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109화
마왕 소환.
알림이 전해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로로랑 마왕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마왕이라면, 벌써 수백년도 전에 죽어버린 그 녀석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가.
‘주인님은 약하니까, 내가 지키고 있었어’
‘괜찮아. 난 그런 주인님의 냄새가 좋으니까.’
로로가.
증오만이 깃든 눈으로 누군가를 보던 아이였다. 로로가 무슨 인생을 살았는가,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내가 본 것은 로로의 과거, 그것도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내가 그 아이에 대해서 전부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갓 태어났을 적의 일을 조금 알고 있을뿐만으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 이후로, 그 아이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내가 알 턱이 없다는 거였다. 단지,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있었다.
과거 아니라, 지금. 현재의 일을.
내가 보고, 내가 알고, 내가 느낄 수 있었던 로로에 대한 것들을.
그 아이는.
내가 알고 있는 로로라는 소녀는.
이제야 겨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 시작한 아이였다.
즐겁거나, 좋거나, 싫거나, 자신의 안에서 감정을 숨기기만 하던 아이가. 이제야 겨우 누군가에게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어리디 어린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로로가.
대체 마왕같은 것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런 것의 제물이 되어야하는 걸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마왕의 제물.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고 해도 그 말이 좋게 해석될 리가 없었다.
희생양,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니까.
그 아이가 어째서 마왕의 제물이라는 것인가. 그런 것이 어째서 그 아이의 운명이라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가 될 턱이 없었다. 이애할 리가 없었다.
“어째서.”
입 밖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어째서 그 아이는.”
그토록 불행해야하는 것일까.
저주받은 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태어난 것만으로 저주를 받아버린 금기의 아이.
아비가 자신의 누이를 강제로 덮쳐 낳게한 소녀는.
스스로가 원하지도 않았던,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을 부과 받은 아이는.
내가 거두었다고 생각했던 운명으로부터 다시금 구속되려하고 있었다.
어째서?
끊임없이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야, 괜찮아?"
그런 내 귓가에 크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미리 말을 했어야지. 뭔데? 어디가 안 좋은 건데?“
그런 크리샤의 말에 머릿속에 한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와락, 크리샤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크리샤.“
"으, 으응?"
다짜고짜 어깨를 붙잡힌 크리샤가 멀뚱멀뚱하게 나를 바라봤다.
"저 녀석, 아리스라는 녀석이 가지고 있다는 게, 저 검이 정말로 편린의 파편이 맞는 거지?"
"이, 일단은 그럴 거야. 드래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 네 눈의 경우에는... 잘 모르겠지만. 루시아 녀석이 편린의 기운을 느꼈다고 했었으니 지금은 잠들어있거나, 혹은..."
무언가 설명하는 크리샤의 말이 들려왔지만 그런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조건.
처음, 로로에게서 운명을 거둬들였을 때. 주시자의 눈을 얻게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그랬었다.
조건이 부족하다, 그런 말을 들었었다.
지금도 그랬다.
조건이 부족하다고 했다. 조건이 부족해서, 내가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내게 속했던 운명이, 내가 거둬들였다고 생각했던 운명이 다시금 로로에게 돌아가려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처럼 하면 그만이었다.
그때처럼. 부족한 조건을 채우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대가를 치렀다.
부족한 조건을 대신해서, 또 다른 대가를.
내 눈을.
대신 할 것.
그것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그런 운명을 부여받았는지, 어째서 그녀에게만 그토록 비정한 운명이 기다릴 뿐인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뿐이었다. 내가 알아야할 사실은 그저 그뿐이다.
조건이 부족하다면.
"조건이 부족하면, 채우면 그만이지."
"갑자기 무슨 말을..."
시간이 없었다.
크리샤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천검의 주인. 아리스?》
”,,,이곳이군요.”
소녀, 아리스의 말에 옆에 있던 그녀의 시녀가 말을 받으며 말했다.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건가 모르겠네요. 진짜로.”
걱정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시녀를 본 아리스가 말했다.
“제 말을 믿어주지 않은 천신교의 높으신 분들이 잘못한 거니까 상관없을 거예요. 이번일은 어디까지나 제 독단, 거기에 지불한 모든 대가 또한 저와, 저의 가문에서 치렀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시녀가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문제라는 거예요. 아가씨. 아가씨는 이미 드네아 공작가와는 연이 없는, 속세를 버린 몸이라고요. 그런데 그런 주제에 드네아 공작가의 돈을 이용해서 군대를 이루다니... 성녀라는 이름이 울겠어요.”
“제가 원해서 된 성녀가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원하지 않던, 원했던, 이미 당신은 성녀라는 걸 잊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녀가 아직 어릴 적부터, 벌써 십년이 넘는 세월을 모셔온 시녀였지만 여전히 아리스라는 소녀의 마이페이스가 감당이 되질 않는 시녀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그런 시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서른 기의 기마를 타고 소녀를 따라오고 있는 군세였다.
서른.
고작 서른 밖에 되지 않는 이들을 ‘군세’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들이 그만큼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이 자랑하는 스물 여덟의 검주, 그 중에서도 무려 아홉. 천검의 주인이자, 동시에 최연소로 검주가 된, 자신의 주인. 아리스를 포함하면 무려 열 명의 검주가 이곳에 있었다. 서른밖에 되지 않는 인원중의 3분의 1이 검주인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군세라고 부르기에는 충분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스물 중에서도 다섯은 잘려나간 신체마저 재생시키는 ‘대치유’를 사용할 수 있는 대주교와 그에 못지않은 성력을 지니고 있는 사제들이었다.
아홉의 검주와 한명의 대주교. 그리고 넷의 고위 사제.
여기서 그친다면, 시녀의 두통이 이토록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은 인물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검주의 끄트머리를 바라보고 있는 일곱의 검사와, 고위마법까지 다룰 수 있는 여덟 명의 고위 마법사까지.
서른에 이르는 인물 모두가, 인류가 내로라하는 인재들뿐인 것이다.
고작 서른밖에 되질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군대, 군세라고 말하는 것에 부족하지 않는 전력이었다.
그런 이들이 어째서, 라이어스 제국의 외곽. 정확히는, 라이어스 제국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이곳. 드워프들의 땅인 테 베르나까지 오게 됐는가.
그 이유는 여럿이었다.
소녀 아리스의 가문인 드네아에 빚을 진 자도 있었고, 혹은 소녀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도 있었다. 단 한 가지,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겠노라고 과거에 드네아의 주인에게 약속했던 자도 있었고, 천신교의 성기사인자도 있었다. 또, 단순하게 돈으로 고용된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이만한 전력이 여기까지 모였다는 것이 일개, 고아 출신이었던 시녀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과거, 마왕이 소환된 이래.
모든 인간들의 나라는 ‘군대’가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수천, 수만의 군세는, 절대적인 강함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무가치라고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방식의 군대를 일궈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로써는 눈앞의 소녀를 들 수 있었다.
정확히는 아리스 드네아의 가문.
더욱 정확히는 드네아의 가문의 시조가 원인이었다.
용사 제임스.
변경의, 촌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검주’이자 ‘초월자’이며, 동시에 라이어스 제국의 ‘영웅왕’이었던 존재.
수만의 병사들과 수천의 기사들이 모인 연합군마저 어떻게 하지 못했던 마왕을, 혼자서 처단한 영웅 중의 영웅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를 이유로, 이세계의 ‘군대’는 과거와는 크게 다른 양상을 달리게 되었다.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일신의 강함.
수백의 병사를 양성하기보다는, 하나의 강한 기사를. 수천의 군사를 훈련시키기 보다는, 하나의 검주와 마법사를 만드는데 국력을 쏟아 부었다.
물론, 제국이라는 커다란 땅을. 제국이 아니더라도, 나라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의 집합을 일구는데 그것만으로 충당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 십 수 만에 이르렀던 병력에 비하자면 지금은 최소한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할 정도의, 고작 몇 만에 이르는 군사와 그들의 주축을 이루는 뛰어난 자들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곳에 모인 모두는 하나하나가, 어디에 있든 간에, 집단의 ‘전력’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들 개개인이 곧, 전세를 기울이게 하는 국가차원의 병기인 셈이었다.
당연히 이정도의 전력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됐다는 것은, 제국으로써도, 드네아 공작가로서도,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일이었다.
그것을, 아리스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애검인 천검을 말 위에서 손질하고 있었다.
십 수 년을 그녀를 모셔왔던 시녀였지만, 당연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이들이 여기까지 모이게 된 이유 또한 터무니없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였기에, 한숨에 더해서 두통까지 일 정도였다.
마왕 강림.
몇 주 전, 뜬금없이 기도실에서 평소 일과를 보내고 있던 그녀의 주인인 아리스가, 예지를 들었다며 주장한 것.
이 땅에 새로운 마왕이 강림, 혹은 소환된다는 예언의 확인을 위해서.
“...하지만, 여기는 드래곤의 땅이라고요? 마왕이 강림하는 건 둘째치고, 드래곤들이 저희들이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허락해줄까요?”
조금이라도, 눈앞의 소녀가 저질러버린 일을 수습하기 위해 꺼낸 시녀의 말을. 아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괜찮아요. 그 드래곤한테 허락을 받았으니까요.”
“...네?”
누구한테, 뭘 받았다고?
자신이 들은 말에 대해서 확인하려고 입을 열던 시녀는 곧 아리스의 말에 막히고 말았다.
“...누구?”
시녀로써는 보이지 않는, 저 먼곳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입을 여는 아리스의 말에. 정확히는 아리스의 말과 동시에 아리스의 주위로 모여둔 아홉의 검주들이 검을 빼드는 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스르릉...!
하나같이 명검, 혹은 마법이 걸려있는 마법검들을 빼든 검주가, 이제 시녀의 육안으로도 보이는, 뿌옇게 먼지바람을 뿌리며 달려오는 것을 바라봤다.
시녀의 주인이자 천검의 주인 역시, 손질하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그녀를 선택했고, 소녀를 주인으로 삼아 성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리게 한 원인인 천검을. 신이 내린 성검을.
“...방진을 짜세요. 예지에 따르면, 이번에 강림할 마왕의 능력은 과거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미 충분히 들은 이야기오. 드네아의 진정한 후계여.”
아홉의 검주 중의 하나. 그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 무려 60년도 전에 검주가 되었고, 몇차례 있었던 제국과 다른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노구가 아리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대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마왕이 강림한다는 소리를 듣고도 이곳까지 따라온 이들이오. 이미 몇 번이고 당부한 경고를 또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시녀가 기억하기로는, 저 노구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그는 전쟁 영웅이었지만, 전쟁이 없어지고 평화로운 시대가 된지도 무려 30년이 넘었다. 당연히, 전쟁 영웅의 이름은 퇴색되고, 그의 진짜 수입이었던 ‘약탈’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검을 다루는 데에는 검주가 될 정도로 천재였지만 영지를 이끄는 재능은 젬병이었다. 그렇게 다 망해가던 영지를 되살려준 것은 드네아 공작가였고, 그 인연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인물이었다.
‘거지주제에 아가씨의 말을 자르다니...’
게다가 그의 작위는 백작. 높은 작위기는 했지만, 본래대로라면 드네아 공작가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을 터인 아가씨에게는 많이 끝발이 밀리는 자였다.
그런 주제에 아가씨의 말을 끊었다는 사실에 시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주인이자 당사자인 아리스는 아무런 상관도 안한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상관없겠죠. 단지, 이곳은 라이어스 제국의 군대가 미치지 않는 땅이에요. 혹여, 몬스터일지도 모르니까 주의를...”
“주의라고? 여기 있는 이들이라면 설령 드래곤이라도 잡을 수 있을 텐데?”
노구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너무 과한 걱정이오. 안심하게나. 진짜 여기에 마왕이 나타날지는 몰라도, 설령 나타나더라도 그대가 굳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우리들이 알아서 끝장을 낼테니까. 흠? 그렇게 되면 이 몸도 ‘영웅왕’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저렇게 무식하니까 드네아 공작가에서 지원해주지 않았을 때 그렇게 망했던 거겠지.’