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110화
노구가 내뱉은 무책임한 말에 시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에 있는 전력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드래곤이며 마왕이며 하나같이 우습게 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허세를 부리는 노구를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프로 시녀가 되는 법에서는 저런 사람에게는 차에다가 설사약을 타주라고 했었는데...’
여기는 차를 탈만한 장소도, 차를 우릴 다기와 찻잎도 없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일개 시녀로써는 속으로 뒷담을 까는 수 밖에 없다는 거였다.
알고는 있었다.
설마, 정말로 마왕이 나타날 리가 없다. 설마, 정말로 드래곤이 나타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게 뻔했다.
마왕은 이미 과거에 처단된 존재일 뿐이었고, 드래곤은 그 마왕 사건 때도 나타나지 않았던 존재였다.
일부는 정말로 마왕이 있었는지, 혹은 드래곤이 실존하기는 한지 의심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자신도, 자신의 주인의 말이기는 했지만 마왕 강림이라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전혀 믿기지 않는데, 저들이라고 별 수 있을 리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런 태도라니... 돈을 빌린 쪽이 큰소리를 뻥뻥 치는 작태를 보고 있자니 배알이 뒤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마이페이스인 자신의 주인, 아리스는 아무런 상관도 안하는 듯 이내 노구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말했다.
“그보다, 우선 지금 여기로 다가오는 저 자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겠네요.”
‘저 자?’
아리스의 말에 시녀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헉... 헉...“
이윽고, 그 자의 모습을, 시녀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타난 것은 사내였다.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흔히 보기 힘든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
그 외에는 특이할 것도 없는, 저잣거리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외모의 사내.
하지만 시녀와 달리, 아리스는 그런 사내를 빤히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의 몸을 빤히 바라봤다.
”.......”
단련된 신체.
단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남자의 특징은 그 정도였다. 그 외에는 옷이 상당히 고급스럽다는 정도일까. 조금 옛스럽기는 하지만 확실히 고급품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리스는 알 수 있었다. 사내는 아직 검주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넘쳐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른 이로부터 옛부터 천재라 불리었던 아리스였다. 그런 자신의 눈으로도 눈앞의 사내가 자신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재능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인간이었다.
그렇다.
인간.
예언에 따르면 이곳애 '마왕'이 강림해야할 터였지만, 나타난 것은 인간이었다.
"당신은…?"
마왕이 강림한다는 예지를 받고서, 여기까지 준비를 마치고, 오기까지 몇 주간의 시간동안.
그녀는 많은 꿈을 꿨었다.
꿈은 매번 달랐지만, 대부분의 것은 같았다.
마왕이 강림한다.
인간을 제외한.
무릇 많은 종족들에게 추앙받는 마왕이.
인간들이, 비웃으며 일컫던, 인간 외의 종족을 아우르는 지배자.
우민들의 사랑을 받는.
우민의 마왕이.
인간을 제외한 모두의 숭배를 받는 마왕이 이곳에 강림하리라는 예언을 받고서.
이곳에 왔다.
가문의 힘을.
자신의 힘을.
돈의 힘을.
모두 쏟아 부어서 모은 서른의 인간을 모아서.
그런데 나타난 것은 인간이었다.
검은 머리와, 특출한 재능 외에는 볼 것도 없는 단순한 인간이.
그리고 그 인간이, 그녀에게 말했다.
"내놔."
"...네?"
다짜고짜 내놓으라는 말에 아리스는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아리스에게 사내는 말했다.
"내놓으라고. 그 검."
《드래곤의 반려, 이지경》
가파르게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검이라면... 이걸 말하시는 건가요?"
아리스, 그런 이름의. 한나를 빼닮은 소녀가 은백의 날을 갖고 있는 검을 내게 보이며 물었다.
욱신하고.
오른쪽 눈이 아려왔다.
뒤이어서 띠링하고. 알림이 들려왔다.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기능 '주시자의 눈'이 ‘아리스 라 브란데냐 블론드 데 드네아’의 기능 ‘혜안’을 상쇄, 압도합니다.]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 정보가 모두 차단됩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뭔가 했다가 막힌 모양이었다. 나 역시, 눈앞에 있는 소녀를 보며 속으로 정보창을 중얼거렸다.
그런 내 귓가에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가 들려왔다.
[불가! ‘아리스 라 브란데냐 블론드 데 드네아’의 정보를 보는 것이 불가합니다.]
“막혔어?”
“......”
무심코 중얼거리자, 눈앞의 소녀가. 아리스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나를 보려고 했던 것을 막았던 것을, 그녀 역시 느낀 모양이었다. 나도 막힌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쩌면, 그녀 또한 내가 자신을 보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을 눈치챘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떻게?
드래곤마저, 폴리모프한 상태의 것뿐이기는 했지만 볼 수 있었던 정보창이 막혔다.
대체 저 소녀가 뭐기에?
“당신은 대체 누구죠? 혹시...”
내가 묻고 싶은 것을 묻는 그녀가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정체를 밝혀라. 이곳에 온 이유가 뭐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홀몸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안 그래도 시간이 촉박한데 저건 또 뭔가 싶었다.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쭈그렁한 주름이 진 얼굴을 한 주제에 몸만 건장한 노인이 아니라, 저 아리스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들고 있는 검.
편린의 파편이 깃든 천검이었다.
“비켜라.”
내 입에서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뭐라고? 감히 내가 누구라고...”
“뭐, 니가 뭔데.”
“나는 위대한 라이어스 제국의 백작이자 검주, 프란츠 데...”
“아 그래, 검주라고?”
이 세상에 백여 명도 없다는 검주가 주변에 왜 이렇게 넘쳐나는 건지 모르겠다. 당장 에네스타도, 그리고 저 소녀도, 이 노인까지만 해도 셋...
“...아니, 아홉이나 더 있네?”
빠르게 나머지 인원의 정보창을 훑어봤다. 그 중 아홉이나 되는 인물들이 기능 ‘검리’와 기능 ‘투기’ 그리고 기능 ‘투기 발현’까지. 검주로써 지녀야할 세 가지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일곱은 투기 발현을 제외한 기능을 보유, 그러니까 검주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에 못지않는 검사들인 것까지 파악했다.
능력치까지 포함하면 나만한 인물도 몇 있었다.
음, 그러면 내가 저 녀석들이랑 비슷한 실력이라는 걸까.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보이는 수치상으로는 그랬다.
뭐 그건 그거고.
“검주가 열 명이라...”
거기에 치유마법을 보유하고 있는 이가 다섯, 마도의 이치라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이 여덟... 아마도 전자는 사제, 후자는 마법사인 듯싶었다.
뭔데?
마왕이라도 잡으러 온 것 같은 포지션이었다.
전열의 전사, 후열의 마법사와 사제. 숫자가 좀 많기는 하지만 딱 용사의 파티 같은 느낌이었다.
그나마 한 명은 이도저도 아닌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 이도저도 아닌 능력치를 지니고 있는, 하녀복을 입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히끅.”
딸꾹질을 하며, 휙하고 고개를 숙여버리는 여자를 보자 내 시녀들이 떠올랐다.
내 시녀들도 저렇게 좀 얌전했으면 좋겠는데...
잠시 복받쳐오르는 감상을 저리 치우고서 내가 말을 이었다.
“됐고, 일단 그 검 좀 잠깐 빌려주라. 나중에 설명해 줄테니까.”
그렇게 말하고서, 아리스에게 다가가자 노구가 검을 휘둘러왔다.
“나를 무시하고서 무사할 성 싶었더냐?!”
살기는 없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른 검이다. 하지만 검주가 휘두르는 검이다. 평범한 인물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목숨을 위협받는 공격이자,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하지만 느렸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이따위 검은 에네스타가 휘두르는 검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려빠진 검에 불과했다. 실제로, 에네스타와 저 노인은 같은 검주였지만, 능력치로도,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도, 특성... 재능부터가 달랐다.
“하긴, 에네스타도 드래곤의 가디언을 했던 몸이니까...”
흔해빠진 검주랑 격이 같다고는 여길 수 없겠지.
이 노인도 진심으로 공격한 것도 아니고.
나는 태평하게 중얼거리며, 노인이 휘두르는 검을 무시한 채로 아리스에게 걸어갔다.
“이놈이 진정으로 미쳤나보구나!”
검이 휘둘러지는 사선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나를 본 노인이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는 없었던 살기가 미약하게 담겨졌다. 제풀에 놀라서 빌빌댈 줄 알았던 게 대놓고 무시하니까 빡이 좀 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필요가 없었다.
까앙!
노인이 휘두른 검이 나를 보호하는 특성, ‘차원을 넘은 자’에 의해 막혀 튕겨나갔다.
“뭣...?!”
놀라며 검을 회수하는 노인의 검을, 도리어 이쪽에서 붙잡았다.
“귀찮으니까.”
개변자.
근력 특화.
거기에 투기.
여기서 멈추지 않고서, 나는 실전에서는 써먹어본적이 없는 기능을 사용했다.
“투귀화.”
뿌드드득!
띠링~
[플레이어 ‘이지경’님의 기능 ‘투귀화’에 의해 짧은 시간동안 신체능력이 극대화됩니다. 근력, 체력, 민첩이 10분간 60%만큼 상승합니다.]
근육이 부풀어올랐다. 개변자로 인해, 내 신체 능력치의 태반이 근력으로 몰려간 상태였다. 그 몰려간 능력치들이, 60%만큼 상승했다.
그 결과 내 근력은 지금 142였다.
에루나보다는 못한 근력.
하지만.
에네스타보다는 강했다.
빠캉!
단순한 근력만으로, 노인의 검이 뚝하고 부러져서 땅에 떨궈졌다.
“내, 내 검이...? 어떻게... 무려 미스릴이 들어간 검인데...”
“드래곤의 이빨로 만든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아까워하냐.”
그리고 미스릴이 들어간 검?
내가 갖고 있는 검들은 몇 개는 통짜 미스릴로 만들어진 검들이었다. 거 조금 들어갔다고 대단한 것도 아니던데 뭐. 조금 가벼워질 뿐이었지. 너무 가벼워서 검을 휘두르는 건지 회초리를 휘두르는 건지 모르겠어서 오히려 아다만티움이란게 들어간 검이 더 쓸 만했었다.
미스릴로 만든 검은 에네스타의 검이랑 부딪히면 휙휙 휘어버려서 쓸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 검 빌려줄 마음은 생겼어?”
부러진 검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노인을 무시한 채로, 아리스에게 걸어가며 물었다.
“당신은 대체... 아니요. 그것보다... 이 검이 필요한 이유가 뭔가요?”
“설명할 시간 없는데...”
정말로.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마왕 소환.
계속해서 조건이 부족하면, 강제로 로로를 제물로 마왕을 소환한다는 알림. 그것이 들려온지 벌써 몇 분이나 지났다. 내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았는지는 나조차도 몰랐다.
“일단 받고 나중에 설명하면 안될까?”
“그건 안 되겠네요. 이 검은 아무에게나 넘겨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적어도, 당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이 상황에서는요.”
이렇게 부탁하는데 그것 좀 나중에 하면 안되는 걸까.
“...안되는 모양이네.”
노인의 검이 부러진 것을 보고 놀란 눈으로 지켜보던 남은 검주들이 검을 빼들고서, 나와 아리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단 물러서주길 바라오. 그대의 실력은 알겠지만, 이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요.”
“맞소, 우선 자신의 소개부터 하는 것이 순서지 않소?”
그나마 노인의 검을 부러뜨리는 모습을 보인 덕분인지, 그것이 아니면 저 노인만 돌출된 성격이었던 건지는 몰라도.
다른 이들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는 수 없었다.
“나는 이... 아니지, 내 이름은 베헤노스.”
이 세계에서의. 나의 이름.
적어도, 이세상에서의 나는 이지경이 아니라 베헤노스였다.
인간인 이지경이 아니라.
드래곤들의 반려인 베헤노스.
“이 땅을 지배하는 자. 크리샤네아 슈페리아의 반려가 되는 몸이다.”
내 말에 검을 겨누고 있던 이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크리샤네아?”
“슈페리아라니, 그건 또 어디...?”
“이 땅의 지배자의 반려라니?”
뭔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데. 나는 놀라서, 아니 드래곤의 반려셨다니. 검이요? 당장 드려야죠, 하고 내미는 광경을 생각했는데, 그런 거 없었다.
더군다나, 내 말을 듣고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의 반응으로 두 눈을 끔뻑거리던 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혹시, 테 베르나의 지배자인 드워프가... 여자였나요?”
“그게 무슨 헛소리...”
말을 이으려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이 세계는 무려 400년간, 드래곤이 없던 세계였다. 그야 당연했다. 400년간의 세월동안, 드래곤들은 나를 소환하는 마법진에 마력이 모이기까지, 부화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마력이 모인 뒤에 부화한 일곱의 드래곤들 중에서도.
인간들의 나라랑 가장 근접해있는 크리샤마저 인간이랑은 학을 떼는 통에 교류 같은 것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슈페리아라는 이름도.
먼 과거. 이미 잊힌 고대의 이름일 뿐이었다. 실질적으로 이곳의 지명이 어떤지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아니, 됐다. 그렇다고 치고. 자기소개도 했으니까 그 검 좀 빨리 빌려주라.”
그렇게 말하면서 아리스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누가 드워프야, 이 빌어먹을 인간아?!”
그런 외침과 함께.
콰직!
솟구쳐 나온 그림자들이 내 발을 휘어 감고 그대로 질질 끌어당겼다.
졸지에 얼굴로 땅을 가르며 끌려간 나는 이내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린 채로, 잔뜩 얼굴을 찌푸린 크리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 너...! 제 멋대로 너를 내 반려라고 소개한 것도 모자라서, 내가 드워프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긍정까지 해?!”
“...오해다. 여기엔 깊은 사정이...”
“그딴거 내가 알게 뭐야?!”
그건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이럴 때가 아니니까 좀 봐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