 보였다.
“...?”
뭐야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